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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꿈없이 자고 일어난 아침.

하늘거리는 창가, 아사의 면커텐이 사랑스럽다. 잔꽃무늬 은사의 수가 테두리에 한줄로 박혀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햇빛은 부드럽게 덩쿨담장을 기듯이 넘어 호두나무색깔의 창틀 위를 물들이고 있다. 눈부신 빛의 폭포처럼 창문 프레임을 녹이고 있는 역광 아래에서 부신 눈을 깜빡이다 진은 안온히 미소지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진은 오랫동안 뒤척이며 궁량해온 난제의 답을 찾은 듯 장담하고 마음에 품었다. 누구나 좋아해서 결혼하고 함께 하지만 때로 서로의 행복을 위해 따로따로가 되기도 한다. 머리로 이해하고 엄마처럼 아빠를 인정했다. 그렇다해도 다 알 수는 없었다. 마음은 늘 허공에 뜬 듯 안정감이 없었고 눈과 귀는 열렸으나 입으로 손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부레없는 물고기처럼 심해에 가라앉아 꿈벅꿈벅 살폈으나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다. 누가 있어 꼬리없는 상어의 깊은 잠을 지켜줄 것인가? 이승을 살듯 꿈속을 살고 잠에서 깨듯 저승을 보는 신내림의 애기무당처럼 제 삶을 내다볼 수 없어 괴로웠다.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른되기가 두렵기만 한걸까.

그애가 큰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좋아. 라고 입술은 말하는 듯 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왜? 그애의 울림없는 말은 가슴을 적시고 깊고 푸른 너머를 가진 눈은 심장에 불을 붙이는 걸까. 너를 위해 내가 산다. 이것이 사랑이다. 진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붓다처럼 가슴에 사랑을 품었다. 미륵불이 중생을 구제하듯 자신을 구제할 것이다, 사랑이란.

 

그애는 보자기를 돌려주러 왔다. 곱게 접어 손바닥 만해진 것을 쪽지편지처럼 매듭지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속에 이야기라도 둘둘 말아온 듯 진을 보고는 한번 눈을 들었다가 내리고 입술모양을 응. 하는 것처럼 가벼이 붙였다.  알지 않느냐는 듯, 나쁘지 않았다는 듯? 부끄러우니 더 길게 잇대지는 말라는 듯. 그애는 패스트푸드점의 메뉴판을 찾는 듯 주위를 휘 둘러보며 시선을 바삐 움직였다. 저기...뭐라고 써 있는거야? 천연스레 묻는다.

" 치즈버거, 아니 치킨버건가? "

" 배고파? 너는? "

그애가 양상추샐러드와 치킨버거를 먹는 동안 진은 오렌지쥬스를 마셨다. 포장지를 옥수수껍질처럼 벗겨내어 꽃모양으로 만드는 그애의 손놀림을 보고있자니, 넌 왜 안 먹어? 하면서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 폼 잡을라구. "

그애가 웃는다. 그럼, 와인잔을 들어야지. 하면서 눈을 마주친다. 어젯밤 있었던 일 이후 처음이다. 진의 눈길에서 무얼 보았을까, 그애는 상긋 엷은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비꼈다.

진은 보자기를 매듭지은 그대로 책상 아래쪽 서랍에 넣었다. 편지와 선물상자 위에 살폿이 올려둔 채 닫았다. 이야기는 무르익어 향을 낼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내가 너의 향취를 잊지 못하니 다시 찾아 안은 녘에는 필히. 하고 진은 마음 속에 음각을 하듯 깊이 새겼다. 너와 결혼할 것이다,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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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그애가 품에 안겼다.

진이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듯이 포근하다, 피아노의 음율이 천사의 날개처럼 감싸는 듯 그애와, 그애를. 안은 진을 안온하게 한다. 음악은, 노래는, 가슴을 저미고 마음을 띄우는 천상의 가락은 그들을 위해 있는 듯하다. 원하지도 않는 자들에게.

 

" 너도 음대 지망이니? "

차랑하고 새로 한 매직스트레이트의 단발을 흔들며 정원은 최대한 순수한 낯빛을 가장하고 물었다. 그애는 아니. 하고 짧게 대답했다.

" 응, 그래? 그럼 피아노를 같이 배우는가 보구나? 윤진이랑은 친한가 봐? "

지나가는 말처럼, 의례히 묻고 받는 대화처럼 정원은 콕콕 집어 물었다. 그애는 아니. 아닌데. 별로. 하고 또 짧게 대답했다.

" 어머? 그럼, 어떻게 아는 사인데? 그냥 울 학교 아니라니깐 궁금해서? 중학 동창이야? 초등 동창에 같은 동네? 난 지금 같은 반이거든, 근데... "

" 같은 중학교 나왔어. "

목소리도 곱다. 정원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안 갔다. 여인천하의 중전이 희빈을 보듯? 아님 억울하게 무수리를 잡다가 헛다리인 걸 알고 놀라는? 지금은 상감도 잘 모르나 이 여인의 매력을 알게되면...하고 속을 태우는.

" 정말이야? 나도 윤진이랑 같은 중학 나왔는데 ! "

" 응. 알어... "

넌 나를 몰라도 괜찮아. 하는 평범한 상민의 얼굴로 그애는 잠깐 건너다 보았다. 미소를 띄며, 미워하지 말라는 듯이.

" 너, 나를 알아? "

" 피아노 치쟎아. 반주 하느라고 우리반에도 왔었으니까. 중학교 합창대회, 해마다 달반을 두고 연습했으니까..."

" 아, 그렇지, 윤진도 너네반에 반주하러 갔었구나, 나처럼. "

정원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그애와 선약이 있다던 윤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토요일 두 시 이후 브레이크타임의 패스트푸드점에서 고등학생들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예대지망의 한갓진 놀이. 그애는 피아노도 못 치면서 왜 윤진을 만나러 왔을까.

 

" 왜? "

정원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목과 함께 눈물도 터지고 있었다.

" 왜 그애를 좋아하는데? 내가 먼저 말했는데! "

정원이 울고 어깨를 떨며 무너지듯 무릎을 껴안고 주저 앉았다. 그 앞에 선 채 까딱도 않는 윤진은 참...어쩌지. 하는 표정이었으나 동정의 빛은 전혀 없다, 공감의 얼굴도 연민의 느낌도 미안함조차 없는 그저 낭패한 표정.

" 정원아, 그만 해. 이러다 소문나겠다. "

" 무슨 소문! "

정원은 한 쾌 걸렸다는 듯 물고 늘어지며 소리쳤다. 그 한 마디를 가지고 너를 옭아 나의 사랑을 온천하에 알리고 함께 죽겠다는 듯 결연한 의지를 품으며, 눈빛 매섭게 윤진을 쏘아보았다.

" 내가 너 좋아하는게 뭐 잘못 되었는데? 난 그딴 거 하나도 겁 안나. 넌 그런 기만과 허식이 좋아? 그딴게 뭐가 중요해? 남의 시선이나 뒷담화가 두려워? 자신이 당당하면 되는거 아냐? 사랑하는게 뭐... "

감흥없는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화를 내고 성난 목소리를 높이고 속엣말을 끄집어 감정 실어 소리치나 정원, 그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진은 한숨 한번 쉬면서 속말을 감추고 이어 말했다.

" 동성연애하는 거 말구, 너...바람 맞았다구 소문난다구. 이 정원, 이제 그만 목소리 좀 낮춰. "

내가 네 맘 모르는 거 아니니. 하고 윤진은 사려깊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부드럽게, 포근히, 반쯤 눈꺼플을 내리고 말하는 걸 정원은 목격하고 말았다. 그애와 있을때, 그애를 향해서, 그애가 어찌 하는지를 조바심치며 그리도 조심스럽게 윤진은 대하는 것이었다. 왜, 그애에게?

