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
민주주의|국가론|정치학|철학 등 View Comments
미국 관료제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미국 초기 공화정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2006년경에 닐 우드가 쓴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라는 책을 읽고 정리해 둔 것이 생각났다. 따로 파일로 있는 건 아니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네이버의 행정학 카페에 있더라. 정리해둔 글을 다시 읽고 여기로 옮겨왔다.
2006.10.03 16:27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 거세된 민주주의, 괴물이 된 자본주의
원제: 『미국의 참주정: 자본주의와 미국의 쇠퇴 Tyranny in American Capitalism and National Decay』(London: Verso, 2004)
닐 우드 지음, 홍기빈 옮김, 개마고원, 2004.
재미있는 책이다. 짧은 까닭에, 그리고 각주나 미주가 달려 있지 않은 에세이인 이유로, 단숨에 읽었다. 물론 3-4일 가지고 다니면서 읽은 것이니 좀 시간은 걸렸나.
이 책은 엘렌 메익신스 우드(Ellen Meiksins Wood)의 남편인 닐 우드(Neal Wood)가 지난 2003년 숨을 거두기 직전 탈고한 마지막 저작을 홍기빈이 옮긴 것이다.
이 책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대제국들이 모두 몰락했고, 그 원인은 내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탐욕과 민주주의라고 한다. 탐욕, 즉 화폐와 재산에 대한 욕심 자체와 이것이 사회 통합에 주는 영향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 그리고 민주주의와 그러한 물욕과의 관계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최근에 내 자신이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이 많은 까닭에 목차를 보고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되었다.
“고전 고대 이래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탐욕과 민주주의란 모두 사회통합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번성하면서 탐욕은 점차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아예 사회적 조화와 질서의 기초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21세기 초입에 이르면 사회적 단결의 궁극적 목적이자 단결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믿도록 되었다. ... 새 옷으로 단장한 탐욕, 그리고 본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변형되어버린 민주주의의 개념이 합쳐져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심장과 혼이 태어났고, 디들은 자본주의 발전에 꼭 필요한 독특한 원동력이 되고 말았다.” (26쪽)
목차
1장 눈앞에 닥친 위험
2장 위장되고 정당화된 탐욕
3장 송곳니가 뽑히고 모습이 바뀌어버린 민주주의
4장 자본주의라는 참주정
5장 사회적 퇴락의 징조들
6장 미국 정치의 공허함
7장 대안적 사회는 가능한가
닐 우드는 탐욕에 대한 종교적 경고에서 잘 드러나듯이 사회통합을 막는 암적인 요소인 동시에 자본주의 이전 시기에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던 ‘탐욕’이 18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 ‘이익’의 개념으로 변신하면서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등장하는 것에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닐 우드는 애덤 스미스가 왜곡 선전되어 왔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는 상인들 및 제조업자들의 “얼토당토않은 질투심”, “인정사정 두지 않는 탐욕”, “독점을 향하는 정신” 등을 들어 “어느 쪽도 인류의 지배자가 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하였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여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을 조화시키는 것은 오직 특정 조건들이 갖추어질 때에만 가능하다고 명확히 밝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말이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한 번씩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았다)의 작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완벽한 자유와 정의의 자연적 체제”라는 틀이 마련되는 것이며, 이러한 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자연적 체제’의 관건은 정부이며, 정부의 적극적인 활동이다. 상업사회에 있어서 정부는 사적인 경제활동이 훼방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도록 법을 강제해야 하고, 경쟁이 벌어지도록 보장해야 하며, 독점을 방지하고, 자유무역을 촉진하고, 또 동시에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계약의 효력을 보장하고, 부채의 지불을 강제하고, 어떤 개인이라도 다른 개인의 활동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정부는 또한 공공의 비용을 써서 인간·재화·원자재의 이동을 촉진할 수 있도록 공공사업·도로·항만·운하 등을 세우고 유지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지지할 ‘자연적 체제’를 창출하는 정부의 가장 중요한 궁극적인 역할은 모든 계급의 청소년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대학과 각 교구의 학교들과 같은 공공기관들을 물질적으로 보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공공의 이익을 목표로 하여 정부가 해야 할 일로, 정부는 소수만이 아닌 모든 시민들의 행복과 번영, 그리고 당연히 생산에 대한 소비의 우위를 달성해야만 한다.
