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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민하기...

무섭다.

사는 게, 내가 주도하기는 커녕 정상적인 소통도 하지 못 한 채 휘둘려사는 이 삶의 방식이 싫다.

남편은 가사에 치여 짜증부리는 내게 그럼 이혼하라는 말이나 던지면서 화나게 하지 말라고 내 입을 틀어막는다.

그와의 이혼, 별거 혹은 투명인간처럼 무시하고 살기... 이 중에서 고민하느라 하루밤 하루낮을 또 보내고 있는 와중에...

한 예슬보다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이겠다는 듯 고교를 자퇴한 18세 민 다영씨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 자신의 학창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 할 것을 알면서 이 사회의 체제내적인 삶에 진입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몰랐던 것이 아닌데,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라는 것을 대학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타의에 의한 독신주의자라고 공언해 왔으면서, 대학도 자퇴했던 내가 왜 결혼이라는 무덤을 용감하게 들어간 것일까...그리고 이제와서 내 인생도 당당하게 살지 못 하고 있는 판국에 딸들의 인생이 이 체제 속에서 길들여갈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도시를 떠나는 것, 그건 단순히 공기 좋은 시골을 찾아간다는 것 이외에 훨씬 많은 것을 함축하게 될 수도 있겠다.

교육적 이주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대안학교나 혁신학교를 찾아 땅과 집을 구하는 것, 생계와 조율이 안 되어 한시간 이상의 통근거리를 감수하거나 아니면 국내에서 기러기아빠가 된 사람들도...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내가 양평으로 가자는 것에 남편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일축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형제가 있는 전라도로 가고 싶어 한다. 일견, 그도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지난 여름, 휴가 대신 늘 가는 시부모님과 시아주버님의 집에서 형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60호였던 마을의 가구 수는 30여 호로 줄어들었다 한다. 그 중 아이들이 있는 가구는 형님네를 포함하여 두 집 뿐이었다. 시골에서 셔틀버스를 타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조카들은 아침 8시에 나가서 11시에 들어온다, 한밤중에 말이다.  열 댓명 있는 학급에서 10등을 왔다갔다 하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교 정문에서 픽업해서 밤 10시까지 국영수를 반복하다가 20키로를 달려 집앞에 떨구고 가면 형님은 5시에 일어나서 9시에 잠드는 시골생활의 리듬을 깨고 한밤중에 자다말고 일어나서 아이들의 간식꺼리를 챙긴다.

나는 정말이지...어이가 없었다. 지난 여름, 유심히 지켜본 시골살이 10년 차의 형님과 조카들의 생활을 보면서.

 

형님은 서울이 고향인 사람이다. 의류공장에서 미싱을 하다가 같이 미싱을 하는 큰 시누이의 소개로 결혼을 했다고 한다. 딸을 셋 낳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나서 남편은 정관수술을 하고 왔다고 한다. 건축현장의 소장인 남편이 허리를 다쳐 시부모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연년생의 아이 넷을 거느리고 남편 수발을 할 수 없기도 했겠지만...이후 계속 시골에 눌러 살게 되어 세 아들 중 두번 째이지만 큰 며느리의 역할을 홀로 다 하고 있다. 집에는 두어달에 한 번씩 오는 남편이 전국의 공사현장을 떠돌다 보니, 기실 아이 넷을 키우는 것도 혼자 감당해야 할 판이니, 형님은 도대체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어 시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하긴... 나도 아이 둘을 키우면서 평범한 노동자인 남편의 월급으로 두 아이 키워내기 벅찬 걸 느끼면서 아이 넷을 데리고 서울에서 살기는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아이들이 경쟁 중심의 공교육 체제에서 자라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데에 반해, 그 공교육도 변변히 다니지 못 하여 장학금 받고 다닌 기숙사형 공고를 졸업하자 마자 생계전선에 뛰어들어 마흔 네살의 지금, 25년 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은...아이들의 피아노학원비도 아까워하며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드니 육성회비 이상 돈 들이지 말고 늦은 일곱살인 딸아이를 조기입학시키자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60세가 되어도 아이들이 대학을 채 졸업하지 못 할 것에 두려움 없이 딸들은 시집만 잘 가면 되니까 굳이 대학가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한다.  

그래...그렇다. 나는 그가 5남매를 키워낸 시부모님이 세째 아들인 그를 중학교 보내는 것도 벅차했고 그가 시커멓게 탄 누룽지를 먹으면서 주린 배를 달랬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으며 그가 열 아홉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파업을 하거나 2년에 한 번씩 해고될 때 쉬는 한 두 주를 제외하곤 일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는 절대적으로 안식이 필요하다. 7년에 한 번씩의 안식은 커녕, 25년 동안 지속된 노동생활이 그는 50세를 넘어 60세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에 절망한다.

...그는 50세 은퇴를 주장하고 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할 나이고, 작은 아이는 그렇지도 못 할 나이다. 딸들의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입시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는.

나는 사교육 스케쥴을 어떻게 짜서 입시에 성공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할 기본 토양도 되지 않는 것이, 그의 형제자매들 중 대학까지의 교육을 마친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을 말이다. 그가 그렇듯 그의 형제자매들은 자식들의 기천만원이 넘는 대학학비를 대기엔 너무 빈약한 생계수단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경제적 수준 하에서 아이들은 입시경쟁의 하위라인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출발선이 다르다.

이 말을 나는 80년대의 학창시절에 들었었다. 아직 전교조가 생기기 전이었는데, 간첩 혐의로 잡혀갔던 지리 선생님에게서 들었는 지, 공립고교의 교장교감과 늙은 선생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면회를 다녔던 국어선생님에게 빌린 책에서 봤는지는 모르겠다.

자유경쟁을 떳떳이 얘기하기에 자본주의사회는, 특히 한국자본주의는 너무나 얄팍하고 허술하며 뻔뻔스럽다.

이런 표현은 강남신화를 옛이야기 들려주듯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 자이안트에 더 잘 어울린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시대와 멀지 않은 내 중학시절의 친구는 아빠가 없었는데, 그런 집이 흔히 그렇듯 오빠의 대학 진학에 온 힘을 소진하여 그는 상고를 갔다. 그것도 당시 최고라 불렸던 서울여상 다음의 동구여상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외국계 은행에 취직했다는 얘기를 나는 데모를 하던 대학 시절에 풍문으로 들었었다.

그는 나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내 입시경쟁의 기억은 기독사립학원이었던 중학시절에 더 가열찼는데, 전교석차를 교실 복도에 붙이면서 담임들은 학급의 10% 이내, 자신의 "엘리트" 들이 전교 석차에 어떻게 랭크되는 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가출로 출석일수를 못 채워 유급한 소위, "날라리"들이 공부를 하던 말던, 수업을 땡땡이치는 것을 체크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면서 보다 더, 근묵자흑의 손해가 날까봐 신경썼다. "근묵자흑" - 이 4자성어를 나는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에게 교무실에 불려가서 들었다. 날라리인 짝궁과 그의 엘리트였던 내가 친하게 지낸다는 걸 알고 내게...그리 하지 말라면서 들려준 사자성어였다.

날라리 친구와 헤어지고 열심히 사귄 친구가, 나와 다른 몇 명과 함께 상위 10% 내의 서열다툼을 열나게 벌이다가 고교입시의 일종이었던 연합고사 성적을 가지고 동구여상으로 가 버렸다.  

 ... 그건 반칙이었다. 우리들은 모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했다. 중하위권 성적군의 아이들과는 친구도 안 했던 엘리트들은 모다 인문계를 가서 또다시 3년 동안 열나게 대입준비를 하여 서울 4년제의 어느 대학을 가느냐를 놓고 경쟁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내 중학시절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받으며 선의의 라이벌이었던 내 친구는 오빠를 간신히 인하대에 입학시키고 자기는 상고를 갔다. 나는 그 친구와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고등학교 초기에도 자주 만났었다.

출발선이 다른 상태에서 그와 나의 경쟁은 공정하지 않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나면서 늘 뭔가 불편하고 미안하고 내가 죄 지은 사람처럼, 적어도 불의에 타협한 비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전에 나는 학교에 치맛바람을 날리며 드나드는 전교학생회장의 엄마라든가, 걸 스카우트나 영어경시대회의 입상을 만드는 열성엄마가 없었던 우리 집의 가난을 비관했었고 그들의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닌, 피아노 콩쿨과 학교 외부의 수상을 위해 뜨거운 뙤약볕의 조회시간에 연단에 오르는 영광을 부러워했었다. 그들의 우수성을 지지하고 있는 브랜드 점퍼와 나이키신발은 내겐 넘을 수 없는 격차였다. 그들은 10미터 앞의 스타트라인에 서 있었고 나는 상고를 간 내 친구보다 1미터 앞에 있었다. 나는 1미터 뒤에 있는 내 친구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10미터 앞에 선 자들에 대한 부러움도 치워버렸다.

더 이상 공정한 경쟁이란 없었다.

상고를 간 동생 덕분에 집안의 재정적 지원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그의 오빠는 인천 5.3사태의 얘기를 내게 해 주며 복사본으로 묶은 시집 한 권을 내게 주었었다. 김 남주의 " 나의 칼 나의 피"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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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고교자퇴한 민다영 씨

고교자퇴한 민다영 씨
 

 

초·중·고생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인 지난 7월 20일 자퇴서를 낸 학생이 있었다. 경기도 의정부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민다영씨가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학교에서 쫓아내듯 강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막연했지만 어려서부터 고민했던 문제들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이미 부모님과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나누어 오고 있었기에 자퇴에 따른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다.

 

다영씨는 어려서부터 막연하게나마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경쟁의 승리자가 돼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면 행복할까 고민했다, 그런 삶은 살기 싫었다, 직장 책상에서 평생을 바치다 죽기는 싫다고 생각"했다. 고교에 진학한 이후 그 고민이 깊어졌고 인권동아리에서 활동을 하면서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과도 진지하게 생각을 나누었다. 그리고 결정했다. '고교 자퇴'.