" 내가 왜 바람맞아야 해? 너, 나랑 입학하고부터 계속 친했쟎아. 우리 중학시절부터도 인연 있었고 그래서 서로 기억하고 있었던 거쟎아. 우리가 어떤 사이야? "

" 친구 사이지. 중학동창이고, 같이 피아노치고 그러다 보니 친해진. "

윤진은 아까부터 울고 눈물 범벅이 되어 속쌍까플 아래 칠한 속심 두꺼운 아이펜슬 자욱으로 까매진 정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 한 뼘 만큼의 거리를 유지한 채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허벅지를 짚고 일어나는 정원은 새빨개진 콧잔등 아래 더욱 붉게 부푼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 그럼! 그애는? 중학교 3년 내내 같은 반도 아니고 피아노를 친 것도 아니고 말 한 마디 나눈 적도 없는 그애가 왜 지금 너한테 ! "

정원은 무릎  위에서 한참 올라오는 스커트 끝단을 잡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윤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따져, 논쟁하여 할 말 없게 만들고, 그도 안되면 추궁하고 비난하고 따를 시키고 싶었으나 그러면 내 사랑이 될 것인가? 싶어 감히 어깨가 들어올려지진 않았다. 키가 큰 윤진은 그래도 정원에게 마음을 주겠다 거짓표정 만들지 않을 것이며 누가 뭐라 하든 제 사랑을 숨겨 쉬쉬하며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  원래 그런 자였던가, 윤 진이? 사춘기 소녀들의 히어로였고 속내 동쳐 맨 처녀들의 선망이었고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신사였으며 부드러운 미소로 응대하던 아이돌이었다. 결코 한사람을 위해 시선 고정하는 이가 아니었다. 스타라면 당연히, 매니저 외에 어느 한 개인을 곁에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난 너를 위해 피아노를 버릴 각오도 되어 있어. 네가 치는 연주곡을 위해 모든 걸 다할 꺼야. 내가 너의 발판이 되어도 좋다구, 나야말로 널 오래전부터 사랑해왔어! "

정원은 말했다. 말이 안 되어도 문장을 만들었다. 비문이 되더라도 마음은 내비쳐질 것이다. 열정을 갖고 노력하고 간절히, 간절히 소망하는 자에게 기회는 주어질 것이다. 현실에서 성취하게 위해 모든 것을 내버리고 추구해 온 자에게, 열과 성을 다 한자에게 선택권을 쥔 자가 무어라 말하는가? 뭐라고 하는 건가?

 

" 네가 사랑한 나를 가져가? 그리고 남은 나는 내 사랑을 만나러 갈테니. "

" 야! 윤진! "

많이 기다리지도 더 보아주지도 않고 윤진은 가 버렸다. 정원을 학교 뒷뜰의 우거진 잡목 사이에 남겨두고. 바람난 애인을 불러 훈계하여 계도하려던 건 실패했고 뼈저린 후회, 낙담, 분노와 탄식만이 남아 정원을 괴롭혔다.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 어째서 노력하고 원하는 자에게 보답하지 않는가, 사랑은 또한 사람의 심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던가? 한눈에 보아도 그애가 무얼 말하는지, 바라는지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게 숨은 계략 위에 떳씌워진 아마포라면 더욱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무릇 자연의 섭리가 아닐 것이다. 그애가 그리 내숭을 떠는데 어찌 사랑은 그리로 기우는가. 내가!

정원은 홀로 엎디어 울었다. 누가 허리 아래 숨은 상처가 없으랴, 심장의 이면에 눌린 자욱이 없겠는가, 이 땅에서 어린아이로 천대받고 어깨 위 견장으로 가린 청춘의 숨소리를 가진 자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법이다, 그것도 사랑한다 점찍은 자에게서.

봐라, 저 애가 어떻게 가녀린 손목을 들어 입과 턱을 가리고 아니다, 싫다. 하면서 품에 안기는 지를. 저런 내숭과 저런 안일과 한번 알은 체를 하지 않고 표표히 군중 속을 뚫고 나가는 저 애의 기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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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 가을 바람 소슬하다. '

이 진은 고개를 약간 기우뚱. 이건 아니구...

' 가을바람 솔솔분다.' 

다시 머리를 곧추 세우고 생각을 해 본다. 솔솔 부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음.

신음처럼 꾸웅 하다가 공책을 밀어놓고 펜도 던져놓고 일어난다. 이나저나!

문득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열씸히 쓰던, 아니 써야해서 애먹으며 숙제검사용으로 두 줄씩 채웠던, 일기장을 책꽂이 구석에서 발견하고 한 줄 써 보던 참이었다. 역시나.

창 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대문 안쪽 마당의 가으로 보이는 건 들장미처럼 우직스러운 덩쿨나무의 가시 돋친 줄거리들이 여기저기 엉켜있는 담장이다. 여전히 엄마는 화단손질을 소홀히 하고 있다...하고 생각하지만 스테레오테이프의 이중 트랙처럼 머릿 속의 다른 구석에선 커다랗게 뜬 눈을, 흘낏하듯, 잽싸게 보였다가 고개를 돌려 뒷머리만 보인 채 체육시간을 마감하던 그애에 대한 생각이 계속 돌아가고  있다.

그애가 훔쳐보는 걸 처음 안 것이 아니다. 봄부터 여름내, 방학 지나고도 변함없이 같은 반도 아닌 윤진을 오랜 벗이라도 되듯 익숙하게 찾아내서 언제부터? 라고 느낄 만큼 시선을 꽂고 있었다, 그애는. 뒤통수가 따가워...하고 느끼면서 윤진이 휙 돌아보면 벌써 재빨리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그 애는 또, 쉬이 낮은 목소리로 말 건네기 어려운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었다. 그 애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위치에서, 또 실상 알지도 못 하는 복도 저쪽 끝반의 여자애에게 큰 소리로 불러 할 말은 없으니, 윤진은 결근한 체육선생을 대신해서 합동수업을 진행하는 그 애네 반의 담임, 키 쪼꼬만 늙다리 여자체육의 시야를 벗어난 양팔벌려 4줄 횡대의 끝줄에서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뭐, 말 그대로 히히덕. 이었다. 앞 줄에 선 아이가 어제 본 개콘을 얘기하자 옆엣 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슬쩍 몸개그를 흉내내기도 해서...좀, 웃었다. 킬킬 거리고. 저만치 앞에서 지도하는 체육꼰대의 하얀 모자 끝만 가끔 들썩거리니 뒷줄 170센티 그룹의 딴 짓은 사실 잘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헌데...

 윤진은 다시한번 으음. 하고 신음을 삼켰다. 절로 이마가 찡그러졌다. 쿨하고 싱겁기로 이름난 1반의 꺽다리인 윤진이 어쩌다 합동수업하게 된 저 앞줄의 범생이 소심녀 땜에.

'승질 나네!'

맨 뒤에서 킬킬거리는 일단의 꺽다리들을 슬쩍 돌아보더니, 한번 더 돌아보더니 눈 마주치자 얼른 고개 돌리고 교실 들어가는 길에서도 저 앞에서 혼자 척척척척 가 버렸다. 평소엔 흘낏흘깃 잘만 보더니.

그냥 딱 보기에도 조용하고 얌전하고 애들하고 어울려 수다같은 거 안 떨것 같더니, 아닌게 아니라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잘해서 체육담임이 좋아한다더라구, 그애와 초등 동창이며 죽마고우라는 중간줄 앞에 앉던 애가 말했었다. 그래 그런가, 저의 죽마고우와도 별 알은 체를 안 하더니 시종 조용히 수업에만 열중하고 4열 횡대로 서서 옆엣 아이와 말 한 마디 않고 앞엣줄 아이의 뒤꿈치만 보더니 슬쩍, 운동장 바닥에 떨어져있던 휴지조각이나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킬킬거리며 소음을 더해가던 뒷줄의 무리들을 돌아보다가 윤진과 눈이 마주치자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 표정 하고는!

