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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련,임화. 그리고 이귀례

지하련과 임화, 그리고 이귀례.

 어제 티나 모도티에 대해 읽으면서, 남편의 그늘에 가리워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할 뻔한 여성 한 명이 또 생각났다. 지하련. 본명은 이현욱. 1940년대에 빛을 발하다가 월북한 작가로 비운의 여류작가로 분류되는 또 한 명의 문인이다. 지하련은 그녀의 필명보다 시인이자 평론가이며 좌익문단의 선봉장이었던 '임화의 아내'로 더욱 유명했다. 오늘은 지하련 전집을 손에 넣게 된 까닭에 그녀의 삶과 작품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대다수의 월북 작가들에 대한 연구가 현저하게 부족한 까닭에 임화를 비롯해서 지하련에 대해 정확하게 연구된 내용이 많지 않다. 설령 있다하더라도 '확인되지 않았다'가 주류적 표현이다. 그래서 지하련의 경우에도 전집에 나온 후에야 본명이 '이숙희'일 것이라는 사실과 그녀의 출생에 대해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점, 하지만 부친이 사회주의자이었을 것이며, 여기에 지하련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내용 등이 첨부되어 설명될 수 있겠다. 여기에서 한 가지 전집을 읽다가 임화의 첫번째 부인(지하련은 임화가 재혼한 두번째 부인이다)인 이귀례에 대한 자료를 찾았는데, 내용이 색다른 시각이기에 덧붙여 놓는다.


      

           지하련(왼쪽),          최정희와 지하련(최정희 왼쪽, 지하련 오른쪽)'

 

  

 



지하련을 만나다.

  지하련은 "도정"이라는 작품이 가장 잘 알려진 편이다. 소설 '도정'은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정한 1946년도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소설부문 추천작품으로 이태준의 "해방전후"와 최종 경선까지 올라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이태준은 조선의 모파상이라고 불리 정도로 간결하면서도 치밀한 표현을 했다고 평가되는 월북작가이다.) 당시 조선문단은 좌익진영과 우익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시기인데, 8.15이후 임화는 김남천 등과 함께 1)봉건잔재의 청산  2)일제잔재의 소탕  3) 국수주의의 배격이란 과제 아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고 '문학가동맹'결성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좌익 문단의 헤게모니를 쥐어왔다. 물론 지하련의 '도정'을 평가하는 우익진영의 내용은 혹독했는데, 김동리가 당시 지하련의 작품에 대해 '지하련의 소설은 리얼리즘을 닮으려다가 알뜰한 인생을 잃었다고'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 문단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도정은 정치.사회소설로 장안파 공산당의 재건을 박헌영의 시각에서 희화화(戱畵化)한 줄거리를 복선에 깔고, 주인공 석재가 해방 전후에서 한갖 소시민이기를 거부하며 새 시대의 일꾼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내용이다. 물론 내가 지하련의 소설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도정'에 나타난 인물의 전형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그녀의 등단 초기 '결별','산길','가을'을 중심으로 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분류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도정'의 내용은 간략하게 다루려고 한다. 그럼에도 잠깐 소시민의식을 떨쳐버리려는 주인공의 표현으로 '도정'의 내용을 따오면,이렇다.

 

  괴물-공산당- 생각하면 긴 동안을 그는 이 괴물로 하여 괴로웠고, 노여웠는지도 모른다. 괴물은 무서운 것이었다. 때로 억척같고, 잔인하여 어느 곳에 따뜻한 피가 흘러 숨을 쉬고 사는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러나 귀 막고 눈 막고 그대로 절망하면 그 뿐이라고 결심할 때에도 결코 이 괴물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었다. 괴물은 칠같이 어두운 밤에도 단 하나의 "옳은 것"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옳다는-이 어디까지 정확한 보편적 "진리"는 나쁘다는-어디까지 애매한 윤리적인 가책과 더불어 오랜 동안 그에겐 커다란 한 개 고민이었던 것이었다."

