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4.19혁명 50돌, 김 수영 -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4월 그 가슴 위로

View Comments

올해는 한국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몇 십주기를 이루는 해인 만큼 기억하고 되새길 것들이 많다. 예전에는 달력투쟁이라 불리는 행사들을 꼬박꼬박 진행했는데, 그냥 평범한 사회인이 되다 보니 무슨 계기가 있지 않으면 챙기기 어렵다.

 

4.19 혁명 50돌도 그러했다. 스크랩해 놓은 기사들을 살펴보니 4.19 혁명을 다룬 기사들도 보였는데, 이에 대해 별다른 말도 하지 않은 채 50여일이 지났다. 4.19는 이제 더이상 우리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일까.

 

생각난 김에 관련기사를 발췌해서 담아오고, 생각나는 시 하나와 노래 하나를 옮겨온다. 시는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이다. 5년 전에 네이버블로그에 옮겨놓았었는데, 기억이 새롭다. 노래는 학부 때, 그러니까 벌써 20여년 전에 4.19 때면 불렀던 '4월 그 가슴위로'이다.

 
김 수영 - 어느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교과서 상식
이 시는 김수영이 1965년 11월 어느 날 고궁 나들이를 다녀오고 나서 쓴 작품이다. 1연 첫행의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시적 진술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역사와 현실의 불합리, 부조리에 대해서는 저항하거나 비판하지 못하고 일상의 사소한 일에만 화를 내는 자신의 소시민적인 태도에 대해 자기 비판하고 있다. 4.19 혁명으로 한층 부풀었던 자유와 사랑과 양심에의 희망이 5.16 군사 구테타로 일순간에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김수영은 소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일만이 가능한 자신의 처지를 조롱함으로써 한 때 그가 소리 높여 외쳤던 자유, 사랑, 혁명이 좌절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은 과거 우리의 뼈아픈 역사와 당대 현실을 시의 대상으로 삼아 발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 '폭포', '풀' 등과 함께 김수영 시의 시사적 의미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2005년 4월의 개인적 소회
나는 왜 일상에서의 모순을 사소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태도가 부족한 것은 단지 존재 자체의 문제만은 아닐텐데... 소심하고 민감하다는 것은 말뿐이었는가.
 
나에게는 왜 거시적인 것, 커다란 것만 보였던 것일까. 김수영이 스스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한다고 자아비판할 때, 나는 나에게 그런 조그만 것이 어떤 이에게는 얼마나 소중하고 처절한 것인지를 간과하였다. 하긴 내 자신도 이해를 시키지 못하는 주제에, 설득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지금까지는 내내 부정해와서 인식하지 못했는데, 내가 잘 삐치는 줄 미쳐 몰랐다.  
  

4월 그 가슴 위로
 
이젠 우리 폭정에 견딜 수 없어
자유의 그리움으로 분노를 뱉는다.
아 총탄에 뚫린 사월 그 가슴위로
넋 되어 허공에 흐르는 아 자유여 만세

이젠 하나 될 마음 견딜 수 없어
두 쪽 난 조국의 운명 입술을 깨문다.
아 총탄에 뚫린 사월 그 가슴위로
뜨거운 가슴으로 일렁이는 통일의 염원이여

이젠 우리 독재의 사슬을 끊고
민주의 행진으로 발 내딛는다
아 총탄에 뚫린 사월 그 가슴위로
피맺혀 강물로 흐르는 아 민주여 만세
 
    

-------------------------
[2010 연중기획]4·19는 왜 ‘미완의 혁명’이 되었나 (2010 04/13ㅣ위클리경향 870호, 박태균 서울대 교수)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한국 현대사 헤게모니는 보수적 부르주아지 세력이 차지

 
4·19는 혁명세력 또는 진보세력과 부르주아지에 기반한 보수세력이 함께한 혁명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르주아지에 기반한 보수세력이 혁명 과정에서 한 역할은 거의 없었다. 부통령 장면은 4·19 혁명의 와중에 부통령직을 사퇴하고 책임을 회피했다. 진보세력과 대중의 결합에 보수세력을 업었을 뿐이다. 그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 보수세력은 ‘반혁명세력’으로서의 본래 본질을 드러내면서 혁명·진보와 결별하고 오히려 파시스트 세력과 손을 잡았다.
 
4·19 혁명 이후 부르주아지적 보수세력이 우리 사회에서 단 한 번도 주류적 역할을 내준 적은 없었다. 유신체제가 이들에게 시련을 주었을 때 이들은 재야와 손을 잡았고, 심지어 노동운동까지도 도와 주었다. 그러나 민주화 혁명 이후 혁명·진보의 가치가 수면 위로 등장하자 이들은 다시 자본주의 지키기에 나섰다. 그리고 이들에게 강력한 힘을 준 것은 급격한 변화를 꺼려하는 대중의 보수성과 민주주의·자본주의 제도의 탁월함, 이를 지원하는 미국이었다.
 