한순간 윤진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도무지 생각이라곤 없어 강건너 마을이 수해로 초토화 되었다는 뉴스를 보고도 건성으로 넘기며 대학가요제의 웨이브에만 신경쓰는 꺽다리 수다꾼들 속에 서 있는 자신을 그애가 어떻게 보았을까를 생각하니...대체 열 서넛의 중학생 여자애가 뭐 그따위로 사람을...얼마나 한심하게 보던지, 츱!!

윤진이 얼마전 주니어콩쿨 대회에서 1등하고 월요일의 조회시간에 앞으로 나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상장과 트로피를 받으며 돌아나오면서 흘낏 그애의 얼굴을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입술이 깨물어질 노릇이었다. 인어공주가 바다 위로 처음 나들이 나와 뱃전에 선 왕자님을 보았을 때의 표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감동과 환희, 동경과 열망에 가득찬 시선이었다. 보통, 동급생이 상을 타거나 하면 부럽다거나 고깝다거나 아님, 맨숭맨숭 딴나라 사람이려니 하고 쳐다보곤 하는데, 윤진은 그애의 시선 땜에 한껏 가슴이 뿌듯이 차 올랐었다. 근데...괜히 운동장에서 킬킬대 가지군...완전 이미지 배렸다.

또 바로 지난 주 가을백일장에서 뭐...윤진은 할 말이 없어 대중가요를 베낀 시를 한 편 내고 말았지만, 그 공부도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달리기도 잘 한다는 그애는 산문 부문에서 금상을 받아서 단상에 섰었다. 산문이라 시 부문의 입상작처럼 액자에 넣어져 걸리지는 않았지만 학교신문에는 실려서 함 읽어보았다. 시험범위 외에 교과서 정독도 해 본 적 없는 윤진이었지만.

징검다리 놓여있던 개천가를 넘어 산으로 들로 풀따고 꽃따고 잠자리도 잡으러다녔었는데, 그 산을 깍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개천을 복개하여 물도, 징검다리도 없어졌다며 슬퍼하는 얘기였다. 내 산아, 어디 있니...하고 끝나는. 뭐, 그애가 쓸 법한 글이었다. 쌩하고 말도 없이 운동장을 가으로 돌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맨날 쉬는 시간마다 독서중이던 그애는, 흠.

윤진도 한 번 써 볼까 일기장을 펼쳐 보았다. 오늘처럼 뒤통수 한 대 맞은 것처럼 기분 더럽고 마음 착찹한 날에는. 가을 바람 쓸쓸히 휘익 부는 데, 거...곁눈 한 번 없이 지나가던 그 애 땜에, 완전 가을 타는 사춘기다, 이 윤진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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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뜨거웠던 레일

앗!

뜨거워.

비명마저 속으로 외치는 혜정은 철도 레일 위에서 얼른 내려왔다.  다들 맨발로 올라 걷고 있었지만 한 발도 더 내딛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의아히 쳐다보았다. 동기들, 이 두 명의 남자동기들은 무슨 생각으로 제 말에 우쩍 일어나 양 손에 슬리퍼를 벗어든 채 외줄타듯 레일 위를 걷고 있는 걸까. 박통시절에는 더 그랬지만 전통시절에도 유격훈련 중 죽어나가는 군인들이 가끔 카더라통신를 타고 흘러나왔었다. 외줄을 타는 두려움이 어느정도일진 모르겠으나 여름 땡볕에 달궈질대로 달궈진 철로 위에 맨살의 발바닥을 대고 걷는 고통도 만만치 않다. ...이게 무슨 일제시대 고문장치도 아니고... 쟤들 왜 저러니... 혜정은 의뭉스레 남자아이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 야, 누가 더 오래 걸어가나 해 봐라, 니들 중 난 놈 좀 골라보게. "

 

혜정이 말하자 영혜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사회과학써클에서 여자애들의 인기를 얻기는 난해해서, 1학년 신입부원으로 들어와 몇 달이 지났지만 썸씽은 남의 동아리 얘기였다. 상철과 종철은 냅다 철로 위로 올라섰다. 순식간에 불붙는 이 경쟁심, 저 놈을 제쳐야 내가 난 놈이 되어 세상을 제패할 것이다. 하는 듯. 남자애들이란.

신촌기차역에서 한시간에 한 번 정도 오는 기차를 타고 능곡을 지나 백마역에서 내리면 이쁘고 분위기있는 카페, 레스토랑이 있고 통기타로 라이브를 하는 화사랑도 있고 혜정의 써클이 어제부터 엠티를 와있는 민박집도 있다. 도착하고부터 선배들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술을 마시고 그러고도 아침에는 피티체조에 조깅에...이제 겨우 한숨 돌리며 동기들과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 중이었다.

영혜는 세미나를 할 때도 조용했지만 동기들과 어울려서도 말 수가 적다. 원래 저런 성격인가? 혜정은 동기들과 친하고 싶었다. 남자애들과도 친구로 훌륭한 우정을 나누고 싶었다. 근데 여자친구와도 이리 잘 사귀어지지 않는다. 내가 문젠가? 어릴때부터 반친구 사귀기가 힘들어 하교길이며 쉬는 시간이며 손잡고 화장실 가는 것조차 부럽게 혹은 고깝게 보곤 했던 혜정이었다. 대학은 좀 다르지 않을까. 더구나 사회과학 써클인데.

결국 뜨거운 레일 위를 맨발로 걷는 것에 승리한 것은 종철이었다. 아니 상철이었나? 기억에 숨은 의도가 있는지, 편견이 있는 지 모르겠으나 엠티 이후 여름방학 동안에 자취를 감춘 영혜를 찾아다니던 상철에게 한참 망설이다가 말해주었었다.

 

" 영혜, 선배랑 사귄대. 좀...됐나 보더라구. "

 

혜정은 일그러지는 상철의 표정을 보면서 짐짓 의연하게 사회과학도답게 일침을 가했다.

 

" 그 선배, 정말 웃기지 않냐. 저는 운동해도 되지만 지 애인은 운동하면 안 된대. 써클 그만두라고 강요했다더라구. 영혜도 뭐, 자기 걱정해서 그런거니까. 하면서 갈팡질팡하더니 과에도 안 나와. 여자애들은 대학도 다닐 필요 없다는 건지! "

 

1980년대, 우연히 들어간 운동권써클에서 발을 빼기 위해선 휴학도 불사해야 했다. 그러는게 나았을까. 혜정을 죽자고 쫓아다니던 종철은 2학년이 되자 마자 군대를 갔다. 안 가고 싶었지만 갈 수 밖에 없다는 군대에서 줄기차게 보내온 편지들엔 지방에선 알아주는 제일고 우등생답게 흘려쓴 궁체로 저의 애환을 늘어놓고 여친의 안부묻기를 잊지 않았지만 제대 후엔 다 잊었다. 혜정과 함께 한 세미나도, 밤새 불렀던 동지가도, 백마의 철길에서 있었던 동기들과의 추억도.

여름 한 밤, 술을 마시다가 없어진 종철을 기다려 새벽을 볼 때쯤 혜정은 주머니 가득 채 크지도 않은 조막사과를 서리해 온 동기를 면박주면서  어찌 이 조그만 게 사과맛이 난다냐? 했었다. 헤실하게 웃던 그 놈, 난 놈이 되고자했던 종철도 상철도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고 5공청문회를 끝으로 80년대가 이울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한  넘들 중 한 명을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 어디 가니? 이 시간에. "

" 영업맨이라서. "

" 그래, 살긴 어디 살구? "

" 쩌기..광릉쪽에. "

" 영업한다면서 왜 그리 멀리 살아? "

" 애들이랑 마누라가 공기 좋은 데서 살고 싶대서. "

" 그래. 그럼, 잘 가라. "

 

혜정은 대학생들이 그렇지, 뭐. 하면서 전철을 내려 바삐 걸었다. 동지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간다. 시간약속에 칼인 노동자들이 아닌가. 약해보여서도 느슨해보여서도 안된다. 여자라고 봐 주지 않을 터이니.