따라서 스미스의 관점에 있어서 정부가 ‘보이지 않는 손’이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는 개입의 기능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55-56쪽)
닐 우드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의 이런 주장은 장기적으로는 ‘신의 섭리’가 작동하여 노동자들의 부당한 고통과 어려움을 막아줄 것이기에, 정부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가져야 하며, 경제에 대한 개입은 삼가야 한다고 하면서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신의 섭리’에서 우러나오는 장기적인 이익의 조화라는 개념을 가져다 놓은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바뀌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을 통한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스미스의 단서조항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버크 이후 도덕적 낙인이 찍힌 ‘탐욕’이라는 용어는 중립적이고 비난의 뜻이 없는 ‘이익’, ‘자기이익’, ‘이윤’ 등이 사용되었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 경제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자 개인들의 상호의존, 나아가 사회적 통합의 진정한 기반이라고까지 여겨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탐욕’이 아닌 ‘이익’이라는 말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인간행동 최악의 특징이며 사회질서 유지에 심각한 위협이라고 여겨왔던 탐욕은 이제 점잖은 옷을 차려입고 전혀 다른 것으로 변장하게 된 것이다. ‘탐욕’은 멋진 양복을 걸쳐 입고 ‘이익’의 개념 뒤에 숨어서, 탈선적인 인간행동은커녕 정상적이며 또 정당한 사물의 질서가 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적 심성이 거침없이 달려 나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 셈이다.” (62-63쪽)
민주주의에 대한 닐 우드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이것은 더글라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 나오는 내용을 해설해놓았다고나 할까.
“아테네는 여자들이 모든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되었고, 거류 외국인과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노예들을 배제한 결점이 있었으나, 그 당시로나 그 후 오랜 기간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모든 남자 시민들에게 가문·교육·재산·소득을 묻지 않고 완전한 정치 참여와 공직 취임의 권리를 보장한 특이성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가난한 자들의 지배”였다. 아테네에서의 빈부 차이도 현재 우리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리 과도한 편은 아니었다.
정치과정을 보자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모든 남자 시민들에 의한 직접지배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정책을 ‘주권적’ 의회에서 논쟁하고 거수투표로 결정하며, 주요 공직자들을 제비뽑기로 선정하고, 엄청난 규모의 민중배심원제도를 두는 등의 일들을 뜻한다. 의회에 참석하면 일당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가난한 시민들도 일자리가 없다고 해서 경제적 궁핍을 겪지는 않았다. ... 아테네인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의 의미는 약하고 불행한 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함축하는 것이었다.”(71-72쪽)
민주주의가 참주정을 막아주는 방패라고 찬양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참주정을 두려워했던 대부분의 사상가들과 논평가들은 가장 목청 높은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이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유명한 철학자들도 대부분 민주주의를 비판해왔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 등이 남긴 민주주의에 대한 비난의 말들은 실로 방대한 양을 이루고 있고, 옹호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래오래 살아남아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아테네인들의 실험을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최근까지도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평결은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었다.”(73-74쪽)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전개된다. 민주주의, 즉 인민의 직접 지배는 사회적 부패를 증대시키고 도덕적 타락에 적합한 조건들을 창출한다. 민주주의 하에서는 가난한 하층계급이 국가를 지배하며, 그 힘으로 자신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자들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킨다. 이 군중들은 돈과 재산과 권력과 지위를 놓고 서로 싸우고, 또 예전에 그들보다 위에 있던 자들과 다툰다. 탐욕과 야망으로 인해 시민들은 서로 성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싸움질에 돌입, 급기야 공동의 선(common good)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폭도들의 난장판’(mob rule)으로 변질된다. 부패와 갈등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 와중에 매력적인 인물이 나와 민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그러나 그런 자도 민중들의 호민관으로 자리 잡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고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쯤에는 완전한 참주(tyrant)로서의 본색을 드러낸다.”(74-75쪽)