 

 '결별','산길','가을'

 지하련의 데뷔작인 '결별'은 '백철'의 호평을 받으면서 등단에 성공했다. 이 중 두 작품(결별, 산길)은 모두 결혼한 여성이 주인공이고, '가을'은 남편의 시각에서 서술된 글인데, 연달아 읽고 나면 마치 1920-30년대 결혼한 어느 여성의 자아정체성이 점점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결별'은 주인공 '형예'가 지난 밤 남편의 시덥잖은 우쭐댐에 '딴지'를 걸면서 티격태격 싸우고는, 다음날 자유연애로 시인과 뒤늦게 결혼한 친구 '정희'를 찾아가게 된다. 정희와 이야기하는 내용과 소설 중간중간 당황스럽게 정희의 신랑과 형예가 눈이 마주친 일들은 아마도 당시 분위기상 '안해'(아내)의 태도로 보기엔 '부도덕'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이었나 보다. 형예는 정희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외롭다고 느꼈고, 이것이 자신이 더 이상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집에 돌아와 남편이 추궁하는 듯한 질문과 자신의 반기에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남편의 모습에, 형예는 갑자기 고독을 느끼며 드디어는 완전히 혼자인 것을 깨닫는다며 끝을 맺는다.

   

   "아-니, 넌 신랑한테 이기냐, 지냔 말이다"

  형예는, 정희의 언제나 버릇으로, 앞도 뒤도 없이 톡 잘라 내놓는 말이라든가, 어린애같은 그 표정이 우습다기보다도 어쩐지.

   '결국 끝에 가선 저희 신랑얘기를 할게다!'

 하는 생각이 들자, ....(중략)....

   "그래, 난 잘 모르니 너부터 말해보렴-"하고 정희를 본다.

   "깍쟁이 같으니, 그래 난 지는 게 좋다.

   "그럼 되우는(?) 좋아하는 게지-"

   "그래, 좋아하기도 해. 하지만 그보다도 이기고 보면 영 습쓸할 것 같고, 허전할 것 같아서    그런다,너-"

  정희는 눈썹을 째긋이 하고 아주 진실하다.

    "그럼 행복이란 널 위해서 준비됐게?"

    "아이, 남의 말을"

  하고 정희는 때리려는 시늉을 한다.

    "아니고 뭐냐, 좋아해서 지고 싶고, 지면 만족하고, 설사 그곳에 어떤 희생이 있대도 즐겨 희생하는 곳엔 고통이 없는 법 아냐?"

    "너 왜 이렇게 막 뻐기니, 무섭다 얘 관두자"

                                           -지하련, '결별' 중에서, 현역은 여우비

 

 

   '결별'에서 지하련은 자유연애에 대해 긍정적이게 표현하고 있는데, 중매로 결혼한 형예의 불안정한 결혼생활의 모습과 대비되는 정희의 행복하게 표현되는 삶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오히려 이 소설이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그려진 것이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연애관 때문이 아니라 지하련이 형예의 감정을 통해 표현하는 부부 생활에 있어서의 불만감이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속에서는 지하련의 모습이 정희에게 투영된 것 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형예의 감정과 말들이 오히려 지하련의 숨은 의도를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말이다.

 

   '산길'은 '순재'라는 여성이 남편과 자신의 친구인 연희가 자신 몰래 만나왔다는 사실을 다른 친구인 '문주'로부터 듣게 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연희는 순재에게 먼저 만나자고 이야기를 한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 놓고 누구의 형상이 흉 없는가 한번 바라다보십시오.

     내 모양이 사뭇 고약할테니"

    연희는 여전히 같은 태도로 말한다.

    "아내란 훨씬 늙고 파렵치한 겁니다. 더 자랑을 가지세요!"

   순재는 결국 그 노염을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엔 없었으나, 말이 멎자 연희의 표정없는 얼굴이

 무엇엔지 격노하고 있는 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과연 모를 일이다. 이제 막 순재가 한 말은 순재로서 대단히 하기 어려웠던 말일뿐 아니라 또 어느 의미로 보아선 정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희와 순재의 대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은 이미 집에 돌아와있다. 연희를 만나고 온 사실을 안 남편은 기가 막히게도 이렇게 말한다.