 

 

ps. 나두 참...문센글쓰기샘이 이비에스 대국민사연공모 주제가 여름이야기래서 함 내 볼까하구 썼지만...이런 글이 걸리겠냐...난 왜 여름 추억이 이렇게밖에 안 떠오르냐...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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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본 소설과 영화의 공통점?

왜 공통점으로 느껴지는 지?

상실의 시대를 언젠가 우연히 본 후 소설을 봐야 겠다 싶었던 차에 역시 우연히( 이경우 볼꺼리를 찾다가 쉽게 선택하게 되었다는 의미) 읽게 되었는데 걍 하룻밤에 다 봤다. 흠. 뭐...하루끼, 유명할 만 하네.

소설 속의 등장인물 중 한명이 독서함에 있어 죽은 지 삼십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안 본다기에 슬쩍, 난 봐 줬다, 하루끼. 하고 생각했는데 그건 걍 워낙 베스트셀러 어쩌고 하는 현대문학을 별로 신용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하루끼가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한 말과 같다. 검증되지 않은 작품을 읽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ㅋ

한 사나흘 두고 다시 읽어보았는데 트란 안 홍의 영화를 봤을 때의 느낌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인지된다... 뭐...정서적으로 나는 69년 즈음의 일본에서 그냥...막 상실감을 몽환적으로 느끼고 있는 대학생에게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 와타나베가 동경대학이라던가 외무성이라든가 그런 출세주의에 관심이 없었다 해도 말이다. 그 시대는 좀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었던가? 68혁명의 소식이 들렸을 것이고 전공투가 분전하고 있었을 텐데. 물론 와타나베의 눈에 비친 운동권학생들이 허구적이고 또 비겁한 모습을 보였다 했을지라도. ( 생각건대 타인의 허물이 나의 부족함을 상쇄시킨다고 느끼는 것은 그의 말 마따나 자신에게 관대한 처사일 것이다. )

어쨌든 소설 한 권에서 죽음이 네 번이나 나온다는 것에, 그것도 등장인물들이 그 죽음에 꼬리를 잇는 충격과 후유증을 보인다는 것에 참으로 '상실감'을 아니느낄 수 없다. ( 기즈끼의 죽음, 그 이전에 있었던 나오코 언니의 죽음, 소설 중간의 미도리 아버지의 죽음, 소설 후반의 나오코의 죽음...음....장례식장에 계속 서 있는 기분이다. ) 마지막 장면인 공중전화부스 안에서의 외침은 거의, 뭉크의 외침을 떠올리게도 하는. 자아상실의 위기? 시대의 무게에 눌려 있는? 절망과 회한의 분위기. 참.

 

근데, 왜 나는 천원도 아니고 만원이나 들여 집에서 죽때리며 시청하신 엄태웅, 한가인의 건축학개론에서 저 소설을 떠올리는쥐? 아, 누구는 수지...의 영화라고도 하더만. ( 사실, 난 수지...를 잘 모르는 관계로...한가인도 말죽거리잔혹사에서밖에 못 봤고, 그저 엄태웅이 맘에 들어 봤다, 저 선덕여왕에서부터 시라노연애조작단을 거쳐 최근 종영된 적도의 남자까지 본 김에. 그래서 알게 되었는데 엄태웅이 좋은 이유는 끝까지 화내지 않고 목청을 돋우다가도 말끝은 확 떨어지는 것 때문이다. 나는, 부드러운 남자가 좋다. ㅋㅋㅋ )

근데 건축학개론도 곱씹어 생각하면 영 재수...쩐...다. 뭐시냐 긍께 한가인이 키크고 잘 생기고 돈 많은 건축학과 선배같은 남자만 좋아하고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질 것이 예상될 만큼 돈 잘 벌 것같은 직업을 못 가지면 적어도 돈 잘 버는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대학 1학년생이었는데...주인공남자애는 그녀가 순결을 버린 것 같으니깐 포기했고 이후에 다시 만났지만 의사남편과 이혼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 위자료 챙기는데 열심인 것을 보고 별로, 다시 대시할 마음도 안 생겼다. 뭐 이런...? ( 뭐... 내가 좀 부정적이고 냉소적인거겠지만...난 음치라 기억의 습작인가 하는 음악에도 별로 가슴 시리지 않아서리...첫사랑 어쩌고 하는 감성에는 영 필이 안 온 관계루.)

 

게다가 난 왜 건축학개론 영화보면서 그 대학시절 나오는 모습에서, 남자주인공과 양서연이 만나는 장면에서 와타나베와 미도리가 만나는 걸 떠올렸는지? 일주일 간격으로 본 소설과 영화라서 그런가? 대학 1학년생, 남자애는 적당히 가난하고 여자애는 아버지가 병들어서 곧 죽거나 죽게 된다. 그리고 여자애는 부자가 되고 싶어하거나 암튼 그런 것에 예민하다. 이 두 남녀 대학생은 똑같이 시대의 문제엔 관심이 없거나 직면하지 않는다. 흠....2012년에 개봉된 건축학개론의 현재시점에서 15년 전이면 90년대 중반인가? 5월투쟁이나 대학생분신행렬이 있었던 즈음에서 별로 멀지 않은 데, 하긴 90년대 학번들은 뭘 모르는 시대니깐, 참...건축학개론 듣는 학생들의 모습은 평화롭기도 하더라...암튼, 두 소설과 영화가 십오년쯤 전을 회상하는 것도 그렇고 그 시대가 운동의 끝물인 것도 그렇고 두 남녀 대학생의 연애, 할까 말까 하는 그 분위기도 그렇고 비슷하게 느껴진다. 건축학개론 작가가 상실의 시대를 감명깊게 본 거 아닐까? ㅋㅋ

암튼 스무살짜리들이란.

그렇게나 풋풋하다는게 참.

요해가 안 가는 군.

하긴 지금 조카들 나이가 그 정도 되다 보니 증말 어려보이긴 하다. ( 그려, 나는 신사의 품격을 수놓고 있는 꽃미남들과 동년배다....갸들도 어려보인다...)

우리들의 80년대는 무척...특이하여서...스무살엔 인생을 걸고 세상을 어떻게 엎어야 하나, 뭐 이딴 걸 고민했었는데. 그 때 속썩이던 민족주의 어쩌고 하는 자들이 불혹넘은 나이에 머리끄덩이 잡으면서 난장치는걸 보니 역시 뽑지 못 한 쭉정이가 그예 농사를 망치는 구나 싶다. 불쌍한 우리의 영원한 소수파들, 대체 우린 언제 볼키( 다수파 ) 가 되나. 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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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그래도 또 전화했다.

예인은 멘트를 다 준비했다.

기획회의 전에 작품에 대한 플랜을 알아두고 싶고...

전화를 안 받는다. 벨은 울리는데. 열 번쯤 울리는거 듣고 있으면 기분 참...

한 시간 쯤 있다가 다시 해 봤다. 바빠야 하는데, 그래야 전화를 다시 할 텀이 길텐데.

또 안 받는다.

계속 안 받았다. 벨 울리던 것도 멈췄다.

예인은 혈압이 오른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 혼자만의 속앓이.

