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故 박종태]아빠의 뜻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지만, 비통해하거나 슬퍼하지만은 않겠다"

"고인이 남기고 간 뜻이 이뤄질 때까지,

아이들이 아빠의 뜻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날까지 참고 견디겠다" -한수진-


故 박종태 씨 아내 한수진 씨 "고인의 뜻 이뤄질 때까지 참고 견디겠다"

다음은 이날 기자 회견에서 밝힌 한수진 씨의 발언 전문이다.

지금 이 시간까지 우리 아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몇 시간 후면 내가 만나 얘기해줘야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여기 저기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기도 어렵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왜 다른 아빠와 달리 우리 아빠는 우리랑 안 놀아주냐'며 떼쓰던 아이들에게…. 마침 어제가 어린이날이었지만 내일은 우리 아들 생일이다. 실감이 안 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많은 일들을 하면서 아이들 아빠가 많은 추억을 남기고 가준 것 같아서 고맙다. 작년 아들 생일에는 나에게는 한 번도 안 끓여준 미역국도 끓여줘서, 그나마 추억을 갖고 있게 해줘서 고맙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지만, 비통해하거나 슬퍼하지만은 않겠다. 고인이 남기고 간 뜻이 이뤄질 때까지 참고 견디겠다. 아이들이 아빠의 뜻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날까지….

멀쩡했던 두 아이 아빠를, 단란했던 가정을, 이렇게 만든 금호자본과 그것을 방조한 정부가 조금이라도 인간의 탈을 쓴 사람이라면 하루 빨리 나타나서 사죄해야 한다. 또 다른 열사가 생기기 전에 더 큰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두 다리 뻗고 자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와서 사죄하기를 경고한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는 왜 죽어야 했나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05-06 오후 4:54:34

 

아들 생일에 손수 미역국을 끓여주던 다정했던 아빠였다. 두 아이와 자신만 남겨두고 떠난 남편에게 아내가 "그래도 추억을 남겨주고 가서 고맙다"고 꾹꾹 울음을 참아가며 얘기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지난 3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 박종태 씨는 구두 합의를 깨고 일방적으로 78명 택배 기사와의 계약마저 해지한 대한통운과 싸우고 있던 중이었다. 본인은 대한통운 택배 기사도 아닌, 25톤 화물차를 운전하는 노동자였다. "일체의 대화를 회피"하는 대한통운 탓에 "파업 아닌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대한통운 소속 조합원의 갖게 된 절망에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지난 달 30일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는 실종된 지 오래됐고,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고분고분 노예로 살라고 한다. 동지들을 잃을 수 없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열 살 딸 아이와 일곱 살 아들 아이를 남겨둔 채였다. 아들의 생일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지난 2007년 10월, 법으로 보장된 "단체 협약 체결"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기공 정해진 씨의 죽음 이후 불과 2년도 못 돼 또 다시 노동자가 노동 3권을 보장받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6일 한 목소리로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라며 '고 박종태 열사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함께 싸울 것을 다짐했다. "대한통운으로부터 계약해지된 78명의 원직 복직 등이 이뤄지기 전까지 장례도 치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한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는 택배 기사와 달리 본인은 여러 회사의 물량을 운송하는 25톤 트럭 운전 기사였지만, 박 씨는 지회장으로 대한통운 기사들의 투쟁을 이끌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지난 23일 체포영장이 발부되기도 했던 박 씨는 지난달 30일 한 정당 게시판에 죽음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박 씨는 이 글에서 "현재 적들은 죽음을 요구하고 있다"며 "투쟁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면 바쳐야 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주검으로 발견된 것.

 

이후 발견된 유서에서 그는 "나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도 "최소한 화물연대가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서 전문] "시대가 노동자에게 죽음을 요구"

다음은 박종태 씨가 남긴 유서의 전문이다.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이 투쟁의 제단에 제물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동지들을 희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동지들을 잃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육신이 비록 여러분과 함께 있진 않지만, 저의 죽음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큰 나라를 반토막내서 배 부르고 등 따신 놈들, 미국과 극우보수 꼴통들이 이번 참에 아예 지네들 세상으로 바꿔 버리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는 실종된 지 오래됐고,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고분고분 노예로 살라고 합니다.

그 속에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안락만을 위해서 투쟁할 것이 아니라 통 큰 목적을 가지고 한발 한발 전진하기 위해 손을 잡고 힘을 모으는 적극적이고 꾸준한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의 생존권, 민중의 피폐한 삶은 사상과 정견을 떠나서 무조건 지켜져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득권을 버리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 민중은 이론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최소한 화물연대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깜깜할 겁니다. 어떻게 승리하는지 저는 보지 못할 겁니다. 그것이 아쉽고 억울합니다. 꼭 이렇게 해야, 이런 식의 선택을 해야 되는지, 그래야 한 발짝이라도 전진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속상하고 분합니다.

이름을 거론하자니 너무나 많은 동지들이 떠오릅니다. 저를 이만큼 건강한 간부로 활동가로 있게 해 준 소중한 분들. 저를 믿고 따라 준 형님, 동생, 친구들. 이 의미 있는 투쟁, 힘겨운 투쟁에 끝까지 남아 준 동지들 모두가 저에겐 희망이었습니다.

광주라는 곳도 사랑합니다.

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빕니다. 복잡합니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올림.

 

운수노조 등에 따르면 대한통운은 지난 1월 노조와 구두로 수수료를 건당 30원씩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양 측은 2월 시행을 약속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외려 3월 15일 대한통운은 "본사의 방침"이라며 "합의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노조에 통보했다. 이튿날 노조는 회사에 대한 항의의 일환으로 분류 작업을 거부했다. 김종인 운수노조 위원장은 "택배를 분류하는 것은 계약서 상 택배 기사의 업무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간 관행으로 택배 기사가 별도의 수당 없이 진행해 왔던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회사는 이들의 '항의'에 "근무지 이탈"이라며 "12시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해고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다시 오후 3시 경 "저녁 6시 전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자동 계약 해지됨을 최종 통보한다"는 문자가 조합원들에게 날아 왔다. 또 하루 뒤인 17일, 회사는 내용증명 우편으로 해고 통보서를 보냈다. 화물연대 심동진 사무국장은 "대한통운은 집단 계약해지 이후 노조와 비공식 대화마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초 단 한 차례 노조와 마주 앉아 임금 등 근로조건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대한통운 소속 PD직으로 고용하겠다"고 말했던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심동진 국장은 "대한통운은 PD직이 되면 택배 기사가 산 화물차의 소유 관계나 물량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전혀 설명도 하지 않고 그저 화물연대를 탈퇴해야 대화할 수 있다고만 되풀이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대한통운은 화물기사들의 수입과 직결된 운송료 삭감의 선두주자"라는 것이 운수노조 관계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택배 뿐 아니라 컨테이너 운송료도 대한통운이 한진, CJ 등 다른 물류운송 업체보다 가장 먼저 깎아 왔다는 것. 박 씨를 죽음으로 내몬 이번 사태도 대한통운의 이런 경영 전략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노동계의 분석이다.

 

노동계는 또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도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물기사 등 특수고용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정부 정책이 이들을 더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얘기다. 올해 초 노동부는 실제 덤프트럭과 레미콘 차주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볼 수 없다며 관련 노조에 시정을 요구했다. 신고필증을 반려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부는 이들 화물 기사들이 자기 차를 가지고 영업을 하는 사람이므로 노동자가 아니라 자영업자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노동계 주장은 다르다. 회사와 맺는 '화물운송 계약'은 형식적으로만 파트너 관계로 포장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종속적인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택배 기사의 경우 한 회사와 계약을 맺고 그 회사의 물건만을 나르고 있는 데다, 출근 시간이나 휴가도 자율적이지 않다는 것이 노조 주장이다. 때문에 민주노총은 이런 정부 정책을 놓고 "수 년 동안 합법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이제와 신고필증 반려 운운하는 것은 건설노조와 운수노조에 대한 탄압 이외에 해석할 길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1일 노동절 대회에서 "이들 노조의 신고필증을 반려할 경우 민주노총은 설립신고필증 반납을 통한 특단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

 

여기에 대한통운 택배 기사들의 싸움 과정에 개입한 경찰 등 공권력의 태도도 박 씨가 절망한 이유의 한 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 운수노조 위원장은 "경찰은 신고 인원보다 많이 왔다고 집회 참가자를 무조건 연행하고 1인 시위자까지 병력을 동원해 둘러싸는 등 과도한 진압을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이 박 씨의 죽음에 대해 "고인은 거꾸로 가는 역사의 칼날에, 이명박 정부가 휘두르는 민중 탄압의 철퇴에 맞아 목숨을 잃은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임 위원장은 "또 고인은 그런 이명박 정부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우리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라며 '총력 투쟁'의 뜻을 밝혔다.

