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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노동자 동지들을 보면서
    나은
  2. 2007/02/05
    서해안 일몰
    나은
  3. 2007/02/05
    자기 애인이 옛 애인을 만난다면-(6)
    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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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만에 다시 듣는 목소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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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닷새째, 담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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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1/26
    악몽(1)
    나은

서해안 일몰

  • 등록일
    2007/02/05 23:01
  • 수정일
    2007/02/05 23:01
태안의 어은돌 해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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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애인이 옛 애인을 만난다면-

  • 등록일
    2007/02/05 21:53
  • 수정일
    2007/02/05 21:53
"어떻게 해야 될까요?"

라디오 상담코너에 흔히 소개되는 사연중 하나 아닐까.


.
얼마 후면 새로운 환경 속에 내던져진다는 걸 핑계삼아
꽤 오랜 시간 연락이 되지 않던 옛 연인에게 연락을 했다.
사실 별로 할 얘긴 없고 얼굴이나마 잠깐 볼까 했는데,
그 친구의 뜻대로, 보지 않기로 했다.

헤어진 이후에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몇 번 만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의 현재 애인과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연락을 먼저 끊었단다.
지금도 굳이 만나고 싶진 않다고 한다.

친구의 결정은 전혀 섭섭하지 않다.
물론, 하나의 관계가,
이제는 정말,
과거로 자리잡았다는 생각에 잠깐 슬프긴 했지만.


.
문득, 사랑 혹은 연애에서 발생하는 것.
질투심, 소유욕, 혹은 사람을 독점하고픈 욕구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나도 질투심을 느껴보기도 했고,
상대가 나와 사실상 '구애 경쟁관계'에 있는 이성을 만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기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라면, 즉 너무너무 좋아한다면 감정적으로 당연한 것일까?
아니면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 사회가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것일까?


.
예전에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면서 내가 주목한 것은
(나중에 다른 블로거들의 감상을 보면서 흥미로웠다)
배타적, 독점적 연애(그리고 결혼)에 대한 반성이었다.

현재의 결혼제도-일부일처제-가 가부장적 사회와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기제라고 본다면,
연애 역시 사실 결혼제도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고민했다.
배타성과 독점적 소유욕이 다양한 문제를 불러오고 심대한 감정낭비를 불러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다.

그래서 내가 지금 머리로 내리고 있는 결론은
이른바 자유연애 더구체화하자면 비독점적 다자연애(?)에 대한 지지다.
단, 상대자와의 사전 합의와 동의 과정을 전제해야겠지.

며칠 전에 본 "나는 섹스중독자"의 카베 자헤디는 "사유재산제에 반대한다면 자유연애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 것처럼 대안체제를 지향하는 이는 자유연애를 지지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걸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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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섹스중독자"

  • 등록일
    2007/02/03 23:53
  • 수정일
    2007/02/03 23:53
영화볼거 없나 하다가 순전히
주연을 겸한 감독이
한때 보봐르와 사르트르의 자유연애를 신봉했는데 어쩌구에 끌려서 본 듯 하다.

영화는 재미있다. 계속 킬킬거리면서 봤다.
남성의 성적 판타지의 일면을 보여주는 영화.
그 때문에 사실 불쾌한 장면도 살짝 있기도 하고.
정말 수많은 성판매 여성들이 등장한다. (감독은 성판매 여성과의 오럴섹스에 집착했으므로)
그런데 배경이 한국이라면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봤을텐데
서구가 배경이어서인지 왠지 다른 느낌을 받았다는 것 정도가 좀 특이했고.

또 하나.
종종 '너무 정직해도 탈'이란 얘기를 하는데.
감독은 자신의 집착증을 나름 극복(?)해 보기 위해 자신의 애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honesty전략을 써 보기도 한다.

그걸 보면서
정직한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죄책감을 더는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위선을 부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도 좀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흠...

여하튼 좀 웃기는 짬뽕 같은 영화.
사유재산제와 일부일처제를 동일시하면서 자유연애를 실천하던 20대 청년이
영화 맨 마지막에 자기는 섹스중독증을 고쳤고 세 번째 결혼을 한다고 자랑하는 건 참 아이러니다.