 

다영씨는 중학교 때는 전교 1등을 한 적도 있고 고교에서는 반에서 1등도 해 봤다. 하지만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대학가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위해 하는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자기 가치관을 찾을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고 성적과 입시로 내모는 교육 현실에 발목 잡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관심분야도 모르는데 대학 가려는 친구들, 안타깝다"

 

자퇴를 한 이후 아침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시립도서관에 가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오히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며 인터뷰 내내 환하게 웃었던 민다영씨. 국제기구나 국제엔지오에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를 지난 8월 말 만났다.

 

- 자퇴 결심에서 실행까지 얼마나?

"오래 안 걸렸다. 고민하는 시간은 많았지만 적극적으로 실행하기까지는 한 달 정도 걸렸다. 부모님과 선생님께 자퇴하겠다는 말씀 드리고 최종 결정했다."

 

- 자퇴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처음에 자퇴한다고 바로 말씀 드린 게 아니고 자퇴하고 싶고 다른 길 찾아 가고 싶다고 계속 대화를 했다. 엄마 말씀이 다른 길 찾겠다고 만날 여러 가지 이야기 할 때는 심장이 너무 떨렸다고 하셨다.(웃음) 하지만 여기저기 다른 길을 알아보면서 자퇴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는 같이 생각해보자며 동의하셨다. 많이 믿어주신다. 부모님이 이야기는 안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부모님도 어렸을 때 나처럼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생계를 위해 일을 하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 같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입시 말고는 다른 길을 찾도록 준비해주지 않는다."
ⓒ 유영민
자퇴

 

 

- 고교 졸업 후 다음 단계를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생각해봤는데,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입시 말고는 다른 길을 찾도록 준비해주지 않는다. 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입시를 포기하면 고등학교에 다닐 이유가 없다. 입시를 포기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학교가 입시 아닌 자기 길을 찾아주는 과정이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서 안타깝다. 그래서 결심한 거다."

 

- 학교를 떠나 지내보니 어떤가?

"아직까지 재밌다. 자퇴하니 시간을 제일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됐다. 원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나의 길을 찾아가는 게 좋다. 내가 지금 하는 공부는 자발적으로 내가 목표를 세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하는 건 대학 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나는 자퇴했지만 친구들은 계속 학교에 있다. 친구들 보면 안타깝다. 하고 싶은 일도 없고, 가고 싶은 과도 없고, 관심 있는 분야도 모르겠는데 대학은 가야겠고…. 생각이 있는 친구들도 있지만 막연하게 대학 생각만 하는 친구들이 더 안타깝다. 입시 때문에 자기를 알아가는 시간, 생각해보는 시간이 없는 현실이 슬프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고 이러다 어른이 돼서 '내가 살아온 게 이 길이 아니네'하게 될까봐 무섭기도 했다. 무의미하달까. 경쟁에서 승리자('승리자'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가 되면 좋은 결과를 차지하고 남들이 말하는 엘리트 돼서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데 취직하는데 그런 게 바람직한 삶일까.

 

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데 그런 건 아닌 거 같다. 당장 10~20년 후를 준비하고 자퇴를 한 건 아니다. 자발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계획과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지금 시점에서 자퇴한 게 좋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도 많고 관심 분야도 많다. 여기저기 계속 찔러보며 제 길을 찾아가는 게 의미 있다. 그러다 제 길 찾는 거다. 그런 시간이 아깝지 않다."  

 

"국제기구나 국제 엔지오 등에서 일하고 싶다"

 

- '여기저기 계속 찔러본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 읽고 싶은 책도 읽고 사람들도 만나고 차근차근 공부하고 준비해서 21살쯤 프랑스로 유학을 갈까 생각중이다."

 

- 왜 프랑스로 유학을 가려는 건가.

"한국 대학에 가기 싫어서다. 우리나라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 준비 하는 곳이다. 그게 이해 안 간다. 취업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인데 4년이란 시간을 그렇게 해야 하나 싶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외국 대학을 찾아보게 됐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영미권은 학비가 장난 아니더라. 그리고 미국엔 우리나라 사회에서 주류되려는 사람들이 유학 많이 간 걸로 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유럽 쪽을 찾다가 프랑스를 알게 됐다. 프랑스는 학비도 비교적 저렴하고 생활비는 지방으로 갈수록 한국 대학비랑 비슷해서 (부모님 도움 없이) 내가 충당하면서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영미권은 불가능하다. 나중에 국제기구나 국제 엔지오 등에서 일을 하고 싶은데 프랑스어를 하면 아프리카에서 그런 활동을 하기에 좀 더 도움이 클 것 같다. 프랑스에 있는 대학을 가고 싶다거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 그럼 21살까지는 어떻게 보낼 건가.

"친구들도 자주 만날 것이고 선생님들도 학교 자주 오라고 했다. 대학 청강 들으며 준비하고 학교 다니며 못했던 일, 하고 싶었던 일 하며 준비하게 될 것 같다. 지금 매우 재미있다.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학교생활이 아니라 만날 다른 일상을 살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게 즐겁다. 굳이 여행 가지 않아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다. 엄마랑 주말마다 도서관 가는 것도 좋다. 이번 주말엔 황학동 벼룩시장에 가기로 했다. 친구들 선물도 살 거다."

 

- 준비·계획한 대로 안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두려움보다는 내가 너무 소수의 길을 가는 데 따른 두려움은 있다. 하지만 어떻게 가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어느 방향이든 결국 그 일을 하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자퇴한 거니까 후회 안 한다."

 

"비정상적 한국 입시 시스템서 자유로워져서 좋다"

 

  
"모든 걸 내가 챙기고 결정해야 하니 불안한 것도 있다. 하지만 지금이 의미 있는 시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소중하고 좋다."
ⓒ 유영민
고교 자퇴

 

 

- 자퇴 후 학교 다닐 때랑 하루 일과가 다를 텐데.

"아침에 일어나서 인터넷 뉴스 검색하고 자전거 타고 도서관 가는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다. 도서관이 자전거로 30분 거리다. 자전거 타고 시립도서관 가는 길이 강변인데 참 좋다. 집에 와서 어학 공부하고 책도 읽고…. 매일 똑같은 일상은 아니고 날마다 조금씩 일과가 다르게 펼쳐진다. 단체 활동도 많다. 어학공부는 꾸준히 만날 한다.

 

날마다 똑같은 일상이 될까봐 탈학교모임 등에 가서 여행하는 프로그램 신청도 했다. 여행 계획 세워서 제출하면 경비의 반 지원해주고 나머지는 내가 내야하는데 거기서 아르바이트도 주선해서 경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학교 다니는 친구들보다 늦게 일어나도 되겠다.

"학교 다닐 땐 6시나 늦어도 6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7시에 일어나면 지각이다. 요즘엔 8시30분에 일어난다. 학교 다닐 땐 누군가 안 깨워주면 못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자퇴하고 나서 내 기상시간을 알게 됐다. 신기했다. 그런 거 생각하면 내 기상시간은 8시30분인데 학교는 8시부터 시작하니까 학교가 이런 것에 대한 배려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혹사시키기만 하고. 자는 시간은 학교 다닐 때랑 비슷해서 12시쯤 잔다. 아침이 상쾌하다."

 

- 자퇴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소박한데… 하루 종일 잤다.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자유롭게 맘 편히 있어보고 싶었다. 하루 정도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야겠다 싶어 책 읽고 영화 다운 받아 보며 지냈다. 학교에서는 시험 끝났다고 해도 여전히 수능이 남아 있고 친구들과 노래방 가고 맛난 거 먹고 해도 입시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하거나 대학을 안 간다는 건 아니고 비정상적인 한국 입시 시스템에서 자유로워 졌다는 것이 좋다."

 

- 성적 압박이 친구들보다 강한 편이었나?

"성격이 스트레스 받고 끙끙 앓는 편이 아니다. 학교에서 하라는 건 다 했다. 중학교 때는 전교 1등도 해 봤고 고교에서는 반에서 1등도 했다. 물론 톱은 아니다."

 

"자퇴한 거 김상곤 교육감이 알면 씁쓸해 할지도..."

 

  
지난 3월11일 오후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 유성호
김예슬

 

 

- 대학생 김예슬씨가 자퇴를 선언한 적 있다.

"그 글을 직접 봤다. 친구 과외 선생님이 고려대생이라서 친구랑 같이 고려대 갔는데 정경대 앞인가 마침 그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그래서 직접 봤다. 그러고 집에 왔더니 인터넷에 막 나오더라. 언니(?) 생각에 많이 공감했다. 그게 (나의) 자퇴에 영향을 준 건 아니다."

 

- 정말로 꿈꾸는 삶은 어떤 것인가?

"옛날부터 하고 싶었던 게 국제기구에서 일 하는 것이었다. 국제기구나 국제엔지오에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사회가 점점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 게 원하는 삶이다. 아직 더 이상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인권에도 관심 있다."

 

- 학교 다닐 때 인권동아리 회장하면서 김상곤 교육감에게 인권상 줬다던데?

"(인권동아리 활동이) 학교생활 중 가장 좋았다. 다시는 못 누릴 추억이고 즐거움이다. 김상곤 교육감님이랑 셀카도 찍었다. 교육감님이 자퇴 사실 알면 씁쓸해 하실 지도 모르겠다. 학교는 입시를 치르기 위한 곳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곳인데 그렇지 못한 학교 현실에 안타까워하시지 않을까. 학교가 다양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성적 잘 받아오면 부모님이 자랑하고 다니셨는데 그걸 못하게 돼서 죄송하다. 또 자퇴생이라는 사람들의 시선도 (부모님께) 죄송하다. 모든 걸 내가 챙기고 결정해야 하니 불안한 것도 있다. 하지만 지금이 의미 있는 시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소중하고 좋다. 이런 시간 없었다면 후회했을 것 같다."

