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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철학사를 서술하는 데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가능할 것이다. 어떤 하나의 일관된 관점으로 철학사를 서술한다는 것 자체가 단순히 내용을 기술하고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는 학적 체계 혹은 이론마저도 제시하는 작업에 다름이 아니다. 이 관점을 역사적 내용에 관통시키는 것이 바로 다름 아닌 학문성을 완수하는 작업니다. 그 여러 관점 중 가장 쉽고 간편하게 적용 가능하면서 시원에 있어서 포괄성에 있어서 가장 풍부하고 게다가 중립적이기까지 한 관점으로 서술하라면 바로 보편과 개별의 상관관계로서 철학사를 서술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보편과 개별의 문제는 철학사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도 가장 거시적인 조망의 기초가 됨은 물론이다. 이제 가장 교과서적이면서 가장 가치중립적인 관점으로 철학사의 가장 커대한 분기를 이룬 세 철학자에 관한 철학사를 서술해보고자 한다.

철학사를 관찰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무수히 복잡하고 다양하며 중층적으로 전개되는 사유의 모험 속에서도 그 구체적 담지자인 철학자들은 하나의 통일적 유형으로 서로 엮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립과 통일이다.

한 번 나열해 보자

최초의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소피스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로크, 버클리, 흄, 그리고 바로 칸트<->헤겔 이다. 그런데 아마 칸트와 헤겔, 맑스를 엮는다면 맑스의 위치는 이 구도에서 마지막 저수지라는 의도로 진행될 밖에 없을 것이다. 즉 맑스 이전의 관념론적 서양철학 전체와의 대결로서 말이다. 굳이 대비한다면 방금의 구도에 불참했던 플로티누스라면 아마도 맑스의 반대 극에 모셔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도식은 서양철학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율동으로서 파악해야 함을 있어서는 안된다. 대립 안에서도 대립 철학자 각자가 이중성과 내적인-관계적인 모순을 지니면서 중층적으로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도식의 개념은 이렇게 보다 섬세해져야 하고 구체성의 날을 세움과 동시에 전체적인 윤곽에 있어서 모서리를 다듬은 형태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맑스를 진정으로 마지막 저수지라 가정했을 때의 바로 그 변증법적 근거이다.

그럼 이제 철학사를 관통하는 보편과 개별의 인드라망 속에서 하나의 소우주적 모델로 칸트와 헤겔, 맑스의 삼박자 구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이 구도는 보편과 개별 그리고 양자의 지양이 다시 보편이 되어 끊임없이 전개해나가는 生의 율동이다.

 

Kant

어느 철학사에서나 칸트를 칭송하는 문구로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철학사의 물줄기는 모두 칸트로 흘러들어갔으며 이후 철학사는 바로 칸트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근대성의 맹아가 칸트에 이르러 기존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 설정을 통해서 근대성의 이념을 정립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면 이러한 분수령으로서의 칸트를 지칭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바로 인식이다. 그리고칸트가 철학사에서 새로운 보편의 정립으로 자리하는 이유가 바로 보편성의 성립 가능근거로서 인식 이론이다. 칸트 이전의 서구 형이상학이 존재론 특히 신학적 존재론에 머물러 있었다면 데카르트와 영국경험론의 대립 과정에서 전개된 인식의 문제가 칸트에게서 드디어 진정한 의미의 인식론으로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인식론은 바로 인간학적 인식론이다.

