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의 길찾기'에 해당되는 글 9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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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일본의 시민사회운동 2007/05/22
  3. 고양파주이주연대 토론회 2007/04/28
  4. 2007/04/16 2007/04/16
  5. 2007/04/15 2007/04/15
  6. 2007/04/14 2007/04/14
  7. 여수참사가 남긴 것들 2007/04/11
  8. 유기수위원장님 면회 다녀오다 2007/02/05
  9. 눈썰매장 (2) 2007/01/21
  10. 자식의 피를 처음 보다. (1) 2007/01/14

영흥도

from 아무그리나 2007/06/04 16:11
영흥대교

위    치 : 인천 옹진군 영흥면  
홈페이지 : 영흥도  www.yeongheungdo.com 

관 리 청 : 옹진군청 (032-880-2366) 
    
개    요 : 영흥도에 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세 번 갈라야 한다. 연12.4km의 시화방조제 도로를 달리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면서 영흥도로 달려간다. 우측으로는 시원한 서해바다가 펼쳐지고 좌측
           으로는 시화호의 전경이 펼쳐진다. 말썽 많았던 시화호의 환경문제를 떠나 바다와 호수 그
           자체만 생각한다. 이제는 영흥대교와 선재대교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관광객이 줄을 잇
           고 있으며 무진장한 수산어업 전진기지로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32km 거리에 있는 섬으로 옹진군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이 섬은 영
           흥도와 선재도, 측도 등 유인도서 4개와 외항도, 중도, 자암도 등 무인도서 18개 포함하여
           연근해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해안경관이 수려하고 노송지대가 자리하고 있어 시원한 그
           늘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으며 백사장이 널리 펼쳐져 있어 일출 일몰이 경치와 어우러져 아
           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십리포해수욕장
◆십리포해수욕장 영흥도의 북쪽 끝에 있다.이곳에는 서어나무 숲 (약900평)이 있어 겨울에는 방풍림 역할,여름에 는 더위를 식혀주는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으 며,약 4km 정도의 고운 자갈 해변과 약1km의 모 래밭은 이곳의 해뜨고 지는 경치와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용담리해수욕장 영흥대교에서 서남쪽으로 약 4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에 용이 승천한 못이 있다 하여 용담이라고 한다. 이곳의 물맛은 전국적으로 유명하기 도 하다.이 해수욕장은 새로 개발 된 곳으로 서해에선 보기 드문 1,000m 가량의 백사장 이 있으며 50~100여년이 된 해송이 주위 에 군락을 이루어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갯벌에 는 낙지, 굴, 바지락, 동죽, 고동, 게 등 자연 어족 자원이 풍부해 자유롭게 잡을 수 있다. 민박시설로는 해수욕장 주변에 10동이 있으며 마 을 안에 20여 가구의 민박이 있다
장경리해수욕장
◆장경리해수욕장 해변을 따라 노송 숲 1만평이 자리하고 있어 시 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있으며 백사장이 약 1.5km가량 펼쳐져 있다.특히 여름철 서해의 낙 조는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어 피서철에 가족단 위 여행의 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통일사 1992년에 건립된 통일사는 최선규스님께서 6.25 사변당시 이북에 가족을두고 내려온 실향민의 애 타는 가슴을 달래며 하루속히 통일되기를 기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신도가 100 여 명 중 멀리는 서울, 부산 등 각지에 거주하는 신도들이 통일사를 찾는다.국사봉 기슭에 자리잡은 통일 사는 울창한 숲과 멀리 수평선위에 오가는 외항선을 바라볼 수 있어 답답한 가슴이 후련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영흥대교 영흥대교는 1997년 8월 착공해 4년 3개월 만인 2001년 11월 15일 준공하였다. 한국동남발전(주) 이 영흥화력발전소 건설과 연계하여 추진한 사업으로, 설계는 유신코퍼레이션(주)이, 시공은 현 대건설(주)을 비롯해 총 36개 업체가 참여하였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영흥도(靈興島)와 선재도를 잇는 길이 1,250m, 너비 9.5m의 왕복 2차 로이며,국내 기술진에 의해 최초로 건설된 해상 사장교(斜張橋:탑에서 비스듬히 친 케이블로 거 더를 단 다리)이다. 영흥대교 석섬 뒷편 선상에서 찍은 사진으로 일출과 더불어 야간 점등으로 화려한 조명 빛을 자랑하며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각광받는 장소이다.
서어나무 군락지
