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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엄정히 처벌해야 다른 범죄 막는다"

민변·참여연대 "이재용, 엄정히 처벌해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와 참여연대는 8일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기자회견을 열고 "삼성물산 부당합병이 오로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를 위한 것이었다며 "△횡령·배임 등 회사 재산 탈취 범죄 △자본시장법 위반 등 자본시장 교란범죄 △뇌물 등 부패범죄를 모두 저지르는 3대 기업범죄의 종합판"이라고 이 같이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범죄행태가 중대할 뿐만 아니라 범행 동기도 단지 재벌 총수의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자금을 줄이기 위한 것에 불과하여 정상참작의 여지가 적다"며 이 부회장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촉구했다.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부장검사 이복현)는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 회계사기 등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과 관련하여 자본시장법 위반(부정거래 및 시세조종),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부터 진행된 이 부회장의 영장실질심사는 오후 7시께 마무리됐다. 구속여부는 9일 새벽께나 결정될 전망이다.


 

▲불법 경영 승계 의혹을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년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한 승계 작업


 

이상훈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은 "삼바 회계사기나 삼성물산 부당합병은 몇 년에 걸쳐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며 "이러한 내용을 이 부회장이 적극적으로 보고받으며 관여했다는 정황이 검찰 수사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2015년 구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1대 0.35의 합병비율로 합병했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의 3배가량 큰 규모의 회사로 평가된 셈이다. 그 결과 제일모직의 지분만 23%를 가지고 있었던 이 부회장은 합병회사 삼성물산의 지분 16.54%를 확보했고 특수관계인 지분까지 합해 40.26%의 지분으로 지배력을 확보했다.


 

홍순탁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은 "삼바 회계처리는 2014년 합병 직전 공시에서 주주간 계약(콜옵션)을 누락했다는 점과, 합병 후 2015년 결산에서 합병의 불공정성을 수습하기 위해 삼바의 회계기준을 변경해 4조5000억 원의 가공 이익을 만들어냈다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짚었다.


 

삼바는 2012년 미국 바이오젠사와 함께 삼성 바이오에피스(에피스)를 설립한다. 이때 주주간 약정에 따라 바이오젠은 에피스를 49.9%까지 매입할 수 있는 권리(콜옵션)를 보유했다. 삼바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는 중요한 정보임에도 이같은 주주간 약정은 이 부회장 승계가 가속화되기 시작한 2014년 감사보고서에 공시되지 않았다. 홍 위원이 지적하는 첫 번째 회계 문제다.


 

또 제일모직이 가지고 있는 에버랜드의 표준지가가 8만 5000원 수준에서 40만 원으로 급등하면서 제일모직의 가치는 더욱 올라간다.


 

반면 삼성물산은 전반적인 건설경기 호황에도 불구하고 신규 수주를 하지 않고, 중요한 공사물량을 계열사에 넘겨주고, 해외수주를 했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공시하지 않는 등 비정상적인 경영행태를 보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삼성그룹차원에서 박근혜 정권에 뇌물을 제공하여 국민연금이 손해를 보면서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찬성하도록 한 사실이 박근혜 정권 국정농단 사건 재판을 통해 드러났다.


 

두 번째 회계문제는 합병 후 바이오젠의 갑작스러운 콜옵션 행사 가능성이 높아지자 에피스를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전환하면서 회계처리기준을 변경한 것이다. 이로써 에피스가 가지고 있던 미국 바이오젠의 콜옵션 부채 1조8000억 원 상당은 2012~2014년 회계에서 누락됐다가 회계기준 변경으로 되려 4조5000억 원의 가공의 이익으로 전환된다.

 

홍 위원은 "현재 삼바의 주가가 높아졌지만 지금 높아진 주가로 이전의 상황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며 "2015년의 이익은 근거가 매우 부실한 회계평가보고서로 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사무실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범죄 혐의에 대한 처벌 촉구 기자회견'에서 홍순탁 회계사가 발언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각종 불법행위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다. ⓒ연합뉴스

그룹 차원에서 이뤄진 조직적 증거인멸 작업


 

김남근 참여연대 정책위원은 "분식회계가 발생한 삼바나 에피스가 아니라 삼성전자 사업지원 TF 지시에 의해 조직적인 증거인멸이 이뤄졌다"며 "이 모든 것은 그룹 경영권 승계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총수 개인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이 말하는 삼성전자 사업지원 TF는 박근혜 정권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삼성그룹의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이후 사실상 미전실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TF는 삼성쩐자와 별개의 독립된 회사인 삼바와 그 자회사인 에피스에 증거인멸을 지시했다. 에피스 상무는 이러한 지시에 따라 '부회장 통화결과', '바이오젠사 제안 관련 대응방안(부회장 보고' 등의 2100여개 파일을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삼성그룹은 분식회계 의혹을 조사하던 금융감독원이 '바이오시밀러 사업화 계획' 문건 제출을 요구하자 변호사들과 상의해 문건 작성자를 미래전략실 바이오사업팀에서 삼바 재경팀으로, 작성시점은 2011년 12월에서 2012년 2월로 조작해 제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에피스 콜옵션 부채 1조8000억 원의 고의 누락 등 분식회계를 기획하고 이를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그후 증거조작이나 증거인멸을 여러 차례 조직적으로 자행했다는 혐의로 이미 삼성전자 사업지원 TF 임원들이 유죄판결까지 받은 상황이다.


 

김 위원은 "이렇게 그룹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증거를 인멸하고 조작했기 때문에 구속영장 발부 사유는 충분하다"며 "기업범죄를 저지르면 제대로 처벌받는다는 인식이 총수들에게 심어져야만 다른 범죄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엄정한 처벌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이번 구속영장청구는 검찰이 영장을 발부받기 위해 명확한 부분에만 청구한 걸로 보인다"며 "△국민연금에 조 단위 피해를 입힌 업무상 배임죄에 대한 공범 △의도적 사업축소 등 비정상적인 경영으로 삼성물산에 피해를 입힌 배임혐의 △2015년 에버랜드의 비정상적인 공시지가 폭등에 대해서도 수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0818521946305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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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 BTS, BLM운동에 1백만 달러 기부

세계적 이슈에 응답해 온 BTS, BLM운동에 기부로 동참
 
뉴스프로 | 2020-06-08 12:39:4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로이터, BTS, BLM운동에 1백만 달러 기부
– 세계적 이슈에 응답해 온 BTS, BLM운동에 기부로 동참
– 팬클럽 ARMY도 선행 릴레이 해시태그로 동참의사 밝혀

로이터 통신이 6월 7일자로 South Korean boyband BTS donates $1 million to Black Lives Matter (한국 소년밴드 BTS, ‘흑인들의 생명은 소중하다’에 1백만 달러 기부)라는 제목으로 BTS가 경찰의 잔혹성에 항의하는 미국 시위를 지지하는 BLM에 1백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소식을 BTS의 소속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알려왔다고 전했다.

기사는 BTS가 트위터 계정에 #BlackLivesMatter 해시태그와 함께 올린 “우리는 인종차별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폭력에 반대합니다. 나, 당신, 우리 모두는 존중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 라는 글을 소개하면서 이 해시태그가 팬들 사이에 새로운 해시태그 #MatchAMillion(1백만 달러를 만들어 기부합시다)라는 또 하나의 기부 물결을 일으켰다고 전했다.

이 운동은 ARMY로 알려진 방탄소년단의 팬들이 BTS가 기부한 100만 달러에 상응하는 금액을 기부하자는 내용이며 ARMY는 BTS의 선행을 이어받는 선행으로 또 하나의 팬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기사는, 지난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백인 경찰이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진압하는 중 사망케 한 사건으로 촉발되어 벌어지고 있는 전세계적 항의 시위는 소수 인종에 대한 경찰의 처우를 두고 고조되는 분노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편, BTS는 세계적 유행인 코로나로 인해 월드투어를 중단한 상태라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글, 박수희)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로이터 통신 기사 전문이다.
감수: 임옥

기사 바로가기: https://reut.rs/376XYpY

South Korean boyband BTS donates $1 million to Black Lives Matter
한국 남성밴드 BTS ‘흑인들의 생명은 소중하다’에 1백만 달러 기부

FILE PHOTO: V, Suga, Jin and Jungkook, members of South Korean boy band BTS pose on the red carpet during the annual MAMA Awards at Nagoya Dome in Nagoya, Japan, December 4,
2019. REUTERS/Kim Kyung-Hoon 2019년 12월 4일 일본 나고야돔에서 열린 MAMA어워드 레드카펫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국의 BTS멤버, 뷔, 슈가, 진과 정국.

SEOUL (Reuters) – Popular South Korean band BTS donated $1 million to Black Lives Matter (BLM) in support of U.S. protests against police brutality, its music label, Big Hit Entertainment, told Reuters on Sunday.

서울(로이터) – 한국의 인기 그룹 BTS가 경찰의 잔혹성에 항의하는 미국 시위를 지지하는 ‘흑인들의 생명은 소중하다(BLM)’에 1백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소속사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일요일 로이터에 전했다.

On Thursday, the seven-member BTS wrote on its Twitter account that they are against racism and violence with the hashtag BlackLivesMatter:

목요일 7명으로 구성된 BTS는 트위터 계정에 #BlackLivesMatter 헤시태그와 함께 인종 차별주의와 폭력성에 반대한다는 글을 올렸다.

“We stand against racial discrimination. We condemn violence. You, I and we all have the right to be respected. We will stand together.”

“우리는 인종차별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폭력에 반대합니다. 나,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는 존중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The hashtag went viral among the K-pop group’s fans and started another wave of donations with a new hashtag, MatchAMillion.

그 헤시태그는 BTS 팬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지면서 새로운 헤시태그 #MatchAMillion으로 또 하나의 기부 물결을 일으켰다.

The movement encouraged BTS’ fan base, known as ARMY, an acronym for Adorable Representative MC for Youth, to match the $1 million donation the group made.

이 운동은 ‘청춘을 대변하는 사랑스러운 MC’의 약자인 ARMY로 알려진 방탄소년단의 팬들에게 BTS가 기부한 100만 달러에 상응하는 금액을 기부하자는 것이었다.

One Twitter account said, “ARMYs, let’s #MatchAMillion with BTS’s donation to #BlackLivesMatter!”

한 트위터 계정은 “아미들, #BlackLivesMatter에 BTS가 기부한 1백만 달러를 만들어 기부합시다(#MatchAMillion).” 라는 글을 올렸다.

The boyband suspended their world tour over coronavirus concerns in April.

BTS는 4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우려로 세계투어를 중단했다.

The rolling, global protests reflect rising anger over police treatment of ethnic minorities, sparked by the May 25 killing of George Floyd in Minneapolis after a white officer detaining him knelt on his neck.

지난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백인 경찰이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진압하는 중 사망케 한 사건으로 촉발되어 벌어지고 있는 전세계적 항의 시위는 소수 인종에 대한 경찰의 처우를 두고 고조되는 분노를 보여준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29&table=c_sangchu&uid=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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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81] 자주·민주·통일 투쟁에 대하여

문경환 | 기사입력 2020/06/09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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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주·민주·통일은 국민주권운동의 과제다

 

국민주권운동은 국민의 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이다. 국민의 주권을 실현하려면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자주는 국민주권을 대외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국가가 다른 나라에 예속되어 주권이 없으면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 외교, 경제, 국방, 문화 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말마따나 미국의 ‘승인’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국민의 주권을 사실상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강탈해간 나라의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민주는 국민주권을 대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독재 치하에서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형식상 민주주의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상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길이 차단된 비민주적 사회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작동하고 진보적인 정당·단체 활동은 탄압을 받는다. 국민의 주권을 실현하려면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 

 

통일은 국민주권을 넘어 민족주권을 실현하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 민족은 하나의 나라에서 살았지만 외세가 강제로 남북을 갈라 분단국가를 만들었다. 따라서 통일을 이루어 우리의 민족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민족주권까지 회복해야 국민주권은 온전히 실현된다. 또 통일을 통해 평화와 번영을 실현하면 국민주권은 더욱 빛이 난다. 따라서 국민주권과 민족주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런 이유로 국민주권운동의 과제는 자주, 민주, 통일이라 할 수 있다. 

 

2. 자주·민주·통일 운동의 의의

 

자주는 국민주권을 되찾아오는 것이다. 1945년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면서 강탈해 지금까지 형태만 바꿔가며 틀어쥐고 있는 주권을 국민이 되찾는 것이 자주다. 

 

자주는 민주와 통일을 실현하는 대전제다. 자주 없이 민주도, 통일도 없다. 외세에 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도, 통일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주는 국민주권운동의 선차적 과제, 절대적 과제다. 

 

민주는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것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민주다. 그래서 민주는 곧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것이다. 

 

통일은 국민주권을 빛내는 것이다. 통일은 민족주권을 한반도 전체에서 실현하는 것이며 이것을 국민주권운동 차원에서 보면 민족주권을 통해 국민주권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하나의 국가 단위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분단은 비정상 상태다. 또한 분단은 외세가 국민주권을 강탈하기 위해 강요한 것이므로 분단을 전제로 해서는 국민주권을 절대 실현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국민주권은 민족주권을 실현해야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통일을 통해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되므로 국민주권을 활짝 꽃피울 수 있다. 그래서 통일이 국민주권을 빛낸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자주는 국민주권을 되찾아오는 것, 민주는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것, 통일은 국민주권을 민족주권으로 발전시켜 빛내는 것이다. 국민주권운동은 주권을 회복하고, 구현하고, 빛내는 운동으로 전개해야 한다. 

 

3. 자주·민주·통일이 서로에게 주는 영향

 

(1) 자주

 

가. 자주가 민주에 미치는 영향

 

자주는 민주의 출발점이다. 주권을 실현하려면 먼저 내 손에 주권이 있어야 한다. 미국에 빼앗긴 주권을 국민의 손에 되돌려놓아야 진정한 민주를 꽃피울 수 있다. 

 

자주는 민주의 대전제다. 자주가 없는 민주는 변색된 민주, 사이비 민주다. 외세가 우리 주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민주를 실현한들 그게 제대로 된 민주일 수 없으며 국민주권을 실현한다고 할 수도 없다. 민주는 국민이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 뜻대로 국가권력을 움직이는 것인데 주권이 외세에 있다면 이를 실현할 수 없다. 오직 외세의 이익을 위해 외세의 뜻대로 국가권력이 움직일 뿐이다. 따라서 자주 없이 민주를 하겠다는 것은 이미 민주가 아닌 사이비 민주이며 이러한 민주화운동은 진보운동이라 할 수 없다. 