 

 

"어딘가에 있을 나의 생생한 행복을 찾기 위해 자퇴한다"

민다영 학생이 자퇴서를 내고 온 날 쓴 일기

자퇴를 결심했다. 중학교 3년 지독하게 공부를 했었다. 조금 벅찬 경쟁이지만, 그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즐거워 공부를 했었다. 남들에겐 시기의 대상이자 부러움의 대상인 '전교1등'도 했었고 항상 경쟁에서 승리자였기 때문에, 그 달콤한 '승리자'의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아서 외고, 자사고 보다는 좀 더 '승리자'가 될 수 있는 확률이 큰 일반고에 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하고 있는 이 경쟁에 회의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려 하는가?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가 막히게 그 와중에도 불확실한 경쟁을 놓을 수 없었다.

 

 이 경쟁에서 승리자가 된다면 내가 바라던 인생은 어떻게 펼쳐질지 생각해보았다. 명문대 입학해서 또 다른, 더 심한 경쟁에서 이겨내고 대기업에 들어가 아파트 평수 늘려가는 것에 만족하며 살던가 아니면 외무고시를 통과해서 외무공무원이 되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평범한 회사원으로 사무실 책상에서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해 왔으니 대기업의 회사원이 된다면 난 내가 원하지 않은,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살 것이다. 외무공무원은 내가 꿈꿔오던 직업이었으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경로엔 '경쟁에서의 승리'말고도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하다.

 

 돈! 짧으면 3년 길게는 몇년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돈. 만만치가 않다. 서민 혹은 그 이하인 우리 집에는 존재 하지도 않고, 나에게 투자될 수도 없는 돈이다. 어떤 자는 나에게 돈 벌면서 공부하면 되지 않겠느냐?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개천에서 용난 대표 케이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씨도 고시공부 하는 동안에는 돈을 벌면서 공부한 것이 아니라 돈을 받아서 공부하지 않았는가. 설사 그런 돈이 수중에 있다 해도 고시통과를 위해 기약 없는 3+α년의 준비기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럼 날 이 확률 적은 경쟁으로 내몬 것은 무엇인가? 성적순위를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했던 경쟁자들? 경쟁에서 잠시 뒤처졌을 때마다 나를 벌레 보듯 바라보았던 L선생님? 경쟁의 승리자(1등급)에게만 주어진 특별교육, 쓸모없던 수학․ 영어심화 동아리? 뭐가 그리 궁금한지 매번 모의고사 성적으로 전교 50등까지의 명단 확보에 열 올리는 여자 교감?

 

 나를 이렇게 내몬 것은 어느 하나가 아닌 그 모두 다인 것이다. 대한민국 모두가 날 이렇게 내 몬 것이다. '대학 입시'라는 이 경쟁에 참여해야하는 목적도 이유도 모른 채... 이렇게 날 경쟁 속에 내몰았다. 이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처럼 그들은 나에게 회유하고 강요했다. 그래서 난 그저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누리고 싶었던 것들과 누려야 했었던 것들을 포기하며 기계처럼 공부를 해 왔던 것이다.

 

결국은 그 입시 경쟁이 모두 헛 된 것임을 판단하고 이렇게 자퇴를 하게 되었지만, 내 결단에 대한 후회는 없다. 대부분이 걷지 않는 소수에 길에 대한 두려움만 조금 있을 뿐이지, 후회하지는 않는다.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이 아닌 취업하기 위한 하나의 스펙뿐인 대학에 4000만원에 가까운 등록금과 4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하기도 아깝고, 대학을 나온 후에도 자기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오히려 내 선택이 옳았음을 느낀다.

 

 18살. 세상 물정 모르고 마냥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내야 하는 나이에 말도 안 되는 현실에 회의감을 갖게 해준 모든 것에 분노하며...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있을 나의 생생한 행복을 찾기 위하여 나는 자퇴계를 썼다!

 

2010.7.20 자퇴계를 낸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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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중....

왜, 늘 항상 누군가에 집착하는 걸까...

이 집착을 버리는 것도 너무 힘겨웠지만, 버리고 나서의 공허함을 견디는 것도 만만챦게 힘겹다.

게다가 집착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도 집착하고 있던 한 사람의 영향 때문이었다...

 

쟝, 그니는 말끔한 신사였다.

하하하...이리 써 놓고 보니 더 말끔하게 느껴진다.

그이만큼 쿨하면서 진정성을 겸비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일치" 에 대한 운명을 느낀 적도 처음이었다.

소설 속의 연인들이 말하는 운명적인 만남이 무슨 뜻인지 - 로미오나 쥴리엣이 죽음을 불사하면서 혹은 안나 카레리나가 숭고한 희생으로 함께 하는 여정 속에서도 제대로 말로 표현한 적이 없으므로 - 그들이 왜? 그토록 상대를 갈구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그와 동조하고 공감하고 일치했기 때문에 운명을 느꼈다.

그는 팀의 리더였다. 그의 팀은 나와 다른 층에 위치했으므로 직접 그의 활약을 볼 순 없었으나 다른 리더들이나 사원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호평되는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가 매우 공명정대하면서 상사에게 대범한 반면 동료들에겐 매우 온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의 업무처리능력도 뛰어나서 우등그룹의 사원들보다 150%이상 성취해내곤 했기 때문에 사원갈구기를 전문으로 하는 과장도 시빗거리를 찾지 못 해 입맛만 다시기를 반복했다.

또한 누구보다도 먼저 동료들의 고충을 세세하게 알아차렸지만 혼자서 조용히 도와줘야 할 지, 여럿이 함께 업무분담을 할 지, 상사를 방문하여 협상을 시작해야 할 지에 대해 그이만큼 정확하게 간파해내고 해법을 제안하는 이도 없었다.

당연히 그는 인기캡이었다.

그의 지인들은 오늘은? 내일은? 그럼 주말저녁은 어때? 하면서 술 한 잔 하기를 청했고 보통 2주 후까지도 그의 저녁 스케쥴은 꽉 차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술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것에 매일매일을 바쳤고 회사에서 가까운 한, 두 집을 정해두고 외박을 하였지만 다음날은 말끔한 모습으로 출근했다.

내가 그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회사가 도산하면서였다. 아니 도산 직전에 인수합병되었지만 기존의 회사와 이후의 회사는 모든 면에서 일대쇄신을 보여주었기에 우리들이 수 년간 다녔던 회사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회사의 새로운 경영과 관리방식에 대응하기 위해 회의는 연일 이어졌고 뒤풀이도 계속 뒤따라다녔다. 자연히 그의 저녁 술자리는 한 곳으로 집중되었고 그의 술자리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회의석상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일찍 집에 가지 않는 한 대부분의 마지막 차주...까지 지키는 그와 주석을 함께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닥 교제범위가 넓지 않고 세 명이상을 한꺼번에 만나는 자리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나는 처음에는 뒤풀이에 자주 빠졌었다. 혹은 1차에서 돌아가는 초기그룹에 묻어 나왔었다.

그러나 어느날의 회의 이후 나는 술자리의 끝까지 남았다. 그가 회의에서 한 발언 때문이었다.

" 외부인 참석은 반대야."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항상 선배들보다 늦게 이야기하고 반론을 펼 때는 논지를 객관화시켜 목소리 높인 사람들의 기분을 감안해 주곤 했던 그였기에 좌중은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의를 집중했다.

"조언을 구하는 건 괜찮지만 직접적인 참가는 아니라고 생각해. 주체와 연대가 구분한다고 구분되어지고 합친다고 합쳐지는게 아니쟎아. 각각의 위치에서 소통하는게 맞다고 생각해. ...회의 구조를 이분화시킬게 아니라면."

그의 마지막 말은 일타였다. 주창자들에게 미리 동조했었던 성미 급한 한 동료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의장 역할을 맡고 있던 대표가 말했다.

" 물론이지. 회의 구조를 이분화시킬 수는 없어. 당연히 회의하면서 사회자가 두 명일 수도 없지. 이 얘기는 아닌 걸로 하고. 지금까지처럼 필요할 때 조언을 듣고 와서 전달해주면 참고하고 그러면 되지."

대표는 주창자들을 쓱 한 번 건너다보곤 바로 다음 얘기를 하자고 했고 이의는 제기되지 않았다.

나는 덕분에 불편하고 힘든 얘기를 하기 위해 입 한 번 벙긋할 필요가 없었다.

대표의 논거는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될 수 밖에 없을 꺼라는 상황을 직감적으로 수긍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기에 또, 그리될 것을 의도한 제안이었나? 하는 의구심을 순간적으로 솟구치게 하는 즉문즉답이었기에 좌중은 은연 숨을 죽인 듯 했다. 그 후의 회의는 소소한 의결 외에 대책에 부심하는 것으로 시간을 채우고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고뇌와 걱정으로 시작한 회의를 피로와 짜증으로 치워버리고 술을 마시러 갈 생각에 흥을 돋워 새로이 기운이 나는 듯했다.

늦은 시간 때문인지 1차에서 대거 탈락하고 단골호프집에 모인 사람은 네 명 뿐이었다.

" 야, 아까 너 말 잘 했다. 내 입장상 걍 자를 수도 없고, 난감했는데 참... 갸들은 왜 그런지... "

대표는 남은 자들이 다 제 편도 아닌데 속내를 툭 펼쳐놓으며 쟝에게 말했다.

" 뭐? 뭐 말이야? 응? 그나 저나 취하네..나 오늘 어디서 잘까? "

신입사원 주제에 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1과의 양호는 입사 초기부터 바람을 일으킨 독특한 스타일과 재담에다 유능함과 진보적 성향까지 겸비하였지만 그 성향이 논리적 깊이를 갖기에는 좀 역부족인 듯  눈치가 없었다.

 " 글쎄... "

쟝은 없는 사람들을 놓고 뭐든 말하기가 불편한 듯 대답이 시원하지 않다. 다혈질처럼 보이지만 눈치 백단으로 민심을 휘어잡고 있는 대표는 쟝에게 더 푸념하지 않고 화살을 돌렸다.