 

박 씨의 아내인 한수진 씨도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지만, 비통해하거나 슬퍼하지만은 않겠다"며 "고인이 남기고 간 뜻이 이뤄질 때까지, 아이들이 아빠의 뜻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날까지 참고 견디겠다"고 말했다. 이날 화물연대는 1000여 명의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었다. 오는 9일에는 역시 같은 곳에서 민주노총 등 '대책위' 주최로 집회가 열린다. 매년 5월 18일 즈음에 개최하던 '5.18 정신 계층 전국 노동자대회'도 이번에는 광주가 아닌 대전에서 여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화물연대는 총파업까지 검토하고 있다. 김달식 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장은 "아무리 힘없는 화물 노동자라지만 사람을 개처럼 부려먹고 버려서는 안 된다"며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몽둥이가 필요하다면 우리가 몽둥이를 들겠다"고 밝혔다. (여정민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he Russell Tribunal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건)

지난 3월 4일 벨기에 브뤽셀에서 '국제전범재판소'(일명 '러셀재판소')에서 기자회견이 열렸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태에 대한 '전범재판'을 2010년(확인요망)에 연다는 발표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지금 '스테판 에셀'이라는 프랑스 대사가 재판소의 대표인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브뤽셀이라서인지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래 동영상에서 그가 불어로 발표를 한다(노인의 독특한 발음을 아래의 텍스트에서 따라가면 아주 재미있다). 다음에 링크된 '국제 전범재판소' 사이트에 가면 다른 사람들의 영어 발표문 등도 있음. 지나는 길에 간단한 '러셀재판소'에 대한 소갯글은 위키페디아에서 도입부만 잘라왔다. 우리는 '전범재판소'라는 명칭에 익숙하지만, 이 사람들은 흔히 '러셀재판소'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 재판소는 1966년 러셀(B.Russel,1872~1970)과 사르트르(J.-P. Sartre,1905~1980)에 의해서 창설됐다고 함. 기타 자세한 내용은 불어판보다 훨씬 상세한 영어판을 참조할 것:
Tribunal Russell // Le tribunal Russell, aussi désigné par Tribunal international des crimes de guerre et Tribunal Russell-Sartre, était un tribunal d'opinion fondé par Bertrand Russell et Jean-Paul Sartre en novembre 1966 suite à la publication du livre de Russell, War Crimes in Vietnam. (...)
Russell Tribunal // The Russell Tribunal, also known as the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r Russell-Sartre Tribunal, was a public body organized by British philosopher Bertrand Russell and hosted by French philosopher and playwright Jean-Paul Sartre. Along with Ken Coates, Ralph Schoenman, and several others, the tribunal investigated and evaluated American foreign policy and military intervention in Vietnam, following the 1954 defeat of French forces at Dien Bien Phu and the establishment of North and South Vietnam. (...) http://en.wikipedia.org/wiki/Russell_Tribunal.

Le tribunal Russell pour la Palestin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프랑스 300만명이 거리로..

약속대로(*), 어제, 3월 19일 전국단위의 파업이 프랑스에서 성공적으로 실행됐다는 소식이다. 지난 1월 29일 총파업(**)에서 250만 명이 파업에 동참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규모가 조금 더 늘어난 300만 명이라고 한다. 물론 사르코지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는 기울이겠지만 더 이상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며 버티고, 노동조합 측은 '승리의 그날까지 투쟁은 계속된다'며 결의를 재확인 했다는데... 학교도 문을 닫고 교통도 절반 이상이 멈춰섰고, 심지어는 신문도 배달이 불가능하므로 인터넷에서 공짜로(원래 PDF 판은 유료) 보라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르몽드(석간)는 대문에 걸어두기도 했다.  

(*) 2009.02.19 | 26억euro, 부족하다, 3월 19일 다시 보자!  http://blog.jinbo.net/radix/?pid=87
(**) 2009.01.30 | 20년만에 거리로 나선 프랑스 봉급쟁이들  http://blog.jinbo.net/radix/?pid=71

 

  "Le Monde" disponible gratuitement
En raison d'un mouvement de grève, le quotidien "Le Monde" daté du 20 mars ne sera pas disponible en kiosque. Retrouvez gratuitement le journal électronique.

 

Vidéo
Colères de cadres dans le cortège parisien
LEMONDE.FR | 19.03.09 | 20h39  •  Mis à jour le 19.03.09 | 20h53

Durée : 2:40  |  Images : Le Monde.fr
Les cadres, parmi lesquels beaucoup n'avaient jamais manifesté, étaient au rendez-vous du défilé entre la place de la Bastille et la Nation, à Paris jeudi 19 mars.
Reportage réalisé par Stéphane Mazzorato et Jonathan Parienté.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500명의 용산 / 40만의 명동

다들 다음주 토요일 '10만 국민 대회'를 기약한 때문인지, 2월 21일 토요일 '용산 추모 대회'에는 500여명이 모였고, 경찰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영정사진이 깨지고 경찰에게 짓밟혔다는 소식이다. 사건의 직접적 당사 가족이 아닌 누가 그 아픔과 분노를 감히 실감할 수 있을까만, 그들의 고립과 관심에서 멀어진 처지가 안타깝고 미안하다. 토요일이라 블로그들도 한산하기만 하던데, 다들 어디로 가고 고작 500명만이 모여 그들과 함께했다는 말인가! 공권력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공권력에 무시되고 괄시될 만한 숫자만을 남기고 모두들 떠나버린 무관심이 낳은, 경찰의 마구잡이 행동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며칠 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임한 조문객의 행렬이 인산인해를 이뤘고 그 숫자가 40만명에 육박한다는 소식이 겹쳐진다. 감히 이런 불경한 비교를 한다는 꾸짖음이 옆에서 들리는 듯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남은 자들의 것이지 떠나신 분의 것은 아니리라는 믿음으로, 간략히 두 기사를 함께 엮어둔다. 

 

▲산산조각이 난 영정사진 (사진=손기영 기자) 

 

경찰, 유족 폭행 영정사진 짓밟아 / [현장] 5차 추모대회 원천 봉쇄…시민들 "어떻게 이럴 수가"

(...) 경찰의 봉쇄를 피해 청계광장에서 프라자호텔 앞으로 집결한 유족들과 시민 500여명은 추모대회 개최가 어렵다고 판단한 뒤, 오후 5시 10분 행진을 시작했다. 김태연 범대위 상황실장은 “청와대로 행진하면서,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는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시민들에게 전하겠다”며 항의했다. 하지만 추모행진은 채 5분도 되지 않아, 서울시청 앞 광장 부근에서 봉쇄되었다. 전경 500여명은 행진에 나선 참석자들을 둘러 샀고,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거칠게 항의했다. 이어 경찰이 참가자들을 인도 쪽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양 측간에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다.
전경들은 유족들이 들고 있던 영정사진을 방패로 밀쳤고, 나무 프레임으로 된 액자와 유리는 산산조각이 났다. 또 영정사진이 바닥에 떨어지자 군화발로 마구 짓밟기도 했다. 한 전경은 고 양회성씨의 영정사진을 빼앗아 바닥에 내팽겨 쳤고, 유족들은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통곡했다. 이에 흥분한 고 이성수씨의 아들 상흔군이 거칠게 항의하자, 전경 3~4명은 그를 대오 안으로 끌고 들어가 안면 주변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또 고 이상림씨의 아들 성연씨는 전경들과 심한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어지러움 증과 구토증상을 호소한 뒤 실신해 응급실로 긴급 이송되었다.

(...) 연좌시위를 마친 추모대회 참가자들은 다시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경찰 봉쇄에 막혀 시내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이어갔다. 이들은 저녁 7시 45분 경 명동 ABC마트 앞에 집결해, 정리 집회를 열었다. (...) 이날 추모대회 참가자들은 정리 집회를 마치고 저녁 8시 대부분 자진 해산했지만, 일부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종로 탑골공원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한편, 범대위는 오는 28일 오후 ‘10만 국민 대회’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모을 예정이다. (손기영 기자, 레디앙, 2009년 02월 21일 (토) 22:44:09, 전체기사의견(0))

 

▲ 2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릴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5차 범국민추모대회'가 경찰들에게 원천봉쇄 되자 서울시청 광장에 모인 용산 철거민참사 희생자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행진을 시도하다가 경찰들에게 둘러쌓여 있다. (ⓒ 유성호 출처 : 부서진 희생자 영정들...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 오마이뉴스)

 

‘정신적 지도자’ 잃은 상실감이 ‘국민장’ 승화   
 

...파 성철스님 입적 이후 처음ㆍ“현 지도층 도덕적 리더십 부재 실망감 표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는 추모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며 국민적 추모 신드롬을 ... ...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며 국민적 추모 신드롬을 낳고 있다. 서울 명동성당에만 조문객40만명에 육박하면서 김 추기경의 장례식은 사실상 ‘국민장’으로 승화되고 있...    [사회/사회 일반] 2009.02.19. 23:09:06

조문객 39만명 ‘끝없는 추모 물결’     

...정진석 추기경 교황특사 자격 입관식 집전 김수환 추기경 선종 4일째인 19일에도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은 조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김 추기경의 마지막 모... ...입관식 집전 김수환 추기경 선종 4일째인 19일에도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은 조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김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는 시민들이 새벽부...

[사회/사회 일반] 2009.02.19. 18:07:46 경향

 

김수환 추기경 '사랑 바이러스' 퍼트리고 영면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한국 천주교 지도자이자 사회의 큰 어른으로 ‘모든 이들을 위하여’ 헌신했던 고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그가 평생 믿고 의지했던 하늘나라로 떠났다.

김 추기경 선종 닷새째인 20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주교단과 사제단, 한승수 국무총리와 주한 외교사절, 신자 등 성당 안팎에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 추기경과의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장례 미사가 봉헌됐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이름으로 집전한 장례 미사는 오전 10시 참석자들이 입당성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를 부르면서 엄숙하게 시작됐다. 미사는 성경의 지혜서와 요한의 서신, 마태오의 복음 등을 읽고 정 추기경의 강론을 듣는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고별식 순으로 1시간 40분 가량 진행됐다. 정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김 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빛과 희망이 되어주었고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사랑과 평화의 사도’였다”며 “사랑과 나눔을 우리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유산으로 남겨주어 이 슬픈 상황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추모했다. 정 추기경은 고별식에서 “장례 미사에 모인 김 추기경의 친족과 모든 분에게 주님의 힘과 위로에 대한 보증으로서 진심으로 사도의 축복을 보내드린다”는 교황의 위로 메시지를 대독했다. (...) 장례 미사 후 김 추기경의 관은 경기 용인의 천주교 성직자 묘역으로 운구됐으며, 오후 1시30분부터 정진석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관을 땅에 묻는 하관 예절이 진행됐다. 하관 예절은 흙을 관 위에 덮기까지 30분이 걸렸을 정도로 간소하게 진행됐다. 김 추기경은 이제 영면에 들었다.

