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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의 유래

시작이 반이다.. 음하하하.. http://user.chollian.net/~dhan30/t.html


대금은 신라시대의 대표적 악기인 삼현(三鉉)[거문고, 가야금, 향비파]과 삼죽(三竹)[대금, 중금, 소금]중의 하나로서 대나무로 만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악기 중의 하나이다. 대금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악지, 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 등에 여러가지 기록들이 나타나는데, 이 중에서 삼국유사 권2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전한다. 신라 제 31대 신문대왕은 개요원년(681년) 7월 7일에 즉위하여 선왕인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창건하였다. 그 이듬해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박숙청이 아뢰기를, 동해 한 가운데에 작은 산이 떠서, 물결을 따라 감은사(感恩寺)를 행해 떠 온다는 보고를 하였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일관(日官)인 김춘질에게 명하여 점을 쳐보도록 하였는데 점을 친 결과 대답하기를, 선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나라를 보호하시고 문무왕과 김유신 두 성군이 덕을 같이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려 주시려하니, 만일 왕께서 해변에 가시면 반드시 값을 헤아릴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시리라는 풀이를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에 행차하여 사람을 보내고 그 작은 산을 살펴보게 하니, 산의 모양이 거북이의 머리를 닮았고 또 산위에 대나무가 하나 있는데 낮에는 둘이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아뢰었다. 왕은 그날밤 감은사에서 유숙하였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 대나무가 합하여 지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불고 비가오며, 암흑의 날이 7일간이나 계속되다가 그달 16일에 가서야 비로소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하여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고 와서 받치는지라, 왕이 용을 영접하여 같이 앉아서 물어 가로되 '이 산의 대나무는 나누어지기도하고 합하여지기도하는데 그 연유가 무엇이오' 라고 물으니, 용이 대답하기를 '한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않고, 두손으로 손뼉을 쳐야 소리가 나는것처럼 이 대란 물건도 합한 연후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하며, '성왕(聖王)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이니 이 대나무를 베어 저[笛]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이다.' '지금 왕의 선친 문무대왕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고, 김유신이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왕(聖王)께서 마음을 같이하여 이 큰 보물을 주시어 나로하여금 갖다 바치게 한 것이라' 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금채(錦彩)와 금과 옥을 주고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바다서 나오매 산과 용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자고 17일에 지림사 서쪽 시냇가에 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이때 태자인 효소대왕은 궁궐을 지키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왕에게 하례를 드리면서 서서히 살펴보고 아뢰기를 '이 옥대(玉帶)의 여러쪽이 다 진짜 용이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어찌 이를 아는가'하고 물으니 태자가 대답하기를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소서' 하였다. 이에 왼편 둘째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연못을 용연(龍淵)이라고 하였다.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저[笛]를 만들어 월성(月星)에 있는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는데, 이 저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비가오면 개이며,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도 평온하여 졌다. 그래서 이 저를 이름하여 만파식적이라하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때 이르러 화랑(花郞)인 부례랑(夫禮郞)이 기적적으로 살아오게 되니 이러한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이름을 지으니, 자세한 것은 그 전기(傳記)에 보인다. 이와같은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세상의 모든 파도를 잠재우게 한다는 뜻으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이름짓고 국보급의 신기(神器)로써 취급했던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설화를 근거로 해서 대금의 기원을 신라시대로 삼는이도 있으나,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가로부는 저[橫笛]가 우리나라에 널리 펴져서 불리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이후로는 모든 악기를 조율(調律)하는데 표준악기로 삼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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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오랜만에 J와 귀에 땀나도록 통화를 했는데 (사실, 우리 기준으로 보자면 한 달에 한 통화 하는 건 '매우 자주'라고 말할 수 있다 ),

놀랍게도 J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는게 과연 이 경우에 들어맞은지는 모르겠으나,

그네 둘의 인연은 참으로 질기기도 하다. 정녕 소울메이트???

 

10년이 훨씬 넘도록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기 벌써 몇 차례이던가. 

 내가 미국에 머물렀던 동안, 이제 완전 끝장인가 싶었는데 요 몇 달 사이 극적인 최후의 반전이 ㅎㅎ

 

남의 연애사에 관심을 갖는 편은 아니지만,

이들은 워낙 근접 관찰하여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지라 내 감회가 남다를 지경이다. (이거 뭐야?)  그간의 걸림돌은 다 해결이 된 건지 걱정도 좀 되고...

 

물론 살짝 배신감도 드는구나.