" 넌 어케 생각하냐? 그거. "

취해 있는 신입사원을 집으로 데리고 갈 냥인 듯 제 옆자리에서 소파 구석으로 쭉 밀어부치면서 대표는 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 그렇지...회의 구조가 이분화될 수 밖에 없어, 보내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야 하니까..."

외부인의 주도대로 회의가 끌려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나는 속내를 슬쩍 덮으며 대표의 자존심에 기를 보태주었다.

"그렇지, 다시 얘기해야 하지, 결국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거니까...누가 책임지는데...다 내가 책임지게 될게 뻔한데 ! "

대표로 추대되면서 한 점 이의도 받지 않았지만 정작 자신은 늘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이대표였다. 누군가 정확하고 바르게 지침과 해답을 제시해 주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일 뿐, 혼돈의 시기, 힘없는 우리들은 쪽수를 모아 권리를 지키는 데 무엇을 더 동원하고 어떤 행동으로 한 발을 내딛어야할 지에 고민만 많았다.

"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회사의 의도를 미리 알 수 있거나...."

이대표는 또 나를 건너다본다. 쟝이 아이디어를 내지 않기 때문일까?

" 연구소에 경영분석을 의뢰해보는 건 어떨까? 요즘 구조조정 들어가는 회사들에서 많이 하는 것 같던데?"

" 그런게 있냐? 너두 알아? "

대표는 쟝에게 확신을 구하듯 돌아본다.

" 응, 들어본 적 있어. 책도 나오던데. 아는 사람이 거기 연구원이 친구라고 했었는데."
과연 발 넓은 쟝, 바로 인맥의 힘을 발휘한다.

" 그래? 다음 회의때 의논해 보자. "

다음 회의에서 나의 의견은 별 근거없이 폄하되었지만 쟝이 찬성을 표시했고 다른 제안도 없었기에 일단 알아보자는 차원에서  연구소 상담을 받아보기로 하였고, 상담 이후 역시 다른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회사의 경영상황을 제대로 알아보자는 차원에서 경영분석을 의뢰하고 보고서를 받기로 하였다. 담당은 나와 쟝이 되었다.

쟝은 다른 동료들과 달리 연구소 뿐만 아니라 단체들과 조류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아는 얘기들이 더 많이 오가게 되었고 회의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는 일도 더 잦아졌다.

나는 업무능력도 평균 이하였지만 사교성도 별로였고 두드러진 재능이나 매력도 없는 편이었다. 그저 착하고 성실하고 다소 내성적이었지만, 기존의 리더가 좀...싸가지가 없는 편이어서 내가 리더로 선출되었다.

나의 내성적인 성격은 왜소한 체구에서 비롯된 바도 커서 추우면 말이 없어지고 더워도 말이 없어지는 것으로 잘 견디는 편이었는데 내 옆자리에 있던 리더는 덥다고 연신 화를 내더니 초연해보이는 나를 보면서 나 때문에 더 열 받는 것 같다고 짜증을 냈다. 그의 짜증에 팀원들은 은근 불만을 쌓아가더니 해가 바뀌자 입사연수도 짧은 나는 리더로서 쟝과 함께 회의에 자리하게 되었다. 회의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업무를 만들어냈고 학창시절 글쓰기를 좋아했던 쟝과 나는 편집부의 주축이 되었다.

편집부란, 어느 기관이든 단체든 수작업이 많은 부서이고 강도는 낮지만 노동밀도와 빈도가 높은, 장시간 늘어지는 노동분야이어서 나는 쟝과 함께 해야할 크고작은 일들이 많았으며 길게 혹은  짧게 자주 만나야 했으며 오가는 와중에서 주고 받는 이야기도 늘어났다. 그리고 어쩌다 술 한 잔 하게 되면 과거사도 뭉덩뭉덩 들려주고 관심사도 시시콜콜 나누게도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의 많은 면에서 닮은 점을 발견하였고 대부분의 사안에서 의견의 일치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리고 과거의 한 자락에서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운 충격 속에서 서로 같이 아는 지인의 이름을 말해보라고 다그치고는 아, 우리가 같은 뿌리였구나 하는 걸 알았다.  

 " 그때, 장청대회에서 문산까지 행진했었쟎아. 대열도 컸지만 열기도 대단했었지. 그때 사회보던 사람이 말야..."

쟝은 내가 함께 공부했던 그룹의 선배와 같은 교회를 다녔었고 80년대말과 90년대 초의 거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깨진 보도블럭과 안개 속의 숨막힘, 눈물과 그리고 피로 물들었던 그 거리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나와 같은 지점에서 비판을 시작했고 같은 사고와 인식 속에서 노선을 변경했다. 우리가 이십대의 후반에 같은 현장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역경들은 천로역정의 그것이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세기에서 기업구조조정은 사회를 바꾸는 신호탄이었고 아이엠에프는 세태의 격변을 부채질하는 데 불과했다.

지금 그는 다르지만 여전히 열악하고 눈물많은 기층의 민중들이 살아가는 현장에 있고 나는 후퇴한 채 머물러있다. 일찌기 진보란, 역사가 필연적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머무름이란 퇴보의 다른 이름에 다르지 않았으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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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동화의 출발은 자신의 어린 시절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에 처해있는 내 아이들일까?

나의 둘째, 다섯살 수정이는 언니보다 똑똑한 것 같다. 아 ! 어떤 경우에도 비교급의 언사를 사용치말라고 아동발달 시간에 배웠는데 ! 난 왜 이러나용...

근데 다섯살 수정이는 어휘구사라던가, 의사표현에 있어 아주 뛰어나 보인다. 생각지도 못 했던 단어를 사용하고 자기 의사를 분명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짧더라도 말이다. ㅎㅎ 날 닮아 국어를 잘 할 것 같군 !

학력고사 시대인 나는 수학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의 문제만 맞추고, 반면 국어를 거의 만점수준을 기록하여 평균치를 조정하여 대입에 합격했었다. 수학....중학교에 입학해서 산수라는 이름을 버리고 등장한 이래, 그 학문을 이해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대입 이외에 쓸 데도 전~혀 없었으므로 지금도 수학은 내게 별나라 이야기이다. 차라리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인가를 발견하면서 유레카 ! 하고 욕조에서 뛰쳐나왔다는 이야기에 더 흥미가 있다.

아이들과 한글공부나 수 공부를 하면서 완존 다시 배우는 기분이다. 요즘은 어린이집에서도 수 공부를 수학이라고 부르나 보다. 큰 딸 수진은 수학을 어려워한다. ㅋㅋ 작은 딸은 5세라 걍 그리고 있는 중이다. 도형 맞추기 같은거...

어젯밤 수정이랑 한글 공부를 하는데....기역 하다가 쌍기역을 알려줘야 해서 내가 어머 기역이 두개네, 쌍둥이 기역인가? 그랬더니 울 딸랑구 왈 " 기역기역이야. " 한다. ㅎㅎ

이름붙이는 사람들은 겹자음을 왜 전부 쌍기역, 쌍시옷 이렇게 불렀을까?  음소 하나에 여러 뜻을 담는 한자어를 사용하지 않는 영어권 사람들은 분명 티티라던가 지지라고 걍 보이는 그대로 불렀을 것이다.

인디언처럼 다혈질인 친구를 "주먹쥐고 일어나" 라고 걍 불러제끼던가 멋지게 춤추는 백인청년에게 "늑대와 함께 춤을" 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때 그 의미는  단박에 전달된다.

스 발음을 잘 못 하는 울 둘 째는 쌍 발음도 겨우 상에 가깝게 한다.

작은 애가 백설공주하면 큰 애는 옆에서 "백썰공주" 하고 고쳐준다.

울 딸랑구들 경음화로 두 살 차이를 표시낸다. ㅋㅋㅋ

내 어린 시절이 행복으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아이들에게 유난히 거절을 못 한다. 거의...대부분의 요구를 들어준다.

아이들의 작은 소망들, 원함들 그런 것들이 무에 들어주지 못 할 것이 있겠냐 싶다.

우리의 부모세대는 입에 풀칠하기에도 벅찬 시대를 살아내느라 아이들을 돌아볼 틈이 없었지만...

지금 부모들은 물론 아이들의 교육에만 너무 올인해서 문제지만 - 거야 사회구조에 기인한 바 크니 비난만 할 순 없긴 하다.- 나는 아이들의 사소한 요구들만 들어주고 큰 요구는 못 들어준다.

울 아이들은 엄마 이건 비싼거야 아니야? 하고 물어보고 딱 하나만 사라는 내 제한에 응하느라 이걸로 할까 저걸로 할까 들었다 놓았다 고민에 빠진다. 그래봐야 천원에서 왔다갔다 하는 물건들이다.

근데 울 둘째는....엄마..이거 두 개를 하나라고 해....하고 막 눈웃음친다. ㅎㅎㅎ

그래...걍 두 개 사라, 이름을 그리 붙인다고 두 개가 하나가 될 수 있가니....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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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들

궁색했던 집.

항상 결핍을 느꼈던 어린 시절로 추억된다.

그 집이 있는 동네, 삼십년 전의 장위동이다.

벗어나기 위해 어른이 되고 싶어했던 십대를 벗어나자 마자

미친듯이 거리를 누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니, 단지 쏘다니고 싶어서 그러나 데먼스트레인션에 참여하고 있다는 훌륭한 이유 속에 숨어서.