김 추기경은 1969년 한국의 첫 추기경으로 임명된 후 개발에 밀린 사람 등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섰으며 1970~80년대의 격동기에는 민주화운동을 후원한 사회의 큰 어른이었다. 30년간 봉직한 서울대교구장에서 1998년 은퇴한 그는 지난해 건강이 나빠져 입원 치료를 받던 중 16일 향년 87세로 선종했다. 김 추기경 선종 후 명동성당의 빈소를 찾은 신자와 일반 시민의 추모 행렬은 40만명에 달했으며, 각막 기증 소식에 장기 기증자가 줄을 잇는 등, 고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놀라운 사랑과 화해의 정신적 메시지를 주었다. (한국아이닷컴 고광홍 기자, [김수환 추기경 영면] "서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경제한파에 지친 국민 가슴에 '따듯한 가르침' ⓒ 인터넷한국일보, 입력시간 : 2009/02/21 03:03:52)

 

* 아마도, '사랑이란, 너무나 소중해서 혼자서만 가슴 속에 꼭꼭 묻어두고 곱게 간직하다가 죽을 때 쯤 장기 기증 등으로나 증명해 보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으나 사는 게 아닌 소외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옆에서, 설령 별 뽀족히 해줄수 있는 게 없더라도, 함께 손 잡고 있어주고, 때로는 투쟁으로 실천으로 쟁취해가는 과정을 일컫는다'는 것이 고인의 가르침이 아닐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6억euro, 부족하다, 3월 19일 다시 보자!

우리 민주노총은 죽 쑤고 욕 먹고 깨지느라 바빠서, 무능하고 사악한 정부에 맞서 싸우기는 커녕 협상의 대상도 못 되는 참담한 처지에 있는데, 멀리 프랑스에서는 아래 사진에서 처럼 대통령과 노동자 대표단이 2월 18일 마주앉아 4시간 동안의 밀고 당기는 치열한 협상을 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는 사르코지가 TV 저녁 뉴스에 직접 나와서, 실업자 등의 경제위기 피해자들을 위한 26억 유로(4조7000억원)를 풀겠다고 발표했고, 이 금액은, 아래의 기사에 의하면, 지난주까지만 해도 14억 유로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노동계에서 '택도없다'고 화를 한 번 내니까 근 2배로 부풀린 대책자금이라는데, 26억에 대한 노동단체들의 반응은 '그래도 부족하다'로 모아지는 모양이다. 다시 3월 19일 '검은 목요일' 거리에서 만나잔다. (부럽다!)

Nicolas Sarkozy a reçu les partenaires sociaux à l'Elysée, le 18 février.Nicolas Sarkozy, le 9 février.

AFP/REMY DE LA MAUVINIERE / Nicolas Sarkozy a reçu les partenaires sociaux à l'Elysée, le 18 février.

 

'검은 목요일'이라고, 주지하다시피, 지난달 1월 29일 목요일 프랑스 전역에 걸쳐 250만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근 20년만에 처음으로 일반 봉급쟁이들이 거리로 나섰다는 소식이 있었다 (cf. http://blog.jinbo.net/radix/?pid=71). 그리고 그 결실이 26억 유로라는 대책자금으로 나타난 것이고, 대책자금의 구체적 용도는, 아래 기사에 의하면, 실업자들에게는 받던 월급의 75%와 특별수당을 지급하고, 초임들의 세금을 감면하고, 300만 가족에 신학기 보조금으로 150유로씩 지급하고, 등등의 내용이 있으나, 이런 것까지 우리가 알 필요는 없겠고,  중요한 것은 노동단체가 어떻게 정부를 압박하고 요리하느냐 하는 것이겠다. 노동자와 그 단체가 갖는 권리와 힘이라는 게 결국은 파업과 거리시위 밖에는 없으니, 다시금 3월 19일의 검은 목요일을 기대해 본다. 그런 내용을 담은 맨 밑의 기사에 의하면, 3월 19일로 예정된 전면파업은, 사르코지의 26억 제안에도 불구하고, 거의 실행될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한 것은 다음주 월요일 노동단체 대표들이 만나 결정하겠다 함.  

경제는 만국공통어인지 이 나라의 노동단체 대표들이 하는 얘기도 우리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위기의 세계경제 속에서 국가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마당에 정부금고 털어서 보너스 몇 푼 더 받자고 이 짓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숨죽인 경제를 살리려면 얼어붙은 구매력을 풀어줘야 할 것이고, 떨고있는 실업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물론 35시간 폐지(일 많이 하고 돈 많이 벌라는 자유!), 각종 민영화 정책, 공공근로자 축소 등, 그동안 사르코지가 취한 일련의 미국식(알다시피 부시의 가장 친한 친구는 mb와 사르코지고, 이놈은 대놓고 지가 가장 좋아하는 시스템이 미국이라 했었다니..) 경제정책들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숨어있다. 이런 속사정에 바탕하여 바라보는 부시똘마니와 노동자 간의 투쟁이 흥미로운 것이지, '검은 목요일'에 범람할 '붉은깃발'에 대한 향수때문에 3월 19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Sommet social : "Que du baratin" ? LEMONDE.FR | 18.02.09 | 17h23  •  Mis à jour le 18.02.09 | 17h23
Durée : 1:55  |  Images : TF1, France 2, France 3, iTélé, LCI, BFM-TV

Revue de presse quotidienne des JT de la mi-journée.

 

Sommet social : 2,6 milliards d'euros pour les classes moyennes
LEMONDE.FR avec AFP | 18.02.09 | 15h58  •  Mis à jour le 18.02.09 | 20h17   

L'Elysée a rendu publiques, mercredi 18 février, les mesures proposées par Nicolas Sarkozy lors de sa rencontre avec les organisations syndicales et patronales. L'ensemble de ces mesures atteint 2,6 milliards d'euros pour l'Etat, selon les chiffres de l'Elysée et en fonction des options retenues. Une enveloppe supérieure à la somme de 1,4 milliard évoquée le 5 février, jugée alors "nettement insuffisante" par les syndicalistes. L'augmentation de l'indemnisation des salariés au chômage partiel à 75 % du salaire brut. "Il n'est pas question dans mon esprit de vous demander de renégocier les accords que vous venez de signer. Je crois en revanche que nous pourrions procéder par voie de conventions ad hoc entre l'Etat et les branches ou des entreprises données, comme nous l'avons fait pour l'automobile", a précisé le président. Le taux d'indemnisation est actuellement de 60 % du salaire brut. Sur ce dossier, le chef de l'Etat a demandé aux partenaires sociaux s'ils étaient prêts à un accord Etat-Unedic pour partager les coûts. 

La création pour deux ans (2009-2010) d'un fonds d'investissement social doté de 2,5 à 3 milliards d'euros financé pour moitié par l'Etat et animé par une cellule de veille composée des ministres concernés et des partenaires sociaux. Cette idée avait été formulée par la CFDT, qui voulait qu'il soit doté de 5 à 7 milliards d'euros et financé par le paquet fiscal (loi TEPA). L'Elysée devrait privilégier un financement conjoint passant par l'Unedic et les fonds de la formation professionnelle. Une prime exceptionnelle de 500 euros  les chômeurs non indemnisés pouvant justifier de deux mois de travail. Cette prime devrait être entièrement financée par l'Etat. Son montant n'a pas été annoncé. La suppression d'une partie de l'impôt sur le revenu pour les personnes de la première tranche. Cette mesure prendrait la forme de l'élimination d'une partie de l'impôt sur le revenu pour les familles assujetties à la première tranche d'imposition. Elle se traduit par une suppression provisoire des deux tiers provisionnels restant à payer en 2009. La mesure concernerait 4 millions de ménages. Selon l'Elysée, cela représente un gain moyen par ménage de 200 euros. 

Une prime de 150 euros pour 3 millions de familles qui bénéficient aujourd'hui de l'allocation de rentrée scolaire. Cette mesure aurait "un coût total de 150 millions d'euros". La mise en place de "bons d'achat" de services à la personne de 200 euros, pour l'aide à domicile, la garde d'enfants, le soutien scolaire ou le ménage, à certaines personnes âgées dépendantes et à certains parents pour la garde d'enfants. Parmi les bénéficiaires possibles de cette mesure, le chef de l'Etat a notamment cité les "660 000 ménages bénéficiant de l'allocation personnalisée d'autonomie à domicile et qui ont besoin d'aide à la maison". Il a également ciblé "les 470 000 bénéficiaires du complément mode de garde gagnant moins de 43 000 euros par an, qui ont besoin d'aide pour faire garder leur enfant", "les 140 000 foyers qui ont un enfant handicapé" ou "les demandeurs d'emploi qui retrouvent du travail et ont besoin de solutions temporaires pour faire garder leurs enfants". L'encadrement des bonus des patrons lorsque leurs entreprises recourent à du chômage partiel ou décident un licenciement économique.  

 

Les syndicats veulent maintenir la pression sur l'Elysée
LEMONDE.FR avec AFP et Reuters | 18.02.09 | 20h04  •  Mis à jour le 18.02.09 | 20h36    

Les mesures proposées mercredi 18 février par Nicolas Sarkozy ne sont pas suffisantes pour répondre à la crise sociale, ont déclaré mercredi les dirigeants syndicaux, qui ont appelé à maintenir la pression sur le gouvernement. A la sortie de la table ronde de près de quatre heures organisée à l'Elysée, où le président français a annoncé des mesures sociales d'un coût de 2,6 milliards d'euros en faveur des ménages les plus modestes, la CFDT, FO et la CGT ont précisé que la journée de grèves et de manifestations prévue le 19 mars aurait bien lieu. Les syndicats doivent se revoir lundi pour déterminer les modalités de cette journée d'action.  

Pour le secrétaire général de la CGT, Bernard Thibaut, le président a annoncé "des mesures d'accompagnement social en direction d'un public qu'il considère comme le plus fragile", les classes moyennes. Or ces mesures "ne sont pas en mesure de faire sortir le pays de la crise, a-t-il estimé sur France 2, on cherche à rendre la situation plus acceptable, il faut une autre ambition politique". Qualifiant l'entretien de "tendu", le syndicaliste a fustigé l'attitude trop intransigeante à ses yeux du Medef. Il a ensuite comparé le chiffre de 2,6 milliards d'euros consentis par l'Elysée aux 8 milliards d'euros que coûtera l'exonération de la taxe professionnelle en faveur des entreprises : "Le Medef menait 8 milliards à zéro. Il mène aujourd'hui 8 milliards à 2,6", a-t-il souligné.  