 

" 선배. "

" 응. 왜? "

" 그냥, 뭐하나 싶어서. 연짱 쉬는날이쟎아. "

" 원래 주5일제 하는 사람들은 다 쉬고 있어. "

" 누가 뭐라나. 뭐했어? 밥 먹을까? "

" 너 회사니? "

" 응. "

" 일욜에 회살 뭐하러? "

" 선배가 회사 위에 사니까 습관적으로 나오는 거야. "

농담처럼 얘기 안 했는데. 예인은 왜 선배가 웃는거지? 하고 약간 자존심이 상한다. "

" 난 밖이야. 밥은 혼자 먹든지, 얼른 집에 가서 먹든지. "

" 선배, 나 집에서도 혼자거든. 밖이면 어딘데? 내가 갈테니 밥 좀 사 줘 봐. "

" 쫓아다니는 사람이 밥 사 줄께. 하고 쫓아다니는 거지. 누가 사 달래냐? "

" 그래서 맨날 많이 사 줬쟎아. "

" 근데 왜 이젠 안 할라 그래? 사 주는거 딴 사람한테 해야 하니깐? "

이건 또 무슨...오늘 왜 이렇게 안 먹히냐. 예인은 짜증이 날 것 같다. 작업 들어가기 전의 정지작업이 이렇게 안 되서야 뭘...

" 선배, 왜 이래? 후배 밥 사 주는게 그렇게 힘들어? "

" 나 밥 먹고 있어. "

가슴이 덜컹. 한다. 예인, 침착해.

" 누구랑? "

" 몰라도 돼. "

" 이작가님? "

" 아니야. "

" 그럼 누군데? "

" 그만 끊는다. "

" 잠깐만, 선배. 근데 이작가님은 만났어? 연락 돼? "

" ... "

" 선배? "

" 이예인, 신경 꺼라. 끊을께. "

어쨌거나, 예인은 정보를 종합했다, 선배는 이작가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니구 연락도 안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대답을 못 하지. 그리구 그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거다. 라고 추측이 된다.

누구? 예인은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그 전화기 너머의...친구. 이작가님의 친구인듯한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생각은 많으나 할 일이 없다. 예인은 사장실 책상 앞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일어나서 가야하지만 아니 가고 싶지만, 어떻게 이작가의 주소지를 찾아 집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린단 말인가. 뭐라구, 무슨 명분이 있어야.

절로 전화기에 손이 갔다. 이틀전부터 수차례나 누른 번호를 눌렀다. 자동인식, 즐겨찾기에 링크되어있는 번호.

벨이 울렸다. 안 받는다. 열 번쯤 울리는 건 기본으로 듣고 있게 되었다. 근데.

받았다.

" 네. "

다른 사람이 대신 받은 건 아닐까? 예인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착 가라앉은 목소리, 기운없는 음성이나 이작가다.

" 안녕하세요? "

" 네..."

" 아, 저에요. 이 예인. "

" 아, 네. 사장님. "

그녀는 왜 전번을 저장해 두지 않는 걸까.  지속적인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 어디 아프신가 해서요."

" 네. 그냥 좀...몸살끼가 있어서. "

" 피곤하셨구나. "

" 아뇨...꽃샘추위 땜에. "

" 맞아요. 너무 추워졌어요. 바람이 많이 차더라구요. 어디 나갔다 오셨어요? "

" 아...니요. 추워서 안 나갔어요. "

" 전화를 안 받으시길래 병원에라도 가신 줄 알았어요. "

" 집에 있을땐 핸폰을 그냥 던져놓고 있어서. 미처 확인을 못 했네요. 무슨 일이라도..."

" 아, 그게 뭐 별일은 아니구..."

예인은 무슨 스토리를 준비했었는지 까먹었다.

" 네... "

" ... "

말이 끊어졌다. 어쩌지. 예인은 긴장감이 와짝 올라왔다. 그녀가 말을 안 한다.

" 아, 저기...작품계획이 어떠신가 들어볼려구... "

" 네...그것이..."

" 네? "

" 계획 없는데...지금은 좀...."

" 네, 뭐 지금은 작업 중이시니까 뭐.. "

" 아니...그보다...지금은 좀 제가 피곤해서..."

" 이작가님? "

그녀의 목소리는 느리고 점점 잦아든다.

" 미안해요. 제가 지금 너무 졸려서...요. 나중에...전화 드릴께...요. "

예인은 기다려 연결음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쓰러지기라도 한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도무지 말 할 기분도, 기운도 없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정말로 바로 잠든 것 같다. 잠 속에서 몸을 녹이고 마음을 재우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죽어 없어지고 싶어하는 것 같다. 다시 눈 뜨고 바라보고 누군가를 생각하며 말을 만드는 것, 이젠 하고 싶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귀찮다. 무얼 더 바라...눈 들고 하늘을 볼 것인가.

예인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수필에서 이런 분위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가 뭐라고 했던가, 아무도 없는 곳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혼자 있다 보면 자살하고 싶어질 것이라고. 그런 말을 왜 했지? 예인은 그녀의 주소를 핸폰에 찍었다. 차를 빼서 거치대에 올리고 네비를 작동시켰다.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리리라.

 

그녀는 잠옷 차림이었다.

시계를 보더니 아직 아이들이 올 시간은 아니라고.

무슨 일이 있냐구, 말을 주워섬기긴 하나 물어보는 데에도 의욕이 없다.

" 계획하는 거 없는데...어쩌죠? "

그녀는 그말을 하더니 소파 옆에 쌓아둔 베개들에 어깨를 기대인채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다 덮는다. 추워서...하고 중얼거리며.

" 주무시는데 깨웠나봐요. 그냥 계세요. 전 갈께요. "

" 아...네...문....닫고...안녕히 가세...요. "

예인은 현관에 선 채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이미 눈을 감았다. 아니 감기는 것 같았다. 파리한 낯빛, 표정 없이 감은 눈. 입술도 다물고 있다. 숨을 쉬고는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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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bar 는 작고 좁다랗다. 카운터 옆으로 내츄럴풍의 화장실이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장점이다. 이층엔 더 많은 테이블이 있다지만 예인은 올라가 본 적 없다. 올라가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본 적 없는 이층이 왠지 음흉해 보인다고 예인은 생각하며 땅값 비싼 동네에서 혼자 술 장사하기 힘들어. 야. 하면서 투정부리는 친구를 좋게 볼려고 애썼다.

" 우리가 친했나요? "

" 말 놓지. "

" 선배, 웃겨. 내가 먼저 말 놓으라고 해야 하는 거였는데? "

" 내 맘대로 놓아서 화나면 너도 놓으라구. 대학때 한두학번 차이가 뭐 대수라고. "

" 하긴 나이로 치면 내가 더 빠르지 않나? 선배,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지? "

" 사주 보니..."

예인은 어쨌든 서류를 검토하게 되는 사장 입장이었다. 당연 선배의 나이를 알고 있었다. 한살 연하였다. 황당하게시리...그럼 그녀하고는 어떻게 되는 거냐....예인은 연상연하커플이네. 하고 혼자 웃고 말았다. 어쩐지 선배가 맨날 잡혀있는 것 같더라니. 하면서. 질투와 시샘으로 스무살의 연정을 끌고 가기에 우리들의 사십대는 너무 무겁다.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도. 결혼하여 가정사에 지친 그녀가 열정을 잃고 있기 때문일까. 여전히 싱글이 선배도, 예인도 새삼 연애를 하기엔 뭔가 홀가분하지 않은 것이다. 왜...

" 유 선생님, 시나리오 작업하시는 거 귀찮아하셔. "

선배는 뜽금없이 말한다. 아니, 아까 하다 만 얘기인가 보다.

" 그래? "

예인은 더 해 보라는 듯 가볍게 받으면서 병맥주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병도 작은데 따라 먹긴 좀 우습구만. 우리 선배, 갈수록 멋대가리 없어지는 구나. 하는 생각을 예인은 떠올리고 있었다.

" 혜정...이 작가한테 소설 넘기시면서 작업해달라고 하셨어. "

" 그래? 언제부터? 촬영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쟎아. 대본 다 된 거 저번에 확인했는데? "

" 반년 전부터. "

예인은 어이가 없다. 이런 걸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는 거다.

