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운영과 사회 정의

사회운동

나는 IT노조 조합원이다. 집행부 일을 꽤 오래 하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일터Q/A라는 뜨거운 게시판 하나를 관리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한국의 IT개발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으로서 이곳 저곳에 파견되서 일하는데, 지금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는 저 업체(인력파견업체다), 참여할 프로젝트, 그리고 작업장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이 게시판에 누가 면접을 보기 전에 누가 "이 업체는 어떤가요" "이 프로젝트는 어떤가요"등의 질문을 올리면, 경험자가 그 업체는 임금 체불을 했다느니, 저 프로젝트는 엄청 괴롭다느니, 저 작업장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느니 하는 정보들을 말해준다. 지금 IT산업환경에서 노동자를 보호해주는 장치는 거의 없고, 산업구조는 엉망이다보니 이런 정보가 없이는 거의 대부분의 IT노동자들이 고생만하고 피해를 입고 그만두게 된다. 

 

게시판 성격상 "어떤 업체가 좋다"는 말보다는 "그 업체/작업장/프로젝트가 안 좋다"는 얘기가 더 많다. 지금 IT산업의 현실을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검색엔진 등을 통해 자기 업체에 대해 안 좋은 얘기가 올라왔다고 글을 지워달라고 하는 곳이 많다. 명예훼손이다, 피해를 입었다, 글쓴이 누구냐, 거긴 뭐하는 곳인데 우리 회사를 비방하냐. 처음부터 화내는 곳도 있고, 사정하는 곳도 있고, 은근히 협박하는 곳도 있고 다양하다. 다른 곳은 이런 요청을 받으면 겁을 먹거나 귀찮아서 그냥 글을 삭제하는지 몰라도, IT노조는 절대 그럴 수 없다. IT노동자들이 이런 정보를 눈치 안보고 자유롭게 공유하는 곳이 이곳 밖에 없는데, 그런 요청에 일일히 응하다보면 게시판이 제대로 의미 있게 운영될 턱이 없다. 결국 게시판의 공익성을 강조하며 IT노동자들의 알권리를 위해 모든 글을 삭제하지 않고 버티는 정책을 취해오고 있다. 물론 개인의 신상정보가 노출됐거나, 인신공격,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적 표현이 있을때는 발견 즉시 개입을 하지만, 글의 내용의 사실 여부와 관련해서는 일체 판단을 내리지 않고, 아무리 귀찮게 요구해도 삭제나 비공개 조치등을 취하지 않는다. 

 

이 게시판을 노조가 맡은지 햇수로 6년째인데, 처음에는 검색 엔진에 많이 걸리지도 않고, 게시판 이용자도 적어서 그런 삭제 요구에 대응하는게 크게 문제가 안됐다. 시간이 지나며 이 게시판의 글이 검색엔진(특히 구글)에 많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게시판을 이용하는 IT노동자도 많이 늘었다. 그러다보니 자기 업체에 대해 부정적인 글이 올라왔다고 글 지우라고 피곤하게 하는 업체도 많이 늘었다. 어느 정도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들어오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주 일상을 피곤하게 하는 수준으로 늘었다. 시시때때로, 예측 못하는 시점에 불쑥 전화를 해서는 내 사정따위는 고려치 않고 날 붙잡고 자기들 사정만 얘기하는 통에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어지간해서는 사람한테 화내지 않는 나도 몇번 고성을 지르며 통화한 적도 있으니까 =_= 내가 전화를 더 싫어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지금은 이메일로만 문의를 받는다고 하니 노조 대표전화로 걸어와 사무국장을 피곤하게 하고 있는데, 하여간 이렇게 게시판을 운영하는게 아주 험난하다. 그냥 남들 하는대로 삭제해주고 하면 편하기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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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삭제 요청이 짜증나지만 특히 짜증나는 유형들이 있다.

