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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go , you are a total hypocrite

그러므로 당신은 완전한 위선자이다.

 

나는 위 문장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물론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작가주의적이거나 경험의 직접 체험을 중시하는 독자들로부턴 별로 지지받지 못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말을 인터넷 서핑 중에 어떤 단어의 뜻을 찾아본 사전의  예문에서 가져왔다. 그게 토탈이었는지 이포크리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예문을 해석한 문장이 당시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었던 나의 심장을 때렸다는 것만이 가슴에 남아있다. 당신들도 동의하듯이 " 꿈을 추진하는 것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 그리하여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자, 들어보시라.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다른 사람들을 처음 만났던 것과 같은 때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 모든 사람들 중에 유독 그가 눈에 들어온다는 "최초의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작가가 아닌 등장인물의 경우, 그 설정 속에서 천성적인 배우의 기질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는 사실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액터란 본시 신을 위한 합창 속에서 추임새같은 대사를 넣는 역할에서 비롯되었으며  제정일치시대에 배우의 등장이란 바치는 것으로서의 예술을 관객을 위한 무대로 끌어내리는 전환점이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신을 위한 선사에서 인간을 통한 유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쓰여진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나는 그를 한번 보고 두번 보고 거듭 보면서 더욱 사랑에 빠져들어갔다. 음,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서 빠져드는 것이니 이건 자기애가 아니라 대상에의 추구가 틀림없다. 왠지 나는 사랑을 감성으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논리와 이성으로 규명하고 싶어지는데 그 이유는 결국 이 글을 다할 때쯤엔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아무튼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건 자기 위안이야 혹은 대리만족이야, 팬픽을 쓰고 싶은 사춘기소녀의 심정과도 유사하지. 뭐 이렇게도 변명해봤다. 하나 나는 그와 같은 타입을 너무나 좋아하는 기질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오, 마이 갓. 이런 식으로 고백하다니.  하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그는 내가 사랑한 열 명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결국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사랑의 콜렉티드인 것이다. 만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용서하라,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관상의 그것이지 소통의 양주체가 되고자 함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욕감을 느낄 것까진 없지 않은가, 어차피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도 않을 터이니 말이다.

 

사실 마지막에 한 말은 진실이 아니다. 그건 단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지 않겠다는 어느 소심한 노처녀의 완강한 부인과도 같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열 번 쯤 사랑에 실패해 보면 다시는 누구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내놓기 쉽지 않아지는 법이다. 여기서 쉽지 않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움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쉽지 않다는 말을 이런 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아는 데 바로 내 열 번째의 사랑이었다. 나는 그때 매우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지만 '열번째'는 그런건 쉽지 않다라고 에둘러 거절했다. 당시 그 말을 듣는 나는 아홉번 쯤 실패한 사랑으로 인해 어쩔수없이 몸에 익힌 요령으로 묵묵히 그리고 담담한 마음을 가장할 수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래동안 말이다. 나는 나 자신조차도 속여넘긴 것 같았다. 어느날 문득 그 날 이후로 웃음이 없어진 내 얼굴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기 전까진 말이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의 법칙을 발견했는데도 말이다.

 

기실 나는 그 행복의 법칙을 발견하고서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 법칙은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그도 인간을 사랑한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이런 식으로 삼단논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치한 수준의 애라도 알 만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사랑한 아홉명이 다 이와 같았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도 인간을 사랑한다고 했다. 게중의 한명은 인민이라고까지 발화했다. 내가 어찌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와 손을 잡고 브나로드를 외쳤다. 그가 김기진의 시처럼 카페 의자에 앉아서만 단지 그럴 뿐이라는 걸 비교적 최근에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그저 가슴으로만 아파했다는 것이다. 내 사랑은 왜 거절당했지? 왜 나는 사랑받지 못 하지? 뭐 이런 자괴감 속에서 말이다. 이러하니 내가 열번째의 사랑을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나야말로 궁상의 극을 달리며 불가능한 꿈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열번째'가 어찌 했는줄 아는가? 온 몸과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나는 이때쯤엔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지 인간을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저 사랑을 사랑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선교사를 따라다니면서 감염된 시동과도 같았다. 예수의 얼굴을 보면서 그 속에서 사제의 얼굴을 보면서 기독교적 사명감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나는 정말로 '열번째'를 사랑했다. 그리고 실연당했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그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까? 물론이다. 그건 법칙이니까.

하지만 신포도에 손이 닿지 않았던 여우처럼 나는 행복의 법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라니? 아니 인민이라 해도 마찬가지야, 그건 사상이고 보편이거나 진리일 순 있어도 사랑은 아니지. 완전히 별개야, 그가 인민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야. 바보같은 짓이다. 아둔한 놈, 결국 내가 한 열번의 사랑이 모두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식의 자해에 해를 입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나는 행복의 법칙을 포기하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 하는 몸이 되었다. 아무에게서도. 어떤 인간에게서도. 인간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제서야 비로소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를 만난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가 도드라졌다. 나는 즉각적으로 눈치챘다. 이는 내가 사랑한 열 명이 갖고있는 공통점을 사랑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내가 오랫동안 깊게 사랑했던 '열번째'와 가장 유사하기까지 했다. 나는 마치 다시한번 무덤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자신이 이토록 선하게 보이다니, 그건 물론 쓰여진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로서의 나이기 때문이긴 하다. 하나 나는 이미 액터로서 활약하고 있다. 나는 사랑한다. 그를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그가 말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도, 그가 인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 그가 역사적 개념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것을 본인의 입으로 들었으면서도 단념하지 못했다. 왜?

