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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한형식)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30114120503
협동조합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프레시안, 한형식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 2013-01-14 오후 4:03:18)
[기고] '협동조합 만능론'을 우려하며
국제연합(UN)이 정한 세계협동조합의 해였던 지난해 불어닥친 협동조합 바람은, 해가 지나 더욱 강해지고 있다. 갑자기 모든 경제적 곤란에 대한 대안으로 협동조합이 제시되는 지경이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넘어설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라는 시각부터,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에 대한 치료제라는 시각과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해 경제의 경쟁력을 높여주리라는 기대가 존재한다. 일반의 통념과는 달리 진보진영만이 아니라 보수 언론과 새누리당도 협동조합에는 대찬성이다. 협동조합기본법은 한국 헌정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여야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협동조합의 제도화를 적극 추진한 이명박은 가장 협동조합 친화적인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방식의 환호가 불편하다. 협동조합 자체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진 게 아니다. 협동조합에 대한 진지하고 생산적인 논의는 드물고, 근거 제시 없는 장밋빛 전망만이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상황이 문제다. 현재의 협동조합 낙관론은 가히 맹목적이라 할 만하다. 협동조합이 그렇게 도덕적 정당성과 경제적 경쟁력을 갖춘 훌륭한 제도라면, 최초의 협동조합으로 보는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이 설립된 1844년 이래로 17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전 지구가 협동조합으로 덮여 있어야 할 텐데 현실은 다르다. 협동조합의 성공 사례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성공 사례에 비하면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몇 개의 성공 사례만으로는 협동조합 모델이 자본주의를 온전히 대체할 것이라고 보기는커녕, 자본주의에 대한 부분적인 보완 역할을 할 정도의 지속성과 확장성을 가진다고 볼 근거조차 찾기 힘들다.
큰 틀에서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모델의 협동조합이 존재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에게 맞는 협동조합의 구체적 모습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찾기 어렵다. 협동조합 일반의 성공이 한국에서도 조건 없이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은 대중 선동에 불과하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이후 세계적으로 협동조합 논의가 다시 활성화된 맥락이 무엇인지, 즉 UN과 세계은행이 사회자본 담론에 근거해서 경쟁과 협력이 병존할 수 있는(협력적 경쟁) 모델로서 협동조합 논의의 활성화를 주도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 협동조합은 어떤 구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또 그 모델이 우리 실정에 맞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협동조합에 대한 환호가 불편한 이유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재조명을 받게 된 협동조합은 이전의 협동조합들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크게 두 가지 방향의 새로운 협동조합 모델이 생겨났다. 한 가지는 시장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즉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 영리기업에 가까워져서 협동조합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 경향의 협동조합은 사회적 의미보다 기업가 정신을 긍정적으로 강조하고, 금융화 시대에 적합한 자본 조달 방식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협동조합이 주식회사를 자회사로 설립하여 일종의 지주회사로서 기능하거나, 의결권 없는 우선주를 발행해 자본을 조달하는 방식을 채택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향은 기존 협동조합의 실패 원인이 이윤을 사적으로 전유하지 못하게 하는 협동조합의 방식 때문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라는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또 다른 협동조합 모델의 방향은 사회적 경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투명성·공정성·공평성 등의 윤리적 가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이 모델은 사회적 경제에 원칙의 기반을 두고 있고, 이를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실현한다. 이 노선은 복지국가에서 나타난 국가 주도 복지 제도와 협동조합이 실패했고, 동시에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심화한 시장의 불완전성도 문제라고 비판하면서 출발한다.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사회적 서비스를 국가와 시장 사이에 있는 시민사회가 제공하는 수단으로 바라본 것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대부분 3차 산업에 종사한다. 따라서 사회적 협동조합의 발전은 서비스 산업의 성장을 전제로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경제 개발의 축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옮겨가면서 민간 창업 동기가 높아지고, 시민의 적극적 참여가 왕성해지며, 비정부조직과 시민단체 설립이 활발해지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즉 사회적 협동조합은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는 협동조합의 새로운 형태다.
