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

잡기장
요즘 술먹다보면 종종 하는 얘기가 있는데
제가 학교를 다니던 97년 이후, 학생들간의 소통 문화?라고 할까요

한 빈대가 있었습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옵니다.
일단 과방으로 갑니다. (수업 늦었으면 과감히 째줍니다)

사람들 있으면 ... 수다를 떨고, 장기를 두고, 숙제를 베낍니다.
사람들 없으면 ... 기타 연습을 하거나, 쇼파에 기대 공상을 즐깁니다.
잠은 안 잡니다. 그새 누가 왔다갈까봐.
다른 데로 갈까.. 고민합니다. 과방선배한테 얻어먹는 걸로 만족스러워 동아리 가입을 안 했기에... 갈데가 없습니다. 창 밖으로 하늘만 바라봅니다. 오직 그것만을 후회합니다. ㅡㅡ

탁자 위에 날적이가 있습니다.
한장씩 넘겨봅니다. 본 내용인데도 가끔은 처음부터 넘겨 봅니다.
펜을 들고 심심하고 외롭다는 말을 이리 둘러 저리 돌려 끄적이기 시작합니다.
한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두 페이지... 세 페이지... 역시 이번에도 장편입니다.
말이 꼬인다 싶어 끝맺습니다.
지금처럼.. 근데 덮어 놓고 나도 상황은 그대롭니다.
다시 펴서 제가 쓴 걸 읽습니다. 또 읽습니다. 그때마다 다릅니다.
그러다가 또 씁니다.

보통은 이러다 보면 누군가 옵니다.
재빨리 검색을 합니다.
내가 이 사람한테 언제 얻어먹었지? @_@
빈대도 철학이 있습니다.

빈대는 약탈자가 아닙니다.
반드시 뜯기는 자를 세심히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뜯어먹은 사람은 적어도 이틀간은 공략(?)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경우와.. 아주 친한 사람은 예외도 있습니다. ㅋ

또 밥을 사준 사람에게는 물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보상을 해 줍니다.
방법은 많습니다. 숙제 베껴주기, 대출, 뭐 사다주기, 그나마 할 거 없으면 집에 갈때 버스 올때까지 기다려 주기...

얻어먹으로 가는데 다른 후배들이 붙으면 ..많아지면
눈물을 머금고 사라져 주는 결단이 필요할때도 있습니다. 물론 눈물을 보여선 안되죠
웃으면서.. "헤헤 야 나 딴데서 얻어먹을께 " ㄴ^^ㄱ==3=3
그래서.. 항상 후배에게 인기 없는 선배, 외로운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먹어주는 센스..

이런 빈대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덕목으로는 튼튼한 두다리, 빠른 기록 검색 능력, 작은 메모도 놓치지 않는 관찰력, 적당량의 뻔뻔함, 그리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좋은 빈대(?)는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언제나 굳게 믿고 살아갑니다.
얘기가 샜는데...
하여간 날적이를 보면
그 당시 선배들은 세상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썼습니다.
저는 제 공상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썼죠.. 그리고 후배들은 학교 생활에 대한 얘기를 많이 썼습니다. 표현에도 차이와 변화가 있는데 예를 들면 기발한 문구는 깜찍한 그림으로 대체되어 갔습니다.

대개 한 학번에 한 명정도는 과방 죽돌이가 있고, 날저거가 있죠.. 어쨌든 온라인 커뮤니티가 그렇게 대중적이지는 않았을때, 날적이는 중요한 소통의 공간이었습니다.
빈대에게는 사람들의 상황, 고민, 심리를 파악하는게 필수이기에.. 날적이를 많이 읽고, 많이 쓸 수 밖에 없습니다.

98년.. 스타크래프트가 폭발했습니다. 뒷풀이 장소가 PC방으로 옮겨졌습니다.
휴대폰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공개된 게시판이 아닌, 일대일로 약속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메신저를 많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기 시작합니다...

그 빈대를 죽인건, 인정이 메말라서라기 보단
빈대가 살기 어려운 환경으로 변해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친한 사람들끼리는 더 원활히 소통하지만... 우연히 지나다 누구의 소식을 듣고, 함께 나눌 기회는 적어져 갔습니다. 더 이상 과방에도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습니다. 그저 있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이 모임, 저 모임 얘기를 듣던 공간들이 없어져.. 아니 옮겨져 갔습니다.

나빠진 것이 아니라 변화한 것이라고
나도 변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탈피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다 요즘에야 술 먹으며 웃으며 다시 옛날을 얘기하고...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이제는 오랫만에 학교에 놀러가도
후배들 앞에서 재롱을 부려 겨우 얼굴을 터도
밥과 술을 사달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잠깐 웃고 떠든 후에는 다시 책만 들여다 봅니다. 그러다.. 노트북을 가진 (요즘 대부분 다 갖고 있더군요. 공대라서인지..) 사람들끼리 겜을 합니다.

함께 놀아주다 보면 지칩니다.
조용히 나와.. 오랫동안 내 목을 축여 준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를 뽑습니다.
교문으로 나가는 가장 먼 길을 택합니다.
이번에도 중얼거립니다. "이제 그만 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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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9 11:41 2006/03/0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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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엠 2006/03/09 11:53 URL EDIT REPLY
담 편을 기대할께요. (너무재미있어요~)
앙겔리마 2006/03/09 12:44 URL EDIT REPLY
빈대의 철학 너무 웃겨요. 나도 빈대였던 시절에 도를 지켰어야 했는데+_+
지각생 2006/03/09 12:44 URL EDIT REPLY
2편이 잘 된적이 없는데 ㅋ 재미있게 봐주셔 감사 ^^
달군 2006/03/09 13:21 URL EDIT REPLY
날저거<--가장 인상깊은 단어였어요.
outwhale 2006/03/10 15:36 URL EDIT REPLY
공간 중심 문화의 상실... 요즘에 이야기를 듣다보면 과방이 멀어서 안간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전 휴대폰이 빼앗아간 문화라고 생각을 하죠...
지각생 2006/03/10 22:06 URL EDIT REPLY
앙겔리마/ 전 아직도 빈대랍니다 ^^

달군/ 내가 생각해도 그래요 ㅋ

outwhale / 죽돌이로서 저도 아쉬워합니다만 다르게 볼 수도 있겠어요. 분명 어떤 공간이던 "특정"한 분위기가 있겠고.. 그것에 적응못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무언가가 늘 필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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