 

사실 독재세력들조차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박정희는 군부독재를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포장했고, 이순자는 자기 남편인 전두환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김영삼은 한때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지만 집권 후 공안탄압에 미쳐 양심수로 감옥을 가득 채웠다. 당연하게도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이들은 주권을 강탈해간 미국을 위해 일하는 미국의 앞잡이였고 이에 저항하는 국민을 탄압하는 독재자였다. 이들은 자주의 문제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가끔씩 그럴듯한 조치를 취하고는 엄청난 민주주의를 시행하는 것처럼 떠들었다. 물론 이런 조치들은 모두 자신의 독재통치를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자주 없는 민주는 존재할 수 없다. 자주 없는 민주를 주장하는 것은 사이비요 변질이다. 오로지 자주를 전제로 하는 민주만이 실질적 국민주권을 실현하게 한다. 그래서 자주는 참된 민주의 대전제가 된다. 

 

나. 자주가 통일에 미치는 영향

 

자주는 통일의 본질이다. 

 

통일은 민족주권을 실현하는 것이다. 애초에 분단도 우리 민족이 주권을 미처 회복하기 전에 외세가 자기들 마음대로 저지른 것이며, 외세가 우리를 분단시킨 이유도 우리 주권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통일을 가로막고 분단을 유지시키는 기본 세력도 외세다. 만약 통일된 한반도가 미·중·일·러 같은 주변국이나 유엔 같은 국제기구의 통치를 받는다면 그걸 통일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우리 민족 전체를 외세가 갖다 바치는 것이며 민족국가의 말살이다. 진정한 통일은 주변국이나 국제기구로부터 자유롭고 우리 민족이 주권을 쥐는 통일이다. 이것은 곧 자주다. 따라서 자주는 통일의 알맹이다. 

 

자주는 통일의 원동력이다. 

 

우리가 통일이라고 할 때 어떤 상태를 통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체제통일을 생각한다.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흡수통일 혹은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적화통일을 통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통일이 아니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의 쇠락과 멸망을 의미한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자기 체제를 버릴 생각이 없으므로 결국 전쟁으로 한 쪽을 파멸시키고 정복하거나 전쟁에 준하는 봉쇄와 압박으로 체제를 몰락시켜야 한다. 5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이 자기 반쪽을 멸망시키는 게 통일일 수는 없다. 

 

체제통일이 아니면 어떤 통일이 가능한가. 남북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하나가 되면 그것이 통일이다. 이를 7.4 남북공동성명의 표현대로 하자면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민족대단결 방식의 통일이 진정한 통일이다. 

 

민족대단결 방식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주다. 

 

자주는 단결의 기준이 된다. 

 

민족이 대단결을 하려면 온 민족의 공감을 얻을 기준이 있어야 한다. 자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이다. 예속은 누구의 공감도 얻을 수 없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남과 북 어느 한 쪽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남과 북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내용이 달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평화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으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결국 자주의 입장을 가져야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추구하는 미국에 의존해서는 절대 평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주는 민족이 공감하여 단결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자주는 단결의 힘이 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남에게 의존해서는 자기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다.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서 하는 통일, 다른 나라의 승인을 받아서 하는 통일은 제대로 된 통일도 아닐 뿐 아니라 민족의 힘을 약화시키게 마련이다. 오직 자체의 판단으로, 자체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자주의 정신만이 민족대단결에 힘을 불어넣는다. 

 

자주는 통일의 기준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방식의 통일, 다양한 단계의 통일이 있는데 어떤 방식과 단계를 통일이라고 할 것인가 기준을 세운다면 바로 자주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 전체 차원에서 자주가 실현된다면 그것이 곧 통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이처럼 자주는 통일의 본질이며 원동력이고 기준이다. 

 

(2) 민주

 

가. 민주는 자주와 통일을 실현하는 데서 유리한 환경을 마련한다 

 

민주는 국민주권역량을 키울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자주와 통일을 실현하는 데서 유리한 환경을 마련한다. 

 

미군정이 점령한 시기부터 미국이 조직하고 지원한 정치세력들이 집권한 시기까지 이 땅에서는 국민주권운동의 씨를 말리기 위한 폭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가 전진하면서 이런 폭압의 강도는 조금이라도 약화되었다. 군인이 총칼로 국민을 진압하던 시절도 끝났고, 최루탄과 백골단이 난무하던 시절도 끝났으며, 공안기관이 대놓고 고문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모두 수십 년 민주화투쟁을 통해 조금씩 바꿔낸 성과다. 물론 아직도 독재 악법과 독재기구들이 남아있지만 과거에 비해 국민주권역량을 키우는 데서 유리한 환경이 마련된 것은 사실이다. 

 

▲ 1987년 연세대학교 백양로에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피를 흘리는 이한열 열사, 결국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1달 만에 영영 심장의 고동이 멈추었으며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투쟁으로 6월 항쟁이 일어나 전두환 독재정권을 몰아내게 되었다. 

 

객관 환경과 더불어 주관 조건도 성장한다. 국민주권역량이 성장하려면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인식, ‘내가 이 나라의 주권을 쥐고 실현해야겠다’는 의식이 발전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국민 의식 발전을 촉발한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을 끌어내리면서 독재자에게 저항하면 안 된다는 봉건의식이 줄어들었고,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국민의 힘으로 정권도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제는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국민은 생업에 매진하라’는 소리는 철지난 소리가 되었다. 너도 나도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자기 의견을 개진하며 광장에 나와 목소리를 내는 게 상식인 시대가 되었다. 

 

이처럼 민주는 자주와 통일을 실현하는 데서 유리한 환경을 만든다. 

 

나. 민주는 자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

 

민주화가 전진할수록 한국의 주권을 누가 쥐고 있는지 실체가 점점 드러난다. 4.19로 이승만을 끌어내리자 박정희 군부독재가 시작됐고, 부마항쟁으로 박정희를 끝장내자 전두환 군부독재가 등장했다. 독재자를 아무리 끌어내려도 다시 새로운 독재자가 등장하는 모습을 보며 국민은 독재자 뒤의 검은 그림자를 눈치 챘다. 특히 5.18 광주항쟁은 군부독재를 조종하고 지원하는 미국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냈으며 반미 무풍지대였던 한국을 반미 열풍지대로 만들었다. 이처럼 민주는 국민이 자주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부각시킨다. 

 

(3) 통일

 

가. 통일이 자주에 미치는 영향

 

통일은 자주를 가로막는 실체를 뚜렷하게 드러내준다. 남북관계가 발전하여 대화와 협상, 교류협력이 늘어날 때마다 미국이 나타나 방해를 하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문재인 정부 들어서만도 한미워킹그룹을 만들어 자국의 ‘승인’ 없이 문재인 정부 단독으로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 국무부와 주한미대사는 대놓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반대하였고, 사실상 주한미군인 유엔사는 통일부장관의 비무장지대 방문까지 통제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남북관계 발전과 통일을 바라는 국민은 분노의 화살을 미국으로 돌리고 있다. 

 

통일이 다가오면 미국이 설 자리가 사라지는 효과도 있다. 미국이 한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힘은 주한미군에 있다. 그런데 통일이 되면 주한미군이 필요 없어진다. 불필요한 주한미군을 굳이 지원금까지 주면서 데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세상 어느 나라도 외국군대의 영구주둔을 허용하고 지휘권을 넘겨주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 그게 가능했다. 바로 분단 때문이다. 분단을 핑계로 주한미군이 주권을 초월해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주한미군은 분단의 기생충이다. 이런 주한미군도 통일이 다가올수록 주둔 명분이 사라져 결국 철수해야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이처럼 통일은 자주를 부각시키고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나. 통일은 민주를 실현하는 데서 엄청나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친미친일 독재세력이 그간 국민주권을 억압하면서 독재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분단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분단을 핑계로 손쉽게 해결했다. 분단을 핑계로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빨갱이 마녀사냥이라는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었다. 분단을 핑계로 독재를 합리화하고 국민을 탄압하며 정적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통일운동이 발전하면 이런 명분이 모두 사라진다.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 선거 때만 되면, 정권이 위기에 처하기만 하면 등장하던 북풍공작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통일운동이 발전할수록 한국사회 정치지형도 바뀐다. 친미친일 독재세력의 기반인 반공반북체제가 약화되는 반면 진보민주개혁세력이 지향하는 민주, 평화, 번영이 대세가 되고 민심이 된다. 민심의 변화는 정치지형의 변화로 이어진다. 운동장을 역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게 바로 통일이다. 

 

4.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통일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

 

국민주권운동은 자주·민주 운동이고 민족주권운동은 자주·통일 운동이다. 이렇게 보면 자주·민주·통일 운동에서 생명은 자주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를 가장 전면에 내걸어야 하며 가장 중요한 투쟁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진보운동은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동시에 자주·민주·통일 운동을 통일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 그래야 각 영역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서 국민주권과 민족주권을 전반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어느 하나를 방치해도 안 되고, 어느 하나에만 매달려서도 안 된다. 자주를 전면에, 중심에 두면서도 당면하여 조성된 조건에 맞게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적절히 배합하여 진행해야 한다. 이렇게 했을 때 자주·민주·통일 운동이 가장 빠르게 전진할 수 있다. 

 

※이 글은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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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9일 정오부터 모든 남북 통신연락선 완전 차단'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6/09 08:44
  • 수정일
    2020/06/09 08:4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김영철·김여정, '대남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후속조치도 시사(전문)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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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09  07: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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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9일 정오부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통신연락선을 비롯해 모든 남북간 통신연락선을 완전 차단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9일 보도를 발표해 "2020년 6월 9일 12시부터 북남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하여 유지하여오던 북남당국사이의 통신연락선, 북남군부사이의 동서해 통신연락선, 북남통신시험연락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와 청와대사이의 직통통신 연락선을 완전차단, 폐기하게 된다"고 밝혔다.

전날 오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연결통화를 받지 않으면서 우려했던 연락 단절 상황이 오후 통화가 재개되면서 가시는 듯 했으나 결국 현실화된 것이다.

통신은 전날 대남사업 부서 회의에서 김영철 당 부위원장과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이 앞으로 '대남사업을 철저히 대적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단계별 대적사업 계획들을 심의하고 우선 남북사이 모든 통신연락선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조치는 남조선 것들과의 일체 접촉공간을 완전 격폐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한 첫 단계의 행동"이라고 말했다.

지난 4일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의 담화에서부터 남북연락사무소 폐지와 함께 후속조치로 언급한 금강산 관광 폐지, 개성공단 완전 철거, 9.19남북군사합의 파기 등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통신은 "남조선당국은 저들의 중대한 책임을 너절한 간판을 들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회피하면서 쓰레기들의 반공화국 적대행위를 묵인하여 북남관계를 파국적인 종착점에로 몰아왔다"고 이같은 사태의 원인이 남측 당국에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남조선당국의 무맥한 처사와 묵인하에 역스러운 쓰레기들은 반공화국적대행위를 감행하면서 감히 최고존엄을 건드리며 전체 우리 인민의 신성한 정신적 핵을 우롱하였으며 결국 전체 우리 인민을 적대시하였다"고 하면서 "다른 문제도 아닌 그 문제에서만은 용서나 기회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북남사이의 모든 통신련락선들을 완전차단해버리는 조치를 취함에 대하여
--조선중앙통신사 보도--(전문>

남조선당국은 저들의 중대한 책임을 너절한 간판을 들고 어쩔수 없다는듯 회피하면서 쓰레기들의 반공화국적대행위를 묵인하여 북남관계를 파국적인 종착점에로 몰아왔다.

그러지 않아도 계산할것이 많은 남조선당국의 이러한 배신적이고 교활한 처사에 전체 우리 인민은 분노한다.

남조선당국의 무맥한 처사와 묵인하에 역스러운 쓰레기들은 반공화국적대행위를 감행하면서 감히 최고존엄을 건드리며 전체 우리 인민의 신성한 정신적핵을 우롱하였으며 결국 전체 우리 인민을 적대시하였다.

다른 문제도 아닌 그 문제에서만은 용서나 기회란 있을수 없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최고존엄만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으며 목숨을 내대고 사수할것이다.

지켜보면 볼수록 환멸만 자아내는 남조선당국과 더이상 마주앉을 일도,론의할 문제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8일 대남사업부서들의 사업총화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영철동지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김여정동지는 대남사업을 철저히 대적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죄값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한 단계별 대적사업계획들을 심의하고 우선 먼저 북남사이의 모든 통신련락선들을 완전차단해버릴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우리측 해당 부문에서는 2020년 6월 9일 12시부터 북남공동련락사무소를 통하여 유지하여오던 북남당국사이의 통신련락선,북남군부사이의 동서해통신련락선,북남통신시험련락선,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와 청와대사이의 직통통신련락선을 완전차단,페기하게 된다.

이번 조치는 남조선것들과의 일체 접촉공간을 완전격페하고 불필요한것들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한 첫단계의 행동이다.


주체109(2020)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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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398] 이름 없는 전쟁의 기억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06/0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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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이름 없는 전쟁은 남조선혁명전쟁

2. 선행대가 인민유격대로 개편되다

3. 인민유격대는 민중 속에 있다

4. 미점령군이 지휘한 토벌작전은 전쟁범죄

5. 남조선인민유격대는 무엇을 위해 피를 흘렸던가?

 

 

1. 이름 없는 전쟁은 남조선혁명전쟁 

 

검찰관 - 지리산의 인상은?

피고인 - 산이 험했습니다.

검찰관 - (지리산에서) 전투를 하는 것을 봤나?

피고인 - 못 봤습니다마는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검찰관 - 그러한 곳을 떠날 생각은 없었나?

피고인 - 그러한 생각은 한 일이 없었습니다.

검찰관 - 대한민국이 수립된 데 대하여 어떤 감상을 가졌나?

피고인 - 38선이 없는 완전 통일된 정부의 수립을 바랬습니다.

검찰관 - 통일된 나라는 어떠한 국가인가?

피고인 - 인민공화국입니다.

 

위의 문답은 1949년 9월 29일 중앙고등특설군법회의 공판에서 검찰관 김근배와 피고인 유호진이 주고받은 심문과 진술이다. 이 문답은 <동아일보> 1949년 9월 30일부 기사에 실렸다.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의 군사재판에 끌려간 피고인 유호진은 이름 없는 시인이며, 지리산인민유격대 문화공작대원이었다. 아마도 청춘의 피가 심장에 끓는 청년시인이었을 것이다. 청년시인 유호진은 지리산인민유격대에 자진입대하여 문화공작임무를 수행하던 중, 토벌대에게 붙잡혀 전쟁포로가 되었다. <서울신문> 1949년 10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중앙고등특설군법회의 재판관은 지리산인민유격대 문화공작대원 유호진과 그의 전우 8명에게 총살형을 언도했다고 한다. 포로감옥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제목의 마지막 시를 썼던 유호진은 1949년 10월 중순 어느 날 소슬바람 부는 서울 근교 야산 자락에서 총살형으로 최후를 마쳤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지금 그가 총살형을 당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시도 남아있지 않고, 그의 무덤조차 없다. 유호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70년 긴 세월은 유호진의 모든 것을 망각 속에 묻어버렸지만, 그 무명의 청년시인을 지리산으로 불러낸 역사의 진실은 묻어버릴 수 없다. 