이렇게 항존하는 타락의 위협에 대한 해독제로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은 ‘사회적 건전성’을 획득하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국가를 구조화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것처럼, “사회적 신분의 차별을 뚜렷이 하여 법의 지배에 두는 국가, 궁극적으로는 유산계급이 지배하는 국가”였다. 그 기초를 이루는 것은 1인 지배, 소수 지배, 다수 지배의 형태를 결합시켜 군주정·과두정·민주정의 특징들이 서로 엮여 있어, 견제와 균형의 체제가 제도화된 ‘혼성 정체’(polity)였다. 이러한 ‘혼성 정체’를 통해 확립될 사회적 건전성이란 민주주의 사회에 만연한 부의 축적과 탐욕 대신 사회 전체가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 그리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유산계급이 베푸는 좋은 모범을 따름으로써 그들 지배계급이 규정하고 강제하는 바의 공공선을 좇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틀에서 민중들은 최소한의 역할과 발언권만을 부여받게 되어 절대로 민주정에서와 같이 국가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76쪽)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은 민주정과 군주정에서 숨은 참주정의 가능성을 보고 특정한 혼성 정체의 형태를 옹호하는 열렬한 공화주의자로 변하였다. 헌법 초안자들의 목적했던 바는 민주주의가 아닌 공화국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인민들의 직접지배나 모든 형태의 다수지배에 커다란 공포와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설계하고 제도화한 성문헌법에 나오는 정부 체제가 이념으로 내걸었던 것은 법의 통치, 견제와 균형을 제도화하는 권력분립, 상·하원 양원제 등이었는데, 이중 민중이 직접 선출하는 것은 오로지 하원뿐이었다. ... 이는 어떤 면에서도 전통적인 의미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음이 명백하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역시 그러한 것을 의도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헌법은 어떤 형태의 참주정도 예방하기 위한 천재적이고 정교한 실험으로, 사회적 건전성이라는 목표와 사회적 부패 방지, 그리고 유산계급의 안전을 결합시킨 저 유서 깊은 ‘혼성체’의 한 변형인 것이다. 정부에 있어서 민중들의 역할은 헌법에 의해 제한되었던바, 이것 하나만으로도 갓 태어난 미국을 민주주의로 부를 수는 없게 되었다. 이러한 미국헌법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갖추게 된 것은 오낸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다. 미국 헌법이 그 시작부터 민주주의 헌법이었으며, 따라서 미국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정부라는 것은 커다란 신화일 뿐이다.”(77-78쪽, 192-193쪽)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게 된 것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 노동자들의 저항 때문이며, 이로 인해 미국헌법도 점차 민주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제한적 의미의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두어 절차로 정의할 수도 있고, 포괄적인 사회적 평등에 초점을 두어 내용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자의 절차적 의미로서만, 즉 정기적인 자유선거로 뽑힌 인민들의 대표들에 의한 정부라는 의미로서만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정부란 법의 지배, 견제와 균형을 위한 몇 가지 헌법적 구조, 복수 정당의 경쟁, 그리고 인신·재산·언론·결사·종교의 자유 보장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민주주의’에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79쪽)
“일반적으로 ‘다수의 지배’, 그리고 인민들이 어떤 형태로든 정부에 직접적인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한 모종의 뿌리 깊은 불신이 여전히 존재한다. 사회적 평등이라는 내용적 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문제는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소득·재산·부의 불평등이 아찔할 정도로 치솟아 오르는 사회, 그래서 성장하고 있는 소수의 손에 점점 더 많은 부가 집중되고 있지만 도무지 개선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으며, 부자들 아니면 선거에 출마할 능력이 없는 그런 사회라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일터에서의 민주주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더욱 적다.” (80쪽)
“사회적 권력의 분배와 관련된 내용적인 질문들은 완전히 무시된 채 개인의 권리나 자유의 보존과 같은 절차적인 측면에만 거의 전적으로 강조점을 두게 되면서, 민주주의라는 말의 의미는 이제 다수의 지배를 예방하고 억누르는 제도로 변질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100쪽)
나아가 민주주의의 내용을 자본주의 및 ‘자유시장’과 연관시켜 아예 똑같은 것으로까지 여기는 경우도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공통점을 찾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관념화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은 이제 민주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었고, 아예 동일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 자본주의란 개인 자유의 최대한의 신장이요, 특히 소비자들의 선택의 자유의 확장이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자유시장과 정부 개입의 최소화라는 생각은 권위 있는 발언자에게서도 결코 빠지는 법이 없다.