"Face à la situation des salariés actuellement, les mesures gouvernementales annoncées sont insuffisantes", a déclaré à la presse le secrétaire général de la CFDT, François Chérèque. "Comme l'action syndicale commence à payer, la CFDT estime qu'il faut continuer de faire pression sur le gouvernement et sur le patronat pour aller jusqu'à un vrai changement de cap." "C'est beaucoup trop court et il y a des oublis", a renchéri le secrétaire général de Force ouvrière, Jean-Claude Mailly, qui a déploré une "fin de non-recevoir sur le smic et les négociations salariales de branches". S'il reconnaît quelques "avancées", le leader de FO estime que "ça bouge trop doucement" et qu'il faut donc "maintenir le 19 mars". La situation en Guadeloupe a largement été évoquée lors de cette rencontre. Afin de répondre à cette situation "inadmissible", Bernard Thibaut dit avoir demandé au chef de l'Etat une "initiative en faveur des salariés des DOM". Selon les syndicats, Nicolas Sarkozy doit annoncer jeudi matin des mesures politiques et sociales pour la Guadeloupe sur RFO.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바이바이~ 두바이

남의 불행을 내 기쁨의 원천으로 삼는 잔인함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용산과 삼성, 삼성과 두바이, 두바이와 첨단 금융자본주의의 표상, 등에서 연유된 것이라면, 내 '사악한 기쁨'이라도 약간은 용서가 되려나? 하여튼 '노통' 이래로 그렇게 본받아야 할 모델로 추앙됐던 유령같은 첨단자본주의의 지상낙원이라는 두바이에 이제는 유령이 횡행한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그래서 나는 기쁘다. '두바이' 하면 우리 입장에서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삼성이 첨단공법으로 짓고 있다는 무슨 엄청난 빌딩일텐데, 용산과 우리 노동자들의 피땀 빨아다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그쪽의 위험대비자금으로나 쓰이지 않았으면 다행이겠다. 삼성과 관련된 '남의 불행'  중 두 번째 것은, 지금 신문의 '가장많이본기사' 1등으로 올라와 있는 우리나라 일등기업 대빵의 장남 부부가 이혼소송 중이라는 소식인데, 재산분할 요청액이 5000억이라나 뭐라나... 뭐 이건 사적인 문제이니 더이상의 언급은 자제하는 게 도리겠지만, 단지 두바이 관련 글을 보다보니 연계돼서 일어난 나의 잡상이다. 이하 이제는 '유령의 도시'가 되고 있다는 두바이의 실상에 대한 실감나는 기사를 펌 한다. "바이바이~ 두바이" 라는데..., 나의 너무 섣부른 기쁨이 아니길 희망하면서...


외국인 떠나고…집값 폭락하고 ‘바이바이~ 두바이’
금융위기 직격탄 맞아 외국인 수십만명 이탈  
 
‘사막의 기적’으로 불리던 아랍에미리트 두바이가 ‘사막의 신기루’로 판명나고 있다. 5년째 두바이에 주재하고 있는 한 해운회사 직원은 최근 <한겨레>와 통화에서 최근 경기 침체의 풍경을 “요새 거리에 차가 없다”는 한마디로 묘사했다. 연중 내내 ‘러시아워’였던 두바이의 주요 도로가 한산해졌다는 것이다.

 

두바이에 차량이 줄어든 것은 전체 인구(137만)의 90%를 차지하는 외국인들이 떠나고 있는 까닭이다. 일자리를 잃은 외국인 수십만명이 이미 두바이를 뜬 것으로 추정된다. 취업비자로 체류하다가 실직하면 한달 안에 출국해야 한다. 지난달 현지 언론은 날마다 취업비자 1500여건이 취소되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최근에는 외국인 출국자들이 두바이공항에 버리고 간 차량이 3천대가 넘는다는 보도도 있었다. 금융과 관광, 부동산붐을 통해 급속히 덩치를 키운 두바이 경제는 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중동의 허브’라고 큰소리치던 두바이 시장도 인구가 줄면서 활력을 잃고 있다. 지난주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어두운 경제전망을 이유로 두바이 6대 국유회사들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고급 차량의 중고 가격은 한달 전보다 40% 떨어졌다. ‘인공섬 팜 주메이라가 가라앉고 있고, 그곳 호텔에는 바퀴벌레가 드글거린다’는 소문도 떠돈다.

 

두바이 경제를 급성장시킨 부동산 거품도 꺼졌다. 일부 지역 집값은 최근 두세달 사이 30% 이상 폭락한 것으로 나타난다. 주요 건축사업 몇십건은 아예 연기 또는 취소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8월 평방피트당 1200디람(약 45만원)을 호가하던 두바이의 건축비용(마감재 제외)은 이달 들어 최저 350디람으로 약 70% 폭락했다고 주간 <아라비안비즈니스>가 최근 전했다. 외국인이 떠나고 집값이 떨어지자 시장이 침체돼 다시 고용을 위협하는 악순환 속에서, “두바이는 유령도시처럼 보인다”고 <뉴욕 타임스>가 12일 전했다. 그러나 두바이 행정 당국은 현실을 덮으려 한다. 두바이의 위기를 전하려는 언론에 대해선 족쇄를 채우기 시작했다. 새 언론법은 ‘국가 경제나 명성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최고 100만디람(약 3억8천만원)의 벌금을 물릴 수 있도록 했다.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7대 토후국 중 ‘맏형’인 아부다비가 ‘동생’ 두바이의 몰락을 막기 위해 구제금융을 시도할 법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난 몇년간 두바이에 주도권을 뺏겼던 아부다비가 이 참에 중앙집권화를 통해 두바이를 발 아래 두려 할 것으로 내다본다. 두바이 정부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지난해(8%)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2.5% 이하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두바이는 인접한 걸프(페르시아만) 지역과는 달리 석유 생산량이 사실상 전무하며, 최근의 성장을 일구는 데 일조한 금융, 부동산 등 분야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김외현 기자 / 기사등록 : 2009-02-12 오후 07:16 ⓒ 한겨레)

 

Carte de localisation de Dubaï

دبي, Dubai-Dubayy-Dubaï-Doubaï

Dubaīy is one of the seven emirates and the most populous city of the United Arab Emirates (UA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Adieu la LCR, bonjour le NPA

Sous l'impulsion de son porte-parole, Olivier Besancenot, la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LCR) va donner naissance, les 6, 7 et 8 février, au Nouveau Parti anticapitaliste (NPA).Les porte-paroles de la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LCR) Olivier Besancenot (D) et Alain Krivine s'entretiennent, le 19 janvier 2006 à Saint-Denis, avant l'ouverture du 16e congrès de la LCR.

 

NPA (엔뻬아-반자유주의신당)의 탄생 

 

(1) 프랑스의 새로운 좌파정당 '엔뻬아-반자유주의신당'의 창당이 마무리됐다. 2월 5일 목요일 LCR(엘쎄에르-혁명적공산주의연대)의 해체식을 갖고, 금-토-일 3일간에 걸쳐 새로운 정당을 탄생시켰다. 확정된 당명에서 보듯이 당의 1차적 목표는 '반 자본주의 투쟁'이다. 이것을 제외한 어떤 자본주의 시스템에 종속된 각종 선거의 현실적 요청에도 굴하지 않겠다며, 사회당이나 기타 좌파 정당들과도 분명한 선을 그었다. 특히 프랑스공산당(PCF)과 얼마전에 새로 생긴 좌파정당(PG)의 선거나 운동의 공조에 대한 애원의 손길도 단호히 거부했다(註1). 작금에 불어닥친 '자본주의 위기'의 호기를 철저히 활용하며 프랑스공산당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좌파의 좌파'로 다시 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긴장과 의욕은 3200명에서 3배가 불어난 9200명의 엔뻬아 투철당원들(militants)의 모습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2)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에 함몰되어 그동안 수없이 사회당과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현실이고, 특히 프랑스공산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기존하는 자리 몇 석을 지켜내기위하여 사회당에 빌붙을 게 뻔한 상황에서, 이제 더는 그럴 시간도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엔뻬아는 확증한다. 이러한 엔뻬아의 '통치의지 상실적 행보'가 결국은 좌파의 정권획득 실패를 야기할 것이라고 사회당과 공산당은 우려와 경고를 늘어놓지만, 좌파의 실패는 우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정책적 차이를 노정하지 못했고 때로는 그들을 모방하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기꺼이 복무하는 정체성 상실적 행태를 갖는 사회당에 있다고 엔빼아는 답한다. 
(3) 그렇다면 엔뻬아의 상징이 된 브장스노가 과연 우파의 표상인 사르코지의 대적수가 될 수가 있으며 '사회당의 위험'으로 부상할 것인가? 이에 대해 우파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브장스노는 사르코지에 대적하는 좌파의 지휘자"이고 "사회당은 엔뻬아의 경향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고정표10~15%를 갖는 극우정당(FN-쟝-마리 르팽)이 사르코지 정당에 맥을 못 추고 침체일로(돈이 없어 당사를 싼 동네로 옮겼고 그 당사는 중국인이 인수했다는..)를 걷는 것을 극좌 정당과 사회당에 비교하며 엔뻬아의 대두에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빠리1대학의 유능한 정치 전문가인 레이노(Ph.Raynaud)라는 사람은 엔뻬아와 사회당의 관계는 사르코지와 르팽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르팽의 극우당은 아주 쉽게 '사악한 것'으로 국민적 동의가 이뤄지지만, 브장스노는 국민의 60%가 호감을 갖는* 선호인물이기 때문이며, 고로 사회당이 엔뻬아와의 연대 국면에서 져야할 위험은 전혀(pas du tout) 우파들의 것과는 다르다고 전문가는 설명한다. [* 여론조사에서 60%라고 나왔지만 사실상 공산주의나 좌파를 싫어하는 사람들조차도 브장스노를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서른도 되기 전부터 LCR 내의 정치고수들을 통해 철저하고 끈질긴 교육과 단련으로 관리돼 왔다는 말씀. 예컨데 상단 오른쪽 사진에서 처럼.]