 

 "사과 할 길 밖에 도리없다는 사람을 가지고 왜 자꾸 야단이요? 왜 따지려구만 드오. 따져서는 뭘 하자는 거요? 당신 날 사랑한다는 것 거짓말 아니요? 왜 무조건 용서할 수 없오?"

라더니 끝내는

"내가 만일 무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 덕택일거요. 하지만 이것보다도 다른 사람들 같으면 몇 달을 두고 법석을 할텐데, 우리는 단 몇 시간에 능히 화해할 수 있지 않소"

 

이런 말에 지하련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평화란 이런 데로부터 오는 것인가? 평화해야만 하는 부부 생활이란 이런 데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라고...

 

그리고 나선 '가을'에선 석재와 석재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친구인 정혜와의 관계 속에서 실은 남편의 무관심한 태도와 배려하지 않는 것이 문제임을 은연 중에 제시하며, 석재의 시각으로 소설이 진행되면서 끝에서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문제인식을 갖게 되는 내용을 끝을 맺는다.

 

 지하련의 작품에 대한 대다수의 평론이 그녀를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서술했다고 평가를 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그녀가 임화와의 관계에서부터 겪게 되는 부부관계에서의 갈등, 그리고 이것이 그 전까지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무조건적인 순응과 인내를 '거부'하는 지하련의 삶의 태도로 평가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화와 지하련>

 

 잘생긴 외모만큼 많은 여성들의 흠모를 받았다던 '임화'와 그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을 지하련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떠돈다. 훗날 백철의 회고에서 1937년 여름, 어떤 출판기념회에서 알게 된 B라는 여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나중에 지하련으로부터 그 여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전한다. 백철은 이현욱이 현재 남편과 맞지 않아 이혼을 선언하다시피 하고 본가에 와 있다고 했는데, 어느 날 이현욱에게 B에 대한 이야길 했더니 B가 임화에게 반해있는 여자란 것을 왜 못알아차리면서 나무라듯이 일러주더란 것이다.

 

  '임화'는 배우로도 활약하면서 시와 평론을 썼던 문인이다. 시보다는 평론이 더 평가를 받는 편인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해방 전후 시기와는 달리 해방 이후 임화의 행적은 묘연한 부분이 많다. 특히 월북이후의 사망 연도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확연치가 않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임화의 전성시대는 예상보다 짧았는데, 이른 바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이 빚어진 1946년까지만 해도 자신이 '위대한 시대의 어구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7년 박세영, 이기영, 이태준 등 동료들의 발빠른 월북이 남같지 않음을 깨닫고 10월 쫓기듯 월북한다. 월북 이후 임화는 반동분자로 숙청되었다고 전해지고 있고 153년 8월 6일 죽었다고 하거나, 그보다 2년 뒤 박헌영의 재판의 증인으로 이용되고 난 뒤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이귀례에 대하여

  임화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그의 첫번째 부인인 이귀례에 대한 내용도 약간 언급되었는데, 평소에 알려지기로는 이귀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으며 임화와 1934년 이혼했다라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더 알려진 것으로는 이귀례는 당시 동경에서 잡지 "무산자"를 주재하던 이북만의 누이동생이었고, 1930년 12월부터 동거상태로 들어갔다가 1931년 봄 귀국하면서 혜화동에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당시 도일했던 시기는 임화가 22세, 이귀례가 17살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이귀례를 탐방해 온 기자가 결혼식이 없었던 것에 대해 묻자 이귀례는

"프롤레타리아 입장에서 결혼식이란 형식적 허례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견지에서 그만두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인습상, 그리고 여자로 다소 섭섭하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러한 생각은 절대 없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중산계급 이상에서 생각할 문제겠지요.

우리는 남녀의 결합보다 동지와 동지의 굳은 악수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의 파경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는 임화가 첫째 부인을 버리고 재혼한 것으로 이해되었는데(당시 문인들 중 조혼풍습으로 부인과 이혼하고 자유연애로 신여성과 재혼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그게 아니라 카프 검거사건 이후 임화가 전향하자 '열성맹원'이었던 이귀례가 실망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냐는 해석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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