이 인간이 나보다 먼저 솔로 부대를 떠나다니!!!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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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감상

뉴스를 보고 있자니,

이 좋은 FTA 를 왜 그동안 안 했나 싶다.

 

수출이 쑥쑥 늘어나고, 농업 피해가 조금(!) 우려되기는 하지만 대책은 내일 발표될 예정이란다. 무엇보다 외부충격으로 국가경쟁력이 강화되고 한/미 안보동맹으로 경제와 안보 두 마리 토끼를 한 손에!

 

은근과 끈기로 뉴스를 끝까지 시청한 결과,

역사에 획을 그을만한 이 중차대한 변화의 무대 뒤에는 대통령의 뚝심이 있었다는 감동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도 알게 되었다.

 

저 인간들 머리 속엔 뭐가 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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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2편

홍실이님의 [살바도르 아옌데 1편] 에 관련된 글.

2. 인민전선에서 대통령 선출까지

 

아옌데는 인민전선이 무너지고 1970년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여러 차례 유력한 정치적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주로 유권자들 사이의 인기 덕분에 좌파 세력에게 전국적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그는 3번에 걸쳐 상원의원에 출마했는데, 세 번 모두 각기 다른 곳에서, 매번 깜짝 승리를 이룸으로써 전국적 평판과 함께 믿을만한 대통령 후보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그는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한 지역에서 두 번이나 출마하는 (1961년 발빠라이소Valparaiso, 1969년 아이센Aysen과 마가야네스Magallanes) 상당한 정치적 용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얻어낸 이 인상적인 승리는 좌파 인물들 중 그 누구도 하지 못할 방식으로 선거전에 진출하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 후보로 추천되었고, 1958년과 1964년에는 다시 활성화된 사회주의/공산주의 동맹의 명목상 대표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본다면, 그는 정치적으로 외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당내 많은 분파들로부터 유일하게 믿을만한 대통령 후보라는 점을 마지못해 인정받았지만,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사회당은 다양한 이념과 개인적 문제로 (종종 매우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당은 종종 온건 노선을, 때로는 매우 급진적인 노선을 선호했다. 당은 좌파 내 두 힘의 연합만이 권력 획득의 기회를 만들 수 있음을 결국 인정했지만 공산당과의 관계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아옌데는 수많은 사회주의 전사들의 시간을 잡아먹던 장시간에 걸친, 결론 나지 않는, 그리고 때로는 무의미한 논쟁들에 거의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당의 동료들보다는 다른 당의 성원들과 개인적 친분이 더 두터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윤택한 삶, 두드러진 프리메이슨 활동, 엘리트 집단 사이를 쉽게 누비고 다니는 것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아옌데는 결코 사회주의 호사가는 아니었다. 그는 쿠바 혁명의 열렬한 옹호자였고,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수많은 국제 혁명운동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그는 1969년에 베트남을 방문하여 호치민(Ho Chi Minh)을 만났고, 체 게바라의 게릴라 패잔병들이 쿠바로 피신할 수 있도록 볼리비아에서 칠레까지 상원의장으로서 그들을 호위해주었다. 급진적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의 진정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며, 1960년대 칠레에는 빈곤과 박탈이라는 현실적 문제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었다. 1970년,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기회가 왔다. 그는 기독민주당, 우파 후보와 경합한 3각 경쟁에서 1/3을 약간 넘는 득표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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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젤 싫어하는게 원고 마감 넘기는 건데.. ㅜ.ㅜ 나는야 원고 체납자 (이렇게 나가다간, 신용불량자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이렇게 마감을 넘긴 원고가 허접하기까지 하면... 흑. 주말에 축적한 호연지기와 에너지는 다 어디로 간걸까? 호연지기는 진정 휘발성 물질이었단 말인가? 그렇담 최소한 에너지는 보존이 되었어야지? 흠. 아마도 에너지는 뱃살이라는 물질로 전화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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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점 - 책 두권

다른 시기에 각기 읽기 시작한 책 두권의 마지막 장을 우연히도 오늘 함께 덮었다.

 

하나는 이제 고전이 되어버린 250년 전 팜플렛을 오늘의 '평범한' 젊은이들에게 소개하고, 이 자본주의 정글을 더 잘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저자 말대로) 처세술 책이고 (^^), 또다른 하나는, 20년을 넘게 그 정글에 온몸으로 부딪혀온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전문강사(?)의 가슴으로 쓴 조각글 모음집이다.

 

이 둘은...매우 다르면서도, 같은 곳에서 만나 접점을 형성하고 있었다.