나는 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며 지난 세월동안 열번의 사랑을 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왜 사랑을 그만두지 못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그는 행복의 법칙에 맞는 인간이 아니다. 오, 맙소사. 결국 내가 사랑한 열 명이 갖고 있는 공통점 때문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해왔던 것이다. 그 조차도 그 공통점의 소유자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유'라고 지칭하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그를 왜 사랑하는 지를 규명해야 하니까, 이유를 알게되면 그만두기도 쉬워질 것이다. 뭐든 그렇지 않은가? 원인을 파악하면 상황은 통제가능해지는 것이다. 단지 그럴 수 있다는 믿음에 불과할 뿐이지만. 나는 바로 지금 이순간 그걸 깨달았다. 이유를 알았지만 그만 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거구나...사랑이란.

 

그가 노래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삶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는 죽음을 노래하기도 한다. 내가 최초로 사랑한 자는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었는데 제법 인민에 대한 사랑을 말로 하면서 분개하기도 했었다. 내가 두번째로 사랑한 자는 숟가락을 두드리며 노래했는데 그는 인민 자체였다. 내가 세번째로 사랑한 자는 병나발을 불면서 노래하는 자와 늘 함께 있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었다. 왜냐하면 병나발을 분 자는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예수를 사랑할 수 없으니 사제를 사랑하게 된 시동과도 같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때쯤엔 내가 이미 단지 노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레 미제라블처럼 비참한 자들을 보면서 들었던 노래를 잊지 못 하는 것과 같다. 이건 감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유라고 달리 지칭해 보았던 그의 매력 앞에서 어찌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서두에 말했지만 나는 이 감성을 부인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해왔다. 매일 낮과 밤을 그에 대한 생각과 꿈으로만 겨우 구분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스스로의 신경이 노쇠해져서 마르고 얄프레한 겨울 낙엽처럼 바스라질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에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냥 인정해. 사랑한다고 생각만 하는 건데 뭐 어때. 말만 안 하면 되지.

 

그리고 다음의 말도 내가 한 말은 아니다, 물론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실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의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 글을 쓸 예정이다. 그때는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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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우 - 현성편 1

십천간을 돌고 돌아 육십갑자를 다 살아냈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살아온 나날보다 많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하여 날숨이 내쉬어졌다. 뭘 더 하지 않아도 좋으리, 애쓰지 않아도 되쟎을까. 이젠 쫓기듯 애태워하지 않고 세상에 붙들리지 않아도, 이젠 그래도 되는 "노년"이 된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들에 힘들이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야, 그럴 것이다. 현성은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제 속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가슴 속에 꿍쳤으나 오래도록 밀어두었던 면포의 속적삼 한자락을 내어본들 흉된다 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그리한들 또 무에 거슬릴 것이냐.

 

현성은 제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64평의 이층집에서 밥과 옷을 지으며 가족을 만들었던 1층과 사색과 소통을 시도하며 사회를 준비했던 2층의 서재와 발코니방 외에 자신을 온전히 모두었던 곳이 바로 이 작은 침실이었다. 세 평이 되지 않는 쪽방, 여기 놓인 침대와 협탁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수납하는 마호가니의 뷰로, 소박한 입본장 하나에는 외출용의 옷가지들이 다른 하나에는 편안한 실내복 몇 벌이 걸려있다. 현성은 이 작은 방을 여행가방 하나에 추려넣어 떠나고자 하였다. 어디를 가든 어디에 묵든 갈아입을 속옷 하나와 발을 덥힐 양말, 목 언저리를 가릴 스카프 한 장이면 충분하였다. 낮은 목소리로 차 한 잔을 내어줄 남편 없는 여인들이 쉬이 만나질 것이고 대합실 의자의 팔걸이에 머리를 두어도 무릎담요를 덮어줄 고운 손길에 은혜 입을 수 있을 것이다.

현성은 뷰로의 서랍들 중 가장 아랫단을 열었다. 그저 보관하기만 할 뿐 다시 들춰보지 않는 잡동사니들, 어린시절의 스냅사진을 넣어둔 봉투와 학창시절의 앨범, 졸업장과 언젠가부턴 받아서 부모에게 보여주지도 못 했던 상장 따위가 차곡이 쌓여있었다. 한두권의 드로잉북도 있다. 그건 90년대 말인가 2000년대 초인가 그 즈음 한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고 은둔하고 싶었던 때 동네의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그렸던 수채화 습작들이었다. 완성된 것도 있고 완성되지 않은 것도 있다. 자신은 예술적인 재능도 향유할만한 감성도 변변히 없다는 걸 알았지만 한동안은 그저 도화지 앞에 앉아있고 싶었다. 마음이 형해화되어 천천히 녹아내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길 바라며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세상을 향해 말 걸기를 그만 두고 있으니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현성은 속 깊은 어딘가에서 작은 아이가 눈을 들고 자신을 향해 입술을 움직거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지난 십년간 그 것을 보며 지탱해 왔다.

드로잉북의 중간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었다.

여행 가방 속으로 빨려들듯 챙겨넣었다.

현성은 방을 나왔다. 아니 집을 나왔다.

 

집을 만들 때에 함께 늙을 사람을 골랐으면 좋았을 걸.