* 글쓴이 정보 달라고 했다가 없다고 하니까 "아니 요즘 시대에도 익명으로 게시판 운영하는데가 있어요?????" 하면서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고, 안타깝다는 듯 하는 곳

* 다른 업체에 피해주는 글을 보면 알아서 지워야지 뭐하냐는 식으로 나오는 곳

* 사람이(혹은 노조가) 그러는게 아니라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 

* 법적 조치 운운하면 쫄 줄 알고 처음부터 고압적으로 나오는 곳

* 아무리 내가 이런 저런 얘기해도 "난 피해자야. 날 지켜줘" 말만 반복하는 사람.

 

나열하면 끝이 없지만 이 포스팅을 하는 것은 특히 맨 위와 맨 아래에 대한 얘길 하고 싶어서이다. 

 

* 어느새 인터넷의 익명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몇몇 사람에게는 말이다. 표현의 자유와 연결된 인터넷의 익명성이 위협받기 시작한게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폐해가 심해졌다고 해도 익명성이 기본이 되고, 그것을 보완할 최소한의, 적정선의 실명제가 도입되는 것이 마땅할텐데, 최근 몇년간의 실명제 흐름도 너무 지나쳐서 되돌려야 하는 마당에, 마치 익명성이라는 게 이미 화석이 된 것 마냥 생각하는 저런 태도를 접하면 정말 무슨 말을 해야할지 순간 멍해진다. 

 

* "난 피해자야, 내가 입은 피해 어떡할 건데" 하는 반응.

다른 모든 맥락을 제쳐두고 무조건 이번 건의 경우만 한정해서, 자신이 힘없는 약자로서 공격받아 피해를 입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 사람이 피해를 입은 건가? 그 피해는 무조건 인정받고 보상받아야하는건가?

 

