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창작중-남자, 그리고 1

혜정은 얼른 보기에 귀엽고 예쁜 여자애였다.

키도 작고 얼굴도 작고 눈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론 컸고 피곤할 수록 가는 쌍꺼풀이 겹으로 지곤 했다. 서양인처럼 높지 않지만 동양인처럼 낮지도 않은 코보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작은 입술, 세필로 그린 듯 정교한 입술이 참 예뻤다. 그 애의 대학교는 여느 대학들처럼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훨씬 많았고 다른 단대보다 문과대에는 그보다 좀더 많은 여자애들이 있었지만 그 애가 택한 독어독문학과에 여자들은 압도적으로 귀한 편이었다. 그 애가 학과의 남학생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건 기우였다. 오리엔테이션과 신입생 엠티, 그리고 학기초의 강의실에서 그 애는 말수가 적었고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슴에도. 그 애의 학과에는 독어나 혹은 문학에는 더욱이나 관심이 없는 남학생들로 꽉 차 있었고 그들은 손가락에 꼽을 만할 과의 여학생들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집적대고 있었다. 학력고사 점수에 따라 가능한 안정적인 커트라인을 염두에 두고 지원해서 합격의 영광을 얻은 남학생들이 태반인데 비해 여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되었다. 그 녀들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는 된다 싶은 학력을 소지하게 되었고 언어와 문학에 강하다고 생각되는 여성들의 특성에 따라 졸업까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예상되었다. 이제 그 녀들에게 남은 것은 좋은 신랑감을 같은 학과나 문과대 근처가 아닌, 가능한 좀 더 레벨이 높은 대학의 남학생들과의 인연을 구축하는 것을 통해 건져내는 것이 과제인 것처럼 보였다. 혜정은 소수의 여학생 동기들 중 재수를 하고 들어온 한 명과 친해질 듯 싶었다. 아마도 나이가 같아서 친근감을 가졌으리라. 아닌게 아니라 재수생의 전력을 가지고 있어선지 다소 우울하고 어딘지 과의 여학생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애가 어느 전문대학의 유아교육과를 다니다가 예의 " 그 물에서는 그 정도의 남자 밖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라는 식으로 전과를 했다는 동기를 말하는 그 동기에게  다시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혜정은  한, 두번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람고는 코드가 안 맞는다고 치부하기를 곧잘 했다. 그렇게 친하고 싶지 않은 동기들의 명단을 확장해갈수록 그 애는 사귈만한 사람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점심식사, 그것이 또 혜정의 커다란 난관이었다. 끼리끼리 혹은 비슷한 부류의 삼삼오오 식사를 하는 학생식당에서 혼자 줄을 서는 것이 처량해보였지만,  학교 바깥으로 혼자 점심을 때울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 애가 혼자 있지 않을 때는 과학생회일을 보고 있는 선배들과 얘기를 할 때, 아니면 동아실에 있을 때였다. 동아리실엔 거의 항상 누군가가 있었고 그들은 기본적으로 갖는 동질감으로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혜정을 빼놓지 않았고 그냥 사회과학 써클보다 자체의 업무를 갖고 있는 ***였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할 일꺼리도 많았다. 다른 1학년들에 비해 더 자주 동아리실을 들르는 혜정에게 선배들은 심부름을 시켰고 운동적으로 연관된 타대학이나 사회단체를 방문하는데 자주 혜정을 데리고다녔다. 덕분에 혜정이 운동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속도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그 애는 2학년 선배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고 그들에게 지지 않는 데모참가와 연대투쟁을 비롯한 활동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써클이나 학생회를 외곽으로 하고 있던 물밑조직에서의 접근도 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애가 지하조직의 조직원이 되었는가? 전혀 아니었다. 그 애는 **의 소리를 청취하는 선배를 이해할 수 없어했고 계급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이며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끝내 철회하지 않는 자신의 알피와의 논쟁에서 합리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없었다. 인식의 왜곡 혹은 몰이해를 감수하고 그 애가 선배들의 노선에 동의하는 말도, 행동도 하지 않자 87년의 후폭풍 속에서 잘 조직화되지 않는 후배들 속에서 유독 돋보였던  그애를 인입하고자 했던 선배들은 혜정을 준조직원 정도에서 대기시켜두기로 했다. 대세화되고 주류화되어있는 대학의 운동권분위기에서 골수우익이 아닌 한 과학생회의 임원들이 격려하는 학내집회를 경원시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혜정은 대부분의 87학번 선배들로부터 운동에 대한 진지하지 않은 태도를 읽어냈고 과학생회의 주도세력이고 동아리의 핵심멤버였던 선배들 중 가까웠던 몇 명에게서 조직원이 되었던 과정, 그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과 논쟁하지 않았다. 그렇게 과에는 즉 강의실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혜정은 동아리실에서도 소외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기서 그 애가 왜 남자선배와 썸싱이 일어났는지,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연애를 하고 실연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혜정의 써클에서 후배들의 학습을 담당하던 알피는 남자, 여자 각각 한 명씩이었다. 무척 친해진 듯 여자알피의 자취방을 드나들던 어느날 대판 싸웠다는 얘기를 흘리더니 입을 싹 닫았다. 그리고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기타 이야기를 했다. 노래, 남 앞에서 부르는 걸 꺼렸다 뿐이지 노래를 좋아했다, 혜정은. 그리고 기타를 치며 감미롭게 노래를 부르는 선배가 써클에 있다고. 알피이고 세미나할 때 후배들의 질문에 대답도 잘 한다고. 이 승만의 ....중략..... 조직원이지만 그다지 적극적인 것 같지 않다고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2학기에 그 선배가 휴학을 하고 나오지 않는다며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점점 차가워지는 가을 바람 속에서 슬프고 초조한 빛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시월 어느날부터인가 입을 꼭 다물고 교정의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혜정은 눈에 띄게 야위어갔다. 너무 많이.

 

고즈넉한 옥탑방, 새로 두시가 넘어간 시각, 주위는 길고양이도 잠든 듯 조용했다. 진은 주방쪽 씽크대에서부터 출입구로 꺽어지기 전까지의 벽면의 이분의 일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여느 살림집이었으면 가스대를 포함한 씽크대 옆으로 냉장고와 잡다한 주방살림을  놓느라 남는 공간이 없겠지만, 200미리의 작고 아담한 냉장고만 놓고 대신 출입구 앞까지 비스듬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라탄의자와 테이블이었다.  손으로 슬쩍 밀어도 쉽게 제 자리를 바꾸는 가볍디 가벼운 이 가구들을 혜정은 좋아해서 침대 옆으로 난 반대편 창문 쪽으로 번쩍 라탄의자를 들고가 안락한 사색을 즐기기도 했다. 조금 전에는 그 라탄의자에 중상을 입은 병사처럼 걸쳐져 있던 혜정, 뭐라고 주절거렸지만  만취를 못 이겨 꼬부라지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물 한 잔을 간신히 먹여 침대에 뉘일랬더니 까탈스럽게 예민한 부잣집 외동딸의 입덧처럼 욱 ! 하고 올린다. 몸을 가누지 못 하는 그 애을 부축해 욕실을 왔다갔다 하기를 서너번 하고나니 흐느적거리며 머리가 아프다고 울먹거리는 혜정, 침대에 쓰러져 시체처럼 널부러진다.  

혜정을 데리고 온 두 명의 남자들은 같은 동아리 선배라며 혜정이 1차에서 너무 들이붓더니 정신을 못 차린다고, 가까운 친구집으로 가겠다고 해서 바래다주러 왔다고 한다. 그들은 한명은 퉁퉁한 고수머리였고 다른 한명은 대조적으로 뻣뻣한 짧은 머리가 스포츠형 머리에서부터 자라고 있는 중인듯한 마른 체구의 남자였다. 중년의 뻔뻔한 매춘남를 연상시키는 퉁퉁이는 재수하고 들어왔다는 그 말끝마다 " 이 형은 말이야 , " 하고 자신을 상대보다 연장자라는 위치를 부각시키며 지칭한다는 작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체질적으로 빼빼마른 길쭉한 얼굴은 조기입학한 초등학교 저학년시절부터 동급생들에 치여 자라 누나같은 여자들만 좋아할 것 같은 또 볼 때마다 모성본능을 자극한다는 그 공대생이 틀림없어보인다. 뭐, 맞을 것이다. 혜정의 동아리에 남자선배는 3명 밖에 없었고 그 중 한 명이 군대갔다는 얘기를 들었던 지라. 그들이 혜정을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가겠다는 화양리의 술집 골목, 그 < 밤 10시 이후 미성년자의 출입을 금합니다 > 라는 표지판을 전신주에 매달고 있는 그 골목을 혜정은 싫어했다. 선배들이 그 거리의  5000씨씨 혹은 일만씨씨하는 한잔을  빙 둘러앉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마신다는 호프집으로 2차를 가는 것도, 그 길 안쪽의 감자탕집으로 3차를 가는 것도 혜정은 그 쯤에서 어김없이 눈에 넣을 수 밖에 없는 집창촌의 쇼윈도우를 보는 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문 앞에 나와있는 닳아보이는 여자들과 시선이 마주칠까봐 두려웠고, 웨딩숖의 마네킹처럼 무심한 얼굴로 가슴까지 푹 파인 붉은 드레스를 걸치고 애견가게의 전면유리안 작은 칸막이 안에서 움직이는 상품처럼 진열되어있는 소녀들을 훔쳐볼 때마다 자신이 성을 사러온 남자들과 진배없이 뻔뻔스럽게 느껴진다는 혜정은 선배들의 못 본 척 하는 그 얼굴에 이상한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물론 혜정의 선배들이 그 거리에서의 3차를 끝내고 여관을 가는 건 사실이었지만 늘 패거리의 잔당들과 함께 널부러질 곳을 찾아서였고 그럼에도 혼숙단속을 귀찮아하는 주인들의 거절에 방황하다가 후미진 여인숙에 겨우 구겨질 뿐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대가기 전 딱지떼기를 숨기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그 남자 대학생들 속에서 혜정이 이질감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혜정이 이토록 야위어 그 작은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질만큼 초췌해 진것이 그 군대간 선배 때문임을 진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가 딱지 떼러 다녀왔다는 사실을 줏어듣기라도 했을까? 진의 순진한 짐작은 그러나 대학가에서 학년초에 눈 맞아 씨씨커플의 염문을 뿌리는 남녀대학생들이 학년말에 이르기전에 이미 숱하게 잠자리를 하고 있다는 평범한 예측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확인되는 것에 당황하고 불같이 화를 내며 울부짖는 고딩시절의 촌스런 보이프렌드의 역할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작중-우리 함께 이불을 털어요.