발칙하고 도발적인 유머 <나는 섹스중독자>
2007.01.17
 

가장 발칙하고 유머러스한 중독기, 감독의 솔직함에 경배를

나이 들어 머리숱도 적고, 비쩍 말라 볼품없는 남자가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페티시즘과 강박증에 대해서 속사포처럼 중얼댄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신경증적인 뉴욕 지식 남성의 치부를 영화 가득 담아내었던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우리는 ‘섹스에 관해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영화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R등급의 우디 앨런이라는 별명이 붙은 카베 자헤디는 앨런이 철저하게 지켰던 그 영화적 거리를 파괴한다. 우리는 우디 앨런의 실생활에서의 여성 편력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영화가 감독의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거나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카베 자헤디는 자신의 삶과 영화를 혼합한다. 우디 앨런은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을 차용할 때, 그것이 의도된 페이크다큐멘터리임을 감추지 않으며 그런 기법은 현실에 대한 풍자의 강도를 높이거나 아이러닉한 상황에 유머를 더욱더 가미하기 위해서 쓰인다. 그러나 카베 자헤디는 실제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영화의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 존재했던 인물과 자신의 과거를 기록한 필름들을 활용한다.

카베 자헤디의 <나는 섹스중독자>는 세 번째 결혼을 앞두고 대기실에 있는 감독이 ‘나는 한때 섹스 중독자였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과거를 재구성한 재연 화면, 사귀거나 결혼했던 여성들을 담은 실제 영상, 자신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애니메이션 화면이 자헤디 감독의 친절한 설명을 배경으로 이어진다. 감독은 자신과 함께했던 여인들과의 관계를 반추하면서 자신의 내밀한 욕망들을 거침없이, 매우 솔직하게 늘어놓는다. 그는 영혼의 동반자라고 생각했던 첫사랑 애나와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관계처럼 개방된 연애를 꿈꾼다. 하지만 그가 비자가 만료되어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애인 캐롤린을 옆에 두기 위해 결혼하면서 자유연애는 종지부를 찍는다. 결혼이란 ‘베트남전을 일으킨 자본주의 체제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그것을 일부일처제적 사랑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일종의 행위 예술이라고 치부해버린다. 영화 때문에 파리로 건너간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아내 캐롤린을 닮은 창녀를 만난 이후 창녀와 오럴섹스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자신의 내밀한 성적 욕망과 결혼 혹은 연애 관계를 지키려는 자헤디의 눈물 나는 투쟁기가 시작된다.

사랑에 관한 통속적인 정의 가운데,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와 ‘사랑은 평생 서로 마주보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있다. 전자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상과 지향의 일치를, 후자는 둘간의 독점적이고 지속적인 관계 유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자헤디는 이 두개의 정의들이 함축하는 사랑의 모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할 뿐 좀체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금지된 욕망을 금지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즉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인정받음으로써 그것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세운 것이다. 그의 아내 혹은 애인들은 처음에는 그가 수줍게 털어놓은 비밀을 충격적으로 듣는다. 나의 남자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 그것도 창녀를 욕망하다니. 서럽게 울거나 구역질내던 그녀들은 이내 그의 솔직함을 인정하고 그의 판타지를 용인하고 공유해주기로 마음먹는다. 자헤디와 그의 연인들은 오래도록 서로 마주보기 위해서 같은 곳을 바라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사랑에서도 ‘솔직함이 최선의 정책’이 될 수 있을까? 예일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자헤디 감독은 온갖 지적 담론들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랑을 둘러싼 두 가지 본능에 대해 실험한다. 하나는 성욕을 일대일의 독점적인 관계 속에 묶어두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는 욕망에 대해 좀더 솔직하고 대범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 것과 매우 모순적인 것인데, 주체는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을, 특히 성적인 면에서 독점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헤디는 자신이 창녀들에게 가지고 있는 욕망을 애인과 공유하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에 대해는 다스릴 수 없는 질투에 휩싸인다. 감독은 관계의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를 목격하며 욕망의 딜레마에 빠진다. 지식인 남자가 가진 욕망의 천박함 혹은 편협함을 인정하는 이런 솔직함이 이 영화가 가진 강점이며, 이 영화가 남성 본위의 성적 판타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데빈과의 관계를 통해 카베는 자신을 비추어본다. 알코올중독자인 그녀를 참아낼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여자들을 괴롭혀온 자신의 욕망도 일종의 중독 증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고 자신을 ‘섹스중독자’라고 규정한다. 결혼과 사랑 그리고 성욕에 대해 대담하고 솔직했던 서두와 본론에 비해 그를 섹스중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결론은 다소 상투적이고 낭만적이다. 그렇지만 <나는 섹스중독자>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쉽게 보기 힘든, 발칙하고 도발적인 유머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은 확실하다.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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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만에 다시 듣는 목소리..