(4) 그렇게 엔뻬아의 정체성은 자본주의의 거부와 사회당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요약된다. LCR이 기존에 지켜왔던 트로츠키주의와 그의 제4회 인터네셔날의 축을 탈피하여, 이제는 더 밑으로 민중 속으로 내려가서 함께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을 명시한다. 이러한 드러나는 변화는 그 지지자들의 바뀐 성향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줄어든 지식인 늘어난 반항자(révolté)'의 모습이 그것이다.

註1) 2월 10일자 레디앙에 엔뻬아가 "공산당 등과 선거연합"을 하기로 했다는 부제의 기사가 났기에, 나의 밑줄친 번역을 다시 확인해야만 했다. 기사 원문에 의하면, "애원을 단호히 거부한" 것은 아니고, 아직 결단을 못 해서 "일부러 말을 아끼는"(réticence)정도가 되겠으나, 공산당-사회당의 지방선거 연대 불가피성에 대한 엔뻬아의 비판 등의 전후 맥락을 참작하여 나는 '단호한 거부'로 옮겼던 것이다(좀 지나쳤지만 아주 틀린 건 아니라 그대로 둔다). 그래서 아래 기사 다음날(2/9) 나온 기사를 다시 살펴보니 이렇다: "몸값이 올라간 엔뻬아는 내년 6월 유럽의원선거에서 공산당-좌파정당과 연합전선을 짜자는 제안에 아예 문을 닫지는 않았다. 그러나 합의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아주 분명한 조건을 걸면서 문을 열어둔다는 것이다(조건:사회당과의 확실한 절연=공산당에는 불가능한 것)"[Liberation, lundi 09/02/2009 à 06h51//Sitôt né, le NPA enchérit à la gauche de la gauche/(...) Ainsi, le parti de Besancenot ne ferme pas la porte aux appels de Jean-Luc Mélenchon à participer à un front avec le Parti de gauche (PG) et le PCF au scrutin de juin, mais il pose des conditions très strictes, rendant peu probable un accord.] 한편 당명 결정 투표에서 '반자본주의신당'(NPA)이 6표(총580표 중) 차이로 예선에서 '혁명적반자본주의정당'(PAR)을 앞섰고, 결선에서는 53%의 득표로 당명으로 선정됐다 함. [Liberation, lundi 09/02/2009 à 06h51//Les pronostiqueurs ont frémi, samedi soir, lors du vote sur les propositions pour le nom du parti. Donné largement en tête, NPA (Nouveau parti anticapitaliste), d’abord choisi comme un sigle de travail, n’a devancé que de 6 voix (sur 580), au premier tour, le Parti anticapitaliste révolutionnaire (PAR). Il a finalement été adopté à 53 % des suffrages.]

.

Adieu la LCR, bonjour le NPA (Liberation, dimanche 8 fév. 19h43)

(1) Tout juste porté sur les fonts baptismaux lors d’un congrès de trois jours en Seine-Saint-Denis, le Nouveau parti anticapitaliste (NPA) d’Olivier Besancenot doit maintenant se faire sa place à la gauche de la gauche. Fort de ses 9.100 militants revendiqués (contre 3.200 à la LCR dissoute jeudi), le NPA, «le parti dont la gauche révolutionnaire a besoin au XXIe siècle» selon Olivier Besancenot, entend bien profiter de «l’échec du capitalisme» et du déclin du Parti communiste français (PCF).(...) Dans ce cadre, le NPA qui compte sur la popularité de son leader, a confirmé dimanche sa réticence à rejoindre le «front de gauche» proposé par le PCF et le Parti de Gauche de Jean-Luc Mélenchon. Selon lui, l’alliance serait ponctuelle, et le PCF rejoindrait le Parti socialiste «pour sauver ses élus» lors des régionales (2010). (...)
(2) Nombreux sont ceux qui, au PCF comme au PS, voient le NPA comme une «machine à faire perdre la gauche» qui «ne souhaite pas gouverner». «C’est le PS qui est une machine à perdre pour la gauche et il cherche à expliquer son échec par les autres», répond M. Krivine. Le NPA «polarise l’attention de beaucoup, peut-être que certains ont envie de nous utiliser», à gauche comme à droite, reconnaît-il. Mais déclare M. Besancenot, «on n'est les marionnettes de personne».
(3) Ainsi, Xavier Bertrand, secrétaire général de l’UMP a déclaré dimanche que le postier de Neuilly était «devenu quasiment le chef d’orchestre de l’opposition à Nicolas Sarkozy» et que le PS avait «tendance à courir après l’extrême gauche», lors de l’émission «Le grand rendez-vous Europe1-Aujourd’hui en France». Alors, le NPA est-il un danger pour le PS? Philippe Raynaud, professeur de Sciences politiques à l’université Paris-II Panthéon-Assas, n’y croit pas. Pour lui, «le NPA ne sera pas pour le PS ce qu’était Jean-Marie Le Pen pour la droite». Le Front national est «facilement assimilé au diable» alors que «les gens ont plutôt de la sympathie pour Besancenot», deuxième personnalité politique préférée des Français (selon le baromètre annuel du JDD). Ainsi, «le type de danger que court le PS dans des alliances avec le NPA n’est pas du tout le même que celui que courait la droite», explique-t-il. (...) (Source AFP)

(4) LE MONDE | 04.02.09 | 13h17  •  Mis à jour le 05.02.09 | 15h36 // (...) Le NPA se veut donc un nouveau parti radical dont les deux identifiants sont "la rupture avec le capitalisme" et "l'indépendance totale vis-à-vis du PS". Avec une touche d'écologie, rebaptisée "écosocialisme". Finie la référence au trotskisme comme au communisme : le parti d'Olivier Besancenot ne sera plus affilié à la IVe internationale, fondée par Léon Trotski. Seuls les militants de la LCR resteront adhérents. "Nous avons pris la décision de faire le NPA par le bas, sans autre partenaire politique et nous avons réussi. Ce n'est pas une LCR bis", assure Pierre-François Grond, bras droit de M. Besancenot. Le changement est visible : le profil militant a changé ; plus révolté et moins "intello". Mais le positionnement idéologique comme l'essentiel de la structure organisationnelle demeurent ceux de la LCR. La ligne d'auto-affirmation et de démarcation vis-à-vis du PS - "la vraie gauche, c'est nous", ne cesse de clamer M. Besancenot - rappelle en effet les débuts de la Ligue communiste qui, avec ses comités Rouge, pensait capter seule "l'esprit de Mai" 1968.

 

 

cf.) 1. 브장스노 인터뷰 Vidéo: Avec le NPA, Besancenot veut "changer d'échelle" LEMONDE.FR | 05.02.09 | 11h37 

2. 버장스노 인터뷰(글): http://www.liberation.fr/politiques/0101317053-on-assume-une-part-d-utopie-car-la-gauche-ne-nous-fait-plus-rever

Durée : 1:38  |  Images : France Inter
La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LCR) va s'autodissoudre, jeudi 5 février. Elle renaîtra sous une nouvelle forme, le Nouveau parti anticapitaliste (NPA). Le porte-parole de la LCR, Olivier Besancenot, était l'invité de France Inter. Avec le NPA, il veut "écrire une nouvelle page" de l'extrême gauche en élargissant le mouvements aux militants qui ont "une autre histoire politique".  

3. 알랭 크리빈(상단 사진 오른쪽) 인터뷰(글): http://www.lemonde.fr/politique/article/2009/02/05/alain-krivine-il-n-est-pas-question-de-faire-du-npa-un-parti-fourre-tout_1151283_823448.html 

4. 버장스노의 참모진 9명의 사진과 이력: http://www.lemonde.fr/politique/portfolio/2009/02/04/npa-la-garde-rapprochee-de-besancenot_1150797_823448.html#ens_id=1143731

5. Lundi 9 février 2009, 07:46 Liberation Diaporama / Congrès du NPA: paroles de militants
http://www.liberation.fr/politiques/1101353-congres-du-npa-paroles-de-militants
Le Nouveau parti anticapitaliste est en congrès fondateur vendredi et samedi, après la dissolution de la LCR jeudi. Parole à sept militants, âgés de 25 à 60 ans, issus du PC, anciens de la Ligue, écolo, ou simplement nouveaux arrivants. (창당대회 현장에서 직접 들은 참석자들의 목소리: 25세의 젊은이에서 60세의 할머니까지, 처음으로 당활동에 참석하는 새식구 이거나, 구 공산당-녹색당 혹은 LCR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으나 이제는 엔뻬아 당원으로 다시 모인 7명의 모습과 목소리를 전하는 슬라이드 기사)

 

 

6. 사진으로 보는 LCR의 소사

http://www.lejdd.fr/dossier//politique/c-etait-la-lcr/l-heritiere.html#gallery (Le journal du dimanche 05 février 2009)
C'était la LCR... (그때 그곳에는 LCR이 있었다.)

L'héritière   1. L'héritière : Officiellement, l'acronyme LCR est né en 1974. Toutefois, le parti d'extrême gauche s'inscrit dans une longue lignée de mouvements trotskistes. Idéologiquement, ses racines plongent dans les thèses de la Quatrième internationale initiée en 1938 par le créateur de l'armée rouge, en réaction à la politique bureaucratique et répressive de Staline. Résolument tournée vers l'extérieur de l'URSS, l'organisation communiste agrège à elle une cinquantaine de groupuscules, dont, en France, la LCF, l'ancêtre de la LCR. [유산: 공식적으로 LCR은 1974년에 탄생했고 오랫동안 트로츠키 운동노선을 견지했다. 이 극좌파의 뿌리는 1938년의 제 4차 인터네셔날에 대고 있다. ...]