기차를 타고 내려 다시 버스를 탔다. 대구 경산 어드메 쯤 버스정류장엔 카페가 문을 열었다. 음력 설날 아침인데. 남편 없는 여인과 그니의 딸이 번갈아 카페를 보고 있었고 현성은 몇 번인가 그네들의 공간을 웹진에 연재되는 칼럼 속에서 사진으로 보았었다. 볼 때마다 가 보고 싶었다. 안면 없는 그들의 "집"이자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공간"으로 한 발 들이자 깜짝 놀랐지만 곧 괜찮다는 표정으로 반가이 맞아준다.

 

" 어서 오세요. "

" 문 열은 거 맞죠? "

" 네, 영업해요. 앉으세요. "

 

그들은 영업품목이 아닌 떡만두국을 대접해주었다. 밤 늦도록 동네사람들이 마실을 나와 떠들면서 갈 줄을 몰랐다. 현성은 집시들처럼 스스럼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한 사람이 민박집을 소개해 주었고 거기서 여장을 풀었다.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둔 방에서 요를 깔고 이불을 덥고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어린 여자애처럼 엎드려 누웠다. 새로 산 작은 노트 속에서 편지를 끄집어내었다. 열 일곱이었을까 아니면 열 여덟이 된 해였을까? 그 애가 고등학교 2학년을 두 번 다니는 바람에 기억의 페이지 수가 헷갈리곤 했다. 하지만 이젠 어느 시절을 추억해도 마음이 애잔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현성은 시간의 벽이 사방에서 허물어지고 경계 지울 수 없는 어떤 공간 속에 들어있었다. 오래된 노트의 갱지 속에 그려넣은 삽화처럼 현성은 기억 속에 스며든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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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 결의문

모름지기 나는 "절대 평범해선 안된다"는 전혜린의 명제를 모토로 불꽃같은 한 생을 살고자 하였다. 31세에 자살한 그니가 아니라도 스물여덟에 요절한 윤동주, 이상 그리고 마야코프스키와 W.A. 모짜르트도 삼십대에 죽었으니 나는 가히 서른에는 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십대를 보냈다. 그렇게는 안되었다. 입시의 압박감과 가정적 불행함에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염세주의에 푹 빠져있던 사춘기시절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연습삼아' 손목을 그어보거나 약을 먹어보기도 했으나 서른을 넘기고도 멀쩡히 살아남았다. 90년대 말이었다.

김남주가 암으로 죽었다. 출옥하고 살아낸 기간이 감옥에서 보낸 시간보다 짧았다. 그가 옥중에서 써낸 "나의칼 나의피" 를 읽으며 사춘기를 우격다짐으로 넘겨왔던 내게 시대는 그렇게 읽어졌다. 죽을래도 죽을 이유가 없는!

"배반당한 혁명적 로맨티스트"가 되기에도 참 더러운 "환멸과 저주의" 시대였던 것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떠드는 거리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다가 불쑥, 결혼을 했다.

결혼, 국가와 결혼한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처럼 계급과 결혼하여 독신으로 살면서 세계를 제패하고자 했던 내가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어진 시대에 직면하여 그걸 해치운 것이다. 서른 다섯이었다, 죽지도 못하고 해치운 결혼이라니. 갑자기 소시민이 되었다. 그 물에 가야 잘난 놈을 만난다는 대입관을 조소하고 낭만의 학생운동을 하면서 졸업은 한다라는 선배들도 엿먹이고 가열찬 현장투쟁과 견결한 조직활동으로 한 몸 불사르고자 했던 내가,  그저 역사의 한 점으로 살다 가리라던 내가, 설령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자가 나타난다 해도 "그"는 로자룩셈부르크의 연인처럼 " 당신의 발전을 위해 청혼하지 않겠다"고 말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내가 결혼을 했다. 그래도 한 놈은 내가 선택한 "그"에게 로자의 연인처럼 행동하라고 권유하기는 했다. " 그녀의 발전을 가로막지는 마세요. " 하고.  완전 폐쇄자(the Closer)였다.

오, 결혼!

일찌기 그것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말해졌던 것이다. 하여 나는 이상향의 남자를 묻는 질문에 "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남자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내 결혼은 가장 극악한 형태의 이율배반이고 상호모순이며 양날의 칼이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아무리 친절하고 헌신적인 연대활동을 하는 여성동지라도 운동권인데, 평탄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만류했다. 나의 친구들은 오, 언니, 노조활동을 했다고 다 우리같이 생각이나 품성이 깨어있다고는 볼 수 없어요.라며 우려했다. 그게 아니라도 이미 운동권커플들도 이른바 아는 놈이 더하다는 말을 실증시키며 열에 아홉은 파경에 이르고 있었다. 근데 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그 자세한 연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재미진 구성을 갖추었을 때의 먼 후일로 미루어놓겠다. 중요한 건 그렇게 " 불쑥 해 치운 " 결혼이 내게 아무러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마음에 있어서만. 마음과 현실은 헤겔의 관념과 실재 만큼이나 분리되어 있었으며 "결혼한 현실세계"에 대한 나의 태도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현실에 대한 윤리적 신뢰만큼이나 공허한 것이었다. 그러한 마음의 관념성과 무력함은 시댁식구들의 태도나 강압이라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커다란 충격과 공포로 폭발했다. 예를들면 처음 인사차 간 시댁에서 나는 김치를 담그기 위해 부엌(주방이 아님, 씽크대 따위가 없는 수도꼭지와 맨바닥의 헛간같은 추운 곳)으로 내몰려졌다. 나는...울었음. 왜?라고 묻는 남편될 사람에게 내 마음을 설명했으나 그는 이해하지 못 했다는. 그후에도 내가 그와 합일할 수 없으리라는 미래를 예견케하는 사건들이 잇달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굳건한 마음은 초연하게 유지되었다. 세상의 질서와 주류의 이데올로기에 반역해 온 내가 그까짓 가족주의에 굴종하겠는가? 그러나 가부장제의 역사가 현존하는 방식은  계급사회의 그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강력하고 단단하며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오죽하면 계급해방 자체만으로는 여성해방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겠는가?