 

유호진과 함께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인민유격대원들이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던 이름 없는 전쟁의 역사를 서술하려는 것이 이 글의 집필목적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름 없는 전쟁을 남조선혁명전쟁으로 부른다. 전쟁의 이름에 남조선이라는 지역명칭을 넣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38도선 이남지역은 남한이 아니라 남조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름 없는 전쟁을 혁명전쟁으로 부르는 것은, 당시 남조선로동당과 그 당을 지지하는 남조선의 각계각층 민중이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벌인 간고한 혈전이었기 때문이다.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혁명운동이 격화되어 혁명전쟁이 일어났으므로, 그 전쟁을 남조선혁명전쟁 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남조선혁명전쟁에 대해 서술하는 까닭은 올해 2020년 6월에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6.25전쟁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비가 내리는 새벽에 갑자기 38도선에서 일어난 것으로 믿고 있지만, 6.25전쟁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남조선혁명전쟁과 연동되어 일어났다. 다시 말해서, 남조선혁명전쟁과 6.25전쟁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하나로 연결된 전쟁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궁금증이 생긴다. 남조선혁명전쟁은 언제 일어났을까? 그 전쟁은 선전포고로 시작된 정규전이 아니라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유격전이었다. 선전포고가 없었기 때문에 개전일이 언제였는지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남조선혁명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있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8년 5월 10일 미국이 강행한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가두시위투쟁에 참가한 군중의 모습이다. 그들이 들고 있는 펼침막에는 "국토를 양단하며 민족을 분렬시키는 남조선단독선거를 절대배격하자!"라는 투쟁구호와 "조선인민대표의 참가 없이 결정된 조선에 관한 유엔결정을 절대반대하자!"라는 투쟁구호가 적혀 있다. 미국은 남북조선 전체 민중이 반대하는 남조선단독선거를 강행하고,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을 세워놓았다. 미국은 남조선단독선거를 감행하여 우리 민족을 좌우로, 남북으로 분렬시켰고,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려는 민중의 정치적요구를 폭력으로 짓눌렀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가장 흉악한 제국주의적 만행이다. 1948년 미국의 단선단정책동을 배격하기 위해 격렬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경찰대와 우익테러단체들을 앞세운 미점령군의 유혈탄압에 대항하여 민중항쟁은 무장투쟁으로 전환되었다. 바로 이것이 남조선혁명전쟁이 일어난 근본원인이었다.  

 

1948년 1월 4일 미점령군 산하 경무부 부장 조병옥은 부산에 있는 제7관구 경찰청이 400여 명을 검거한 사건과 관련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 발표에 따르면, 남조선로동당은 1947년 2월부터 각 도별로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1947년 3월 경상남도에서 조직된 군사위원회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군사위원회 사령부 아래 정치부, 병사부, 훈련부, 정보부, 연락부, 자금조달부를 두었다. 

2) 부산, 동래, 진주, 통영, 남해와 각 군(郡)에 연대를 두었고, 연대에 특공대, 정찰대, 정치공작대, 전령대, 후보대, 무기제조반, 조사반을 두었다. 

3) 1947년 8월 말까지 초모한 연대병력은 830명, 공작대원은 763명, 참가군중은 36,000명이다. 

4) 시가전, 산악전, 공방전을 훈련했다. 

5) 스스로를 인민해방군으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은 군훈(軍訓)을 정했다.

- 유격전을 전개한다.

- 본부명령에 절대복종한다.

- 비밀을 엄수한다.

- 전투력의 원천은 공적과 겸손이다.

- 영웅주의와 자유주의는 적이다. 

- 풍찬로숙에 단련한다.

- 문약과 사치는 아편과 같다. 

 

1948년 2월 7일 미국의 단선단정음모를 파탄시키고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요구하는 민중항쟁이 폭발했다. 2.7구국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된 대규모 민중항쟁이다. 2.7구국투쟁은 남조선로동당이 각 도별로 조직한 군사위원회가 인민유격대로 개편된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2.7구국투쟁이 일어난 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산하 노동자들은 총파업투쟁에 돌입했고, 각계각층 민중이 가두시위투쟁에 나섰다. 미점령군 당국으로부터 유혈진압명령을 받은 경찰대는 시위군중에게 발포하여 28명을 살해했고, 8,479명을 체포했다. 유혈진압으로 격화된 민중항쟁은 폭동, 테러, 방화를 불러왔다. 미점령군 산하 경무부 부장 조병옥이 발표한 담화를 인용한 <동아일보> 1948년 2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2.7구국투쟁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폭동 - 30건 

테러 - 55건

방화 - 4건

가두시위 - 103건

파업 - 12건

봉화 - 204건

동맹휴학 - 22건

 

기관차 파괴 - 61량 

객화차 파괴 - 11량 

철길 파괴 - 11개소 

철도교량 파괴 - 7개소 

통신기관 파괴 - 83개소 

전선 및 전주 파괴 - 27개소 

 

항쟁참가자 - 사망 28명, 부상 35명

경찰관 - 사망 5명, 부상 23명

관공리 - 사망 1명, 부상 12명

우익인사 - 사망 5명, 부상 63명 

 

2.7구국투쟁 중에 항쟁참가자들은 지방경찰서 지서들을 습격하여 총기 26정과 실탄 481발을 빼앗았다. 남조선로동당 서울시당위원회 세포조직 성원 50여 명은 서울에 있는 경무부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빼앗으려는 대담한 습격전을 준비하다가 체포되었다. 2.7구국투쟁 중에 항쟁참가자들이 경찰대에게서 빼앗은 총기와 실탄은 민중항쟁을 무장투쟁으로 전환시킨 촉진제로 되었다. 

 

 

2. 선행대가 인민유격대로 개편되다

 

2.7구국투쟁으로 폭발한 민중항쟁은 1948년 3.1절을 계기로 다시 폭발하여 3월과 4월 내내 계속되었다. 미점령군 당국이 남조선단독선거를 강행한 5월 10일을 전후하여 대규모 민중항쟁이 또 다시 폭발했다. <서울신문> 1948년 5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남조선단독선거가 강행된 5월 9일과 5월 10일에 일어난 민중항쟁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선거사무소 습격 - 134건

선거사무소 방화 - 32건

선거관련서류 탈취 - 116건

경찰지서 습격 - 301건

경찰지서 방화 - 16건

관공서 방화 - 16건 

우익인사주택 방화 - 69건

테러 - 612건

 

항쟁참가자 - 사망 27명, 부상 68명

경찰관 - 사망 51명, 부상 128명

경찰관 가족 - 사망 7명, 부상 16명

관공리 - 사망 11명, 부상 47명

선거후보 - 사망 2명, 부상 4명

선거공무원 - 사망 15명, 부상 61명

우익인사 - 사망 107명, 부상 387명 

 

기관차 파괴 - 71건

철길 파괴 - 65건

도로 및 교량 파괴 - 48건

전화선 절단 - 541건

전신주 파괴 - 543건

봉화투쟁 - 86개소

 

이처럼 대규모 민중항쟁이 계속 폭발하면서 격화되던 1948년 상반기 남조선에는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각 도별로 분산된 군사위원회를 통합시킬 필요를 느꼈다. 미점령군 당국 산하 수도경찰청 청장 장택상이 1948년 5월 27일에 발표한 내용을 인용한 <경향신문> 1948년 5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각 지방당조직들에게 1948년 4월 1일부터 선행대(先行隊)를 조직하라고 지시하고, 다음과 같은 방침을 시달했다고 한다.

 

1) 남조선로동당 각급 당조직들에서 엄선한 당원들로 선행대를 조직한다.

2) 선행대 최고기관은 남조선로동당 최고기관의 지령을 받는다.  

3) 선행대는 전국적 통일체로서 유격대의 기초조직이다.

4) 선행대는 명령계통이 엄격한 군사조직체다.

5) 선행대는 각 지역에 백골대, 촉루대, 인민청년군 등 특수조직체를 둔다.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각 지역별로 분산된 군사위원회를 통합하여 선행대를 조직했고, 선행대를 개편하여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했다. <호남신문> 1949년 11월 13일부 보도기사에는 한국군 제5사단 정보처가 수집한 정보가 실렸는데, 그 정보에 따르면, 남조선인민유격대는 다음과 같이 편제되었다고 한다. 

 

1) 남조선인민유격대 사령부인 총사(總社) 예하에 중대급 부대인 철사(鐵社), 금사(金社), 암사(岩社)를 두었고, 영사(營社)라는 별동대도 두었다. 

2) 1개사는 유격대원 20~60명으로 편성되었다. 

3) 철사 예하에 소대급 부대인 1사와 2사를 두었고, 금사 예하에 소대급 부대인 3사와 4사를 두었고, 암사 예하에 소대급 부대인 5사와 6사를 두었다. 

4) 광부대, 북부대, 남부대는 유격대원 12~14명으로 편성되었다.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가 각지에 분산된 군사위원회들을 통합, 개편하여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있었던 1948년 4월 남조선민중은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미점령군 당국은 경찰대와 우익테러단체들을 앞세워 단독선거반대투쟁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단독선거반대투쟁에 참가한 민중은 경찰대와 우익테러단체들의 폭압만행에 맞서 자위적 무장을 택했다. 그런 급진적인 상황에서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위원회는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현대사에 제주4.3항쟁이라고 기록된 무장투쟁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50년 4월 군경토벌대에게 체포된 남조선인민유격대원 38명이 총살형을 당하는 장면이다. 서울 근교 수색에 있었던 총살형 집행장인 것으로 보인다. 헌병들이 일렬로 세워놓은 나무기둥에 유격대원들을 묶고 있고, 건너편에는 총살형을 집행할 경찰관들이 총을 들고 서 있다. 1949년 12월부터 1950년 3월까지 겨울철에 한반도의 산야에는 낙엽이 지고 눈이 쌓인다. 특히 활엽수가 많은 지리산에 겨울이 오면, 앙상한 나무들만 남게 되므로 인민유격대가 은폐할 곳이라고는 몇 개 되지 않는 자연동굴밖에 없다. 군경토벌대에게 자기 위치가 노출되는 위험 속에서 인민유격대는 강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혈전을 벌였다. 이처럼 모든 조건이 불리해진 그 해 겨울, 남조선인민유격대는 미점령군의 지휘를 받는 군경토벌대의 집중적인 토벌작전에 밀려 수많은 전사자와 포로를 남기고, 지리산 깊은 산속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무장투쟁이 일어나자,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선행대를 남조선인민유격대로 확대, 개편하고, 혁명전쟁을 개시하기 위한 비상대기태세에 돌입했다. 이런 급박한 사정은 1948년 7월 3월 미국 <합동통신(United Press)> 서울특파원 제임스 로우퍼가 미점령군 당국자로부터 입수한 기밀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기밀문서는 당시 미점령군 당국 경무부 산하 경찰대가 전라북도 완주에서 압수하여 미점령군 당국에 보고한 남조선로동당 완주군당위원회 기밀문서다. 기밀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1) 소련군이 북조선에서 철퇴하는 1948년 7월 초에 전투가 개시될 것인데, 조선인민군이 남조선에 내려와 남조선로동당을 지원할 것이다.

2)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할 것이며, 남조선단독정부를 파괴할 것이다.

3) 1948년 6월 27일 또는 28일까지 전투지령을 수리할 것.

4) 전투비행대 조직은 계획하는 중이며, 이에 관해 1948년 6월 25일까지 소속본부에 보고할 것.

5) 20~25세 청년동맹 맹원 15명을 1948년 6월 30일까지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잠입시킬 것. 

6) 후원자들로부터 3만~5만원의 기부금을 모금할 것.

7) 반동분자를 조사하고, 그들의 성명과 주소를 적은 일람표를 작성할 것. 

 

남조선로동당 완주군당위원회가 기밀문서에 “1948년 6월 27일 또는 28일까지 전투지령을 수리할 것”이라고 명기한 것은, 1948년 2월 7일 2.7구국투쟁을 계기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민중항쟁의 폭풍 속에서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각 지역별로 남조선인민유격대가 조직되어 남조선혁명전쟁에 돌입할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948년에 연속적으로, 격렬하게 전개된 민중항쟁의 폭풍 속에서 남조선인민유격대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기가 없으면 혁명전쟁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는 남조선인민유격대를 무장시키기 위한 무기제조사업을 추진했다. 이런 사정은 미점령군 당국 산하 경무부 부장 조병옥이 1948년 7월 13일 취재기자들에게 전한 발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표내용은 <동아일보> 1948년 7월 14일부 기사에 실렸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경찰대는 전라남도 강진군 월출산 구정봉에 있는 인민유격대 무기공장을 습격하여 다음과 같은 전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인민유격대원 - 전사 4명, 포로 25명

총기 압수 - 13정

수류탄 압수 - 2발

폭약 압수 - 10개

화약 압수 - 1승

실탄 압수 - 약 200발

뇌관 압수 - 3,000개

99식 장총탄피 및 엽총탄피 압수 - 1가마 

38식 장총 제조기구 - 10여 점

박격포 제조기계 - 1조

일본도 압수 - 5자루

피복류 압수 - 35점

지령문서 및 취사용구 압수 - 다량

 

 

3. 인민유격대는 민중 속에 있다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각 지역에 조직된 인민유격대들 가운데 가장 먼저 교전을 벌인 유격대는 제주도인민유격대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는 1948년 4월 3일 민중항쟁을 유혈적으로 진압하는 경찰대를 상대로 첫 교전을 벌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전투력과 전투기간에서 다른 지역 인민유격대를 능가할 정도로 남조선혁명전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1948년 12월 8일 제1회 124차 국회 본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범석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약 3,000명으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30일부는 제주도인민유격대가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중에 한라산에 구축한 산중진지에 3개월분의 실탄과 식량을 저장해놓고 유격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전투력이 다른 지역 인민유격대를 능가할 정도 강했던 것은 제주도민중들이 제주도인민유격대를 전폭적으로 지지, 성원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전황을 조사하기 위해 미점령군 산하 수도경찰청이 급파한 대규모 형사대가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 1948년 5월 15일 전라남도 목포에서 기자회견를 했는데, 그들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위원회는 제주읍에서만 72개의 당세포를 조직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 하나만 봐도, 제주도인민유격대가 제주도민 30만 명 중 대다수 민중들로부터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완강한 전투력을 보고 놀란 미점령군과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은 방대한 병력과 무장장비를 토벌작전에 동원했다. 제주도에 파견된 미점령군 장교들이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남조선국방경비대와 남조선경찰 정예부대가 제주도에 들어가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것이 역사자료에 기록된 최초의 토벌작전이다. 

