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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간 지 3일째, 미래는 예측불허라...

우연과 우연이 겹쳐 필연이 된다고...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고 선덕여왕이 읊조리더만...

우리의 다툼은 일상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었는데...

그저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데 우리 둘 다 그것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게 너무 싫다 보니 서로에게 떠밀다가 말이 좀 거칠게 나갔는데...

그러다가 조금은 익숙해진 이혼 어쩌고 하는 대사들이 오갔지...

싸움은 별로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대가 나가세요. 했고 그가 말없이 나갔는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건 정말로 끝이 될까...

며칠이 지나면 그가 돌아올까...

여느 때와 다른 점, 그와 내가 둘 다 서로를 맞추기 위해 싸움을 오래 하는 것에 지쳐 있다는 것이다.

그 전의 어느 때처럼 나는 그에게 전화하지 않고 그는 내게서 전화가 없으므로 혹은 기다리지 않으므로 냉전 상태를 전환할 수 있는 아무러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

흠...이러다가 별거가 계속되고 어쩌면 정말 이혼수속을 밟을지도...

사실...

이런 류의 고민을 하는 것도 귀찮다.

가족 간의 감정전이란 얼마나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가...

나는 할 일이 있고 생각할 것이 있고 행동해야 할 여러가지가 있는데 뜻 맞지 않는 가족과 뜻을 맞추기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귀찮다.

충분히, 결혼 후 가정 혹은 가사를 위해 나의 많은 것들을 빼앗겨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듯이 정말이지 나는 그가 딱히 필요치 않다.

더구나 그가 가사와 육아를 반분하지 않고 늘상 조력자의 위치에 있는 한 그 약간의 도움이 있던 없던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가사는 나의 것이고 사회생활도 나의 것이고 내 생의 고민도 나 혼자만의 것이다. 그가 아예 없는 3일 째의 아침이 밝았지만 그가 있었던 어느 아침도 나는 혼자 일어나 아이들을 챙기고 어린이집에 보내거나 병원에 가거나 집안을 치우거나 한 후에 출근하고 밥 먹고 시장보고 귀가해서 저녁밥을 지었다. 그가 필요한 것은 저녁시간에 할 일을 그가 분담해 주는 것이었는데 그 양이 적다 보니 그리고 그러기 위한 신경전이 많다 보니 그가 있으나 없으나 별로 다르지 않은 저녁시간이 흘러갔다......

이리하여 나는 그를 버리는 것인가....

그의 경제적 외조는 그에게 있어서는 퇴근 후 집에 와서 쉴 수 있게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였는데 나는 그것에 너무나 적은 가치를 부여했고 때로는 완전히 무시했다. 그의 말처럼 그는 나보다 2배 정도 더 벌지만 그와 나의 밖에서의 노동시간은 차이가 없었기에 그와 나의 노동은 똑같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기도 했다. 그가 2배 더 번다고 해서 가사노동을 절반만 해서는 안된다고. 내가 그보다 반 밖에 못 번다고 해서 가사노동을 그만큼 더 많이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는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가사의 반분을 하는 것에는 끝내 적응하지 못 했다. 마음으로도 이론으로도.

그리고 나는 그와 적당히 살아가는 것을 이제는 그저 귀찮다라고만 생각한다.

나는 결혼 후 7년을 낭비했고 더 이상 낭비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글 쓰지 못 하고 생각하지 못 하고 생을 고민하지 못 하고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생활 속에 파 묻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이유,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이다.

가사노동은 절대 반분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가사는 내게 전업이 아니라 부업이 되어야 한다.

모든 일하는 여성에게 직업과 가사는 양립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이 그렇듯이 일하고 와서 집은 자기 생활을 챙기는 곳이 되어야 한다. 당근 아이가 있다면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

그가 퇴근 후 쉬고 싶은 것처럼 나도 퇴근 후 쉬고 싶다.

그럼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은 누가 돌보는가? 아이돌보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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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단어 연결하기의 끝에서 소설 읽기

  혼자 있는 3일째,  짐처럼 느껴지는 자식들과 그들의 양부 중 한명이 시골 즈이집으로  가고 없는 집에서 부러 아무와도 약속을 잡지 않고 밤들을 보내고 있다.

  목요일 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삐 가느라 어질러진 집안을 치우지도 않고 내동 컴 앞에 앉아 있었다. 후회하지않아를 다시 보며 잠드는 새벽까지...

  금요일 밤은 중독된 카페인 레몬테라스에서 맘에 드는 브래드박스를 발견하고 구매신청을 하고서야 겨우 청소와 설겆이를 했다.  새벽...이른 아침이라 할 만한 시간까지...

  토요일...밀린 잔무를 보느라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집중이 되지 않아 고생하고도 집에 오자 마자 컴 앞에 앉아 이리저리 써핑...눈이 아프고 잠이 절로 쏟아지다가 문득...

써핑하기의 끝에서 포스팅을 시작한다.

 

하려다 보니...궁금해 진다.

포스트가 뭐지?

 

포스트

IT용어 ①이메일 통신망으로 상대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뉴스그룹에 기사를 투고하는 것   ②한 단위의 기본 정보를 레코드에 삽입하는 것 ③컴퓨터의 게시판이나 온라인 포럼의 메시지 난에 메시지를 첨가하는 것 

 

 아 그럼...메시지란 무엇인가?

 

 

 

메시지 [message]

[명사]1 어떤 사실을 알리거나 주장하거나 경고하기 위하여 보내는 전언(傳言). ‘교서’, ‘성명서’, ‘전갈’로 순화. 2 문예 작품이 담고 있는 교훈이나 의도.3 <언어>언어나 기호에 의하여 전달되는 정보 내용

 

  흠...그럼 블로그는 ...?