 

집은 홈도 아니었고 하우스도 되지 못 해서 나는 가정이나 가족의 진정한 뜻을 사전적 의미 이상으로 실감해 보지 못 했다.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지를 묻는 톨스토이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 교도소의 독방 만큼의 사적 공간도 없는 초라하고 위험한 사춘기를 보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고함 소리 속에서 매맞는 엄마와 함께 귀뚤귀뚤 귀뚜라미 우는 연탄보일러가 있는 지하실에 숨어서 어둠과 벌레들로 인한 공포를 아빠보다는 낫게 여겼던 어린 시절이 지금은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초록색 기와지붕 얹힌 작은 단독주택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집, 아이들을 돌보지 못 하고 아빠와 가게에서 장사하기에 바빴던 엄마를 기다릴 수 없어 서툴게 라면을 끓여주던 오빠와 그 때도 말 안 듣고 늘 빗나가기만 했던 귀여운 구석 없는 남동생 사이에서 나는 성 역할 사회화가 잘 안 되던 아이였다. 줄창 혼자 놀고 혼자 싸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책만 읽었었다. 일어설 수 없이 천정 낮은 다락에 혼자 숨어 만화책을 보다가 다락의 작은 유리창을 깨고 아빠한테 뺨을 맞았던 일-아빠는 단지 깜짝 놀라고 어이가 없어서 때렸다고 나중에 말했다, -컴컴하고 무서웠던 지하실,  늘 속 시원히 말대꾸 하고 더 시원하게 두들겨맞았던 엄마가 답답하기만 했던 일 그런 류의 기억들이 그 낡은 단독주택을 보면 생각난다. 그 집 주인이 구청의 지원금을 받고 담장을 허물어 그 비좁은 마당을 드러내 놓고 있기에 그 집의 추억은 더욱 잘 생각킨다. 그 지하실의 입구가 마당의 작은 베란다 아래로 음험한 그늘 속에 숨어서 나를 내다 보곤 한다. 그 집 앞을 지나는 게 너무나 싫다.

 

이십대의 중반을 넘기지 않고 나는 집을 나왔다. 몇 번의 가출 경험이 있기에 스물 다섯의 가출은 거의 완벽한 출가, 아니 분가 아니 자주독립의 수준이었다. 모아놓은 돈은 없었다. 그러나 내 가출의 이유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오빠가 모아놓은 돈으로 허름한 월세방을 얻을 수 있었다. 오빠는 나의 몇 번의 다짐에 잘 부응하여 평소의 오빠 답지 않게 엄마아빠의 우격다짐에도 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전의 가출에서 있는 곳을 추적당한 경험이 있는 나는 오빠를 완벽히 내 편으로 만든 것 만으로 내 독립된 생활이 지속될 수 있슴에 놀라워했다. 그 후로  장위동에 다시 돌아가는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었다.

그 집 앞을 지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어린이집을 갈 때는 차량을 이용하지만 올 때는 피아노 학원을 들러 오기 때문에 아이들을 직접 데리고 그 집 앞을 지나 조그마한 빌라인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

이 동네가 철거되길 기다리며, 철거시에 받을 이런 저런 이득을 건져보고자 주민등록의 실제 거주자임을 지키기 위해 장위동으로 돌아와있기 때문이다.

결국 궁색함이 나의 가정에서도 이어지기 있다는 말이다.  내 궁색함은 내가 남편으로 삼은 이의 지독한 가난과 그 가난에 습성화된 궁색함에 강화되고 더욱 강제되고 있다.

이렇게 몇 푼을 위하여 몇 년을 궁색한 동네에서 살 필요는 없는데....나의 아이들에게 나와 똑같은, 내유년의 궁색함이 여기 저기 묻어있는 낡은 동네에서의 생활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 아니 더 나빠졌고 이건 우리가 이 동네를 떠나기 전까지 개선될 수 없는 생활환경이다. 철거예정지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천을 건너 야산으로 놀러다녔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자동차들 사이를 갈짓자로 걸어야 하는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서울의 변두리, 아이들은 놀 곳이 없다. 나도, 우리 아이들도.

한글도 모르던 나이 때부터 만화방을 들락거렸다고 엄마는 나중에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책이 있는 곳이 거기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그리고 우리 삼남매가 언제 집에 맘 편히 있을 수 있는 날이 있었냐고 속으로 뇌까렸다.

 

두 칸의 점포 안 쪽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다. 아니 거실처럼 쓰는 가게에서 바로 이어지는 작은 방 안쪽으로 길고 좁은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거실방엔 티비가 있었고 밥을 먹는 곳이자 엄마아빠가 잠자는 곳이었다. 다른 하나의 조금 더 큰 방이 오빠와 남동생이 쓰는 방이었으므로, 나는 엄마아빠가 잠자는 방 안쪽의 기다란 방에서 혼자 자야했다. 오빠는 고등학생, 나는 중학생이었다. 삼남매가 한 방을 쓸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고 엄마아빠의 잠자리 옆에서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어린애도 아니었던 나는 내 방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그 사무치던 욕구, 그 결핍과 단지 불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가난에 대한 분노는 사춘기시절 내 방을 갖지 못 함으로써 뼈에 사무치도록 각인되었다. 가난이 싫고 미웠고 저주스러웠다. 궁색함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근검절약도, 촌지를 받으며 대학을 가야한다고 너불대는 고등학교의 담샘도 증오스러웠다.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의 반감은 대학을 들어가자 마자 나를 데모꾼으로 만들었다. 자구발 하나만 읽고도 나는 완벽히 맑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미 사춘기를 지나 십대말에 이르렀을 때 가난이라던가 가정의 누추함이라던가 불행한 가족관계라던가 하는 것에 영향받고 휘둘리는 것을 모면하고 다소 위험하긴 했지만 빗나가지 않고 무사히 성장했던 나는 사회과학과 내 개인사를 혼동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나의 인문학적 소양이 너무 깊었다. 고교시절 실존주의에 심취했던 내게 꼬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고나 할까.... 고교시절 제 2의 성을 읽으면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나는  사회과학세미나 써클에서 경제학, 역사학을 다 보고 정치사회학을 공부할 때 쯤 곁다리로 본 여성학 텍스트에서 시몬느 보봐르를 만나는 것에 너무 익숙해있었고, 고교시절 존경하는 선생님이 당신의 캐비넷을 열고 빌려준 마가렛 미드의 문화인류학관련 서적을  읽었던 내게 가족의 기원을 공부하는 것은 인식의 나선형 발전구조를 몸소 체험하는 형국이었다. 맑스주의는 내 유년의 결핍을 사회구조적으로 밝혀주었고 60년대 이농한 도시빈민이었던 내 아빠의 굶주림과 공포와 분노, 그리고 가부장적 폭력의 연원을 밝혀주었다. 이해했으므로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비판적이 되었다. 나는 매우 비판적이었고, 이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제대로 올곧게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그 토대를 만드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내 삶의 내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운동...십년에 걸친 내 운동이 패배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동지들을 잃지 않았다면 아주 작은 조직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다면 내가 장위동으로 돌아올 일은 절때 없었을 터인데....

길을 잃고 돌와왔다. 마뜩챦은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그 점포의 방들은 다 없어졌지만, 그 가게의 한 켠에서 엄마아빠는 일흔의 나이에도 가게를 지키고 있다. 달리 할 것이 없으므로 말 그대로 지키고 있다. 못 먹고, 못 입고, 죽도록 고생만 하면서도 골병이 들도록 두들겨맞았던 엄마는 제대로 거동을 못 하신다. 가게에 커다란 평상을 놓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신다. 그 가게의 위 층에 방 3개와 너른 거실이 있는 살림집이 있지만 엄마는 언젠가부터 그 이층으로 가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 하게 되었다. 근검절약의 최후단계에 이르러서 엄마는 그 축저된 돈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나는 분노한다. 내 엄마의 생을, 내 엄마에게 자신의 분노를 쏟아부었던 아빠를, 그 가게를 아침마다 가는 것이 또 하나의 고통이다. 내 아이들의 어린이집 차량이 엄마아빠의 그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는 가게 앞에 서기 때문이다. 나의 궁색한 집이 있는 골목 안쪽까지 어린이집 차량이 들어오기엔 여기저기 처박혀있는 자동차들이 너무나 많은 철거예정지구이다, 장위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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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의 친구 이야기

혜정의 두번 째 이야기

이렇다 할 친구도 없이 여름이 갔다.

아니 마뜩치 않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을 함께 했던 새로운 친구를 한 명 사귀긴 했다.

그건 그 친구를 사귄거라기 보다 이미 다른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그네들 속에 있느라 자신과의 하교길을 함께 하지 않는 초등학교 시절의 단짝친구와 균형을 맞추는 의미에서 혜정도 다른 이와 함께 한 것 뿐이었다.

그니가 내게 이 정도밖에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그보다 넘치게 사랑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기울어지는 것은 위험했다. 그건 스스로를 상처내는 길이다. 그니에게 있어 내가 적당한 친구인 것처럼 나에게도 그니가 그 정도의 무게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혜정은 그니처럼 다른 친구를 사귀었고 그 애는 혜정을 단짝처럼 대하진 않았어도 꽤 절친한 친구처럼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주었다. 화장실을 함께 가거나 교실을 벗어나 이동하는 주 1회의 예배시간, 체육복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가면서 곁에 붙어 함께 수다를 떠는 것 등등... 여자아이들에겐 일거수일투족에  의사를 주고 받고 혹은 목적없이 말들을 주워섬기면서 걸음걸음에 적어도 팔짱을 끼지는 않아도 팔꿈치를 스치며 동행하는 친구가 늘 필요했다. 그것이 보기에도 좋았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그 애는 같은 분단이었고 한 줄씩 돌면 바뀌는 오른쪽 짝궁이었다. 청소시간 사건 후 왼쪽 짝궁은 더 이상 친해지지 않았고 그 애는 그애의 친구들과 혜정은 오른 쪽 짝궁과 의자를 끌어당겨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 애는 착한 아이 같았다. 혜정이 상위권 그룹인데 비해 그애는 중하 정도의 성적을 가지고 있었고 비교적 비슷한 성적군의 아이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교실분위기 속에서 그 애는 혜정과 친구하기를 기꺼워하는 듯 했다. 그리고 혜정은 뚜렷한 특징 없는 그 애를 그저 그렇게 친하게 지냈다.