  • 등록일
    2007/02/02 23:41
  • 수정일
    2007/02/02 23:41
전화번호는 다른 이를 통해 구했다.
하지만 막상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기란 쉽지 않았다.
아마 상대는 '누구일까? 모르는 번호네' 하면서 받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 건 사람이 확인되는 순간
어떤 반응이 튀어 나올지는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년이 조금 더 된 것 같다.
같이 활동하던 그 친구는 어느날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당황스러웠고, 집 앞에 가서 지키고 있을까 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여러 번.
다행히 한 달 가량의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친한 선배에게로 연락이 왔다.
하지만 나는 그 연락의 대상에선 빠져 있었다.

그렇게 그 친구는 운동을 그만두었다.
가끔씩 그 선배를 통해 근황을 전해들었다.
그때마다 섭섭함과 자책감이 교차했다.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었는가.
한편으론 일방적으로 끊김을 당할 만큼 나의 노력은 부족했던가.

연락처를 알아두고, 언제고 한 번 연락해야지, 연락해봐야지.
만나주든 아니든.. 그러던 것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그리고 이제사, 조금은 홀가분한 처지가 되자 연락해 볼 의지가 난 모양이다.

통화는 참 어색하게도 이루어졌지만,
나의 바람대로 만날 약속은 정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는 목적이 분명하다.
'그 곳'에 가기 전에 나의 10여 년을 되돌아 보고 싶다는 생각.
나의 시간들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시공에서 관계했던 사람들과 겹치는 것.
그래서 나만의 생각으론 속단할 수 없다.
풀리지 않았던 것들을 풀어보고자 하는 생각.
그렇게 나에게는 너무나 의식적인 만남일 테다.

반대로 그 친구에게는 이 만남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전화를 끊고 나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아픈 만남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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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인 유진오

  • 등록일
    2007/01/30 23:50
  • 수정일
    2007/01/30 23:50
김강사와 T교수를 쓴 유진오가 아니라
시인 유진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청년 시인 유진오는 48년에 <창(窓)>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시인이 되는 것은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돼야겠다.
시는 그 다음에 써도 충분하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민을 위한 전사(戰士)가 되는 것이다.
나의 시다운 시는 금후의 과제이다."

라고 심정을 적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집은 지리산으로 떠나면서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남부군 中)


유진오

출생 연도 및 출생지 미상
1940년 초반에 일본 문화학원을 다님
1946년 김상훈 등과 함께 『전위시인집』 발간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활동
1947년 빨치산 문화선전대로 지리산에 들어감
1949년 10월 군법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후 감형되었으나,
그 이후 행적은 불분명함

시집 : 『전위시인집』(1946), 『창(窓)』(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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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진, 해남

  • 등록일
    2007/01/28 11:57
  • 수정일
    2007/01/28 11:57
에이쒸!!!

한 시간 동안 썼는데, 날렸다!!!

"등록" 버튼을 누르고 나니깐 왜 아무 내용 없이 텅 빈 내용만 뜨는 것이야.
뒤로가기 몇 번 해 봐도 안 뜨네.
우엑우엑우엑.

아씨.
다시 쓰기 귀찮어.

일단 메모와 사진만 남긴다.
나중에 시간 나면, 혹은 땡기면 보완해야겠다...

<메모>

영랑생가. 관심없어 그저 그런
다산초당 옛길. 좋았다.
반찬이 다 김치라는 할아버지.
두륜산 옆자락을 넘고 넘어.
솔직히 힘들고. 1단 잘 안 내려가고. 빨리 가고픈데 시간도 쫓기고.
스트레스 ↑
그래도 소나무 우거진 북일 초교에서 김밥 한 줄 먹고 진정.
끝없이 오르락 내리락
지나치는 여행자, 인사 놓치다.
쇄노재 매점 아주머니.
귤2, 가구마5. 투어가이드.
자식들이 비슷한 또래.
부동산 얘기. 역사 이야기.
40분 앉아 놀다.
77번 도로 힘들더라.
땅끝.
버스.
7일 만에 엔진.
이상한 기분.
이렇게 빠를 수가.
이틀만에 160km 내려왔는데 정신이 없다. 뭐가 뭔지 모를.



영랑 생가.


영랑 생가.


영랑 생가.


강진에 청자 도요지가 있다나.


다산 초당가는 옛길


다산이 걷던 길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라 한다.