" 그럼 울회사랑 계약하기 전부터 작업하고 있었다는 거 아냐? 왜 말 안했어. 누가 유 선생님 각본 아니면 안 찍을까봐? 유선생님 그렇게 인지도 없어. 특히 영화판에선. 아님 조금이라도 작가료 더 받을라구? 이작가님, 유선생님하구 그정도로 세밀한 각본 짜긴 그림이 좀 안 나오는데... "

선배는 맥주잔을 안 비운다. 심각한 상황인가, 지금이...예인은 주

 

 

선배가 작가들을 싫어한다는 걸 예인은 처음 알았다. 그럼 여지껏 드라마는 어떻게 찍었나...

" 유선생님, 혜정이 고등학교때 선생님이야. 담임도 했던...국어선생. "

" 그래요? 대단한 인연이네? 고교시절 선생님이랑 지금까지? "

" 유선생님이 문단 데뷔해서 알게 된거야. 것도 한참 뒤에. "

" 그렇구나. 근데 왜 선배는 불만스러워 보이지? "

그렇다. 불만스러워보인다. 선배는 유현경 선생의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에 처음부터 반대였다. 작품에 대해 실컷 토론 다 해놓고 막상 영화화한다니깐.

"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 "

" 무슨 소리야. 선배. 당근 각본 새로 짜지. 편집 감독도 붙고. 지금껏 소설..."

" 유선생, 그딴 거 안 해. "

" 선배? "

예인은 감독이 작가들 인맥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선배가 누군가를 그토록 싫어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 왜 그래? "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그 여자를 싫어할까. 이혜정의 고등학교때 선생이라서? 왜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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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것도 딸려오게 하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오죽하며 끼워팔기로 내는 순익이 본품의 그것보다 더 많다는 말이 있을까. 정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인은 그래서 딸려온 원두커피 박스 안의 비스켓을 튿어 금장 접시에 담아 내어놓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손님들은 대접받는 다는 기분을 더욱 한껏 느끼며 잘 차려입은 양장 위로 과자가루가 떨어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비싸 보이는 비스켓 하나를 꼭 집어들곤 하였다. 그리고 어지간해도 협상이 인연끊을 만큼의 결렬로 끝나는 일도 없게 되었다. 회사 입장으로선...하면서 예인을 향해 호감어린 미소를 지어보이는 영업팀장들은 꼭 다음 약속을 남기곤 했다. 그래 그러니까...

예인은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도 이혜정 작가 자체로 예인엔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긴 그런 타산이 다 무엇일까. 오직 냉정한 비즈니스로 이 감독을 영입한 것도, 아니 기획사 자체를 차려낸 것도 아니었으니 세세한 자기합리화까진 필요 없을 것이다. 결국 인생은 제가 원하는 대로 틀어가게 되는 법이다. 그녀가...

본 건물은 금연건물입니다. 라는 표지가 입구와 계단 층마다 붙어있었다. 그렇다고 주로 촬영현장으로 쓰이는 스튜디오들 안에서 금연을 지키게 하기는 어렵다. 카메라에 냄새가 담기지는 않으니...자고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스모킹이라는 영화제목까지 나왔겠는가. 그렇다 해도 예인은 하얀 빵모자와 돗트프린트의 쉬폰스카프가 어울리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잘 연상이 되지 않았다. 저기, 복도의 끝에 화재대비용으로 설치된 발코니에 한쪽 어깨가 보이는 것이 분명 그녀일 것이라고 확신을 해도 말이다. 그녀를 지키듯 발코니로 나가는 문 한 가운데 서서 역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은 선배이다. 그녀의 어깨 높이에 머리가 있는 것을 보니 발코니 바닥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것이 틀림없다. 오피스텔 안에도 작지만 베란다가 있는데. 예인은 왜 그들이 굳이 저기 나와 있는 지를 모르겠어서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복도의 반대쪽으로 갈까. 아님 주거용 오피만 있는 탑층에 제가 올 일이 없는데 마주치면 난처하니 얼른 도로 내려갈까....하지만 발코니에 나와 앉은 그들은 뒤를 돌아보거나 금방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녀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으니, 그건 일부러 집 안에서 들고 나왔다는 것일테니...

예인은 항상 그녀를 볼 때마다 뭔가 속이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낯빛이 비교적 희거나 화색이 돌때도 그녀는 표정이 가볍지 않았다. 이십대의 그 거리에서도 그늘없이 쨍한 여름태양 아래서도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기거나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사십대의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것처럼 웃어도 다 웃지 않은 채 입꼬리를 내리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담배도 끊지 않은 것이다. 이십여년을 계속한 흡연으로 안색은 늘 산화아연의 파우더를 칠한 듯 창백하다. 담배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내민 손톱, 반이 잘려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잘못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부식하듯 떨어져나가고 있는 손톱, 얇고 하얀 핏기라곤 찾을 수 없는. 그 얼굴, 귓볼, 목덜미 어디  한 곳에서도 불그레한 생기라고 찾아볼 수 없었다. 헤어용 오일을 사용한 듯 차분히 가라앉은 머리카락조차 윤기없이 바삭해 보였다. 그녀는 전반적으로 비타민이 부족하다. 혹은 영양결핍이다. 푸석해 보이는 피부. 그렇게나 건조해 보이는 입술. 예인은 그녀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감독의 시선을 되짚어 따라가 보기도 했다. 그 눈, 고정된 시선의 강한 눈빛. 그 속에 담겨있는 게 무얼까. 욕망?  글쎄.

이십년 전보다 훨씬 불건강해보이는 애인을 바라보는 눈길 속에 담긴 것이 연민인지 애틋함인지, 조금은 변질된 분노나 고통어린 애증인지 알 수 없다. 따로이 가정을 갖고 있는 그녀를 소위 직장을 매개로 하여 다시 만나고 있으면서 불붙을 지도 모르는 애욕을 경계하기에 선배의 눈빛엔 너무나 열정이 없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예인은 선배가 피아노를 칠 때도, 노래를 할 때도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고 있거나 작품을 다시 해석하면서 연인에 대한 감정을 새로 돋는 신록처럼 화면 가득 펼쳐 보일 때도 항상 열정을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찾던, 그리하여 갈구하던 애인을 다시 만났으면 상황과 조건이 어떻든 기뻐하거나 적어도 생기가 돌아야 하는 거 아닐까. 예인은 선배가 날이 갈수록 처지고 또 느려지고 있는 것엔 그녀가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발코니에서 나와 복도로 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어찌나 느리고 기운이 없는지. 불현듯 그녀가 지체장애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힘없는 시선, 시계에 들어오는 사람이 아는 얼굴이라는 것을 나중에 인식하는 듯 표정이 느리다.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그제야 함께 시선을 드는 선배, 똑같이 힘아리 하나 없는 얼굴에 활기없는 몸짓, 저게 감독의 얼굴인가? 선배의 사랑은 선배에게 독이 아닌가.

그런 문장을 만들어놓고 흠칫 하고 있는 예인에게 그녀가 손짓을 한다.

" 여기 오신 거죠? 저 가는 참인데, 감독님도 잡아 줘요. 배웅나온다 해서 말리는 중이거든요. "

" 이 작가님, 왜 벌써 가요. 아직 한 낮인데. 애들 올 때 안 되었쟎아요? "

" 금요일이라 장 봐야 해요. 나중에 애들만 두고 나갔다 오기 뭐 해서. 감독님, 쓸데없이 따라온다해서 떼는 중이에요. 요즘은 동네마트도 다 배달해 주거든요. 우리가 뭐 자취하는 대학동기들도 아니궁. "

" 아, 그거 저번에 대본에서 본 거 같은데. 이번 작품 하시는 유선생님이랑 같이 작업하세요? 대본 바뀐대서 유선생님 댁에 가신 줄 알았더니. "

" 예인이 너, 나 만나러 온거야? 그럼 좀 안에서 기다리구. 밑에까지만 내려갔다 올테니. "

그녀를 대신해 말을 친 선배는 그껀은 나중에. 라고 흘리며 그녀와 함께 엘레베이터를 타러 간다.