결혼을 잠시 쉬어가는 간이역 정도로 치부했던 내게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대상들이었으나 아이는 달랐다. "그의 동의를 얻지 않고" 세상에 내어놓은 아이에 대한 책임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정말로 "태어나버린" 아이를 보았을 때 나는 하늘이 주신 모성의 기쁨 따위는 단지 학습된 감성의 수준으로만 느꼈으며 보다 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를 마주하면서 그 내던지는 행위에 일조했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공포와 전율을 체감하고 있었다. 오직 무력하고 자기 자신조차 책임질 수 없는 부모만이 " 아이는 제 먹을 것은 타고난다"거나 " 결국 지 타고난 팔자이다"라고 자식에 대해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이런 식의 무거운 책임의식이 아니라도 "양육"을 위한 모든 노동은 내게 전담되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나의 실제적인 결혼, 그 뒤의 스트레스는 본격화되었다. 아이가 태어난 백일파티에서 남편과 이혼말이 오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7년 뒤 유치원을 졸업할 때 쯤에는 잠정적 이혼상태로 불쑥 결혼했던 두 남녀는 합의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런 합의나 결혼, 제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성인들의 인생 이야기가 본 글의 주제는 아니며 또 실제적인 중요성을 갖지도 않는다.

아이는 학령기에 들어섰으며 학교를 가고 공부방을 가고 때로 저녁식사도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오게 되었다. 비록 많이 늦어지긴 했으나 바야흐로 나는 간이역을 떠나 다시 사회생활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럴 것 같았다. 이미 십년 간의 투쟁과 연습 속에서 가족 혹은 가정을 재생산하는 노동은 상당히 축소되고 간소화되었다. 예를들면 자조능력은 갖추고 있는 비장애인으로서 남편은 자신의 밥과 의복 그리고 제 누울 자리정도는 혼자 챙기며 출퇴근을 하고 있다. ( 맞벌이생활 중의 가사분담은 커녕 하루 40분의 외벌이 남편의 평균가사노동시간도 달성하지 못 하는 그와의 공동생활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이 집에 사는 한 지 앞가림은 스스로 해라.라는 것) 아이들은 빵과 우유로 지나가는 아침식사에 익숙해져있었고 ( 엄마가 길들였다고 오해하지 말 것, 기상과 등교 사이의 짧은 삼십분에 밥을 먹는 것은 신체리듬상 무리임, 고구마와 미숫가루 등 충분히 곡류를 통한 조식을 제공하고 있슴) 학교 생활이 끝나면 지역공동체의 더불어 함께사는 아이들이라는 모토를 충실히 실천하는 공부방에서 유기농식단의 간식과 저녁식사를 하며 알차고 재미있게 지내다가 7시에 귀가한다. 고로 나는 아침 9시부터 오후 6,7시까지의 개인가처분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단, 주 5일 동안만.

아이들이 집에 있는 토요일과 일요일의 주 2일은 온전히, 거의 온전히 집에 있어야 한다. 아이들끼리 집에 둘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안전 문제이다. 하지만 못지 않게 하루 세끼의 식사 또는 간식과 주변 정리 등 아이들이 집에서 쾌적하게 놀고 공부하고(는 물론 희망사항임) 자유로울 수 있도록 배려와 돌봄 그리고 감정노동을 수행해해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서술에 모성의 기쁨이라던가 아이돌봄이 고역이기만 한가라는 류의 반론은 제기하지 말아 달라, 논점은 그런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충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만일 선택해야 한다면 아이들의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위해 안방에서의 매춘을 감행할 의사까지도 있다. 물론 가설이다.

주 7일 중에 단지 2일의 전일노동은 기존의 가사노동에 비해 확실히 줄어든 것이다. 아이들의 5세 이전까진 혼자서 집 밖을 나간 적이 없는 나를 위해 친구들이 차를 가지고 와서 아이들을 싣고 마트나들이를 가게 해 준 적도 있다. 내 경우, 아이를 맘편히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친인척보다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역시 폐가 되니 늘 망설여진다. 그러니 안전이 보장된 학교와 공부방에서 아이들이 지내는 평일의 낮시간과 남편이 쉬는 일요일 만큼은 내가 가장 맘편히 외출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예를 들어 나는 주 5일의 전일제 근무를 하는 곳에 취업을 할 수도 있다. 그리 녹록친 않다. 아이를 낳기 전의 맞벌이생활과 아이들이 4세,6세였던 1년간의 맞벌이생활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볼때 나는 직장과 가사를 병행하지 못 했다. 그건 순전히 내가 워킹맘의 자기규칙인 " 씽크대의 얼룩을 보더라도 눈을 감고 지나가라"는 테제를 실행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나는 늘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예를들면 나는 냉장고 안을 늘 깔끔히 정리해두고 냉장고용 김치항아리를 한 번 꺼내고 들일 때마다 행주로 주변을 싹 닦는다. 나의 냉장고는 늘 정리컨설턴트의 우수등급을 받을 상태로 유지된다. 이불을 개고 펼 때도 마찬가지다. 각 잡고 개켜올리는 내게 직업군인 출신의 남편은 내무반에서도 그렇게는 안 한다고 핀잔을 준다. 핀잔만. 그 무거운 라텍스 요를 한 번씩 털고 정돈할 때도 손을 보태지 않으며 그럴 필요가 뭐 있냐고 나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청소의 기준을 달리하는 인간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요컨대 나는 집안을 건사하는데 시간을 많이 들이는 사람이다. 극단적으로 빨래를 널고 걷고 개는 것도 할머니처럼 한다, 다림질한 것처럼 반듯하게.