드디어 인간은 존재의 영역에서 인식의 영역으로 진보의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우리가 향유하는 첨단의 과학적 혜택은 바로 근대의 인식론적 진보의 귀결이다. 근대 이전에는 우리 즉 인간이 과연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 도대체가 진정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칸트가 3대 비판서로서 전개한 비판철학의 핵심이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보편성 즉 이론적 체계화, 근거의 모델을 존재에게서 찾았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인식은 단지 정신적 직관과 사유의 형태로서 접근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데카르트에 이르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정식화를 통해 제시된 인간적인 주체의 최종근거는 드디어 진리의 근원을 존재, 신에게서 인간 자신의 발견하게 된다. 이제 새로운 진리의 근거이자 기준이 되는 사유하는 자아가 정립되자 이 자아 즉 주체와 대립되는 외부의 경험적 사물과의 관계가 정립된다. 근대 이전의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몰주체적인 인식을 다루었다면 근대에서부터는 정립된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라는 새로운 보편과 개별의 대립구도가 탄생한 것이다. 이제 데카르트가 주체의 영역을 설정하였다면 영국경험론은 대상의 영역을 설정한다.

칸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직관(내용)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이 말은 칸트가 대륙합리론과 영국경험론을 종합하고자 하는 목적을 핵심적으로 표현한 명제이다. 하나의 보편(이성)과 개별(경험)의 통일성의 원리를 획득하고자 한 것이다. 이 문장은 순수이성비판의 오성범주 연역 부분에 등장하는 말로서 선천적 종합판단의 성립 가능성을 증명함을 통해 이성과 경험을 통일시킨다. 이성은 곧 주체이며 주체와 대상의 통일에 다름이 아니다. 논리적인 명제 분석을 통해 이를 증명하는데, 분석명제와 경험을 지칭하는 단어가 종합명제를 통해 통일됨을 증명함으로써 경험론과 합리론을 화해시킨다.

칸트가 이성과 경험을 종합해가는 과정은 앞에 이야기한대로 인식의 성립 과정이다. 게다가 비판철학적 목적을 가지기에 인식 이론의 전개를 통해서 기존의, 인식론이 뒷받침되지 않는 형이상학의 한계 지점을 밝히는 동시에 선험적 오성에 기반한 인간 인식의 한계까지도 도달한다. 이 한계는 바로 칸트의 선험적 원리의 도달 한계이면서 동시에 이성과 경험 양자의 통일성이 획득될 수 있는 가능 영역의 한계이기도 하다.

칸트의 핵심 개념은 선험이다. 사실은 초월이라고 번역해야 더욱 뜻이 정확하기도 하다. 적어도 오성의 종합 능력에 있어서는 선험의 의미를 가지지만 이성적 인식의 영역에 있어서는 일종의 초월론적 인식의 근거로서 주체의 초월성을 설정하게 된다. 여기서 초월적이라 함은 동양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 고양이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식, 종합적 인식의 가능조건이 경험계를 초월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초월론적 주체는 고대 플라톤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사실 보편과 개별(구체성)의 종합이지만 그 핵심적 실마리는 보편적인 원리 즉 초월론적 이성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모든 진리의 가능근거로서 인간의 주체는 초월론적 이념의 성격을 가진다.

너무 이야기가 나아갔다. 다시 되돌아가면 사실 대상의 인식에 있어서 선험적인 오성판단은 하나의 중요한 한계를 시사한다. 바로 오성적 인식에 있어서는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선험적 오성은 단지 주어진 경험의 잡다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의 원리로 가공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여기서 유명한 칸트의 물자체 가설이 등장한다.

물자체란 즉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총칭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사유가 인식론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대상 자체의 경계 너머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식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경험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칸트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근원으로서의 물자체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물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경험의 유한성에서도 도출되며, 우리 인식의 범주적 성격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도출된다. 우리의 경험의 밖과 우리의 인식의 형식의 밖에 분명히 풍부한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 영역을 신, 영원성, 자유의지, 필연성 이 네 가지 이념이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서는 이율배반에 빠질 수 밖에 없을 증명함으로써 남겨 둔다.

사실 진리의 빛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본질은 물자체적 성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는 예지계의 영역이라고 한다. 이제 칸트는 오성적 인식의 한계를 설정하였으므로 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한 본격적인 접근 방법을 모색한다. 바로 그러한 방법이 바로 실천이성의 능력과 판단력이 발휘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칸트의 비판이론은 윤리적 문제에 대한 실천적 요청으로서의 이성과 미적 판단력의 가능근거로서의 공통감에서 완성된다. 그 구도의 핵심은 바로 초월론적 이성이다.