 

0. 하종강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후마니타스 2006

 

 

저자가 가슴으로 썼다는데, 어찌 독자가 가슴으로 읽지 않을 수 있나! (물론 안 그런 책도 허다하기는 하다)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고, 오히려 글로 길게 쓸만한 감상은 없다. 다만.....

오래도록 일관된 사람이고 싶다. (도처에 함정이 많기는 하다만, 그 어떤 외부적 요인이 내면의 자기합리화만큼 위험하랴!)

 

 

0. 강유원  [강유원의 고전강의 - 공산당 선언] 뿌리와 이파리 2006

 

 

예전에 한겨레 21에 연재할 때는 몰랐었는데, 블로그 글들을 보면서 인간 좀 까칠하구나, 이런 생각을 좀 했었다. 이 책은 야간강좌 강의록에 해당하는데, 진짜 까칠하고 간결하다 ㅎㅎㅎ 딱 맘에 드는 스탈....

공산당 선언 그 자체에 대한 해설과 소개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고전을 읽는 독법 - 그 꼼꼼함이 마음에 들었다. 

돌아보면, 그 어떤 고전도 진정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없는 듯 싶다. 그것이 전공서적이던 아니던, 항상 구체적인 목표 - 논문 준비, 세미나 발제, 강의자료 준비 - 를 두고 시간에 쫓기며 읽었던지라 무언가를 곱씹어가며 읽었던 적이 없는 거 같다. 항상 요약에 급급... 아, 하나 있다면, [사회역학] 번역할 때.... 혼자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면서  "독서백편이면 의자현이라..." 읊조리며 신기해했던 생각이 나는구나.... ㅡ.ㅡ

 

천천히,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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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

호연지기 대 양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잠깐 나들이를 다녀왔다.

다음 주에는 이걸 까먹으면서 살 예정이다. 

 



어제 늦은 오후 대전 출발 - 진주 진양호 도착

탁 트인 전망에 일단 호연지기 일갑자 상승

 

진주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 중 하나라는 천수식당에서 '진주' 비빔밥 시식

경상도 음식이 짜고 맵기만 하다는 편견은 버리기로 했으나,

이게 과연 '가장 맛있는' 음식일까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ㅡ.ㅡ

 

남해안 호우 주의보 때문에 걱정을 (아주 조금) 하기는 했으나 다행이 큰 비바람은 없었고, 특유의 새파란 바다를 볼 수는 없었으나 대신 진양호에서, 남해바다에서 환상적인 물안개를 원없이 감상하고 호연지기 이갑자 상승

하지만 그 풍광을 담아내기에는 사진기가 영.... (재주없는 목공이 원래 연장 탓 하는 법이다.)

 

숙소 베란다에서 내다본 진양호 풍경... 원래 사진보다 백배 멋진디...


 


 통영에서 아침으로 충무김밥 먹고

풍화일주도로 거쳐 달아공원에 올랐으나 운무가 짙어 먼 바다는 구경을 못하고,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일몰이 그리도 환상적이라 하던데... 

 

간식으로 사발면 간단히 먹고 통영국제음악제 Sun Rings 관람.

실컷 싸돌아다니다 깜깜한 극장 안에 들어가 조용한 실내악 듣고 있으려니 초반 20분은 완전 의식불명 상태 ㅜ.ㅜ

다행이 얼릉 정신차린 후 '보고 듣노라니' 아름답고 인상적인 공연.... (다소 난해하기도 했음 ㅡ.ㅡ) 어쨌든 이걸로 호연지기 1갑자 정도 상승....

 

TIMF 매표구 앞 조형물...


 

음악회 끝나고, 또 유명하다는 도다리 탕수어랑 짜장면 먹고 대전으로 귀향.

 

원래는 굴이나 장어도 먹어야 하는데 워낙 일정이 짧다보니... ㅡ.ㅡ

굴 축제도 이즈음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풍랑 예보 때문에 취소되었다고...

 

내년 국제음악제에도 꼭 들러줘야겠다는 생각.

예전 사진을 찾아보니, 지난번에 갔던게 2003년, 벌써 4년 전이더라....

 

2003년 통영국제음악제에 갔을 때, 본 공연이 열렸던 시민문화회관 야경


 

내년에는 꼭 달아공원의 일몰을 보리라.

(흠, 갑자이 일출/일몰 매니아 송양이 생각나는군!)

 

총 4갑자의 호연지기를 얻었으니 월~금까지 평균 0.8갑자씩 소비하면 된다!!!

 

* 진주 (레드망고) -고성(공룡나라 휴게소) - 통영 (갤러리커피).. 이 세군데에서 연속 세 차례 경악스러운 커피 맛에 정말 상처입었다. 무슨 엄청난 사양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커피를 원했을 뿐이라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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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레이스?