집을 얻었다.

엄마는 굳이 그럴 필요 있냐고 하셨지만, 굳이 그러겠다는 딸에게 길게 말하지 않았다.

" 생활비는 용돈 이상 더 줄 수 없다. "

" 괜찮아요. 집세가 나가는 것도 아니고 옥탑방 공과금이 얼마나 된다구, 용돈도 알바로 충당할 수 있다니까. "

레슨비로 여느 부잣집의 고액과외비 만큼은 아니라도 동생 이수의 학원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는 가정경제에 타격을 주었기에 진은 대학에서는 가능한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 네 방은 세를 줄 생각이니 집에 왔을 때 불편한 건 감수해야 한다. 대신 매달 받은 월세를 통장으로 부쳐줄테니. "

"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피아노 과외해도 되고 다른 알바꺼리도 천지라니까. "

엄마는 미간을 찌푸린다.

" 대학을 만만히 보지 마라, 더구나 요즘 같은 시국에. 나는 네가 강의실과 맥주집만 오가면서 낭만 운운하는 대학 생활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 알았어요, 열심히 할께요. 학과공부도 세상공부도 "

엄마의 불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항상, 아주 어렸을 때부터도 엄마는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 불안해 했다. 세대차이가 난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는 맘도 없지 않았지만 엄마의 인생에서 사회는, 특히 한국사회는 아주 느리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68년의 격변을 한국사회를 넘어 유럽의 소식을 통해 조망하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는 유럽에서 한참이나 뒤떨어져있는 한국사회를 불행하게 직시하면서도 전태일 이후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는 동지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자신의 인생에 관대하지 못했다.  어쩌고 저쩌고 중략...

 

 

 

 

 

 

혜정의 학교에서 진의 학교를 지나 뒤편 주택가에 얻은 옥탑방은 넓은 창을 가지고 있었다. 진은 혜정의 학교에 가까운 곳으로, 혜정의 학교와 자신의 학교 사이에 집을 얻고자 하였으나 창에서 바라보이는 대공원의 숲 때문에 복덕방에서 보여준 마지막 집으로 결정하였다. 또 옥상 위에 마련되어 있는 평상과 옥상의 출입구를 개방하지 않는 다는 조건이 맘에 들기도 했다. 반지하층을 포함하여 3층 위 옥상에 작은 창고 하나 크기의 옥탑에 집주인은 샌드위치판넬을 이어붙여 욕실과 기다란 부엌을 만들었다. 본디 창고방과 욕실과 부엌은 각각의 벽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지난 겨울, 오랫동안 혼자 살던 늙은 택시운전수의 실수로 화재가 난 후 올수리를 했다고, 방과 부엌을 하나로 트고 보일러도 도시가스로 교체했으며 천정이며 샷시도 새로 하느라 먼저 살던 사람의 보증금 말고도 돈이 많이 들었다며, 완전 새집이라고 같은 동네에서 철물점을 한다는 할아버지는 큰 소리를 쳤다.

" 이만한 집을 그 돈에 얻는 걸 아주 복 받은 걸로 생각해야 할께야. 보게, 이렇게 훤히 트여 밝고 너르고 저기 씽크대며 문짝이며 다 새것 아닌가, 뭐시냐 그 오삐스텔이나 한가질세 ! "

 그러고도 할아버지는 진이 한 말은 아니었지만, 옥탑이라구 시비하지 말라면서 그것만 아니면 훨씬 더 쳐 주는 방이라고, 그것도 머스마들 아니고 여대생이니까 양보한 거라고 한참을 더 떠든다. 아마도 복덕방 아저씨가 의뢰를 받으면서 어쨌든 옥탑이니 가격을 조정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진이 얌전하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돌아서면서 주인은, 흘낏 천정을 올려다본다. 새로 올린 천정의 석고보드를 뚫고 새 형광등이 은색 날개를 펼치고 달려있는 것이 불안해 보였나? 진도 따라서 흘낏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아, 완전 새집이라니까, 신혼살림 차려도 되는 집이여! 하면서 주인은 또 너스레를 떤다. 진은 네!  깨끗이 쓸께요. 하고 주인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수도세는 꼭 받으러오기 전에 챙겨주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혜정에게 집주인 얘기를 하다가 보니 천정 속이 좀 불안하게 생각된다. 올수리를 했다지만, 욕실은 오래된 양변기에 세면대도 없고 벽도 기존의 빨간 벽돌과 새로운 샌드위치 판넬의 접합이 부자연스러워보인다. 욕실은 화재에 피해가 없었던 듯, 그럼 새로 친 천정 속은 어떠할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안 보이는 것을 두고 신경쓸 게 무언가 싶다. 혜정이 그런 눈치를 챘는가 한숨을 쉰다. " 그럼 택시 아저씨는 보증금도 못 받고 나갔다는 거네? 세 살던 집에 불 나면 살던 사람이 물어야 하는거야? 집 주인이 관리 의무 있는 거 아닌가? " " 글쎄? 화재 원인에 따라...다르지 않을까? "  불 났던 집이 어떻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자꾸 이런 화제로 얘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진은 창문을 열었다. " 근데, 이 창문 진짜 크다. 공원 숲이 저 끝까지 보이쟎아. 시원해서 좋겠지? "

" 응, 근데 겨울엔 춥지 않을까? " " 하하하, 너 하나 춥지 않게 할 능력은 있으니까 걱정마셔. " 진은 이렇게 말하니 진짜 신혼부부가 첫 둥지를 틀며 하는 대사 같아 괜히 웃음이 더 크게 나왔다. 옥탑방의 문 밖에는 마당처럼 쓸 수 있는 옥상도 있고 반지하층이 있어 계단도 2층 반만 올라오면 되는 이 집이 맘에 들었다. 게다가 혜정은 계단 쪽의  햇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유리로 된 반원형의 벽이 멋있다는 말도 했다. 설마 혜정이 없어 자신이 더 추위를 느끼게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진은 여기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따스한 겨울을 보낼 것을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진 끝에 " 내년에도 재계약하고 쭉 살아도 좋을 것 같지? " 하고 말했다.혜정이  " 계약을 해마다 다시 하는가 보지? " 하고 말하자 그제서야 " 그러는 것 같던데? " 하고 자신없는 대답을 하면서.

 

결국 침대는 새로 샀다.  더블로. 엄마에게 넓은데서 자고 싶다고 말하니 그래, 집의 네 방보다 훨씬 크니 그래도 되겠구나 하시며 침대는 좋은 걸로 해야 한다는 말에 대신 입학선물은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책상이며 책장, 옷장 같은 건 이삿짐 차로 옮겨오고 거실 한 쪽에 있던 오래된 윈저 의자 하나를 더 얹어왔다. 별 말이 없는 엄마, 식탁은? 하시다가 피아노 땜에 안되겠구나 하신다. 물론 충분한 공간은 안되겠지만, 진은 커피나 맥주를 마시면서 편하게 걸터앉을 수 있는 작은 티테이블 셋트를 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혜정의 취향을 존중할 예정이었으므로 아무 말도 안 했다. 혜정은 함께 가자는 말에 신나하며 동대문 시장을 누비며 커다란 창에 어울릴 만한 커다란 커튼을 골랐다. 진은 취미가 없어 잘 몰랐지만 하얀 레이스의 속커텐과 겨울에도 지장없을 만한 제법 두터운 감의 겉커텐, 커텐집게며 타슬을 만지작거리는 혜정을 보고 집 꾸미기나 홈패션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동대문을 나와 을지로의 가구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에도 혜정은 즐거워했다. 예쁜 의자를 유심히 보고 사무용 책상 중에서넓고  디자인 잘 빠진 책상을 보면서 만져보고 싶어했다. 살까? 했더니 막 웃는다. " 엇다 놓을라구? 이런 건 전원주택이나 적어도 마당 넓은 단독주택은 되야 어울리는 가구들이라구. " 한다. 하지만 엄마는 신당동에 살 때도, 별거 후 이사온 집도 단독주택이지만 이리 예쁜 가구들 놓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었다. 마당도 꽤 되었는데...하고 생각하며 진은 의외로 혜정이 공주님 취향을 갖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전혀 티도 안 내더니? 결국 혜정은 공주님 취향을 여지없이 증명하며 하얀색 라탄의자, 테이블셋트를 고른다. 네 생각은 어때? 하고 혜정은 남의 집 살림 준비하는 걸 따라온 것 뿐이라는 자세로 물어봤다. 진은 상관없다고 말하려다가 정말 멋질 것 같다라고 고쳐 말했다. 옥탑방에 두기는 분명 부담스러운 크기이고 컨셉도 안 맞을 것 같았지만, 햇살 좋은 가을날 옥상 마당에 내어 놓으면 그럴 듯 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혜정의 분위기에 전염된 것 같았다. 갈수록 낭만적이 되어가고 있는 진이었다.