블로그
웹(web) 로그(log)의 줄임말로, 1997년 미국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새로 올리는 글이 맨 위로 올라가는 일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일반인들이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일기·칼럼·기사 등을 자유롭게 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개인출판·개인방송·커뮤니티까지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일종의 1인 미디어이다.
웹 게시판, 개인 홈페이지, 컴퓨터 기능이 혼합되어 있고, 소프트웨어를 무료 또는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으며,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과 관련된 지식이 없어도 자신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블로그 페이지만 있으면, 누구나 텍스트 또는 그래픽 방식을 이용해 자신의 의견이나 이야기를 올릴 수 있고,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해 사진 자료를 올릴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미디어이다.

세부 기능은 ① 일기처럼 날짜별로 구성되어 있어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손쉽게 기록할 수 있다. ② 완벽한 자료 관리가 가능하다. ③ 독자적인 자료 보관이 가능하고, 저장된 파일을 이메일로 보낼 수 있다. ④ 일반 커뮤니티의 게시판과 달리 콘텐츠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더 많은 커뮤니티 기능을 할 수 있다. ⑤ 자신이 작성한 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동조자가 생겨 광범위한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고, 남이 만든 블로그에 가입할 수도 있다. ⑥ 채팅이 가능하며, 특히 채팅한 내용들이 날짜별로 블로그 페이지에 기록된다. ⑦ 웹 브라우저 상에서 실시간으로 콘텐츠의 내용을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으며, 한국에서도 갈수록 사이트가 늘어나고 있는데, 기술적·상업적인 제약 없이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사이트에 올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특성 때문에 기존의 언론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언론으로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아. 궁금증이 별로 안 채워지는 네이버사전이네...다시 검색...
 
웹(web)과 항해 일지를 뜻하는 로그(log)의 합성어로, 웹 사이트 주인인 블로거(blogger)가 발행인이자 편집국장이며 기자이기도 한 인터넷상의 일인 언론사. 게시판 형식의 사이트에 자신의 일상적인 일기에서부터 사회적인 이슈에까지 개인이 자유롭게 글과 사진, 동영상 등을 올려 디지털 논객, 온라인 저널리스트로서 미디어 커뮤니티를 이끌어 간다

  로그가 항해일지를 뜻하나?

 

 

 

 

 

 

 

로그 [log] [명사] <수학> 1이 아닌 양의 어떤 수를 거듭제곱하여 다른 주어진 수와 같아지는 거듭제곱수. 에서 y를 a를 밑으로 하는 한의 로그라 하며 로 나타낸다. ≒로가리듬.

 

 

  

  그렇지, log라는 세 철자에 대해 느낌이 안 좋은게 왜 그러나 했더니 수학책에 나오는 단어여서 그랬군...

 

대수()라고도 한다. a가 1이 아닌 양수일 때, x,y 사이에 x=ay의 관계가 있으면, y를 a를 밑으로 하는 x의 로그라 하고, logax로 나타낸다. 이때 x를 y의 진수라 한다. 또 y=logax를 x,y 사이의 함수관계로 볼 때 y를 x의 로그함수라고 한다.
예를 들면, 8은 2와 3에 의해서 8=23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이것은 거듭제곱이다. 이 식의 역계산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2=3√8과 같이 8과 3에서 2를 구하는 것으로서 거듭제곱근이고, 다른 하나는 2와 8에서 3을 구하는 것으로3=log28과 같이 나타내고 2를 밑으로 하는 8의 로그는 3이라고 한다.log28은 2를 몇 제곱하면 8이 되는가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수와 로그의 두 식은 같은 함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로그의 3에 대해서 8은 진수에 해당된다.
로그는 영국의 J.네이피어가 창안한 것이다. 그는 지수와는 독립적으로 급수로부터 이것을 생각하여 1614년 그 성질을 기술하고 로그표를 첨가한 저서를 썼다. 지수에서 로그를 발견한 사람은 스위스의 J.뷔르기로서 로그표도 작성하였다. 또 10을 밑으로 하는 상용로그는 영국의 H.브리그스가 생각해낸 것으로 네이피어도 브리그스에게 조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로그의 발견에 의해서 큰 수의 계산을 쉽게 할 수 있고 당시 매우 성행하고 있던 천문학 등에 크게 이용되었다. 현재와 같이 거듭제곱의 역으로서 설명한 사람은 L.오일러로서 18세기에 접어든 이후의 일이다.

 

 아...골치아파라..수학자들은 왜 이런걸 만들어서 나의 학창시절을 우울하게 했을까나...

 

 

 

로그 [log]
[명사] 1. 배의 속력이나 항정(航程)을 재는 데 쓰는 항해 계기.
2. 항해 일지나 항공 일지.

 

  

-logue
-logue, 〔Gk=word〕 《연결형》 「담화;편찬;연구자」의 뜻
에필로그 [ epilogue ]
  • 네이버 백과사전
    시나 소설 등의 맺음 부분. 연극에서는 극의 종말에 추가한 끝대사 또는 보충한 마지막 장면을 말한다. 프롤로그에 대응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스극이나 엘리자베스조(朝)의 연극에서 사용되었으나 왕정복고기의...

 

 

 

 흠... 블로그에서 로그함수를 거쳐 일기문을 지나 연극을 지나 결국 반가운 이름에 도달했네....

 

  

로제 마르탱뒤가르 [ Roger Martin du Gard ]
네이버 백과사전
미발표 부분 전체를 파기해 버렸다. 작품을 재구상한 그는 1936년 《1914년 여름》과 1940년 《에필로그》 등 2권을 발표함으로써 실로 20년에 걸친 대작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 1937년에 《1914년 여름》...

