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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예인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할 수 없지. 머릿속에서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라는 문장이 떠 올랐다.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직시하구...

그녀는 선배의 애인이다.

두루뭉실하니 산발한 머리가 보였다. 가까이 갈수록 갈색으로 보인다. 염색했나. 얼굴을 들고 쳐다본다. 빛에 반사되어서일까 은빛으로 희끗희끗하다. 뒤로 손을 돌려 머리를 동여묶으며 일어서는 여자. 키도 작네.

누구? 하는 얼굴로 인사를 할까 말까하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소심한 에이형이군.

시선을 맞추는 것에 응하며 눈인사를 한다. 먼저 입을 떼지는 않을 품새.

" 안녕하세요? 작가님이시죠? "

" 아, 네...안녕하세요. 별루 작가는..."

수줍게 웃으며 슬쩍 몸을 돌린다. 자긴 별로 잘난 사람 아니라는 듯?

" 취재중이시라구요? "

" 네에...저기 같이 하는 분 있는데, 이 윤정 작가님이라구...그 분이 다음 작품 기획하시는 거구요. 전 참고로요. "

" 같은 팀 아니세요? "

" 아, 그렇긴 해요. 근데 전 아직 보조 수준이라. "

" 데뷔하셨쟎아요. "

" 네? "

그녀는 깜짝 놀라며 쳐다본다. 자기 작품을 봤다는 거에?

" 작년 연말에 청소년 프로그램 하신 걸로 아는데요? 제목이....뭔지 모르겠네. 직접 본건 아니라서. "

" 아, 네에. 뭐...그냥... "

스스로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듯. 완전...내성적인 성격이구만.

예인은 이 여자가 선배의...하는 문장으로 머릿속이 꽉 찬 채, 자신의 표정이나 말투를 인식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선배의 발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 어, 선배. 작가님, 소개 좀 시켜 줘. "

그녀의 표정이 변했을까? 뒤통수가 쭈볏쭈볏...그녀의 얼굴이 선배의 눈 속에 담겼다.

" 혜정아, 쉬는 시간이야. 밥 먹게. "

" 응...아니. 저기.. "

하면서 예인과 이감독을 번갈아보는 여자. 예인은 소개시켜주기를 기다리는 청부업자같다.

" 선배, 작가님이랑 친하다며? 나두 같이 가. 나, 작가님들하구두 친해야 한다구. "

" 알쟎아. 이혜정작가님, 그리구 여긴 예인 엔터의 장예인사장님. 밥은 저기 오시는 이윤정작가님이랑 해. "

" 왜? 다 같이 가지. "

그녀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가는 이감독의 뒤에서 예인은 차마 졸졸 따라갈 수가 없어 명랑하게 말했다.

" 응? 뭐야, 장 대표? 점심 먹으러 가는거야? "

해죽해죽 웃으며 다가와 팔짱을 끼는 이윤정, 예인은 이작가와 대학동창이라는게 별루다. 선배와 함께 다닌 대학이 아닌, 나중에 편입한 예전이었기에.

 

테라스가 넓은 이태리 레스토랑이었다. 창가로 자리잡았다. 이감독이 그녀를 에스코트한다. 의자를 빼주며. 돌아와서 마주 앉는다. 뒤따라 들어오고 있는 예인과 이윤정작가를 신경쓰고 있는 건 물론 그녀이다. 선배작가를 쳐다보며 합석을 권유해도 될지, 그냥 눈인사만 할지 방황하고 있다. 똑바로 다가오고 있는 예인의 걸음걸이에 표정이 정리되는듯.

" 이작가님, 이쪽으로 오세요. 저기 대표님랑. "

"  감독님. 우리 같이 앉아도 되죠? "

" 선배, 이런데 좋아했어? 언제는 맨날 국밥만 먹더니. "

예인이 옆에 와 앉자 이감독은 할 수 없이 건너편으로 앉는 이윤정감독에게 어서 오세요. 한다.

" 뭐 시켜? 파스타? 스파게티? 선배, 느끼한 거 잘 못 먹지 않아? "

그녀가 옆으로 메뉴판을 밀어준다. 

" 비프스테이크도 있어요. "

" 아냐, 나는 점심 간단한게 좋아. 파스타 어때? 감독님은 뭐 좋아하세요? "

" 혜정아, 뭐 먹을꺼야? "

" 응..."

이윤정은 슬쩍 메뉴판을 다시 밀어준다. 슬쩍 사시를 뜨며.

" 아뇨, 이윤정 작가님, 보세요. 전 맨날 먹는거 있어요. "

" 이혜정 작가님이 맨날 먹는게 뭔데요? 나두 그거 먹을까 봐. "

" 에, 그냥 파스탄데요. "

그녀는 이윤정 작가가 까르보나리를 시키자 오늘은 저도 그걸로 하겠단다.

" 왜? "

" 이윤정작가님 따라 하고 싶으니까? "

웃으며 애교떨 듯 선배작가를 쳐다보는 그녀. 점점 수선을 피우며 말이 많아지는 이윤정 옆에서 그녀는 희미해진다. 그녀를 따라 까르보나리를 시키는 선배, 그녀처럼 해물을 추가한다. 예인은 똑같이? 아님 이윤정처럼 그냥 크림으루?

" 전 비프 줘요. 많~이. 느끼하신분들 한 점씩 뺏어먹어야 하니깐. "

화기애애하게 웃음꽃이 피는 점심자리인데 선배는 별로 웃지 않는다. 불청객이 싫다는 듯.

그녀는 조금씩 천천히 먹는다. 느끼함을 덜려는 지 중간 중간 해물을 먹으며. 선배가 조개에서 살만 꺼내어 그녀의 접시 위에 놓아준다. 짐짓, 못 본체 했지만 이윤정 작가는 너스레를 떨며 어머! 애지중지한다더니 정말이네...

그녀는 불편한 표정으로 애써 웃음을 지어보인다. 선배의 눈길이 그제야 이윤정에게고 가 꽂힌다.

" 우린 식사 오래 하는데, 다 먹었으면 먼저 가지? "

" 커피 마실꺼니깐 괜찮아. 누가 뭐랬다 그래. 천천히 드셔들. "

이윤정은 혜정을 돌아보며 감독의 눈치를 보듯 흘끗거리며 여전히 너스레 떨듯 떠들어댄다.