◆서어나무군락지 - 영흥도에는 전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대규모 의 서어나무군락지가 집단 서식하고 있다. 지 금으로부터 150여년전 내동마을에 사는 선조 들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살던 중 해풍이 심해 방풍림을 심어 바람막이를 조성하려고 여러차 례 걸쳐 각종 나무를 심었으나 현지토양이 모 래,자갈로 이루어져 있어 모두 고사하기 때문 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강한 서어나무 를 구해 구덩이를 깊이 파고 흙을 식재 한 후 정성껏 자식과 같이 가꾸었다고 전해 오고 있 으며,현재 십리포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에게 시원한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해군영흥도전적비 - 영흥면 내3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괴의 불법 남침과 더불어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1950년 9월15일 세계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전투를 끝냈다. 인천 상륙 작전에 참여한 장병과 영흥도 주민으로 조직된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등이 이 전투에 참여 하였으며, 이 작전 기간 중 9월 13일 북괴군 대대급 병력을 청년 방위대원들이 703함대의 필사 적 함포 지원아래 성공적으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 전투시 순국한 해군영흥지구 전투 영전사자와 영흥면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14인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24개 섬으로 구성(유인도3, 무인도 21) ▷ 국토확장 및 해양개발의 보고(寶庫) : 무인도서, 천해간석지 ▷ 경인지역 수산물 공급원 : 수산 양식장 ▷ 해양관광자원 : 십리포·장경리·용담이 해수욕장, 바다낚시 ▷ 교통편 : 태화버스 1일 6회 운행(03.12월 기준) ▷ 화력발전소 : 94만평(육지28만평, 해안66만평) ▷ 인구통계 : 총계 3,546 (남 1,847 / 여 1,699 / 세대수 1,401) - 2003년 10월기준- 관광코스 : 영흥도선착장 -> 십리포해수욕장 -> 국사봉등산 ->장경리해수욕장-> 광어양식당 -> 용담리해수욕장-> 해군여흥도전적비 -> 영흥도선착장 도로안내 : 1) 영동고속도로 월곶IC (303번 지방도-오이도 방면) →시화방조제 →대부도 → 선재도 →영흥대교 →영흥도 2) 서해안고속도로 비봉IC (306번 지방도) →사강 →탄도 →대부도 →선재도 →영흥대교 현지교통 : 1) 광역버스 : 790번 * 용현동 출발 - 05:20 ~ 20:30 / 14회 / 1시간 30분 소요 * 영흥도 출발 - 06:20 ~ 21:30 / 14회 / 1시간 30분 소요 - 문의 : 신백승여행사 032)886-4747 (용현동 구 터미널 건너편 CJ앞 ↔ 옹진군청앞↔ 제물포역 ↔ 주안(구 시민회관 건너편) ↔석바위(파리바게트앞) ↔ 인천시청(후문) ↔ 만수동(하이웨이주유소 건너편,BYC앞) ↔ 남동 구청 ↔ 소래포구(입구) ↔ 선재도(선착장) ↔ 영흥도 터미널) 2) 시외버스 : 태화상운 * 인천출발(용현동) - 06:40 ~ 18:40 / 6회 / 40분 소요 * 영흥도 출발(진두) - 06:40 ~ 18:40 / 6회 / 10분 소요 - 문의 : 태화상운(주) 032)883-5114 (인천(구)터미날(용현동) ↔ 주안(구.시민회관사거리) ↔ 만수동(하이웨이주유소 건너편) ↔서해안고속도로 ↔ 월곶 ↔ 시화 동보아파트 ↔ 대부도(방아머리) ↔상동 ↔선재도 ↔ 영흥도 터미널) ※ 인천에서 출발하여 영흥도 진두 종점까지는 대략 2시간 소요. (교통체증에 따른 도착시간이 불규칙할 수 있슴) ※ 종점인 진두는 영흥대교 건너 우측으로 임시 정거장으로 활용 ※ 종점 진두에서 각각 해수욕장으로 마을버스가 연계되어 운행함. ※ 문의 : 영흥도마을버스 011-9753-7048, 011-322-1652 영흥도택시 011-668-7127 현지숙박 : 문의-옹진군청 홈페이지( http://gun.ongjin.incheon.kr ) 영흥도( http://www.yeongheungdo.com ) 특 산 물 : 포도, 바지락, 우럭, 농어, 광어 정보제공자 : 인천 중구 전동 현숭덕
 작성기준일   2006년 0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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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4 16:11 2007/06/04 16:11
최근 '시민사회론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질 만큼 세계적으로 시민사회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일본의 초기 시민사회, 시민운동론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 '시민운동'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 안보투쟁을 계기로 해서다. 시민운동은 기존의 사회운동에 대한 대안적인 운동형태로서 제시됐다. 그것은 "진보적 운동 속의 관료주의적 교조주의적 편향"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경제성장과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파편화된 사생활 중심의 대중사회화가 진전되는 데 대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확대된 안보투쟁
  