 그리고 더 아련하게 학창시절, 친구와 함께 읽었던 그리고 고적하게 거닐던 정독도서관의 정원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티보가의 사람들 [Les Thibault]

 

1922∼1940년 간행. 《회색 노트》 《감화원()》(1922), 《아름다운 계절》(1923), 《진찰》 《라 솔레리나》(1928), 《아버지의 죽음》(1929), 《1914년 여름》(1936), 《에필로그》(1940)의 8편으로 되어 있다. 작자는 이 작품의 전반에서, 20세기 초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젊은 세대의 시대적 고뇌를 그 직접적인 체험자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완고하고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의 가정에 태어난 자크가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인터내셔널 운동에 투신, 비행기 위에서 반전() 삐라를 뿌리려다가 헛되이 추락사하기까지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상식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의사였던 자크의 형 앙투안이 소집령을 받고 종군하다가 독가스에 중독되어 요양 중, 지난날의 자크의 언동과 그가 지키려고 했던 평화, 자크와 그 애인 사이에 태어난 유아()를 생각하며, 또 자기는 재기 불능임을 알고 앞으로 올 세대에 희망을 걸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대목에서 붓을 놓았다.

이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숨막히는 유럽 정세의 훌륭한 묘사, 작품 구성에 보이는 중후감, 작중 인물들의 각자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배려 등으로 보아서,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소설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간주된다. 작자는 이 작품의 제7부 《1914년 여름》으로 1937년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특히 제7부에 묘사된 자크의 사상과 행동은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로 인간적인 세계의 건설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의 그것으로서, 프랑스문학이 빚어낸 가장 매력적인 인물상이 되었다.

 

  근데 나 이거 회색노우트 밖에 안 읽은 것 같은데...감화원까지 읽었구나...제목도 멋있군, 1914년이라...도서관 가서 빌려봐야겠다. 학창시절 이후 도서관에서 소설책 빌린 적은 없지만....이 겨울에 할 일을 찾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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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간 사행시

오 여기 사랑의 노래를

아름다운 연인들의 이야기를

시작도 끝도 없는

스스로에게 바치는 생의 미덕으로

 

 

여자들의 이야기

성숙한 사랑과 인생에서

주인됨을

간절히 원하노니, 여/성/해/방

 

여자와 함께 사는것은 남자라네

성숙한 사랑과 인생, 그리고

주인됨을 위하여...

간극을 좁히자, 여/성/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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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교육칼럼-입시제도비판

 
    칼럼 > 칼럼
"강북이나 지방 애들은 원서 쓰지도 마!"
거침없는 하이킥 - 3불폐지론
이형빈(이화여고) 
3不 폐지 - ‘당신들의 입시공화국’

 

대한민국은 입시공화국이다. 교육부가 어떤 입시정책을 내놓느냐에 따라, 주요 대학이 어떤 입시요소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60만 수험생과 그 가족들은 아니 수백만의 초․중․고 학생들은 때로는 수능학원으로 때로는 논술과외로 내몰린다. 교육부가 편찬한 교과서 위에 수능 문제집이 있고,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 위에 각 대학의 입시안이 있다. 국가경쟁력 확보니 창의적 인재 양성이니 온갖 가지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우리나라의 교육의 목표는 오직 하나, 명문대 입학이다.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초등학생들은 동심을 저당 잡히고 중고등학생은 밤늦게까지 청춘을 저당 잡힌다.

 

지금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이른바 ‘저주받은 89년생’으로 불린다. 이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이른바 ‘죽음의 트라이앵글(내신-수능-논술 삼중고)’로 불리는 2008학년도 입시안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1학년 때 생전 처음 접해보는 ‘내신등급제’로 신음했다. 과거의 ‘수, 우, 미, 양, 가’ 식의 절대평가가 아닌 ‘상위 4%까지는 1등급, 상위 11%까지는 2등급’ 하는 식의 상대평가를 적용받게 되었다. 그 결과 ‘친구의 노트를 훔치는’ 가혹한 경쟁체제를 교실 안에서 체험하게 되었다. 이들은 2학년에 올라와 어느 날 갑자기 서울대를 중심으로 ‘논술 본고사’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접하게 된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가지고 5지 선다형 찍기 문제에 씨름하던 이들은 이제 느닷없이 ‘창의력 신장’의 깃발을 높이 들고 논술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들이 3학년에 올라오자마자 고려대, 연세대 등 상위권 사립대학에서 수능의 비중을 강화하겠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아이들은 이제 ‘창의력 신장’의 깃발을 내리고 다시금 EBS 수능 강의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참교육은 간데없고, ‘창의력’이니 ‘경쟁력’이니 하는 온갖 요란한 깃발만 나부끼고, 아이들은 ‘합격’이라는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림이 없다.

 

과연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는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고3 담임교사 1년만 안 해도 그 다음 해에는 모조리 잊어버리게 된다는 복잡한 입시제도, 그리고 이 급변하는 입시제도의 흐름 속에 유유히 관철되고 있는 본질은 무엇인가?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가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입시 제도는 해방 이후 16차례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변화의 흐름 속에는 한 가지 변하지 않는 본질이 존재한다. 입시 제도는 자주 바뀌면 자주 바뀔수록, 입시 제도가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부유층의 자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진다. 입시 제도가 자주 바뀌고 복잡해질수록, 온갖 정보를 빠르고 쉽게 획득하여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부유층이기 때문이다. 고액의 사교육을 통해 내신, 수능, 논술을 모두 준비해야 하고 한번쯤은 해외 유학을 다녀와야 하고 각종 대회 수상 경력이나 고득점의 TOEIC 성적이 있으면 더더욱 유리해지는 입시제도의 관문을, 노동자 민중의 자녀가 통과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런 점에서 입시제도는 철저히 계급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속설은 이제 경험적 진실이 되었다. 명문대를 가기 위해서는 ‘부자 아빠, 영어 되는 엄마’ 밑에서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명품 사교육을 받고, 조기 영어 유학도 다녀오고, 특목고에 진학하고, 내신과 수능과 논술을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소위 SKY 대학 학생의 30%가 서울 강남지역과 특목고 출신 학생들이라는 통계자료는 이제 조중동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얼마 전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만약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지금 태어났다면 아마 서울대에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일침을 놓지 않았던가. 오로지 학교 공부와 동네 보습학원에 의존하는 노동자 민중의 자녀의 입장에서 보기에 대학입시란 ‘그들만의 리그’일 따름이다. 이러한 ‘그들만의 리그 -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을 아예 노골화하겠다며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있는 것이 바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3不 정책 폐지’ 주장이다.