그녀는 식사를 다 하지 않고 밀어둔다.

" 빵이랑 같이 먹게 우리도 커피 시키자. "

선배는 말은 안 하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예인은 애써 무시했다. 우린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함께 밥 먹고 있는 거라구...누가 누구랑 데이트하는데 끼어든게 아니구...

빵도 조금씩 먹는 그녀. 커피도 홀짝 거린다. 아...저거 성격인가. 예인은 궁싯궁싯 심술이 난다.

" 진짜 오래 드시네. 말씀도 별로 안 하시면서. "

예인은 시계를 쳐다보며 현장 들어갈 때 되지 않았냐구 걱정스레 이감독을 쳐다보았다.

그래. 하는 선배. 이윤정을 향해 그만 떠들고 일어서죠. 한다. 농담으로 받아야지한는 얼굴로 마주 보는 이윤정.

" 응, 그래. 오늘 또 촬영이 많은 편이죠? 오늘 내일쯤엔 인터뷰 들어갈까 했는데... " 표정이 일그러지며 감독을 바라본다. " 감독님, 인터뷰도..."

" 오늘 촬영 끝이에요. 배우들이랑 스탭들 시간 많으니깐 인터뷰 하세요. "

벌떡 일어나더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아 예인과 이윤정을 지나쳐 그녀의 뒤로 간다. 의자 빼 주러.

" 가자. "

" 응. 같이 가야지. "

" 촬영 끝이라니깐. 인터뷰하는데 방해하지 말구 퇴근해. "

" 왜에에? "

예인은 이윤정과 함께 식당을 나오며 저만치 앞서 걷는 이감독과 그 애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 야, 장사장 !  저거 뭐니? 이감독이랑 재, 애인사이라더니 정말 그런거야?

" 언닌, 재...가 뭐야... "

" 어머, 재, 나한텐 까마득한 후배야. 겨우 작년에 데뷔해서 울 회사 들어온지 한 달 밖에 안 되었어. 내가 델구 다녀주는 거나 마찬가진데...근데 앤, 묻는 말엔 대답 안 하구? 이 감독 태도 봤지, 삐져서 계산도 안 하구 가는거. "

" 원래, 계산은 사장이 하는 거야. "

" 애 좀 봐? 넌 질투도 안 나? 너 이감독 쫓아다녔잖아. 아니 지금도 쫓아다니구 있지. 근데 이감독은 맨날 재만 챙긴다, 애... "

" 언니, 그만 해. 언니네 팀인데, 호칭이 그게 뭐야. 나이도 있는 사람을. "

이윤정은 갑자기 멈춰선다. 이미 저만치 가서 행인들 사이에서 뒷모습도 찾기 힘들어진 이감독 옆의 그녀를 가리키며.

" 너보다 나이 많지? 얼굴도 네가 훨씬 더 젊고 예쁘다. 키도 작고, 화장은 저게 뭐 하다 말았냐...볼꺼 없는데..."

예인을 곁눈질하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게 뭘까.

" 근데 너하고는 딴판으로 귀염성있지? 친절하구. 착하구. 예쁘구. "

" 언니...재...좋아했어? "

" 아이, 뭐, 사람 괜찮다구. 누가 이감독처럼..."

황급히 입을 다무는 이윤정. 잽싸게 예인을 훔쳐본다. 못 본 척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예인. 그들이 간 거리 속으로 시선을 둔 채 속으로 되뇌었다.

알 놈은 다 아는군. 그녀는 선배의 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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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예인은 할 수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선배의 시선끝에 있었고 그 시선이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 뭐야, 저거...산발을 해 가지군... "

예인은 말을 먼저 하고 동공에 들어온 영상을 머리로 옮겼다. 느리게. 생각하기를 하긴 싫었지만 의식 속에서 이미 언어로 형상화되었다.

' 얌전하게 생겼네...'

안 그럴 것 같았는데. 예인은 이 진 선배의 여친이 그저 수수하고 평범한 여자라는 것이 얼른 이해가 안 갔다. 선배처럼 루즈하거나 아님 대조적으로 화려한 미인이거나 뭐 적어도 몸매라도 잘 빠진...

' 작은 여자구나...이쁘장하니...'

예인은 대학시절 즈음에는 훨씬 더 젊고 예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안미모.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촬영장의 한쪽, 밀어둔 테이블과 의자들 너머로 쌓아둔 카메라와 기자재들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무언가에 걸터앉은 듯, 한참 키가 작아 보인다. 배우들을 직접 본다는 것에 흥분했는지 뺨을 살짝 물들인채 가끔 무언가를 적기 위해 노트를 얹은 무릎 위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볼 때마다 맨 먼저 셋트 안을 보고 연기 중인 배우들이 보이지 않으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중간중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저 스탭은 무얼 담당하는 사람일까? 하는 표정으로.

 

 " 취재를 하려면 인터뷰를 하지, 왜 저렇게 앉아만 있대? "

예인이 던지듯 묻자 조감독은 뭐? 누구?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더니 곧 알아먹었다는 듯이 이마를 편다.

" 나중에 하겠대요, 며칠은 그냥 보기만 하겠다고. "

" 며칠이나? 왜? "

" 글쎄요. 뭐, 탐색기같은 거겠죠. "

뭔 탐색을 그리 오래 하누? 했더니 이제 이틀째이니 내일은 안 할지도 모르지만. 하면서 조감독은 싱긋 웃는다.

" 누구랑 틀려서 느긋한 성격인가 보더라구요. "

예인은 댓거리할 생각 없다는 듯, 조감독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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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학시절부터 이감독을 알고 있었다. 이감독은 몰랐지만.

의상학과를 때려치고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기 위해 중퇴를 결심했을 때, 미련이 없었던 것도 순전히 그가 졸업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그가, 같은 단대에서 부지런히 강의실을 중복시키고 매점이며 식당을 찾아다니고 피아노과의 연주회란 연주회는 모다 참석하며 얼굴 부딪히기를 시도하던 예인을 알아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처럼.

예인은 촬영장의 한 쪽 구석에 서서 노려보듯 이감독과 이감독의 시선을 쫒았다.