그 우정은 한 철도 가지 못 했다. 어느날 그 애와 함께 하교하기를 그만 둔 후, 혜정은 혼자 긴 뚝방 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버스를 타도 30분, 걸어서 가도 30분 정도 걸리는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그 절반 이상이 차도와 개천을 따라 이어지는 뚝방이었고 그 길은 불안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걷는 사람들이 계속 눈에 보이는 반면,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표정을 가까이 올 때까지는 알 수 없었으므로 혜정은 맘껏 공상의 나래를 펴고 혼자 골몰하며 걸을 수 있었다.

단짝을 잃어버린 후 혜정은 말할 사람이 없었고 비판하지 않는 마음으로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열 서넛 아이들의 일상과 질투, 시샘, 성적이야기 등등을 의미없이 뇌까리는 그 마음 선한 오른쪽 짝궁을 혜정은 경멸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가 없었다. 어느날 일방적으로 외면한 것처럼 되어버린 오른 쪽 짝궁을 혜정은 아주 나중에서야 다소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오래 추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새로운 생활에 끝내 적응하지 못 한 혜정은 혼자 만의 생각과 시간과 생활을 이어나갔다. 점심밥은 어찌어찌 뒤에 앉은 아이와 먹기도 했지만 대부분 혼자서 쉬는 시간을 맞이해야 했다. 45분의 수업 사이에 있는 10여분의 쉬는 시간, 그 시간은 쉬는 시간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아우성으로 수업시간이 채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고 다음 수업 종이 치고도 한참을 웅성거림 속에서 연장되었다. 매 교시 마다의 그 시간들, 그 시간들에 혜정은 하릴 없는 사람처럼 멀뚱거릴 수 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도 쉬는 시간 마다 책을 보는 습관이 있던지라 혜정은 쉬는 시간마다 소설책을 꺼내 읽어나갔고 소설을 읽는 사이 사이 수업에 열중했다. 문제는 책을 조달하는 것의 어려움이었다. 초등학교는 교실마다 학급문고가 있어 교실 뒤쪽의 긴 책장에 수 백권의 책이 있었다. 늘, 계속 계속 책을 읽고 있는 혜정에게 초등학교시절 아이들은 학급문고의 책을 거의 다 읽은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중학교에는 책이 없었다. 적어도 교실엔 없었다. 이 멋진 기독사립학교는 여중과 여상, 여고가 함께 있었고 붉은 제복과  견장의 금술을 휘날리면서 행진하는 고적대를 자랑했지만 도서실은 여고 교사의 한 쪽 귀퉁이에 있는 것을 사립학원의 모든 학생들이 함께 이용하고 있었다. 사실 주이용자는 여고생들에 국한되는 수준이었지만. 혜정은 도서실을 드나들면서 책을 빌리고 갖다주느라 분주했다. 온 아이들이 우루루 하교하는 시간을 피해 도서실에서 사씨남정기며 구운몽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소설책을 읽다가 저물녘이 되어서야 혼자 너무 어두워지지 않은 뚝방길을 걸어 근자에 읽은 소설을 떠올리며 공상에 잠겨 집으로 걸어가곤 했다.

루이제 린저의 "슬픔이여 안녕" 때문에 혜정은 슬픈 마음을 계속 계속 유지하며 말없는 소녀로서의 중학교 1학년 생활을 지속해 갔다. 읽을꺼리를 찾다가 주워든 하이틴 소설에서는 모래밭의 사금파리만큼 어쩌다 한 번 심금을 울리는 러브스토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정서를 갖고 마음 속에서 조금씩 자라는 그 애에 대한 생각을 되새김질했다. 그냥 생각만 하고도 만족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단짝친구는 더이상 단짝이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동창생으로서 가끔 교실을 오갔다. 아니 여전히 혜정이 그니의 교실을 찾아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갈수록 가져오지않은 교과서를 빌리거나 체육복을 빌리러 내왕하는 수준으로 변해갔지만 그니의 교실에서 윤진의 모습을 보는 것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니의 반과 혜정의 반은 같은 시간대에 체육수업이 있었고 초등학교 동창생이 아닌 윤진의 모습을 찾고 나면 혜정은 계속계속 그의 모습을 주시했다. 그를 볼 수 있는 모든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혜정은사립기독학원의 모든 학생들이 다 한 곳으로 모이는 주 1회의 예배시간에 강당으로 가기 위해 교실을 일찍 나섰고 혜정의 교실보다 강당에 가까운 초등학교 동창의 교실에서 윤진이 나오는 것과 마주치기 위해 애썼다. 그보다 약간 뒤의 행렬에 있어야 그를 마음 놓고 바라볼 수 가 있었으므로.

키가 큰 그는 행렬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사람좋은 미소를 띠고 아이들 속에 있었고 결코 혼자 있거나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그의 찰랑거리는 단발머리,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안제리크에서 나오는 중세 유럽의 공자들처럼 보이는 단발머리, 그린 듯 단정한 눈썹, 큰 키에 돋보이는 날씬한 다리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하고나 잘 웃고 잘 어울리고 호쾌한 그의 풍모에 혜정은 날로 날로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와 같은 반이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친할 수 없는 운명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초등학교 동창생은 날이 갈수록 속물처럼 되어가서 그런 애와는 친구가 되지 못 하고 늘 허섭한 여자애들과 수다만 떨고 있었다.

아, 그 애는 왜 그 눈을 휘 둘러보아 나를 발견하고 말 걸어주지 않는 걸까....

바보같은 왕자님처럼 멀리있는 인어공주를 결코 발견하지 못 하고 그는 늘 눈앞에서 와글대는 여자아이들하고만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슬픔은 마치 자신의 운명이라는 듯, 혜정은 슬픔과 사랑의 정서를 보듬고 어루만지며 가을을 보내고 포근한 겨울을 맞이했다.

이 사랑을 어찌해야 할까....

혜정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윤진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을 쳤다.....

 

 

 

 

 

 

 

 

음...............삘 받아서 좀 끄적여 볼까 했더니 귀가하시는 자녀님들땜에 더이상 못 버티겠네....젠장.....

근데  이건...동화라기 보다 청소년 소설인가....자전적 성장소설이랄까....근데 대사가 너무 없어서 원 당췌 흥미유발이 안 될 것 같네....합평회에 들고 나가면 사람들이 전부 수필 쓰냐고 할 것 같은데....

어케 대사와 사건을 집어넣어서...기승전결을 만들어서 소설처럼 만드나....아니...동화처럼 만드나....큰 일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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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정의 친구들

옛날 옛날에

바닷가 작은 마을에

이녹 아덴이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이건 꽤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이다.

책도 읽었지만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분명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아마 6학년 때 였을 것이다.

나의 6학년은 꽤 괜찮았나보다. 50명은 기본으로 넘는 콩나물 시루같은 교실에서 작지도 않은 6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담임선생님이 내겐 있었다. 아, 내가 57번이었다. 근데 키순은 아니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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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의 기억이 그닥 또렷하지 않은데 6학년 담임선생님이 여자였고 비교적 좋아했었고 (열두살 이후로 좋아했던 선생님은 한명 혹은 두명 뿐이다, 오히려  나는 선생님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졸업할 때 석별이란 노래 때문인게 크긴 하지만 무척 울었던 걸 보면 6학년 담임샘을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아니 나에게 있어선 국민학교인 그 시절에  아이들이 1년 내내 하루종일 보고 있어야 하는 선생님은 담샘 뿐이었으니 담임선생님을 좋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인생이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추단하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6학년의 기억은 그것 뿐이다. 이녹 아덴을 들은 것.

친구들이라 하면, 단지 만화를 같이 좋아했기 때문에 이야기를 조금 나눴을 뿐인 동급생이 하나 있었고, 별로 중요치 않은 친구가 하나쯤 더 있었던 것 같고, 매우 '중요한 타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벗이 한 명 있었다.

벗! 열 두살 즈음부터 그 친구를 알았고 사귀었고 그미에게 편지를 쓰면서 벗이라는 단어를 자주 썼었다.

그애는  열 두살부터 중학시절까지의 일기장에 거의 매일처럼 등장하는 친구였다.

 

 

혜정이가 학교 가는 날이다.

그냥 학교 가는 날이 아니라  중학교 입학하고 처음 등교하는 날이다. 바로 어제 입학식을 하고 담임선생님과 배정된 반의 교실만 보고 그냥 왔으니 수업을 받고 점심을 먹고 6교시가 끝나는 오후 세시까지 계속 있어야 하는 학교생활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화요일인 오늘과 내일은 6교시지만 목요일은 7교시까지 있어서 네시나 되어야 교실에서 나올 수 있다. 

혜정은 한없이 우울했다. 오후 3시나 4시까지 자신이 들어간 반의 교실에서 나올 수 없다니...교실은 그냥 감옥의 다른 이름 같았다.  그 중에서도 독방이나 다름없는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과 기댈 곳 없이 막막한 공간이었다.

 

'6학년 때도 그애와 함께 있을 수 없어서 슬펐는데 중학교가 같은 곳으로 배정되어 뛸듯이 기뻐했던게 얼마전인데 이게 뭐람...1학년의 반이 왜 이리 많은거람....아이들은 왜 이리 많담.....왜 그애와 같은 반이 되지 못했을까...'

 

운명은 자신을 비켜가고 있다는 생각에 혜정은 너무나 우울했다.  중학 3년동안 그애와 같은 반이 될 날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2학년 때는 될 꺼라는 생각이 확신처럼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1년이나 남았다. 앞으로 1년 이라는 긴 시간을 그애 없이 학급 생활을 해야 한다는게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그애의 마음이 내 곁에 있을까...'

 

왜 이런 생각을! 혜정은 도리질을 쳤다.

작년에도 같은 반이 아니었지만 매일 만났고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늘 함께 했고 거의 매일처럼 그애의 집에 들러 더 머물렀으며 일요일에도 곧잘 그애의 집을 찾아 함께 지내지 않았던가.