글의 사실 여부를 떠나, 업주는 분명 피해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전보다 업체에 대한 평판이 떨어져 사람이 잘 안구해지고, 수입이 떨어질수는 있겠지. 그렇다면 그 사람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 글을 삭제하면 어떻게 되나? 그 업체에 대한 안좋은 얘기가 사실인 경우, 글을 삭제하면 그 글을 못보고 또 다른 노동자가 피해를 입게 될 위험이 커진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된다. 사람 숫자 만이 아니라 피해의 질도 다르다. 업주가 받는 피해와 노동자가 악덕 업체에 속해 막장 프로젝트에 참여하는데서 오는 피해는 같이 비교할 수가 없다. 노동자와 업주는 1:1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수/약자와 사회적 다수/강자의 관계로 봐야 한다. 민법상의 계약관계보다 앞서 사회권의 개념으로 봐야한다고 난 배웠다. 진실인 글의 경우, 보다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글을 삭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글의 내용이 허위인 경우, 분명 업주가 부당한 피해를 볼 수 있다. 글을 유지하는게 전체 IT노동자들의 이익에도 별로 도움이 안된다. 하지만 그런 글의 진위 여부를 게시판 운영자가 다 알 방법이 없다. 글이 허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게시판 운영자가 그런 글을 지우다보면, 점점 진실을 담은 글과 허위를 포함한 글의 경계가 모호해져 결국 진실된 글을 지키는 것도 어려워지는 상황이 온다. 결국 허위글을 통해 일부의 업체가 부당한 오명을 쓰고 피해를 입더라도, 진실된 글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 일부 업주의 피해보다 대다수의, 아니 한 두명이라도 IT노동자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그 글을 삭제하지 않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설령 글로 인해 업체가 피해를 입었다 해도, 그 피해가 모든 것보다 우선시되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IT노동자들의 권리를 가장 많이, 우선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글을 삭제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의 입장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해서 고려해야 하는 경우는 그가 "사회적 소수/약자"일 때 뿐이다. 어떤 이가 사회적으로 강한 입장에 있다면 그의 피해를 무조건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오히려 부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얘기를 업주들이 잘 듣고 받아들일리가 없다. 아무리 IT노조는 IT노동자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므로 글을 삭제하지 않는다해도, "그럼 나는? 내 피해는 어떡함? 당신들 뭐임?" 이런 말만 반복하면서 고집을 부린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혹시 이런 얘기를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게시판을 운영하는데 자문이 되어 함께 대응해 주시면 좋겠다 ㅜㅜ 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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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가 피상적으로 누군가의 피해/이익을 쉽게 판단하지 않고, 각자 처한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있다면 이런 얘기를 할때 덜 피곤할 것이다. 인터넷은 익명성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면, IT노동자가 눈치 안보고 자기 경험을 얘기할 수 있게 익명으로 글을 쓰고, 추적할 수도 없게 만든 지금의 시스템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내게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을 설명하는데 있어 늘 고역을 치른다. 실명제가 당연하고 글쓴이는 언제나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익명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 그렇지 않을때의 부작용에 대해 전혀 고민이 없는 사람이 IT(인력파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업주가 자신이 노동자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그나마 측정도 되지 않는 자의적인 판단으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바꿔야할까. 바로 이런 것들이 지금의 명예훼손/손해배상/사이버모욕죄 관련 법들이 완전히 바뀌어야할 이유이다. 사회적 소수/약자를 보호해야할 법령이 오히려 사회적 강자를 보호하기 위해 약자를 핍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피해를 입은 노동자가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 또다른 피해자를 없애려는 행위, 그것도 원래 그런 얘기하자고 정해진 공간에서 하는 말, 이런 것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좋은"행위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저런 행위가 이 사회의 "미덕"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법령과 상식, 통념들은 그런 미덕을 억압하는 역할을 한다. 소수의 강자의 "있지도 않은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지금의 법령/통념 체계는, 소수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훨씬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고, 실제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을 보장해주지도 못할 뿐더러 사회적 미덕을 억압하는 역할까지 하니 도무지 존재 가치가 없는 법이다. 뭐든지 적정선이란게 있는것이고, 서로간의 입장이 충돌될때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조율해나가야 하는데 지금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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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노조는 앞으로도 일터Q/A 게시판을 자유로운 곳으로 유지하기 위해 업체들의 억지 요구와 싸우겠지만, IT노동자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게시판 글의 내용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만큼 그 글들의 신빙성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노조에 대한 지지도 좀 더 많이 공공연하게 해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정말 피해를 입었을때, 혼자의 힘만으로 업주와, 이 사회구조와 싸우는 것은 너무 힘들고 괴롭고 승산도 적다. 노조에 가입해서 자신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이의 문제로서 함께 해결해나가 봅시다. 한 사람이 소송에서 이기는 것, 피해의 일부를 보상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 같은 사람이 또 생기지 않게 집단적으로 행동하고 성과를 남기는 것이다. 노조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작 이 게시판을 자유롭게 유지하는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런 피해들을 정말 줄여갈 수 있는 행동들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제 좀 덜 피곤했으면 하는 바램으로ㅜㅜ 그리고 크게는 모든 IT노동자들이 억울한 일을 덜 당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들이 좀 제대로 바뀌고, 사회적 인식이 잘 자리잡히고, IT노조가 더 힘이 생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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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01:31 2012/08/17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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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부처 2012/08/20 13:00 URL EDIT REPLY
조으네요!!!! 멋지다!!!!! 게시물 삭제 요구가 많이 와서 그딴 거 대응하는 것도 정말 귀찮아 죽겠지 말입니다. 저희는 약간 케이스가 다르지만... 비슷한 케이스도 없지 않아 있구... 아유 그냥 소송 드립 치는 것들 무간소송지옥에나 떨어져라
지각생 | 2012/08/23 08:47 URL EDIT
게시판 한 곳 운영하는게 이런데 진보넷은 얼마나 괴로울지 ㅋ
소송 드립이 은근히 잘 먹히니까 계속하겠죠? 소송에 쿨해지는 멘탈이 필요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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