 

3不 폐지론의 속내

 

고교 등급제 - 강북이나 지방 애들은 원서 쓰지도 마!

 

필자가 고3 담임 교사이던 2004년, 내신 성적 만점에다가 여러 재능을 가진 학생을 Y대 수시 입학에 지원시켰다. 그러나 결과는 탈락, 우리 학급뿐 아니라 다른 학급, 다른 학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다수 발생하였다. 이에 전교조 서울지부 차원에서 서울 시내 각 고등학교의 수시 입학 자료를 수합하여 분석한 결과 내신 성적이 뛰어난 강북 학생은 불합격하고 내신 성적이 저조한 강남 학생이 합격을 하는 ‘고교 등급제’의 실상이 폭로되었다.

 

각 고등학교를 서열화하여 학생 개인이 아닌 출신 고교에 따라 각기 다른 입학 기준을 부여하려는 고교 등급제는 현대판 ‘연좌제’이다. 아무리 성적이 좋고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 학생이 강남 지역이나 특목고 학생이 아니라면 대학 진학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는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31조 1항에 대한 전면 도전이다.

 

기득권층은 끊임없이 고교 평준화 정책을 문제 삼으며 고교 등급제 도입을 주장해 왔다. 그리고 이미 지금도 고교 등급제는 암암리에 시행되고 있다. 대학의 수시 입학에서 당락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내신 성적이라기보다는 구술 면접, 자기 소개서 등 서류 전형이다. 그 과정에서 한 학생이 어느 지역 고등학교 출신인가, 어떤 집안의 자녀인가 하는 점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특목고 비교내신제’(특목고 출신 학생들의 경우 수능 성적을 가지고 환산한 점수로 내신 성적을 갈음하는 제도) 역시 고교 등급제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강북이나 지방 아이들은 아예 원서 쓸 생각도 하지 말라는 고교 등급제 - 영구임대주택에 사는 아이들이 넘어오지 말라고 자기네 아파트 단지 담벼락에 철조망을 치듯, 그들만의 높은 장벽을 쌓아 놓고 ‘대한민국 1%’를 사수하기 위해 애쓰는 이 시대 기득권층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대학 본고사 - 고액 과외 못 받는 애들은 시험 보지도 마!

 

대학 측은 ‘학생 선발의 자율권’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대학 본고사’ 부활을 주장한다. 하지만 1998년부터 대학입학은 실질적으로 자율화된 이후 대학의 학생 선발의 자율권은 거의 자유방임주의 수준으로 보장되어 있다.

 

① 대학의 장은 … 입학자를 선발하기 위하여 고등학교 학교생활기록부의 기록,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성적, 대학별고사의 성적과 자기소개서 등 교과성적 외의 자료 등을 입학전형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②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은 대학의 장이 … 논술고사외의 필답고사를 시행하는 경우 … 이의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35조)

 

교육부는 다만 내신, 수능, 대학별고사 등 대학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형요소를 나열해 놓았을 뿐 이를 어떻게 반영할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대학에 넘겨 놓은 상태이다. 내신 성적을 0% 반영하고 수능 성적을 100% 반영하든, 오로지 논술 고사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든 그것은 대학 측에 달려 있다. 전국의 N개의 대학에서 N개의 선발 방식을 제시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 여전히 논술고사 외의 대학 본고사 시행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신이나 수능, 논술보다도 더 촘촘한 잣대로 학생 선발의 변별력을 확보하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한 소수의 엘리트(?)를 손쉽게 선점하려는 의도이다.

 

그러하기에 대학 본고사는 정상적인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고난이도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대학 본고사가 시행되었던 70년대 서울대 본고사는 철저히 국, 영, 수 중심의 지식을 측정하는 문제였다. 게다가 시험 문제가 어렵기로 악명이 높아 합격선이 100점 만점 가운데 30점 정도였다. 이처럼 어려운 문제를 치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고액의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학 본고사 시행의 수혜자는 부유층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논술 고사로도 학생을 변별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대학들이 앞으로 어떤 형태의 본고사를 치르려 할지 알 수 없다. 이미 상당수의 대학에서는 TEPS나 TOEIC, TOEFL 등의 영어 성적을 반영하고 있고 심지어 고려대 등 일부 대학은 미국의 수능시험인 SAT를 반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적도 있다. 게다가 한미FTA 체결에 따라 교육 시장마저 개방된다면, 미국의 SAT가 한국의 수능시험을 대체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기여 입학제 - 유전 명문대, 무전 삼류대

 

기여 입학제는 두 말할 필요조차 없이 국민의 절대 다수가 반대하는 제도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탈옥수 지강헌이 벌떡 일어나 이제는 ‘유전 명문대, 무전 삼류대’를 외쳐야 할 판국이다.

 

대학 측이 기여 입학제를 주장하는 이유는 단 하나 대학 재정이 어렵다는 이유이다. 소수의 부자의 돈을 받아 대학의 재정을 튼튼히 하여 다수의 학생들에게 혜택을 돌리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이다.

 

최근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의하면 수많은 사립대학들이 회계 장부를 조작하고 학교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여 수십 억대의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대학들은 재정 부족을 탓하며 학생 등록금을 연간 천만 원대로 올려 서민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더니 이제는 거액을 기부하는 학생에게 대학 합격증을 팔겠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그의 소설 <양반전>을 통해 돈을 주고받으며 양반 문서를 매매하는 세태를 고발하였다. “문과의 홍패(紅牌)는 길이 두 자 남짓한 것이지만 백물이 구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돈자루인 것이다”라는 양반의 특권을 듣고 난 부자가 “그만 두시오.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두 번 다시 양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돈을 받고 합격증을 팔려는 대학들, 그리고 그 합격증을 사서 온갖 혜택을 누리려는 기득권층, 우리 아이들을 도둑놈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3不 정책으로는 부족하다. 대학 평준화, 무상교육 실현!