지금도 이감독은 시선을 멀리 두고 있다. 곁을 더우기나 뒤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 감독의 시선.

그는 왜 주변을 돌아보지 않을까.

이 감독 외에 누구나, 누구나 ! 알고 있었다.

예인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가 있는 모든 곳에 예인은 다가갔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예인을 동시에 알고 있었다. 그가 말 거는 사람들에게 예인도 인사를 했고 관계를 가졌으며 지속적인 우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예인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는 늘 바빴다.

피아노과의 정기연주회에 불참하기 시작했고 학점을 이수하지 못 해 5년째 대학에 머물렀다. 학적부상으로만. 그는 항상 캠퍼스를 빠져나가 점심때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언젠가부터 인근의 거리에서도 술을 마시거나 까페를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무엇을 쫓고 있는가?

그를 잃어버리고 예인은 학교를 떠났다. 의상학과에서 더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대학로의 연극단을 쫓아다녔던 오년 동안 예인은 그의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이미 드라마의 엔딩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예인은 연상시킬 수 없었다.

" 말도 안돼 !! "

 극단의 스탭이었던 옛날 대학동기한테서 정말 몰랐냐고 재차 질문받으면서도 예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 어떻게 이 진 선배가 드라마 연출을 한단 말야? 전혀 관계없쟎아. 선배는 피아니스트라고 ! "

" 졸업연주회 간신히 통과했쟎아. 난 그 선배, 피아노 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어. 2학년 땐가 이후로는. "

동기는 잠깐 예인과 함께 들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의 피아노 & 락밴드의 공연을 떠 올렸다. 중간 이후 난장판이 되기 전까지 울려퍼졌던 선배의 피아노 독주. 거기서 뻑 간 이후 몇 년을 쫓아다녔던가.

" 선배가 감독이 되나니! "

예인은 운명적이라고 느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당연히 다시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정확히는 이번에야말로 그에게 자신을 알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삼년이 지나지 않아 예인은 충무로에서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배우생활을 때려쳤지만 별로 미련 없었다. 원래 그렇게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정할 수 있었다. 괜찮다. 중요한 건 감독을 영입할 수 있는 기획사를 차렸다는 것이다. 물론 예인의 아버지가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에 크게 힘입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다 좋은 일이었다. 아들들을 믿을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후계자 인정을 받은 것도, 비위 맞추기 힘든 아버지와 함께 집안을 다 내어맡기는 것에 큰 올케는 좀 서운해했지만 워낙 통크게 경제적 지원을 해 주는 시누이에게 어깃장을 놓을 수는 없는 일. 예인은 영화관을 소유한 프로덕션의 오너가 되었다.

왜? 당연히 드라마국에서 월급감독으로 찌들리고 있는 선배를 스카웃해 오기 위해서였다.

한참 걸렸다. 방송국에 진출해 있던 대학로 시절의 선배들에게 욕도 어지간히 먹었다. 뭐 어떠랴. 예인은 중요하지 않은 타인과의 관계가 망가지는 것엔 쉽게 대범해졌다. 처음 방송국 미팅룸에서 이감독을 만났을 때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들었다. 드라마 외주 제작을 협의하려던 국장도, 대외협상팀의 부장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못 했다. 기획부터 광고수주에 이르는 드라마제작의 전과정을 혼자 프리젠테이션 하는 예인을 이감독은 흥미롭다는 듯 주시했다. 그 후 작가와 공동작업을 주선하고 캐스팅, 오디션, 셋트제작, 협찬물 계약 등 모든 장면에서 예인은 적극 개입했고 수시로 감독과 의견을 조율했다. 방송국 드라마에선 최고의 자율성과 재량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래도 부족하면 얘기해요. "

예인은 이감독과의 모든 대화의 끝에서 이렇게 말했다.

" 네. "

이감독이 그리고 나서 한마디만 더 하면 스카운제의를 할 참이었다.  방송국에선 한계가 있으니 충무로로 나오라고. 곧 그렇게 될 판이었다. 예인은 낙관하고 있었다. 촬영을 시작한 이번 드라마의 시청률이 어떻게 나오던 그걸 빌미로 이 감독을 빼낼 것이었다. 잘 나오면 후한 계약금을 걸고 보다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권유하면서. 못 나오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매니악의 작품활동을 보장하겠다고 큰 소리치면서.

" 같은 대학이었구나. "

 하면서 이감독이 말을 낮췄을 때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제부터 바래왔던 관계인가. 선후배 사이.

그런데 이게 뭐람 !

예인은 소리질렀다. 촬영 중인 셋트와 배우들과 모형인형처럼 움직이고 있는 스텝들, 그 모두를 한 눈에 넣고 있는 이 감독의 시선을 쳐다보면서 조용히 속으로, 이를 악 물었다. 여전히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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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effect

" 그때 왜 그애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까? "

상량한 표정의 소년은 낮게 중얼거렸다.

굳게 닫히는 수도원의 철문, 철창의 안쪽에서 흔들리는 커텐. 첨탑을 바라보는 소년의 높이 쳐든 턱. 목줄기. 가늘게 이어져 숨어드는 가슴골.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소년은 직감했다.

가슴이 서늘해지며 폐부 속에서 무언가가 빙결되는 게 느껴졌다. 닫힌 문 앞에서 발을 뗄 수 없었다. 무릎이 꺾였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웃음. 빛나던 눈동자. 새된 숨소리...오, 그녀를 다시는 안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이 덧칠되어 양감되는 부조처럼 확신에 찬 절망감에 소년은 부르짖었다.

" 널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 "

fade out.

 

시사회는 성공적이었다.

3대 일간지의 문화면에 기사가 실리고 5대 검색엔진의 메인에 article 이 떴다.

" 감독님, 축하드려요. "

연예부기자의 인터뷰와 출연배우들의 광고성 멘트들이 이어졌다.

 

" 무슨 일 있으세요?"

" 아니,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 아닐까? 별로 색이 변한 것 같지는 않은데?"

지인들과 평론가들의 블라인드토크가 시사회 끝난 후의 리셉션장에서 건네지고 있었다.