워킹맘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친구들은 건조대에서 걷어 바로 옷을 갈아입는달고 말하며 집안에 행주나 걸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까지 말한다. 실제 나는 그들의 집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는 꼴을 한 번도 보지 못 했다. 그들은 집을 숙박업소처럼 이용한다, 온 가족이 모두 다.

내게 집은 쉴 곳이며 노는 곳이며 정신이 성장하는 곳이다. 그건 그럴 수 있을 만큼 쾌적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맘처럼 성격을 바꾸면 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 나는 맞벌이 시기 늦은 퇴근과 늦은 저녁식사와 모든 단도리를 마치고도 혼자 거실을 청소하곤 했다. 새벽 세시에.

청소 만큼 시간을 잡아먹으면서 청소처럼 바쁘면 안 할 수도 있는 종류의 가사노동이 아닌 것이 바로 취사 혹은 요리이다. 그건 정말 중요하다. 오죽하면 68혁명의 3대 과제 중의 하나가 취사였겠는가.

평일의 저녁식사는 없어졌지만 귀가 후 야식을 챙겨야 했다. 그건 과일이나 주전부리로 후식을 내놓던 것보다는 좀더 양과 질에서 강화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밖에서 지낸 아이들은 집에서 안정적인 기분으로 고구마와 쥬스, 과일샐러드 정돈 먹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급식체제가 제공하기 어려웠던 포만감, 안정감, 여유로운 대화와 자기표현 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먹으면서 즐겁게 떠든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은 특히 어린 시절에 중요하다. 한번도 그런 경험을 갖지 못한 남편은 아무리 편안하게 늘어지는 휴가가 주어져도 밥을 천천히 먹지 못 한다. 늘 오분 만에 고봉을 비우고 밥상머리에서의 식량쟁탈전에 승리한 후에야 뒤로 물러나 승자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다. 그는 오징어를 씹는 정도나 되야 한, 두마디 농담을 한다. 뭐 남편의 궁핍한 어린시절과 삶을 즐길줄 모르는 태도의 연관성을 논구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아이들에게 평일의 저녁시간을 돌보는 엄마의 임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나는 평일 저녁엔 외출할 수 없다. 강조해서 말하면 직장에서의 칼퇴근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많은 경우 워킹맘들이 그러지 못 하는 실제적인 직장메카니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보고 있다. 그들은 마흔 이상의 승진가능성이 있는 여성직장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퇴근하지 못 한다. 직장이란 하다못해 회식이라 할 지라도 그렇게 매번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 집에서의 부재는 월 1, 2회라 할 지라도 무척 곤란한 상황이 연출된다. 내 남편된 자가 아이들과 집을 대신하여 돌보지 않기 때문이기는 하다. 나는 열 한시 쯤 귀가하면 나 없이 뭔가를 먹고난 식구들의 뒷설거지를 해야 하고 아무렇게나 널려진 옷가지들을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늦게 들어왔어도 다음날 아침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미처 가방에서 꺼내어지지 않은 아이들의 수저통과 물병을 꺼내 다시 씻어 담아야 하고 미처 챙기지 못 했던 가정통신문의 지시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담임에게 전화를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저런 일들이 워킹맘들이 못 해 내는 일들이 아니고 다들 해 내고 있다. 하이힐을 신고 달리며 말이다. 나는, 그렇게 살기 싫다. 아니 처음부터 싫어한 건 아니다 해 보니, 못 해 먹겠다는 것이다. 내게 가사도우미를 부르라는 말을 조언이라고 하지는 말라. 이 나라에서 대졸여성의 취업률은 20%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워킹맘의 대졸비율이 20%이다. 취업하고 있는 주부들의 80%는 고졸이하이며 또 100인 이하의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말하자면 비정규직이다. 그들은 아니 우리들은 파 한 단을 사더라도 까지 않은 흙대파를 사서 가사노동을 더 할 지언정 생활비용을 줄여야하는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다. 집안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직장생활도 지가 해 내야 하는 일이다. 분담할 사람은 없다. 한부모가정처럼 생활을 꾸리고 집을 건사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내게 필요한 것은 직장이 아니라 돈이다. 그 돈이 내 월급이든 남편의 월급이든, 보내주는 양육비든 상관없다. 생활비가 있으면 직장을 다닐 이유는 없는 것이다. 자기실현이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 혹은 자존감을 위해서라는 건 특히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겐 가당치 않은 언설이다. 남편이 집에 있으나 별거하고 있으나 이혼한 상태이나 별로 다르지 않게 이 나라의 엄마된 자들은 혼자 아이를 키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전업주부가 되기를 결혼하고 십년이 넘어서야 결의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토록 견고하고 완강하며 틈없이 강요되는 여성에게 주부됨을 요구하는 현실이라니, 하다못해 정신의 고양과 사교를 위해 어딘가의 강좌나 세미나를 갈래도 그것들은 평일 저녁 아니면 주말에만 있다. 주중의 낮에 있는 프로그램들은 거개 요가나 스포츠, 음악감사, 취미미술 뭐 그런 식의 온건한 교양수준의 모임들 뿐이다. 마치 평일의 저녁식사와 주말의 안락함을 위해 수고하는 전업주부들에겐 딱 그 정도가 어울린다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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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는 이론 1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에서 늘 마음에 되뇌어지던 구절이다.