전통적 협동조합은 개별 조합원의 이익 향상을 목표로 하지만 사회적 협동조합은 사회적 목적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지역사회의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 제공, 한계노동자들의 일자리 창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공동 참여와 공동 노력이 요구되는 지역 개발 혹은 지역 재생 프로젝트의 수행 등이 주요 목적이다. 이런 역할을 국가가 아니라 협동조합이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호혜적·수평적 보조가 바람직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복지는 수직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이러한 비효율성으로 사회적 서비스의 질이 저하되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서구 국가들이 복지국가의 모델을 해체하고 새로운 모델로 전환하기 위해 수평적 보조성의 원리를 법률로 채택했고, 사회적 협동조합이 할 수 없는 것만 국가가 수행하는 노선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정부가 '외주화(outsourcing)'하는 사회적 영역이 생겼고, 그 역할을 새로운 협동조합이 담당하거나, 기존 협동조합이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수행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협동조합은 복지국가의 역할 최소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의 협동조합 옹호자들도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부작용에 대한 대안으로서 협동조합을 제안하는데, 그 근거는 다음 3가지이다.
1) 협동조합은 주로 지역에 근거한다.
2) 협동조합은 사용자로서 이익을 추구하지, 투자자로서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3) 협동조합은 시장질서 속에서 공정경쟁, 사회적 가치, 기업이윤 추구를 병행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의 협동조합기본법도 사회적 협동조합의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 기본법은 주로 기존 시장이 포괄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경제·사회·문화적 약자들의 자생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협동조합이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그래서 소상공인, 저소득 취약계층, 특수고용직 노동자, 청년, 낙후지역 주민 등이 협동조합을 통해 스스로 사업을 영위해 나가고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는 매개로서 협동조합을 만들 것을 강조한다. 핵심은 이러한 취약계층이 협동적인 방식의 '창업'을 하도록 장려한다는 것인데, 협동조합의 설립 기준을 대폭 낮춰 신고만으로 가능하게 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협동조합의 본래 취지는 조합원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폐쇄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의 협동조합기본법은 이를 확장해 사회적 목적이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편익을 추구하는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자체 혹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시장 만능의 부작용을 줄여주는 기능을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규모로 수행할 가능성이 실제로 얼마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협동조합 옹호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대효과를 전망한다.
1) 서비스 부문에서 창업 유도로 실업을 줄인다. 다수의 소규모 기업이 등장해 서민경제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단위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활력소가 될 것이다. 즉 서비스 산업의 생산력 향상을 통한 경제성장을 기대한다.
2) 낙후지역에서 자신들의 필요에 맞는 일자리 창출과 복지 증대 효과가 기대된다. 복지 증대를 위한 구체적 조직이 사회적 협동조합이다.
3) 특수고용노동자(레미콘 기사,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보험설계사 등)의 보호 효과가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이 모여 창업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도모한다.
4) 기존의 생협과 사회적 기업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생협은 새로운 협동조합법에 근거한 운신의 폭이 훨씬 넓다. 기존의 생협특별법은 출자금 규모 등에서 까다로운 규제를 적용했다. 그러나 협동조합은 출자금 제한이 없고, 공정거래나 독점 규제에 관한 법률도 적용받지 않는 등 훨씬 자유롭게 영리활동을 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은 영세한 규모의 사업을 하나로 모아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특히 협동조합연합회가 출범하게 되면 연대와 협력의 힘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5) 사회서비스 증대, 서민 경제 활성화, 복지 전달 체계 개선, 복지 사업 효율성 제고, 기존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 해소를 통해 복지 정책에 긍정적 효과를 끼치리라 기대된다.
협동조합은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해소할 진보적 대안인가
그러나 위의 기대효과들은 정말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가? 그리고 실현된다 해도 그것이 시장경제에 대한 진보적 대안인가? 이와 같은 관점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많다.
