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건 엄청 불편하면서도 즐겁다.
참 많은 걸 배우고, 나에 대해 알게 되고, 바꿔나가게 된다.
그러면서 내게 일어나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를 꼽아보면,
"환원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됐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뭐하는, 어디의, 이런 사람", "무슨주의자" 등으로 분류하는 건, 굉장히 편리하다.
이 사람은 이렇군. 좋아,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군. 싫어.
그는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일 거야.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그렇게 내 멋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해버리면 세상 사는게 쉽고 단순하다.
하지만 그 사람을 정말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어져 버린다.
"여성"이라는 틀로 묶고, "남성"인 나와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여성과 나의 차이는, 나와 어떤 남성과의 차이보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적을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를 만나면, 습관적으로 이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나와 얼마나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지 계속 데이터를 뽑아나간다. 그리고 그는 "이런 사람이구나"하고 "알아채"버린다. 그런 것이 "지금의" 그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될 일이 많은데도.
사람을 어떤 틀로 규정하는 것은 그 사람을 파괴하는 행위다.
이런 식의 생각은 그대로 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요즘은 덜해졌지만 한참 자신 없고 스스로 괴롭히고 있던 때는 이 블로그의 많은 내용이 저 질문에 답을 내리려는 시도로 채워졌다. 나를 규정지으려 하고, 불확실하고 애매한 부분이 많은 내 자신을 의심하고 불안해했다. 시시때때로,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하는 내 자신을 싫어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나는 여성주의자인가 아닌가, 혹은 약간 물러선 듯한 "친여성주의자"인가 아닌가, 여전히 발견되는 남성중심적인 사고와 면면의 잔재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저 다분히 맹목적으로, 다양한 교양과목으로 "여성주의"를 비롯한 "사회적/정치적 소수" 문제를 채택하는, "진보"를 원하는 사람 중 하나인 건 아닐까. 위선자이거나 사실은 정말 바보인 건 아닐까. 이런 고민들이 끊임 없이 날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않게 됐다. 고민할 여지 없이 확실한 무언가를 찾아서가 아니라, 그런게 있다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어떤 상황, 맥락과 무관하게 "어떤 사람"이길 포기하고, 구체적 현실 속에서 그때그때 나를 선택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철두철미한 "주의자"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느낄 수 있는 범위에서는 분명히 계속 일관된 선택을 하고 책임지려 노력하리라는 걸, 스스로 믿을 수 있다. 그럼 된 것이다. 내 뒷조사는 이제 그만~
사람은 변한다. 시간이 지나며 변하고, 처한 상황에 따라 변하고, 교류하는 사람들에 따라, 그들과 함께 관계 속에서 계속 쉴새 없이 변한다. 어제 알고 있던 그와 오늘의 그는 분명히 다를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고. 사람들 블로그만 봐도 그렇잖아. 한결 같이 똑같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누군가를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한때의 기억과 편견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걸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 수 있다. 대신 그런 기억과 편견을 버리는 것은 당장은 굉장히 피곤하다. 그래도 그게 그와 나를 모두 자유롭게 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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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정말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정도로 어렵고 힘든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적당히 하다 포기하고 그런 틀들을 덮어 씌우고, 스스로의 눈을 색안경으로 가려버리는 거겠지. 난 사람 대하는게 어렵다. 쉬운 사람도 분명 있지만, 대부분 어려운데, 지금까지는 그게 내가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든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 대하기 어려운 건 내가 스킬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사람을 대하는 습관이 그리 굳어 있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 또 상황이 애매할 수도 있고. 힘들어도 쉽게 살기 위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진 말아야지. 물론 생각만큼 잘 될지는 모르지만 :)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는데 쓸 에너지를, 스스로 상처받고 다시 치유하며 쏟아버리는 에너지를,
그때그때 충실히 살기 위해 쓰고 싶다. 망설임 없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데 돌리고 싶다.
당위에 쫓겨다니며 자신을 혹사하고 위축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 하고 사랑을 구걸하고 그러며 사는 건 그만두고 싶다. 그런 모든 에너지, 지금 내가 허비하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돌려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데 다 쓸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사람을 정말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 줬고, 계속 나를 변화시키고 있는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