무엇보다 다행이었던 것은 한국 사회의 주류인 부르주아지적 보수들이 건강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건강했던 것은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극우(파시스트)와 극좌(공산주의)의 힘이 너무 강하게 작동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진보·혁명 세력과 건강한 부르주아지 보수세력의 결합은 한국 사회 민주화에 가장 큰 동력이 됐다. 진보·혁명 세력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단 한 번도 이 사회의 헤게모니로서 작동하지 못했다. 일부 진보세력이 정권의 중심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반혁명 보수세력의 헤게모니 안으로 흡수됐다. 우리는 구조조정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또 이를 50년 전에 민주당 정부 아래에서 미국이 장면 정부에 요구한 공공요금 인상, 환율 현실화, 외화유치법 등 사회 개혁 과정에서 경험했다.
 
분명 4·19가 진보와 혁명의 정신 아래 이뤄졌음에도 헤게모니는 보수적 부르주아지 세력이 장악했다. 만약에 조봉암·진보당 같은 강력한 진보·혁명 세력이 있는 상황이었다면 미국이 이승만으로 하여금 하야하도록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이러한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통해 1979년 10·26 이후의 과정,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과정,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의 지난 10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
[4·19혁명 50주년](上) 지방과 민주주의 (경향, 손제민 기자, 2010-04-14 18:27:22)
ㆍ대구·마산 ‘저항의 도시’에서 ‘보수의 아성’으로
 
“선생님, 질문 있습니데이. 하필 야당 강연회가 있는 일요일에 등교시킨 이유가 뭡니꺼. 거짓말은 하지 마이소. 우리한테는 정의를 말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 이율배반 아닙니까. 선생님, 비겁합니더.”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극에 달했던 1960년 2월28일 일요일에 교장 지시로 등교한 대구 경북여고 학생들이 교사에게 던진 질문이다(이창희 안동대 교수). 이어 경북고, 대구고 등 대구의 8개 고교 학생들이 독재정권을 비판하며 거리로 나왔다. 관제데모에 동원되던 고등학생들이 최초로 일으킨 자발적 시위였다.
 
함종호 ‘4·9 인혁재단’ 상임이사는 대구가 보수화된 계기를 1964년과 71년 대구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혁그룹’ 활동가들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조작사건에서 찾는다. 특히 71년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23명 중 13명이 대구 출신이며, 사형자 8명 중 5명, 무기수 7명 중 3명이 대구(경북) 출신이다. 대구 사람들에게 권력에 저항하면 성히 살 수 없다는 인상을 깊이 남겼다는 말이다. 박 정권은 또한 4월혁명의 중심인 대구대·청구대를 통합해 영남대를 만들고 그 자신이 주인이 됐으며, 2·28 운동 발원지인 경북고 출신자들을 이른바 TK세력의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삼음으로써 대구의 4월혁명의 중심 근거지들을 무너뜨렸다. 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무상급식 논쟁 과정에서 가장 소극적인 곳이 ‘교육도시’ 대구이며, 2010년도 예산에서 학력평가 관련 항목은 대폭 늘린 반면 급식예산은 42%나 삭감된 곳도 이 지역이라는 점(이창희 교수)은 50년 세월이 무엇을 남겼는지 말해준다.
 
지역 민심이 보수냐, 진보냐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방에서의 민주주의 자체가 후퇴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인천·경기 지역의 경우 재정자립도가 70~80% 수준으로 지방정부의 분권은 비교적 이뤄졌다고 할 수 있지만 자치는 잘 되지 않는다는 평가다(정영태 인하대 교수). 당선자가 독단 행정을 하는 ‘위임 민주주의’가 심각하고, 주민들이 재개발 등 중요 사업에 의견을 반영할 길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중요 결정을 앞두고 공청회가 열리지만 ‘이의 없죠?’라고 묻고 통과시키는 형식적 절차에 그친다. 충분한 의견 수렴이 없으니 지방의회나 시·도청 앞에 집회·시위가 그칠 날이 없다. 집회·시위가 가능하다는 것이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현 정부 들어선 그런 불만 표출마저 막히는 경우가 많다.
 