" 해피엔딩 아니쟎아요. "

" 맞아요. 남는 감정이 슬퍼요. 막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

" 속상해요. 그쵸? "

" 응, 이상해요. 지금까지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비통해하거나 절망적인 감정으로 엔딩샷된적 없쟎아요. "

" 감독님...무슨 일 있으신거 아네요? "

 

예인이 소리를 낮춰 조감독에게 물었다. 방송국에서 이감독을 끌고 오는데 톡톡히 한몫 한 그녀로서는 충무로판에서의 입봉작이 어떻게 평가될지 여간 걱정이 되는게 아니었다. 왜 갑자기 색이 변했지?

" 그렇게 색이 변한건 아닌 것 같은데... "

조감독은 말하면서도 영 자신이 없다.

" 여전히 정확한 구성이고 스토리라인도 한 줄로 잘 짰고 분위기는 좀 어둡지만 원래 그 스타일이고..."

" 희망이 안 보이쟎아요 ! "

예인은 딱. 그거라는 듯 소리쳤다.

" 지금까지 남주가 여자애 보내놓고 울면서 끝난 적 있어요? 항상 다시 만날 꺼라는 전제 하에 크게 짜여진 에피소드였쟎아요. 이감독, 원래 트레이드 마크가 그거쟎아요. 옛날 이야긴데, 그 자체로 주제 잡아내고 그 속에서 재밌고 예쁜 사랑하는, 그러다가 헤어지지만 금방 다시 만나든가 아니 만나는거 안 나와도 언젠가 만나질게 예측되어서 그냥 그렇게 편하게 볼 수 있는. "

예인은 분명 뭔가 달라졌다는 데에 확신을 걸면서 조감독을 다그쳤다.

" 이감독, 애인 찾았죠? 그 뒤에 어떻게 되었어요? 그거 깽판 난 거 아네요? "

" 예에? 그건 또 무슨? "

피디로 평생 가겠다고 충무로에선 밥 먹기 힘들다며 애 둘 딸린 자기는 건드리지 말라더니 결국 이감독이 사표 내자 따라서 사표내고 예인에게 끌려왔던 조감독은 아무리 저희들의 운명을 거머쥔 기획사 사장이지만 너무 사생활 침해스러운 거아니냐고 항변할 듯 했다.

" 잡아떼지 말아요. 내가 수삼년 공들여 이감독 스카웃해 오면서 그 정도 정보 없을 줄 알아요? 유감독은 방송국 입사할 때부터 이감독이랑만 파트 짰으니까 알꺼 아네요. 기존의 드라마들하고 완전 딴판이쟎아요. "

" 그러니깐, 드라마하고 영화는 다르다구요. "

" 뭐가 달라요? 시간 차이? 노출 차이? 개런티?  "

" 에...왜 그래요..."

" 제작비 적게 줬다고 비난했었죠? "

" 크랭크 아웃했으면 끝난거죠. 배우들도 개런티에 불만 없었어요. "

" 제작사는 맘에 안차도 감독이 맘에 들었으니까? "

" 에...왜 그러세요...대표님도 감독보고 시작한 거면서... "

" 시작했지만 계속 할 자신이 없어요. "

" 대표님 ! "

예인은 영 불안을 지울 수 없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이마에서 길고 풍성하게 틀어올려졌던 머리카락 한 올이 풀려 흔들렸다.

" 내가 이감독 콜했을 때는 이렇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영화 만들라는 거 아니었어요. "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 무서울 지경이에요. 엔딩샷 말이에요. 주인공이 희망을 놓고 있어요. 후회, 절망. 자책...앞에서 실컷 보여줬던 소녀와의 사랑, 은밀함, 부드럽고 개구졌던 행동들, 그런 것들이 전부 망각될 정도에요. 멜러로 도배해놓고 호러로 끝냈쟎아요. "

" 대표님. 드라마 아니니깐 그정도 틈은 보여도 되쟎아요. "

조감독은 짐짓 무거운 어조로 얘기했다.

" 틈? 무슨 틈? "

" 감독님, 원래도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어요. 추억 이야기 늘어놓으면서 뭐 얼마나 희망적이겠어요. "

예인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 아, 그래요. 고등학교 때, 아니 중학교 때인가. 국어선생님이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추억을 새기는 사람은 현실이 불행해서 그런 거라고. "

히죽 웃으며 조감독은 사십대 이른 나이에 충무로에서 빠지지 않는 기획사를 홀로 꿰어차고 있는 이 재벌집 외손녀를 바라보았다.

" 맞아요. 감독님 드라마 다 그랬어요. 현실에 힘들어하면서 추억으로 위로받고, 그거 필름으로 만들어놓고 돌리고 또 돌려보면서 때워내는 식이었죠. "

" 뭘 때워내요? "

" 힘든 현실? "

" 뭐라구요? 지금 말장난 해요? "

예인은 그러나 화내고 있지는 않았다. 조감독이 웃으면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추억으로 위로받는다고 진짜로 행복해 지진 않쟎아요. 감독님은 항상 절망적이었어요. 더 힘들고 아프고 절망감에 사무칠 때, 더 밝고 예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 만들곤 했었죠. 그 자신에게 그게 필요했으니까. "

" 그럼 지금은요? "

" 지금이 뭐 어떻다는게 아니라, 영화니까 단막으로 끝내야 하고 그래서 러브라인을 질질 끌지 않으니까 슬퍼보이는 거에요. "

" 그렇게 보인다구요? 그렇게 느끼면 그것으로 영화리뷰는 끝나는 거에요. "

" 맞아요. 기쁨이 길지 않고 슬프게 끝나기는 마찬가지니깐 결과적으로 슬픈 영화가 되어도 할 수 없어요. 감독님이 그 정도 자기 마음밭의 한 고랑도 안 보이고 영화를 마무리할 수는 없쟎아요. 그러면 거짓말이 되어버려요. "

" 절망의 엔딩샷이 없으면 거짓말이 된다구요? "

예인은 여전히 다는 납득이 안 된다는 듯 중언부언했다.

조감독은 잠시 말을 끊고 예인을 쳐다 보았다. 흥행이 안 될까 봐 걱정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면서.

" 감독님...지금 애인이랑 안 좋은 건 사실이에요. "

" 뭐라구? "

예인은 어린애처럼 되물었다. 자신이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는 듯이.