  패전 후 일본에서는 전후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조직됐다. 치안유지법이 폐지되고, 공산당, 사회당 등 좌파 정당이 합법적으로 존재하게 됐으며, 직장 단위의 노조 조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농민의 조직화도 진전됐고, 학생운동도 부활하여 각 대학, 그리고 대학 간의 연대 조직이 결성됐다. 1960년대까지 사회운동을 주도한 것은 전후에 분출한 이들 진보적 민주단체들이었고, 사회운동의 주류는 이러한 조직 기반을 가진 노동운동, 학생운동이었다.
  
  1950년대 냉전체제가 확립되면서 정치권은 '보수-혁신' 대립 구도로 재편되고, 다양한 자발적 결사체들도 각 정당 아래 계열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노조, 학생조직 등 진보적 단체들은 좌파 정당 아래 계열화되어 그 대중적인 기반이 됐으며 사회운동은 좌파 정당을 정점으로 그 하부에 수직적으로 계열화된 운동 조직들에 의해 이루어진 '혁신세력'에 의해 주도됐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진보적 사회운동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 '시민운동'을 주창한 지식인들이다. 안보투쟁은 기시 정권이 추진하던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들이 연대하여 전개한 대투쟁으로, 1960년 5월19일 집권 자민당이 경찰대를 국회 내에 배치시킨 가운데 단독으로 신안보조약 승인을 강행함으로써 안보조약 개정 반대운동은 집권여당의 비민주적인 폭거에 항의하는 민주주의 수호 운동으로 의미가 확대됐다.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시민 중심으로 탄생한 '시민운동론'
  
  그 이후 한달 가까이 매일 10만 명 이상, 많을 때는 30만 명 가까운 군중이 국회를 둘러싸고 시위를 했다. 안보투쟁도 실질적으로 노조, 학생단체 등이 주도하여 시위 참가자들은 조직을 통해 동원된 경우가 많았으나,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사람들, 조직에 속하지 않은 자발적 시위 참가자들도 많았으며, 이들은 직업 정치가들과 직업 혁명가들의 지도자의식이나 행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안보투쟁이 민주주의 수호 투쟁으로 신국면을 맞게 된 이후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시민 참가자들이 증대했다. 기존의 운동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던 지식인들 가운데 이러한 새로운 경향에 주목하여, 일본사회의 현실에 맞고 형해화된 민주주의를 실질화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논리를 모색했다. 즉 안보투쟁을 통해 대두한 새로운 운동 형태의 특징을 포착하여 이를 바탕으로 향후 대안적인 운동을 창출하기 위한 실천적 이론으로서 시민운동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새로운 운동 논리의 핵심은 주체와 조직에 관한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대표적인 시민운동론자인 히다카 로쿠로는 시민운동 주체인 '시민'의 특징으로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무당무파일 것, 둘째, 정치적 야심을 갖지 않을 것, 셋째, 24시간 활동가가 아니라 직업을 가진 생활인으로서 '파트타이머'적인 참가자일 것, 넷째, 조직의 지령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가할 것, 다섯째, 필요 경비는 자신이 부담할 것. 이같은 '시민' 개념은 '조직인'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조직에 매몰되지 않은 자율적인 개인을 강조한다.
  