유배가 풀릴 것을 앞두고 새겼단다.
똑같이 돌에 새겨도 어떤건 문화재가 되고, 어떤건 자연훼손이 되고.




초당에서 몇 걸음 가면 나오는 정자에서. 바다가 보인다.


쉬어갔던 북일 초등학교.


동백꽃이 피려 하고 있었다.


쇄노재 매점, 그리고 아주머니.
여행 중 가장 길었던 대화.


겨울이 보는 파릇파릇함.


배추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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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째, 광주.

  • 등록일
    2007/01/27 23:50
  • 수정일
    2007/01/27 23:50
찜질방에서 잤던 날 중 가장 잘 잤다.
수면실 시설도 매우 좋았고,
무엇보다 군산 찜질방의 경험을 살려 휴대용 귀마개를 미리 준비한 것이 압권이었다.
앞으로도 찜질방에선 얇은 상의 한 벌과 귀마개 정도면 매우 편안히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광주를 돌아보고, 부지런히 강진까지 가야 한다.
그동안은 하루에 6~70km 정도 탔지만 광주시내에서 망월동까지 갔다가 강진으로 가려면 사실상 거리는 100km가 넘는다.
시간이 부족하면 밤에도 잔차질을 해야 하는 거리다.

밤에 잔차질 하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아서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화요일에 전남 남해안 지방에 비가 온다고 한다.
비가 오는 것은 더 최악이다.

월요일에 땅끝에 닿기 위해 강진까지는 간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광주에서는 518관련지를 많이 돌아보고 싶었는데...
전남대와 망월동만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전남대


뭐. 별 느낌 없었다.
정문은 그 때의 정문이 아니라 새로 지어진 정문이라고 하니.
'용지'라고 불리는 연못이 크고 좋아 보이더란 생각 밖에는...
학생회관에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 싶긴 했는데 시간도 많지 않고 해서 금방 나왔다.


연못에서 노니는 오리들.
나 너네 좋아하는거 알잖아~


망월동



광주시내에서는 대따 멀다. 가는데 한 10km. 40분 넘게 걸렸다.
게다가 길도 안 좋고 차들도 많고 해서 좀 위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도착.

남들은 학교 다닐 때 가보곤 하더라만 나는 어쩐지 한 번도 와 보질 못했다.












거대한 국립묘지가 서 있었다.
이 묘지가 완공되면서, 어찌 보면 박제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잠깐 했다.
묘비 사이를 돌면서 여성들의 이름을 찾아 비문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윤상원 열사의 비석 앞에선 좀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 1학년때,
월간 노동해방문학에 실려 있던 윤상원 평전.
지금은 변절한 시인 박노해가 쓴 그 글을 읽고 나는 전율했다.
그 글을 읽은 후 나에게 518은 더이상 광주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광주노동자계급의 무장봉기였다.

그 후로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 최윤의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깃발' 등의 소설책을 쥐곤 했다. 어제 본 '오래된 정원'을 보면 518이 사람들을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20여 년이 지났지만 나에게도 그러했다...

국립묘지를 돌아보고 사진전을 보면 수없이 봐 온 사진들을 감상했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분노. 한편으로는 허탈함.
문득 다음에 연재되던 강풀의 만화 '그 후 20년'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볼 만 했는데..

구묘역으로 갔다.
안 갔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열사들이 쉬고 있는 곳.
이용석 열사의 묘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용석 열사가 분신하던 그 장소에 나도 있었지.

집회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할 때쯤 뒷쪽에서 연기가 나길래 여느때처럼 유인물, 쓰레기 등을 모아 불을 피우나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 때 전신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 물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근로복지공단 진입을 위한 몸싸움라인에서 마주쳤던 1001들의 야수같은 폭력도.

그 날 집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여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주최로 열린 첫 전국집회였다.
원래는 상징적인 몸싸움 정도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모두는 그냥 그렇게 시늉만 하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날은 그랬다.


구묘역에는 광주, 전남 지역이 고향인 열사들이 묻혀 있는 것 같았다.
87년 6월 항쟁의 상징인 이한열 열사도 있었고,
많은 학생 열사, 노동 열사들이 있었다.

한 학생 열사의 사연이 가슴에 남았다.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 검문을 피하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다가 목숨을 잃은 한 학생.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죽음일 지 모르겠지만...