 

제주도인민유격대와 군경토벌대가 격전을 벌이던 1948년 10월 19일 미점령군은 전라남도 여수부(府)에 주둔하는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게 제주도인민유격대를 토벌하라는 출동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14연대 장병들은 토벌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48년 12월 8일 국무총리 이범석이 제1회 124차 국회 본회의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무장봉기군은 육군 약 3,700명, 해군 1,579명이었다고 한다. 무장봉기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여수부, 순천부, 구례군, 보성군, 장성군, 광양군, 하동군, 고흥군을 삽시에 점령했다. 1948년 12월 8일 국무총리 이범석이 제1회 124차 국회 본회의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미점령군은 무장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2개월 동안 89회 전투에 진압군 연인원 7,814명과 함선 7척을 투입했다고 한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계속된 무장봉기군과 진압군 사이의 전투들에서 발생한 인명손실은 다음과 같다. 

 

무장봉기군 - 전사 826명, 포로 2,685명

진압군 - 전사 142명, 부상 195명, 포로 16명, 행방불명 9명

 

<동광신문> 1948년 11월 24일, 11월 27일 보도에 따르면, 여수, 순천, 대전에서 각각 진행된 최고군법회의 군사재판에서 무장봉기군 포로들 중 577명에게 사형, 110명에게 무기형, 48명에게 20년형, 118명에게 10년형, 138명에게 5년형, 70명에게 5년 이하의 형이 각각 언도되었다고 한다. 징역형을 언도받고 수감된 무장봉기군 포로 484명은 1950년 6월 6.25전쟁 직전 경찰에 의해 전원 학살당했다. 

 

역사자료에는 제20연대 무장봉기가 1948년 10월 27일에 진압되었다고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진압군의 점령지탈환작전이 10월 27일까지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전투에서 패한 무장봉기군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 인민유격대에 합류했고, 진압군은 자기들이 탈환한 점령지에서 양민학살에 광분했다. 전라남도 보건후생국 통계자료를 인용한 <호남신문> 1948년 1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사망자 2,533명, 중상자 1,027명, 경상자 130명, 행방불명자 833명, 파괴가옥 1,800채라고 한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1948년 10월 경찰토벌대가 전라남도 서부지역의 어느 작은 농촌마을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무차별 체포한 장면이다. 당시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4연대 장병들은 제주도인민유격대를 토벌하라는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여수와 순천을 비롯하여 6개군을 점령했다. 무장봉기군을 진압한 군경토벌대는 전라남도 서부지역 주민들을 '공비내통자'로 몰아 무참히 학살하고,마을을 불살랐다. 위의 사진 속에 나온 이름 없는 농민들의 생사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8년 11월 2일 이번에는 대구에 주둔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6연대에서 장병 약 200명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무장봉기군 76명이 전사했고, 진압군 9명이 전사했다. 전투에서 패한 제6연대 무장봉기군도 지리산인민유격대에 합류했다. 무장봉기군이 합류하는 바람에 남조선인민유격대의 전투력은 더욱 강해졌다. 

 

남조선인민유격대가 수행한 혁명전쟁은 미점령군과 이승만친미파쇼정권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제주도에서는 남조선단독선거가 시행되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미점령군은 인민유격대를 지지, 성원하는 민중을 남녀로소를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 살륙하는 토벌작전방침을 군경토벌대에게 하달했다. 기밀해제된 미국측 문서를 인용한 <연합뉴스> 2020년 1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1949년 1월 28일 미점령군 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버츠는 남조선국방경비대 1개 대대를 추가로 파병하여 제주도 전역을 “완전히 초토화”하겠다는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의 건의를 받고 “최고로 좋은 생각”이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미점령군과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이 감행한 초토화작전으로 제주도 전역은 학살의 피로 물들었고, 살륙의 불길 속에 휩싸였다. 비전투원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은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다. <연합신문> 1949년 3월 4일 보도기사에는 미점령군과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이 제주도의 1개 읍, 11개 면, 96개 리에서 자행한 극악무도한 전쟁범죄에 관한 통계자료가 실렸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피학살 양민은 약 20,000명, 소각된 리는 73개, 전소된 가옥은 20,280동이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2003년 12월에 발표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 제주도 피학살자를 25,000~30,000명으로 추산했다.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때로부터 퍽 세월이 흐른 1957년 3월 27일 한라산 평안악 밀림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상상을 초월한 엄혹한 환경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제주도인민유격대가 경찰토벌대와 벌인 마지막 교전이었다. 마지막 교전에서 유격대원 2명이 전사했고, 유격대원 1명은 4월 2일에 체포되었다. 제주도인민유격대와 제주도민중이 싸운 9년간의 혈전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조선일보> 1948년 6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미점령군은 충청북도 영동군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경무부 공안국장을 토벌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미점령군이 토벌사령부를 충청북도 영동에 설치한 까닭은 그곳이 충청, 호남, 영남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은 1948년 당시 남조선혁명전쟁이 충청, 호남, 영남을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조선인민유격대들 중에서 지리산인민유격대는 지리산 일대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는데, 그들의 전투상황은 <연합신문> 1949년 4월 3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지리산인민유격대 총사령은 홍순석이었고, 참모장은 김지회였다. 홍순석과 김지회는 1948년 10월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4연대 무장봉기를 이끌었던 군사지휘관들이다. 그들은 인민유격대 500여 명을 이끌고 하동, 산청, 함양, 거창, 합천 등지에 신출귀몰했는데, 20~30명씩 편성된 소부대들은 심야에 경찰토벌대의 경비망을 교묘하게 뚫고 들어가 “하루에도 4, 5차례나” 경찰지서들과 면사무소들을 들이치고 빠져나가는 습격전을 벌였다. 1949년 3월 27일에는 거창경찰서 관내 경찰지서를 습격한 후 금융조함과 우편국에서 거액의 현금을 빼앗았다.   

 

 

4. 미점령군이 지휘한 토벌작전은 전쟁범죄

 

경찰토벌대가 지리산인민유격대를 당할 수 없게 되자, 경상남도 경찰국장은 1949년 3월 31일 진주에서 9개 지구 경찰서장 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는데, 그 회의에서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토벌결사대를 조직하여 더욱 강화된 소탕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경찰토벌대와 별개로 한국군도 지리산지구토벌사령부를 설치했다. 한국군 지리산지구토벌사령부는 유격전에는 유격전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하면서 토벌유격대를 조직했다. 그렇게 되자, 인민유격대는 토벌유격대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한국군 국방부 보도관의 발표문을 인용한 <자유신문> 1949년 5월 1일 보도에 따르면, 1949년 4월 8일 오후 5시경 지리산 달궁 부근에서 벌어진 지리산인민유격대와 한국군토별유격대 사이의 교전에서 총사령 홍순석과 참모장 김지회가 전사했다고 한다. 총사령과 참모장이 전사했어도 지리산인민유격대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1949년 6월 16일에 나온 관보 제112호에 따르면, 내무부 당국은 지리산인민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 전라남도 구례, 경상남도 하동, 전라북도 남원에 각각 지리산지구특별경비대를 설치하기로 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격전이 계속되었다. <동아일보> 1949년 6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산악지대에서 벌어진 지리산인민유격대와 경찰토벌대 사이의 교전에서 봉화군 경찰서장을 비롯한 경찰관 4명이 전사했고, 그 밖에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9년 8월 8일 보도에 따르면, 내무부 당국은 지리산인민유격대를 고립시키기 위해 지리산 산간마을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산간마을주민을 하산시켜 집단마을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서울신문> 보도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일찍이 만주에서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얻은” 집단마을조성전술은 50~100호를 묶어 1개 집단마을을 만들고, 집단마을 주위에 높은 방벽을 쌓아 밤낮으로 경비하는 전술이었다. 집단마을조성에 협조하지 않는 주민들은 ‘공비내통자’로 몰려 남녀로소를 구분하지 않고 학살당했다. 이것은 명백한 전쟁범죄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시기 만주에서 일제관동군과 만주군이 조선인민혁명군,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중국인항일부대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만주 각지에서 산간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집단마을에 가두었던 전쟁범죄가 지리산에서 다시 자행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과 만주군에 자진입대하여 전범일왕 히로히또에게 충성했던 친일민족반역자들이 8.15 이후 미국에게 충성하기 위해 남조선국방경비대로 대거 입대해 군부를 장악했으므로, 그들은 일제에게서 배운 전쟁범죄를 거리낌 없이 저질렀던 것이다. 일본군과 만주군의 하명을 받고 항일투쟁세력을 토벌했던 그들은 8.15 이후 미점령군의 하명을 받고 남조선인민유격대를 토벌했다. 남조선인민유격대 토벌작전에 동원되어 전쟁범죄를 저지른 고위급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48년 10월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4연대 장병들이 일으킨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군경토벌대가 미점령군 장교의 지휘 아래 불타는 전투현장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사진에서 오른쪽 맨앞에 서 있는 사람이 미점령군 장교다.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방대원들이 호스를 준비하고 대기하는 모습도 보인다. 소화전에도 태극기를 꽂아놓았다. 당시 미점령군이 지휘하는 군경토벌대는 무장봉기군을상대로 벌인 전투 중에 신원이 불확실한 주민은 '공비내통자'로 몰아 재판 없이 현장에서총살했으므로 소방대원들은 오인총살을 당하지 않으려고 항상 태극기를 들고 다녀야했다. 미점령군 당국이 토벌사령관으로 임명한 자들은 거의 모두 일제관동군이나 만주군 출신 친일민족반역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남조선인민유격대는 미국의 비호를 받는 친일민족반역세력과 싸웠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군 중좌 출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일본군 중좌 출신 신태영 (육군참모총장)

만주군 중교 출신 원용덕 (호남토벌사령관)

만주군 상위 출신 정일권 (지리산지구토벌사령관)

만주군 상위 출신 김백일 (광주지구토벌사령관)

만주군 중위 출신 백선엽 (순천여수지구토벌사령부 참모장)

만주군 소위 출신 박정희 (호남토벌사령부 작전참모)

 

미점령군은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건만,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남조선인민유격대를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이 수립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은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밀려들어갔다. 미국은 1948년 9월 15일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하기 시작했고, 1949년 6월 30일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미국은 점령군을 철수한 이후에도 군사고문단 495명을 남한에 남겨두고, 한국군을 지휘, 통제했다. 

 

<경향신문> 1949년 11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1949년 11월 25~26일 충청남도 대전 대흥동에 있는 한국군 헌병사령부에서 국방부, 육군본부, 법무부, 내무부 고위당국자들이 참석한 4부합동회의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회의에서 토벌작전을 강화하기 위해 총사령부를 대전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지리산지구, 태백산지구, 호남지구, 영남지구, 안동지구에서 각각 토벌작전을 지휘하는 각 지구 전투사령관 5명은 4부합동회의를 마친 뒤에 토벌작전회의를 진행했다.  

 

4부합동회의에 참석한 육군총참모장 신태영은 취재기자들에게 군경토벌대가 남조선인민유격대와 벌인 전투들에서 거둔 전과를 밝혔는데, 1949년 11월 1일부터 24일까지 전투기간 중에 남조선인민유격대원 888명이 전사했고, 347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429명이 투항했다고 한다.  

 

남조선인민유격대와 군경토벌대가 격전을 벌이는 동안 어느덧 한 해가 저물고 1950년을 맞았다. 다급해진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은 토벌작전을 하루빨리 끝내려고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했다. <경향신문> 1950년 1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국방장관, 육군총참모장, 전투지구사령관 3명, 헌병사령관, 정보국장, 연대장 2명, 부대장 여러 명, 그리고 국회 국방위원장, 치안국장대리, 경상남도 지사와 경찰국장, 경상북도 지사와 경찰국장, 경상남도 및 경상북도의 군수들과 경찰서장들, 행정조사관을 비롯한 100여 명이 1950년 1월 19일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중앙국민학교 강당에 모여 토벌작전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들은 1950년 3월 말까지 토벌작전을 완전히 끝내자고 결의하면서, 해안선 방비를 강화하고, 토벌지구에 있는 모든 마을을 “철저히” 파괴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서울신문> 1950년 1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지리산인민유격대를 토벌하고 원대복귀한 한국군 제211부대의 귀환신고식이 1950년 1월 28일 서울 서빙고동 군부대훈련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지리산토벌작전의 결말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지리산인민유격대 - 전사 4,382명, 포로 1,645명

한국군 토벌대 - 전사 103명, 부상 238명

노획무기 - 총기 1,239정, 실탄 57,000발, 박격포 5문 

 

그러나 군경토벌대가 토벌작전을 완전히 끝내자고 결의했던 1950년 3월 말이 다가왔는데도 남조선인민유격대는 완강히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당황한 군경토벌대에게 비상조치가 요구되었다. <동방신문> 1950년 2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안동에 있는 중앙국민학교 강당에서 지난 1월 22일 회의에 참석했던 100여 명이 다시 모여 제2차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자유신문> 1950년 2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주한미군사고문 단장 윌리엄 로버츠(william L. Roberts)가 토벌지구를 직접 시찰하였다고 한다. 당시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점령군이 철수하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토벌작전현장에 미국군 장교들을 파견하여 토벌작전과 대량학살을 여전히 지휘, 통제하고 있었다. 

 

 

5. 남조선인민유격대는 무엇을 위해 피를 흘렸던가?

 

남조선인민유격대가 전투를 벌이는 사이에 38도선에서는 한국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의 교전이 날로 격화되고 있었다. 38도선에서 격화되는 교전은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6.25전쟁을 3개월 앞둔 1950년 3월 27일 남조선로동당 총책임자 김삼룡과 남조선인민유격대 총책임자 이주하가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1948년 4월 3일부터 2년 동안 혈전을 거듭해온 남조선혁명전쟁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한국 정부 사회부가 발표한 내용을 인용한 <조선일보> 1949년 1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반란(남조선혁명전쟁을 뜻함)에서 발생한 비전투원의 인명손실과 물적 피해는 1948년 12월 20일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다고 한다.

 

 

 

사망자

 

전소가옥

경기도

 

187

 

384

 

충청북도

 

 

66

 

25

 

전라북도

 

 

37

 

105

 

전라남도

 

 

8,280

 

9,909

 

경상북도

 

 

287

 

899

 

경상남도

 

 

708

 

1,993

 

강원도

 

 

53

 

116

 

제주도

 

 

3,340

 

26,790

 

 

 

12,959

 

40,221

또한 1948년 12월 20일을 기준으로 남조선 전역에서 중상자는 9,415명이고, 반소가옥은 3,827호, 소개가옥은 77,051호, 전재민은 523,683명이었다. <사진 5>

 

▲ <사진 5>이 사진은 제주4.3평화공원에 있는 행방불명희생자 묘역을 찍은 것이다. 묘비들에는 이름만 새겨졌고, 생몰년대가 없다. 미점령군과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은 제주도인민유격대를 지지, 성원한 제주도민중을 대량학살하거나 대량투옥했는데, 제주도 형무소의 수용능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수감자들을 서울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에 있는 형무소들에 대거 분산수용했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위령비에 새겨진 '경인지역'이라는 지역명칭은 이 묘역에 모신 행방불명희생자들이 서울과 인근 지역의 형무소들에수감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은 1950년 6월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과 직후 모든 형무소들에 분산수감했던 이른바 '좌익수'들을 대량학살했다. 대량학살 희생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승만친미파쇼정권이 저지른극악무도한 학살만행은 천추에 씻지 못할 죄악 중의 죄악이다.  

