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IT 단체를 만들기 위한 준비 모임이 두차례 열렸다. 지금까지는 다양한 영역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앞으로 함께 하기 위해 기본적인 조율을 하는, 조금 느슨한 진행이었다. 내일(4/12) 세번째 모임을 갖는데, 이번 모임을 통해 단체의 목적과 비전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위한 역할 분담등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너무 논의를 열어놓고 느슨하게 진행하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에 만나 함께 논의하는 사람들과는 지금 만드는 "첫번째 단체"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계속 비영리IT활동을 하게 되며 만나게 될 것이기에,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려두고 가능성의 범위를 넓혀두기 위해서 속도를 많이 내지 않았다.
첫번째 모임을 마치고, 두번째 모임에서 내가 그동안 해온 IT자원(봉사)활동을 정리해서 발표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래서 내가 해온 것들을 쭉 정리하다보니 재미가 없고 왜 이걸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스트레스를 받다가, 이참에 내가 해온 것만이 아닌, 한국에서 진행되는 여러 "비영리IT"를 간단히 정리해보는게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정리해봤다. "(한국의) 비영리IT의 네가지 유형"
A. 문제해결형
IT자원활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고장난 시스템을 고쳐 주는 것"일 것이다.
실제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의 대부분이 이 영역에 속하는데, 1. 가장 많이, 절박하게 요구하며 2. 도움을 받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영역이라 양쪽의 연결이 가장 잘 이뤄지는 분야이며, 3. 이것이 잘 안되면 앞으로 말할 세가지 유형의 비영리IT활동이 다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 마지막에서 이부분을 다시 얘기하겠다.
B. 역량강화형
비영리IT 네가지 유형 중 가장 건강하고 근본적인 성과를 가져오는 유형이다. 도움을 받고 있는 대상이 주체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활동이다.
나는 이 유형의 범위를 조금 넓게 잡고 있지만, 언뜻 이해되기 쉬운 것만 얘기하면 역시 "IT 활용/제작 교육"이다. 이것도 많은 수요가 있지만, A-문제해결형보다는 절박함을 느끼기 어려워서 관계자들의 의지가 없으면 실제 시작해서 궤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어느 정도 지속되서 성공할 수 있다면 가장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문제해결형이 대체로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금방 잊혀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역량강화형은 그보단 좀더 밀착되서, 지속적으로 함께 하는 활동이 요구되므로 이후에도 관계가 오래 유지되고, "성과", "과업"이 아닌 "사람"이 남을 수 있다는 면에서도 좋다.
이 유형의 어려움은 역시 초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IT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기초적인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에겐 신선할게 별로 없는) 주제"를 끈기있게 반복해서 한동안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점차 고난이도의 스킬을 주고 받게 되면 IT인들도 다양한 재미를 그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C. 도구제작형
주로 규모 있는 기관, 단체가 비영리IT를 하겠다고 하면 이 유형이 많다. 특히 한국의 IT는 철저히 도구적으로 사고되고 있으므로, "인간과 가치"가 아닌 "성과와 효율"를 중시하는 관점으로 접근할 경우 이쪽으로 쏠리기 쉽다.
도구제작은 꼭 필요한 영역이지만 두가지 전제가 있다. 하나는 유지보수가 반드시 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것을 쓸 사람이 주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활용법을 잘 교육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 필요에 따라 알맞게 바꿔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단순히 시혜적으로 잘 받아 쓰기만 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문제에 직접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어서 늘 "만들어준 분"에게 의지하게만 된다면, 실제로 "도구 사용자"의 역량은 발전한 것이 없게 된다.
도구제작형은 그 과정이 "전문적"이 되기 쉽기에, 실제 작업 과정에서 IT인들이 가질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과 경험등이 있다. 릴리스할때, 일거에 여러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성취감도 많이 느낄 수 있다. 소셜 이노베이션 캠프등 한국에서도 여러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긍정적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발전되며, 사람들을 실제로 성장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게 안된다면 도구제작형은 가장 위험한 유형이 될 수 있다. 전문가의 자기만족에 그치는 활동이 되고, 비전문가인 "도구 사용자"의 역량이 오히려 약해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외의 좋은 사례가 있다. CiviCRM (http://civicrm.org/) 이라는 도구인데, 비영리단체용으로 만들어진 "지속적인 관계 관리"도구이다. 비영리단체가 요구한 것을 기술자 커뮤니티가 받아, 드루팔(Drupal)이라는 CMS의 모듈로 만들었는데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드루팔을 뛰어넘어 워드프레스(Wordpress), 줌라(Joomla) 등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CMS에 모두 설치할 수 있는 녀석으로 성장했다. 도구제작을 하려면 특정한 이벤트를 통해 하기 보다는 이렇게 "지속되는 관계 - 커뮤니티"차원에서 이뤄지는게 좋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D. 정보제공형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는 유형이다. 문제는 "깊이"와 정보제공자의 시점.