 

고교 등급제, 고교 평준화 완성으로 넘어서야

대학 측이 줄기차게 고교 등급제를 주장하는 이유는 지역 간에 학력 격차가 존재하므로 내신 성적을 그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공교육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역 간 학력 격차가 생기는 이유는 지역마다 다양한 경제적, 문화적 여건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한 학생이 그러한 여건에서 최상의 결과를 냈다면 그것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만약 지역별 교육 격차가 그토록 문제라면 그 격차를 없애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지, 그 격차를 근거로 학생들을 출신 고교에 따라 차별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특목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외국어고, 과학고 등 특목고의 설립 목표는 해당 학문 분야의 특성화된 교육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특목고의 실상은 외국어, 과학 계열의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한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만약 대학 측이 외국어 학과를 진학하려는 외국어고 출신 학생들에게, 자연계열을 진학하려는 과학고 출신 학생들에게 일정 정도 가산점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법대를 가려는 외국어고 출신 학생들에게도, 의대를 가려는 과학고 출신 학생들에게도 대학은 일방적인 혜택을 주고 있다.

 

흔히 보수세력들은 고교 평준화 정책이 ‘획일화된 교육’이라는 비판을 한다. 하지만 우리 교육을 획일화하는 주범은 평준화 정책이 아니라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서열체제로부터 비롯된 가혹한 입시교육이다. 또한 평준화 정책이란 흔히 오해하든 단순히 ‘뺑뺑이’로 학생을 배정하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영재에게나 장애 학생에게나, 서울지역 학생에게나 산골마을 학생에게나 모든 이에게 ‘질 높은 공교육을 균등하게 제공’하는 것이 평준화의 진정한 취지이다.

 

따라서 우리 교육의 문제는 평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의 미완성’에 있다. 여전히 비평준화 지역으로 남아 있어 가혹한 고교 입시를 치르고 있는 지역에까지 평준화는 확대되어야 한다. 입시 명문고로 전락한 특목고가 진정한 설립 취지에 따라 제자리를 찾도록 해야 한다. 강북의 학생들도 강남의 학생들도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교 등급제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나아가 평준화 정책은 이제 대학교육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대학 본고사, 대학 평준화로 넘어서야

 

대학 본고사 논란의 핵심은 과연 각 대학이 학생 선발의 자율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회사에 들어올 신입사원에 대해서는 당연히 회사가 선발권을 갖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대학 입시와 회사 입사는 그 근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 이유는 대학 입시란 한 학생이 국가 차원에서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공교육을 이수하고 그 결과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시제도는 기본적으로 대학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의 결과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마련되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한국의 대학은 학생 선발의 자율권을 지나치게 행사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일본 등 극소수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전국의 모든 대학이 서로 다른 입시 전형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이것도 모자라 대학 본고사를 통해 학생 선발의 변별력을 더욱 높이겠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가혹한 입시경쟁체제를 학생들에게 강요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아니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표현대로 현재의 ‘죽음의 트라이앵글(내신-수능-논술)’ 위에 ‘삼불 폐지’라는 고통을 더해 ‘죽음의 삼각뿔’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에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서열화체제가 있다. 대학서열화체제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어떤 입시제도가 등장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학서열화체제의 해소는 곧 평준화의 완성, 대학 평준화를 의미한다.

 

대학 평준화란 흔히 오해하듯 ‘뺑뺑이’도 아니고 ‘서울대(라는 학교 하나의) 폐지’도 아니다. 프랑스처럼 모든 대학을 하나로 통합하여 ‘대학입학자격고사’를 통과한 학생이면 누구에게나 입학을 보장하여 ‘입학은 쉽게’ 하되, 대신 ‘졸업은 어렵게’ 하는 엄격한 학사 관리를 한 후, 졸업생들에게 공동의 학위를 수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이 ‘3불 3통 정책’이라 표현했듯이 ‘3불 정책’을 법제화하고, 전국의 모든 국공립대학이 공통의 입시 전형, 공통의 학점 이수, 공통의 졸업자격시험을 통해 국공립대학 통합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나아가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는 부실, 부패 사립대학을 국공립대학으로 전환하여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로 편입시키는 것, 그것이 대학평준화의 완성이다.

 

대학 평준화는 대학의 학문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정책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의 학문 경쟁력 저하의 근본적인 원인은 오히려 대학서열화 체제와 학벌사회에 있다. 필자가 졸업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경험적 사실에 의하면, 연세대나 고려대 등 명문사립대 신입생들 중 1/3 가량이 서울대 진학을 위해 ‘반수 - 대학에 다니면서 다시 대입시험을 준비하는 형태로 ‘재수의 절반’이라 하여 ‘반수’라 한다.’를 신중히 고민하고 있고, 소위 서울지역 중위권 대학 신입생의 경우는 절반 가까이 ‘반수’를 하고 있다. 즉 서울대를 제외한 모든 대학의 학생들은 또 다시 재수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취업을 위해 TOEIC 문제집을 들고 고시원으로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대학서열화체제와 학벌사회야말로 모든 학생으로 하여금 오로지 더 높은 학벌을 획득하기 위해 달려들게 만드는 원인이다. 이 가운데 진정한 학문의 즐거움에 몰두하는 학생은 사라지고 대학의 학문 경쟁력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두 번의 평준화 전환을 경험한 바 있다. 한 번은 초등학교 과열 입시 경쟁을 부추겼던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중학교 평준화를 실시한 것, 또 한 번은 명문고 진학 열풍을 낳았던 고교 입시를 폐지하고 고등학교 평준화를 실시한 것이다. 그 과정에는 가혹한 입시 교육으로 고통을 겪었던 아이들의 절규, 그리고 국민의 강력한 요구가 뒷받침했다. 이제는 대학 평준화를 통한 대학 입시의 폐지를 노동자 민중의 이름으로 요구해야 할 때이다.

