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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등록일
    2006/01/31 01:12
  • 수정일
    2006/01/31 01:12

약간 알딸딸한 상태다. 술자리에 등장했던 술의 양은 맥주 2000cc * 3에다 마지막에 500 한 잔씩을 나눠마셨으니 어쨌든 1.5리터 들이 한 병은 마신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상태임에 틀림없다. 좀더 많은 동지들과 함께 할 수도 있었으나 개의치는 않는다. 조촐한 술자리에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가슴팍에 다가오는 그 무엇은 부재한 느낌일 지라도 큰 부담없는 편안한 자리였음에는 틀림없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으나 중간중간 결의가 함께했다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린 아직 젊기에 더 괜찮은 미래가 있을 수 있기에 또 무언가를 약속하고 결의했나보다. 지금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무언가를 나누어 가지고 있겠지-

 

아침에 잠이 깨고 눈을 감은 채 관계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어쩌면 동지적 관계라는 말만큼 애매모호한 것도 없지 싶다. 동지라는 호칭의 이중성.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을 편의상 동지라고 칭하나 우리는 동지라는 단어에 또 많은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가. 무심코 동지라고 부르지만, 또 기실 아무나 동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 사람 앞에서 동지라고 부르는 것을 떠나 뒤에서도 동지라고 부를 때, 일관된 동지라는 호칭만이 진심으로 신뢰를 담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과연 동지적 관계란 무엇일까. 어쩔 때는 정말 그런 듯 싶지만 나중에 되돌아 보면 사무적 관계 이상 아닌 것을 느낄 때의 허탈함과 비애, 그리고 후회로 덮쳐오는 느낌들을 수년 째 몇 번 씩 반복하면서도 아직 그런 것 하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방향일까. 내가 동지라고 호칭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정말 동지적 관계인가. 우리는 동지적 신뢰를 상호 확인하고 있는가.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런 동지와 그렇지 않은 동지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 그렇지 않은 관계는 청산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일까. 또다시 아쉬움이 발목을 잡길래 다만 마음 속에 한 문장 새겨넣는다. 친구여, 집착을 버리세.

 

아직 한산하게만 느껴지는 도심으로 나와 농성장을 찾았다. 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 않다. 현수막이 거두어진 깔끔한 회사 건물을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반 년을 넘게 자리를 지켰던 천막은 혹시 이미 거두어지고 없는 것은 아닐까. 혹시 있다 하더라도 텅빈 천막 안을 들춰 보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쓸쓸한 풍경을 카메라에라도 담아 두어야 하나.

얼굴을 아는 몇 몇 동지들이 보이고 - 그러나 결코 환히 반갑게 웃을 수만은 없는, 하지만 사람을 미워할 이유야 별로 없다 - 아무것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외교적 태도로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아쉽게도 나는 여전히 표정연기를 잘 못한다) 천막은 조금씩 조금씩 정리되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다. 내일, 모레 또 무슨 일이 생길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다려 본대들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없다. 소주 한 잔 진하게 하면서 달게 비판해 달라던 그의 말을 진심이라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자신들의 투쟁력에 기반하지 않고 지위를 활용해 권력에 기대어 투쟁을 정리한 어용짓거리들과 다르게 보여줄 수 없는 능력이 한스러웠다. 대책을 만들지 못하는 무능력함이 뼈아팠고, 안이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이 머릿속을 쿡쿡 찔렀다. 어쩌면 이런 상황과 결과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굼떴던 것은 아닐까라는 기분나쁜 생각들을 하면서 언덕길을 올랐다.

 

동지에게 선물받은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진 속의 녀석은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너의 사상과 실천은 대체 이 세상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릴 땐 어른들에게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입에 발린 칭찬을 곧잘 듣곤 했었는데, 저 녀석의 눈깔은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그래도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포토샵으로 장난질을 친다고 해도, 뿌연 배경에 비해 선명하게 잡힌 피사체가 그래도 나의 정신을 파고들면서 단련을 요구하고 긴장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렇게 어쨌든 또 하루는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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