주로 기업이나 해외 명사들의 전략, 방법론, 철학 등을 소개하거나, 그것을 자신이 한 단계 가공한 형태를 "힌트"로서 제공한다. ITCanus 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비영리섹터에서 활용하기 좋은 것들을, 쉬운 말로 정리해서 제공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의미 있는 작업이고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을 만큼 내실도 있다. 이 유형의 활동은 한번 잘 아카이브가 갖춰지고 나면 지속적으로 다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단점이라면, 정보제공자가 그것을 제공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높은 곳의 훌륭한 것을 아래에 나눠주는" 식으로 접근하면 실효성이 극히 떨어진다는 점, 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만큼 무책임하게 끝낼 수 있다는 점 등이 있다. 제2섹터의 기준으로 제3섹터를 단순하게 판단해서 그 독특한 측면을 이해하지 않고 얕은 지도편달만 하려 든다면, 결국 이것도 자기만족에 그치는 활동이 되기 쉽다.
그리고, 꽤 많은 비영리단체 활동가들이 "좋은 것이 많이 있는 건 알겠는데, 실제 적용할 수 없거나 그 뒷감당을 못하는 상황과 자신의 능력"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점은 이런 유형의 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꼭 생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 네 가지 유형의 관계
네 가지 유형은 각각의 특성, 장단점이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서 이 네가지 유형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비영리섹터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안한 기반을 가지고 있다. 비영리조직의 관계망은 충분히 유연하지 못하며, IT인들은 독자적인 섹터를 만들거나 다른 분야의 비영리조직과 폭넓게 교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좋은 뜻을 갖게 된 IT인들이 있어도, 그들의 뜻과 능력이 향할 수 있는 비영리섹터와 밀착된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해서 힘들어한다. 여기에는 흔히 생각하는 "IT인들의 사회성 부족"이 한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단 비영리섹터들의 주체적 IT활용역량이 언제나 생각보다 더 약해서 IT인들과의 접점을 다양하게 만들어가기 어렵다는 점이 더 크다. 그리고 한국의 IT가 "상품"과 "서비스"만 있고 "사람"이 없으며(IT제품을 보고 실제 그것을 만든 '이웃 사람'을 떠올릴 한국의 소비자가 얼마나 될까? IT개발자들은 또 얼마나 스스로의 존재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나?) 성과와 효율만 있지 "가치"가 잘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IT인들이 도구화되는 경향이 사회적으로 팽배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비영리단체 활동가들도 자기 가려운 곳 긁고 나면 IT인들과 지속적으로 관계 맺을 생각 잘 못하는 "바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기는 문제는, 대개 밀착도가 낮은 영역 - 도구제작과 정보제공형의 비영리IT활동은 그래도 조금 관심이 쏠리거나 일이 진행이 되는데, 다른 두 유형 - "문제해결"과 "역량강화"에는 그 필요성에 비해 많은 노력이 꾸준히 투여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불균형은 결국 네가지 유형 모두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 한다.
도구를 제작해도 그것을 잘 활용하고, 응용할 수 있는 역량의 지속적인 강화가 안되고, 새로운 도구의 도입으로 인한 여러 변수에 대처하는 "문제해결"능력이 부족하다면, 그 도구는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가져오기 힘들다. 좋은 해외 사례를 소개해줘도, 비영리단체 활동가가 도저히 그걸 적용할 엄두가 안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좋은 말은 오히려 고통만 가져온다. 반대로 역량강화는 그에 따른 적절한 도구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데, 적절한 때에 좋은 도구를 만들거나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흐름은 주춤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몰입해서 배울 수 있을까.
그래서 하고픈말.
지금 각자 하고 있는 것들을 계속 잘하면 된다. 다만 이 네가지 유형의 비영리IT활동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니, 역량이 너무 한쪽으로 집중되면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강조해서 균형을 잡고 싶은 것이 내 바램이다. IT인은 거의 모두가 가르치려고만 하고, 비영리단체 활동가는 대체로 "난 못하니 누가 해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동안 하지 않았던 다른 유형의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아직 익숙하게 들리진 않을테지만, "상품"이 아닌 "사람"이 떠오르는 IT, 효용만이 아니라 "가치"를 생각하는 "비영리IT"활동이 대중적으로 이뤄져서 분명한 하나의 흐름이 되길 바래본다. 비영리IT를 같이 생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