  "좌·우 양쪽 중앙집권주의 모두에 저항하는 운동"
  
  이러한 시민운동의 주체 개념은 조직론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기존의 사회운동은 지도부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 이념이 있어, 운동의 방침과 구체적인 행동강령은 상층의 핵심 간부들에 의해 결정되어 하부로 전달되고, 조직에 속한 대중은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정치학자 이시다 다케시는 이런 정책 결정 방식을 '관료주의적 지령주의'라고 표현했다). 목표 달성을 우선시하여 효율적인 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과 조직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연합조직과 각 단위 조직들의 관계는 '전면 포섭'의 관계로서, 모든 점에서 단일한 지도 방침에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필연적으로 조직을 단순한 '세(勢) 집합'으로 만든다. 이런 구조 하에서 같은 운동에 동참하는 주체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일한 계열에 속하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 계열에서 자신이 정통적 전위임을 주장하는 사람은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이 약한 자를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과 같은 계열에 전면 포섭되지 않은 조직에 대해서는 '전면 부정'의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정의를 독점하는 '양심'주의"를 낳는다. '정의로운' 목표 달성을 위해 운동의 효율적인 조직과 세불리기가 중시되는 가운데 운동에 참가하는 풀뿌리 대중 개개인은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조직의 논리, 지도부의 방침과 지도 이념에 따라 동원되는 양상을 보였다.
  
  시민운동론자들은 기존의 사회운동의 이같은 조직 구조를 집단주의, 권위주의, 정치주의적인 점에서 보수, 체제측과 공유하는 '일본적 특성'이라고 봤다. 조직 논리가 지배하는 집단주의적, 목표지향적인 운동은 풀뿌리 대중의 주체화를 억제한다. 히다카가 '시민운동'을 "좌로부터의 중앙집권주의에도, 우로부터의 중앙집권주의에도 저항하는 운동"이라고 한 것은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 시민운동론자들이 제시한 '시민' 개념은 하나의 이념형으로서, 개인이 내면에 일관된 의식이나 논리를 형성하고 그에 의거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의미에서 '시민성'을 확보한 인간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한편에는 조직 내지 집단에 매몰된 대중이, 다른 한편에서는 파편화된 사생활에 매몰된 대중이 존재하는 가운데, 어떻게 대중을 주체화하여 정치, 사회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과 참가를 하도록 할 것인가- 시민운동론자들은 이를 일본에 민주주의를 뿌리 내리기 위한 과제로 봤다.
  
  조직이 물신화되지 않도록 이슈 중심으로 뭉친다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는 서구에서 시민혁명을 통해 이룬 제도를 들여왔을 뿐인 일본 같은 나라는 '주어진 민주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민혁명"을 거칠 필요가 있다면서, 안보투쟁의 전개과정 특히 1960년 5월19일 이후의 흐름에서 그런 시민혁명적인 성격을 발견한다. 그것은 "일본의 공적 정책이 일본인의 사상의 사적(私的)인 뿌리로부터 새롭게 배태"되는 것으로서 "뿌리로부터의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根本からの民主主義)"이다. 즉 1960년에 등장한 일본의 '시민운동' 담론은 서구와 같은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일본에서 형해화된 근대 민주주의의 실질을 이루기 위한 '근대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앞에서 히다카의 운동 주체로서의 '시민' 개념을 소개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 개념이



