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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내일 모레 그 녀석과 약속을 잡았다.

  말년 휴가때 한 번 본 것 말고는 군대가기 전이나 후나 본 적이 없으니, 대학교 때 몇 년을 붙어다닌 사이치고는 꽤 시기를 두고 만나는 셈이다. 원래 계획은 면회(?)도 가주고, 선물이나 편지도 가끔 보내줄 생각이었지만, 늘 그러하듯 생각은 생각에서 멈추는 스탈.

  이 녀석에게   제대 하기 전.  계획했던 편지 한 통을 부쳐주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발목을 끄는 귀차니즘 때문이다. 두 블럭 떨어진 우체국까지 가서 우표를 사기가 힘이 들었던거다. 그래서 이 편지는 내 방 책상 서랍 속에 고히 모셔진 채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어버렸다.  (사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이거 말고도 또 있다.)

 

 'F4' 에게 "삼십"으로 통하는 그 녀석에게 줄 이 편지를 얘기 하려면, 말 많고 탈 많았던 옛 기억으로 돌아가야한다.

 

 

내 기억은.

 삼십에 대한 내 기억은 내 운동의 시작과 맞물려 있어서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학생운동을 처음으로 나와 관련지어 생각했던 때. 그 때로 돌아간다.

다른 운동세력은 거의 전멸하고, 민족주의 세력만 몇몇 과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때,

캠 좌파라는 이름으로 나와 내 동기는 혈혈단신으로 단대 선거에 출마했다.

캠 내에서 그나마 확고한 역사를 가진 세력과 힘 겨루기는 지는 것이 뻔한 승부였다.

 

그래도 우린 의미를 가지고 활동했었고, 승부는 졌지만 꽤 유의미했다고 지금도 평가한다.

물론 이 때의 체험은 나나 내 동기나  '대중운동 경험의 부재'라는 원체험으로 작용해 이후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한 편으로 압박해 올 때도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현재를 다잡을 수 있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기까지의 과정은.

사실 쉽지 않았는데, 이건 내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거다.

  

2000년대의 대학생활.

취업을 위해 토플 책을 끼고 살아야하고,

너 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해야 살아남는다고 강요하는 환경이 지배적이기 시작한

그 틈에서 살아온 나의 이야기이다.




옛날 기억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불어'에서 '국어'로 전공을 바꿨다. 여러 요인이 작용하긴 했는데,

직접적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얻은게 있으면 잃는 게 인생사.

내 경우엔 '사람과의 관계맺음'이다. 전과한 나와 내 친구들은 그걸 '알량한 텃새'라고 불렀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에 적응하기 힘든 나에게 단대 선거 출마는

사실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던 거다.

안 그래도 과에서 내 이미지는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그 모든 이유는 '전과'에서 시작했다.

 

  학기 초 학회비를 이중으로 납부하라는 과학생회의 요구에 부당하다는 내용으로

 500여명의 연서명을 받아 선배들 얼굴에 날려줬다.

물론 처음에 논리적으로 옳지 않은 결정이라고 설득했으나, 돌아오는 건

 "다 이해하는데 그냥 너희가 희생해"라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가 화가 났던 거다.

 난데 없는 서명운동에 놀란 학생회 선배들은 우리의 요구에 순응했지만,

대신 우리는 '싸가지 없는' 스타일의 소유자로 무수한 눈초리를 받았다.

  

 여기에 턱없이 부족한 장학금도 한 몫 했던 거지.

한 학년당 40명 정원에 장학금은 고작 네 다섯명. 유감스럽게도 그 장학금은 매번 전과생들이 독차지했다.

국어과 특성상 소문이 뒤로만 도는데, 꼭 돌고 돌아 귀에 들어오는 소문들이다.