 

남조선인민유격대는 무엇을 위해 피를 흘렸던가? 그들이 남조선혁명전쟁에서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혁명전쟁의 목적은 민중의 정치적 요구와 일치된 것이었다. 그러했기에 남조선인민유격대는 남조선민중 속에서 혁명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당시 남조선민중의 정치적 요구는 1946년 2월 19일 서울에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강령에 밝혀져 있다. 민전의 5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제1강령 - 남북조선의 통일적 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제2강령 - 무상몰수와 무상분여의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할 것.

제3강령 - 친일민족반역자와 친파쇼반동거두를 완전히 배제할 것.

제4강령 - 미군정은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할 것.

제5강령 - 미군정이 고문기관 및 입법기관을 창설하는 것을 반대할 것. 

 

위에 인용한 5대 강령 중에서 제1강령과 제4강령은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강령이고, 제2강령과 제3강령은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강령이며, 제5강령은 미국의 남조선점령을 반대하는 강령이다. 여기에 인용된 5대 강령은 남조선인민유격대가 혁명전쟁에서 피흘려 쟁취하려고 했던 목적이었다. 

 

1948년 4월 초에 시작된 남조선혁명전쟁은 1950년 3월 말에 종결되었으나, 38도선에서는 남조선혁명전쟁보다 더 격렬한 교전이 벌어졌고, 남북의 교전은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전쟁으로 이어졌다. 군경토벌대의 포위망을 뚫고 깊은 산으로 들어간 남조선인민유격대원들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격대를 다시 조직하고 싸웠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한반도의 5년은 혁명과 전쟁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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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특별기획] 기존 질서 붕괴와 세계 대변혁 ‘포스트 코로나’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㉓

정운현 언론인·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발행 2020-06-07 17:18:29
수정 2020-06-07 18: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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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도둑맞은 봄과 짓밟힌 일상

 올해로 직장생활 3년 차인 K 씨. 그는 시중은행의 창구 직원이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입출금을 위해 방문하는 고객을 상대한다. 어제 하던 일이나 오늘 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내일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일상에 그는 짜증이 늘어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다리라도 뚝 부러져 며칠 푹 쉬었으면’.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출근길에 무릎 통증을 느꼈다. 통증이 며칠 간 이어지자 그는 사무실 인근 정형외과를 찾았다.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후 의사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무릎 관절에 악성 종양이 생겼다고 했다. 당장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다. 결국 그는 며칠 뒤에 수술을 받고 한달 간 병가를 냈다. 그제야 그는 지루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올해 우리는 봄을 도둑맞았다. 봄의 문턱에서 만난 불청객 코로나19가 봄을 강탈해갔다. 구례 화엄사의 흑매(黑梅)가 언제 만개했는지, 온 산천을 뒤덮던 진달래가 언제 피었다 졌는지도 모른 채 봄을 보냈다. 처음 겪은 황당한 일이었다. 불청객은 놀랍게도 전 세계를 휩쓸었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평범하지만, 그러나 소중한 우리의 일상이 송두리째 짓밟혔다. 3월이면 개학하던 학교는 등교를 보류하였고, 크고 작은 모임도 한동안 금지되었다. 또 환자가 아닌데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국민이 마스크를 끼고 다니고 있으며, 중소상공인 등은 영업 부진으로 극도의 고통을 겪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는 이미 10만 명을 훌쩍 넘겼다. 세계적 대재앙이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코로나19로 등교 개학이 미뤄진 지 80일만에 등교를 시작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등교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발열 체크를 하고 있다. 2020.05.20
코로나19로 등교 개학이 미뤄진 지 80일만에 등교를 시작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등교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발열 체크를 하고 있다. 2020.05.20ⓒ김철수 기자

2. 코로나19가 가져온 한국 사회의 명암

코로나 사태의 파장은 예상외로 컸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역설적인 교훈’이었다. 대표적으로 기존선진국들에 대한 인식 파괴가 그것이다. 성채처럼 견고했던 선진국들의 실체가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간 의료 선진국을 자임하던 그들의 대응은 예상외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마스크 등 방역물품 품귀현상이 빚어지자, 민주시민의 보편적 자세인 질서가 하루아침에 붕괴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은 분명히 달랐다. 생필품 사재기나 싹쓸이 같은 행태는 단 한 건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스크 구입을 위한 줄서기 역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다. 확진자를 조치하는 당국의 업무 태도나 시민들의 대응 자세 역시 의연했다. 세계 주요 언론은 한국을 주목하였고, 세계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한국인의 높은 시민의식과 준비된 한국 정부의 진가가 이번에 세계인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초기 우리 정부의 방역 대책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특히 신천지 사태 등이 터지면서 정부는 물론 국민들도 크게 우려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차분한 대응과 국민들의 협조로 사태는 조기에 수습되었고, 이를 계기로 코로나19 대응 자세는 한 단계 성숙되었다.

급기야 세계 120여 개 국가에서 우리가 만든 코로나19 진단 키트를 요청하고 있다. 이는 세계적 기업으로 평가 받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명성을 단번에 뛰어넘는 성과인 셈이다. 또 방탄소년단(BTS)의 세계적 열풍과 흥행,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의 오스카상 석권을 능가하는 호평이기도 하다. 특히 해외 입양 한국인과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에게 마스크를 선물하면서 한국은 또 한 번 ‘아름다운 나라’로 각인되었다.

그럼에도 한국 역시 코로나 사태의 후유증을 피해갈 수는 없다. 경기침체로 인한 경제 부진과 점증하는 실업, 시민 생활의 위축과 소비 감퇴, 마스크 쓰기 등 변화된 생활 양태로 인한 번거로움도 적잖이 늘었다. 이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따라서 사회 전반에 걸쳐 ‘포스트(post) 코로나’에 대한 분석과 대응이 절실한 상황이다.

지난 4월 15일 인천공항 화물터미널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진단키트를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관계자들이 화물을 적재하고 있다.
지난 4월 15일 인천공항 화물터미널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진단키트를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관계자들이 화물을 적재하고 있다.ⓒ외교부

3. ‘포스트 코로나’, 준비하는 이에겐 기회된다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논의가 줄을 잇고 있다. 권위 있는 석학들은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함께 세계 대변혁을 예고한다.

미 하버드대 경제학과 로버트 배로(Robert Barro) 교수는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으로 전 세계 43개국에서 3,900만 명이 사망하고 당시 주요국의 연간 GDP가 평균 6% 감소한 사례를 들어, 이번 코로나 사태가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면 2~3년 동안에 10% 이상의 GDP 감소가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다룬 책 [붕괴]의 저자이기도 한 미 컬럼비아대 애덤 투즈(Adam Tooze) 교수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세계 제1, 2차대전에 견주며 대형 경제위기를 우려하였다.

또 덴마크 코펜하겐 비즈니스 스쿨의 루치아 라이슈(Lucia Reisch) 교수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소상공인과 스타트업들이 특히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전망했으며,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탈레스 S. 테이셰이라(Thales S. Teixeira)는 고객의 양태에 따라 기업의 흥망이 극명하게 엇갈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밖에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박사는 언론 기고문을 통해 “코로나 19로 세계질서가 바뀔 것”이라며 “자유 질서가 가고, 과거의 성곽시대(walled city)가 다시 도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 코로나 사태로 인해 여행과 이주가 줄어들고 해외로 진출했던 기업들이 자국으로 회귀하면서 글로벌 교류가 퇴보하고 이로 인한 경기침체가 우려된다고 예측했다. 그는 전방위적으로 시민을 공격하는 코로나로 인해 정부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민주적 가치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이번 코로나 사태 와중에 이미 목격된 바 있고, 장차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앙성결교회에서 교인들이 전자출입명부(QR코드) 시범운영 테스트를 하고 있다. 전자출입명부 시스템은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했을 때 시설 출입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이날부터 서울, 인천, 대전 3개 지역의 주요 교회, 영화관, 노래방, 음식점 등 시범 운영에 들어간다.   2020.06.02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앙성결교회에서 교인들이 전자출입명부(QR코드) 시범운영 테스트를 하고 있다. 전자출입명부 시스템은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했을 때 시설 출입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이날부터 서울, 인천, 대전 3개 지역의 주요 교회, 영화관, 노래방, 음식점 등 시범 운영에 들어간다. 2020.06.02ⓒ민중의소리

다양한 전망과 조언 중에서도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다. 지한파 미래학자이자 미래학계 대부로 불리는 짐 데이토(Jim Dator) 하와이대 명예교수가 그 사람이다. 데이토 교수는 최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한국은 다음 세 가지에 과감히 도전할 것을 주문했다. 첫째, 더 이상 선진국을 따라가지 말고 스스로 선도국가가 될 것. 둘째, 지금껏 한국을 발전시켜 온 경제와 정치 논리가 미래에는 더는 통하지 않을 것이니 21세기 한국에 어울리는 새로운 것을 찾는데 앞장설 것. 셋째, 더 이상 기존의 동맹에만 의지하지 말고 외교 관계를 다극화하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정책담당자, 기업인, 연구자 등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코로나19는 아직도 전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언젠가는 종식되거나 아니면 인류가 관리 가능한 상태로 수그러질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까지 팔짱만 끼고 기다릴 일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세계적 전문가들은 다양한 식견을 쏟아내고 있다. 물론 우리 정부와 각계 전문가 집단 역시 나름의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정부는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큰 역할을 해낸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격상시키기로 했다. 이는 방역 차원의 대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데 불과하다.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사진 = 정운현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의식구조 등 사회 전반의 광범위한 논의와 변화, 그리고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계의 지성을 한데 모으는 작업이 절실하다. 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위해 구성했던 기존의 T/F를 민-관 공동으로 국가 차원의 ‘포스트 코로나 특별위원회’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내에도 각 분야별 전문가가 차고 넘친다. 문제는 이들을 한 꾸러미에 담아내는 ‘선한 손’이 필요하는 점이다. 민간의 참여를 유도하려면 정부 주도보다는 민-관 공동 형태로 꾸리고, 정부측에서 위원장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단계 더 나가자면, 우리의 역량을 국내에만 가둬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방역 모범국가로서 한껏 높아진 위상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승화시켜야 한다. 우선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한·중·일과 동남아 국가들을 묶어 ‘동아시아 보건·의료 공동 협력체’를 수립하는 방안이다. 이는 미-중 신냉전 시대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활로가 될 수도 있다. 데이토 교수는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꿈꾸고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포스트 코로나’ 역시 준비하는 자에겐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창간20주년 특별기획]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모아보기

정운현 언론인·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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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전단 살포가 법적으로 제한돼야 하는 이유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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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20/06/08 10:12
  • 수정일
    2020/06/08 10:1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주장] 실효성 없는 대북전단 살포, 누구를 위한 것인가20.06.08 07:58l최종 업데이트 20.06.08 07:58l최승철(csc7134)

탈북민단체, '김정은 규탄' 대북전단 살포 탈북민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지난달 31일 김포시 월곶리 성동리에서 '새 전략핵무기 쏘겠다는 김정은'이라는 제목의 대북 전단 50만장, 소책자 50권, 1달러 지폐 2천장, 메모리카드(SD카드) 1천개를 대형풍선 20개에 매달아 북한으로 날려 보냈다고 1일 밝혔다.
▲ 탈북민단체, "김정은 규탄" 대북전단 살포 탈북민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지난 5월 31일 김포시 월곶리 성동리에서 "새 전략핵무기 쏘겠다는 김정은"이라는 제목의 대북 전단 50만장, 소책자 50권, 1달러 지폐 2천장, 메모리카드(SD카드) 1천개를 대형풍선 20개에 매달아 북한으로 날려 보냈다고 1일 밝혔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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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전단을 두고 북한이 남한을 향해 날이 선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대응하고 있는 가운데, '과연 대북전단이 실효성이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다.

다시 떠오른 대북전단 갈등

지난 4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5월 31일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면서 '개성공단 완전 철거' '남북군사합의 폐기'를 시사하는 담화를 내놨다. 통일부는 김여정의 담화가 발표된 지 4시간여 뒤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실효성 있는 제도개선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다음날(5일) 북한 통일전선부는 "남쪽에서 (대북전단 제재) 법안이 채택돼 실행될 때까지 우리도 접경지역에서 남측이 골머리가 아파할 일판을 벌여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라면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폐쇄 등을 언급했다. 정부는 7일 "정부의 기본입장은 판문점 선언을 비롯한 남북 정상이 합의한 사항을 준수하고 이행해 나간다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호치민 묘소의 김여정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2일 베트남 하노이 호찌민묘에서 김 위원장을 수행하고 있다.
▲ 호치민 묘소의 김여정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사진은 지난 3월 2일 베트남 하노이 호찌민묘에서 김 위원장을 수행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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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통일부의 입장이 나오자 탈북자 출신인 지성호 미래통합당 의원을 포함한 통합당 의원 4명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기가 북한인지 남한인지 헷갈린다"면서 탈북자들을 '쓰레기' 등으로 비유한 북한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들은 '대북전단 살포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고 북한주민들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정의의 행동'이라면서 대북전단 관련 법률안을 만들겠다고 밝힌 통일부도 비난했다.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공약을 내놓은 문재인 정부는 2018년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시작으로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판문점선언,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 남북군사합의 등의 진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지난 2019년 4월 한국과 미국이 판문점공동성명 제2항 1조(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한다)가 있음에도 한미군사훈련을 재개했다. 북한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남북관계 전면 재검토'를 경고했다.

2019년 6월 30일 한국을 방문 중이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을 다시 만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개선되는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그해 8월 한미양국이 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하자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과 통일부장관을 직접 겨냥해 "아무 실권도 없는 미제의 괴뢰주제에"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또한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 미사일 발사시험을 세 차례나 진행해 남북 사이 군사적 대치 분위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재인 정부는 올해 초부터 금강산관광, 방역협력 등 유엔대북제재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남북협력을 추진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이 대북전단 살포에 문제제기에 나선 것이다.

대북전단을 통해 본 남북 대결의 역사

대북전단 살포로 인한 남북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북전단을 통한 남북 대결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① 남북대결이 치열하던 1991년 9월,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다. 그리고 그해 12월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다. 총 4장 25조로 돼 있는 이 합의서의 제1장 3조에는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을 하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은 대북전단 살포를 원천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② 2004년 6월 4일, 남과 북은 고위군사회담을 개최하고 서해상에서 우발적 충돌방지와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 합의서 제3항 1조는 "쌍방은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4주년이 되는 2004년 6월 15일부터 군사분계선 지역에서 방송과 게시물, 전단 등을 통한 모든 선전활동을 중지한다"이다. 또한 5조에는 "쌍방은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선전수단들을 다시 설치하지 않으며 선전활동도 재개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③ 2011년 3월 23일, 북한은 "심리전은 전쟁행위"라면서 백령도 심청각에서의 천안함 폭침 1주기를 맞아 진행할 예정이었던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조준사격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④ 인천아시안게임이 진행되던 2014년 9월, 탈북자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회장 박상학)은 9월 21일 경기도 파주시 통일동산에서 대북전단을 살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북한은 "도발 원점을 초토화하겠다"라면서 으름장을 놨다. 그날 대북전단은 살포됐다.
 