십대후반에 늘 이런 정서였다. 그리고 이십대에 그 부끄러움을 못 이겨 운동을 했지.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 무얼 바라 홀로 침전하는지.

 

지금도 문셈을 가면서 다시 맑셈을 가면서 때때로 미친듯 독서에 열중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랴 싶다.

시를 쓰는 것처럼, 사상(象/)을 글줄로 나열해 놓은것을 '이해'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린 것이 하 분해서

마음을 잡지 못해 벌인 일들 투성이다, 산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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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4일 월요일

나는 왜 아무도 안 보는 소설을 쓸까...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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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나는 과거를 쓰고 있다.

불러내어 오늘을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쓰고 싶다.

그건 아마도.

묻지 못 한 한 마디를 가슴 속에 숨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왜  내 사랑은 실패했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랑의 서사를 재현하고 인물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 각각의 진실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사실, 그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한번도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에겐 자신이 목도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스스로 알아낸 진리를 실현하는 것만이 중요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사정 같은 거 말로는 알았다고 하면서 얼굴로는 이미 결별을 선언하는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서 자기는 버림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제 그녀를 버린 자들은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누구를? 두고 갔는가. 떠난 것은 항상 그녀 쪽이었고 우리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현성도 말했다. 나를 비난한다 한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 못 한다. 그 증거로 나는 지금도 교직사회의 퇴임자로 존재하고 있다.

대학생들이라고 달랐겠는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던 동시대의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한에서 정직했다. 그래서 비난한다 해도 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지금도 그녀의 주변에서 대작을 해 주고 있다. 외로워진 그녀는 예전보다 더 소심해진 표정으로 비난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비난이라는 것도 뭔가 대안을 갖고 있을 때에나 하는 것이다. 그녀의 비판이란 힘이 없는 것이 - 그녀가 전투적?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고 무한한 인내심으로 현장을 버티고 있을 때에도 - 그녀에게 동조한다는 것은 곧, 그녀를 껴안고 고난의 연대를 건너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것이 그녀의 사랑이었다. 공감을 구하면서 의존하는 것.

그녀가 사랑했던 자들은 노심초사한다. 그녀가 이제 펜을 놓겠다 하면 그 때에는 현실을 살고있는 자신의 도우너들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때, 왜 나를 두고 갔어? "

" 누가 두고 가?"

" 나를 떠났쟎아, 공장거리에 혼자 두고."

" 누구나 그들 각자의 생이 있는 거야. 너는 너의 생을, 나는 나의 생을."

" 너는 맑시스트가 아니야. "

" 그래, 그게 우리의 차이점이지. "

" 너는 레즈비언도 아니지. "

" 맞아, 나는 그렇게 위험한 소수가 될 생각은 없어. "

"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무엇이지? "

" 친구쟎아, 바보, 그때 그런 것처럼 지금도. 우린 향후 오십년을 함께 지내기로 했쟎아. "

 

그녀는 뭐 어차피. 하면서 정리했다.

 

- 향후 오십년은 맑시스트가 탁상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을 꺼야.

- 레즈라는 것도 뭐, 성관계를 안 하면 친구나 다름 없지. 어차피 그는 프리지디티(frigidity)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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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그녀는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 했다.

마치 갈 곳이 없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깔끔한 성격이 누구의 것이었냐는 듯 겨울을 핑계로 잘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밥을 지어 먹는 것 외에 청소도 가끔 누울자리를 만드는 정도로만 했다. 빨래도 한참을 두었다가 피치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한 번씩 해서 널고 걷고 개는 일을 분절하여 하루 걸러 하나씩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는 가족들의 일상을 챙기는 외에 다른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살림을 전업하여 거기서 자신의 주체됨을 찾고 능란할 뿐아니라 인간관계에서의 자존감조차 세울 만큼 생활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대체로 일을, 그것이 육체노동이라는 뜻의 생산직이든 다소 정신적이라는 풍의 사무직이든 상관없이 그녀는 일을 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 했다. 보람이라던가 흥미나 적성의 문제도 아닌 것이 그저 남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 자체를 소외된 노동으로 "느꼈다. " 따라서 댓가없는 일을 하기 싫어했고 이 말이 남들과 달리 그녀에게 의미했던 것은 원하는 댓가가 없으므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돈 벌고 싶지도 필요도 없었으므로 일할 이유를 찾지 못 했다. 그건 이전에 가졌던 직업이라 할 만한 모든 일들이 또한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맞벌이를 했던 것도 사무직에 취직했던 것도 그전의 공장생활이나 아르바이트 조차도 그녀는 그때 당시에 만나고 있었던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만나고 싶은 누군가를 갖지 못 하게 되자 집 밖을 나갈 이유를 찾지 못 하는 것이다. 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게 의탁할까?

그건 박애주의자이기 때문이지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믿지 못 해도 할 수 없다면서 웃었지만 다른 이유를 찾기도 어려워보이긴 했다. 그녀에게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아이들이죠. 하고 대답하는 그녀는 이제 아이들이 열 살이 되었으니 한 십년 쯤이면 삶의 이유를 찾기 어려워질텐데, 걱정이다. 하는 것이었다. 살 이유가 없으면 어찌해야 하나?