 

혜정과 함께 밥을 해 먹었다. 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카레라이스였다. 그리고 라면끓이기 정도? 혜정은...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애는 오빠와 남동생 사이의 유일한 딸이었고 엄마가 전업주부도 아니었지만 보통의 여자애들보다 부엌일을 할 줄 몰랐다. 아빠가 힘에 부쳐 짜증내는 엄마에게 " 가시나 뒀다 뭐할끼고, 좀 시키라 ! " 하고 말했지만 그 때마다 엄마는 " 시집가면 다 할텐데, 지겹도록....놔 둬라, 내 좀 쉬었다 밥 차려 줄테니. " 하셨고 가끔 너무 난장판인 집안 꼴을 보며 " 손 뭉뎅이 뿔라짔나, 청소 좀 하그라 " 하는 정도셨다 한다. 그래서 청소했어? 아니, 내가 막 빗자루 들을 라고 헀는데 기분나쁘게 말을  내시니깐 성질나서 걍 던져두고  나왔지. 하는 혜정, 아주 착한 딸이다. 그래도 청소는 자주, 아침이면 내내 온 집안을 하느라 땀범벅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요리를 못 하는 건 순전히 엄마, 아빠가 경상도출신이기 때문이라며, 원래 경상도음식이 맛이 없다고 한다. 그런 말이 있나? 하고 넘어갔다.

함께 먹는 밥을 위해 우리는 시장을 봤다. 감자와 양파와 당근, 그리고 계란은 기본으로 항상 비치하는 식재료들이다. 여기에 햄을 넣거나 없으면 없는 채로 잘 해 먹는 것은 카레라이스였다. 서로 하기 싫은 날이면, 많이 해 뒀던 카레라이스를 3일 동안 계속 먹기도 했다. 혜정, 질리지도 않고 먹을 때마다 맛있단다. 밥과 김치 외에 자주 할 수 있는 반찬은 계란후라이였다. 몇 달 동안 계란후라이는 그보다 난이도 높은 계란말이로 진전되지 않았다. 술집에서 안주로 나오는 계란말이는 두텁고 잘 말아져 있었다. 학생식당에서 두어 쪽 주는 계란말이도 좀 얇고 물컹하긴 했지만 비단두루마리처럼 잘만 말아져있었다. 근데, 우리가 후라이팬에 잘 저은 계란물을 붓고 좀 있다 말을라치면 다 깨지고 부서져 얼른 두번 연속 뒤집지만  말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형상을 하곤 했다. 거기서 일보전진한 것은 순전히 혜정의 공이었다. 어느날, 계란말이하는 법을 자취하는 선배언니한테 물었다며, 정답은 바로 " 익기 전에 돌리라 " 는 것이란다. 과연, 이론만으로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연습을 했는지 혜정은 잘 달군 후라이팬에 잘 저은 계란물을 붓더니 끈기있게 기다린다. 제법 요리사처럼 후라이팬 손잡이를 들고 한쪽으로 기울여 펼쳐진 계란부침의 한쪽만 먼저 익는 걸 확인하더니 양 손에 숟가락과 뒤집개를 각각 들고 드럼 주자가 첫음을 잡는 것처럼 심혈을 기울여 계란말기를 시작한다. 돌돌돌, 제법 3회전, 4회전까지 겹으로 만다. 와! 대단하다! 진은 정말 감탄하며 혜정의 손놀림을 보고 환호를 했다. 그 후로 우리들의 밥상에 계란후라이가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작게 채썰은 당근과 양파를 넣은 계란말이처럼 영양가높고 맛좋고 보기에도 예쁜 밥반찬도 별로 없다.

하지만 혜정의 요리솜씨는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식재료의 다듬기부터 시작되는 요리의 마지막 단계인 간 맞추기에 이르러 혜정은 씽크대 앞에 서서 왔다갔다 하는 것에  지쳐했고 입맛을 잃어 정작 다 차린 밥을 먹는 것에 의욕없어 했다. 그 애는 매사에 강단이 있어 술을 마셔도 마지막까지 버텼고 3학년 남자선배와 소주로 내기를 하여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체구에서 비롯되는 체력의 한계는 단기전으로 승부할 수 없는 대부분의 일에선 금방 바닥을 드러내며 항복을 하거나 미리 포기를 하곤 했다. 그 애는 한 자리에 오래 서서 하는 요리하기가 맞지 않았다. 보다 더 테이블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셋팅을 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고 보람을 느꼈다. 가능한 모든 접시와 컵과 수저받침대나 내프킨까지 동원하여 예쁘게 상차림을 하고 그 앞에 앉아 오래 식사하는 것을 좋아헀다. " 넌 식사를 눈으로 하냐? " 고 핀잔을 주었지만 이쁘지 않은 것은 먹지도 못 했다. 통째 올라온 생선을 싫어했고 가능한 시선 조차 두지 않으려 애쓰곤 했다. 그 애에게 시장통의 뼈다구찜이나 순대국 속의 간, 내장탕 따위는 너무 힘든 시험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노동자들과의 식사에서 그런 메뉴를 참아 넘기는 것이 자신이 대중성을 갖는데 실패하게 한 핸디캡이었다는 말을 할 정도로.

그 애를 위해 요리의 대부분을 담당했지만, 정말로 그 이외의 것에선 완벽한 써비스를 받았다. 깨끗함의 기준이 다른 혜정은 창틀에 먼지가 오래 묵는 것도 싫어했고 티비의 검정부분에 자꾸만 쌓이는 먼지를 어케 없애나 하는 것 따위를 갖고 오래 고민했다. 설겆이를 다 하고 나서도 뜨거운 물을 한번 더 끼얹기 위해 가스비 아까워하지 않으며 한 솥의 물을 끓여내기도 했다. 덕분에 집은 항상 전담청소부가 있는 부잣집도련짐의 방처럼 깨끗하게 정돈되어있었고 기분이 내킬때면 쉽게 카페테리아의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 있었다. 북적거리는 시장 한가운데를 뚫고 유일하게 그 애가 사 들고 온 것은 한 단의 프리지어 혹은 안개꽃이었고 가끔 해바라기 한 송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팔걸이가 있는 하얀색 라탄의자는 금방 먹고 일어나는 식탁의자보다 훨씬 편안해서 우리는 자주 거기서 식사 외에 커피나 얼음쥬스를 마시며 독서를 했고 음악을 들으며 맥주와 계란말이를 앞에 놓고 늦은 밤까지 분위기를 잡곤 했다.

더블침대의 패드는 아니었지만 이불, 특히 홑겹의 여름이불 외에 다른 것들은 혜정이 혼자 들고 털고 개어놓기엔 힘에 부쳤다. 더구나 그 애는 왜 먼지를 이불 속에 돌돌 말아넣느냐며 꼭 마당까지 들고 나가 몇 번이고 털고서도 햇빛에 비치는 먼지들이 떠도는 것을 보며 직성이 안 풀려 볕 좋은 날이면 옷장안 맨 아래에 깔려있는 이불까지 안고 나와 말리곤 했다. 깨끗한 환경과 정리정돈된 상태에 대한 욕구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지만 진은, 다른 어떤 일보다 그 애가 이불을 터는 것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곤 했다. 그 애와 마주 서서 이불을 털고 그 커다랗고 다소 무겁기까지 한 이불을 널어 말리고, 그걸 걷기 위해 저녁에 귀찮은 몸을 일으키는 것에 기꺼워하면서 진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 함께 이불을 터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어느 책에선가 보았다며 혜정은 그렇게 가사분업을 한다면 여자에게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는 말을 누가 하겠냐고 말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작중-사랑, 현신하다.

나는 너의 피조물이다.

네가 원하는 형상을 갖고 네가 바라는 행동을 한다.

손끝으로 숨을 불어넣듯 너의 펜 위에서 눈을 와짝 뜨고

오랜 동면에서 몸을 일으킨 스핑크스처럼

너를 먹어치울 것이다.

 

 

진은 매일, 혼자서 천미리의 우유를 마셨다.  

더 이상 크지 않아도 좋을 만한 신장, 그건 여고에서나  통하는 말이었다. 푸른 콩나물 시루의 검은 보자기를 떨쳐버릴 듯 앞다투어 크고 있는 남학생들을 버스정류장에서 목격할 때마다 진은 불쾌했다. 그,  여학생이라는 신분은 누군가의 마누라가 되기 전의 관례나 절차에 불과하다는 듯 내어놓고 쳐다보며소근대는, 시선과 화제의 주인공들인, 등 넗고 가다좋은 허여멀끔한 남학생들이 혜정의 학교에도 있을 것이었다. 매일처럼 ㄷ 자 모양의 교사 안 쪽에 조성된 정방형의 화단 사이로 난 보도 위를 걸어 상급생들은 도서관을 가거나 체육수업을 받으러 나갈 것이다. 화단을 향해 있는 교실의 창문에서 환호와 수다와 핸드 싸인을 받으며. 그 속에 숨어 눈으로 펜으로 가슴으로 찍은 오빠를 향한 강렬한 시선 속에서. 그들의 드러낸 팔뚝과 커다란 손아귀, 울렁이는 목젓을 훔쳐보며 두근거리는 풍만한 가슴의 처녀들 속에서  무엇으로 그 애을 빼내올 수 있을지를 탐구하며 진은 우유를 마셨다. 고기를 먹었고 밥을 고봉으로 퍼서 싹 비워냈다. 또래보다 작은 몸집에 성격도 까탈스러워 젓가락을 깨작거리고 있던 동생의 경멸어린 시선을 받으며.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체조를 했고 저녁이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조깅을 했다. 중학교 앞의 뚝방길을 따라 우이천의 진원지를 찾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뜀박질을 해서 도착한 인근 자치구에서 새로 조성한 체육공원의 시설들을 유감없이 활용해 주었다. 갑자기 운동매니아가 됐냐며 여자축구에라도 나갈 꺼 아니면 근육 생기기 전에 그만두라는 동생의 핀잔에 주먹으로 응수하며 사내들의 몸짓을 흉내내기도 했다.