Mai-68, le tournant   2. Mai-68, le tournant : Les événements de Mai-68 ont entraîné une importante mutation pour la mouvance d'extrême gauche. Sitôt le calme revenu, deux organisations ayant pris une part importante dans les troubles qui ont agité le pays sont dissoutes par le pouvoir gaullien: le Parti communiste internationaliste (PCI) et la Jeuness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JCR). Interdits, les deux mouvements fusionnent alors en un seul: la Ligue communiste (LC). Figure marquante de Mai-68, le jeune Alain Krivine se présente à l'élection présidentielle de 1969. Il recueille un peu plus d'1% des voix. Toujours fidèle aux principes de la Quatrième internationale, la LC, en raison d'épisodes violents contre l'extrême droite, sera à son tour dissoute en juin 1973. L'année suivante, un nouveau parti est créé. Il est baptisé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LCR). [2. 68혁명과 격변: 68을 거치면서 국제공산당(PCI)과 혁명적공산주의청년단(JCR)이 해체 융합하면서 공산주의연대(LC)가 탄생하고, 젊은 알렝 크리빈이 연대의 대표로 69년 대선에 출마하여 1% 조금 넘는 표를 획득한다. 그리고는 1973년에 극우파와의 대결 국면을 거치면서 LC는 해체되고 이듬해에 새로운 당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혁명적공산주의자연대(LCR) 이다.

Les premiers pas   3. Les premiers pas : La création de la LCR marque, malgré des débats non tranchés sur l'utilisation de la violence ou sur la stratégie révolutionnaire à appliquer, la fin de la période «gauchiste» du mouvement. En 1974, de nouveau candidat à l'élection présidentielle, Alain Krivine, concurrencé par la néophyte Arlette Laguiller pour Lutte ouvrière (LO), plafonne à 0,36% des voix. Au tournant des années 80, alors que l'union de la gauche se profile, la LCR dénonce "la politique de division" du PCF. Empêché - en raison du seuil non atteint de 500 parrainages politiques - de présenter un candidat à la présidentielle de 1981, le mouvement trotskiste appellera à voter François Mitterrand au second tour. [4. LCR의 첫 걸음: 1974년 대선에서의 실패와 1981년 대선에서의 거듭된 좌절은 미테랑의 비판적 지지로 이어지고...]

1995, le renouveau   4. 1995, le renouveau : Après une longue traversée du désert au cours d'une période marquée par l'effondrement du communisme en Europe de l'Est, la LCR reprend du poil de la bête au milieu des années 1990. L'opposition de la rue à la réforme de la sécurité sociale initiée en 1995 par Alain Juppé permettra à l'organisation de peser à nouveau dans le débat public - notamment par la création d'associations proches des thèses de la LCR, comme le syndicat SUD ou l'organisation Agir contre le chômage. En 2002, et pour la première fois depuis 1974, la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est en mesure de présenter un candidat à la présidentielle de 2002. Il se nomme Olivier Besancenot. Il recueille 4,25 % des suffrages. [4. 1995년 다시 :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가 붕괴한 후, 1995년 미테랑이 죽고 우파정권이 들어서면서 동시에 불어닥친 반동적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은 95년 민중 대폭동을 불러왔다. 이 여세에 힘입어 다양한 좌파 동맹이 탄생하고, 급기야 LCR에서는 크리빈이 스스로의 자리를 28살의 청년 버장스에게 물려주는 결단으로 2002년 대선에서 4,25%라는 놀라운 득표를 일궈낸다.]

Besancenot, le héraut   5. Besancenot, le héraut : Adhérent à la LCR depuis 1991, Olivier Besancenot, 38 ans, en est devenu au fil des années sa principale figure médiatique. Le porte-parole de l'organisation s'est porté deux fois candidat à l'élection présidentielle. Il y a, à chaque fois, obtenu de très bons scores (4,25% en 2002 et 4,1% en 2007), permettant au parti trotskiste de revendiquer son leadership à la gauche de la gauche. Le facteur, qui officie à Neuilly-sur-Seine, le fief de Nicolas Sarkozy, a su séduire les médias et l'opinion grâce à sa gouaille et son discours direct. Couvé par Alain Krivine, Olivier Besancenot est programmé pour prendre les rênes du Nouveau parti anticapitaliste, un parti censé coller à l'image de son leader: plus ouvert, plus moderne, plus ancré dans les couches moyennes. [5. 영웅 버장스노: 200년에 이어 2007년 대선에서도 버장스노는 4,1%를 획득함으로써 명실공히 좌파(사회당 뺀)의 선두주자로 부상(기타 공산당과 노동자투쟁당은 1~2%의 득표력으로 명색만 유지). 애두르지 않는 달변과 능변으로 훈련되고(물론 크리빈 등의 고수들의 지도하에) 무장된 버장스노는 수많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장차 사르코지의 가장 강력하고 가능한 대적수로 우뚝 선다. 그리고는 지금 NPA(엔뻬아) 탄생의 중심에 그가 있다. 더 열리고, 더 현대적이고, 더 중산층에 닻을 대고 건설할 좌파의 진짜 좌파가 이제 NPA 다. (원문의 나이는 잘못됐음. 버장스노는 74년생이므로 34살)]

 Bensaïd, le penseur    6. Bensaïd, le penseur : Professeur de philosophie à Paris VIII, Daniel Bensaïd, 62 ans, est le théoricien de la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Militant à la Jeunesse communiste révolutionnaires (JCR) aux côtés d'Alain Krivine, il participe activement aux événements de Mai-68. En 1969, après la fusion entre la JCR et le Parti communiste internationaliste, ce tenant de la ligne "gauchiste" du mouvement entre au bureau politique de la Ligue communiste Depuis, il exerce son tutorat idéologique sur la LCR et sert notamment de référent à Olivier Besancenot. Il collabore également avec le périodique québécois La Gauche. Daniel Bensaïd est également membre de l'Institut International pour la Recherche et la Formation. [6. 사상가 벵사이드 : LCR의 핵심 이론가로서 브장스노에게 정치이론을 공급하는 투쟁의 주유소. ...]

Krivine, l'historique   7. Krivine, l'historique : Rompu au combat politique dans les différentes sections jeunesse du PCF, Alain Krivine, 67 ans, adhère au mouvement trotskiste en 1966. Cette année-là, il fonde la Jeuness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JCR), qui pourfend notamment la guerre au Vietnam et qui tiendra "le haut du pavé" en Mai-68. La JCR est dissoute en juin 1968 et Alain Krivine est emprisonné. En 1974, il prend une part active à la création de la LCR, dont il représentera les couleurs à l'élection présidentielle de 1974. Jusqu'à la dissolution du mouvement ce jeudi, il est resté, malgré sa démission du bureau politique en 2006, l'un des porte-paroles de la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Comme Daniel Bensaïd ou plus proche de lui, François Sabado, Alain Krivine est également le "mentor" d'Olivier Besancenot. [7. 역사적인 크리빈: 선임 당 지도자이자로서 브장스노를 단련하는 조련사.]

L'ombre Rouillan    8. L'ombre Rouillan : Jean-Marc Rouillan a fait un retour fracassant dans l'actualité au coeur de l'été 2008. Expliquant avoir rencontré Olivier Besancenot et lui avoir fait part de son intention d'adhérer au NPA, l'ancien militant d'Action directe a confié à L'Express ne pas regretter l'assassinat du P-DG de Renault, George Besse, tué en 1986. Il a également justifié la violence comme arme politique. Des propos qui lui ont valu un retour en prison et qui ont également terni l'image du porte-parole de la LCR. En effet, Olivier Besancenot ne s'est jamais résolu à condamner les déclarations de Rouillan, laissant ainsi planer le doute quant à ses réelles motivations politiques. [8. 그늘 속의 루이양: (덜 알려진 인물인데) 구 LCR에서 버장스노와 나란히 대변인을 맡았던 사람 (무슨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주체인 모양인데 나는 잘 모르겠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뤼마니떼' 지령 2만호 기념 PDF

 
Document PDF - 1.8 Mo
Téléchargez ici le cahier spécial de 16 pages. [뤼마니떼의 역사를 담은 16쪽의 PDF]
사각링크의 작동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한 주소: http://www.humanite.fr/IMG/pdf/Numero_20_001_de_l_Humanite.pdf

 

뤼마니떼(l'Humanite)가 지령 2만 호를 자축하는 기사와 그동안의 역사를 담은 16쪽 짜리 PDF를 만들어서 자랑하기에 기꺼이 받아 퍼온다. 1944년 쟝죠레스(Jean Jaurès)에 의해서 창간된 이래로,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전투적으로 프랑스 공산주의-사회주의의 역사를 대변한 세월이 55년이라는 말이다 (SFIO-1905; PCF-1920; PS-1969)*. 그동안 얼마나 전쟁을 반대했고 노동자-빈민의 편에서 외쳐댄 함성이 치열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가 아래에 간략히 소개돼 있으나 우리말로 옮기는 노력까지는 할 필요가 없을 듯하고, 링크된 PDF를 열어 사진으로 보면서 상상해도 어느정도는 충분할 듯하다.

* SFIO(국제노동자(연맹)프랑스분파)는 1905년에 창설되어 Jean Jaures, Paul Lafargue, Leon Blum 이 지도부를 형성한 공산당과 사회당이 분파 이전의 연합체.  1920년 뚜르-쌩삐에르데꼬(Tours, Saint-Pierre-des-Corps) 전당대회에서 프랑스공산당(PCF)이 분리 창당되고, 지금의 프랑스사회당(PS)는 1969년에 와서야 미테랑(Francois Mitterand, 1916~96(1981~95 대통령))에 의해서 만들어짐. (고로 68혁명 이전에는 사회당은 아직 없었고 공산당이 창궐하던 시기였으므로, 68 세대들의 공산주의적 취향이나 취미(!)가 반드시 순수하고 자발적이라기 보다는 시대조류에 편승한 경우도 많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음, 마치 우리의 386 처럼.) 지금은 뤼마니떼가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역할을 하는 반면 리베라씨옹(Liberation)은 사회당을 대변.