탈북자단체, 대북전단 20만장 살포 탈북자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 회원들이 노동당 창건기념일이자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4주기인 10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부근 주차장에서 대북전단 20만장을 날려보냈다.
▲ 탈북자단체, 대북전단 20만장 살포 탈북자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 회원들이 노동당 창건기념일이자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4주기인 2014년 10월 10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부근 주차장에서 대북전단 20만장을 날려보내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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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2014년 10월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위해 김양건, 황병서, 최룡해 등 북한 수뇌부 3명이 남한을 방문한 뒤에도 대북전단 살포는 계속됐다. 남북간 대화 재개 분위기가 다시 수면 위로 올랐을 때였다. 정부가 자제를 요청했지만, 자유북한운동연합은 같은해 10월 10일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 부근 주차장에서 대북전단 20만 장 살포를 강행했다.

또 다른 탈북자단체는 같은 날 오후 4시 경기도 연천군 소재 야산에서 대북전단 132만 장을 담은 기구를 띄웠다. 북한은 이 기구를 향해 경기도 연천군 중면 삼곶리 방면으로 14.5mm 고사총을 발사했다. 한국군은 이에 대해 경고방송 후 K-6 중기관총 40여 발을 북한 GP를 향해 대응사격했다. 한국군은 연천군 일대에 전시경보인 '진돗개 하나'를 발동했고, 3시간여 뒤 이를 해제했다.

⑥ 2014년 10월 30일 북한은 2차 남북고위급 접촉 조건으로 '대북전단살포 중단'을 요구했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2차 남북고위급회담은 결렬됐다.

⑦ 2015년 1월 6일, 대북전단 살포를 진행하던 한 탈북자가 법원에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았다"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대북전단의 살포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지만, 북한을 자극하여 도발을 유도할 수 있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보다 우선되므로 대북전단 규제는 적법하다"라고 판결했다. 반면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를 저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의결했다. 인권위는 "대북전단 활동은 세계인권선언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라고 봤다.

⑧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선언을 발표한다. 공동선언 2조 1항에는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한다, 당면하여 5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 행위들을 중지하고 그 수단을 철폐하며 앞으로 비무장지대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기로 한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전단살포 중지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⑨ 2020년 6월 4일, 사실상 북한의 2인자인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탈북자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삼으면서 "개성공단 완전 철거" "남북군사합의 폐기" 등을 고려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다음날엔 북한 통일전선부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를 시사했다. 

[의문] 대북전단 살포,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
 
 북한 청년들이 탈북자들의 대북전단 살포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성토하는 군중 집회를 열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6일 보도했다. 사진은 이날 평양시 청년공원야외극장에 모인 북한 학생들이 마스크를 쓴 채로 군중 집회를 하는 모습.
▲  북한 청년들이 탈북자들의 대북전단 살포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성토하는 군중 집회를 열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6일 보도했다. 사진은 이날 평양시 청년공원야외극장에 모인 북한 학생들이 마스크를 쓴 채로 군중 집회를 하는 모습.
ⓒ 연합뉴스=조선중앙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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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단체가 대북전단을 살포하는 목적은 폐쇄돼 있는 북한에 외부 세계의 소식을 전함으로써 북한주민들이 스스로 들고 일어나 북한 정부를 전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대북전단 살포 찬반을 떠나 탈북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과연 전단 살포가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우선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대북전단은 남한 지역에서 북한 지역으로 들어가기 상당히 어렵다. 북한 지역에 떨어져야 할 전단이 남한 접경지역 인근 혹은 공해 상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대북전단이 쓰레기가 돼 생태계 파괴의 원인으로 바뀌는 것이다.

2018년 5월 2일 <경향신문>은 강원도 속초 조양동에서 발견된 붉은 바다거북을 부검한 결과, 장에서 탈북자단체들이 뿌린 대북전단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당시 붉은 바다거북의 체내를 확인하던 수의사들은 "장이 심하게 꼬여있는 것이 직접적인 사인"이라면서 "이물질들도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만약 대북전단이 북한 지역에 떨어졌다고 해도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이상한 그림이나 글들은 되레 북한주민들의 거부반응을 일으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북전단 살포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효과가 너무 작다는 것. 탈북자단체가 대북전단 살포를 한 번 하는 데 드는 비용은 1000만 원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대북전단 살포로 인해 북한과 남한이 지속적인 마찰을 빚고 있고, 북한의 군사적 도발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북전단 살포는 낭비행위다. 탈북자 스스로에겐 위안이 될 수 있겠으나, 북한 정권을 반대한다는 상징성 외에는 남한 사회에 득을 주는 게 없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진전 막는 대북전단 살포... 법적으로 제한해야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이 4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대북전단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이 지난 4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대북전단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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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으로 보나 남북관계 발전사를 보나 대북전단 살포는 제한돼야 한다. 2015년 법원의 판결문에도 나와 있듯이 '몇몇 개인의 표현의 자유보다 다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언론·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라는,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기준이 명시돼 있다. 탈북자들은 더 이상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남북관계를 저해하는 행위를 해선 안된다.

대북전단 살포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북한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다. 이미 '대북전단 살포 중지'는 남한과 북한이 오래전부터 합의하고 약속한 사항이다. 지난 4일 통일부가 만들겠다고 밝힌 '대북전단 살포 중지' 법률안은 대한민국이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와 21대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자는 영국에 거주하는 탈북자이며 현재 NK경제개발정책연구소(http://www.enk21.org)를 운영하고 있고 오래전부터 탈북자들에 의한 가짜북한뉴스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본 기사내용은 기자본인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최승철TV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제작한 기사에 대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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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대남 비판 이어가는 북한, 민생 문제 급했나

대남 언급 없이 비료 문제 강조...군중 집회는 이어져

 

8일 북한 관영 매체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7기 제13차 정치국회의를 주재했다며 "나라의 자립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며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서 나서는 일련의 중대한 문제들이 심도있게 토의되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이날 회의에서 △화학공업을 전망성있게 발전시키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 △수도 시민들의 생활 보장 문제 △당 사업에서 제기되는 규약상의 문제 수정 및 규약 개정안 반영 △조직 문제 등이 다뤄졌다고 밝혔다.

 

▲ 8일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과 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7기 제13차 정치국회의를 주재했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

지난 4일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대북 전단 문제를 언급한 뒤 북한 내부에서 남한에 대한 비판 여론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보도를 통해 공개된 내용만을 기준으로 했을 때 남한을 비롯한 대외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셈이다.

 

대신 북한이 화학공업과 시민 생활 등을 주요 사안으로 논의한 것을 두고 대북 제재 장기화에 이어 코로나 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까지 겹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북한의 현 상황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통신은 김 위원장이 화학공업에 대해 "화학 공업의 구조를 주체화, 현대화의 요구에 맞게 개조하고 지속적인 발전 궤도에 올려 세우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밝혔다면서 "경제 발전을 추동하고 담보하기 위해서는 화학 공업부문이 먼저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하시면서 화학 공업 전반을 추켜세우기 위한 당면과업들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통신은 특히 김 위원장이 화학 공업 부문 중에서도 "비료 생산 능력을 늘이기 위한 사업을 최우선적인 문제"로 지목했다며 "우리의 원료에 의거한 카리(칼리) 비료 공업을 창설하는데서 나서는 과학기술적 문제들을 시급히 해결할 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함께 통신은 김 위원장이 석유 대신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돼있는 자원인 석탄을 원료로 활용하는 '탄소하나화학공업'과 관련 "탄소하나화학공업에 쓰이는 촉매개발을 적극 다그치면서 촉매기술, 촉매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물질적 토대를 갖출 데 대하여 지적"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통신은 김 위원장이 "수도 시민들의 생활 보장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시면서 살림집(거주용 주택) 건설을 비롯한 인민 생활 보장과 관련한 국가적인 대책을 강하게 세울 데 대하여 강조"했다면서 "평양 시민들의 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풀기 위한 중요 문제들이 토의되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북한은 연일 남한 및 탈북자를 규탄하는 각계 각층의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북한 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이날 개성시에서 한국 정부와 탈북자들을 규탄하는 항의 군중 집회가 전날인 7일 열렸다고 보도했다.

 

또 '파국적 사태의 장본인들은 죄악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것'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에서는 김여정 제1부부장의 담화에 대해 북한 내부의 반응을 전하는 한편 평양기관차대 소속 대원들의 규탄 집회를 보도하기도 했다.

 

▲ 8일 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전날인 7일 개성시에서 남한의 전단 살포와 탈북자들을 규탄하는 군중집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0808115114118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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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첫 출입 안내견 ‘조이’에게 닥친 아찔한 순간

직접 본 안내견 조이, 똑똑하고 귀여웠다.
 
임병도 | 2020-06-08 08:40:5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국회 사상 처음으로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본회의장에 출입했습니다. 6월 5일 시각장애인 김예지 의원(미래한국당, 비례)과 안내견 조이는 국회의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에 참석했습니다.

6월 5일 본회의장 입장은 방문 및 견학 차원이 아니라 본회의 참석이라 안내견으로서는 첫 국회 등원인 셈입니다. 그러나 김 의원은 미래통합당의 퇴장으로 국회의장과 국회부의장 투표는 하지 않았습니다.

시각장애인 김예지 의원이 당선됐을 때 국회 사무처는 난색을 표명했습니다. 그동안 국회는 “의원은 본회의 또는 위원회의 회의장에 회의 진행에 방해되는 물건이나 음식물을 반입해서는 안 된다”는 국회법 제148조를 근거로 안내견 출입을 막아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004년 17대 총선에서 시각장애인으로 당선됐던 정화원 한나라당(미래통합당 전신) 의원은 안내견 동반이 허용되지 않아 본회의장 출입 때마다 보좌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조금은 나아졌을까요? 21대 국회는 김예지 의원과 안내견 ‘조이’의 본회의장 출입을 허용했습니다.

직접 본 안내견 조이, 똑똑하고 귀여웠다.

▲시각장애인 김예지 의원(미래한국당, 비례)과 안내견 조이가 국회 계단을 오르는 모습

6월 5일 오전 8시 50분쯤 김예지 의원과 안내견 조이가 국회 본청 입구로 들어섰습니다. 발열체크를 위해 김 의원이 멈추자 조이도 그 자리에 서서 김 의원을 기다렸습니다.

국회 본청 입구에서 로텐더홀까지 이어진 계단에서 조이의 진가는 발휘됐습니다. 계단이 나올 때마다 조이는 움직이지 않고 김 의원을 기다렸고, 김 의원은 조이를 쓰다듬으면서 확인 후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만약 안내견 ‘조이’가 없었다면 김 의원은 보좌관이나 ‘흰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가야 했습니다. 아마 시간도 지금보다는 오래 걸렸을 겁니다. 조이 덕분에 김 의원은 다른 의원처럼 당당히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본회의장 입장 전 통합당 의원총회가 열렸던 예결위 회의장은 카메라와 기자, 보좌관, 국회의원들이 자리한 탓에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조이’가 낯선 환경에서 짖거나 돌발 행동을 할까 취재 내내 걱정했지만, 우려와 달리 ‘조이’는 아주 의젓하게 회의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김예지 의원과 조이에게 닥친 시련

▲본청에서 나온 후 빼곡히 주차된 차량 때문에 보행로를 이용하지 못해 서 있는 김예지 의원과 안내견 조이

통합당 의원총회가 끝난 뒤 김예지 의원과 조이는 본청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까와 달리 제대로 걸어가지 못했습니다.

본회의나 의원총회, 상임위가 열릴 때마다 국회 본청 앞에는 의원들의 차량으로 빽빽하게 들어찹니다. 이곳을 지나가려면 주차된 차량 사이의 비좁은 통로로 걸어가야 합니다.

김예지 의원과 안내견 조이가 걸어가야 할 보행자 통로 쪽도 차량이 주차돼 있었습니다. 도보 이동 통로는 막혀 있고, 차량은 계속 지나가고, 보좌관도 당황스러워했습니다.

결국, 김 의원과 조이는 주차된 차량을 피해 돌아서 보행자 통로를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차량이 계속 지나가고 있어, 보는 기자의 눈에는 아찔해 보였던 순간이었습니다.

김예지 의원이 안전하게 본청과 의원회관을 걸어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의원회관과 본청을 잇는 지하통로를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사실 이 지하통로는 국회의원들도 잘 이용하지는 않지만, 고려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보행통로 안전 기둥을 국회 본청 앞부터 현재 설치된 위치까지 연장하는 방법입니다. 이럴 경우 차량 주차를 막아 안전하게 보행통로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데 안전장치나 편의시설 등을 설치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국회와 국회의원 모두가 장애인 활동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 개선과 지원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김예지 의원은 1호 법안으로 장애인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가 장애의 유형, 정도 등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장애인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유튜브에서 바로보기: 국회 출입 안내견 ‘조이’에게 닥친 아찔한 순간(귀여움-분노 폭발 주의) (귀여움-분노 폭발 주의)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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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 고용보험, 국민이 직접 발안한다" 이정희 발안위 공동위원장 맡아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0/06/0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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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 고용보험 국민발안위원회(이하 발안위)가 7일 발족했다. 이상규 민중당 상임대표와 이정희 국민입법센터 대표가 공동제안한 발안위는 고용보험 사각지대 당사자들과 각계각층 시민단체가 결집한 가운데 첫발을 떼었다. 지금까지 240여명이 발안위원으로 참여했다.

 

▲ 7일 전국민고용보험 국민발안위원회가 발족했다.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사진제공-민중당]   © 김영란 기자

 

이에 앞서 민중당은 2019년 3월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고용환경 변화에 맞는 급여체계를 반영한 ‘노동보험’ 입안한 바 있다. 민중당은 이를 21대 총선 노동 분야 주요 공약으로 채택했으며, 코로나발 고용위기가 가시화되면서 ‘전국민 고용보험’ 공약 제시하기도 했다.

 

공동위원장을 맡게 된 이정희 국민입법센터 대표는 지금의 고용보험은 “전체 취업자의 절반도 포괄하지 못해 사각지대가 클 뿐 아니라 급여 받을 가능성이 작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적용 대상을 확대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특수고용의 새로운 유형이 계속 생겨나는 고용환경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특수고용 전체를 일단 당연 가입으로 넣고 대상별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희 공동위원장은 “특수고용노동자는 물론 중소영세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 초단시간 노동자, 65세 이상 취업자, 농림어업종사자에게 고용보험을 적용하고 자발적 이직과 투잡, 소득감소와 재충전도 보장하도록 실업급여 체계 개편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끝으로는 “(민중당의 안은) 저학력과 저소득층을 고용보험에서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설계됐다”고 설명했다.