까지는 아니지만, 다음 주 일정을 보니 숨이 허거덕... 월: 국/건/영 설문 개발 프로젝트 자문회의 자료 완성 및 발송, 원고 쓰기 화: 원고 완성 및 회람, (수업준비)+ 통계실습강의 수: 프로젝트 관련 논문 1차 리뷰/정리, (수업준비) + 연구방법론 세미나 목: 출장 - 노동안전프로젝트 회의 + 형평 세미나 금: 출장 - 국/건/영 설문개발 자문회의 및 정리 * 학회 원고 검독 몸만 가서 살짝 앉아 있다 올 수 있는 회의들이면 좀 좋을까? 공식 일정이 저렇다는 거고, 그에 대한 준비는 도대체 언제 한다냐??? 미루거나 펑크낼 수 있는 것도 없구나. 논문 때문에 분석 마무리해야 할 것도 있는디... 그래서 내린 결론인데....


이번 주말은 우선(!) 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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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줄넘기..

5백개 하고는 피토하며 쓰러지는 줄 알았다.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

그나마 예전에 했던 가락은 다 사라졌고나...

 

이제 나름 날도 포근하니,

대중교통 출퇴근 엄수 + 줄넘기 다시...

 

강호의 은둔자 J 가 강추한 검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보구....

성격 개조도 할 겸, 도를 닦는 건 좋은디...

아침에 일어나는 게 도대체......

(그리고 안경 때문에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런 우려에 J는 코웃음을 치더군)

 

우선, 2천개 될 때까지 매일 백 개 씩 증가...

 

후배 M의 꼬드김에 무려 만원이나 주고 나이키 줄넘기 장만했는데,

알고 보니까 요즘 줄넘기들은 횟수가 자동으로 헤아려진단다.

내 거는 그게 안 되서, 백 개 할 때마다 나뭇가지로 바를 정 자를 표시해둬야 한다. ㅜ.ㅜ

2천개 채우려면 그것도 장난 아닌디? ㅡ.ㅡ

 

뭐 뾰족한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중간에 숫자 까먹어서 더하면 너무 억울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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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1편

지난 연말,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학생 한 명에게 영문으로 된 논문 번역을 맡긴 적이 있다. 성적 때문에 추가 과제물을 해야 하는 학생도 괴롭겠지만, 없는 숙제 만들어서 줘야 하는 사람도 괴롭기는 하다. 그래도 학생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시키고자 머리를 짜내다 결국 논문 번역을 시키게 된 거다. 그것도 너무 기술적인 걸 맡기면 안 될 거 같아 포괄적이면서 뭔가 이 학생에게 공부 의욕을 불어넣을 수 있는 희망찬 논문...

마침 읽으려고 책상 위에 출력해 놓았던 논문을 건내주었는데,

며칠 후 그 번역본을 제출받고, 수정해서 블로그에 소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랬다. 그게 벌써 세 달 전인디... 까먹고 있다가 아까 책상정리하면서 발견했다.

2005년도 국제역학회지 (34권)에 실린 논문으로, 칠레 정치사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의 역할,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탄생과 그의 역할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Muir R and Angell A. Commentary: Salvador Allende: his role in Chilean politics

Waitzkin H. Commentary: Salvador Allende and the birth of Latin American social medicine

학생의 초고를 많이(ㅡ.ㅡ) 수정해야 하는디, 내가 언제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진전이 있을 때마다 조금씩 끊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1. 의학에서 정치로..



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Salvador Allende Gossens)는 1908년 태어나 1973년 9월 11일에 일어난 반정부 쿠데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네 차례에 걸쳐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1952년, 1958년, 1964년에 낙선했다가 마침내 197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1932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학창시절부터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였고, 그가 졸업하던 해에 출범한 칠레 사회당 (Chile's Socialist Party)을 결성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는 1937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38년에 인민전선(Popular Front) 정부를 수립한 급진주의자 대통령 뻬드로 아귀레 세르다(Pedro Aguirre Cerda) 정권에서 보건부 장관을 맡고 나면서부터이다.