  

 

L’Humanité fête son 20 001e numéro !

Depuis 21 août 1944, date à laquelle le journal fondé par Jean Jaurès reparaissait officiellement après une longue période de clandestinité, l’Humanité a publié plus de 20 000 numéros.
L’Huma en culottes courtes, et après…

Samedi 17 janvier, il y a deux ou trois semaines, parmi des milliers de manifestants, des centaines et des centaines de personnes brandissent ou arborent la une de l’Humanité pour la paix en Palestine, l’arrêt des bombardements à Gaza. Hommes et femmes, celles-ci venues avec leurs enfants, poussant des landaus. Des centaines d’hommes et de femmes, d’ados qui découvrent qu’un journal peut être avec eux, méprisés et humiliés éprouvant dans la chair et l’âme la souffrance d’un peuple, et qui font, de la une de ce journal, l’expression de leur douleur et de leur combat. Dans l’immense manif de 2002 entre les deux tours de la présidentielle, Le Pen et Chirac restés seuls en course, la une de l’Huma, « Il faut lui barrer la route » était partout, comme elle l’avait été au moment du déclenchement de la guerre du Golfe : le photomontage d’une gamine avec sur la tempe comme une arme, un pistolet de pompe à essence. Des unes, seulement, éditées en affichettes. Peut-être des lecteurs en plus parfois et peut-être que non. _ Mais une certitude, en tout cas, l’Huma, ces jours-là, était là.

 

Combien de fois le journal fut-il censuré en ces années de guerre ?

L’Huma. Nos culottes courtes dans ces années, quand la France roulait en Dauphine si elle pouvait se payer une voiture, ou même en DS 19, nous faisaient ressembler à des gamins de Doisneau. On se souvient de cette photo dont il est l’auteur où un gosse d’une dizaine d’années tient l’Huma en main, en revenant de faire les courses sans doute. Eh bien c’était un peu comme cela à Cherbourg en ces temps où la radio annonçait que l’armée française, en Algérie, pacifiait les campagnes et portait des sacs de blé aux populations. Ce n’était pas encore le temps des cercueils mais c’était une chance, au fond, d’avoir des parents communistes. Du moins si l’on voulait savoir ce qui se passait vraiment. _ Et puis il y avait eu cette première vraie rencontre avec l’Huma un jour, en revenant de l’école. La une du journal pris en passant au bureau de tabac portait des rectangles blancs en place de plusieurs articles, et c’était juste écrit : « Censuré ». Quel jour était-ce ? Difficile maintenant de le savoir. Combien de fois le journal fut-il censuré en ces années de guerre, qui ne voulait pas dire son nom, mais que, lui, nommait ? Combien de fois totalement saisi ? Ainsi le 25 septembre 1956. Cette fois il ne parle même pas de la « pacification » à la mitraillette, de la torture comme il le fera souvent. Non, c’est simplement un éditorial qui est en cause, signé Léon Feix, demandant l’ouverture de négociations avec les représentants du peuple algérien. Mais cela, c’est déjà trop. Il n’y a pas, il ne peut pas y avoir pour le pays colonisateur de représentants du peuple algérien. Il faudra encore six ans et combien de morts, de disparus, de torturés et de corvées de bois, de noyés dans la Seine au soir du 17 octobre 1961, de morts à Charonne, pour conclure les accords d’Évian, avec les représentants du peuple algérien ?

 

L’Humanité est son journal qu’on vend au matin d’un dimanche quand on colle des affiches aux murs du lendemain.

Ouvrir l’Humanité des années cinquante, c’est aussi voyager dans le temps. Le temps retrouvé. Kubler sera l’homme à battre dans la montagne. Robic et Bobet sont les seuls qui puissent lui ravir la vedette. _ À moins que ce ne soit « l’ouvrier » Roger Walkowiak. La chronique « Une femme dans le Tour », le Tour de France bien sûr, mais on dit « le Tour », comme à l’époque on dit « le Partié », est signée Hélène Parmelin. C’est la compagne du peintre Édouard Pignon et tous deux sont des amis intimes de Pablo Picasso. Le journal publie une bande dessinée, les Trois Amours de Jean Cavalier, qui évoque la répression des protestants par les dragons au XVIIe siècle. Il publie aussi un roman américain qui s’appelle le courant souterrain . Il met en scène des ouvriers. « Quand j’étais dans l’équipe de jour, dit l’un d’eux, je faisais mon travail du Parti ». Bien sûr.
En 1950, la communiste américaine Bernadette Doyel n’a-t-elle pas obtenu 600 000 voix en Californie, ce que l’Huma salue comme une grande victoire vers le socialisme. Il y a des communistes partout dans le monde où rayonne pour tous les peuples l’exemple de l’URSS. On le croit. Le PCF est le premier parti de France. L’Humanité est son journal qu’on vend au matin d’un dimanche quand on colle des affiches aux murs du lendemain. Puis le temps est venu des amours, des pantalons à pattes d’éléphant et des chemises à fleurs.
Se souviennent-ils, ceux qui ne se réclament de Mai 68, que pour justifier leurs soumissions politiques d’aujourd’hui, du rôle de l’Humanité dans ce qui fut, bien au-delà des jets de pavés du Quartier latin, la plus grande grève de l’histoire. De l’appel à la grève générale aux constats de Grenelle avec, chaque jour, les listes qui ne faisaient que s’allonger des usines occupées, puis par la suite des acquis obtenus, branche par branche, quand un jeune ouvrier, payé 300 francs par mois, tout d’un coup, en gagnait 600 après trois semaines de grève, quand était enfin reconnue la section syndicale d’entreprise. La télé, la radio, la plupart des journaux ne voyaient que pavés et lacrymogènes. Il fallait bien lire l’Huma, si l’on voulait savoir ce qui se passait.

 

L’Histoire du XXe siècle ne fut pas un dîner de gala et l’Humanité n’a pas échappé à ses enfers.

Il y eut de grandes choses, mais il y en eut aussi de terribles, écrivait Aragon dans la nuit de Moscou. Car on ne sut pas toujours ce qui se passait, ce que la fidélité même du journal à ses combats l’empêchait de voir. L’Huma attaqué en 1956, lors de l’insurrection de Budapest par des émeutiers qui veulent incendier le journal, se défend avec panache. _ Mais pendant des semaines le journal se trompe ou s’aveugle sur la nature de ce qui se passe en Hongrie. Ce n’est pas une tentative de coup d’État fasciste mais une insurrection antistalinienne. En 1975, les Khmers rouges vident Phnom Penh en prélude à de terribles massacres. _ L’Huma rejette l’hypothèse d’un bain de sang. Le journal ne retient que l’agression américaine au Vietnam et au Cambodge… L’Histoire du XXe siècle ne fut pas un dîner de gala et l’Humanité n’a pas échappé à ses enfers. Le XXIe siècle s’annonce-t-il mieux ?

 

Chaque jour la mise en cause de l’exploitation, aux côtés des salariés.

Mais voilà 20 000 numéros… 20 001 exactement ! Avec chaque jour, oui, c’est un peu ça, la poursuite des combats de la veille et de nouveaux combats. Vietnam, Mandela, Cuba, Palestine. Antiracisme, soutien aux sans-papiers, lutte contre toutes les discriminations. _ Chaque jour la mise en cause de l’exploitation, aux côtés des salariés. Automobile, sidérurgie, petites entreprises, plus près de nous le CPE. Tant et tant de sujets de révolte, de colère, d’insurrection et puis, depuis des années, tant de sujets de débats, de confrontations, d’échanges d’opinions… Tant de clés aussi dans l’actualité de la crise, aujourd’hui, du capitalisme. Il y a deux semaines, le journal donnait la parole, à égalité, à tous les leaders de la gauche. La semaine passée, la parole à tous les leaders syndicaux.

Quel autre, aujourd’hui, veut construire, dans le rassemblement de toutes les forces de progrès et le respect des différences, une alternative, non seulement au sarkozysme, mais au capitalisme ? Quel autre, - à quel prix !… -, est toujours, comme l’avait voulu Jaurès, indépendant des puissances d’argent, et cela uniquement par la fidélité et le soutien de ses lecteurs ? Anciens, actifs, militants politiques et syndicalistes, altermondialistes, c’est à tous ceux-là que le journal d’aujourd’hui s’adresse en se tournant résolument en même temps vers les jeunes lecteurs. Ils étaient tout un groupe l’autre jour au journal. Le hasard a fait qu’ils découvrent, dans une salle de réunion, les pages ouvertes de ces journaux de la guerre d’Algérie et que revienne alors l’histoire, cette histoire. Les gamins d’aujourd’hui ne portent plus de culottes courtes, mais l’Humanité reste à écrire et à inventer. (Maurice Ulrich)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년만에 거리로 나선 프랑스 봉급쟁이들

1월 29일 목요일, 프랑스 전역에 걸쳐 250만명이 시위에 참석. 이날 모든 학교는 문을 닫았고, 근 20년만에 처음으로 일반 봉급쟁이들이 거리로 나섰다는 소식이다. 시위의 동인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금융위기의 여파에 따른 노동자들의 실업위기와 구매력 저하에 있다. 잘 나갈 때의 떡고물은 은행가놈들이 다 챙겨먹고, 이제와서는 힘들 때의 고통과 위험은 왜 노동자에게 떠넘기냐는 분노의 함성이 뜨겁다. 물론 엎친데 겹친 격으로 사르코지의 미국식 신자유주의 선호 정치에서 시작됐던 각종 민영화-자율화 조치로 학교와 우체국 등의 많은 공공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게된 마당에 찾아든 경제위기의 여파가 사람들은 거리로 불러낸 것이다. 이제 사르코지와 은행가(*관련기사추가)들이 한묶음으로 민중의 심판대에 놓이게 됐다는 얘긴데...... 아직은 사르코지에게 전혀 양보의 기미가 안 보이지만, 혁명의 기억 속에 사는 민중을 둔 사르코지는 결코 이명박이 될 수가 없겠기에, 결국은 민중이 승리하리라고 감히 점쳐본다.