 

국민발안으로 입법하게 될 전국민고용보험제도는 민중당의 현재 법안을 초안으로 해 원탁회의 등을 통한 각계각층 의견을 반영해 국회 제출 법안을 만들게 된다.

 

발안위는 전국민고용보험 도입에 동의하는 개인들로 구성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모집 예정이다. 홍성규 발안위 공동집행위원장은 “국민동의청원을 준비하기 위해 30만 명의 국민발안위원을 모집하겠다”라는 포부를 밝히며 “9월 내 국회에서 우리의 안이 논의될 수 있도록 운동에 박차를 가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날 당사자의 절절한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박완규 제화노동자는 “대한민국 제화노동자 수가 2,500명인데, 고용보험이 적용 안 되니 신규노동자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정부안에서 특수고용 노동자는 또 제외됐다. 정부는 제화노동이라는 직종을 내팽개칠 것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영업자 김영리 씨는 “자영업자는 임대 기간과 임대료라는 2중 고통을 견디고 있다. 코로나 19로 권리금이고 뭐고 그냥 나가라고 해도 못나갈 만큼 많이 힘들다”라며 고충을 토로했다. 

 

전현욱 요양서비스 노동자는 “(집으로 찾아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재가 요양보호사가 44만 명에 달한다. 어르신이 돌아가시거나 병원에 입원할 경우 곧바로 일이 끊기게 된다. 이런 경우 부분 실업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센터와 근로계약을 맺기 때문에 일이 없더라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라며 부당한 현실을 말했다.

 

최복임 방문학습지 노동자는 “코로나를 겪고 학습지 수업 취소가 많아져 소득이 감소했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처지에 코로나까지 겹쳐 새 직장을 찾는 것도 여의치 않다. 주변에 보험을 해약하고 카드 돌려막기로 생계를 이어가는 교사들이 수두룩하다”며 어려운 처지를 전했다. 그러면서 “학습지 노동자의 95%가 여성이며 그중 80%가 가임기 여성이다. 특수고용 노동자이지만 육아휴직, 출산 급여가 주어지면 좋겠다”라고 요구도 밝혔다.

 

김경희 방과후 강사는 “많은 강사가 자신을 우아한 프리랜서라고 생각해왔는데, 코로나를 겪으며 재난에도 아무런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있다. 수업이 연기되며 수입이 0원인 상황에서 방역, 원경강의 등에 투입하겠다는 대책이 세워졌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다. 특수고용 노동자와 비정규직이야 말로 전국민고용보험제와 생계대책이 가장 절실한데 왜 자꾸 배제되는지 속상하다”라고 토로했다.

 

안주용 농민민중당 대표는 “다양한 노동형태가 존재하는 농민의 경우 소득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가 없다. 전국민고용보험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농민에게도 적용될 수 있도록 소득지원, 재충전급여를 농민에 맞게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발족식에서 참가자들은 전국민 고용보험 국민발안운동을 제안하는 ‘대국민 제안서’를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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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46초의 숨막힌 외침, ‘플로이드 영상’이 뒤흔든 질서

등록 :2020-06-07 09:31수정 :2020-06-07 09:35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영상으로 기록된 흑인 사망

스마트폰 카메라 손에 쥔 대중
백인 경찰 집요하고도 끈질긴
8분46초간의 공격 그대로 찍어
‘경관 생명 위협’ 해명 안 먹혀

‘이미지 정치’ 대명사 트럼프는
시위 밀치고 교회 인증샷 ‘기행’
미디어에 기득권 민낯 또 전시

약자의 실상 저장된 영상 물결
미디어 독점했던 기득권 겨냥
‘게임의 법칙’ 뒤집히는 중일까
지난달 28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시내에서 한 시위자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경찰 앞에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시내에서 한 시위자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경찰 앞에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 2주간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웠던 영상은, 영화도 드라마도 토크쇼도 아니었다. 다른 모든 영상을 제치고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영상 뭉치는, 복수의 행인들이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한 아마추어 기록 클립들이었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살던 46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질식해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한 이 클립들은, 보는 이들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물론 누구도 이 클립들을 보고 ‘엔터테인’ 되지 않았다. 가볍게 웃으며 볼 만한 영상을 찾던 사람들의 정수리에, 이 클립들은 얼음장처럼 찬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지금 웃고 떠들 때가 아니라고,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인종차별이 사람을 죽였다고. 메시지에 압도당한 미국의 방송사들과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자들은 모두 신작 공개를 미루거나, 연대의 의미로 8분46초간 검은 화면을 전송했다. 8분46초, 플로이드가 쇼빈의 무릎에 짓눌려 숨을 거두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영원한 실시간’으로 남을 그 영상물론 무고한 흑인이 경찰의 과잉진압과 인종 프로파일링으로 사망한 사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조지 플로이드 이전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흑인들의 이름만 적어도 신문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플로이드의 죽음을 담은 영상들은 보는 이를 뿌리부터 송두리째 뒤흔든다. “구할 수 있었는데 눈앞에 두고도 구하지 못한”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트라우마는 힘이 세다. 마치 우리에게 뱃머리 바닥 부분을 수면 위로 드러낸 채 천천히 가라앉는 세월호 영상이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인 것처럼, 공포에 질려 제발 자신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고 김선일씨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는 상처인 것처럼. 그러니까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2004년 <씨네21>에 기고한 영화인 이라크 파병반대 선언문 ‘김선일 테이프는 우리 휴머니즘의 실상을 증언한다’를 인용하자면, 이런 것이다.“이 녹화 테이프에 대해서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않는 점이 하나 있다. 이 테이프가 ‘이제부터 항상 현재로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김선일씨가 살아났다면 이 테이프는 과거의 역사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김선일씨가 죽는 순간 이 테이프는 역설적으로 불멸성을 획득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려달라고 하소연했던 그를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하소연한 그 순간은 앞으로 영원히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우리에게 하소연하게 될 것이다. 불가능의 역설. 그러므로 이 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항상 우리의 휴머니즘을 질문할 때 실제 시간이 될 것이다.”이제 위의 글에서 ‘테이프’를 ‘비디오’로, ‘김선일’을 ‘조지 플로이드’로 바꿔서 읽어보자. 플로이드 영상을 접한 이들은 모두, 언제든 아직 플로이드를 살릴 수 있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플로이드 영상은 정서적으로만 강력한 것이 아니라, 그간 수많은 이들이 내심 확신해왔지만 물증이 없어 제기하지 못했던 의혹에 증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압도적이다. 플로이드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도 않았고, 도주하려 들거나 경찰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반면 그를 향한 경찰의 공격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 어찌 해볼 수 없었던 사고’가 아니라, 8분46초 동안 지속된 집요하고 끈질긴 공격이었다. 경찰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고, 언제든 공격을 멈출 수 있었다. 그동안 경찰이 즐겨 사용하던 ‘진압 중에 용의자가 사망한 것은 불행한 일이나, 사진은 진실의 일부만 담고 있다. 현장에서 용의자가 체포에 불응해 거세게 저항했고 경관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같은 해명을, 플로이드 영상은 적극적으로 반박한다.
미국 워싱턴 백악관 근처에서 지난 3일(현지시각)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항의하는 수많은 시민이 휴대전화 전등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워싱턴 백악관 근처에서 지난 3일(현지시각)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항의하는 수많은 시민이 휴대전화 전등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사진이나 목격자 증언만 있었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랐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이미지가 프레이밍을 통해 진실을 어떻게 왜곡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미지가 진실을 다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대중의 지식을 역이용하면, 진실을 담고 있는 이미지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일 또한 가능한 것이다. 동영상은 얘기가 다르다. 물론 동영상도 편집과 조작을 통해 교묘하게 진실을 호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조지 플로이드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영상처럼 중간에 끊기거나 편집되는 일 없이, 그가 서서히 짓눌려 숨을 거두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 앞에서는 다른 핑계를 대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더구나 곳곳에 설치된 폐회로티브이(CCTV)와 사람들 손에 들린 수많은 스마트폰 카메라의 존재는 교차검증을 가능하게 만든다._________
압도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
경찰의 부당한 과잉진압을 경험해본 흑인들은 플로이드의 영상을 보면서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나 또한 저와 같은 일을 경험해본 일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종차별주의적인 태도를 지우지 못하던 보수주의 백인들조차, 영상으로 기록된 명백한 증거 앞에서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폭스 뉴스> 앵커들부터 전 미국의 경찰서장들이 모두 앞다투어 쇼빈의 행동을 비판했다. #BlackLivesMatter(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가 미국 내 50개 주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로이드 영상이라는 압도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었기에, 반응이 이처럼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었던 것이다.공교롭게도 시위대의 반대편에서 “시위대가 약탈과 방화를 이어간다면 연방군을 투입해 진압하겠다”고 말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또한 동영상 기반의 미디어 정치를 통해 인기를 쌓아온 정치인이다. 그는 미국 프로레슬링 리그 ‘레슬마니아’ 시리즈에 출연하고, 최후의 1인을 자기 회사에 취업시키는 오디션 프로그램 <어프렌티스>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대선후보 경선 토론에서는 상세한 정책 설명 대신 티브이로 토론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에 한번에 쏙쏙 박힐 만한 손동작과 캐치프레이즈를 밀면서 이미지를 쌓았고, 리얼리티쇼 출연자를 연상시키는 기행과 폭언으로 하드코어 지지자층을 집결시켰다.본디 동영상 기반의 미디어 정치는 이처럼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한 기득권의 몫이었다. 이라크전 당시 <시엔엔>(CNN)은 미군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과 폭격당하는 바그다드 시내를 생중계하며 전쟁을 엔터테인먼트의 소재로 삼았는데, 미군 또한 이를 통해 자신들의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하며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체제)의 질서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스마트폰만 있으면 영상을 촬영하고 전송하고 배포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되면서, 공고했던 기득권은 조금씩 균열을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플로이드 영상이 온 인터넷을 휩쓸면서, 그동안 미디어에서 집요하게 왜곡되고 지워졌던 미국 내 흑인들의 현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미디어를 활용해 구축한 이미지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호소하던 도널드 트럼프는, 이번에도 그럴싸한 이미지를 통해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 했다. 소요사태가 계속된다면 강경 대응하겠다는 연설을 마친 뒤, 트럼프는 최루탄과 고무탄으로 시위대를 밀어내고는 세인트 존 교회로 걸어가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기행을 벌였다. 종교적, 도덕적 권위를 상징하는 성경을 손에 쥔 채 사진 촬영을 한 것은, 분명 보수층 지지자들에게 호소하려는 의도였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을 기록한 영상에서, 트럼프는 “그 성경은 당신 소유의 성경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그저 “성경이다”라고 어물거렸다. 성경을 읽지도, 성경 구절을 인용하거나 기도하지도 않은 채 기념사진만 찍었다는 얄팍한 전후 맥락이 기록된 영상은 보는 이들의 비웃음을 샀다.
어쩌면 2020년에 공개된, 그리고 공개될 모든 영상 중 가장 중요한 플로이드 영상 앞에서 생각한다. 미디어에서 집요하게 지워졌던 이들은 모습을 드러냈고, 미디어를 이용해 이미지를 구축한 이는 미디어로 그 민낯을 고발당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게임의 법칙이 뒤집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48197.html?_fr=mt1#csidxe9a42a95f838eacb410d64ef2284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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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양심?

강기석 | 2020-06-05 11:19: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아! 바로 이 친구였구나!”

오늘(4일) 아침 한겨레 오피니언면에 실린 석진환 한겨레 이슈 부국장의 칼럼 ‘누구도 양심을 장담할 수 없다’는 칼럼을 읽고 비로소 알았다. 10여 년 전 어느 날, 치열하게 전개되던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정치검찰의 표적수사 와중에 나로 하여금 언론에 대한 극도의 실망감을 갖게 하고 급기야 “나라도 수사와 재판의 전 과정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그 진실을 기록에 남겨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장본인을 발견한 것이다.

조중동과 그 아류 신문, 방송사에 대한 실망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진보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한겨레에, 그 한겨레 기자가 쓴 칼럼이 내게 그토록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 정확한 내용이야 지금 기억에 남아있을 리 없지만 그 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았다.

“거의 모든 정치인은 부정한 돈을 받는다. 돈을 받은 정치인은 수사가 시작되면 처음에는 거의 모두 돈 받은 사실을 부인한다. 한명숙 전 총리도 그럴 것이다. 검찰이 아무 증거없이 수사를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깨끗하게 정치를 해왔다는 한명숙 전 총리도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끝내 혐의가 밝혀질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칼럼은 당시 이명박 정권의 전 방위적인 야당인사 사찰과 탄압의 실상을 모른 체하고, 야당 지도급 인사에 대한 손톱만큼의 배려도 없었음은 물론, 가장 기본적인 무죄 추정의 원칙마저 저버린 채, 오로지 검찰 입장에서 쓴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식의 글이었다.

오늘(4일) 석진환 부국장이 쓴 칼럼의 줄거리도 대동소이하다. 전부(9억 원)가 아니고 일부(3억 원)일지라도 한 전 총리의 유죄는 확실하지 않은가. 여전히 “결백하다”고 말하지만 법적 판단이 끝났고 재심도 어렵고 돈을 줬다는 한만호씨도 죽었으니 한 전 총리의 결백 주장은 이제 신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믿는 도끼가 ‘검찰’에서 ‘대법원 판결’로 바뀌었을 뿐 처음부터 한 전 총리 유죄 심증은 여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석 부국장에게 묻고 싶다. 

-대법원 전원합의 판결은 영원히 무오류인가?(대법원이 확정한 유신, 5공 시대의 무수한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 판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1억 원짜리 수표는 어떤 혐의에 대한 물증인가.(검찰은 3억 원씩 3번에 걸쳐 한 사장이 한 총리에게 직접 전달했다고 주장했고, 변호인단은 오직 한 번 3억 원이 한 사장과 한 총리 지역구 보좌관 사이에 오고 갔을 뿐이라고 했다. 여기에 포함된 1억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보좌관이 한 총리 동생 전세자금으로 일시 빌려 준 것이다) 

-유죄는 검찰이 입증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무죄는 피고인이 입증해야 하는가.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피고인은 무죄 입증할 필요도 없이 무죄인 것 아닌가.(무죄 판결을 내린 1심 재판관마저도 1억 원짜리 수표 교환과 용처에 대해 보좌관과 한 총리 동생의 석명이 충분치 않다고 하면서도 이 수표가 한 총리로부터 동생에게 전달됐다는 검찰의 (유죄) 추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아닌가)

-수사과정에서 증거 날조 등 검찰의 부정행위가 드러난다면 그것이 어느 정도 재판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가(‘미란다 원칙’이란 것도 있는데 증인이나 증거나 조금이라도 조작됐다면 재판은 전면 무효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석 부국장이 우려했듯 재심 여부가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검찰의 무시무시한  조작질이 문제인 것이다. 그 조작질에 연루된 인물들은 지금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아직은 신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고 인간의 영역, 즉 법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이니 석 기자는 너무 안타까워 할 필요도 없다. 

