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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7/06
    월간 [사람]의 창간.(2)
    레이-1
  2. 2005/07/05
    조금 더 생각해보면.(10)
    레이-1

월간 [사람]의 창간.

첨부이미지

 

다산인권재단에서 발행하는 인권잡지, 월간 [사람]은 내게 꽤 큰 사건이었다.

 

매체에 대해 아는 것은 눈꼽만치도 없는 녀석이 창간호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도 영광일 뿐. 이번 아니면 언제 '창간호'에 이름이라도 실어 볼 수 있을까.

 

사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서 무척 맘이 찔린다. (앞으로는 열심히 해볼랍니다. 불끈!)

어렵게 시작한 것이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분들과 함께 하는 것인 만큼, 정말 좋은 잡지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만들 것이다.

 

 



 

‘가족처럼 대우해 드리겠습니다’ 속에 숨겨진 진실

-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감독: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힐러리 스웽크  2005년작품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하지만 그 순도를 따지자면 물이 더 진하다. 피는 90%이상의 물에 여러 불순물이 섞여져 있는 것일 뿐이다. 유전자나 적혈구 따위의 생물학적 요소들이 100%의 순수함을 자랑하는 물의 가치를 마구 깎아내릴 만큼 대단한 요소들이었나? 하기야 피를 돈 주고 사려면 물보다는 훨씬 비싼 것이 사실이지만.

괜찮고 실력 있는 선수를 키우기에는 의심도 많고 나이도 많은 클린트 이스트우드(프랭키 던)와, 서른이 되어서야 데뷔하겠다고 무작정 체육관을 찾아온 힐러리 스웽크(매기 피츠제럴드)에게는 엄청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가족에게 왕따 당하고 있다는 점. 왜 인지는 모르지만 부인과 딸에게 버림받은 듯 보이는 트레이너와 천박한(?) 권투선수라는 직업 때문에 무시당하는 여성 권투선수. 하지만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 조금만 눈을 돌려보시죠, 가족 말고도 그 따뜻한 사랑과 애정을 퍼부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데 왜 ‘혈연’에 그렇게 연연하며 구질구질하게 감정을 낭비하십니까?

영화 막바지에 그들은 서로의 끈끈한 애정을 확인하고 새로운 가족-부녀관계-구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나마 마지막에라도 제대로 확인한 것이 나은 것일까. 하지만 ‘재능 있는 선수’와 ‘실력 있는 트레이너’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지 그들은 그냥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아하!. 결국 끈끈한 애정을 얻기 위해서는 ‘능력’이라는 가치가 필요한 것이었군. 씁쓸하다. 무시하고 싶은 직업을 가진 딸-언니이지만 엄청난 대전료 앞에서 여주인공의 가족들은 ‘오~달링’을 부르짖으며 상큼?발랄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등장한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지만 그녀는 대전료가 없으면 또 다시 버려질 운명. 쯧쯧, 결국 관계의 무게는 ‘돈-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꼴이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말로 운운하며 ‘가족’의 울타리를 공고히 하는 것은 사실 당신에 대한 부드러운 배신이다. 이익에 대해 첨예하게 부딪히며 싸우는 정글 같은 사회에서 가족은 당신에게 ‘혈연’을 빌미로 따뜻함을 제공하는 척 하다가 결국 뒤에서 도끼를 내려친다. ‘그래도 밥값(아니 핏줄 값!)은 해야지’하며 말이다. 그 따뜻함에 홀린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그 배신을 내치지 못하고 가정폭력에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감정/노동의 착취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가족처럼 대우해 드리겠습니다’라는 한줄 구인 광고가 무서운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착취에 굴복하라는 뜻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핏줄이 아니다.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다. ‘가족처럼’이라는 말 앞에 숨어있는 것은 ‘자본주의적’이라는 단어이다. 정말 끈끈한 정이 그립다면 순도가 떨어지는 ‘피’에 기대지 마라. 그보다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고 소통할 수 있는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올 것이다. ‘피’는 ‘자석’이 아니다.

(2005. 7. 월간 '사람' 창간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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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생각해보면.

** 이 글은 부깽님의 [남성 페미니스트] 포스트에 트랙백 되어 있습니다.
** 그리고 [아직 정의내리지 못한 것] 포스트와 연결된 이야기입니다.

* 웹링의 문제를 너무 확장해서 바라봤다는 느낌이 없지않지만, 이런 생각들이 나의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들을 넓힐 수 있다는 생각에 쓰게 됐다.

여전히도 여물지 못한 고민이지만, 부깽님의 글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여성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여기서의 '입장'이 부깽님의 글에서 표현된 것처럼 "단순히 하나의 시각을 갖는 정지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사유하는) 동적인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100%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성과주의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나는 '여성으로 살아남는 것'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바꾸어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고,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주변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생각'의 차원을 넘어 '행동'으로 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한다는 측면에서 일 것이다.)

여성주의적 입장의 동일성을 통해 웹상에서의 연대를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mi-ring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오프공간이 아닌 온라인 공간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웹링이 진정 '특별한 연대'를 구성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시작인 웹링에 대해 그 의미를 사전에 평가하는 것은 분명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여성운동이 이제 최소한의 '입장'만을 공유하는 것 만으로 연대를 확장하는 것 보다는, 좀 더 논쟁적인 방식으로 '확고한 연대'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여성행진에서 일어난 해프닝(기사 참조)을 보면서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공통점과 '여성주의'라는 광범위한 입장을 공유 이외에 진정한 연대와 확장을 위해서 생산적인 논쟁들이 구성되어져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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