" 이전 작품하고 달라질 수 밖에 없긴 해요. 절망적이었지만 그걸 생각만 하고 있는 거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현재 진행형으로 체감하고 있는 건 다르니까요. "

" 그래서요? "

예인은 뭔가 꼬리를 잡아내고 말겠다는 태세로 표정을 굳히고 짧게 질문했다.

"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는 거에요. "

" 뭘? "

" 힘들다고요. 자긴 지금 절망하고 있으니까...도.와.달라고...? "

영화평론가처럼 해설하듯 말하는 조감독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스쳤다. 예인, 아차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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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이사하고 발끝도 내어놓지 않고 하루내 집안에만 있다.

그녀도, 아이들도.

 

- 넓으니까.

 

그녀는 아이들이 거실에서, 안방으로 다시 작은방으로 옮겨다니며 놀고 있다고 한다.  지붕카를 타고 놀이집을 꾸미고 미끄럼틀에서 내려와 주방놀이용 씽크대 안에서 오색가지 한복들을 꺼내기도 한다.

 

- 어쩌자고.

 

그녀의 집이 아이들의 놀잇감과 약간의 동화책들로 온통 채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하하. 웃고 말았다. 여기서.

 

여전히 커텐을 달지 못 하고 있는 그녀의 창들은 유난히 크고 많다. 상가주택이라. 하면서 그녀는 웃풍이 심해 춥다고 중얼거린다. 그 어조에 불만도 실망도 저며있지 않는 것에 유심히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집의 네 변 중 하나가 주욱 창으로 이어져있었다. 길게 이어진 창턱 위로 그녀는 작은 소품들을 줄지어 올려 두었다. 카페처럼. 시선의 대부분을 창 쪽으로 두면서 정작, 그녀는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있다. 바깥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여기서 그녀의 공간은 어디인걸까.

고등학교 시절, 자그마한 제 방의 창가에 50*70의 책상 위에 빨간 스테레오카셋트를 하나 두고 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안온했던 그녀에게 스무살 이후, 밖으로  떠돌기에 바빴던 그녀는 자기만의 방을 가진 적이 없었다.  도망치듯 감행했던 결혼 이후에도 그녀의 공간은 책상 하나, 걸상 하나를 그토록 원했건만 아직까지도 갖지 못 하고 이제는 별로 필요치도 않다는 듯 익숙해하고 있었다.

 

- 뭐...별로.

 

무엇이든 욕구하는 것에도 에너지가 필요한 법.

그러하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망. disire. 이다.

 

그녀는 더이상 원하지 않는다. 생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도. 가치로운 것. 실존적인 의미, 노동이나 마르크스도.

- 맑스주의 이상의 답을 얻지 못 했어.

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대학을 떠났었다.

다른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길을 가는 것에 힘들고 지쳐했던 그녀는 어느날 문득, 손을 놓았다. 그때, 투쟁의 어느 즈음에 문득 포기를 입에 담았던 것처럼.

 

말이 되어 나온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되었었다. 투쟁의 끝도. 결혼의 시작도.

어느 선배가 충고하기를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면서 아이를 안 낳겠다고 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그 말을 듣고 침묵으로 긍정하였으니 자연스럽게 아이도 낳았다. 아이.

아이를 낳았다. 라는 말은 좀처럼 쉬이 끝나지 않는 현실의 시작이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그녀의 방황, 절망, 화내고 혼자 울고 누군가를 향해 요구하는 것을 보고 지켜왔던 것은 그녀의 벗이었다. 이제 그녀가 남편에게 가졌던 작은 소망을 걷어내고 벗에게 요구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한 지금,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나 외에는. 언제나 열외였던 배제가 이제는 특권이 되어 표정 없어진 그녀의 곁을 지키는 유일한 자가 되었다.

 

그녀의 집에는 여전히 걸려지지 못한 커텐과 부러진 커텐봉, 그리고 짝이 맞지 않는 커텐고리들이 남아있지만 더이상 그녀는 창을 꾸미고 싶어하지 않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의 먼지를 그대로 놓아두면서 시선의 높이로만 바깥쪽을 바라볼 뿐, 찬바람 들어온다면서 창문 열기에도 인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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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그녀의 일상

갈팡질팡 하는 그녀.

시선이 흔들린다.

책을 읽지 못 하고 글을 쓰지도 못 한다. 상념에 잠기지도 못 하고 따라서 잠들지도 못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생을 주도하는 고삐를 놓은 것은. 다시 쥐려는 의욕을 상실한 것은.

그녀를 두고 떠나왔던 그 십년 전 쯤부터였을까.

방황의 한 가운데서 결혼을 하고 두서없는 수다를 떨기 시작하고 비난과 욕지기를 거르며 비판과 하소연을 계속 하다가 어느날 뚝. 수다를 멈췄다.

 

- 사람은 변하지 않아.

 

이혼하는 여자들이 많이 그렇듯 그녀도 그런 말을 했다. 눈꼬리 붉어진 채.

 

염세주의자였던 그녀가 생의 한 가운데를 뚥고 운동과 맑시즘을 움켜쥔 채 표표히 건너왔을 때 사람은, 적어도 계급으로서의 노동자는 변화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 믿고 믿음을 현실에서 증거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절망한다.

투쟁도, 운동도 그리고 동지들도 함께 할 수 없었을 때 이미 고갈된 에너지와 신념으로 결혼한 남편에 대해 노력하기를 그저, 조금.

 

- 그에게 무엇을 원하겠어.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남편의 가사분담 거부에 당황하고 힘들어했지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라구. 그리 말하는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 괜찮아. 별루.

 

그녀는 이어 말했다.

 

- 결혼도 별생각없이 대충했는데 이혼을 너무 오래 생각하는 것 같아.

 

그녀는 별로 관심없다고.

그녀는 그런 여자다. 제가 놓은 것을 다시 돌아보지 않는.

 

- 박원순이 누구야?

 

하면서 그녀 생긋 웃는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며. 한나라당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동갑내기 친구의 말에 글쎄? 시장 정도의 권력에 접근하려면 그놈이 그놈이지, 뭐 별 다르게 행동할 수 있겠나? 하면서.

 

- 노무현도 그렇게 운신의 폭이 좁았는데. 오죽했으면...

 

슬프다. 그 정도를 감당해내지 못 하는 한국사회가.

 

그녀가 어느날 끈을 놓는다면...