칠레는 그 격동의 시기에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했던 세계에서 유일한 3개국 중 하나였다 (다른 두 나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이는 유럽으로부터 한참이나 떨어진 국가에서 좌파 급진주의 정치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칠레는 20세기 초반의 공산주의, 아나키스트 운동 이래 강력한 좌파 운동이 존재해왔다. 1912년에는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이 이뀌께(Iquique)의 탄광부두에서 결성되어 곧 칠레의 북부 탄광지역에 굳건한 뿌리를 내렸으며, 빠르게 성장하던 노동운동에서 급진적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칠레의 정치는 1917년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1920년에 칠레 공산당(Chilean Communist Party)이라고 이름을 바꾼 후 제 3차 인터내셔널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칠레 공산당은 소비에트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감에 따라 스탈린의 숙청에 대해 부당한 지지를 보내야 했고, 중도 분파들과의 동맹을 회피하며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는 협소한 계급 지향 전략에 몰두하게 되었다.


공산주의 노선의 경직성은 대공황이 칠레를 강타했을 때 정치적 주도권이 다른 좌파 그룹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1932년, 정부는 좌파 군관이자 칠레에 100일간의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던 마르마두께 그로베(Marmaduke Grove) 대령에 의해 전복되었다. 당시 그는 경제적 위기의 와중에서 민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일련의 조치들을 실행한 바 있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그러한 시도는 1년 후 젊은 살바도르 아옌데를 포함한 일군에 의해 건립된 사회당의 지도부 형성으로 이어졌다.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이념적 측면에서 좀더 절충적이고 내적 규율이 덜 엄격했던 사회당은 스탈린주의 반대라는 목표를 공유한 토르츠키주의자, 아나키스트, 사민주의자들의 기묘한 연합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로베 자신의 인민주의자 스타일은 공황의 영향이 칠레를 강타하던 시기에 당이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도록 만들었다. 노동 계층과 하위 중간 계급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지지를 얻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1930년대 중반,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서유럽의 공산당, 사회당 구분과 유사한, 좌파 그룹 내 강력한 당파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칠레의 정치적 발달이 일정 부분 유럽과 닮아 있었다면, 사회 체계는 저개발 국가의 그것이라 할 수 있었다. 영아 사망률은 높았고 건강 수준은 낮았다. 의료 서비스는 불충분했고 영양실조가 빈번했으며 노동 환경은 안전이나 건강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옌데 같은 급진적 의사라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의 정책을 만들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아옌데가 ‘칠레인의 의학적/사회적 현실 (La Realidad Medico-Social Chilena)’j이라는 책을 출판한 것은 그가 보건부 장관으로 취임한지 1년이 지나서였다. 이 책은 칠레 빈곤층을 향한 그의 인도주의적 관심은 물론 급진적인 구조적 변혁에 의해서만 이 나라에서 불건강의 사회적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그의 정치적 판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은 옷을 사 입고 가족들을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한 소득이 없고, 노동자들은 가혹한 상황과 고용 환경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며, 노동계급 가정은 살만한 주거환경과 위생시설을 갖추지 못했다는, 바로 이러한 조건들이 용납하기 어려울만큼 높은 영아 사망률과 불건강으로 직결된다는 것이었다.


아옌데는 이러한 상황들 중 일부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즉각적인 조치들, 이를테면 더욱 잘 짜여진 보건의료 체계, 강제적인 고용주 부담의 산재보험 등을 제시하면서 책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칠레의 사회 문제를 진정 해결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구조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토지 개혁과 국가의 천연 자원 판매에서 얻은 이윤이 사회복지에 쓰일 수 있도록 외국 기업의 국유화 같은 것들을 제시했다. 연정의 장관으로서 이러한 폭넓은 사회적/경제적 의제를 추진하는 그의 능력에는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그는 여러 가지의 창조적인 조치들의 도입을 이끌어냈다. 싼 가격으로 우유와 유제품을 가난한 이들에게 공급했단 산티아고의 일명 ‘우유 판매대 milk bars’ 등이 그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농촌 지역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내보이고 고발하기 위해 산티아고에서 열린 대중 박람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인민 전선이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촉진하고 공공 교육 프로그램을 확장하면서 정치/시민 생활의 많은 측면을 민주화시키는 데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정권의 타협은 좌파들에게 대가를 요구했다. 1941년 선거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독립적으로 경쟁했고, 분열적인 내부 논쟁 끝에 급기야 정부를 떠났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의 압력 속에서, 급진주의자 대통령 곤잘레스 비델라(Gonzalez Videla)는 1948년에 공산당을 금지시켰고, 이러한 움직임은 사회당의 소수 분파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이는 사회당이 다수 분파(살바도르 아옌데를 포함하는)와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 분파는 반(反) 공산주의 입법과 정부 내 급진주의자들과의 후속 협력을 반대하는 ‘인민 사회당(Popular Socialist Party)’을 형성하였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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