자본주의는 개개인들에게 최대의 자유 -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이름붙여졌다 - 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또 다른 특징으로 마구 떠받들어진 법적·사법적 평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능력을 위주로 하는 사회 조직양식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민주적이며 평등한 무계급 사회이다. 게다가 항상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어서 영원히 성장하고 진보한다. 진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뚜렷한 표식이다.” (28-29쪽)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사실상 상극의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영리 기업들, 그 사무실과 작업장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장소이며 민주주의적 절차와 내용과는 심히 동떨어져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자본주의적 기업이란 사실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기업이라면 조직의 위에서 아래로 명령이 내려오고, 권력 피라미드의 아래층에 있는 이들은 질문이나 이탈 없이 그것을 집행한다. 물론 경영진이 하급자들에게 토론과 제안을 권장하는 일도 있고, 기업의 본질인 권위주의가 ‘팀 활동’이나 ‘팀의 단합정신’ 같은 구호를 끌어들여 사용함으로써 종종 본질을 흐리지만, ‘팀’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야말로 개인의 이해·의견·활동 등을 일하는 집단의 조화와 효율성에 종속시키고 협동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인 것이다. 마차가 끄는 것이 말 몇 마리이건 팀 정신이 살아 있는 축구팀이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전자에는 채찍을 든 마부, 후자에는 코치와 주장이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에 ‘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똑같은 공적인 관계를 일컬으면서도 불만을 달래고 기업의 권위적 구조를 슬쩍 감추며 노동력의 단결을 통해 더 충성하고 더 협력하여 생산성을 올리도록 채찍질하는 말장난일 뿐이다.”(81-82쪽)
“탐욕과 마찬가지로 한때 심한 질타를 받았던 민주주의가 이익 및 자기 이익이라는 새 옷 속에 숨어 있는 탐욕을 증진시키고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강화하고 추진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완결 짓는 매듭인 양 추가적으로 인정되고 찬양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관행을 은폐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21세기 초의 ‘민주주의’란 이제 구호에 불과한 것으로서, 자본주의 기업과 그 확장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은폐하고 자본주의 기업이 정부와 정치마저 지배하게 된 것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눈속임으로 전락해버렸다.”(84쪽)
“민주주의는 종종 입헌주의와 법치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두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존중되는 것들이지만, 이론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민주주의 정부와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85쪽) “입헌주의가 예로부터 참주정에 대한 안전장치로 여겨져온 것은 타당하나, 민주주의는 입헌주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입헌주의의 원칙들을 체현하여 참주정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 아래 둘을 동일한 것으로 놓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100-101쪽)
“민주주의가 대충 정당화될 여지가 생긴 것은 민주주의가 이미 아주 결정적인 부분에서 이빨이 뽑혔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의 지배”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게 된 민주주의는 이제 정부에 대해 각종 책략을 부리는 부유한 자본가들의 손에 꽉 잡혀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다. ... 민주주의의 절차적 측면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민주주의의 내용에 있어서 결정적인 성격이 뒷전이 되어버렸고 대중들에게나 식자들에게나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능은 자본주의에, 정치적 기능은 그 파트너인 민주주의에 배당하는 식의 기묘한 노동 분업을 통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부하로 전락해버렸고, 자본주의의 정치적 반영물이 되어버렸다. 민주주의는 점차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다른 모습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사회적 평등, 정치적 평등, 심지어 법 앞에서의 평등(절차로서의 민주주의의 특징이라고 그렇게도 떠들어온)마저 내다버림으로써, 민주주의는 이제 완전히 거세된 것이다.” (85-86쪽)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주택 부족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치료도 받을 수 없는 사회에서 과연 민주주의 작동에 필요한 다양한 활동에 시민들을 참가시키고 또 그들에게 충성심을 불어넣어 민주주의를 번영시키는 일이 가능할까?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는 방식을 보면, 오로지 이런 저런 절차들과 제도장치들에 사람들이 따라주는가 아닌가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절차 및 제도장치들이 작동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위와 같은 사회적 조건들이 과연 제대로 갖추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87쪽)
“미국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격이 갈수록 넓고 깊게 벌어지는 불평등사회가 되어왔다. 민주주의에서 평등이 수평적 혹은 절대적 동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풍족한 자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의 격차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은 분명히 ‘1인 1표’와 ‘법의 통치’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칙 또한 부정하는 것이다. 경제적 권력이 소수의 손에 엄청난 양으로 집중되는 곳에서는 이들의 투표가 덜 부유한 대다수의 표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지며, 또한 부자들에게 적용되는 법과 가난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게 된다.