구묘역을 돌고 나니 다른 묘역들도 한 번씩 가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박일수 열사 장례식 때 가 보았던 양산 솥발산과 마석 모란공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도 땅을 달리며

부지런히 광주 시내를 벗어나 나주를 지나 영암으로 향했다.
먼 거리. 만만치는 않았다.
중간 중간 쉬기도 하면서.



영암읍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고갯길에서 뜻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왠 6.25 희생자 위령탑?


비문을 읽어보니 내용이 영 심상치 않다.
영암군 금정면 연보리.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맞다.

전남 영암 보련학살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1949년 결성된 '국민보도연맹(國民輔導聯盟)'의 취지는 과거 좌익 경력을 가진 사람이나 그 가족을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한다(輔導 또는 補導)' 였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을 반대한 이들을 모두 보도연맹원으로 가입시켰고 또 지역에서는 할당된 수를 다 채우지 못하자 사상과 무관한 주민들을 대거 보도연맹원으로 가입시키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예비검속되어 학살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약 30만 명이 이렇게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보도연맹원과 함께 좌익 경력자 및 좌익 가족에 대한 예비검속으로 이들 또한 보도연맹원과 함께 모두 학살되었다. 예비검속 및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이후 물고 물리는 보복학살의 시작이었다.

1950년 7월 13일(음력 5월 30일) 영암군 금정 덤재에서 경찰이 200-250명의 보도연맹원을 학살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예비검속이 된 보도연맹원들이 며치 구금된 사이 경찰은 이들을 살리고 싶으면 돈을 가져오라 하여 갔더니 이미 보도연맹원들은 사라진 후였다. 당시 유족들은 학살지를 찾아 시신을 확인하였는데 한 구덩이에 5-6명씩 묻혀있었고 이런 구덩이가 40-50개 정도 되었다고 한다.

또 1950년 10월 17일(음력 9월 7일) 영암군 구림에서 경찰이 80여 명을, 1950년 12월 18일(음력 11월 10일) 영암군 연보리 차네골에서 군인이 161명을, 1951년 1월 2일 (음력 1950년 11월 25일) 영암군 구림에서 경찰이 12명을 빨치산 소탕과정에서 학살한 사건이 있다. 이 외에도 영암군 풀씨재 고개, 금정 남송리 등지에서도 학살이 있었다는 제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자료 : http://www.genocide.or.kr/  )

그 외에도 찾아 보니 이런 자료가 있다.
http://www.dailian.co.kr/area/news/n_list.html?page=2&t_name=gj_news&sel=&search=&kind=mno&keys=3277&idx=&id=9807&room=&area=&sno=&sdate=

http://blog.naver.com/uuuau?Redirect=Log&logNo=40010166441
20세기 전반 동성마을 영보의 정치사회적 동향

특히 위 글을 읽어 보니
내가 넘어온 고개는 바로,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빨치산들의 활동 무대였던 것이다.

고갯마루를 넘으면 나오는 영보리라는 마을은,
좌익 인사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한때 '영암의 모스크바'로 불리기도 했단다.


고갯마루를 앞두고.











고갯마루에 서니 월출산과 탁 트인 남도 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역사의 현장이었다.
예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채 꽂아 둔 이태의 '남부군'이나 다시 봐야겠다.


한밤중에 강진으로

영암읍에 도착하니 이미 어두워졌다.
영암읍은 마치 죽어있는 도시처럼 조용하고 사람도 거의 없어 보이고..
문 연 식당도 별로 없어 보이고(내가 못 찾은 거겠지만)
겨우 고깃집 하나를 찾아서 들어가 밥을 안 먹고 고기나 한 번 시켜 먹어 보았다.
2인분은 시켰는데 혼자인지라 왠지 박대하는 분위기라 좀...;

술은 못 먹고 사이다로...

밥을 먹고는 캄캄한 밤길 30km를 달려가기로 결심했다. 중간에 터널도 하나 지나야 하고.
그리고 강진으로 가는 길.

처음 출발할 때는 바로 머리 위해 오리온 자리가 떠 있었다.
"오리온, 날 지켜줘~"

가끔씩 차들은 쌩쌩 지나갔지만
왠지 오싹한 느낌.
귀신 나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들고.

시가지가 아닌 곳은 정말 '캄캄'하다.
자전거로 긴 오르막을 오르는데 힘든 건 둘째치고,
 캄캄한데 멈춰 서 있는게 더 무서워서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결국 터널 하나를 지나고 부지런히 간 끝에 한 시간 반만에 강진읍 도착.
저 멀리 시가지 불빛들이 보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터널 속의 환한 불빛 바로 옆에서 나는 잠시 쉴 수 있었다.
빛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인간은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하는 것인지.