다. 그러나 '시민'은 '다른 사람과 단절되어 자신의 생활에 매몰되는 존재'가 아니라 연대를 추구한다. 단 그것은 집단 활동이 개성의 상실을 가져오지 않는, 즉 자율적 개인으로서의 연대다. 일본의 기존의 조직 구조는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개인이 어떤 조직에 속하게 되면 모든 사안에 대해 동조하고 통일 행동을 취할 것을 전제로 하고, 개별 사안에 대해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직에 속한 모든 개인이 모든 사안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시민운동은 조직이 물신화되지 않도록 상설 조직을 갖지 않고, 이슈 중심으로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함께 조직하고, 이슈가 해결되면 운동조직은 해체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지도부와 이데올로기적인 지도 이념이 없이 운동 참가자는 동등한 자격으로 횡적인 유대를 맺으며, 이데올로기나 정치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개인에 내면화된 윤리나 생활의 관점에서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 참가자 개개인이 납득하면서 행동하기 위해 목표 달성 이상으로 논의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 이런 원칙들은 사회운동 자체의 민주성을 확보하는 것이 곧 진정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길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은 일본의 초기 시민운동론은 일본의 역사 속에서 배태된 것이므로, 한국의 시민운동론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지면의 제약 상 한국과 비교하며그 의미를 짚어볼 여유는 없으나, 이 시기 일본의 시민운동론자들이 제시한 문제의식과 비전은 눈부신 성장을 이룬 가운데 시민운동 내부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시점에 있는 오늘날의 한국 시민운동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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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2 18:03 2007/05/22 18:03

어제(27일) 저녁에 민주노동당 고양시위원회 사무실에서 고양파주이주연대가 주최하는 토론회가 있었다. 토론회의 주제는 '여수참사가 남긴 것들'이다. 연사로 나와 네덜란드 활동가 Jan Paul Smit가 참여하였다. 나는 이미 여수에서 그와 함께 비슷한 주제의 토론회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가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그때는 그냥 지나갔던 이야기들이 새롭게 들어오는 것도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불법일 수 있나?"는 그의 말은 지금의 미등록이주노동자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옛말에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죄는 없어도 사람은 미워하라'는 짝이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아니 오히려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면서 공동체에 공헌하였음에도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만약 같은 한국인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커다란 문제가 되었을 일들이다.

 

하지만 어제 토론회에서도 합법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가 있었던 것처럼 아직 이 문제는 공감대를 더 넓혀야 하는 과제가 있다. 하나씩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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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8 22:46 2007/04/28 22:46

2007/04/16

from 아무그리나 2007/04/16 22:43

쉬는 날이지만 아침 일찍 일어났다. 장애인들이 유시민 장관 집 앞에서 농성투쟁 중이라 아침 선전전 지원을 나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약속시간인 7시에 맞춰 도착하니 정경화, 최영희가 맞이한다. 텐트농성 중인 장애인 동지들과도 간단히 인사를 하고 선전전에 참여하였다. 장소는 유시민 장관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이다. 전경들이 진입을 막았으나 장애인 동지들이 전동휠체어를 그대로 몰아서 유시민 집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어제는 1인 시위도 못하게 했는데 오늘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제대로 막지 못했나보다. 전경들은 겨우겨우 아파트 현관 앞에서 더 이상의 진입을 막고 섰다. 그때문에 마침 출근하려던 주민들이 문이 막혀 잠시동안 발을 동동 거려야했다. 사실 이런 방식의 투쟁은 좀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정해진 계획도 없이 무작정 유시민 얼굴을 직접 보겠다는 마음으로 돌진하는 식이다. 한참 몸싸움 중에 살짝 물어보니 유시민 장관이 사는 집의 호수도 잘 모른다. 그래도 장애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비장애인으로써 이런 투쟁 방식 역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왔으니까. 주민들 중에 어떤 분은 '데모 하는 것은 좋은데 이렇게 하면 안되지'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 분이 정말로 데모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잠깐 동안이라도 생각해보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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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6 22:43 2007/04/16 22:43

2007/04/15

from 아무그리나 2007/04/15 23:14

한미FTA 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허세욱씨가 결국 돌아가셨다. 이 정권하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하는 것인지....여수에서 2달여간 장례식장에 있었는데 또 다시 장례식장이라니....기가 막힌다.