평등이란 절차상의 규정들 이외에는 민주주의와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경제적 의미에서의 평등이란 이제 더러운 말이 되어버렸고, 재빨리 ‘자유’라는 말로 대체되어버린다. 평등이라는 말이 두드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밀어넣는 이들은 이 ‘자유’라는 말을 통해 사업과 기업활동에 있어서 정부 개입과 통제를 받지 않을 자유, 재산획득의 자유, 시장의 자유, 소비자 선택의 자유 등을 의미한다.
물론 자유는 민주주의에 있어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자유란 우리와 차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향해 적극적이고도 정직한 관용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제 자유는 날마다 더 적은 숫자의 부자들이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의 숫자는 더 늘어가면서 그 격차가 벌어지는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공허한 개념으로 전락한다.” (179-178쪽)
제대로 발전된 체제로서 등장한 지 150년도 되지 않은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적 행위에 근거를 두면서 이를 ‘이익’, ‘자기 이익’ 등으로 바꾸어 민주주의라는 포장을 씌워 보편화시키고 제도화시켜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이념적 정당화와 사람들 마음속의 자본주의적 심성이라는 원동력은 예전에 사회적 질병으로 여겨지던 것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즉 정치 공동체의 자연적 조건이요 사회적 건전성으로 변형시켜놓았다.
실로 역설적인 점은, 현실의 사회적 건전성을 재는 척도가 새롭게 바뀌는 바람에 새로운 형태로 지금 출현하고 있는 참주정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발달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문화라는 참주정으로,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속속들이 파고들어오는 이 새로운 형태의 참주정 앞에 가난한 자, 부유한 자, 약자, 강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88-89쪽)
“종래의 참주정과 새로운 참주정의 주요한 차이 중 하나는, 새로운 참주정은 구체적으로 인격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예전의 참주정에서는 권력과 권위를 멋대로 휘두르는 자가 누구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의 소유와 통제가 파편화되고 분산되면서 새로운 참주정의 진정한 건설자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자본주의적 기업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나 그 개인적 성향과 무관하게 경쟁과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이라는 비인격적 존재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비판적으로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기들의 연금과 퇴직금을 고용주들이 쥐고 투자하고 있는 이상 꼼짝없이 자본주의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 새 참주정의 놀라운 특징은 전체 체제에 우리 모두가 붙들려서 칭칭 엮여 있다는 점이다.” (105-106쪽)
닐 우드는 거세된 민주주의와 괴물이 된 자본주의에 장악된 미국이란 제국은, 긍정적 의미의 ‘외부의 공포’를 갖지 못한 로마제국이 멸망의 길에 들어섰듯이, 더 이상 어떤 경쟁자도 없는 유일의 초강대국이 됨으로써 스스로 종말의 싹을 잉태하게 되었다고 본다. 저자는 원래부터 부와 그에 따른 특권에 기반한 계급사회였지만 점점 더 그 성격이 강해지고 있는 미국의 빈부격차와 범죄율 등의 수치들을 낱낱이 들추며 그 징후들을 읽어내면서, 가장 주목할 것은 무엇보다 미국 정치의, 민주주의의 급격한 쇠퇴 혹은 타락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실업 관련 수치들은 선진 산업국들 중 가장 낮지만, 이는 상당히 진실을 숨기고 있는 수치들이다. 약 1,200만, 즉 전체인구의 5%가 실업 상태이며, 여기에 600만 명 정도가 ‘조건부’ 혹은 일시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약 1500만 정도가 수당도 없는 파트타임 직장이나 노동시간 단축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거기에 추가하여 300만 이상이 실업상태이지만, 수당지급 자격 미달이거나 일자리 찾기를 포기했다는 이유로 통계에 잡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급속히 불어나고 있는 감옥에 있는 200만 이상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하여 실업, 파트타임 직장, 군대, 감옥 등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합칠 경우 전체인구의 10~15%에 달한다.”(118쪽)
