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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 등록일
    2006/01/28 14:35
  • 수정일
    2006/01/28 14:35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조현문

 

 


감옥에서 나온 지 벌써 3개월
쉴 만큼 쉬었다
그러나 눈썹 밑을 파고드는 이 불안함은 무엇인가
활동은 온전하게 내 것이었는가?
칠순 아버지는 갈수록 술주정이 심해지고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시간을 보내려던
칠순 어머니는 매일 양발 공장으로 출근한다
다섯 식구의 가장인 아내는 간호사,
오후 3시 병원으로 출근한다
아들 강욱이, 여동생 딸 민이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돌본다
돈 몇 푼 번다고, 부업을 그만두라고 해도
어머니는 한사코 양발 공장으로 출근한다
생활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운동은 단순한 결의가 아니라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고만고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땀과 피로와 아이의 투정을 견뎌야 하는가
지하실에 털어 박혀 종일 술을 드시던 아버지는
기어코 물건을 집어던진다
벌써 이 고만고만한 삶에 지쳐 간다
생활은 자꾸 변명이 되어 간다

 

어느새 40줄에 들어선, 감옥에 몇 번 갔다 왔던 이형은
술을 몇 잔 들지 않았는데 벌써 혀가 꼬부라지고 있다
10여 년간의 활동,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 가두에 대한 매력은 내 청춘을 소진시켰어. 투쟁의 全科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질 수 없었지. ―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었어 ― 기관지의 문필가들은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떠나갔고 전통은 수립되지 않았어. 난 ― 가두투쟁의 기술만을, ― 정권타도의 ― 슬로건만을 앙상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야 ― ― 부모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내는 집을 나가고, ― 보증금 100에 월 13만원.

 

정말 이런 게 아니었어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될지도 모르겠어
말없이 이형의 손을 잡는다
이형, 나이 사십에 더 비참한 것은
혁명을 꿈꾸지 못하는 거야
활동의 지울 수 없는 상처는
관념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실천을 통해서만
온전하게
온전하게
넘어설 수 있어

 

일상의 우연한 계기가
내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들 강욱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탄다
강욱이는 지하철 타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정리해고 반대,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벽보가 떨어져 있다
사람들이 벽보를 지나쳐 간다
벽보를 지나쳐 가는 것은 내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돌아서 떨어진 벽보를 다시 붙인다
눈썹을 파고드는 불안과 변명을 함께 떼어 붙인다
아들 강욱이가 머리띠를 묶은 노동자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모둠발, 강욱이의 발목에 힘줄이 선다
떨어진 벽보를 다시 붙인다

 

아내는 다시 활동을 시작하려는 내게 두렵다고 한다
그래,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가족을 지키고 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 두려운 것은
싸움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다
혁명을 꿈꿀 용기조차 없는 것이다
이 고만고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피로와 땀을 견뎌야 하는가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가건물 같은 생활에 전혀 새로운 관계의 햇살 한 뼘 들어찬다
노동조합 속에서 새로운 일을 찾은 아내는 웃는다
그래 이게 '내 삶이다'
잊고자 하는 패배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하는 내 삶이다
때늦지 않은 걸음으로
저토록 확실하게 피는 생활―혁명 속으로
내 마지막 삶의 불꽃으로 간다

 



아! 봄이다

 

 

초록으로 물오른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새파랗게 싹을 틔울 때
애인은 내게 말했다

쁘띠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서 무슨 운동을 하겠어요
당신은 어느새 룸펜이에요
세상을 처음 본 새싹은 아름다웠다

더 이상 경제적으로 당신을 못 도와줘요
당신의 생활비는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세상을 처음 본 새싹은 아름다웠다

좋아요, 자본주의는 공짜가 없다고 당신은 말했어요
돈 버는 시간 이 땅의 노동해방을 위해 투자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나 당신은 노동해방을 위해 시간을 계획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세상을 처음 본 새싹은 아름다웠다

모든 투쟁이 있는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지도 못하고
혁명의 필요성을 정력적으로 선전·선동하지도 못하고
당 건설의 흐름을 조직하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세상을 처음 본 새싹은 아름다웠다

당신은 매일 새벽이 되서야 자고
남들 다 일하는 시간에 일어나서
겨우 저녁때가 되서야
이 책 저 책 뒤적이다가
그것마저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비디오나 빌려 보다가 잠만 자고 있어요
세상을 처음 본 새싹은 아름다웠다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먹어서 살만 찌고 있어요
전위를 이야기하면서도 당신 몸 구석구석에는
게으름이 코딱지처럼 붙어 있어요
세상을 처음 본 새싹은 아름다웠다

운동은 선언이 아니에요
남을 조직하기 전에 스스로를 조직해야 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초록으로 물오른 바람이 나뭇가지에 새파랗게 싹을 틔울 때
내 가슴속에서도 싹이 돋고 있었다
관성으로 늘어지는 내 활동의 바로 곁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동지의 눈빛,
아! 봄이다

 

 

 

현장에 뿌리내리다 2

 

 

현장 조합원을 만나러 가는 길
난 택시 값 2만원을 준비한다
오늘도 그를 만나지 못하고
택시 값을 날릴 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
겨울나무는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갔던 빛을
서둘러 거두어들이고 있다

현장 조합원을 만나기 위해
벌써 수십 차례 전화 연락과
약속을 잡았지만
그는 항상 바쁘단다
현장 투쟁이 바쁘단다
조합을 떠나는 조합원들을 설득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단다
나는 급기야 그의 집 부근에서
자정이 가까워 오도록 기다린다

아주 오랜 시간
그의 생활에 좀더 가까이 갈 것이다
― 현장 속으로!
그가 쌓아 올린 학출에 대한 불신의 탑에
돌 하나를 보태지는 않을 것이다
― 생활·투쟁, 바로 그의 곁으로!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난 기다림에 지쳐 돌이 되어도 좋다
그러나 난 그가 동지라는 말 한마디로 날 호명할 때
― 집 부근이 아니라 파업 투쟁 속에서, 바로 그의 곁에서
돌이 된 내 몸은 사르르 젖이 돌 것이다
돌 속에서 마침내 꽃을 피울 것이다

 

자정은 가까이 오고
자정은 그처럼 말이 없다
그를 기다리는 끈기만큼
자정은 새벽으로 가는 통로가 되고
그 끝에는 악수가 준비되어 있다
난 이 어둠 속에서 손을 따뜻이 한다
저 쪽에서 그가 오고 있다

 

from 해방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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