품에 안으면 도망치고 싶어도 그 완력에 눌려 꼼짝 못 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의 넓은 어깨에 기대면 다른 두꺼운 가슴팍 따윈 생각도 안 나게 하고 싶었다.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도 여느 킹카와 함께 걷는 여자들에 지지 않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 애의 자랑스러운 남자가 되고 싶었다. 아니 사내들 이상으로 열락을 줄 수 있기를 바랬다. 왜 그럴 수 없겠는가? 누가 질과 클리토리스의 만족을 위해 페니스가 아니면 안된다고 말하는가? 진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애의 눈빛과 손짓과 입술의 움직임을 읽고 그 말하지 않고 있는 열망에  현신으로 대답할 것이며 그를 통해 종국에 그 애와 하나가 되리라고 진은 마음먹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손톱 끝에 머문다. 키틴질의 게찜을 통째 부숴먹을 것같은 격정을 안고.

흐트러진 고수머리 사이로 내비치는 인적없는 계곡 아래 암반같은 목덜미에 키스하며

완전히 잠들 줄 모르는 동공이 눈꺼풀 아래서 흔들리는 걸 안타깝게 내려다보며

산골 소녀처럼 애무할 때마다 더 굳게 다물어지는 입술을 벌려  밖으로 나온 내장을 좇아

그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듯.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작중-혜정의 사랑

첫사랑을 잃고 눈 둘 곳은 없었다.

사방이 벽, 벽으로 둘러막힌 듯한 공간, 입시에 매달리는 한편 자기방치에 다름아닌 매일의 수다에 몸을 맡기고 있는 동급생들 속에서 버텨온 1년이 길고 길어서 또다시 시작되는 2학년을 망막한 맘으로 맞고 있었다.

슈토름의 호수를 읽으며 잃어버린 첫사랑을 바람 속에 실려보내고 있던 라인하르트와 같은 얼굴을 하고 혜정은 시니컬하게 웃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 웃음, 지리 선생님의 공허한 웃음에 갈가리 찢기듯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던 혜정은 주변의 아이들에게 냉소적인 농담을 던지며 웃기 시작했다. 친구가 된 그들은 크게 웃는다. 재밌다며. 지리선생님의 " 우리나라, 좋은나라 ! 자 따라해본다 ! 우리나라 좋은나라 ! " 하는 외침에 크게 웃으며 크게 따라하던 것처럼.

자신을 버리고 이과를 선택해서 가버린 전혜린과 함께 했던 친구를 원망하는 것도 잠깐, 결국 그애가 남기고 간 상처는 그 아래 깊이 패여있던 오래된 상처 때문에 더 아프게 느껴졌던게다. 혜정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라볼 무엇이 있어 생을 지속해야 할까. 죽음 이후 아무런 대안도 없다는 것이 생에 대한 미련을 부여잡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 가슴으로 시간의 흐름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고통이다. 존재하지 않는 혜정에게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히 시간들은 곁을 지나갈 뿐이었다. 국어선생님을 만나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그 분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결혼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혜정은 즐겨읽던 시집에서 윤동주의 사진을 빼냈다. 가지고 다니던 연습장에서 부룩 쉴즈의 사진 위에 덧끼워두었던 랭보의 사진도 빼냈다.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으리라. 선생님은 이제 자신이 만나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여지를 없앴다. 아내와 어머니의 길을 걸어갈 그 분과 정립할 수 있는 관계는 스승과 옛제자라는 것 뿐일터이니.

혜정이 좋아했던 역사 속의 여성들, 시몬느 보봐르와 루 살로메와 코코샤넬 그리고 윤심덕을 생각할 때와 같은 이미지가 국어선생님에게 있었다. 입시만 중요했던 고교에서 단지 귀찮은 일꺼리 밖에 안되었을 걸스카우트 대장을 맡으며 나름대로 아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싶어했던 분이었다. 수업시간에 단편적으로 흘릴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삶에 대한 메시지를 스카우트정신을 통해 알려주고 싶어했던 분이었다. 그분과 사상을, 철학을, 문학과 인간애에 대한 신념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랬지만 그 분에 비해 혜정은 너무 어렸다. 이미 열여덟이었지만 입시 외에 가르쳐준 것이 없는 학교에서 학생으로 머무르고 있는 혜정은 서른세살의 국어선생님, 결혼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과년한 여자의 하나일 수 밖에 없었떤 그 분의 곁에서 할 수 있는 일도 가질 수 있는 위치도 없었다.

선생님의 댁은 종암동에 있었다. 고려대학교의 국문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책에서 인세가 들어오지만 몇 푼 되지는 않는다며 거실에서 남동생과의 얘기를 정리하고 혜정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갓난아이가 누워있는. 표정없는 얼굴로 담담히 아기에 대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다는 얘기를 한다. " 내가 이렇게 매여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참 이상하게 느껴져. "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력으로부터. 선생님은 소개를 받고 3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그 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혜정은 더 이상 나눌 말이 없었다. 갓난아기가 누워있는 선생님의 친정집에서 광주를 얘기할 수도, 난쏘공을 얘기할 수도, 노동자파업을 얘기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이미 생각하고 논쟁할 수 있는 마음의 기지를 잃고 있었다.

혜정은 돌아와서도 갈 곳이 없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보다 더 나빴다.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다. 이 청춘의 나이에 3년 머슴살이처럼 요구받고 있는 수험생활을 끝내지 않고서는 만날 수 있는 사랑이 없다. 대입까지 남은 2년이 너무 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작중-열애중 2

혜정이 왔다. 마중나올 필요 없다며, 비디오는 주말에나 봐야지 어떻게 보냐고 해서 진은 그냥 집에서 기다렸다. 진의 집, 혜정이 고등학교에서 가까운 자신의 집을 지나쳐 중학교에 가기 전에 위치한 진의 집에 처음 왔을 때, 아니 처음 대문 안으로 들어왔을 때 무척이나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하는 듯한 얼굴이었던 걸 진은 슬며시 미소로 떠올리며 제 방 침대에 누워 잠시 쉬고 있었다. 안 가르쳐 줘도 혜정은 진의 집 주변을, 골목과 시장을 지나 비슷비슷한 지붕과 대문을 가진 단독주택들이 양쪽으로 늘어선 가운데서 익숙하게 찾아들어왔다. 진의 뒤를 밟기 전에 이미 동네에도 많이 와 본 듯한, 그러나 진은 짐짓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 한척 했다. 그 애의 쪽팔림을 모면하기 위해 흘리는 눈물이 무서웠다. 그 애와 이만큼 거리를 좁히는 것에도 힘들었던 6개월이었다.  도로아미타불로 만들 수는 없었다. 여름내 집에서 레즈비언과 관련된 책들을 읽다가 한낮에 훤히 드러낸 그 애의 목덜미를 보고 있는 것은 괴로웠다. 신장의 수치와 상관없이 균형잡힌 몸매를 갖고 있는 그 애는 옆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키가 작다는 것을 얼른 알아채기 어려웠다. 8등신이라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길고 가는 목은 8등신 미녀의 그것처럼 진의 눈길을 자꾸만 끌었다.

그 목덜미에 손가락을 대고 싶었다. 입술을 대고 빨아보고도 싶었다. 달콤한 맛이 느껴질까? 그 애의 가는 팔목, 작은 손아귀에 잡혀 애무를 받고 싶었다. 간지러울까? 따뜻할까? 한 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어깨를 안고 눕고 싶었다. 그 애도 자신도 아무 생각 없이, 말도 하지 말고 그 피부 속에 얼굴을 묻고 느껴보고 싶었다. 그 무엇인가를.....어떤 종류의 그 감정과 감정을 분출시키는 그 촉감을. 진은 머리에 떠오르는 책에서 읽었던 그 여자들의 생각들, 성적 환상들, 판타지처럼 가면을 쓰고 다가온 남자와 정사를 하던 여자의 숨결과 표정에 취해갔다. 그 녀들, 그 녀들의 흔들리는 유방, 한 팔에 감길 것 같은 허리, 욱씬하고 느껴지는 저 깊은 곳에서의 달콤한 통증... 그런 류의 영상이 머릿 속을 떠도는 와중에 자꾸만 손이 허리 아래로 가려는 것을 진은 애써 저지하고 있었다. 혜정이 보고 싶었다.

 

약간 상기된 채 집안으로 들어온 혜정, 가방이며 짐들을 내려놓고 가뿐해 진 몸으로 식탁에 앉는다.  반쯤 담아준 카레에 밥을 비벼 먹는다. 그 노랗고 걸쭉한 것을 한 방울, 가슴 언저리 옷깃에 흘린다. 물티슈를 찾아 지워주려 했지만 잘 안 빠진다. 그 애의 봉긋한 가슴 위에서 움직이는 자신의 손가락, 건반 위를 흝던 그 현란한 속도감을 그 녀의 가슴 위에선 완전히 까먹은 듯 느릿하기만 하다. 혜정은 얼굴을 붉힌다. 커피를 들고 방으로 자리를 옮겨 책장을 살펴본다. 그 애가 손을 뻗어 책장 아래칸에서 제 2 의 성을 빼어든다. 놀란 듯한 그 애의 옆얼굴.

 

" 좋아해 "

진은 혜정의 무릎꿇은 옆에 나란히 앉아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책을? 아니 너를.

" 키스하고 싶어. "

정면으로 그 애의 얼굴을, 그 애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은 나지막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물빛 눈동자가 크게 벌어진다. 그 애의 대답. 같은 거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 애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던 입술이 꾹 다물어져있다. 눈을 떠보니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혜정.

'" 눈 감아...눈 감아봐..."