강진 진입.
이렇게 20인치 바퀴로 100km를 끊었다.
26인치 바퀴로 다닐 땐 100km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ㅠ.ㅠ

찜질방은 없고,
여인숙은 못 찾고,
온돌 있는 모텔방을 찾아서 옷도 말리고, 씻기도 하고..
아무래도 너무 무리했나 보다. 오른쪽 허벅지가 찌릿찌릿 했으니.
자다가 다리에 쥐 나지 않을까 싶어서 문득 겁이 났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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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째, 담양.

  • 등록일
    2007/01/26 16:52
  • 수정일
    2007/01/26 16:52
여행 다섯번째 날. 목적지는 담양, 그리고 담양을 넘어 광주에 도착해 자는 것.
그런데 이날은 구경한 것보다 예닐곱 개의 고갯길을 넘었던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정읍에서 담양으로 갈 수 있는 코스는 두 가지.

장성으로 좀 돌아가거나, 내장산을 직접 넘어서 가거나, 내장산 옆을 돌아 순창을 걸쳐 담양으로 넘어가는 길.
전라도는 경상도에 비하면 정말정말 평야가 많지만,
전북에서 전남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노령산맥 줄기가 뻗어나와 내장산 자락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아마 장성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나마 언덕이 좀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순창을 걸쳐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분명히 계획을 짤 때는 장성으로 가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왜 당일 아침에 코스를 바꿨는지 모를 일이다.

"1번 국도 타고 장성으로 가면 엄청 돌아가는 거야~"
라는 택시기사의 한 마디 때문이었을까.

내가 잤던 찜질방의 위치가 1번국도로 쪽으로 나가기에는 너무 내장산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었을까...

하여튼 이 날.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아침 7시 30분에 출발.
장장 다섯 시간 가까이 자전거를 타다가, 질질 끌고 가다가...;;
10km의 오르막과 10km의 내리막을 지나 겨우 담양에 도착했다.

하지만 담양에 도착한 것으로 고개 넘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광주로 가기 위해 나는 그 날 무등산 자락도 넘어야 했으니깐...


처음 찜질방을 출발해 내장산을 향하는 드넓은 도로에서는 참으로 상쾌했다~
그러나. 담양으로 향하는 표지판과 함께 등장은 높다란 언덕길.
나는 이 길로 갔던 것이다.



고개 하나를 넘어 보니 저 앞에 더 큰 고개가 또 하나 보이고.
지도에서 M자로 꺾인 곳을 겨우 넘어 경계선을 넘으니 드디어 순창군이 나왔다.


내가 넘어온 길. 과연 오늘 안에 담양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저~ 밑의 평지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내장산이 거의 눈높이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씨는 흐리고,
햇빛은 나지 않고,
언덕을 오르는 동안 몸과 옷은 흠뻑 땀에 젖은 상태.
길은 깨끗했지만 며칠 전에 내린 눈은 여전히 녹지 않고 곳곳에 쌓여 있었다.
8km가량의 긴 내리막을 내려오는 동안, 정말 추웠다.
싸구려 등산자켓은 땀을 자기가 흡수해서 다 머금고 있는고로 정말 얼어죽는 줄 알았다.


옷을 보니 이렇게 얼음이 얼었다.
이건.... 여의도에서 겨울에 물대포에나 맞았을 때나 봤던건데 헉.

한 시골 마을을 지나가는데 연기가 나고 있었다.
모닥불이 있나보다! 싶어서 달려가 보았더니

보기에는 따뜻한데 제대로 불을 쬘 수는 없을 정도.
이틀 전 격포에서의 그 커다란 장작불이 어찌나 그립던지.
솥 안에는 과연 뭐가 끓고 있었을까?

할 수 없이 몸을 녹이는 것도, 옷을 말리는 것도 실패하고 다시 달리다 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어느 교회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싹 갈아 입었다. 그러니 조금 낫더만.