“미국이 점점 더 부유해지고 제국주의적으로 되고 한줌의 부자들과 다수의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계급사회로 변해가면서 동시에 시민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은 악화되어 왔다. 인구의 15%인 4000만 명 이상이 1년 내내 충분한 의료보험 없이 살고 있으며, 의료보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무려 700만에 이른다. 반면 형편이 괜찮은 이들과 부자들은 자신과 가족들에게 가지가지 항목을 포함하는 값비싼 건강보험을 사적으로 구입하든가 직장에서 얻든가 한다. 빈곤선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가정에서도 18세 미만의 많은 아이들이 의료보험이 없는 상태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는 고용주들이 피고용자들의 부양가족에 대한 의료혜택을 삭감하거나 없애버리기 때문이다.”(124쪽)
닐 우드가 지적하는 미국사회의 소비주의는 우리에게도 낯설지가 않다.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본질 자체가 이제 구매충동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이는 어떤 소매 유통업체의 구호에 잘 드러나 있다.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옛날에 주장한 것처럼 우리의 합리성을 빌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도 정신도 없이 그 저 영원히 계속되는 구매와 돈쓰기의 광란에 온몸을 던지도록 프로그램된 행위 메커니즘으로 전락한 덕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인 것이다. 신문·잡지·TV·전화·광고전단과 우편물·인터넷 등이 힘을 합쳐 우리 일상을 거대한 시장판으로 만들어버린다.”
“상품은 사고 나면 금방 낡은 것이 되며, 옷에서 자동차와 컴퓨터에 이르는 유행의 변화는 최신 상품을 더 많이 더 많이 사고자 하는 욕망에 불을 지른다. TV나 라디오를 끈다고 해도 사방에 넘쳐나는 광고로부터 피하거나 숨 돌리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버스와 택시, 심지어 경찰차조차 꿈에 나올까 두려운 유치찬란한 색깔의 광고로 도배가 된 채 굴러다닌다. 정부의 지원 삭감으로 재정난에 몰린 대학들 중에는 기업 후원자를 찾아서 실험실은 물론 화장실, 강의동에까지 그 후원자의 이름을 그대로 붙이는 일도 종종 있다.”(141-142쪽)
소비주의에 비판에 더하여 삶의 속도에 대한 지적은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게다가 추석 연휴에 푹 쉬면서 재충전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처리할 기회로 여기면서 계속해서 일과 공부만을 생각하는, 지금의 나에 대한 따끔한 목소리이다. 지금 나는 메신저를 꺼놓았고, 연휴 때는 휴대폰도 꺼놓을 생각이다. 물론 괴로워도 슬퍼도 잘 울지 않는 캔디폰이기는 하지만...
“갈수록 가속도를 더하면서 거의 발광에 가까운 문화를 낳고 있는 미친 듯한 삶의 속도도 미국 생활의 특징이다. 만사를 잊고 떠나 쉬는 일은 아예 불가능하며, 심지어 잠시 일에서 풀려나 숨 돌리는 일조차 갈수록 힘들게 되었다. 노동은 갈수록 빨라지고 힘들어지고 있다. 휴식과 안정은 이제 사라질 위험에 처했다.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업무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사무실을 떠나 집에 있는 시간도 계속 침탈당하고 있다.
이 새로운 ‘상호연결성’(interconnectedness)은 우리의 안식과 사생활을 파괴하고 있으며, 만사를 잊고 쉴 기회도 빼앗아가 버렸다. 각종 업무와 사회생활에 필수품이 되어버린 핸드폰 덕분에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항상 연결 상태에 있게 된다. 컴퓨터의 사용도 언제 어디에서든 긴장을 풀 수 없게 한다. 가뜩이나 쥐들의 경주처럼 되어버린 미친 듯한 속도의 삶을 더 악화시킨다.