 

기여 입학제, 무상교육 실현으로 넘어서야

 

교육은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을 위한 권리이다. 또한 교육 기회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전 국민을 위해 보장해야 할 성격의 것이다. 그러하기에 교육비는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헌법에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 (제31조 3항)”이라 명시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공교육 확대의 역사는 곧 무상교육 확대의 역사였다. 그리고 교육의 기회 균등, 무상교육의 확대는 노동자 민중의 처절한 투쟁을 통해 확보한 성과물이다. 돈이 없어 교육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 사회는 이미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무상교육의 의미는 단순히 돈을 내지 않고 교육을 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홍세화 선생이 지적했듯이 무상교육은 곧 세대 간, 계층 간의 사회적 연대를 의미한다. 기성 세대가 성실히 납부한 세금으로 다음 세대의 교육을 책임지고, 그 세대가 다시 땀 흘려 노동한 대가로 기성 세대의 노후를 책임지는 사회적 연대의 실현이다. 또한 부유층의 세금으로 저소득층의 교육비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연대의 실현이다. 그러하기에 개개인이 획득한 학력을 개개인의 출세를 위해 사유화하지 않고 다시금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적 연대가 실현될 수 있다. “내가 낸 돈으로 대학을 다녔으니 사회에 나가 그에 합당한 이익을 챙겨야지”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낸 돈으로 대학을 다녔으니 사회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지”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다.

 

기여 입학제는 전혀 반대의 논리이다. 돈을 내어 입학증을 사고, 학벌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전형적인 기득권층의 논리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듣게 되는 “내 돈 내가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왜 간섭이냐?”라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논리이다.

 

온갖 회계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교육 재정이 부족해 기여 입학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대학은 스스로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대학을 사회에 환원하면 될 일이다. 그러한 부실 부패 사립학교는 국공립으로 전환시키고 대학 평준화의 대장정에 동참시키면 될 일이다. ‘유아교육에서 대학교육까지 완전한 무상교육의 실현’으로 기여 입학제에 맞불을 놓을 일이다.

 

노동자 민중의 눈으로 교육 문제를 바라보자

 

얼마 전 금속노조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생활하면서 느끼는 애로사항을 묻는 질문에 자녀 사교육비가 37.0%로 가장 많았고, 주택문제가 23.5%, 노후대책이 18.5%로 그 뒤를 이었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자녀 사교육비를 대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 잔업과 특근 등 장시간노동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레디앙 3월 26일자) 노동자 민중이 아무리 임금인상 투쟁을 하고 뼈 빠지게 잔업을 하며 한 푼 두 푼 저축을 해 봐야 천문학적 규모로 치솟는 사교육비, 대학등록금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3不정책 문제를 비롯한 입시 문제는 결국은 계급, 계층의 문제이다. 기득권층은 현재의 교육 불평등 현실에도 만족하지 않고 ‘3不 정책 폐지’라는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리고 있다. 노동자 민중은 ‘3不 법제화’라는 방어적 수단뿐만 아니라 나아가 노동자 민중을 위한 평등한 교육권의 확립, 대학 평준화와 무상교육 실현이라는 공세적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특히, 이번 대통령 선거 공간을 이러한 계급, 계층적 교육 쟁점을 적극적으로 부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대학 평준화와 무상교육 실현은 어찌 보면 요원한 과제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안 이외로는 과도한 사교육비로 인한 민중의 부담 가중, 한창 꽃 피어야 할 나이에 스스로 자살을 생각하게 하는 입시 지옥이 사라질 수 없다. 노동자 민중은 이제 근본적인 입시 제도의 개혁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 잔업 특근을 해서라도, 식당일을 해서라도 학원비를 마련해 내 자식만이라도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개인적 욕망을 뛰어넘어 노동자 민중의 자녀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적어도, 교육이 계급 재생산의 도구로 전락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교육은 기득권층이 자신의 권력을 대물림하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전면적인 발달을 돕는 고귀한 노동이며, 우리 학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형빈 님은 서울 이화여고 교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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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29일 금욜

2006년 12월 29일 금욜

12월에 일기를 한 번 밖에 안 썼다.

결혼하고 특히 아이가 생긴 이후 일기를 잘 안 쓰고 있다.

바빠서라기 보다 사고의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일이 없다는 것이 힘들고 허무하게 한다.

가정일이라는게 무가치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실현에 관계되는 어떤 의미를 주지 못 한다는 건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

특히 임신기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출산 후 적어도 아이가 24개월이 되기까지는 육아에 매일 수 밖에 없는데, 예를들면 대부분의 교육시설에서 아이를 잠시 맡아주는 놀이방의 가능연령이 24개월이 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둘째 아이가 2년 간격으로 태어난 나의 경우, 만 4년을 집밖 출입을 하지 못 한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어린이집은 0세부터 아이를 받아주도록 되어있지만 실제로 많은 어린이집에서 인건비절감을 이유로 12개월 이전에는 꺼려하고 있다. 부모들 또한  직장을 다니느라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엄마 손으로 거두고 싶어한다, 종일반으로.

하지만 도시의 핵가족 문화 속에서 엄마가 종일반으로 육아를 하는 것이 좋지만은 아닌 것 같다.  시댁을 지방에 두고, 친정은 같은 서울이라지만 지방같은 거리에 떨어져살고 더구나 건강이 안 좋으신 엄마네 집안일을 오히려 도와야 할 판으로 잠시라도 아이를 맡기고 집밖출입을 할 조건이 전~혀 안 되는 내 경우,  하루종일 아이와 둘이서 눈 맞추기를 하고 있어야 하니 엄마도 아이도 행복하지 못 하다.

갓난둥이 둘째와 보내기위해 엊그제 두 돐을 넘긴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빠의 출근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는 세살배기의 두 눈은 잠 속에 묻혀 잘 떠지지 않는다. 오늘처럼 맵게 추운 아침에도 이 어린 아이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출근이라도 하는 것처럼 집을 나선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내게 아침에 아이가 등원을 하면 조출하는 당직선생님의 보호 아래 있다가 10시가 되면 담임선생님과 함께 오전간식을 먹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점심을 먹은 후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간식을 먹고 오후 3시부터는 하원이 시작되면서 선생님의 보호 아래 있다가 6시까지도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면 당직선생님이 7시반까지 보호하게 된다고 알려주었다.