가 버리겠지.

지금,

지금은 간신히 얼굴을 보고 있지만.

 

- 아이들이 있으니까.

 

근년들어 둘째가 부쩍 이뻐보인다는 그녀. 아직 어린 아기들이 좋다며.

겨우 초등 1학년일 뿐인데 큰 아이가 하루 하루 학교를 다녀올 때마다 모르는 애가 되어 온다며.

거리감을 느낀다.

그녀는 세상의 질서에 이질감을 느끼며 속하지 못 하였던 것처럼

제 아이에게조차 어려움을 갖는다.

 

- 네게 가면 내가...

 

그녀는 입 밖으로 내지 못 한 채 건너다 본다.

 

- 내게 무엇이 좋을까?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그나마 다시 양평으로 가겠다는 말은 안 꺼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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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그녀의 일상

"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무슨 ! "

그녀는 두 줄까지도 다 읽지 않고 내던져버린다.

 

" 그냥 공산당이라 그래, 뭔 이름은 맨날..."

점점 더 작아지는 목소리.

 

" 십년도 더 전부터 떠들어봤자...그놈의 강령초안은 집구석에서만 떠드는..."

울것 같은 표정으로 냉소에 흠뻑 젖은 말투로.

 

" ... ... "

침묵, 그녀는 함께 논구하지 않았던 상대 앞에서 성을 낸 것이 무안스럽다는 듯? 혹은 슬프다는 듯.

 

40년 동안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가신 어머니가 질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듯.

" ... ... "

 

그녀의 슬픔에 공감한다. 함께 고뇌했으나 모자랐고 함께 방황했으나 지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앞에서 같이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었기에 아마도.

사랑받고 있는 거겠지.

 

그녀가 확신처럼 우리가 다시 함께 할 것이라고 느낀 것은 아마도 무상급식 껀에 대한 단체의 다른 입장을 알게 되면서였을 것이다.

" 한나라당이라니 ! "

그녀는 전에 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냈다.

그리고 실소하며 일축했다.

" 혁명 이후 숙청대상이야. 한나라당과 함께 일했다는 전력은. "

작은 목소리로 비난을 깔고 중얼거리던 그녀.

" 풀뿌리 시민운동이란게 그렇게 뒤섞어 줄 스는 건 아니지..."

 

그런 후에 그녀는 강요하듯 눈빛을 빛내며 들쑤시고 있다.

" 단체를 나와야겠네. 스트레스가 뭐 몸과 마음에 다 쌓이고 있는데. "

 

그리곤 열심히 센터를 세울 곳, 새로 터를 잡을 곳을 알아보느라 밤을 새운다. 아....

이 여자를 따라 가야 하나. 쫓기듯 앞서가야 하나.

 

머리나 식히러 등산이나 가야겠다.

저질체력의 그녀, 산행은 절대 같이 간다 소리 안 하니,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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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그녀의 일상

어찌하여 그러한가.

한 마디, 두 마디 하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그녀는 집착한다.

마치 모래 구덩이 속에 선 채 한 가닥 외로 꼰 지푸라기를 잡듯이.

 

음식보다 더 깔끔한 인테리어의 일식집에서 그녀, 심심하기 그지 없는 모밀국수를 먹는다.

먹으며 소분소분 말을 잇는다. 끊일듯 끊이지 않고. 한번씩 건너 낯빛을 살피며. 슬쩍 떠 보듯 한 가지씩 질문을 던지며. 명절을 쇠러 시댁을 다녀오며 말 상대 해 주지 않고 또 상대가 되지도 않는 거리 뜬 사람들 속에서 심심해하더니.

 

" 그러면 북한산 주변으로 알아볼까? "

" 그러게. "

" 집을 거기 두고 조금 나와서 출퇴근하면 되지. 애들 학교야 뭐 이제 많이 컸는데 아침에 같이 나오고... "

" 그럴 수도 있지. "

 

아무래도 집을 옮겨야 겠다고, 짐을 좀 줄이고 책들도 버리든 어떻게 처분을 하고...내년 봄 즈음엔.

흘려듣듯 그녀는 책. 하고 중얼거렸었다.

 

" 이십대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책들인데. "

밥보다 술보다 더 돈을 많이 들이며 사 모았던 책들이었다고, 그녀는 80년대의 신간들이었고 90년대의 신간들을 그 때 그때 다 사 들이며 알고 싶어했고 논구하고 싶었으며 이론이 어떻게 실천이 되어야 할 지를 몰라 고뇌했었던...서른 즈음까지의 십년간, 혹은 인생의 거의 전부를 표상할 만한 책, 노트, 팜, 그리고 서류들과.

" 열 다섯에서 열 아홉까지의 일기장이 한 박스였는데 그것들과 함께... "

그녀는 함께 내다버린 남편보다 오빠에게 더 상처받았었다. 친족으로 살아오면서 논리적으로는 아니나 감성적으로는 충분히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 버리지 못 하고 있는 것을 버려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버리지 않고 끌어안고 있는 것을 무참히 버려버린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해야 할 지..."

그녀는 싱긋 웃었다. 책을 버려야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에 부응하듯 관용의 태도를 보이며. 아니 포기하는 심정을 냉소적인 목소리에서 미처 비워내지 못 하면서.

 

그녀가 언제부터 이렇게나 눈치를 보았던가.

거절하고 거절하고 거절하니 상처받지 않는다는 표정을 맨얼굴을 들지 못 하는 연예인처럼 안면에 걸고 있다.

그녀의 구분과 경계선에 서 있으니 많은 이들이 함께 용서를 받는다. 책을 버려야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녀의 책을 버려준 남편까지 도매금으로.

 

그렇게 지류에 착목하듯 본류를 흘리더니 그녀, 그래서...하면서 말을 잇고 또 잇는다.

" 집을 어디로 옮기려구? "

" 양평을 간들 뭐 그리 다르겠어? 혁신학교나 대안학교나. 전원마을이나 북한산 자락의 구옥들도... "

" 그렇긴 하지. "

 

이제 그녀는 아무런 호응을 안 해도 혼자 진도 나간다.

" 그럼 내년에 집을... "

 

하면서 그녀, 인생스케쥴을 짜 주겠다기에 어디 한 번 해 보라. 하고 말하니 아연 긴장한다. 슬쩍 쳐다보는 듯 싶더니 잽싸게 눈길 돌리며.