아프리카로 갈 지도 모르지. 하고 말하는 그녀에게 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니면 지금 컴퓨터 앞으로  돌아오는 틈틈이 집안일을 하는 것처럼 혼자 사는 집을 건사하는 자잔한 일을 하면서 쓰고 또 쓰고 또 쓰다가 쓰러질지도.

무엇을 쓸 지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소설가들은 방에 콕 쳐 박혀서 대하서사를 써내기도 한답니다. 아세요? 박경리는 평사리에 가 본 적이 없대요. 하지만 소설 속에 묘사된 평사리가 바로 그 곳에 그대로 있더래요.

그녀는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있다.

글을 읽지 못 했던 어린 날부터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다. 그림이 있쟎아요하면서. 만화를 보다가 글을 깨친 방콕소녀가 바로 그녀였다.

사실 지금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나 조차 그녀의 상상이 빚어낸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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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 당신은 내 사랑이 되지 마요. "

 

그녀가 오래간만에 기분 좋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음원을 끄고 디스플레이만 하고 있으면 좋았을 껄, 예인은 방글방글 웃고있는 그녀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 뭘 할꺼에요? "

" 맛있는 밥, 카레랑 두부부침, 계란말이도. "

 

그녀는 밥을 먹고 가라고 말했다. 내일이 원고마감인데 더이상 손 볼 것 없다며 며칠 전에 닫았던 파일을 다시 열지 않고 있던 그녀였다. 그 상태 그대로 메일로 보내줄 모양이다. 예인은 어떻게 해야 수정과 가필을 독려할지 궁량했지만 아무래도 난망해 보인다.

 

" 카레, 진짜 좋아하네. 어제도 먹었다면서요."

" 오늘은 양상추샐러드를 곁들일 꺼에요. 난 양식조리사 과정을 등록할까봐요. "

 

현미밥, 달코롬한 소스를 첨가한 카레, 양상추샐러드에 아삭김치, 새콤달콤 무절임과 핫한 두부 위의 양념소스까지.

그녀는 쉡-처럼 허리앞치마를 두르고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노동을 시작한다.

 

" 내가 준비하는 식탁엔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할 꺼에요, 크루프스카야처럼. "

" 크루프스카야?"

" 레닌의 동지였어요. 이스크라의 유일한 여자 편집자. "

" 혁명가군요. 요리를 좋아했나? "

" 동지들을 좋아했죠. "

" 당신처럼. "

 

그녀가 웃어보였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되기 보다 크루프스카야가 되기를 꿈꿨어요. 이상하죠? 러시아혁명사를 읽으면서 집밥을 먹었던 기억이 없는데.

 

 

엄마가 해주는 밥을 맘편히 받아먹었던 기억이 없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아이들의 밥을 짓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 아이들은 밥을, 돌아다니면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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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성공회대 교수 자유 집담회

1회 성공회대 교수 자유 집담회

주제: "201218대 대선의 구조적 의미와 향후 한국사회의 전망"

일시: 20121226() 12-4장소: 새천년관 7417

패널: 권혁태, 김동춘, 백원담. 정해구, 조희연 외. 주최: 동아시아연구소·민주주의연구소

 

그동안 성공회대 교수들 상호간의 지적 대화의 기회가 많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동아시아연구소(HK연구소)와 민주주의연구소(중점연구소)가 공동으로

성공회대 교수들 간의 심도 있는 지적 대화를 위한 자리를 기회 있는대로 마련하고자 합니다.

패널토론자들의 간단한 발제 이후 자유토론을 하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분은 참석해주시기를 바랍니다.참고 1. 김밥을 준비합니다. 김밥으로 간단히 식사하면서 자유롭게 토론합니다.2. 패널 중심으로 전반부 토론을 진행하고, 참석자들과 함께 후반부토론을 진행합니다.3. 패널토론자들이 A4 1-2장 정도의 발제문을 만들어서 발표하고 이후 토론합니다. 기본자료논의의 공유지점을 확대하기 위하여 다음의 자료와 질문을 공유하면서 토론합니다.

1. 경향신문-민주주의연구소 대선토론회 자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2212230515&code=910110

 

2. 좌담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은 질문들(권혁태-조희연 작성)

1) 상승세를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권은 패배했는가.

대안적으로 사고할 때, 패배에서 우리는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가.

2) 박근혜 정부 탄생의 구조적 의미는 무엇인가. 87년 이후의 변화 속에서 2012년 대선의 의미는 무엇인가.의사파시즘의 등장? 일반 민주주의의 위기? 민주적 개발독재의 재등장?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의 차이는?

87년 체제의 종언? ‘2008년 체제의 성립? 97년 체제의 완성?

3) 대선의 국제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대선의 국제적 분석과 관련하여, “하나는 국제적 조건 변화가 대선을 규정하는 것과,

반대로 선거 결과가 국제적 조건 변화를 추동하는 것.

후자는 앞으로의 문제이지만 전자는 앞으로의 방향의 전제를 이룬다고 할 때, 경제공황에 대한 공포,

동북아 정세의 유동화 등이 유권자들의 투표행동에 영향을 미쳤는가, 미쳤다면 어떤 조건이 박근혜 지지로 이어졌는가 박근혜 정부, 일본의 아베정부, 중국의 시진핑 정부, 북한의 김정은정부의 등장은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향후 동북아시아 정치지도를 재구성할 것인가.