 

오늘은 여수에서 올라와 처음으로 파주사무실엘 나갔다. 파주사무실은 공부방 책이 빠져나간 것 외에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한글교실이 있었고 언제나 열심이신 자원활동가들과 이주노동자들 몇 명이 찾아왔다. 오늘은 안산에서 스리랑카 신년축제가 있었고 크리켓 경기도 겹쳐 대여섯명 밖에 오지 않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김준휘 선생님이 리포트 작성을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식사를 쏘셔서 동석하며 저녁을 얻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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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5 23:14 2007/04/15 23:14

2007/04/14

from 아무그리나 2007/04/14 22:49

여수에서 올라온 지도 얼마 안되었는데 요즘 연일 단속 소식이 들려온다.

어제는 와치사라 스님이 일산 가좌동에서 단속된 스리랑카 노동자를 빼낼 방법이 없냐고 물어오더니, 오늘은 당원 한 분이 농장에서 6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잡혔다며 역시 방법이 없냐고 물어오셨다. 나는 보호일시해제가 되는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좌동에서 잡힌 스리랑카 노동자는 부인이 현재 임신 중이라 더욱 안타까운 처지이다. 다른 센터에서 일하는 분에게 물어보니 임신 8개월 이상이면 비행기를 이용하기 어렵다는 의사 소견서를 받을 수 있어 보호일시해제를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얼핏 듣기에는 임신 6개월이라고 들었는데 8개월이면 되고 6개월이면 안되는건가?

 

이주노동자가 내국인의 일자리를 뺏는 존재라면, 여성은 남성들의 일자리를 뺏는 존재이고 앞으로 남북통일도 해서는 안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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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4 22:49 2007/04/14 22:49

"불타버린 10개의 코리안 드림”

이번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로 희생된 10명의 이주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중국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들은 한국에 와서 일하면 잘살 수 있게 될 거라는 ‘코리안드림’을 품고 이 땅에 발을 내딛었다. 마치 우리가 ‘아메리칸 드림’이나 ‘중동 붐’을 쫓았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꿈을 채 이루기도 전에 이들은 ‘불법체류자’라는 딱지가 붙어 하루하루를 숨죽여 지내야했다.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들어간 비용을 다 갚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기에는 한국정부가 허가해준 체류기간이 너무 짧았다. 일거리가 줄어들어 사장님이 소개해준 다른 곳으로 가서 일하다가 허가된 업종이 아니라는 이유로 졸지에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일하던 것도 잠시 뿐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단속반에게 백주대낮 길거리에서 아니면 잠자던 숙소에서 끌려나와 마치 흑인노예들처럼 수갑을 차고 줄줄이 차에 실려 ‘보호소’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보호소’는 말이 ‘보호’였지 사실상 ‘수용소’였다. 두꺼운 철창으로 막힌 좁은 공간은 24시간 CCTV로 감시되었고, 유일하게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건 한 달에 한두 번 30분씩 주어지는 운동시간 뿐이었다. 일하던 곳에서 받지 못한 체불임금 등 고충을 이야기하였지만 어떻게 처리되는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심지어 체불임금이 입금되었는데도 알려주지 않아 출국하지 않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사고가 난 날, 매캐한 연기에 모두들 일어나서 철창문을 붙들고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쳤지만 연기가 나고 9분이 지나서야 경비용역 직원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도 문을 열지는 않고 소화기만 몇 번 뿌리더니 그냥 가버렸다. 그리고는 이후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연기가 점점 심해져서 모두들 화장실로 대피하였다. 화장실 물을 틀어 수건을 적셔 입을 막았지만 점점 숨이 막혀왔다.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만약 직원들이 문만 열어주었다면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화재가 난 3층 보호실에는 직원들이 아예 없었다. 직원들은 규정을 어기고 자기위치에 있지 않았고 경비용역직원만 있었다. 화재가 발생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열쇠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갔고 그때조차 첫 번째 방만 문을 열고 2층 보호실에 다시 가둔 후에 다른 방을 열기 위해 3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연기가 가득차서 보호실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사고가 난 여수외국인보호소는 최신식 시설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2005년에 문을 열자마자 이미 화재사고가 한 번 발생한 바 있다. 그럼에도 그 이후에 이렇다할 조치가 제대로 취해지지 않았다. 화재경보기는 고장난 상태였고,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보호실 바닥은 가연성 소재로 만들어진 우레탄장판이 깔려있었고, 환기시설도 형편없었다. 또한 보호실과 보호실 사이의 벽이 설계도와 달리 시멘트벽이 아니라 쇠창살과 목재책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화재가 더욱 빨리 확산되었다.