" 어, 아냐. 그럼 같이 내려가서 커피숖 가지 뭐. 그냥 딴 생각하다가 올라와버려서 짐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

그녀는 연신 한 쪽 손을 내 저으며 따라오지 말라 한다. 커피숖 가라구. 저는 엘리베이터 더 타구 내려가서 지하철 연결통로로 나갈 꺼라구.

" 작가님은 왜 차 안 갖구 다니세요? "

" 글쎄요. 워낙 잡념이 많아서랄까..."

얼버무리듯 말하는 그녀. 운전하면서 신경 곤두세우는게 싫다고. 공주님 체질이라 기사대동하지 않으면 자가용 못 탄다고 농담하면서 떠난다. 아쉬운 듯 그녀를 보내는 선배. 하지만 표정은 왠지 더 어둡다. 다른 걱정이 있는듯.

" 커피 안 마셔? "

예인은 후발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연일 좌석을 메우고 있는 고급 커피전문점의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 계속 마셔서. 너 괜찮으면 맥주 마실래? "

" 웬일이야? 선배가 나한테? 맨날 문전박대하더니. "

벌써 몸을 일으키며 예인은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한다.

" 여기 호프집은 분위기 쫌 그런데. 선배, 그냥 바로 가자. 내 친구 하는 데 가까이 있거든. 근데 배도 고프고..."

그러고 보니. 하면서 선배도 맞장구를 친다.

" 계속 커피하고 담배만 해서. 요기 될 만 한거하구...병맥주 먹자. "

예인은 이게 선배의 대산가 싶어 고개를 들고 마주 바라보았다.

" 왜 그러니? "

" 선배, 좀 이상하네. "

" 뭐가? "

" 날 너무 가깝게 대하네. "

"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대표 대접해달라구? "

" 학교 때부터 쫓아다녔는데 그렇게 곁을 안 주더니, 요즘 왜 이래. 늙었나? "

병맥주를 컵을 달래서 따라 마신다. 선배, 폼 안 나는데..

" 폼 잡고 사는 거 힘들어서 늙는다. 너라도 나 좀 쉬게 해 주라. "

예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예 묻고 있었다.

" 애인 만나서 즐거운 줄로 알고 있는데. 의외의 대사네? 오늘도 땡땡이 치구 오피에 쳐 박혀 놓구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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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조감독을 붙잡고 뭐라고 하소연하는 이윤정을 뒤로 하고 예인은 맥이 풀린 채 촬영장을 나왔다.

하얗게 새로 지은 건물, 건물 중앙에 전망용 엘리베이터를로 만들고 로비를 이층까지 높였다. 외장에 씨블랙을 입히겠다는 예인의 말에 설계사무소장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쳐다보았었다. 수지타산 안 맞춰도 되면 맘대로 하라면서. 안그래도 주상복합으로 빼면서 타산이 안 맞고 있는데 부채비율이 위험수윈데 하고싶은 거 다 하려다가 아예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수가 있다며 진심어린 충고를 하는 지라 예인은 더 주장할 수가 없었다.

모 아니면 도라구...예인은 블랙을 포기할테니 크리스탈로 바꿔달라고 해서 겨우 확보한 것이 지상 2층까지의 전면유리창이었다. 투명한 큐브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 예인은 이층에 내려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칠 것없이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차들, 인도의 행상들...그 어디 쯤에 선배와 그녀가 걷고 있을 것 같았다.

훌쩍 큰 선배의 팔꿈치에 어깨를 스치며 종종 거릴 것 같은 그녀. 무릅을 덮는 폭넓은 치마를 입고 앵글부츠로 한껏 키를 늘이곤 갈색머리칼을 삐죽이 내민 채 회색 베레모를 쓰고 물방울무늬의 쉬폰 목도리를 여왕의 러플칼라처럼 칭칭 감고 나타나곤 했었다. 예인엔터빌딩의 준공식 이후 바로 입주한 선배의 오피스텔을 찾아서. 12월 초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렸던 어느땐가 예인은 이층의 지금 이자리에서 거리 쪽이 아닌 로비 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익숙한 그림자의 선배가 코데즈컴바인의 야상을 반쯤 어깨에서 흘러내린 채 그녀의 팔꿈치를 부축하느라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 그러게, 굽 높은 거 신지 마라니깐. "

" 그럼 마중 나오지 마 ! 너랑 길 가는 거 힘들단 말야. "

" 누가 쳐다 본다구 그래? "

" 힘들다구...쪽 팔린게 아니라... "

엘레베이터를 타도 될텐데 그들은 굳이 이층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한 계단, 아니 두 계단 쯤 올라갔나보다. 180을 육박하는 선배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해사하게.

" 내가 더 올라가면 너두 목 아플 껄. "

" 앞이나 봐..."

선배는 미소 띤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생생한 표정으로.

예인을 알아보지 못 한채 선배는 시종일관 그녀의 옆구리를 낀 채, 발끝이나 손끝 아니면 그녀의 이마 쪽을 쳐다보면서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오피스텔이 있는 탑층까지. 엘레베이터 안에서도 그녀를 위해 한쪽 팔을 뻗어 가드를 해 주는게 보였다.

예인은 선배의 그런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에 익숙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보다 주로 캠퍼스의 어느 나무 그늘이나 벤치 근처, 혹은 정문을 빠져나가 직선거리 100미터면 도달하는 타 대학교로 가는 은행나무 많은 인도의 어디쯤에서. 선배는 그녀가 다니는 학교로 출퇴근을 했다. 그럴꺼면 뭐하러 이쪽 학교에 입학했담. 예인은 선배를 몰라도 되었을 것이라며 그녀의 대학에 음대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무슨 학과인지 그 학과가 자신과 선배가 다니는 우리 학교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선배는 예인의 존재 조차 모르고 있는데. 선배는 다른 사람을 사귀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는 듯 했다. 학과의 동기들이나 동문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거나 창문에 물이 흐르도록 장치해 놓은 호프집 안쪽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눈에 띄는 것을 예인은 어쩌지 못했다. 선배는 멋있는 사람이었고 피아노를 칠 때도 치지 않을 때도 음악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우쭐해 질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선배의 곁에서 지나가는 길이 아닌 동행으로 함께 걷거나 말 나누거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물론. 언제나 그 녀 뿐이었다. 어느 여름엔 짧은 고수머리를 하고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시한 셔츠에 발목이 넓은 카고 팬츠를 입어 더욱 작아보이는 그녀와 마주쳤었다. 혼자 서 있는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가면서 예인은 처음으로 근거리에서 보는 그녀의 피부가 어린애처럼 말갛고 투명하다는 걸 알았다. 한창 화장에 열을 올리던 대학 신입생들 속의  예인으로선 뭐 저런 촌스런...하는 말을 속으로 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대학생이란 걸 알고 있지 않았다면 중학생으로 오해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대낮의 캠퍼스 앞 거리를 우왕좌왕하는 중고생들은 모다 날라리일 것인데...

" 혜정아 ! "

뒤에서 휙 앞으로 내달리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은 역시 선배였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든 채로 뒷머리를 슬쩍 쓰다듬으며. 쑥스러운듯 미소를 흘렸다.

" 머리 잘랐어? 왜 이케 짧게 ! 시원하긴 하겠네? "

" 어려 보여서 완전 망했어. "

" 그럴 줄 몰랐어? "

" 멋일어 보일라 그랬는데. "

예인은 선배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것도, 시종 웃음을 흘리면서 농담처럼 떠드는 것도, 누군가의 앞에서 허리를 구부정하니 흔들면서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때, 그녀는 신발 같은 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키높이구두나 운동화, 힐이나 샌들 뭐 그런게 아니었다. 그냥...뭐였지. 암튼 굽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유난히 하체가 짧아 보였으니까. 키가 큰 선배와 같이 있어서 더 그래 보였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거나 시선을 아래로 까는 버릇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가 한쪽 어깨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보는 사람은 불편하다. 저렇게 키 차이 나는 커플..