 

" 시간 있는 내가 알아볼께. "

 

그녀, 6개월 전으로 퇴행했다.

그리고 마음을 삭이고 또 삭인다.

 

- 내가 너를 기다려 십년을 돌아 왔다.

- 터를 잡지 못 한 채 부유하듯 살며...

-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주변을 맴돌며...

 

그녀는 이제 어찌할 것인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홀로 떠날지.

다시 집착처럼 함께 할 집을 알아보며, 같이 일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릴지.

 

그녀가 밤을 새며 정보의 바다를 누빌 때

불안이 엄습해 오면서도 힐끔.

자만하는 자신이 들여다보아져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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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그녀의 일상

그녀의 한숨.

그녀의 그리메.

눈 벌개진 채 눈물 일렁인다.

 

담배연기처럼 한숨, 쉬고 다시 내쉰다.

시간을 구획짓는

그녀의 근심

 

온세상을 그늘

지운다.

 

 

 

 

" 왜 그래? "

" 그냥..."

 

그녀가 좋아하는 이탈리안식 레스토랑에서 런치메뉴라도 값싸지 않은 파스타를 먹어주었건만 아이스커피의 얼음을 지걱거리며 창을 보고 있는 그녀.

도심의 거리를, 아니 창틀 정확히는 창의 문짝을 보고 있다. 프로방스풍의 갤러리창의 문짝과 격자들을.

 

" 전원주택이 너무 비싸. "

" 그렇겠지..."

 

함께 슬퍼해주어야 하니 말끝 흐려준다. 거기 비싼 줄 언제 몰랐었나...

 

" 학교 근처에 작은 집이 있는데. "

 

그녀는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듯한 작은 집이 학교를 멀지않게 쳐다보며 턱 하니 있더라...한다.

방 두 개와 그 방들을 합친 정도의 거실, 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최소화시켜 구석에 밀어놓은 작은 부엌.

하지만 씽크대에서 내다보는 작은 창으로 널따란 앞마당이 다 들어오니 족하다며.

거실이 테라스를 가진 명품 전원주택은 아니나 넓은 창 앞으로 통나무로 만든 야외테이블이 있으니 그 또한 족하다며. 흔하게 지어진 하얀 스틸하우스도, 불안한 목조주택도 아닌 연한 감빛의 조적조의 신축이니 가히 탐낼만 하다며 한숨을 내리 내쉰다.

 

" 얼만데? "

" 2억 6천 부르더라구. "

" 20평이라며? "

" 대지는 200평이야. "

" 그래..."

" 평당 100만원은 다 넘더라구. 그나마 작은 집이라 그정도 가격이야. 난방도 심야전력이구. "

" 심야전력? "

" 한전에서 싸게 공급해주는 건데, 요즘은 허가를 안 해 준대. 신축들은 거의 가스통 배달해서 쓰거나 기름보일러나 뭐...펠렛이라나 그런게 나왔다던데...암튼 심야전력이 난방비 젤 적게 든대. 양평은 추워... "

 

추위에 약한 그녀. 겨울마다 가스요금과 실내온도 사이에서 방황하더니 상당히 주의를 기울인다. 심야전력이 아닌 건 유감이지만. 하면서 그녀는 학교에서 조금 떨어졌으나 걸어는 갈 만한 또 다른 집에 대해 얘기한다.

 

" 칠천만원이래. "

" 뭐? "

그녀, 생긋 웃으며.

" 집만. "

뭔 소린지...

" 그럼 땅은? "

"남의 땅인데, 개인은 아니고. 뭐 시유지 같은 개념이지. 도지세를 조금 내면 된대. "

 

하이고...

그녀가 그렇게나 땡겨하니. 모처럼 일없는 휴일 아침 문자 주고 받다 통화 좀 하고 같이 나섰다.

음. 한시간...10분 걸리는 군.

 

" 지하철역에선 10분 안 걸려. "

" 그래? "

" 물론 차로. "

 

과연, 택시 타니 10분 안 걸려 떡하니 집 앞으로 모셔다 준다. 그래...서울에서 어디에 살든 지하철역 이용하고 도보 10분 안 걸리겠냐. 안 걸리면 역세권이니 비싸지...울 집은 15분 이상 걸린다...

과연...칠천만원짜리 집은 그 주변의 전원주택, 2층 집에 넓은 데크에 연초록의 잔디가 깔린 마당, 아니 정원, 아니 그냥 대지라고 말해야  도심 속에서 가끔 보는 마당이나 정원 딸린 주택들과 다르게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전원주택들을 부러워하며 열등감에 빠질 것 같은 그런 구옥이다. 30평이니 넓기는 하다만...

 

" 웃풍 있을 것 같지? "

 

그녀는 역시 난방 걱정. 85세 할머니의 안방에 놓인 검은색 자개장이며 거실창 아래의 돌로 된 베란다와 하늘색 패치워크의 욕실 바닥 타일이 현관에도 똑같이 깔려있는 것을 눈에 담으며 그녀는 쓴웃음을 짓는다.

" 1970년대의 전형적인 단독주택이네. 서울 변두리에 흔하게 남아있는. "

파란 철대문과 마당을 발라버린 시멘트바닥을 내려다보며 싸긴 하지만...나중에 매매도 잘 안 될 것 같고...기와지붕 얹힌 시골농가라면 모를까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마당에 더하여 언덕 위 코너의 완경사에 세로로 걸쳐진 대문이라니...완전 월곡동 산 1번지야. 하면서 하하 웃는 그녀, 허탈한 시선을 막골의 골짜기 사이에 들어찬 허공으로 던진다.

 

그래도 그녀는 며칠이나 고민을 했단다. 평지의 2억 6천과 그 4분지 1이라 해도 좋은 7천만원 사이에서. 후자의 경우가 사실 그녀가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이었으니. 2억을 대출받을 수는 없쟎아. 하면서 실소하는 그녀. 아, 어떡하지. 하면서.

 

뭘...뻔한거지...

원래부터도 현실성이 없었는데. 그녀는...

그럼에도 계속계속 생각하고 있다. 자꾸 쳐다보면 확신이 생기고 길이 보일 지도 모르고 그러다보면 정말이 될 지도 모르쟎아. 하면서.