기대효과가 실현되려면 우선 협동조합이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협동조합에 맞는 산업정책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국가적 규모의 산업정책 틀 안에서 협동조합이 영위할 수 있는 산업 분야가 존재해야 협동조합의 존속이 가능하다. 산업정책과 연계되지 않은 시장과 국가(정부) 사이의 '제3영역'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구체적 사업 영역을 제시하지 못한다. 현재 협동조합이 진출하도록 권장되는 업종들은 주로 서비스 산업에 해당하고, 그마저도 수익성이 낮아 실제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영역이 대부분이다. 서비스 산업에 집중된 소규모 창업의 과다로 자영업의 고밀도화와 영업 부진이 이미 사회 문제가 된 마당이다. 협동조합 설립을 부추긴다면 결국 경제적 지속이 불투명하고 고용 창출 효과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시적 산업정책의 틀 안에서 국가나 대기업이 담당하는 영역과 중소기업이 담당하는 영역 구분을 명확히 하고, 그 토대 위에서 협동조합의 사업 영역을 구체적으로 배정해야 한다. 사회적 협동조합 고유의 배타적인 목적 사업이 필요하고, 그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그 이후에도 공적 조달이나 대기업과 협약 체결을 통해 협동조합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보장이 필요하다. 현재의 협동조합 논의는 '창업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이며 취업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데올로기, 즉 일자리는 민중이 자신의 손으로 알아서 만들어야 하며 이미 만들어진 일자리에 고용되는 것은 수동적이고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경향마저 있다. 즉 일자리 논의가 협동조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냐, 기업이나 국가가 제공하는 일자리에 수동적으로 고용될 것이냐에 대한 선택의 문제로 몰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양질의 일자리를 공급하는 것이 국가와 자본의 당연한 과제라는 전제 아래, 피고용자는 그들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받는 데 만족하고, 그들에게 안정적인 고용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줄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기득권 세력이 협동조합 논의를 기꺼이 수용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두 번째로 사회적 협동조합의 사회적 서비스 제공이 국가가 담당해야 할 복지 기능을 축소시킬 위험이 있다. 복지 제도가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이제 겨우 복지 정책을 확대하는 시점에 있다. 이 시기에 국가의 복지 기능을 외주화해서 민간으로 넘기는 역할을 했던 서구 사회의 사회적 협동조합을 추진하는 것은 긍정적이지 못할 수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이 복지를 국가적 시스템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민간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서구와 반대로 국가의 보편적 복지 제도를 완성하기 위한 과도적 단계로서 사회적 협동조합의 역할을 규정해야 한다. 국가 역할의 아웃소싱이 아닌, 사적 부문이 책임지는 사회적 서비스를 공적 영역으로 이전시키는 매개 역할을 협동조합이 해야 한다.
특수고용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한다는 주장은 위험한 발상이다. 특수고용노동자라는 범주 자체가 이들의 노동자성을 부인하고 허울 좋은 개인사업자란 이름을 붙여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 않은가? 이들이 모여 공동 사장이 된다고 해서 노동자로서 그나마 받을 수 있는 법적 보호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 협동조합을 대안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결국 노동자로서 권리를 인정해 주지 않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협동조합 내부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할 수단도 미리 마련되어야 한다. 사업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의 사회적 명분을 강조하면서 고용된 노동자에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사례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기존 사회적 기업에서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 협동조합이 실패한 사회적 기업의 생존을 일시적으로 연장시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협동조합기본법은 기존 사회적 기업이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정부의 지원이 만료되면 지속 불가능한 한계 상황의 사회적 기업이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이름만 바꾸어서 몇 년간 더 정부 지원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실체가 없는 관변단체나 시민사회단체가 정치적 동원을 대가로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지원을 받지 못하게 감독할 필요도 있다.
