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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 담론의 정치-사회적 배경 (홍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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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와 희망>이라는 잡지에 흥미있는 글들이 실리는 모양이다. 프레시안에서 이를 소개하고 있다. 아래 발췌한 홍성민 교수의 글에 다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준다. 글의 초점은 박세일 교수의 <창조적 세계화론>에 대한 비판에 가있는 듯 하지만, 그보다는 진보담론의 문제점과 그에 대한 대안을 다룬 부분에 눈길이 갔다. 물론 글 자체에서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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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 담론의 정치-사회적 배경 (프레시안, 홍성민 동아대 교수 (정치학), 2010-06-12 오전 11:06:29_
[미래와 희망 3호] 박세일의 <창조적 세계화론>에 대한 비판
 
1. 언어와 정치
언어의 성격을 기준으로 볼 때, 한국사회에서 경쟁하는 보수/진보의 구분은 세가지 차원에서 가능하다. 첫째는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정치적 진보/보수를 구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경우 진보/보수는 이념적인 내용과 사상적 근거에 의해서 구분된다. 이러한 수준에서 보면 진보의 이념과 내용은 시대와 상황을 넘어서 고정불변한 진리로 보이며, 정책적 대안도 여러나라의 특수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념적 내용을 기준으로 판단하건대, 한국의 진보는 현재 19세기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답습하고 있다.
 
두 번째는 담론의 수준에서 정치적 진보/보수를 구분 할 수 있다. 담론이란 언어의 사회적 효과에 주목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노동자"라는 말을 선호하는 대신 한국 보수 진영에서는 "근로자"라는 단어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두 단어의 의미내용은 동일하지만 그 담론적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정책적 내용보다는 어휘의 사회적 효과와 언어대립관계가 한국사회에서 진보/보수를 구분하는데 중요하다. 보수가 효율성, 자율성, 민영화, 국제화등의 단어를 활용하는 반면, 진보는 평등, 연대, 공공성, 민족주의 등을 자주 사용한다. 이러한 단어의 대립구도는 의미의 내용보다는 단어의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중요하다. 예컨대 효율성은 대체로 평등이나 공공성과 대립하여 이해되는 것이 보통인데, 한국사회에서는 효율성의 담론적 효과가 평등이나 공공성보다 보다 광범위하게 지지층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반 국민들이 언어에 적응하는 경로를 통해서 면밀히 분석해야 알 수 있는 사항이다.
 
세 번째는 언어시장의 논리를 기준으로 진보/보수를 구분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담론이 텍스트 공급의 차원을 강조한다면, 언어시장은 텍스트가 생산된 사회적 배경에 더 주목한다. 또 이러한 텍스트의 어휘들이 일반 개인들에게 어떻게 수용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또 시민사회에서 정부의 정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나 언론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요즘과 같이 시민단체가 활성화된 시기에는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정부의 정책을 두고 찬성과 반대의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여기서 정부정책의 호응도가 결정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또 언론의 세력투쟁도 매우 중요한 변수중의 하나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보수언론의 헤게모니는 진보가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여 진보진영에서는 인터넷 활용을 통해 게릴라 전술로 담론의 저항진지를 만들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와 공중파는 물론, 인터넷, 모바일 폰에 대한 언론규제법이 통과되고 있어 게릴라 전술을 통한 여론형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나아가 개인들이 정책들을 당연한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익숙하게 되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것을 개인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도 빼놓을 수 없다.
 

1) 국제정치/국내정치
박세일 담론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정책제안이 강한 반향을 얻고 있는 이유는 국제정치적 역학구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담론은 압도적으로 미국학계에서 생산된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국제적인 공인을 등에 업고 쉽게 국내정치로 진입된다. 박세일의 보수담론은 미국정치학계가 만들어 낸 "민주화 이행론", 세계은행이 생산한 "거버넌스", 보수적 관료와 투기적 상업은행이 연합하여 창출한 "워싱턴 컨센서스"를 한국식 버전으로 바꾸어 놓은 전형적이 신자유주의 담론이다.
 
리더쉽, 정치개혁, 행위이론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중요한 기반이다. 그리고 구조조정의 프로그램이 남미 제국에서 적절하게 적용되지 못하게 될 때 "거버넌스"의 효율성을 기치로 세계은행이 개입하여 국내경제를 조정하게 된다.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의 논리는 대체로 초창기에 아프리카에서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원된 개념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세계은행이 제 3세계를 국내거시지표를 두고 일괄적으로 통제하는 개입주의정책의 기반으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민주화 이행론/거버넌스/인권은 국내정치/국제정치경제/보편적 이상주의를 대표하는 학문적 개념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박세일의 선진화/세계화/공동체주의 담론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신적 에농세(ENONCE)라고 할 수 있는 3가지 담론구조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2) 시민사회/개인 수준
오늘날 한국의 대학교수는 특정한 이해관계를 보편적인 것으로 위장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정당성을 동원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언론의 개혁문제를 거론할 때는 반드시 지식인사회의 계급성과 학언의 유착관계를 염두해 두어야 한다. 박세일의 담론은 매우 공식적인 학술담론으로 포장되어 있고, 그 학문적 깊이도 일견 깊어 보이나 결국 보수세력의 이해관계에 봉사하고 있다. 박세일이 보수언론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담론을 전파시키는데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박세일이 <창조적 세계화론>에서 현재의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연안정성(flexicurity)'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결국 노동유연성을 인정하는 토대위에서 개선책을 찾자는 시도이다. 공병호나 구본형의 "성공학 담론"이 노골적이고 천박하게 친자본주의 편을 드는 반면, 박세일은 논리면에서 보다 '유연하고', '노동자의 편에 선 듯한'인상을 준다. 그러나 자본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노동자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보통사람의 눈에는 이면의 논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훨씬 설득력이 있고, 그래서 훨씬 위험하다.
 