그 때도, 그 이후에도 또 지금도 선배는 변함없이 그녀를 가드하듯 몸을 기울인 채 옆에서 걷곤 한다. 마치 그녀의 호위기사라도 된 듯. 왜...선배는 그 자신이 그렇게 아름다운 직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머리를 길러 찰랑거리게 하지 않는 걸까. 넓은 어깨 만큼 풍부한 바스트와 쭉 뻗은 허리, 8등신의 몸매에서 월등히 높은 하체 비중을 가졌음에도 항상 루즈하게 걸치고 다니는 사파리, 점퍼, 롱셔츠 뭐 그런것들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질 않곤 했다. 그녀를 신경쓰는지 신발은 늘 굽낮은 플랫슈즈 아니면 스니커즈, 어떨땐 슬리퍼를 끌고 다니기도 했다. 뭐...그런...

그렇게 멋있는 선배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그녀는, 그녀도 옆사람이 자랑스러운 듯 흘낏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확인하곤 했다. 마주친 시선에서 부러움을 발견했을까? 얼른 시선을 비키는 그녀. 예인보다 그녀가 더 무안해하는 듯 표정이 긴장했다.

" 왜? "

" 응, 아니. "

" 뭐 불편해? 어디 들어갈까? "

" 아냐, 더운데. "

" 그러니까 시원한데 들어가면 되지. "

" 추워, 에어컨은. 저 위에 가서 떡볶이 먹을까... "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두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한쪽 팔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끼고 있다. 표지의 제목이 잘 안 보이는 양장본의 홑껍데기 책. 중간에 책갈피가 끼어 있다. 그녀는 항상 촌스러운 고시생같은 분위기다. 그녀의 어떤 점이 좋은 걸까. 선배는.

예인은 이층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전망용인 값을 하느라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게 해 준다. 탑층에서 내려 긴 복도를 지나 끝까지 갔다. 선배의 오피스텔은 중간 쯤에 있다. 골라도 된다구 했는데 번잡스럽게 엘레베이터 가까운 쪽을 선택했다. 왠지 그것도 이제는 나이 들어 산책하기 보다 한 곳에 자리잡아 앉아있기를 더 선호하는 그녀를 위해서인 것 같이 느껴졌다. 장엔터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주거용 오피를 구입해 들어온 것도 그녀가 입사한다는 게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고서였으니 충분히 그럴 것이다. 예인은 선배를 설득하기 위해 떠들었던 수많은 말들 중 무엇이 주효했는지를 또한 전혀 객관성없는 이유로써 알고 있다. 방송국보다 영화가 낫다, 월급감독보다 자기꺼만들면서도 더 많은 연수익을 보장하겠다. 홍보나 흥행 모든 것은 회사가 알아서 할 것이다. 작가 선택권도 주겠다 등등...예인은 소속 작가들을 나열하다가 결국 덧붙였다.

" 드라마작가하시다가 오신 분들도 많아요. 이윤정 작가 뿐 아니라 아직 신인이지만 이혜정 작가, 그리고 또... "

" 이혜정 작가가 왜? "

형식적으로 문답만 하고 있던 선배가 먼저 물어오는 순간이었다.

" 왜라뇨? 당연히 데뷰했으니 차기작을 내야죠. 드라마국에서 그 경력, 그 스펙으론 힘들어요. 나이도 있고. 이윤정 작가랑 팀 짜기로 했어요. 베테랑들은 대본 작업 혼자 안 하는 거 알쟎아요. 이혜정 작가도 혼자 작업해서 완성도 맞추기는 힘드니까. "

그리고 또 뭐라고 예인은 설명을 덧붙였었다. 이어서 감독대우의 세세한 프로모션까지.

" 들어갈께. "

" 정말 ! 선배, 그럼 계약하는 거에요!! "

예인은 계획대로 되는 것에 기뻐해야 할 것인데 꼭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젠 이혜정 작가를 섭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냥 알바라니깐 ! 하고 황당해하는 이윤정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붙였다. 울 회사에 하청, 비정규직 이런 건 없다. 작가팀 소속으로 일단 이름 올려라.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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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염색을 했지만 금방 자라는지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희어지고 있는 뿌리부분을 내보였다. 귀밑을 훔쳐보다가 문득 야릇한 생각에 예인은 혼자 얼굴이 붉어지는 듯 했다. 유난히 길고 가는 목이 쇄골의 끝을 보인 채 라운딩프릴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속 어딘가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 오늘 촬영 왜 접는 거야? 조감독은 일정변동 없을 꺼라구 했는데. "

이윤정은 촬영장으로 들어가며 묻고 있다.

" 조감독에게 물을 껄, 왜 나한테 물어? "

로비의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계단 쪽을 살펴도 보이지 않았던 선배와 그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서 예인은 흘려말하고 있었다.

" 아까 너두 봤쟎아. 갑자기 혼자 결정한 것 같지 않았어? 마치 우리가 뭘 잘못 한 것처럼...누가 어쨌다구 갤 그렇게 챙겨 달아나냐구 ! "

예인은 발걸음을 멈추며 이윤정을 돌아봤다.

" 왜 과장하구 그래? 스케쥴 변동이 있으니까 그런거지, 아무리 감독님이 공사구분 않구 그랬을라구. 현장에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

" 어머머...너 화내니? 감독님 챙기느냐구우? "

말끝에 콧소리를 넣으며 한 발 떨어지는 이윤정은 어쨌든 예인의 눈치를 살피고는 보겠다는 품이다.

 

" 오늘 중지났어요. 오후 씬은 대본이 바뀔 것 같다구. "

조감독은 멀리서 예인을 보자 마자 달려와서 일러준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의 예인은 그래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준다.

" 대본이 왜? 촬영 중에 바뀌는 게 어딨어. 작업일정 다 잡혀있는데, 우리 하루 제작비가 얼마씩인지 몰라 그래? "

" 감독님은 어차피 제작사 요청으로 인터뷰 일정 빼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로 대치하라던데요.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 차이 없을꺼라구. "

예인은 뒤미처 온 이윤정을 슬쩍 돌아보았다.

" 그거야 뭐 베테랑 작가님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이윤정 작가님. 인터뷰 준비 해 오셨죠? "

" 어머, 진짜 오늘 하라구? 아, 뭐 물론 하면 되지, 준비랄께 뭐 있나..."

" 오늘 배우들, 주연이랑 준주연이랑 다 있는 날이니까 어지간한 내용은 다 수집할 수 있을꺼에요. 말씀 주시면 제가 코디랑 스탭들도 주선할께요. 야외촬영할 때 하는 것보다 여기서 인터뷰하시는 게 훨 편하실꺼구요. "

" 친절한 조감독님, 근데 정작 중요한 감독님 인터뷰는 어케 하나요. 현장 안 들어오신 것 같은데..."

" 대본 땜에 작가님 만나러 가셨어요. 안 들어오실텐데. 글구..."

조감독은 이윤정과 예인을 번갈아 보며 실쭉 웃는다.

" 감독님, 인터뷰 안 하시는 거 알쟎아요. 지난 십년 동안 조그만 사진 하나 나가는 거도 허락 안 하셨어요. "

" 어머, 우리끼리 하는 건데 뭘 그래. 자료수집용인 거 알쟎아. 사진 안 찍어두 돼. 그냥 미팅 한 번이면 된다구! "

" 금방... "

조감독은 예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 감독님이랑 같이 식사하고 오신 거 아네요? "

" 그게 무슨 미팅이야, 인터뷰 미팅, 단독 대담해야 한다구 ! "

마지못한 듯 이윤정을 쳐다보며 조감독, 웃지 않으려 애쓰듯 묘한 표정으로 말한다.

" 이혜정작가님이랑 하고 있다는데요...이윤정작가님이랑은 저보구 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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