한겨레는 안타까워(하는 척) 하는 대신 뉴스타파 등이 제기한 검찰의 불법 수사-기획 증거 날조 혐의- 취재에 매진해야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리 한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다.

석 부국장은 왜 이런 칼럼을 썼을까? 내가 보기에 변명하기 위해서다. 스스로 토로했듯 10여 년 전 자신이 법조기자를 하면서 검찰의 뜻에 따라 처음부터 한 전 총리를 유죄로 몰아갔던 행위들에 대해 면죄부를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변명의 방법마저 치졸하다. 자신은 여전히 옳고 양식있는 기자로 인정받기 위해 한명숙 총리가 겪고 있는 희생을 그냥 덮자고 하면서 지금에라도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민주당을 ‘오만’으로 몰아 부치는 것이다.    

다음은 내가 쓴 책 ‘무죄’ 머릿글의 한 대목이다.

“나는 40여 차례에 이르는 한명숙 전 총리 1차, 2차 사건 1심 재판을 빠지지 않고 방청했다 (...) 그런데 해괴한 것은 현장을 열심히 들여다 본 사람들(1심 재판부)은 한명숙 전 총리의 무죄를 확신한 반면, 현장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사람들(2심 재판부)은 너무도 쉽게 유죄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

언론도 마찬가지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공판을 지켜 본 나 같은 기자는 검찰의 공소장이 얼마나 허술한가, 증인과 증거라는 것들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그럼에도 한 전 총리를 꼭 잡아 넣겠다는 집념만은 얼마나 강렬한가를 개탄하며 무죄를 확신한 반면, 현장에 잘 나와 보지도 않은 언론은 왜 빨리 한 전 총리의 유죄 판결이 확정되지 않나 안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검찰의 횡포가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언론의 이런 무책임한 태도가 하나의 큰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한겨레 지면에서 석진환 기자의 글을 자주 읽었을 수는 있지만 재판정에서는 그를 자주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나는 그의 얼굴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그가 그의 칼럼에서 인용한 한 대목,

“인간의 양심은 절대 장담해선 안 된다고 한다”를 그에게 반사하고 싶다. 
“당신의 양심부터 잘 지켜라.”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0&table=gs_kang&uid=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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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일본 첫 승전 100년... 그날의 재구성

봉오동전투 일본군 궤멸적 타격... 신출귀몰한 홍범도 부대

20.06.07 11:16l최종 업데이트 20.06.07 11:16l
 봉오동 전적지 들머리에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
▲  봉오동 전적지 들머리에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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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 7일

2020년 6월 7일은 우리나라 최초 독립전쟁인 봉오동전투가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년 전인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洪範圖)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연합부대)가,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월강추격대대' (越江追擊大隊)를 참패시킨,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 대일전 승첩의 날이다. 이 봉오동전투는 사흘 전인 1920년 6월 4일에 있었던, 화룡현 삼둔자(三屯子)전투에서 시작됐다. 그날 새벽 30여 명의 우리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일본군 2개 중대는 이를 보복하려고 우리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조선인 양민들을 무차별 살육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독립군은 삼둔자 산기슭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타격했다. 이에 함북 종성군 나남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사처럼 약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삼둔자 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추격대대'를 임시로 편성했다.

이들 월강추격대대는 야스가와 소좌의 인솔로 1920년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이런 낌새를 알아 차린 홍범도 장군은 그들과 교전에 앞서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했다. 그러고는 봉오동 상동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해 놓았다. 그런 다음 월강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해 포위망 속에 가둬두고 일망타진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분대를 월강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으로 내보낸 뒤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하게 하여 그들 전 부대를 유인했다.

6월 7일 아침 8시 30분 무렵에 월강추격대 첨병이 독립군 분대의 뒤를 쫓아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월강추격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치고는 봉오동 하동을 정찰한 결과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죄다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봉오동전투 격전지인 봉오동을 품고 있는 초모정자산
▲  봉오동전투 격전지인 봉오동을 품고 있는 초모정자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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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봉오동전투

그들은 본대를 불러 봉오동 하동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뒤 그날 정오 무렵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봉오동 중동, 상동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월강추격대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봉오동 상동 남쪽 300m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곧장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주력부대가 들어오길 묵묵히 더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기관총을 앞세우고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제야 홍범도 장군은 공격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은 일제히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월강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의 전투는 무모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리고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 월강 추격대를 혼비백산케 했다. 통쾌한 대일 승전이었다.

당시 중국 〈상해시보〉에 따르면,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추격대를 150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 게릴라 전의 개척자로 알려진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  우리나라 게릴라 전의 개척자로 알려진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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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 평양 서문안 문렬사 부근에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조선 순조 때 농민의 난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와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홍경래 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일가친척이 화를 입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와서 장사를 하며 살았다.

홍범도 아버지 홍윤식은 할아버지 생전에 남긴 빚을 갚고자 머슴살이를 했다. 홍범도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그는 인물이 남달리 뛰어나 관기로 뽑혀갈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자 외가어른들이 서둘러 홍윤식과 혼인시켰다.

가난한 부부는 결혼 이태 후 아들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산모가 해산한 뒤 하혈이 심하여 이레 만에 세상을 떴다. 홍윤식은 동네 아낙네들에게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홍범도는 머슴살이, 병정, 막일꾼 등으로 자라다가 나중에는 중이 되고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외금강 신계사 주지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하지만 한 해 남짓 만에 수도생활을 청산하고 하산했다. 그때 홍범도는 여승 옥녀와 정이 들어 뱃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옥녀의 고향인 북천으로 가고자 봇짐을 지고 금강산을 떠났다. 하지만 원산 교외에서 불한당으로부터 변을 당해 홍범도는 옥녀와 생이별을 한 뒤 방랑객이 되었다.

그는 그때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아가자면,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 했기 때문에 무예를 닦는 길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홍범도는 강원도 회양에서 만난 포수로부터 사냥총 한 자루를 구입했다. 그 길로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사냥꾼으로 생업을 삼으면서 사격술과 검술을 닦았다. 뒷날 일본군들이 홍범도란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오싹했던 백발백중 사격술과 신묘한 검술은 그때 익힌 솜씨였다.

홍범도의 인생길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일제 깡패 무리들이 남의 왕궁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명성 황후를 난도질해 죽이고, 그 시신마저 장작더미에 던져 태워버렸다는 얘기를 듣자 홍범도의 울분은 하늘을 찔렀다.

그는 일제 침략자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수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항일 투지가 불탔다.

1895년 10월 홍범도는 강원도 단발령에서 만난 포수 김수협과 뜻이 맞아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한 뒤, 곧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통쾌하게 처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홍범도의 맹렬한 항일 무장투쟁이 펼쳐졌다.

일제 강압에 따른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11월 홍범도와 차도선은 항일 의병대를 만들어 함경남도 후치령에서 일제 북청수비대를 섬멸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그 뒤를 이어 의병대는 함경남도 삼수, 갑산에서 일제 군경과 수십 차례나 처절한 격전을 벌였다.
 
 카자흐스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 세워진 흉상.
▲  카자흐스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 세워진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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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의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작업

1911년 봄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첫 국내 진격전을 감행하여 함북 경원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개가를 올렸다. 또 1919년 10월에는 평북 강계 만포진을 공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여 명을 살상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게릴라전의 개척자로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역시 홍범도 장군의 공이 컸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에게는 '날아다니는 장군'으로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우리 겨레에게는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 '백두산 호랑이'로 추앙 받았다. 장군의 발자취는 조국의 산과 계곡, 압록강 두만강 굽이굽이, 백두산 밀림과 만주 벌판에,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황야에까지 남겼다.

장군은 조국 광복을 이태 앞둔 1943년 10월 25일, 러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즐 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항일구국 생애를 마감했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신 지 40년 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는 장군의 반신 동상이 세워지고, 생전에 살았던 곳은 '홍범도 거리'로 명명되었다.

우리 정부는 올해 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도 친일의 무리와 그 추종자들이 활개치는 세상에 홍범도 장군은 한 줄기 빛과 한 줌의 소금으로 겨레의 수호신 역할을 하리라 믿는 바이다.
 
 봉오동 전적지. 지금은 봉오동저수지로 물에 잠겨 있다.
▲  봉오동 전적지. 지금은 봉오동저수지로 물에 잠겨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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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기자는 1999년 8월에 이어 2005년 6월에도 현지를 답사하였습니다. 이 기사는 사학자 장세윤 박사 지음 <홍범도 장군>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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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文 대통령 남북·북미 선순환관계 비판 "남북관계는 민족내부문제"

박한균 기자 | 기사입력 2020/06/0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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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매체가 7일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북미 선순환관계 정책에 대해 “악순환관계”라고 비판했다.

 

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관지 우리민족끼리는 ‘달나라타령’ 제목의 기사에서 “북치고 장고치는 타령도 좀 사람들이 들을 맛이 있게 해야 여운이 남지 오히려 남을 피곤하게 한다면 그것을 어찌 타령이라고 할 것인가”라며 “아마 남조선집권자가 북남합의 이후 제일 많이 입에 올린 타령을 꼽으라고 하면 선순환관계 타령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매체는 ‘시도 때도 없이 선순환관계 타령’을 했다며 “선순환관계를 남조선당국자는 북남관계와 조미관계를 서로 보완하며 추진해나가는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해석하는데 말이 그렇지 실천에 있어서는 북남관계가 조미관계보다 앞서나갈 수 없으며 조미관계가 나빠지면 북남관계도 어쩔 수 없는 관계로 여기는 것 같다”라고 짚었다.

 

매체는 이에 대해 “지금까지 북남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사건건 미국에 일러바치고 미국이 승인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손들고 나앉아 아까운 시간을 허송세월한 것이 남조선당국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실증해주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매체는 “이거야 상식적으로 봐도 악순환관계이지 어떻게 선순환관계인가”라며 “도저히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는 타령이다”라고 주장했다.

 

매체는 특히 “북남관계는 북과 남이 손잡고 민족공동의 대업인 평화와 번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내부문제라면 조미관계는 말 그대로 우리 공화국과 미국과의 관계문제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판판 다른 북남관계와 조미관계를 억지로 연결시켜놓고 선순환관계 타령을 하는 그 자체가 무지와 무능의 극치이다”며 “만 사람은 물론 자기 스스로도 이해 안 되는 선순환관계 타령을 읊조리며 허구한 세월을 무료하게 보냈으니 그 타령이야말로 달나라에서나 통할 달나라 타령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북은 지난 4일 김여정 북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담화를 통해 탈북자들의 대북전단 살포행위를 막지 않으면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바로 다음 날 당 중앙위 통일전선부도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대북 전단 살포와 관련 남측 정부 태도를 비판하면서 첫 번째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부터 철폐할 것이며 이후 다른 조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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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독립과 호국이 오늘 대한민국의 뿌리”

대전현충원에서 65번째 현충일 추념식 열려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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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06  10: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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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했다. [사진제공-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65번째 현충일 추념사에서 “독립과 호국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나라를 지켜낸 긍지가 민주주의로 부활했고, 가족과 이웃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의인을 낳았다”며, “독립·호국·민주 영령들은 각자 시대가 요구하는 애국을 실천했고, 새로운 시대정신과 역동적인 역사의 물결을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역사는 “독립·호국·민주”로 이어졌다고 정리한 셈이다.

문 대통령은 “국립 대전현충원의 현판을 안중근 의사의 글씨체로 교체하게 되어 매우 뜻깊다”고 밝혔다.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이었다. 광복군을 거쳐 지금의 우리 군까지 이어지고 있는 군인정신의 사표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 순국 110주년이다. 

문 대통령은 “내일은 봉오동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일”이라고 상기시켰다. 100년전 암울했던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이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제 맞서 봉오동에서 거둔 ‘독립전쟁 첫 번째 대승리’다. 

또한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의 뿌리가 독립군이었고, 2018년 국방부는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기원으로 공식 확인했다. 해방 후 많은 독립군, 광복군이 국군이 되었다”며 “독립정신을 호국정신으로 계승하여 6·25전쟁에 참전했다”고 밝혔다.  

‘한강 방어선 전투’를 지휘한 김홍일 장군은 광복군 참모장 출신이었고, 기병대 대장으로 활약하다 1950년 8월 생을 마감한 장철부 중령도 광복군 유격대장 출신이다. 

   
▲ [사진제공-청와대]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외손녀 이현원 중위는 국군간호사관학교 1기생으로 1953년 3월 임관해 참전했다. 독립군의 딸, 고(故) 오금손 대위는 한국전쟁 때 ‘백골부대’ 간호장교로 복무했다.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김필달 대령 역시 1950년 11월 간호장교로 임관해 한국전쟁 등에 참전했다.

그 후예들인 국군간호사관학교 60기 졸업생 75명이 올해 3월 3일 임관하자마자 대구로 가서 ‘코로나19’ 방역전에 참가했다. 6일 ‘경례문’을 낭독한 이혜민 소위는 임관식에서 “6·25 참전용사인 할아버지를 본받아, 국민과 군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로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말했다.

65번째 현충일 추념식 사회는 6.25참전용사 후손 이정민 아나운서와 배우 김동욱 씨가 맡았다. △대통령 내외 입장 △개식선언 △추모 묵념 △헌화 및 분향 △국민의례 △편지 낭독 및 노래 △국가유공자 증서 수여 △추념사 △추념공연 △현충의 노래 제창 △폐식 및 대통령 내외 퇴장 순으로 진행됐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딸, 장사상륙작전 참전용사, 3·15의거 희생자 배우자, 화살머리고지 국군 전사자 유족, ‘코로나19’ 순직공무원 유족과 동반 입장했다. “역사 속 애국의 현장에 있던 이들을 기리기 위해”라고 청와대가 밝혔다.

국기에 대한 ‘경례문’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뜻을 이어나간다는 의미로 6·25 참전용사 후손 간호장교 이혜민 소위와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증손자 김도현 해군대위가 낭독했다.

1951년 7월 강원도 양구에서 전사한 고 임춘수 소령이 당시 가족에게 보내기 위해 가슴에 품고 있던 ‘편지’를 딸 임욱자 씨가 낭독했다. 가수 이수현(악동뮤지션) 씨는 이 사연을 담은 ‘아버지’를 불렀다.

추념공연은 6·25 전쟁고아 2세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천안함 46용사 묘역에서 드보르작의 ‘고잉 홈(Going home)’을 연주하며 시작됐다. 이어 소프라노 임선혜, 가수 알리 씨가 ‘그 날’을 함께 불렀다.

행사 장소가 대전현충원으로 결정된 배경은 수도권에서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방역 대책 때문이다. 참석 인원도 최소화하여 300여명으로 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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