진은 그 애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보지 못 했지만 자신의 입술에 따라, 자신의 혀가 건들이는 데에 좇아 조금씩 벌어지는 그 애의 입술 속으로 잠겨들어갔다.

 

그 애의 목덜미, 그 애의 봉긋한 가슴, 그리고 그 애의 가랑이에 자신의 가랑이를 매듭만드는 첫 손질처럼 겹치면서 진은 두근두근 가슴속을 흔드는 격정에 힘이 겨웠다. 자신의 허리 아래, 그 애의 다리 사이 작은 애기무덤처럼 봉긋 솟아있는 클리토리스, 클리토리스가 키스를 한다. 귀엽고 어여쁜 두 아이들이 뽀뽀를 하듯 광속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의 세포분열처럼 온몸을 휘돌아치는 혈관이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머릿속이 뻑 가는 듯, 생각을 문장이나 영상으로도 만들 수 없을 만큼 어지럽게 느껴지는 현깃증, 피아노건반 위에서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손, 손가락, 이보다 더 빠른 가속도를 느껴본 적 없었던 출렁이는 허리. 아래 쪽 외음부에서 진은 강하게 치오르는 오르가즘을 느꼈다. 진에게 자위같은 건 불필요한 연습인 것을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작중-열애중 1

가을이 깊어갈수록 혜정은 말 한 마디 더 하는 것이 인고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듯, 쪼그만 입술을 꼭 다물고 우울해했다. 플라타너스의 크고 마른 잎들이 차로변 인도를 끝없이 어지럽히고 뉴스에서 아직도 간간히 나오고 있는 노동자파업과 사상누각같은 기대를 부풀이고 있는 대통령선거에 관한 보도들 속에서도 스산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걷는 행인들은 내리뜬 눈을 들어올릴 줄 몰랐다. 학교는 코앞에 닥쳐온 입시 앞에서 부산한 긴장을 이어나가고 있었고 수험생들에게 주목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그들과 교대하여 고3생활을 시작할 자신의 2학년 담임반 아이들에게 선생님들은 공부보다 잔소리를 더 많이 하며 끝없이 스트레스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 혜정은 또 다른 종류의 심리적 외상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애의 뿌리깊은 열등감 혹은 트라우마는 초등학교를 늦게 들어왔다는 이미 오래 전, 그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었고 그리고 이제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과거의 사실에서 연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덧대어 성적에 대한 과중한 압박감, 동급생들보다 훨씬, 모든 면에서 뛰어나거나 특출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한데 대한 자격지심 그리고 87년,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흐름에 함께 하지 못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에 사로잡혀 갈수록 심각한 우울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 애의 고등학교는 총학생회장 직선제를 쟁취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주도한다고 알려졌던 3학년들에 대해, 혜정은 자신이 정상적으로 여덟살에 학교를 입학했으면 그들과 같이 뭔가를 하고 있었을 텐데 하는 미련 아닌 미련을 못 버렸다. 자기가 연루되지 못 한 그 어떤 곳에서 있었을 회합과 토론과 인쇄물을 만드는 긴장과 자긍심, 그리고 분명히 연관되어있으리라고 추측되는 국어선생님과 잘 만나지 못 하고 있는 상황까지도 혜정은 나이에 맞게 학교를 다니지 못 한데서 비롯된 불운이라고 생각하며 우울해했다.  가을, 바람이 계속 불어대고 산책을 하노라면 갈데없이 눈물이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어하던 혜정, 그 애를 보는 것은 그리 예민하지 않았던 진의 감수성을 쉴새없이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 애가 좋아했던 노래, 선구자와 보리밭을 흥얼거리는 것을 보고 그 음정, 박자와 상관없이 한정없이 처연해지는 그 애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따라서 감상에 젖어들었고 그 애가 눈물 어린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빼앗긴 들에도 봄을 오는가를 읊조리는 것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터질 듯, 어깨가 들썩일 듯하여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리로 나가야할 것 같았다. 대선의 패배와 운동의 일단계가 제한적 승리로 마무리되는 것을 예감하는 듯, 그래서 그와 같은 역사적 시기를 행동으로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을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쉬워할 것을 예언하는 듯 혜정은 그 87년의 가을이 가는 것이 싫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을이 지나는 것에 심장이 터질 듯한 애틋함으로 불안해 했던 것은 진도 마찬가지였다.

 

" 렛슨시간 더 늘린다고 안 했어? "

혜정은 평일인데 이번 주에 벌써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온 진에게 근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 응, 그러니까 내일은 안 가는 날이라니까.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놀러오지 않을래? 공부할 꺼 들고 와도 좋고. "

" 그래? 그럴까....야자 안 한다고 해서 공부할 데도 마땅챦긴 해. 근데 걍 놀다만 올 것 같은데..."

" 뭐 어때, 너 맨날 자기 전에도 공부한다며? 글구 담달부턴 독서실 끊을꺼라고 했쟎아. 좀 쉬엄쉬엄 해도 되지 않아? "

" 응, 알았어. 집에 안 들르고 바로 갈께. 저녁밥 먹여줄꺼지? "

" 그럼, 최근에 배운 카레라이스의 정수를 보여주지 ! 하하하 "

진은 냉장고에 감자와 양파와 당근이 있는 지를 확인했다. 고기보다 햄을 넣는 게 낫겠지. 육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 혜정은 그 졸깃함, 고소함, 육즙에서 나오는 단내같은 것에 취하는 것 같아 싫다고 했다. 그다지 음식의 맛에 민감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커다란 상에 올려진 한 접시의 고기반찬에 경쟁적으로 젓가락을 들이대는 것이 너무 민망스럽다고도 했다. 혜정은 지나치리만큼 경쟁구도에 놓이는 것을 기피하고 그래서 항상 뒷줄이나 열외에 서 있기를 자처하곤 했다. 그래도 햄을 좀 먹어줘야지...하고 생각하며 진은 슈퍼에 가서 햄 하나, 맥주 두 병, 그리고 오징어땅콩 과자를 샀다. 비디오가게에 들러 영화도 하나 빌릴까 하다가 그건 혜정이 오면 함께 가서 고르는 게 나을 듯 싶었다. 그 애의 영화 취향을 진은 잘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도 은근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 애가 감명깊게 본 영화가 인도로 가는 길이라고 해서 얼마 전에 빌려봤지만, 뭐가 재밌다는 건지...편하게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 후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애가 무얼 고르든 진은 가치있는 시간이 될 것은 분명하리라고 생각하는 진이었다.

엄마가 공부방의 책임자로 있게 된 후, 저녁식사는 진이 혼자 먹는 일이 많아졌다. 동생에게 밥을 안 차려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수는 굳이 엄마의 공부방으로 가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거기서 공부하다가 엄마와 같이 집에 돌아오곤 했다. 친구들과 붙어 어딘가로 싸돌아다니지 않는 한 늘 그랬다. 왜? 밥 먹고 설겆이하는게싫어서? 그렇든 어떻든 진은 동생에 대해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혜정과는 반대로, 나이보다 일찍 학교에 입한한 이수는 남자애들의 세계에서 또 다른 종류의 곤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이 참견하기엔 너무 먼 세계였다. 그의, 남자애들의 그 조숙한 척하는 몸짓들이 보기 싫은 것도 한가지 이유이긴 했지만.

카레라이스 봉지 뒤에 써 있는 조리법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읽어보고 냉장고 문쪽으로 넣어두었다. 할 때 마다 읽어보지만 정말 단순한 조리법이었다. 이걸 왜 혜정의 국어선생님은 실패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을 팔팔 끓여서 썰은 감자랑 당근이랑 양파랑을 확 들이부었다가 화악 끓어넘쳐 낭패했다는 그 여자의 요리실패담을 혜정에게 전해들으면서 그 여자는 자신이 요리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돌봐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넌즈시 알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설마 혜정이 국어선생님 집에까지 찾아가는 건 아니겠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3

진은 자꾸만 혜정을 보고 있고 싶었다. 그 애를 살폈다. 그 애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 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 찬란한 봄, 말 수 적은 혜정의 입을 벌려 소리를 듣고 싶었다.

편지, 그런 걸 쓰지 말라고 말하고 차가운 밤, 꽁꽁 언 손으로 선물 상자 따위 들고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한 마디를 하면, 자신은 그 열배로 돌려주고자 했다. 왜 그러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허락된 청춘의 시간은 얼마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애가 자신의 서툰 말주변에 금방 눈물을 떨어뜨리자 감히 더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초컬릿이 동경인지, 그 애의 고집스럽게 빛나던 눈에 정원에게서 봤던 것같은 욕망이 숨어있는지 진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확인이 안 되는 채로 자꾸만 가고 있는 시간이 아쉬웠다. 그 애를 만나는 것은 한 달에 한 번도 어려웠는데 그 시간을 인내하기에 자신의 마음 속, 자신의 허리, 그 팔딱이는 심장은 너무나 빨라진 가속도에 휘둘려 제 것으로 갖고 있기도 벅차했다. 이런 속사정에 아랑곳 없이 혜정은 외박을 아주 장기로 해대고 있었다.

 

" 그럼 언제 오는데? "

" 토요일, 5박 6일이라니까. "

" 잠은 ? " 응? 하고 되묻더니 혜정, 막 웃으며 스카우튼데 당근 텐트지 한다.

" 봄에 오리엔테이션 엠티할 때 텐트 치는 법이랑 다 배웠다니까. "

" 니가? 각자 자기 텐트 치고 잔다구? "

" 아니, 애들이랑 같이. 그리구 남자애들이 많이 도와줘."

아, 그래 보이 스카우트...그 보이들 말이지....

진은 머릿 속에서 동급생들과 함께 떠들어봤던 여성잡지에서 해변가에서의 사고 어쩌고 하는 기사들과 함께 모자이크처리된 남녀의 사진에 배경으로 있었던 텐트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 내가 왜 이러나, 요즘 너무 까십에 민감해진 듯 싶다....