말하자면 10시 이전에는 일찍 가도 그냥 데리고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후 3시 이후에도. 물론 어린이집은 교육 만이 아니라 보호하는 곳이고, 내가 데리고 있다 해도 보호 이상 하는 건 없다, 하루종일.

아이가 아침에 출근하듯 나서서 저녁에 퇴근하듯 귀가하는 건 참 보기 안 쓰럽다. 겨우 두 살 밖에 안 되었는데. 더구나 어둠이 일찍 깔리는 겨울에는, 결국 내가 아이를 보는 시간은 저녁 시간 뿐이고 다음날 아침 일찍 가야 하니까 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물론 아이들은 성장판이 열리는 밤 10시 이전에 잠자야 하는게 당연하지만.

그나마 어린이집이 대기업도 아닌데 주 5일제라니 다행이다. 어린이집에 오는 아이들의 부모들을 대기업사원인 듯 주 5일제 근무하는 것으로 간주해 주는 것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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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한국노총 표준생계비 2006년

한국노총 표준생계비 발표
4인 가구 표준생활 위해선 420~460만원 필요
식료품비 주거비 가장 높아…가구수 늘수록 교양오락비는 줄어
 
4인가구가 먹고 자고 마시며 약간의 오락을 즐기는 등 표준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선 한달에 평균 420만원에서 460만원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신가구 또한 150만원의 생활비를 써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23일 한국노총이 발표한 ‘2006년 가구별 표준생계비 측정결과’에 따르면 가구주 40세를 기준으로 부부와 초등학생 자녀 2명으로 구성된 4인가구(Ⅰ)의 표준생계비는 422만1,933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가구주 46세를 기준으로 한 부부와 고등학생과 중학생 자녀를 둔 4인가구(Ⅲ)의 경우에는 460만173원의 생활비가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 1명으로 구성된 단신가구의 경우도 표준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150만4,168원을 소비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성인 2명인 부부로 구성된 2인가구의 경우는 1인가구의 두 배보다 좀 낮은 260만9,300원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구주 35세를 기준으로 부부와 1명의 유아를 둔 가구의 경우 표준생계비는 323만7,009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05년에 비해 단신가구는 7.7%, 2인가구는 14.3%, 3인가구는 10.6%, 4인가구(Ⅰ)는 6.6% 증가한 수치다. 4인가구에 비해 다른 가구의 증가율이 높은 이유는 2001년 실태조사 시 4인가구에만 포함됐던 품목이 이번 실태조사에서는 1~3인 가구로 확대되거나, 소비지출이 증가했기 때문인 것으로 한국노총은 밝혔다.

2006년 한국노총 표준생계비 (단위 : 원)
구분 단신가구 2인가구 3인가구 4인가구Ⅰ 4인가구Ⅱ 4인가구Ⅲ
가구구성 성인1인 성인 남녀 가구주35세
배우자32세
5세(유)
가구주40세
배우자37세
11세(초)
9세(초)
가구주43세
배우자40세
14세(중)
12세(초)
가구주46세
배우자43세
17세(고)
15세(중)
식료품 270,747 568,603 685,300 894,258 943,175 972,473
주거비 263,074 425,146 483,754 740,631 740,631 740,631
광열수도비 62,387 73,933 86,930 107,165 107,165 107,165
가구가사용품비 78,052 122,116 132,330 147,807 148,094 148,382
피복신발비 82,181 163,112 192,914 235,262 246,724 255,976
보건위생비 84,890 149,252 186,677 226,513 230,139 230,139
교육비 48,150 48,150 234,800 377,262 363,081 512,420
교통통신비 161,900 433,083 462,076 531,136 566,704 602,272
교양오락잡비 327,470 367,006 410,676 418,293 418,293 418,293
제세공과금 125,317 258,899 361,552 543,606 563,038 612,422
합계 1,504,168 2,609,300 3,237,009 4,221,933 4,327,044 4,600,173

이번 표준생계비 결과는 한국노총은 지난해 7월20일부터 한달간 소속 조합원 1,749명을 대상으로 벌였던 2005년 생활비 지출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와 함께 소비자 물가 변동사항을 자체 개발한 표준생계비 산출 모형에 대입해 산출한 수치다. 또한 한국노총은 지난 2002년 표준생계비 산출 모형을 바꾼 이후 4년 동안의 가구의 생활양식과 소비수준의 변화를 측성 분석해 이 결과를 토대로 모형 개정에 반영했다.

또한 최저생계비와 달리 표준생계비는 식료품비와 주거비, 제세공과금 등 생활필수품만 아니라 교육비, 교통통신비, 교양오락잡비 등 표준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활비를 모두 합산한 것이다.

이에 따라 4인가구(Ⅰ)의 생활비를 항목별로 살펴보면 식료품비 21.2%(894,258원), 주거비 17.5%(740,631원), 조세공과금 12.9%(543,606원), 교통통신비 12.6%(531,136원), 교양오락잡비 9.9%(418,293원), 교육비 8.9%(377,262원), 피복·신발비 5.6%(235,262원), 보건위생비 5.4%(226,513원), 가구가사용품비 3.5%(147,807원), 광열수도비 2.5%(107,165원) 순으로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구성원이 늘어날수록 교육비와 주거비의 비중은 점차 높아지는 반면 교양오락잡비는 크게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노총은 ‘2006년 표준생계비 산출결과’를 바탕으로 2월 중순경 2006년도 임금인상 요구지침을 결정할 방침이다.
 
김봉석 기자  seok@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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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도서안내-맑스,왜 희망인가?

[도서안내]맑스, 왜 희망인가?
메이데이
21979 263  /  0
2005년 06월 17일 14시 14분 47초







  맑스, 희망인가?


