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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모도티에 대하여

   어제 책 몇 권을 사기 위해 간만에 광화문까지 '행차'했다가, 체게바라의 평전이 불티나게 팔리는 모습을 보고는 문득 프리다칼로가 생각났다. 왜 체게바라의 평전이 잘 팔리는 모습과 프리다 칼로가 연상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체게바라의 평전을 집어들면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주인공으로서 체게바라를 연상시키는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게 나에게는 영화라는 주제로 전이되어서 프리다가 연상되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예술스포츠 코너로 발을 돌렸다. 내가 처음 집어든 책은 "프리다칼로,나혜석,까미유 끌로델"이란 책이었는데,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그늘에 가려졌던 그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었던 것 같다.
 
 프리다의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또 다시 문득 생각났던 건 '티나모도티'란 여성이었다. 티나 모도티라는 이름은 나에게 영화 속에서 프리다와 함께 춤을 추던 "애슐리 쥬드"의 모습이 전부였다. 멋들어지게 춤추는 셀마 헤이엑과 애슐리 쥬드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의 혁명적분위기에 같이 심취했고, 그녀들의 당당한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이 강하게 내 뇌리에 박혔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우연한 기회로 "티나 모도티"라는 두꺼운 책이 해냄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을 알고, 읽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프리다칼로, 나혜석, 까미유 끌로델"을 묶어 놓은 책의 의도를 보며, 여기에 한 명. "티나 모도티" 역시 추가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녀의 사진집을 찾았다.
 
  
              Diego Rivera and Frida Kahlo in the May Day march
       <티나 모도티가 찍은 프리다 칼로, 리베라 디에고; 1929년 메이데이>

 

■사진을 볼 수 있는 사이트

 티나모도티   http://cinemarx.cafe24.com/tina/main.htm

 

 

 

티나 모도티
- 글:홍미선(월간 한국사진 98년 3월호) -

 

Photo of Tina taken by Weston티나 모도티는 이태리 태생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미국 서부로 이민을 떠난다. 그곳에서 재봉일부터 시작하여 연극배우, 필름배우의 직업을 가졌었고, 예술가,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화적 소양을 쌓게 된다. 그러던 중 미국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톤(Edward Weston)을 만나 연인이 되었으며, 멕시코에서 그의 조수로 일하면서 사진을 시작한다. 멕시코에서 그녀는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였고, 후에 정치적 문제로 멕시코에서 추방당하여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도피하게 된다. 러시아에 정착한 그녀는 스탈린의 비밀 경찰로 활약하며 프랑스, 스페인 등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다가 결국 멕시코의 한 택시 안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가 사진 작가로서 부각되지 못하였던 것은 다음의 여러 이유에서이다. 먼저 매력적인 여배우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였으며, 종종 그녀 자신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모델로 등장하였다. 또한 그녀는 사진의 대표적인 무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멕시코에서 활동하였다. 모도티의 정치적 경력들은 그녀를 행동주의자로 인식되게 하였으며, 그녀의 작품 또한 사회주의 성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사진의 대가인 에드워드 웨스톤의 명성에 묻혀 사진작가로서라기 보다는 웨스톤의 아름다운 연인 또는 그의 조수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그러나 모도티의 작품들은 그녀가 추구하였던 사회주의의 이상을 내용으로 하면서, 당시 사진의 국제적인 흐름이던 형식주의(Formalism)를 간결하고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어 근래에 이르러 미학적으로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대부분 1923~30년 동안 모도티가 멕시코에 거주할 때 제작되었으며, 약 250컷의 이미지가 있다. 비록 그 기간이 7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기는 멕시코에서 사회의 깊은 변화와 함께 예술의 풍성함을 맞이하였던 특별한 시기로 알려져 있다. 1920~30년대 사이 멕시코의 많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고대 인디언들의 대중적인 전통을 회복시키면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 당시 멕시코에는 정치적이거나 문화적인 문제로 추방당한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Mexican Folkways Vol.5(1929)모도티는 이렇듯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녀는 멕시코의 위대한 벽화가인 리베라(Rivera) 등의 작가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1927~30년 사이 "멕시코 민습"(Mexican Folkways : 1925~1937년간 스페인어, 영어로 발간된 계간지)의 편집인으로서 사진을 담당하였다. "멕시코 민습"은 예술가, 작가들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던 정기간행물로, 이상적인 혁명을 추구하며, 사회주의 선전을 목표로 하였다. 모도티는 멕시코인들의 모습, 고유민속 등의 사진을 기고하였으며, 작품들 중 마른 옥수수, 탄약대, 낫으로 장식된 정물 사진은 그녀의 혁명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모도티는 멕시코에서 공산주의를 접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이상을 사진 매체를 통하여 모더니즘 어법으로 성공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녀의 사진들은 인물, 정물, 노동자들, 민속예술, 거리풍경, 건축들, 꽃과 식물 등의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모도티는 사진을 '사진적 질'(Photographic Quality)에 가치가 있으며, 시대를 기록하는 가장 감동적이고도 직접적인 도구라고 생각했다. 즉 이는 모도티에게 있어서 예술이 혁명적일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녀는 자신의 작업들을 마르크스주의(Marxism)의 관념에 놓았다. 그녀의 첫번째 개인전은1929년 12월 3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렸는데, 전시회 개막일에 "사진, 그리고 새로운 감각"이라는 연설과 함께 혁명가가 불려졌다고 한다. 전시기간 중에는 노동자들이 볼 수 있도록 관람시간이 특별히 배려되었고, 전시 마지막에는 그녀의 작품이 정치예술임을 의미하는 "멕시코 최초의 혁명적 사진전"이라는 제목의 연설이 진행되었다. 신문들은 그녀의 정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들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었고, 모도티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개인전이 끝난지 6주후 그녀가 감금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새롭게 떠오르는 대통령 후보의 반대세력에 의해 그녀는 멕시코에서 추방되어 독일로 가게 된다. 독일에서 그녀는 쾨테 콜비츠(Kothe Kollwitz), 게오르그 그로츠(Georg Grosz) 등의 유명한 화가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신문 에이전시 회원이 되어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독일은 나치즘과 파시즘이 확산되어 더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다. 모도티는 1930년 10월 모스크바로 다시 떠나게 된다. 그 당시 러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유토피아니즘(utopianism)은 무척이나 희망적인 것이었으나, 스탈린 체제 하에 들어서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제한을 받고 정치적인 선전을 해야 했다. 모도티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이상과 화합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진을 그만두게 된다. 또한 베를린과 모스크바에서는 멕시코에서처럼 사진찍기에 좋은 강렬한 태양빛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사진을 그만둔 후, 그녀의 멕시코 작품들은 국게적인 전시에 초대되었으며, 그 당시 한 비평가는 그녀의 사진을 "새로운 눈, 새로운 구성, 새로운 의식"이라고 평했다.

   1942년 그녀가 죽은 후 멕시코에서 소규모의 추모 전시가 열렸고, 이것을 끝으로 그녀의 작품들은 긴 휴식을 갖는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그녀의 고향, 이태리 우딘(Udine)에서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주의자 편에 가담했던 시민들을 기리는 행사가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이 과정에서 모도티의 경력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우연한 계기를 통해 알려진 그녀의 작품들은 예술계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고, 시대의 정신을 독특한 형식으로 담고 있어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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