순창군 쌍치면을 지나 담양군으로 들어간다. 순창에서 담양을 넘는 경계도 고갯길이다.
아... 차 타면 금방인데 이 고생을 왜 내가 사서 하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큰 고개를 하나 넘어 담양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조금씩 마음은 가벼워 진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담양 가는 길. 원래는 개장 앞에 수많은 닭들이 뛰놀고 있었는데
사진 찍으려고 어물어물 하는 바람에 개장 뒤쪽으로 닭들이 다 숨었다.
고갯길을 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개그야의 "킬리만자로의 걔"가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더니, 니가 '쳐다본다'냐?"
"아니다. 내 이름은 '닭 쫓던'이다. 너야말로 '쳐다본다'냐?"
"아니다. 내 이름은 '지붕'이다."
"그럼, 누가 '쳐다본다'냐~~~~~"
(정말 불쌍한 얼굴로 김완기가 등장한다)
"내가............. '쳐다본다'다..........."
그 다음엔 어떻게 했더라? ㅋㅋ

담양으로 접어드니 왼쪽에는 거대한 담양호가 나오고,
오른쪽으로는 전남5대 명산 중 하나라는 추월산이 나온다.
추월산 참 범상치 않게 생기긴 했다.


담양호. 전망좋은 곳에서 찍은 사진.


추월산 옆구리도 다시 넘어넘어 드디어 담양읍에 도착.
죽녹원에 도착했다. 작은 산등성이에 만들어진 대나무숲 공원 정도 된다고 할까?


죽녹원.
겨울이라 춥긴 했지만 도통 녹색을 보기 힘들었는데, 여기서는 마음껏 녹색을 즐길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운수대통'이란 건데. 여기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질 지 모른다나~
이건 '어린이용'이다.
그런데 어린이들의 꿈은 의사, 박사, 예술가밖에 없단 말인가~~


이건 어른용.
'대박' 뭐 이런 것도 있고. 나도 하나 던졌는데 '사랑'에 골인~ 음하하!

대나무숲 곳곳에 소풍 다녀간 고등학생들의 소원지를 매달아 두었다.
이거 보는게 참 재미있었다. 소원의 대부분은 '수능 대박' 고3애들이 왔다갔나 보다.






가끔 이런 애들이 있었다. 이건희 회장보다 부자가 되려면..
이건희 친척 정도는 되야 조금 가능성이라도 있을텐데?


캬. 멋지다.


우주 정복의 첫 관문은 수능이로군. 음..


응. 그래 뭘 기다렸니?


오늘의 베스트.

지구가 역자전 하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ㅡ.ㅡ;
잠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다.
일단 지구가 거꾸로 돌면.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
그리고 계절풍, 무역풍 따위의 방향이 바뀌면... 기후가 달라지나...?
아 그러면 기후재앙이 생길 수도 있고 혹시 세계의 평화가 깨지는 것을 아닐까.
나 원 참.












죽녹원은 괜찮았다.

관방제림도 둘러 보고 메타세퀘이어 길도 둘러 보았다.
생각보단... 역시 가을에 왔어야 했나.
그래도 담양 읍내를 흐르는 천변은 잘 가꾸어 놓았다.






담양읍내 김밥천국을 찾아 밥을 먹었다.
다음 목적지는 소쇄원. 지도가 있었지만 그냥 현지 사람에게 말도 붙일 겸 식당 아저씨한테 물어봤더니 한 번도 못 가봤다면서 잘 모르더라.
아저씨도 내가 신기했는지 이것저것 물어 보길래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자기는 연중무휴로 식당을 해야 해서 어디 놀러가거나 할 여가가 없다고.
왠지 말 속에 아쉬움이 배어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괜히 물어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이제 담양과 광주의 경계 쯤에 있는 이른바 '가사문학문화권'의 중심지인 소쇄원으로 출발.
지나다 보니 광주호가 나온다. 참 곳곳에 인공호수가 많다.


먼저 도착한 곳은 식영정. 여기가 참 경치가 좋았다. 광주호를 내려다 볼 수도 있고.










반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온 소쇄원. 한국식 전통정원이라는데.
솔직히 1000원 내고 들어간 것 치고는 대실망.
겨울이라서 그랬나. 아니면 해 지기 직전이어 햇빛이 없어서 그랬나.
무슨 수해 당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그런 기분. 어차피 건전지가 다 돼서 사진도 얼마 못 찍었다만. 하여튼...


소쇄원을 나오니 해가 다 졌다.
이제 광주 시내로 들어가 잘 곳을 찾아야 했다.
소쇄원 쪽에서 광주로 가는 길은 두 개. 대체로 평탄하지만 거의 'ㄱ'자로 돌아가는 코스가 있고, 무등산 자락을 넘어 거의 직선으로 가는 코스가 있다.
또 살짝 주유소 아저씨한테 물었더니 얼마 안 걸린단다. 자전거로 20분이면 된다나.
설마... 20분은 아니고 3~40분은 되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마침 세부적인 지도가 없었다. ㅡ.ㅡ 그 부분만.