친구와 동료들에게 편지를 쓸 때 먼저 충분히 생각을 정리하여 조심스럽게 초고를 잡는 것에서 시작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아침부터 밤까지 이메일로 융단폭격을 하며 살고 있으며,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내는 그런 메일들은 거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옮겨 놓는 수준이다.”(143-144쪽)
“미국인들의 차에 대한 애착, 그리고 대부분의 장소에 차를 몰고 가야 한다는 필요 등으로 인해 우리의 문화는 무수한 면에서 구조가 바뀌게 되었다. 차에 대한 이러한 병적인 집착은 미국 사회의 다른 특징들은 계급 분열, 폭력, 소비주의, 미친 듯한 삶의 속도 등을 떠받치고 또 부추기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기둥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차량 밀도가 치솟으면서 기차 등의 다른 대중교통 수단은 재정지원도 줄고 심히 쇠퇴했다. 풍족하거나 안락한 수준의 생활을 하는 자들은 집단으로 도심을 탈출하여 교외로 나갔으며, 이로 인해 미국 도시의 구조에도 심대한 변화가 나타났다. 도시 주변의 시골은 넓은 고속도로와 입체 교차로 등으로 경관이 망가졌다. 커다란 쇼핑센터가 고속도로 주변에 도처에서 솟아올라 교외 거주자들의 소비욕을 충족시키며, 거대한 주차장이 그 열성적인 구매자들을 수용한다.
이 자동차 광증(car mania)”은 물리적·인공적 환경을 바꾸어놓고 사회생활을 변형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공해와 관련 질병, 범죄와 폭력, “신나게 차를 모는” 십대들, 숱한 교통사고와 사망자를 낳는 해로운 현상이다.”(144-146쪽)
“미국인들은 점점 쇼핑과 은행 업무, 이메일과 온갖 종류의 정보를 인터넷에 의존하고 있다. ... 분명해진 것은 인터넷을 통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일수록 단순한 정보의 취득을 사유와 사색, 비판적 판단 등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다른 학생들과 교사들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 관계를 쌓으면서 계발하고 배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새로운 기술혁명으로 경제적 지구화가 크게 강화되기는 하겠지만, 노동시간 증가, 노동자들의 스트레스와 긴장의 증가에 수반되는 심각한 문제들도 있다. 어느 곳에서 날아든 메시지를 언제 사용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대단한 골치 아픈 문제가 되어 노동자들의 인내력과 기술을 심하게 갉아먹고 있다.”(151-152쪽)
미국정치의 공허함에 대한 닐 우드의 지적도 또한 미국화되어가는 한국의 정치에 시사점이 있다.
“최근의 연방선거에서 투표율이 이토록 저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시민들은 종종 부정직과 부패로 지탄을 받아도 그저 “임기응변의 능구렁이들”처럼 빠져나갈 뿐인 정치가들과 정치 자체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또한 닮은꼴인 두 개의 정당을 놓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유권자들은 과연 그 사이에서 뚜렷한 정책의 차별을 볼 수 있는가? 여기에서 무슨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선거는 그래서 보통 출마자들의 인간성 경연대회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182쪽)
“미국정치는 지난 몇 년간 국가적으로 심히 중대한 정치문제들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충분한 자료와 정보에 기반을 둔 토론과 신속한 결단이 시급히 요청되는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의 근본 문제들은 무수히 많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정치가들은 핵심적인 문제들을 따지고 또 응수하는 그들의 책임을 저버리고, 대신 주변적인 문제들에 몰두하고 있다. 낙태, 안락사, 총기관련법, 군대 내 동성애자 등의 문제들은 물론 중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충분한 일반 의료보험 프로그램, 사회안전망과 주택의 확충, 빈곤 퇴치, 빈부의 격차 해소, 선거공영제, 인종 차별, 인권, 사형, NATO의 확장 등의 핵심적인 문제들과 과연 비교할 수 있는 것인가? 투표자들은 정치가들이 이 가장 중대한 문제들을 받아안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더 이상 이들에게 표를 던지는 수고 따위는 하지 않는다.” (186-187쪽)
“미국정치가 공허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시민들 생활의 많은 부분이 정치의 범위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경제’가 더욱 중요하며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 모든 인간활동과 모든 사회관계는 경제의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으며, 주택에서 연금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시장의 지배에 내맡겨지고 있다.