하지만 사고를 조사한 경찰은 이런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화재의 원인이 방화일 가능성이 있다는 쪽으로 관심을 몰아갔다. 언론들도 여기에 동조해 각종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했다. 결국 경찰은 화재원인을 보호외국인 중 한명의 방화로 최종결론을 내렸으나 확실한 증거를 내세우지는 못하고 여러 정황증거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반면 역시 2005년에 보호소 화재가 발생하여 11명이 사망한 네덜란드에서는 1년여 간의 철저한 진상조사 끝에 2명의 장관과 1명의 시장이 사퇴하였다. 이 사고에서도 방화여부가 논란이 되었으나 최종 조사결과는 ‘불은 언제나 날 수 있지만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다른 원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다른 원인들이란 미숙한 초기대응, 화재발생에 취약한 건물구조 등이었다.
여수참사 역시 네덜란드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방화용의자가 살아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느냐 아니면 사망해서 그럴 수 없었냐가 달랐다.

여수참사가 발생한 지 2달째에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건은 보호외국인 중 한명이 방화한 사건이고 하급공무원 몇 명만이 처벌되었을 뿐이다. 전국 보호소에 대한 실태조사를 시작한다고 발표되었지만 2005년에도 이미 국가인권위에서 실태조사를 한 바 있다. 하지만, 보호소의 문제는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단지 행정서류 미비자에 불과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형사범처럼 아니 오히려 그 보다 못하게 대우하는 현재의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전면합법화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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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1 22:43 2007/04/11 22:43

2003년에 지구당 사무국장을 하던 시절 위원장님으로 모셨던 유기수 전위원장님은 현재 대구 교도소에 계시다.

 

건설연맹 사무처장으로 지난 포항건설노동자 투쟁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하시다 검거되어 1심에서 실형 2년을 받고

 

6개월 넘게 복역 중이시다.

 

오늘은 유기수 위원장님을 면회가는 날이다.

 

2003년에 각각 지구당 부위원장님이시던 곽장영, 이 준 이렇게 두 분도 함께 가셨다.

 

곽부위원장님은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만나서 함께 버스를 타고 내려갔고

 

이 준 부위원장님은 댁이 경남 산청이신지라 바로 대구교도소로 오셨다.

 

대구교도소는 평일인데도 면회객으로 붐볐다. 아마도 설연휴가 얼마남지 않은지라 그런 것 같았다.

 

한 20분을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어 면회를 하였다.

 

유기수 위원장님은 먼저 면회를 다녀온 당원들의 말대로 살이 쪽 빠지셔서 얼핏보면 대학생처럼 보일정도로 젊어 보이셨다.