------------------------------------
[4·19혁명 50년]“유공자이면서 사찰 대상”… 한 맺힌 유족들 (경향, 손제민 기자, 2010-04-14 18:24:45)
ㆍ김주열 열사 모친 집요한 회유·감시
ㆍ유공자 인정 못받은 부상자도 많아
 
--------------------------------------
[4·19혁명 50주년](中) 50년을 거슬러 만난 4·19와 젊은이 (경향, 손제민 기자, 2010-04-15 17:42:57)
ㆍ“과거엔 젊은이들이 외면할 수 없는 ‘큰 질문’이 있었지”
ㆍ“학벌·승자 독식 시대… 대의보다 ‘먹고사는 문제’ 절실”
 
금메달리스트나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이 되지 못하는 대부분의 평범한 20대는 G세대에 속하지 못해요. 지금 한국사회의 학벌 중심주의, 병적인 경쟁, 승자독식 체제 같은 것들의 모든 책임이 기성세대에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기성세대는 요즘 세대들이 열정 없이 기계적으로 산다고 말하기 전에 왜 취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지, 입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지 한번쯤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
[4·19혁명 50주년](下)기억과 유산은 어떻게 전승되나 (경향, 손제민·백승찬·이영경 기자, 2010-04-16 18:00:54)
ㆍ예술작품 속에 잊힌 듯 살아있는 ‘금기를 깨는 정신’
 
역설적으로 예술 작품 속에 부재한 4월혁명에 대한 ‘기억’을 가장 많이 메우는 것은 기념관이다. 서울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지에는 4월혁명 사망자 295위의 위패와 묘가 안장돼 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93년 묘지를 성역화한 뒤 이곳은 대망을 꾸는 이들이 다녀가는 코스가 됐다. 묘지 기념관 다른 층에는 4월혁명 희생자 유서내용도 전시돼 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옵소서.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은 알고 있습니다.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하세요.”(4월혁명 때 남은 유일한 이 유서는 당시 한성여중 2학년이던 진영숙 열사가 쓴 것이다. 진 열사는 60년 4월19일 밤 서울에서 버스 차창 밖으로 시위 구호를 외치다 경찰 총탄에 맞아 숨졌다.)
 
-------------------------------
[4·19혁명 50주년]“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경향, 글 박주연·사진 김문석 기자, 2010-04-16 18:00:06)
ㆍMBC 특집극 ‘누나의 3월’ 집필 김운경 작가
 
-------------------------------
[시론] 4월에 부르는 노래 (한겨레,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10-04-18 오후 08:42:40)
 
암흑천지에서 어린 학생들이 일어나 김수영 시인이 노래했듯이, “전국의 초등학교란 모든 초등학교에서, 그리고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던” 대통령의 사진을 떼어낸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4월혁명은 송건호가 말했듯이 기성세대, 즉 ‘이’(利)의 세대를 부끄럽게 만든 의(義)의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거대한 신호탄이었다. 4월혁명으로 우리 국민이 얻은 것은 이승만 하야가 아니라, 국민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으며,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그리고 직접 행동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를 얻을 수 없다는 엄청난 교훈이었다. 그것은 국가를 진정한 민주국가, 국민의 국가, 인권국가로 만들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었다. 그래서 4월혁명은 폭력국가, 불법 국가, 친일파 국가, 경찰국가, 속임수 국가를 자유와 민주의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의 국가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4월혁명이 미완의 혁명이라는 말은 ‘창자가 메마른’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나서지 못했다는 말일 것이다. 배고픈 국민들이 매수되기를 거부하고 진압에도 저항하면서 자유의 노래를 합창할 때 4월혁명은 완수될 것이다.
 
-----------------------
[사설] 민주주의의 퇴행 속에 맞는 4·19혁명 50돌 (한겨레, 2010-04-18 오후 08:46:34)
 
4·19혁명은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누릴 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음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민주주의의 본질인 사상·언론·집회의 자유는 물론 삼권분립 등 정치적 민주주의가 철저히 파괴됐다. 이렇게 유린된 민주주의는 저절로 회복되지 않는다. 외세나 위정자들이 나서서 되찾아주지도 않는다. 젊은 학생과 시민들은 목숨까지 바쳐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그럼으로써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를 향유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4·19혁명 50돌을 맞는 오늘, 우리는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퇴행에 직면해 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에 혈안이 된 기득권층과 그 주변 세력이 우리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해가고 있다. 정치영역뿐 아니라 사회·경제·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민주적 절차는 무시되고 ‘촛불집회’ 등 반대 목소리는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억압받는다. 6월항쟁 이후 자리를 잡아가던 민주주의적 규범과 절차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6/08 12:31 2010/06/08 12:31

댓글0 Comments (+add yours?)

Leave a Reply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gimche/trackback/1036

Newer Entries Older Entries

새벽길

Recent Trackbacks

Calende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