또한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이윤의 원천이 되도록 용의주도하게 부양되고 발달되어온 미국의 대중문화 생활에도 그 원인이 있다. ... 정치나 정치문제들로 대중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나약하고 비겁한 대다수 현재 정치가들의 성격으로 인해 정치는 흥미도 없고 반복적이며 지루한, 결코 오락적이지 않은 것으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정치 이슈들을 정말로 세밀하게 검토하고 열렬히 논쟁하는 이들이 워싱턴 중앙정부가 아닌 주 정부와 지방정부 수준의 좀더 좁은 범위의 대중들이라는 점, 교육·환경·교통 등과 같은 문제들에 진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이들의 위원회 같은 곳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188-190쪽)
“미국 정치의 암담한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은 기독교 우파가 전국적 차원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 빌리 그래험에 따르면, 미국은 이제 전 지구의 강대국이 되었는지라 악마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이 처한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의 원인은 ‘악마’라는 것이다. 이 악마의 공격을 물리치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두 함께 종교로 돌아와서 기독교적 신념과 가치를 강화하여 우리 스스로를 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이러한 기독교 우파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는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악마들이(주로 진보주의로 변장하여 나타나는데 최근 심각한 위협이 되도록 창궐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미국적인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공격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악마들과 맞아 싸우기 위해 이들은 미국 남부와 로스앤젤레스, 미국 북서부에 걸친 도시 교외지역 등에서 공화당 조직에 확실하게 침투했다.” (194-195쪽)
홍기빈의 역자 후기 「‘미국적 가치’에 대하여」에 이러한 내용들이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다. 역자는 미국화가 진행되어 일상의 안팎으로 속속들이 미국적 가치와 섞여들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을 비판’하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우리 존재에 대한 성찰, 그리고 그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우리 속의 미국’을 반성하지 않은 채 마이클 무어와 에미넴의 입심과 재치에 갈채하고 그저 부시와 네오콘에 대한 저주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행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닐 우드가 취하고 있는 방법에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서양 정신사 전통으로부터의 내재적 비판,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어떠한 결과를 낳았고 그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띄게 되는가에 대한 고찰, 그리고 문명 쇠퇴론의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 닐 우드는 미국 사회 모순의 뿌리로서 자본주의를 지목하는 그의 관점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으며, 자본주의에 점령당한 미국문명이 급격한 쇠망의 길로 접어들 것임을 암시한다. 물론 여기서 ‘자본주의 미국 쇠망’의 메커니즘은 ‘정치적 맑스주의’의 특징을 반영하여 ‘시민 도덕(civic virtue)의 쇠퇴’라는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다. 홍기빈은 단지 자본 축적이나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주제에 갇히지 않고,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퇴락이라는 도덕적 관점에서 미국적 가치와 그 퇴락을 비판하고 반성할 수 있는 보다 폭넓은 윤리적 정신적 관점을 담아내고 있다고 파악한다.
여기에서 ‘살루스트의 정리’ 즉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가 국가 내부의 통합을 증대시킨다”는 원리는 살루스트가 당대의 사회적 불화와 도덕적 타락을 설명할 원인을 찾기 위해 로마의 과거를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홍기빈은 9·11 이후 미국의 지배계급이 이를 변질시켰다고 파악한다.
원래 살루스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로마 공화정 말기에 만연했던 정신적 타락을 막고 고상한 시민도덕을 소생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외적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이를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는 고상한 감정과 공동체정신을 소생시킬 원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였으며, 이를 통해 도덕적 타락과 공화국의 쇠망을 예방하거나 최소한 그 속도를 늦추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지배계급은 그 정반대로 사람들의 정신적·도덕적 감각을 더욱 저열하게 마비시켜서 지배 체제를 위해 편리하게 조작 동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살루스트의 정리를 그대로 따르기는 하되, 미국 전통 가운데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가치들을, 그것도 가장 단순 무지하고 사람들의 저열한 증오심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소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닐 우드는 마지막에 자본주의라는 참주정이 지배하는 미국에 대한 대안을 개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좋은 얘기들의 집합체이다. 문제는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가 그러한 대안의 가능성을 향하는 길을 따라갈 의사와 능력이 있는가인데, 닐 우드는 변혁을 향한 의지만 있다면 그러한 목표들을 달성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도의 자기희생, 단호하고도 끈기 있는 단결행동, 엄청난 양의 땀방울 등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개략적으로 그려낸 사회적 목표라는 것들은 인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사회주의의 목표들이다. 인간들이 현재의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에 가득 찬 재산과 권력 확장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자본주의의 참주정을 그러한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굳게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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