문득 지난 주 일요일에 그애의 집에서 함께 먹었던 맘모스빵이 생각났다. 달콤한 사과잼이 숨어있는, 보솜한 소보루가 듬뿍 얹어진 커다란 맘모스빵은 가로세로 네모지게 등분하여 그애와 나와 그애 오빠가 함께 먹고도 충분하여, 남은 걸 다시 봉지에 넣어 샛노란 금색테이프로 다시 잘 묶어 봉해졌었다. 그애의 집에서 우유 한 잔과 혹은 그냥 보리차 한 잔과 함께 먹는 맘모스빵은 정말 맛있었고 또 평화로왔다.

그애의 집은 학교와 혜정의 집 사이에 있었다. 말하자면 혜정에게는 학교를 가거나 오는 길에 지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혜정은 아침이면 조금 일찍 나와 가능하면 그애의 집 앞에서 그애를 기다리는걸 좋아했다. 시간은 조금 일찍이어야 그애가 대문을 나오지 않았거나 아담한 그집 대청마루에서 신을 찾고 있거나 하는 짧은 시간을 골목께에서 기다리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혜정은 그 역할을 아주 좋아했다.

어쩌다가 그애의 집에 도착했는데 이미 학교에 가 버린 후 일 때도 있었다. 그땐 너무너무 속상했다.  그애가 먼저 가 버린 걸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한 번 외에는.

혜정은 그러나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거꾸로 혜정의 집이 학교와 그애의 집 사이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코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특히 아침 등교시간에는 더욱이나.

중학생들은 한껏 폼을 재며 버스정류장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웅성댔고 생전 처음 입는 교복들을 어색함도 없이 언니오빠들 사이에서 언제부터 중학생이었던 양 익숙하게 입고 나래비 서서 버스에 올라탔다.

혜정은 혼자 버스를 타고 혼자 어색함과 민망함으로 상기된 얼굴을 창 쪽으로 돌리고 섰다. 여중이 있는 곳은 버스로 네 정거장 정도였다. 다섯 정거장까지 가는 버스를 타면 교문 바로 앞에서 내릴 수 있지만 기다릴 여유가 없는 상급생들은 학교 어귀의 큰 길에서 지나가버리는 버스를 타고 갔다가 내리자마자 교문까지 냅다 뛰었다. 교문에는 지각과 용모단정을 체크하는 학생지도부 선생님과 완장을 두른 깔끔외모의 선도부가 있었다. 때문에 걸릴 만한 뭔가를 숨긴 이들은 최대한 많은 인파가 교문을 통과하는 시간을 이용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혜정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버스가  지나는 길에 있는 또 하나의 중학교, 그 남자중학교의 학생들이 함께 버스를 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익숙해지지도, 관심도 가지 않는 이 오빠들이 마냥 눈에 가싯거리였다. 뭐 글타구 누가 눈길 하나 주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

남자도, 여자도, 사람도 많은 것이 싫은 건지도 몰랐다. 혹은  혜정은 그냥 그애와 함께 할 수 없는 이 삼십여분의 등교시간이 하냥 싫고 또 싫었다.

쉬는 시간마다 단짝친구를 찾아 그애의 교실에 가게 될 것 같았다. 그애의 교실은 불행히도 복도의 맨 끝에 있었고  혜정의 교실은 반대편 끝이었다. 그나마 같은 1층에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을까, 2층에도 1학년의 11반과 12반이 있었다. 그 옆으로 2학년 교실이 이어지는 2층에 갈 일은 없었다. 혜정은 같은 초등학교에서 올라온 아이들을 자기 교실에서 몇 명 발견하긴 했다.  아니 그네들이 서로 아는 척하며 물어보고 대답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저절로 알게 된 것에 불과했다. 혜정 자신이 아는 얼굴은 없었다. 친해보자고 인사하는 친구도 없었다. 혜정은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초등학교 내내 담임선생님의 통신란에 써 있었던 대로 침묵과 작은 목소리로 하는 최소한의 대답으로 중학교 시절을 시작하고 있었다. 3월, 이 다사로운 삼월의 하루 하루를 혜정은 단짝친구를 자주 볼 수 없음에 슳어하며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유년의 행복은 일찍 끝났다. 그 삼월이 다 가기 전 어느날이었다.

 

혜정은 다 친해지지 않은 옆자리의 짝궁과 수업 종료 후 청소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옆자리 짝궁은 혜정 이외에도 초등학교 동창이거나 한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벌써 친해진 같은 분단의 아이들과 수다를 떨면서 칠판을 지우고 있었다. 혜정은 자신이 속한 칠판 앞 교단 구역을 쓸고 대걸레를 찾아서 닦으려고 했다. 짝궁도 함께 속한 구역이었다. 분단의 다른 아이들은 각기 자신의 짝궁들과 함께 책상들이 즐비한 1분단 구역, 2분단 구역, 3분단 구역...그리고 교실 뒤쪽 구역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짝궁들과 함께, 같이 맡은 구역을 청소하고 있는 아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칠판을 지우면서 낙서를 하고 지우개를 던지고 분필가루를 사방에 흩날리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이 바로 청소를 담당하는 분단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혜정은 그네들을 한심하게 생각했고 쉽게 경멸했으나 오래 생각키지는 않았다. 빨리 청소를 끝내야 귀임의 반에 갈 수 있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연하고도 다행히도 그애도 오늘 청소당번이었다. 혜정은 청소를 다 해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청소검사를 다 맡아야만 교실을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청소시간을 마냥 자유시간인 양 허비하고 있는 아이들이 미웠다. 밉고 미웠지만 구역마다 청소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 짝궁없이도 거개 끝내가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분단장이 빨리 담임선생님한테 가서 청소가 끝난 사실을 알리고 담임이 교실을 한번 둘러보러 오거나 아니면 그대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만 떨어지면 그 뿐이었다.

 

" 야, 이 지우개도 좀 털어와."

 

짝궁은 대걸레를 빨러 교실문을 향하는 혜정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혜정은 내가 왜 ! 하고 속으로 외쳤다. 미간을 찌푸리며 뒤돌아보았지만 그닥 친하고 싶지 않은 짝궁에게 할 말은 아무것도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 너도 칠판 담당이쟎아, 내가 지웠으니까 니가 털어오라구. "

 

혜정은 뭐라 뭐라 조목조목 할 말이 많았다. 칠판은 이 교단 구역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구, 여길 다 쓸고 닦고 있는 내가 안 보이냐구, 내가 허리 굽혀 먼지 속에서 빗자루질을 하고 우리반의 2개 밖에 없는 대걸레를 교실 뒤쪽 구역의 아이가 가져가기 전에 교실 중간구역을 맡은 아이들한테서 받아오느라  얼마나 힘들게 눈치를 봤는지...얼른 빨아와서 얼른 닦고 가야 하는데...지는 한 것도 없으면서... 이 모든 말이 목구멍 안에 걸려 있었다.

 

" 야아...이거 가져가라니깐..."

 

짝궁은 힐끗 보고 다시 뒤돌아가려는 혜정의 등을 향해 지우개 하나를 가볍게 던졌다. 교실 문을 나가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혜정의 목 뒤를 스쳐간 지우개 덩어리는 가속도가 붙어 교실 문을 막 들어오는 윤 진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 어 ! 어...어어엇...!"

 

윤진은 키가 컸다. 지우개를 피하려던 윤 진의 어깨 즈음이 혜정의 코에 콱 받혔고 혜정은 아픔과 함께 그 곳이 코라는 사실, 코가 벌개져 우스울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왜 이렇게 억울한 지 모르게 눈물이 샘솟았다. 순식간에 아이들이 와 하고 몰려들어서 더 창피했다.

윤 진은 괜찮으냐고 물었고 짝궁은 지우개를 가슴에 안은 채 다가와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주워대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혜정이 우는 모습에 깜짝 놀라 어떻게든 이 말수 적은 동급생을 위로해 주고 싶어했다.

 

"흑...흑흑흑..."

 

혜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이들의 팔 사이를 빠져나가 그 길로 자신의 단짝친구네 반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고 싶었지만 눈에 띌까봐 빠른 걸음으로 막 걸어갔다. 머릿속은 오직 그애를 만나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나는 이렇게 힘든 일을 겪고 있다고, 내게 이런 일이 생겼다고 호소하면서 혜정은 단짝친구의 위로를 받고 싶었고 사건을 공유하고 싶었고 그래서 보고하러 간 거였다.

 

'우리는 그날 그날의 모든 일을 서로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6학년 시절 같은 반이 아니어서 우리는 매일매일 쪽지를 썼고 쉬는 시간마다 쪽지를 교환했으며 처음 친구가 되었던 5학년 때의 같은 반 때보다 더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고 서로에게 할 말이 넘치지 않았던가.'

 

이런 정도의 큰 일은 당연히 단짝 친구가 먼저 알아야 했고 바로 그애로부터 먼저, 가장 크게 위로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길지도 않은 복도의 끝에 있는 그애의 교실까지 가려면 건물의 중앙에 있는 현관 홀을 지나야 했고 거기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 많이 집중되는 것 같아서 혜정은 눈물이 멈추지 않아 더욱 벌개지고 있는 얼굴을 푹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휙 지나갔다. 윤 진이 그 뒤를 따라 가고 있었다.  혜정의 단짝친구네 반 아이인 그애는 혜정의 반으로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러 오곤 했었다. 오늘도 청소시간이 어찌되었는지,  저의 친구를 보러 들어오다가 혜정과 맞부딪힌 것이었다. 키가 큰 윤 진은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남의 반 교실도 서슴없이 들어오곤 했다. 혜정이 늘 단짝친구네 반의 교실 뒷문께에서 뒷쪽에 앉거나 서 있는 누군가에게 예의바르게 누구 좀 불러줄래 하고 말하던 것과 달리.

단짝친구는 늘 자기 자리 근처에서 별로 떠나지 않은채 주위의 아이들과 떠들고 있었다. 교실 뒷문 쪽에 가까이 앉는 날이 아니면 혜정으로서는 목소리를 크게 내어 친구를 부르기가 어려웠지만, 키가 큰 윤 진은 어쨌든 뒷쪽에서만 맴돌았고 자주 혜정이의 부탁을 받게 되었으며,  받지 않아도 뒷문에서 빼곰히 고개를 내민 혜정을 볼 때면  큰 소리로 혜정의 친구이름을 불러제꼈다. 그애는 보지 않아도 반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으리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혜정의 관심은 자신의 단짝친구 밖에는 없었다. 혹은 단짝친구가 있기 때문에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그 애를 좋아할 필요가 없었다.