시민사회를 거친 담론의 영향력은 개인에게 출판물을 통해서 전달된다. 한국에서 출판은 개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도서가 개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출판은 특히 개인이 정치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조정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공식적인 정치언어들은 대부분 학문적 훈련을 요구하는 것들이며, 따라서 보통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세계화와 관련된 포스트 포디즘, 노동의 유연성, 생산적 복지 등은 상당수준의 사회과학훈련을 거쳐야만 알 수 있는 개념들이다. 따라서 보통사람들은 간접적인 정치적 상징을 통해서 실제를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책들이 민중의 정치적 표상을 결정한다. 박세일 담론의 효과는 사실 이러한 우회로를 거쳐 개인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베스트 목록의 변화만을 놓고 보더라도 한국사회에서 개인들의 정보습득과정이 압도적으로 기능적인 경영학, 처세술, 영어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경영학 관련 서적은 미국의 경제패러다임과 자본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박세일의 세계화론이 경영학담론의 지원을 받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진보담론의 문제점과 제안
대체로 진보담론은 국가수준의 담론, 간혹 시민사회 수준의 담론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국제수준이나 개인화수준의 담론이 정비되지 못한 상태이다. 더구나 국가수준의 담론이나 시민사회의 담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해 화음으로 들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근 진보진영에서 역동적 복지국가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것이 시민사회에서 강조하는 생태민주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최장집의 민주화 이론, 임혁백의 민주주의 이론도 사실은 1980년대 윌슨센터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 낸 "민주주의 이행론"의 아류이다. 최장집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던 아담 쉐보르스키는 폴랜드 출신의 맑시스트였으나, 80년대 후반이후 윌슨센터의 프로젝트에 동원되면서 미국학계에 적응하게 된다.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맑시즘을 견지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려는 시도였다면, <국가와 시장>, <민주주의 와 시장>, <민주주의와 발전>들은 민주주의 이행론의 패러다임에서 작성된 전형적인 프로젝트 결과물들이다. 초창기 쉐보르스키에서 배운 최장집에게 비교적 맑시즘의 색깔이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 비하여 임혁백은 쉐보르스키 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시카고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그가 수입하는 담론은 주로 민주주의 이행론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장집 자신도 민주주의 이론을 보편성의 틀 안에서 이해했고, 그것을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려했다는 점에서 보면 미국의 세계전략과 학문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자주 인용했던 뤼시마이어의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는 챨스 틸리의 <국민국가의 형성과 계보>와 함께 근대화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홍보물로 제 3세계의 민주발전의 전형을 미국으로 바라보도록 만든 이데올로기 선전물이었다.
 
보통사람들이 담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을 늘 의식하고 진보담론을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적어도 최장집의 민주화이론들은 당대에 국제수준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시민사회 수준에서 상식적인 반향을 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정치현실과도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비교하여 좀더 급진적인 진보담론, 이른바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PD/NL담론들은 운동권 내부에서는 치열한 논쟁거리였지만 정작 일반 민중들 수준에서는 그 차이점이 뭔지, 내용이 뭔지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80년대 대학가의 운동권 담론이 최장집 수준의 민주화이론과 서로 조응하여 1987년 체제를 만들어 내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운동성과는 구조적 모순이 극에 달해 시민사회가 자동적으로 폭발한 것이지, 이론과 담론효과가 민중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 진보진영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전히 국가수준의 담론에 매몰되고 있으며, 이념적 진정성에 집착하고 있을 뿐, 이것이 시민사회에서 어떤 조응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또 국제담론에 어떤 대응을 내놓을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실 진보진영이 큰 틀에서 제시하고 있는 복지국가론, 사회민주주의도 따지고 보면 60년대 근대화모델의 아류일 수 있다. 후기 포스트 포디즘 시대에도 여전히 복지국가가 가능할까 ? 투기자본의 세계화를 맞이한 시대에 노동자 복지는 어떻게 가능할까 ? 국제화를 맞이하여 과연 대학의 법인화를 끝까지 저지할 수 있을까 ?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매우 구체적이고 매우 급박하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80년대의 원칙론을 버리고 정치언어를 시장의 논리, 언어게임의 논리로 이해해야 한다. 수용자의 입장에서 담론을 바라보고 생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과연 푸코, 들뢰즈, 네그리의 맑시즘으로 한국의 사회문제에 응답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한국정치는 개별화되고, 일상생활에 깊이 스며있는데 아직도 사회운동의 구호는 반이명박 연대, 노동자연대 등등과 같이 거대담론의 수준에 멈추어서 있다. 계급이 아니라 직업군, 세대군, 학력차별군 등으로 현실적인 행위이론을 생산해야 한다.
 
아직도 노동자 계급의 투쟁의식을 강조하는 수준이라면 보통사람들을 설득할 수가 없다. 오늘날 개인들은 노동자이면서도 이미 부르조아적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중산층이면서도 건전한 공익의식을 포기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저들의 행동을 허위의식이라고 비난 할 수도 없다. 더 이상 그들은 이성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의 껍데기를 채우고 있는 내용물은 욕망, 감정, 불안, 열등감이며 이것은 주로 소비광고, 영화, 드라마, 노래들에 의해서 채워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개인들의 주체화과정을 '욕망의 정치'라는 패러다임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주체형성과정이 담론의 효과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차후에 밝혀져야 한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데 진보진영이 학문적 수준에서도 할 일이 많다. 진보진영도 보수진영이 하듯이 거대한 틀에서 전략적 담론을 만들어 갈 통일된 조직이 필요하다. 영민한 통찰력과 매우 유연한 전략적 자세가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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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8:46 2010/06/12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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