뭐라고 당부하기도 멋적어 진은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응, 하고 혜정은 말하면서 어차피 자신은 체력이 딸려서 등반할 때마다 맨 뒤의 가드한테 꼬챙이로 찔리면서 올라간다고, 그래서 혼자 뒤처지거나 다치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진은 그 가드가 보이일까 스카우트대장이라는 그 선생님일까하는 생각을 하며 대체 누굴 조심하라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다지 친구가 많지 않은 혜정이 같은 반에서의 몇 명과 겨우 어울릴 뿐 스카우트활동에선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서 굳이 적성에도 안 맞는 지리산종주같은 걸 따라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지만 자신이 가타부타 할 순 없는 일이고.... 그렇게해서라도  끈질기게 자꾸 보고 싶어하는 혜정의 그 국어선생님이 더 맘에 들지 않았다. 혜정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는 생각보다 나이가 있어서 77학번이랬던가? 암튼 노처녀였다. 처녀총각 선생님들에게 한 번씩은 꼭 하는 " 선생님, 애인 있어요? " 하는 질문에 그 여자는 애인은 없고 남자친구는 있다면서, 그 친구와 10년 이상 오래전부터 사귀고 있다고 근데 너무 오래 사귀어서 결혼하자는데 도저히 어색해서 못 하겠다고 그랬다고 말했다고.... 한다. 허참, 어색해서 못하겠다니...그래서 결혼 안 하고 계속 제자들하고 독서토론이나 하면서 살겠다는 건지....진은 그 선생님이 요즘 대학가에서 많이 부르는 노래라면서 운동권가요같은 걸 혜정에게 적어준 걸 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여자는 학생운동을 했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신주의자인 것 같았다. 혜정은 그 선생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얘기하는 것같은 분위기로 얘기하곤 헀다. 그래? 그 여자를 사랑하니? 이 혜정? 진은 그냥 웃으며 넌 왜 다른 애들처럼 젊은 총각선생님을 안 좋아해? 했더니 좋아한다며, 지리선생님이랑 영어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한다. 둘 다 총각이라고. 지리선생님은 좀 못 생겼지만 그 선생님이 수업 중 간간히 흘리는 이야기들에 많은 걸 느낀다고. 영어선생님은 수업 밖에 안 해서 잘 모르겠지만 진짜 잘 생겼다고. 아이들이랑 같이 가 본 그 선생님의 자취방이 너무 누추해서 근처 슈퍼에서 우유랑 간식꺼리를 사서 문 안에 살짝 놓고 오기도 했다고 주절주절 얘기한다. 갈수록 태산이다. 고등학교 들어와 안하던 짓을 하는가 싶었더니 아주 세게 나간다.  그래서 남친도 만드셨나...

하지만 의외로 혜정은 그 길거리헌팅을 자신을 주도하여 자기의 패거리들에게 각각 보이프렌드가 하나씩 생긴 것에 대해 아주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 애리가...그 후까시랑 계속 만나나봐...다른 애들은 나이트 한 두 번 가고 다 땡쳤다는데, 애들이 별로...모범생같지도 않고... "  혜정은 저의 친구들은 이성교제에 그리 열심이지 않다고, 친구들끼리 놀고 같이 공부하고 그러는 걸 더 좋아하고 연애는 대학가서 ! 라고 다들 정하고 있다고 한다. 근데 그 애리란 애가 아빠가 좀 가정폭력이 있고 해서 가출하고 싶어한다고, 그리고 예뻐서 남자애들이 좋아하는데 그 짝궁된 남자애랑 사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만약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미팅을 주선한 자기는 너무 괴로울 것 같다며 불안해 했다.  진은 그러나 그 것보다 혜정의 그 짝궁- 미팅에서 소지품줍기같은 걸로 짝짓기한 남자애를 이렇게 표현하는 혜정이 웃기긴 했지만 - 은 어떻게 되었나가 더 궁금했고 걱정스러웠다. 아닌게 아니라....혜정도 그 남자애가 하도 따라다녀서 애를 먹고 있었다. 집 근처까지 와서 엄마, 아빠한테까지 걸려서 인사까지 했다는 것이다. 혜정의 부모는 의외로 걱정이나 야단보다, 개랑 결혼할꺼냐면서 웃었다고 한다. 애는 괜찮아보이네 어쩌네 하시며....  아주...가지 가지해요,.. 그래서 어쩔건데? 했더니 빨리 정리해야지. 갠 왜 그리 말귀를 못 알아먹는지...참....하면서 혜정은 진심으로 걱정스런 표정을 한다.

이 모든 상황을 미루어보건대 진은 혼자 방에 앉아 고심에 차서 정리를 시작했다.

그 국어선생님은 독신주의자거나 레즈비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혜정도 남자들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뭘 모르거나 아니면 레즈비언의 경향성이 농후하다.....

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보니 더 맘이 다급해졌다. 그럼 자기에 대한 혜정의 감정은 뭔가?  남자에 대해  아직 모르는 거라면 자긴 아예 해당사항 없고,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치면 그 국어선생보다 못 한게 아닌가? 이런...젠장....3월부터 7월까지 공부도, 피아노도 건성건성하면서 소녀경이니 제2의 성- 그 책은 너무 두껍고 어려워서 겨우 2부의 레즈비언편만 열심히 봤을 뿐이지만....- 을 탐독하고 어여쁜 클리토리스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을 키워온 건 뭔가 되나?  말짱 도루묵?  설마 좋아하는 애도 있는데 이 시점에서 자위하는 법이나 배워야 한단 말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2

" 진아, 왜 그래, 별 일도 아니쟎아. "

정원이 빠른 걸음의 진의 곁을 동동거리며 쫓아오며 말했다.

" 응, 지금 화내는 거야? 나한테? 그러지 마, 너두 알쟎아, 이런 거..."

진은 우뚝 멈춰섰다. 자신의 눈 바로 아래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는 정원의 얼굴, 그 처연히 맑은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뭘? 뭘 알아야 하는데? 내가...

" 이거...설마 모른다고 하는 건 아니지? "

정원은 여전히 맑게, 꿰 뚫을 것같은 투명함을 내비치며 진을 올려다보고있다.

" 넌 안 해?  자위...다들 해, 하쟎아. 그걸 좀 같이 한 거 뿐이야. 뭐 그리 나쁜 일도 아니쟎아. 안 그래? "

그래? 그런가? 진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진은 해 본 적 없었다....

그 단어를 모르는 건 아니었고 그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닌것 맞다. 하지만 이게 그런 건가? 그게 대체 뭐지?

" 진아...왜...날 부끄럽게 해.... 넌 여자가 자위하는게 나쁘다고 생각해? 그런거야? "

나쁘다...그 말은 옳다라든가 정당하다라는 말의 반대말이 아닌가? 그런 식의 술어와 연관시켜 본 적 없다.

" 생리적인 거야. 너무 많이 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일상생활에 지장받을 정도만 아니면 괜찮다고, 그냥 자연스러운 거라구....넌 그렇게 알고 있지 않아? "

" 알았어. 그냥 좀 놀랜 것 뿐이야. 알았으니까 그만 해. "

진은 정원과 빨리 헤어져 집으로 가고 싶었다.

정원은 5학년 때부터 자위를 해왔다고 말한다. 자기도 중학교 때는 이런게 나쁜 건 아닐까  병이라도 걸리는 건 아닐까 무서운 생각이 들었었다고. 하지만 상담실에서 어렵게 " 자위하는 거 안 좋은가요? " 하고 물어보니 선생님이 괜찮다고 너무 많이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그랬다고 한다. 여자아이들 뿐 아니라 남자아이들은 더 많이 더 자주 하고 서로 그런 얘기도 많이 한다고, 이상한 비디오 빌려서 같이 보면서도 막 그런다는 얘기를 막 한다. 내가 무슨 사춘기 성교육 받는 중딩이냐......진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사실 자기가 성교육이라고 받은 건 중2때 가정시간에 슬라이드로 아기 낳는 걸 보여주면서 설명해 주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수정란이 생겨서 자궁에 착상해서 어쩌고 하던 것 밖에 없었다. 그림으로 그려져있던 자궁의 기이한 모양, 나팔관 어쩌고 하는 그저 모양을 따서 붙인 명칭이 좀 우스웠다는 기억, 그리고 어떤 외국여자가 고통스럽게 출산을 하는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영상....그 어둠침침한 시청각실에서 아이들은 놀라움과 무서움을 느끼며 괴성을 질러댔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남은 건 애 낳는 건 너무 아플 것 같다는 공포,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정원의 말대로라면 그 시절, 그 때에도 애들은 자위를 하곤 했던 걸까? 근데 자신은 왜 그걸 몰랐을까? 아니 왜 아까 그 정원이 하던 것 같은 그런....자신의 음부에 손을 대는 그런 행위를 해 본적이 없었을까....정원의 말처럼 아주 어린아기들도 본능적으로 자위를 한다면 나는 왜? 내가 그냥 좀 남자같은 게 아니고 뭔가 문제가 있나? 하지만 정원이 " 넌 안 해?" 라고 말했을 때 진은 본능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그 느낌을 모른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여자애들이 소근소근대는 사랑이니, 키스니, 섹스니 하는 얘기들은 최근 들어 훨씬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을 진도 곁에서 들어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진지하게, 영화에서 키스하는 걸 잘 보라구, 우리나라 배우들 말고 외국배우들이 하는 걸, 턱을 움직이지 않냐고 입술을 벌리고 있지 않냐고...혀를 넣어서 하는 키스를 프렌치키스라 그러는 거라구 누군가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 백설공주나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부등켜안고 있는 모습 밖에 모르는 여자애들은 아냐, 그럴리가, 더럽게시리... 하고 반박하기도 했지만 번번히 비웃음을 사곤 했다.