주유소 아저씨 말을 믿는 바람에 나는 또 캄캄한 밤에 두 개의 고개를 넘어 한시간 반만에 광주 시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쌩쌩 달리는 차들을 욕하면서.
에휴~


두번째 고갯마루에서 만난 광주 시내 야경.
어찌나 반갑던지-

시내에 들어가 저녁은 대충 때우고.
찜질방을 찾았다. 광주 시내 굴지의 찜질방. 마침 토요일 밤이어서인지 진가 수백 명이 복작복작하고 있었다.
과연 잘 잘 수 있을까...

자기 전에 내일 코스를 점검했다.
이왕 가는 거 땅끝까지 간다. 그러면 내일은 무조건 강진읍까지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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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 등록일
    2007/01/26 12:08
  • 수정일
    2007/01/26 12:08

요즘 평균 수면 시간 9시간. ㅡ.ㅡ;

 

나에게 2007년은 보람차고 희망찬 새해가 아니다.

며칠 전에 현역에 있는 후배녀석이 전화를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했다.

녀석이 "형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어? 근데 형은 올해 복 받을 일이 없잖아~~~"

하고 놀린다.

 

1월이 거의 지나가고 짧디짧은 2월이 다가오는 요즘

나는 이중의 압박 속에 시간을 허비 중이다.

 

하나는 왜 내가 지금 활동도 못하고 백수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

또 하나는 대체 나는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조바심.

 

다름 사람들과 다르게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은 아닌지,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해 보는 요즘이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엔 급기야 개꿈같은 악몽을 꾸었다.

이게 뭐냐! 이게!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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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 정읍.

  • 등록일
    2007/01/22 11:13
  • 수정일
    2007/01/22 11:13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로


부안군을 벗어나 정읍시로 들어섰다.
어느덧 도착한 고부면. 조선 시대에는 호남의 제일 핵심도시는 전주였고, 고부는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고부는 일개 면으로 전락했다나.



무엇보다 배가 고파 식당에 들렀다.
국밥 하나를 시켰는데 반찬도 푸짐하다.
결코 김밥**에서는 접할 수 없는 반찬들. 근거없는 느낌인데 전라도 식당들은 대체로 반찬이 푸짐한 듯 싶다.















식당 옆에는 고부초등학교와 고부관아터가 있다.
고부관아터에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어서 실제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개교 백주년이라 허허


고부면에서 이제 황토현 전적지로 간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농민들이 최초로 봉기한 후 관군과 붙어 대승을 거둔 곳.

황토현 전적지


기념탑이 서 있는 곳에서 내려다 본 드넓은 들판


전봉준 동상










제 1 주동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기 위해 주모자들의 이름을 원을 따라 둥글게 썼다고 한다.

텅 빈 기념관에서 그래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역시 교과서적이지만 자료 설명도 꼼꼼하게 잘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동학농민군이 설치했던 집강소는 일종의 소비에트와 유사한 성격의 인민자치기구 아니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죽 서술하면서 이것이 90년대 민족자주운동으로까지 연결된다고 설명했던 부분. 왠지 모를 '입장'이 느껴져서였는지도^^

텅 빈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을 혼자서 고즈넉이 둘러보다
바로 옆에 새로 멀끔히 지어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들렀다.
박물관 같은 곳. 시설도 잘 되어 있고. 특이한 것은 19~20세기 세계 각 국의 민중운동에 대해서도 간략히 전시해 놓았다는 것.


요 기념관이랑 황토현 전적지랑 묶어서 거대한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중이었다.
관광수입을 만들기 위해서 참 노력하는 지자체라-

멀지 않은 곳에 전봉준 생가가 있지만 자전거로 가기엔 너무 멀어서 바로 정읍시내로 직행했다.

호남선 철도와 호남고속도로를 넘어서 정읍시내로 진입.

여기를 작년에 몇 번은 지나다녔겠지.
만약 자동차로 다녔더라면,
나는 목적한 곳에 몇 배는 빨리, 쉽게 도달할 수 있었겠지.
그래도 나는 내 다리 힘으로 두 바퀴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누빈다는게 자랑스러워.

정읍에선 오랜만에 피씨방에 한 3시간 들어앉아서 이것저것 들어가 보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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