2005-05-25 | ISBN 89-91402-00-3


반양장본 | 343쪽 | 223*155mm(A5신) | 15,000원


구입문의 | 도서출판 메이데이 (02-322-5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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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맑스, 희망인가?'를 화두로 진행된 맑스코뮤날레 2회 학술문화제의 발제문을 엮은 책이다. '코뮤날레'는 코뮤니즘과 비엔날레의 합성어로, 2년마다 치르는 맑스주의자들의 코뮤니즘 축제라는 뜻이다. 지난 2003년 '지구화시대 맑스의 현재성'이란 화두로 제1회 대회가 열린 바 있다.


'맑스의 코뮤니즘 어떻게 가능한가?', '맑스와 함께/너머', '맑스와 현 시기 한국의 좌파 운동'의 3장으로 나뉘어진 책은, 각각의 주제아래 다양한 필자들의 글을 모았다. 참여 필자는 다음과 같다.


조정환, 황선길, 박영균, 이진경, Andreas Arndt, 이성백, 박주원, Holger Heide, 강수돌, 강내희, 오세철, 윤수종 (이상 수록 순)


맑스 왜 희망인가? - 필자들의 말


"오늘날의 코뮤니즘은 모든 법칙, 동일성에 대항하는 특이한 삶들의 으르렁거림, 차이와 투쟁들의 유통과 연결, 즉 반복의 네트워크 그 자체이다."(조정환)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 의식을 일상에서 함양하고, 일상적인 자본주의 제도에 구조화된 권위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이의 기초를 이루는 성적 억압에 대한 토론을 전면화해야 한다."(황선길)


"'정치적 실천'과 결합되는 맑스주의 운동은 궁극적으로 자본의 '밖'을 실현하고 '밖'을 현재의 권력이자 미래의 현실태로 생산하는, 즉 코뮌을 실현하는 주체의 형성이자 그 권력의 창출일 수밖에 없다." (박영균)


"구성적 차이의 정치학은 무엇보다도 우선 모든 차이를 대립과 모순으로 인도하고, 결국은 적대의 효과 아래 복속시키는 '척도의 권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 정의된다." (이진경)


"동일성 범주야말로 차이들이 구별될 수 있는 차이들의 연관을 드러내 주는 범주이다." ( Andreas Arndt)


"이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성 개념의 규정, 이성과 욕망의 관계의 새로운 설정을 통해 계몽의 기획을 복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이성백)


"국가나 자본주의와 전적으로 다른 시선으로 살아야 하면서 동시에 국가나 자본주의를 항시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 바로 여기에 코뮌의 어려움이, 그리고 코뮌의 자유로움이 있다." (박주원)


"우리가 겪게 되는 그 어떤 두려움도 회피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인정하고, 동시에 분노나 노동, 소비 따위의 중독물을 통해 자기기만하기를 중단해야 한다." (Holger Heide)


"이를 자본(노동)을 거부하는 두 방식이라 보고 싶다. 즉 '저항하는 불복종'(노동자운동-자본 안에서 투쟁)의 방식과 '형성하는 불복종'(공동체운동-자본 밖에서 투쟁)의 방식이 그것이다." (강수돌)


"좌파적 문화운동은 문화와 예술을 작품 중심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전체 사회적 과정과 연결되는 고리들, 예컨대 문화제도, 법, 예산 등의 문제들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강내희)


"관료주의와 엘리뜨주의 그리고 종파주의에 찌들은 이들의 운동을 밑으로부터 억압 착취당하는 프로레타리아트에 의해 전복시키는 일이며, 이것 역시 진정한 맑스주의에 기초하는 일이다." (오세철)


"소수자운동은 바로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변형되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노동자 내부의 소수자적 특징을 배제하지 말고 오히려 포괄해 나가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윤수종)


목차


제1부 맑스의 코뮤니즘, 어떻게 가능한가?


오늘날의 코뮤니즘과 삶 정치 / 조정환


평의회 공산주의 / 황선길


제2부 맑스와 함께/너머


차이의 실천을 넘어 적대의 실천으로 / 박영균


맑스주의에서 차이와 적대 문제 / 이진경


지구화, 변증법 그리고 차이 / Andreas Arndt


맑스 사상과 차이의 철학 / 이성백


오웬과 푸리에, 19세기 사회주의의 또 다른 길과 꿈 / 박주원


노동 사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과연 맑스의 위기 이론이 필요한가? / Holger Heide


제3부 맑스와 현 시기 한국의 좌파 운동


현대 공동체 운동과 맑스 / 강수돌


맑스와 한국 좌파 문화운동의 방향 / 강내희


사회주의 세력의 합법 정치 전술에 대한 단상 / 오세철


소수자 운동과 좌파 운동 / 윤수종


언론이 본 맑스 코뮤날레 "맑스, 희망인가?"


민중언론 참세상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것 알리는 자리


프로메테우스 제2회 맑스코뮤날레 첫날 풍경


한겨레 21세기적 '사회구성체' 논쟁 불지핀다


시사저널 혁신의 진통 딛고 희망으로 부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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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만들기는 했는데...

홈피 만들어서 계정받아 출판은 했는데, 수정해서 다시 올리다가 막혔다.

대체 왜 수정한 것들이  다시 출판되지 않는지...

구청에서 공짜로 가르쳐주면서 성의없었던 강사에게 제대로 물어보고 확실히 배우지 않았던 것이 후회된다.

홈피, 가족홈피 만들어서 시댁 식구들에게 알리고 친정식구들에게까지 확대하려 한 나의 꿈이 좌절되고 있다. 슬프다.

진보넷에 블로그를 만들어서 비슷하게 해볼까나...

가족 홈피로는 안 어울리니까 친구들에게 먼저 알려볼까나...

전화를 열흘에 한 통 정도 밖에 안 하니 통 친구들과 교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그네들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보구싶다.

블로그에 이것 저것 쓰면서 시도해보구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활로를 뚫어봐야지...

힘내자, 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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