진은 기억을 더듬어 훨씬 더 어렸을 때 삼촌이 잠시 얹혀살 때 혼자 들어가 본 그의 방바닥 자리밑에서 발견한 얇은 소설책 같은 걸 읽었던 생각을 했다. 여자의, 아마 소녀의 벌거벗은 몸에 대해 묘사한 글들이 있었다. 부드럽고 하얀 허벅지라든가, 그 깊은 골짜기의 샘이라던가 뭐 그런 표현들을 봤던 것 같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리고 들끼면 안될 것 같아 다시 그 자리에 살며시 끼워두고 방을 나왔었다. 아무한테도 그 얘기를 한 적은 없었다.

엄마는...엄마는 왜 내게 이런...아니 성교육을 시켜주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이 슬쩍 들었다. 엄마는 항상 부드럽고 포용적이었고 동생 이수와 차별을 두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었다. 어릴 때는 안아주기도 했지만...그다지 스킨쉽이 많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진은 갑자기 엄마가 궁금해졌다. 벌써 전부터 별거 중이었다. 외박을 한 일도 없다. 엄마가 애인 비슷한 관계의 사람이 있다고는 상상되지 않았다. 엄마는 자기 일에 열심이었고 자기 생각에 확신을 갖는 사람이었다. 생활에 있어 무척 스탠다드한, 반듯한 기본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성을 모른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자기를 낳았고 몇 번이나 임신을 했는데.....가정시간에 배운 바에 의하면 임신에 성공하려면 배란기를 맞춰야 하고 뭐...암튼 섹스를 많이 해야 한 번씩 아기를 낳는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 혼자 잠자는 우리 엄마는 성생활을 어찌 하시나? 역시 자위? 그런가? 언제? 밤에? 그래서 자기는 전혀 몰랐을 수 밖에 없었을까? 하지만 내가 밤중에 깬 것도 여러 번 있었는데.....그 땐 안 했나?

진은 어쨌든 엄마도 자위를 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누구나 생리적으로 하는 거라는데....그건....땀을 많이 흘리는 일 같은데.....어떤 기분일까....정원은 뭔가 무척 좋은 듯, 흡족함을 아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감정, 아니 감촉인 것처럼 보였다. 정원과 같이 다니기 시작한 지난 6개월 동안 이렇게 전혀 공감이 안 가기는 처음이었다. 진은 밤새 뒤척였다.

 

그 후로 정원이 다시 그런 행위를 보인 적은 없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하지만 그 전보다 정원은 훨씬 더 붙어다니려 했고 같이 걷거나 나란히 책상 앞에 앉을 때면 손을 잡거나 팔을 걸거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등 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겹치며 간질이거나 하는 행동을 자주 했다. 진은 주변에 아이들이 없을 때면 또 다시 키스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상하게 눈 앞에 자꾸 어른거리는 정원의 붉은 입술을 보면서 하게 되곤 했다. 피곤했다. 이런 생각을 자꾸 자꾸 하고 있는게. 일일찻집 앞에서 혜정을 보고 난 후 부터는 피로감이  배로 커진걸 느끼며 골치가 아프려 했다. 아이들이 슬쩍슬쩍 넘겨보던 사진이 많은 잡지를 등너머로 훔쳐보기도 하고, 누구네 집에 언제 모인다는 쑥덕거림에 한번 끼어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이들이 자기 눈 앞에서 잡지를 숨기지 않았다면, 자기들 얘기를 진이 들었나 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았다면 자신도 자연스럽게 한 마디쯤 던져볼 수 있었을 텐데....아쉬웠다. 그리고 어느 겨울밤, 동생 이수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새어나오는 숨소리, 그 가쁘게 헉헉대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얼른 제 방안으로 뛰어들려다 조금 더 방문 앞에 머물렀던 일이 있고나서 진은 이젠 화가 나려 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책을 구해야 할 지, 누구에게 물어야 뭔가를 볼 수 있을 지 답답하기만 했다. 이런 얘기....상담이랍시고 엄마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엄마는, 너무 고결해 보였다.  그러면 정원에게? 진은 정원의 스킨쉽도, 솔직함도 그리고 그 혀를 넣는 키스의 기억도 싫었다. 왠지 모르지만....그 남자애들과 손을 잡았을까? 그리고 또 뭔가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보고 싶었다. 혜정...그 애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1

고등학교와 중학교는 달랐다.

아니 좀더 편협하게, 여중과 여고는 많이 다르다.

아이들의 태도도, 말도, 행동도.

정원은 처음부터 다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수업 중에 옆얼굴이 따갑다 싶으면 여지없이 빤히 보고 있는 그 눈과 마주쳐야 했다.  입학식 후 자리를 정하기 위해 복도에 일렬로 섰을 때도 정원은 맨 뒤에 서 있다가 선생님의 손짓에 마지못해 앞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선생님은 재가 수즙음이 많아 그런가? 하며 그럼 뒷줄에 앉으라고 했다. 교실의 맨 뒤에서 두 줄 앞의 좌석을 차지한 정원,  진의 얼굴을 옆으로 돌아보면서 수시로 미소를 지어보인다.

" 나랑 친구 해. 우리 같은 중학 출신이쟎아. "

" 모르던 사이도 아닌데, 뭘 새삼스레? 그래 잘 지내보자. "

중학교 합창대회에서 지휘를 도맡았던 정원과는 같은 반이 아니었어도 피아노반주 땜에 이래저래 얼굴을 익혀온 사이였다.

" 그럼 이제부터 나랑 같이 다니는 거다. 알았지? "

정원은 '나랑' 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 애가 날 좋아하는가 보군. 진은 담담히 생각했다. 가벼이 취급하는 건 아니지만 비교적 익숙한 경험이었기에. 여자아이들은 원래부터도 자주 패를 지어다녔지만 개중에는 초등학교 때처럼 단짝을 만들어 꼭 붙어다니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고등학교 오면 좀 달라질까 했더니?

여느 아이들처럼 쪽지를 보내거나 사소한 볼일들을 만들어 말을 붙이거나 아니면 멀리서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는 그런 류의 행동을 정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밖에 나가 놀던 자기집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처럼 " 진아, 가자. " 라고 말하며 팔짱을 끼고 앞서 나갔다. 당연한 듯 와서 도시락을 펼쳤고 오래 사귄 벗처럼 자연스럽게 동행했다. 처음에 진은 같은 중학 출신이니까 편해서 그러려니 했다.  사실 그렇기도 했다. 정원이 그리 친한 티를 내자 고교에 와서 처음 만난 아이들은 쉽게 친구의 자리를 만들어오지 못 했다. 좀 더 어렸을 때처럼 그저 호쾌하고 성격좋은 친구가 편하고 좋아서 잘 어울려다니는, 그런 단순한 마음으로 진을 바라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런게 아닌 척을 못 하는 여고생들에게 정원은 내 친구에게 딴 맘 먹지 말라는 듯,  죽마고우인 자신의 자리 외에 더 만들 자리는 없다는 듯 고개를 높이 들고 두 눈을 휘 둘러보며 진의 곁을 지켰다. 덕분에 진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 했다. 아니 정원이라는 새로운 친구 외에  다른 기회를 얻지 못 했다.  정원의 '나랑' 이란 실인즉 '나랑만'이라는 뜻이었지만 진은 그걸 예민하게 파악하지 못 했다. 늘 절친한 여러명의 친구가 있었을 뿐 단짝을 갖지 않았던 지난 과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원이 그 단짝의 자리를 자처하고 나섰고 새로운 학교,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선점에 성공하자 단숨에 고착화시켰다.  진에게 친구들은 계속 생겼고 그 중 몇 명과 더 친해졌지만 그들은 정원보다 더 친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진과 친해질 시간과 공간을 허락받지 못 한 주변부의 아이들,이를테면 교실에서 비교적 먼 곳에 앉아있는 키작은 여자애들과 윤 진과 클라스메이트가 되는 행운을 얻지 못한 불행한 소녀들은 진과 그의 친구들을 부러워했으나 정작 그의 친구들은 자신이 주변부에서 바라보는 여자애들과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특별한 위치는 오직 정원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건 이미 오래된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직 학기초였고 진의 생일을 알기에는,  알아도 선물을 챙기기에는 마음의 시간이 부족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정원은 교실에 화려한 꽃다발을 안고 들어섰다.

" 어머나, 예쁘다 ! " " 얘, 뭐니, 이거? 어느 선생님 줄껀데? " " 오늘 무슨 날이니? " 

여고생들은 한마디씩 하며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어느 선생님에게 주던 우리반에서 주는 거니 함께 자랑스러울 수 있으리라...정원이 이쁨을 받는대도 제 일처럼 기뻐할 것 같은 얼굴로 모여든 얘들에게 정원은 " 응, 오늘 진이 생일이쟎아. 내가 케잌도 주문했으니까 이따 점심시간에 같이 파티하자. "  하고 말했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그러자고, 케잌이 수위실에 도착하면 자기가 가지러 가겠다는 둥 책상을 붙여서 과자랑 음료수를 더 사다 놓고 하자는 둥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개 중에는 왜 진이의 생일을 미리 알아두지 않았을까,  괜히 망설이지 말고 선물이랑 준비할 껄, 점심시간에 나갔다 와서 이따 집에 가기 전에 주면 안될까 하는 등의 생각으로 낭패감을 느끼고 있는 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차려진 젯상에 상돈 올리는 격 밖에 안 되는 지라 아예 몰랐던 척 축하나 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진은 채 다 알지도 못 하는 동급생들이 차려주는 생일상에 감격해했다. 보다 더 즐겁고 활기찬 분위기에 함께 신나했다. 그리고 꽃다발을 받으면서 " 고마워" 하고 말했고 그러면서 다시한번 정원을 쳐다보았다.