정말로...그녀는 어느날 휙 이사가고 없을 것 같다.

 

그녀의 한숨이 계속되기를.

그 눈물 계속 훔쳐주며

곁을 지킬터이니.

 

헌데...눈 벌개진 한 쪽 눈이 아프다면서 또 눈병이 난 것 같다고. 봄에 한 번 났던 눈병이 재발했나. 요즘은 이런저런 알러지가 다 달려드는 것 같다며. 한시간 넘게 한산한 지하철 속에서 에어컨 바람 속에 앉아있더니 코를 흥흥 거리며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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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그녀의 일상

" 혜정아 ! "

 

뚝 끊어진 전화에 열이 확 뻗친다.

안 그래도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스마트폰이 터치가 잘 안되어 신경 곤두서는구만, 이 여자가 말을 하다 말고 끊고는 받지 않는다. 지 맘대로 하겠다고. 아니, 저의 뜻과 다른 것에 연연해하지 않겠다며 상의는 커녕 통지도 않고 갔다. 양평으로. 나는 가련다. 하면서.

어찌 그러한가.

저와 함께 하지 못 하고 혹은 안하는 벗들을 두고 새로이 이웃을 만들어 지내겠다 하면서.

아이들에겐 작은 학교가 모든 것을 챙겨줄 터이니 저는 그 옆에서 손을 거들겠다 하면서.

더 이상 화내지 않으리. 바라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으리니 당신들이 내게 마음 둘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면서.

 

" 혜정."

 

그녀를 안고 사랑한다 속삭였지만, 말 뿐 행동이 따르지 않으니 그녀는 배시시 웃고 만다.

그녀의 오르가즘에 동참하고 열을 받아주었지만, 짧은 쾌락이 그녀를 오래 웃게 하진 못하니.

그녀가 녹음을 보고 싶어하는 구나.

들풀 우거진 땅을 밟고 싶어하고 바람 속에 서  있고자 하며

정갈한 식탁과 테라스가 있는 집을 갖고 싶어하나 무엇으로 소원을 들어줄 것인가.

사람을 싫어하니 다만 도시가 싫다 하는 것으로 가려 덮고

경쟁이 싫다하면서 작은 학교에 기대어 숨어 살자 하면서

아이들을, 아이들만, 아직 저의 품 안에 자식이려니 팔을 안으로 굽히고

홀로 지키는 토굴 앞의 괭이처럼 눈짓을 하더니

휙 들어가버린다.

제가 나고 자란 도시를 버리고.

도시 속에 옭죄인 벗들은 그냥 두고

나는 가려니...

 

" 경기도야. "

 

그녀는 언제나처럼 시니컬하게 입술끝을 씹듯 말아올리며 말했다.

 

" 언제라도 턴 할 수 있는. "

 

그녀는 싱긋 웃으며 건너다 본다.

 

" 이 봉우리도 아닌 갑다. 싶으면 금방 돌아올꺼야. 쉽쟎아. 가기보다 오기는 더. "

 

그녀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묻지 않기에.

 

" 너는 할 일이 있지? 여기서. "

 

6개월 전엔 그리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기서도 네가 할 일이 있을꺼야. 라고 말했으나.

 

" 함께 일하기로 했쟎아. "

 

힘없이, 절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해봤으나 그녀는 에이. 하고 만다. 우문에 답을 하면 서로 우스워진다며.

 

" 나중에 내가 일할 자리가 생기면 그때 돌아올께. "

 

그녀에게 트릭을 썼으나 그녀는 알고 들어온 것이니, 이제 그만 나가겠다 하면서 나중에 정말로 우리가 함께 할 만 하면 그때...

전에는 그러지 않았었던 그녀가.

 

- 우리가 함께 의논해서 !

- 네가 단체에 들어온다면...

- 여기...남아서...지역에서 우리가 조직을 만들어.

 

그녀는 십년 전에는 그렇게 말했었다. 연단에서의 구호소리보다 더 크게 울릴 것같은 눈동자로.

그 깊은 안쪽에 눈물을 가득 담고, 공장 거리에 남자고. 함께 조직을 만들자고. 같은 단체에 들어가자고.

그리 할 수 없다 하는 동지에게 더 말 하지 않고 등 돌려 가는 뒷모습을 그냥 바라보면서 혼자 십년 세월을 보냈다.

곁을 맴도는 강아지처럼 아이들이 크는데 따라 이런저런 상담을 해오고 이런저런 일정들을 만들어오고 가찹든 멀든 훌쩍 와서 차 한 잔, 술 한 잔을 청하던 그녀가.

지친 어깨, 허망한 시선을 멀리 두면서 제가 가장 편한 곳으로 그냥 혼자 가겠다 한다.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며.

 

" 낯선 곳에서 뭘 해? 외로울꺼야. "

 

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듯, 건너다 보더니 피식 웃는다. 익숙한 이곳에서도 저는 늘 외롭다며. 아무런 차이가 없다며. 그저 들판을 바라보기 위해 가는 것 뿐이라며. 재개발구역의 창을 내다보기는 무안하다며.

한 번 쯤은 제 하고픈대로 해도 되는거 아니냐며. 그도 못 하면 인생이 저물어 회환만이 남을 것이니.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 있고 싶다 한다.

 

" 혜정아 ! "

 

" 네게 테라스를 공유하자 한다한들 ! "

 

그녀는 전화를 끊기 전, 힘주어 한마디로 쏘아붙였다.

 

" 너는 들어올 생각이 없쟎아 ! "

 

그녀가 하지 않은 한마디가 남아 울린다.

십년 전에도, 지금도 !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결혼한다 하였고 그녀를 아는 모두가 당황해했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라서, 그보다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활동, 과거, 현재 그리고 결혼. 이어지지 않았고 그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그녀의 동갑내기 친구가 말했다.

 

" 너 때문이었어. "

" 뭐? "

" 네가 결혼해서 아이와 가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

" 그게 무슨...바보같은 소리야..."

" 너와 공통의 화제를 갖기 위해서였어. 실제로 결혼 이후 다시 만나서 잘 지내오고 있쟎아. "

 

그런 여자였다. 제가 집착하는 것에 모든 것을 경사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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