4) 향후 중도개혁자유주의정당질서의 재편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5) 2012년 대선이 진보-좌파-노동민중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통합 진보당 분열과 상처가 준 영향, 그리고 향후 진보좌파 진영의 전망,

중도 리버럴 정당과 진보당과의 관계를 진보당 관점에서 이해할 때,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이번 선거-좌파정당의 완전 몰락과 리버럴 정당의 석패- 결과를

사회주의 정당의 의회진출이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6) 향후 중도개혁자유주의정당질서의 재편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7) 기존의 반독재정치계급정치로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정치성()이 나타나고 있는가. 대중소비사회의 출현, 지식정보사회의 출현, 탈산업사회의 출현, 포스트 모던적인 문화의 등장 등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새로운 변화는 대중, 특히 젊은 세대의 정치적 지향과 감수성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야권은 이를 담아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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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조갑제 칼럼] 문재인, 이정희 손잡고 제 무덤 팠다

[조갑제 칼럼] 문재인, 이정희 손잡고 제 무덤 팠다이정희가 불 지른 5060 선거혁명! 

  • 최종편집 2012.12.21 08:13:21

 

이정희가 불을 지른 50대의 경이적인 투표율


 

조선일보 5060(투표율 90%) 현상 분석.
이정희의 언동(言動)을 보고 잠을 못잤다는 사람,
텔레비전을 깨버렸다는 사람,
진보를 사칭한 종북의 정체를 비로소 알았다는 사람,
그 이정희와 손을 잡은 문재인을 의심하는 이들이
투표날을 기다리고 있다가 새벽부터 몰려나갔다.

 

 

 

오늘자 조선일보는,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선인이 승리한 가장 큰 요인으로 전문가들은 5060세대가 (소위) 진보·좌파 진영에 느낀 불안감을 들었다>고 보도하였다.
자신들이 만들어온 시대가 전면적으로 부정당하는 듯한 상황에 분노했다는 것이다.
 

이는 종북좌파의 박정희 부정, 이정희의 표독한 발언, 문재인의 위험한 안보관, 민주당원들이 저지른 국정원 여직원 불법 감금 사건 등이 文 후보의 무덤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반대로 정통우파 진영에서 文 후보의 이념적 문제를 계속 제기하고, 朴 후보가 아버지의 과거사를 사과한 데 비판하고, 노무현-김정일 역적모의를 지속적으로 폭로한 게 유권자의 40%를 차지하는 50세 이상 세대를 자극, 투표장으로 몰려나오게 하는 데 유효하였다는 뜻이다.
불안한 세대가 불만 세대를 이긴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50대의 투표율은 89.9%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60대 이상은 78.8%를 기록, 20·40대보다 훨씬 높았다.
50대 투표자의 62.5%가 朴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50세 이상 유권자는 40%였다.
 
방송 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50대의 시간대별 투표율은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의 10시간 동안 20대, 30대, 40대의 투표율보다 줄곧 높았다.

노무현 시절을 악몽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50세 이상 세대는 그 시대의 재현을 두려워하였다.
특히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의 충격적 내용이 이들의 체제-안보 불안을 증폭시켰다. 
  

 

무엇보다 50세 이상 노장층의 뿌리 깊은 반공의식과 예절감각을 자극한 것은 이정희의 표독한 토론 장면이었다.
'종북의 전형적 행태'가 시청률 높은 TV 토론을 통하여 全국민들에게 생생하게 중계됨으로써 기막힌 반공교육을 한 셈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효과적인 반공교육을 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정희의 행패적 언동을 보고 잠을 못 잤다는 사람, 텔레비전을 깨버렸다는 사람, 진보를 사칭한 종북의 정체를 비로소 알았다는 사람, 그 이정희와 손을 잡은 문재인을 의심하는 이들이 투표날을 기다리고 있다가 새벽부터 몰려나갔다.
투표율 상승은 이들 덕분인데,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젊은이들이 몰려온다'고 각각 오판하였던 것이다.
오전 출구 조사에선 朴 후보가 거의 10% 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그럼에도 文이 앞서고 있다는 뜬소문이 조직적으로 유포되었다.
이게 또 5060(+) 세대를 자극, 투표장으로 더 나가게 한 것이다.
 
문재인 진영이 설정한 '박정희 對 노무현' 구도도 5060세대의 표심을 반대 방향으로 자극했다.
한규섭 서울대 교수는 "그 시대에 박정희에 반대하면서도 산업화를 이뤄낸 자기들을 모두 구태 세력으로 모는 것에 반감이 컸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선거 막판 민주당이 제기한 국정원 여직원 사건도 5060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고 분석하였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국정을 운영해본 민주당이 확실한 근거도 없이 여직원을 감금하고 국정원·경찰 등 국가기관을 공격한 것이 굉장한 역풍(逆風)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됨에 따라 향후 선거에선 5060세대의 표심을 잡지 못하는 정당은 필패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윤성이 경희대 교수는 "진보 정당이 젊은 층에만 기대서는 정권을 잡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2017년에 가면 50세 이상 유권자들의 비중이 거의 50%에 육박한다.
 

 

베이비 붐 세대인 50대는 1985년 2.12 총선 이변의 主役(주역) 세대이다.
20대이던 그때도 유세장과 투표장으로 몰려 나갔다.
이들은 反전두환 정권 운동을 벌이던 신민당을 집중적으로 지지, 민주화의 분수령이 된 선거혁명을 일으켰다.

그 뒤 30년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왔고, 지킬 것도 많아진 50대는 한 세대 만에 반(反)정부에서 체제 수호로 대선회를 한 것이다.
50대는 두 번 선거 혁명을 한 셈이다.
민주화 운동 시기엔 反정부, 종북(從北)득세 시기엔 친(親)체제 선거혁명을 하였다.
파란만장한 대한민국 역사의 위대한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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