그 후로도 진의 반에서는 모둠을 지어 생일파티를 하는 일이 없지 않았고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술 마실 껀수의 하나로 누군가의 생일을 차용해오기를 자주했지만, 윤 진의 퍼스트는 정원이라는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진 자신에게도 말이다.

정원은 예쁘다라고 말하면 시샘하는 맘이 아니고서는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외모의 여학생이었다.  긴 생머리를 항상 등언저리까지 정갈하게 빗어내리고 다녔고 티나지 않게 화장한 얼굴에 잘 다듬은 눈썹과 밝고 화사한 뺨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톰하니 육감적인 입술은 건강한 붉은 색이었다. 중학시절 단발머리의 정원이 한 학급의 아이들 전체를 앞에 두고 카라얀처럼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두 팔을 활짝 뻗으며 지휘봉을 휘두르던 모습을 진은 알고 있었다. 빨간 마이에 타이트 스커트를 입고 아가씨들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다리를 보이는 단상 위에서 지휘하는 그 모습에선 사뭇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 때에 비하면 정원은 다소 얌전 아니 차분 아니 참해졌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크게 웃지 않고 한 손을 입술 가까이로 올리며 웃기도 한다. 분명하게 레이스나 핑크색, 예쁜 소품들에 대한 선호를 나타냈고 가방이나 옷가지에 그런 취향을 살리고는 했다. 정원에겐 꽃, 오완식 커텐, 푸짐하고 질 좋은 돈까스 그리고 붉은색 포도주가  어울리는 그런 이미지가 있다. 정원의 구김살없는 웃음,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거칠것 없다는 듯 큰 목소리, 호감을 표시하고 또 보답받고자 하는 분명한 기대와 요구, 그런 솔직함과 애교스러움을 진은 좋게 보았다. 정원과는 분식점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어야 했고, 동대문보다 명동을 가야 했으며 달에 한 번씩 영화를 보다가도 가끔은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기도 해야 했다. 봄날 다사로운 해 아래 정원과 손을 잡고 학교에서 버스정류장에 이르는 가로변의 부띠끄 앞을 지날 때, 살랑이는 치맛자락이며 투명한 망사리본 따위에 이끌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정원에게, "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 하며 진은 캉캉스타일의  풍성하게 펼쳐지면서 발등까지 내려오는 하얀 치마를 사 주었다. " 어머, 정말이야? 그래도 돼? " 하며 정원은 기쁜 듯 햇살같이 웃었다.  진은 귀엽고 또 예쁘다고 생각했다. 당장 다음날 학교에 정원은 그 치마를 입고 왔다. 너무나 눈에 띄는 그 치마를 이틀 더 입고 왔으나 생활지도부 선생의 부드러운 지적이 있은 후 " 진아, 아무래도 이 옷, 여기서는 못 입을 것 같아. 나중에 놀러나갈 때 입어야겠어. " 하며 그렇지만 정말 우아하고 멋진 옷이라며 이걸 입고  함께 파티같은 데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맞아, 네겐 파티의 공주님이라는 자리가 어울린다하고 진은 생각했다. 이렇게 순진하게 웃는 모습은 언제까지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도.

정원은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멋지고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 것 같았다. 지금은  정원에게 그런 기사와도 같은 역할을 자신이 해 준대도 그건 그것대로 즐거운 추억이 될 꺼라고, 그리 생각하는 진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여고생들은 좀 더 어렸을 때와는 아주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예전처럼 여럿이 함께 다가오기 보다 자기 혼자만을 봐 주기를 원하는 듯한 속내를 자주 흘리고 있었다. 진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하고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일세하는 맘으로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원이라면 조금은 얘기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예쁜 아가씨는 소중히 대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조금 멍청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정원은 순진하게 웃을 때면 야, 바보같아 보여 하는 핀잔을 자주 받곤 하였다. 얘기를 오래 나누다 보면...한 번에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생각을 못 하기도 해서 좀 천천히 정리하면서 대화를 해야 하는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떠랴, 이쁜 것이 공부도 잘 하면 미움받는다고 정원은 그다지 성적이 좋게 나오는 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엔 재능이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팝송과 함께 클래식도 혼자서 잘 듣는 편이었다. 함께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러 가서는 똑같이 좋아하는 오페라에 환호했고 그 웅장함에 감동했다. 살리에리의 분노와 자괴감에 공감하는 마음도 함께 나누며 우리, 음악가의 길을 가는 것에 좀더 진지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며 같이 심각해지기도  했다. 정원은 언젠가 자신의 바이올린에 피아노반주를 부탁하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의 꿈을 얘기하기도 했다. 정원이 여고에서의 진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친구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사실인 듯 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정원과 진이 둘 다 자주 가는 음악실, 그 어스름한 오후의 인적없는 공간에서 그들이 함께 깜박 잠이 들었던 때에 일어난. 진은 여기서 오래 자면 안되는데....정히 선생님이 늦을 것 같으면 그만 연습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야지...정원이는 어쩌지, 데려다 주고 갈까....하는 생각을 얕은 잠 속에서 계속하고 있었다. 음악실의 기다란 의자가 등뼈와 쇄골에 부딪혀서 불편하기도 하고 또 좁기도 했다. 시체처럼 차렷 자세로 눕기에도, 옆으로 돌려 누워있기에도 불편해서 한 손은 허리께에 다른 한 손은 이마 위에 올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피곤함이 느껴진 그러나 여느날과 별로 다르지 않은 평일이었다. 아, 컨디션이 안 좋다며 생리때가 되가는 것 같다던 정원 땜에 피로감이 전염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문득 진은 지금 자기손이 어디로 떨어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이나 아니면 이마 위에 올리고 있던 팔이 좁은 장의자에 누워있다보니 스르륵 밑으로 떨어졌나 보다. 근데 이 의자 아래에 있는게 뭘까......부드럽고 따뜻한, 어린 시절 엄마의 젖가슴에 손을 넣었을처럼 쑤욱 미끄러지며 손바닥에 느껴오는 이 온기는? 어린 강아지의 턱밑을 간질었을 때와 같은 이 가실한 감촉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손끝마디마디에 물렁한 듯 단단한 듯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열기는?

진은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누운 옆에 무릎을 꿇은 듯 풀어헤쳐진 가슴이 보였다. 유두, 붉게 팽창한 유두와 함께. 그리고 자신의 한 손과 함께 아래로 쑥 들어간 채 가늘게 떨고 있는 팔꿈치, 튀어오른 혈관과 뜨겁게 맺혀있는 땀방울을.

정원은 잠깐....잠깐만.... 조금만 이대로 있어 줘...하고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러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듯 진의 손등을 꽉 부여잡은 채 힘껏 흔들어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의 깊은 한숨, 이마에 맺혔다 떨어지는 땀방울을 얼굴로 받으며 진은 자신의 손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뭐라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떠오르는게 없었다. 진은 이게 뭐지? 이게 자위? 그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고마워...하는 정원에게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쳐다보던 여자아이들의 그 눈빛에 담긴, 작년과는 다른 그 알 수 없었던 느낌이 바로 이런 거였나 하는 생각이 확신처럼 들었다. 정원의 축 늘어진, 그러나 뜨거운 물에서 건져올린 오징어숙회같은 입술이 누운 채로 멍해져 있는 자신의 입술 위를 덮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9 금 혹은 보안사항임

원래 쓸라구 했던게 이게 아닌데, 삼천포로 빠졌다.

동화창작반에서 동화창작을 할라니 당췌 떠오르는 게 없어 어린시절 친구 얘기를 쓰다가 사춘기시절 좋아했던 여자애가 생각나서 한참 생각하다 보니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 전부 여자들이라.....내가 레즈비언인가 하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ㅎㅎㅎ 솔직히 초등학교 동창생은 오래 붙어있긴 했지만 걔가 좋았다기 보다 걔가 주는 크라운산도가 좋았고 걔네집에서 놀 때의 편안함을 좋아했었으니 열외다. 내가 정말로 좋아했던 윤.  정말 오랫동안 맘 속에서만 살았던 이였다. 만화책에 간간히 나오던 동성애 코드 땜에 정말 푹 빠져들었다. 중학시절 친했던 두 친구, 고교시절 사춘기의 절정에서 많은 걸 나눴던 한 명의 친구와 한 명의 선생님, 아 그 선생님이야말로 좋아했던 것에 더해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운동은 대학에서가 아니라 그 선생님이 빌려준 사회학 관련 서적을 통해 내 의식에 각인되었었다. 그 후로 내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 없다. 오히려 내게 비판의 주표적이 되었던 선배들 몇 명이 있었을 뿐이고 덕분에 대학생이라는 신분과 스펙을 내 인생에서 삭제하는 데 톡톡히 공헌했던 걸로 기억된다. 하지만 노동자 생활에서는 막판에 함께 투쟁했던 동지를 한 명 친구로 건져내어 지금도 돈독히 지낸다. 흠...그 친구를 포함해서 내가 좋아했던 이들은 모두 여자들이다. 아, 남편을 포함해서 사랑할 만한 남자를 만나지 못 한 것은 내가 너무 잘나서였을까 내가 너무 까칠해서였을까.  여성해방이 이룩되지 않는 한, 남자를 인생의 의미로 사랑하기는 힘들 것 같다. 걍 하던 대로 여자를 사랑해야겠다.

 

ㅋㅋㅋ 그래서 내가 진짜로 쓰고 싶은 것은 여자를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남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는 장 정일 이후 정말 지겹도록 보았고 이젠 주말마다 티비에서도 보고 있다.

삼천포로 빠진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보안에 걸릴 것이 많아서 또 현재진행형의 사람들과 연루되니 더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즐겁지도 않다.

두근 두근 즐거울 게 분명한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진보넷 블로그라 써도 될 지 걱정스럽다.

게다가 19금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으니...걍 문 닫고 숨어서 써야 할라나....ㅎㅎㅎ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