 

윤 진의 반은 청소를 끝내고 담샘이 검사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정의 단짝친구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기다리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애는 어쩌면 그리도 빨리, 그리도 많은 아이들을 친구로 사귈 수 있었을까...혜정은 그애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떠들고 있는데 자신이 불쑥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불편했다. 자신의 울어서 벌개진 얼굴, 벌개진 코, 흐트러진 앞머리에 가려졌지만 눈물이 그렁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단짝친구만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고 분했다. 자신이 왔는데 왜 그애는 뛰어나와 맞이해 주지 않는 걸까. 혜정은 여느때와 달리 교실의 뒷문께에서 멈추지 않고 친구를 발견하자 바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놀라고 있는 그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계속 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다른 아이들이 보는게 싫어서.

아이들은 갑자기 휙, 울면서 들어와  딘찍친구의 품에 안기는 혜정의 모습에 깜짝 놀라는 듯 했다. 그리고 뒤미처 들어온 윤 진이 상황을 설명하자 많이 아프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아픔 따위, 눈물 따위 그애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 마자 단번에 잊어버렸고 그쳐버렸다.

혜정은 더 이상 자신의 단짝친구가 자신 만의 친구가 아니라는걸 뼈저리게 절감했다.

이 다사로운 봄날, 제 인생의 처음 사랑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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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재구성하는 것...의 한계

우울증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생긴다던데...

맑스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고 했는데...

대체 나의 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 아닌게 아닌가....

나와 남편이 공동의 주거공간에 있으면서 가사분업이 지난 7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에 이젠 절망스럽다.

물론 오늘 나의 이 스트레스는 지난 3일간 아이들이 집에 있으므로 해서 그리고 남편은 토욜밤까지 늦은 귀가와 일욜 하루를 탕진하는 음주 후유증으로 인해 가족구성원으로서 아무러한 역할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발생한 사흘에 걸친 가사노동의 지속성 때문이다.

전업주부에게 있어 가사써비스의 대상이 되는 남편과 아이들이 집에 있다면 노동은 그냥 24시간 풀가동될 수 밖에 없다.

사실 내가 많은 노동을 한 것도, 강도 높은 노동을 한 것도 아니긴 하다. 그러나 자기 시간 없이 돌봄노동과 감정노동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3일 째의 저녁,  나는 심신이 쇠약해졌다. 그리고 지병인 손발각화증이 악화되고 혈액순환이 안 되는 발바닥의 저릿함으로 밥 먹을 의욕도 잃고 말았다. 이 불쾌함의 생리적 원인이 단지 배고픔인 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태섭아빠가 태섭엄마의 발을 오늘도 주무르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왜 저런 사람을 곁에 두지 못 했을까에 비관하며 걍 굶고 있었다. 자기가 먹을 밥을 힘겹게 차려 혼자 먹는 것, 자기의 발을 허리 구부려 힘겹게 주무르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다는 의사표현인 것 같아서...내 신세가 외롭다는 것을 정말로 인정하는 것 같아서....걍 굶고 걍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 이 불쾌함과 이 희망 없음, 대안 없음의 자각 때문에.

 

아이를 낳고 키운지 7년, 큰 애가 일곱살이니까 계산은 맞겠지.

처음 결혼을 할 때는 단지 갈 곳이 없어서였다. 불행하게도 그건 과장 아닌 진실이었다. 고시원이라는 데가 평범한 서민들이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곳이라는 걸 그 때 알았었다면 아마 나는 고시원에서 저렴하게 생활하면서 미래를 모색했을 것이다.

운 좋게 남편은 착한 사람이고 모난 성격도 아니었다. 뭐... 내가 찍기에는 일가견이 있으니까...직관력이 있다고 자부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개인을 만드는 사회구조의 규정성, 그 이데올로기의 견고함을 너무 간과했다.

그는 그가 원하지 않아도 이 사회가 만들고 그의 가족문화가 만들어 놓은 가부장적 성격을 자신의 성격으로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 물적 기반이 그리 하도록  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가사분업을 안 한다는 이유로 이혼한 여자의 이야기를 여성학 관련 서적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여자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간다. 나도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나....아이들에게 돌봄활동을 하지 않는 아빠라도 그들의 부녀관계를 해칠 수 없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혼하지 못 하고 있다.

이혼을 왜 하나라고 묻기 이전에 결혼을 왜 유지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와 나는 가정 안에서 보다 외식을 할 때, 그보다 술 자리에 단 둘이 마주 앉았을 때 더욱 불편하다. 각자의 일을 하고 있지도, 아이들을 돌보면서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닌...정말로 상호작용이 있어야만 할 그 단 둘의 술 자리에서 우리는 혹은 나는 참담하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므로....

결혼하고 함께 산 지 8년의 기간 동안 우리는 사귀지 못 했다. 시도는 있었으나 서로 안 맞는다는 걸 확인하고 해결을 못 보고 있다. 우리는 정말 안 친해...라고  내가 말하면 그는 맞아하고 침묵으로 빠져든다. 결혼하고 1년 만에 아이가 태어나서 가사노동과 양육의 힘겨움으로 인한 불협화음으로 7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혹시 우리는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을까....

나의 운동이 패배하고 동지들이 대안을 찾을 수 없어 뿔뿔이 흩어질 때  그와의 결혼을 통해 잠시 안돈할 곳을 마련하면서 나는 어떻게든 돌아갈 곳을 찾고자 하였다. 정말로...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그것을 막을 사람은 아니었다. 빨리 찾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거나...낳았더라도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지도...하지만 너무 길어졌다. 아, 나는 아이들이 둘 다 어린이집을 가면 내가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그리고 해야만 하리라고 강제받았다. 충분한 기간을 쉬었으므로.

운동이 아니라 취업을 하고 그걸 병행하는 것에 실패했다. 가사노동은 직업을 병행하면서 혼자 감당해내기에 내겐 너무 무리였다. 그리고 남편은 도와주는 것 이상 가사분업을 거부했다.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1년 동안 직장을 가졌다. 그 1년을 남편은 지옥같은 한 해였다고 말한다. 나는 병을 얻었고 우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이미 큰 애가 태어나고 백일이 되기 전에 우리는 이혼을 입에 담기 시작했었고  내가 직장과 가사에 치여 허덕이면서 잦아진 말다툼은 도를 넘었다. 그는 격앙되는 자신을 추스리는 것에 힘겨워했고 나는 전업주부의 자리로 돌아와앉았다.

 

그리고 오늘 더이상 인생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에 의욕이 없다. 나는 결혼과 육아로 인해 경력단절된 여성들이 흔히 그러하듯 여성인력개발센터를 기웃거리고 방통대 공부를 하고 이런 저런 자격증을 수집하면서 해왔던 40대의 빈한한 스펙 만들기를 그만 두려 한다.

 

남편은 오늘도 함께 재워주기를 바라는 두 아이를 두고 출근을 위해 혼자 구석에서 잔다. 함께 재워주기를 바라는 두 아이에게 번갈아 눈을 맞춰주며 책을 읽어주는 매일밤의 노동에 지친 나는 내일 아침도 늦잠을 잘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간신히 보내고 나서야 내 시간을 갖겠지. 나의 시간,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 라파르그가 말한 게으를 권리를 향유하는 시간....가족구성원들이 귀가하기 시작하는 5시까지. 하루 8시간의 자기 시간을 갖지 않으면 오후 5시부터 시작되는 가사노동을 해낼 수가 없으므로. 가족구성원이 홈 내에 있는 그 집으로의 출근은  시장보기나 미리 해두는 청소, 쨍쨍한 햇볕에 말려야하는 빨래 등으로 인해 자주 당겨진다. 그리고 대인서비스를 기대하는 가족구성원들에게 화 내지 않고 짜증부리지 않고 편안한 쉴 곳을 제공해 주기 위해 나는 감정을 다스려야 하고 시중들기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페이스를 조절해 두어야 한다.  기실 내가 오늘 아침부터 피곤했던 것은 어제 낮에 아이들을 삼촌에게 맡기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걍 아이들과 간단한 밥을 만들어 먹거나 아이들이 노는 동안 좀 쉬었으면... 오늘 그에게 화내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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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할 일

7월13일 화욜 계절공부-영어 / 2층카핏청소, 창고라탄셋트청소, 장난감세척, 김치이동, 쌀이동

                구청전화, 기차표예매, 청소년 가입

7월14일 수욜 유모차가져와서 세척

7월15일 목욜 시골행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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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신091227

한 줄을 어찌 시작할까를 고민한다.

화자는 나인가, 혹은 신경숙처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J 를 재구성하는 사람이어야 할까.

플롯도 없이 소설쓰기가 가능한가. 혹은 하루끼처럼 펜가는 대로 쓰고나서 새로운 기법이라고 해야 할까. 마르탱 뒤가르처럼 20년을 구상하는 것이 내게도 이제 그 정도의 세월은 흘렀다고 생각되는데...

하지만 실은, 내게 소설은 자위처럼 계속하던 상상스토리의 허무함을 보완하고싶은 발상에 지나지 않다...그게 문제지만...

 

10대

그리고 20대

다시 30대

이제 40대

4반세기를 기술해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개인적일 수 만은 없다.

아마도 60년대로부터 규정되는 것, 그리고 70년대의 빛깔이 강하게 남는 80년대의 고통과 90년대의 회의와 이후의 기수없슴, 그래도 삶은 선택해왔고 그렇게 주체의 위치에서 살아왔다고 해야만 한다.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남은 생애를 위해서일까 아니면 현재를 살아내기 위해서일까...아마도 더이상 진전되지 않는 현재를 존속하기 위해서일것이다...

 

사랑은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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