마지막으로 협동조합의 취약성을 국가의 지원이 아닌 민간의 기금을 조성해 해결하려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협동조합이 시장경제 환경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규모를 키워야 한다. 규모 확대에 필요한 자본 조달 방식을 조합원의 출자나 국가의 지원이 아니라 금융시장을 통해 조달하는 게 서구의 새로운 협동조합의 중요한 경향이다. 이는 결국 금융투기자본에 새로운 투자처를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협동조합운동의 초기부터 제기된 인민은행, 즉 협동조합에 자금을 공급하는 전담 은행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사회투자기금으로 부활했다. 그런데 사회투자기금도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결국 금융 이윤을 올려야 한다. 사회투자기금이 자금을 제공하는 협동조합 부문이 경제적으로 경쟁력이 없다면, 사회투자기금은 결국 손실을 감당하기 위해 투기적 금융을 주로 하고 2차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하는 '착한 투기자본'화 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협동조합의 운영과 존속을 위한 자금공급자로서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협동조합 부문은 금융자본의 새로운 투자처로 전락하고, 국가 기능의 아웃소싱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협동조합 바람을 좀 더 비판적으로 지켜보면서, 협동조합이 더 민중적이고 민주적인 역할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의 일방적 선전이 아닌, 냉정하고 진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0455.html
[2030 잠금해제] ‘사회적 경제’를 의심하라 (한겨레, 박가분 자유기고가, 2013.01.20 19:28)
대선 패배 이후 야권진영에선 이른바 ‘사회적 경제’에 대한 논의를 적극 소개하기 시작했다. 권력교체에 대한 희망이 고조되었던 대선 이전에는 ‘복지국가’ 담론이 줄을 이었던 것과 다소 대조적이다. 물론 대선 이전에도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꾸준히 이어졌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국내 여러 매체들이 앞다투어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미소금융 등 사회적 경제의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했다. 국제연합(유엔)에서는 2012년을 세계협동조합의 해로 지정했으며 이러한 국내외적 추세를 반영하듯 지난해 국회에서는 사회적 협동조합 설립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되었다.
보수진영도 사회적 경제에 나름대로 주목하고 긍정적인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에서는 최근 협동조합의 성공 사례들을 특집으로 연재했고, <매일경제>도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의 영역이 불황기에 실업을 ‘흡수’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소개했다. 이는 경제민주화와 자본주의 4.0을 필두로 해서 장기불황의 시대에 좀더 ‘따뜻한 시장경제’를 지향하겠다는 보수파들의 공언과 잇닿아 있다. 물론 어떤 의제에 대해 일정한 좌우의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합의 이면에 숨겨진 ‘적대’가 무엇인지를 징후적인 방식으로 읽어내야 한다.
문제는 현재 사회적 경제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논의가 무비판적으로, 중구난방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물론 그 의도는 불순하지만) 지난해 보수 일간지에 실린 한 칼럼이 협동조합에 관해 좀더 현실적이고 ‘정직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19세기 중엽 시장경제의 경제적 약자들이 모여 협동조합 경제를 시작한 지 150여년이 지나면서 협동조합은 기업경제나 공공경제가 아닌 제3의 경제로 자리잡았다. 치열해진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협동조합 간 합병과 연대를 통해 규모화·전문화가 이루어지고 (중략) 경제사업체로서 자리를 확보했다.” 말하자면 오늘날 유력한 대안으로 일컬어지는 협동조합의 성공 사례들은 자본과의 경쟁에서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을 수용하거나 국가지원을 받으며 ‘살아남은’ 것들이다. 그 과정에서 협동조합의 초기 정신은 변질되고 자본과 국가의 기능을 보완하는 것에 머물게 되었다. 사회적 경제에 대한 대다수의 논의들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길 꺼린다.
드물게도 <프레시안>에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을 냉정하게 비판한 한형식 당인리 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의 문제제기대로 ‘어떤’ 협동조합, ‘어떤’ 사회적 경제인지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와 자본의 테두리 내에서 그것이 갖는 한계 역시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아마 좌우보혁 양자에서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이상하리만치 급작스러운 의제 수렴이 일어난 것은 국가와 자본 자체의 ‘지양’을 제안하는 급진적 전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의 다른 이름인 제3의 경제라는 표현은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위기에 처한) 자본과 국가의 지배를 보완하는 연결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최근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인터뷰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라, 국가-자본-네이션을 의심하라”라고 제안했다. 이 말을 여기에 대입하자면 “사회적 경제를 의심하라”가 되겠다. 그 역시 대안화폐와 협동조합을 옹호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과 네이션-스테이트를 지양하는 한에서 급진적 전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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