 

안에서 게으르지 않게 생활을 열심히 하셨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지어진 최신식 시설의 포항교도소에 계시다가 가장 오래된 낙후된 시설의 이 곳 대구교도소로 오시니

 

불편한 점도 많으신 것 같았다. 가장 큰 불만은 운동장은 좁고 수용인은 많아 운동을 거의 할 수가 없다는 것.

 

워낙 운동을 좋아 하는 유위원장님이신지라 무척 답답하신 듯 했다.

 

그리고 포항교도소는 최근에 지어져서 난방이 잘 되는데 반해 이곳은 난방이 되지 않아

 

처음 이감와서 기온이 많이 떨어졌을때는 무척 추웠다고 한다. 그래도 엊그제부터 날이 많이 풀려서 다행이다.

 

그 외에도 화장실이 너무 좁은 점, 독방에 있다가 혼거방에 오게되어 책을 많이 볼 수 없는 점 등도 불편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위원장님 특유의 낙천성과 유머러스함으로 인해 그런 어려움도 별로 대수롭지 않으신 듯 했다.

 

오히려 여러 문제점들을 "이거 다 뜯어고쳐야 돼"라고 말하시는 것에 대해

 

면회를 간 우리들이 이구동성으로 "뭘 뜯어고쳐요 빨리 나와야지"라고 말했을 정도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면회객들이 많아 규정에 나와있는대로 딱 5분만에 면회가 끝이 나버렸다.

 

하루를 거의 다 투자해서 내려간 것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면회시간에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접견장을 나왔다.

 

못다한 이야기는 편지로 하고 더 못다한 이야기는 빨리 나오시면 그 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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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5 23:25 2007/02/05 23:25

눈썰매장

from 아무그리나 2007/01/21 23:36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눈썰매장을 다녀왔다.

 

파주 법원리에 있는 쇠꼴마을 눈썰매장이다.

주로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참여했고 파키스탄, 스리랑카 친구들도 함께 갔다.

 

나도 처음 타는 눈썰매라 은근히 기대되었다.

처음 타 본 눈썰매는 생각보다 속도가 빨랐다. 순식간에 언덕 아래까지 도착했는데 눈가루를 흠뻑 뒤집어 써야했다.

 

 

 

 

 

 

눈썰매를 한 2시간 정도 타고 나서 고구마를 구워먹었다. 그리고 말뚝박기, 닭싸움 같은 한국전통놀이와 네팔의 전통놀이도 하였다. 네팔전통놀이는 공으로 사람을 맞추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하는 놀이와 비슷했다. 모두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놀이규칙가지고 마구 싸우는 등 정말 유치하게 놀았다. 뭐니뭐니 해도 이런 놀이는 유치해야 재미있다.

 

 

 

다시 금촌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절로 졸음운전이 되었다. 오랜만에 밖에서 한참 뛰어놀았더니 온몸이 나근해짐을 느꼈다. 지금 집에 돌아와 아이랑 한판 씨름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너무너무 피곤하다.

 

그래도 오늘 이 추억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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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1 23:36 2007/01/21 23:36

아들 산이가 아파서 응급실에 가게 되었다.

 

요즘 유행하는 장염에 걸렸다고 했다. 처가집 식구들이 모조리 걸리더니 옮았나보다.

 

밤에 자다가 두 번이나 구토를 하고 설사를 하더니 몸에 열까지 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애기 데리고 병원 뛰어다니는 일)이 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울기만 하는 아새끼가 정말 불쌍했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피뽑으면서 처음으로 아새끼 피를 보았다.

 

정맥에서 뽑아서 그런지 껄쭉해보이는게 정말 물보다 진해보였다.

 

애기 피도 어른 피랑 똑같았다.

 

다행히 저녁이 되어 다시 한 피검사에서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와 퇴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종일 병원에 있는 것은 어른 들에게도 힘든 일이다.

 

병원의 공기는 일부러 그런건지 무척 탁하다. 멀쩡한 사람도 환자가 될 것 같다.

 

지금 아새끼도 쓰러져 자고 애미애비도 쓰러질려구 한다.

 

병원은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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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4 20:41 2007/01/14 2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