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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jineeya님의
[국가주의 타파와 공공노동자의 주적 개념] 에 관련된 글입니다.
어제 먹은 술이 아직 몸속에 남아 떠돌아 다니는 까닭에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냉동실에 북어가 남아 있다는 걸 떠올리고
북어국을 끓인다.
뒤져보니 파도 없다. 오로지 북어만으로 끓이고 있다.
북어국은 오래끓여 북어가 푹 우러나야 제맛이다.
그래서 북어국이 끓는 동안 jineeya님의 글을 읽었다.
글을 읽고나니 나도 몇자 거들고 싶어진다.
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협상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부 일반예산에 기대고 있는 측면이 많은데
이건 바로 국민의 세금으로부터 만들어진 재원이기때문에
그 사회에서 동의하는 수준의 임금이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임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역할의 중요성을
세금을 내는 국민들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어떤 측면에서 우리가 자본주의적 가치- 효율성, 성과중심주의 등-가 아닌
다른 종류의 가치 - 공동체성, 협력과 연대,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한 전망 등-를 더 높게 평가하여 이에 따라 임금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매우 높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이 하는 일은 직접적인 상품의 생산이나 이윤의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다.
특히 대인서비스(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 교육, 보육, 사회복지..)분야에
있어 서비스의 중단은 가장 취약계층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노동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파업권을 행사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보육노동자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부모가 일터에 나가 있는동안 아이들을 돌본다.
돌보는 일은 정서적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인데
측정하기가 매우 곤란할 뿐더러
어떻게 평가해야할지에 대한 기준도 없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은 생산력을 기준으로 평가되어 왔다.
재생산과 관련된 노동은(가정관리, 육아 등)
일부 여성주의그룹을 제외하고는 진지하게 논의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이 누군가? 를 밝혀내는 일은 정말 어렵다.
포괄적 의미에서 인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거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은 모두의 관심사가 되지만
정작 이를 위해 누가 돈을 써야 하는가?에 이르렀을 때
사실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하고
그런 까닭에
임금소득만으로는 가정의 모든 문제를(위기와 재난) 해결할 수 없는 노동자들은
이에 대한 비용을
자본가가 가져간 이윤에서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구체적 대상을 '적'으로 지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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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자신이 노동자임을 선포하는 일이
보육노동자에게 중요한 까닭은
적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이기보다는
동지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노동자 계급에 속해 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일이 노동자 계급전체에 복무하는 일이라는 점을
깨닫기 위해서는 몸으로 이를 경험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이런 자각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몇가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흠- 쓰다보니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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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따라 보게 됐습니다 다음글도 기대하죠...^^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