.

À la une dans l'Humanité
29 janvier 2009 AUJOURD’HUI DANS L’HUMANITE
.
http://www.liberation.fr/greves [시위관련 전체기사 모음]
A Paris, Sarkozy et les banquiers dans le même panier (Récit) [Liberation, le 29 janv. 16h09, 21h41]
Plusieurs dizaines de milliers de manifestants, venus du public et du privé, ont défilé à Paris pour dénoncer leurs conditions de travail et la baisse du pouvoir d'achat. Ils témoignent. A Paris jeudi.

A Paris jeudi. (REUTERS)

 .
«Au moins, là, Sarko pourra pas dire qu'on remarque pas quand y a grève.» Il est 13h30 place de la Bastille, le ciel est bleu et, de fait, il y a du monde, comme le note ce lycéen occupé à coller un autocollant «rêve générale» sur le blouson de sa copine. En attendant le départ du cortège prévu à 14 heures, les merguez grillent, les terrasses de café font le plein et on peaufine les slogans – «trop de sécurité nuit à la santé», «le fond de l'air effraie», «sarkoland=précarité légalisée»... Venus à pied, en métro et RER – qui roulent plutôt bien pour un jour de grève –, vélo, voiture ou car, des milliers de manifestants affluent de tous les côtés. La liste est longue : profs, étudiants, infirmiers, postiers, gaziers, mais aussi salariés du privé, avocats, médecins, retraités, salariés de l'audiovisuel, collectifs d'handicapés, de sans-papiers, intermittents...
.
«Les profits ne sont jamais redistribués» Beaucoup sont venus pour ça : «Pour une fois, ce n'est pas privé contre public, tous les corps de métier sont représentés», souligne une jeune femme qui ne veut pas dire son nom, «trop peur d'être identifiée par (s)on patron». Salariée d'une «PME dans l'audiovisuel», elle est «fatiguée de voir que les profits ne sont jamais redistribués. Ma société a fait 12% de bénéfices l'année dernière et rien n'a bougé côté salaires». Elle s'est déclarée gréviste et a pris le premier RER. «C'est plutôt mal perçu par mes collègues et ma hiérarchie, je vais devoir rattraper ça d'une manière ou d'une autre, mais j'assume.» Ces deux standardistes d'une société de conseil s'attendent aussi à déguster : «On nous le fera payer d'une manière ou d'une autre, mais on n'a rien à perdre.» Elles «n'ont pas voulu se cacher derrière des RTT pour venir protester contre la baisse du pouvoir d'achat». «A 40 ans, on en a marre de vivre à découvert», soupire la première, bonnet et lunettes de soleil sur la tête.
.
«A la fin du mois, je n'ai plus rien» Plus loin, un groupe de blouses blanches se frayent un chemin. Parmi eux, Hassene, infirmier à l'hôpital de Draveil (Essonne) : «On est d'abord là contre la loi Bachelot qui, en regroupant les hôpitaux, va mener à la destruction de 30.000 emplois. 2000 ont déjà été supprimés en 2008.» Comme dans le reste de la fonction publique, c'est aussi, et surtout, la question des salaires et des conditions de travail qui mobilise. «Les salaires ne suivent pas l'inflation, les heures sup sont payées au lance-pierre... Du coup, le personnel se décourage et se tourne vers le privé.»
.
«Nos patients sont moins dangereux que Sarko ou Bachelot.» Pour rien au monde Olivier ne lâcherait sa pancarte (fabriquée à partir d’un vieux calendrier): «Cela résume parfaitement ce que pensent les soignants des services psychiatriques…» Olivier travaille depuis deux ans dans un hôpital de Créteil et se désole des coupes budgétaires. «Et surtout, du changement de mentalité qui va avec, imposé insidieusement par le ministère.» Un seul exemple: «Avant, on avait le temps de faire des activités manuelles aux vertus thérapeutiques avec nos patients, genre jardinage ou atelier bricolage. Désormais, le message c’est: contentez-vous de soigner avec des médicaments et de calmer les états de crises. Point barre.» Beaucoup de retraités sont présents. Guy, guichetier à la Poste durant 40 ans, est parti à la retraite il y a deux ans. «Mais avec la loi Fillon, j'ai dû travailler six mois de plus pour voir ma retraite amputée de cent euros par mois. Et comme ma mutuelle a augmenté, à la fin du mois, il ne me reste rien.» L'avenir de la Poste l'inquiète: «J'aimais mon métier, mais on manquait de plus en plus de personnel. Les trois dernières années, j'ai vraiment souffert de ne pas pouvoir servir les usagers comme on aurait dû».
.
«Je cherche juste mon cortège» En avançant vers la place de la République, les profs Rased ont ressorti leurs gilets fluo. Maîtres spécialisés dans l'accompagnement des élèves en difficulté, ils dénoncent les 3000 suppressions de postes dans leurs rangs et, plus largement, «tout un ensemble de mesures qui ne sont rien d'autre que des fausses économies»: la suppression du samedi matin en primaire, les évaluations en CM2, «qui portaient sur des points du programme qui n'avaient pas encore été abordés», la réforme des programmes du primaire, la «disparition programmée des IUFM»... Isabelle tourne sur deux écoles d'Athis-Mons: «Plus ça va et plus on se dit que ce gouvernement a entamé une casse systématique de l'éducation et de notre métier.» (...) Chacun tâche de rester derrière sa bannière, «histoire d’être un peu visible». (...) Simple observateur ? «Pas du tout, je suis manifestant, corrige-t-il, c’est juste que je cherche mon cortège», les enseignants syndiqués à Sud. A 24 ans, il a fait sa première rentrée dans l’Education nationale en septembre dernier. «Pour l’instant, ça va encore, je reste motivé. Mais bon, le moral de mes collègues est au plus bas avec toutes les suppressions de postes annoncées. Et puis ce n’est pas évident de travailler avec les profs contractuels qui changent d’établissement tout le temps : on ne peut construire aucun projet éducatif sur le long terme…» Fin de la conversation. A l’horizon, il entrevoit les bannières de son syndicat, «ouf».
.
«On a touché le fond, il faut creuser maintenant» Sur le bord du trottoir, Claude et ses «42 ans au service de l’Etat» regarde passer le cortège sagement, les mains dans le dos. Aujourd’hui retraité, il a fait toute sa carrière chez France Télécom. «Défendre le service public, enfin ce qu’il en reste», voilà ce qui l'a motivé à rejoindre cette grande manifestation. «Allez faire un tour dans la Creuse, et vous verrez que le service public n’existe pratiquement plus : les écoles ferment les unes après les autres. La Poste, on n’en parle même plus. Et si vous êtes malade, mieux vaut ne pas avoir peur des kilomètres !» A côté des traditionnels «Augmentation générale des salaires» ou «Sarko démission», on entend des slogans comme «On a touché le fond, il faut creuser maintenant», «du pognon, y’en a pour les banquiers, alors pourquoi pas pour les salariés». Ou encore «des coupes partout, des milliards pour les banquiers». Pour Claudine, militante CGT de la première heure, «c’est bien la première fois que les pancartes s’en prennent autant aux banquiers. Faut dire que la crise économique est le prétexte préféré du gouvernement pour justifier les suppressions de postes !» A peine a-t-elle fini sa phrase que la voilà partie dans une boulangerie, près de la place de la République. Il est 17 heures, la manifestation est loin d'être terminée. «Il est temps de prendre un petit goûter pour tenir le coup jusqu'au bout», sourit-elle un brownie à la main. (CORDÉLIA BONAL et MARIE PIQUEMAL)
.
.
(*) 이번 프랑스 시위와 바로 관련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위군중에게 분노의 한 대상인 은행가놈들이 벌이는 반 노동-민중적 작태는 국경을 초월하여 다르지 않겠기에, 미국발 흥미로운 관련 기사를 여기 추가해 둔다.
 
美 월가 경영진, 구제금융 받고도 '보너스 잔치'
파산 위기에 몰려 수천 억 달러의 구제금융이 투입된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업체들의 경영진이 지난해말 무려 200억 달러에 육박하는 보너스 잔치를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월스트리트 소재지인 뉴욕주가 29일(현지시간) 발표한 감사 결과에 따르면, 보너스 총액은 184억 달러(약 25조4000억원)에 달했다. 월가에 뿌려진 보너스는 가장 많았던 2007년의 329억달러보다는 대폭 감소한 것이지만 다우존스 지수가 1만 선을 넘어섰던 2004년과 비슷한 역대 6번째 수준이다. 게다가 지난해는 월가의 주요 금융업체들이 대규모 손실과 대량 감원 사태 속에 구제금융까지 받은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번 보너스 잔치는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는 것이다.
월가의 이런 행태에 미 정치권은 격노한 반응을 보였다. 우선 보고를 받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무책임의 극치이자, 부끄러운 짓"이라며 "모든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마당에 납세자들의 돈을 긴급 수혈 받은 금융기관들이 보너스 잔치를 벌인 것은 개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도드 미 상원 금융위원장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이 나눠가진 보너스를 환수하겠다"고 밝혔다. 도드 위원장은 "국민이 수 백억 달러에 달하는 보너스를 떠맡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모든 가능한 법률적 수단을 찾아보고 있으며 이 돈이 반드시 국민에게 되돌려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조 바이든 부통령은 "보너스 잔치를 벌인 사람들을 감옥에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라며 맹비난했다. 월가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의 강경한 태도로 볼 때 금융업체 경영진들이 누려온 보너스 관행에 제동을 거는 입법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승선 기자/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01-30 오후 5:40:4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