내용이야 우리가 어디서 굴러온 개뼈따귀로 자기들 몫을 뺏어가는 것 같아 못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본의아니게 왕따가 되어버린게다. (ㅠ.ㅠ이게 웬일)

 

그런데 단대 선거에 떡하니 출마하는게 자기들도 당황스런 시츄였나보다.  민족 계열에서 단대 선거 정후보로 평소 과에서 사람좋기로 소문난 동기가 나왔다. 과에선 난리가 났다.

같은 과에 후보가 둘이 나올 수가 있냐며 어떤 선배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나올 수 있으니까 나온거 아니냐' 나야 속으로 몇 번을 소리질렀지만, 한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제길. 그 땐 어렸던거다.

 

 

 선거 기간동안 가늠할 수 있는 득표 수를 세워보는데, 비참했다.

득표수가 적은 것에서 오는 비참함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된 것에서 오는 좌절감이었다.

국어과도 불어과도 어느 곳에서도 속하지 못한 채 둥둥 떠내려가는 '낙동강 오리알'신세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처지를 보고 어느 동지가 농담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니까 좋지?"

평소 내 성격이면 좋게 흘려보냈을텐데, 정색하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딱 잘라말했다.

아직도 그게 기억나는 걸 보면 지대 짜증났던 거다. 지금이었으면 사과하라고 소리질렀을텐데 ㅋ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내부에서 생활하는게 만만치 않았다.

선거에 들어가기 전 이런 생각으로 출마하니 지지해달라고 부탁했던 몇몇 복학생 선배들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네 생각에 동의해. 그런데 앞에서 나서서하기엔 그렇고, 뒤에서 응원하고 있을께"

젠장. 지금 생각해보니 완전 비겁모드. 그래도 그 때엔 그것마저도 고마웠다.

과 전용 게시판엔 상대편이 과선배니 유의깊게 보라는 내용과 우리쪽을 비방하는 글로 가득했는데,

 내가 지금도 용서하지 않는 구린늑대새끼는 공약을 씨부렁거리는 글을 올려놨다.

단대가 사범대인만큼 당시 상대평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워 이데올로기 공략을 펼쳤는데,

구린 늑대는 어디서 굴러온게 말도 안되는 공약을 내세웠다고 흥분하는 글을 썼다.

 그 때 당시 열받던 건 선거가 끝나고 이듬해 학교에서 정말 인원 수가 적은 과목에 대해

절대평가를 시행하는 걸 보고 (당선된) 학생회의 성과라고, 가능한 일이었다고 글을 쓴 일이다. 카멜레온 같은 놈. 찔리는게 있었던 거다.

 

 

뭐, 준비되지 않았고, 미숙한게 많았던게지.

개인적으로는 만약 여기서 끝이 났더라면 지금의 난 아무 고민없이 잘 살았을텐데,

우라질 학교가 적절하게 탄압을 해준 덕에 이렇게 살고 있다.

그 때 이후 학생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는데, 대신 과에서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후배 하나 만나려치면, (물론 내가 펑크낸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마치 내가 사람을 안 좋은 물로 끌어당기거나 조종하려는 인물로 묘사되서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건진 사람이 삼십이다.

이리저리 잘 도망다니던 삼십이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사회를 보려하고 고민하려고 하던

그 때.

내가 겪었던 같은 어려움을 그 친구도 토로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척박한 토양. 그 가운데 지닌 열기. 미숙함. 계속해서 학습되는 무기력감. 

미안하고 고맙고 그랬다.

 

 

삼십에 대해

 

대학생활동안 건진게 뭐냐고 물으면 내 가치관 그리고 사람이라고 대답한다고 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건진게 뭐냐고 물으면 난 그 중 하나가 '삼십'이라고 말한다.

내가 관계한 사람이 몇몇 되지 않아서^^;;

 

제대를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온 삼십은 대뜸 말한다.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난 그러라고 했다.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다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런 모습만은 보이지 말길.

권력과 타협하지 않기.

 

부치지 못한 편지에 이런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걸 줄까 말까 고민중이다.

이사하면서 버린 것도 같고...쩝.

뭐, 만나서 직접 말할 수도 있겠지? 뭐가 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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