 

Hegel

우리가 인생의 기준을 완벽하고 지고지순한 곳에 두고 본성의 선량함을 순수하게 지키며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는 바로 칸트의 추종자가 될 것이다. 그는 완전한 이상에 대해 믿고 동경하며 초월적인 이념을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그러므로 자신의 불완전성과 나약함을 비판적으로 겸허하게 음미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앎이라는 것을 완전성과 초월적 절대성에 두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서 한 발짝 나아가는 현실적인 진보를 진정한 앎으로 여긴다면 그는 헤겔의 제자가 된다. 그러기에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실질적 사업을 성취하고 사람과 부대끼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타자까지 포용하기에는 헤겔적인 정신이 보다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칸트는 지키는 데 강하고 헤겔은 이룩하는 데에 강하다. 그래서 헤겔의 후계자인 맑스는 현실적인 사회주의를 꿈꿀 수 있었고 실재로 레닌에 의해 사회주의는 현실적으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칸트와 헤겔의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관상만으로도 이러한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칸트는 모 아니면 도라는 명료하고 깨끗한 성품으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조용히 살아갔던 것이고, 헤겔은 모순덩어리인 인생의 고뇌와 세상의 풍파를 얼굴 가득 찡그린 표정 속에 짊어지고 묵묵히 진득하게 한 발 한 발 걸어갔던 것이다. 헤겔의 학창 시절 별명이 그래서 노인이라고 불리워지게 된 점도 재미있다.

더 확대해석한다면 깨끗하게 자기를 지키는 자는 조용히 처박혀서 편안하게 일생을 즐길 수가 있고, 이상과 현실과의 간격이 큰 만큼 그 간격의 중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다만 너무나 깨끗하고 순수한 이상을 기준으로 삼기에 큰 실수는 하지 않고 무난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격에서 모순을 안고 끌어안고 나아가려는 자는 세상을 개척해나가는 동시에 어느 순간 물들고 타락하기 쉬게 마련이다.

사실 너무나 이분법적이고 희화화된 구분일 수 있지만 진정 칸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철학이고 헤겔은 밑바닥에서 높은 곳을 향해 전진해나가는 철학이다. 바로 보편과 개별의 대립 구도이다.

헤겔의 주저는 정신현상학이다. 정신의 현상 즉 현상해 나가는 정신(知)에 대한 학이다. 사실 헤겔의 이후 평생에 걸친 학적 업적은 이미 이 정신현상학에서 포괄적으로 예비 아니 조망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사실 변증법이라는 개념의 운동은 그 정신현상학 서론에서 이미 전개가 시작되었고 예술, 종교, 정신이라는 최후의 목적을 향한 작업이 이미 예정되었다고 보아야 정당하다. 그래야만이 헤겔 변증법의 역동적 힘의 본질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다.

헤겔의 저작에서도 마찬가지로 보편과 개별의 문제는 핵심적 주제로 다루어진다. 기원은 사실 플라톤에서 시작된다고 봐야 하는데, 보편적 이데아가 자신을 세계에 분유하면서 자기동일성이 파괴되는 모순을 주제로 한다. 즉 헤겔의 표현대로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차이)의 통일성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현상계는 무수한 비동일성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데 그것을 정신이 파악하는 원리는 동일성 즉 통일성의 원리이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으로서의 체계라는 이념이 실현되며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일성은 비동일성을 통일성 속에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다.

핵심적인 키워드는 아마 플로티누스plotinus의 一者 설일 것이다. 사실 자기동일성의 문제에 대해 희랍철학은 선의 이데아라는 애매한 가능성만을 남김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결국 초월적 이념 우위의 철학은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플로티누스와 같은 존재를 초월하는 존재를 넘어서는 곳으로 숨을 수 밖에 없다. 존재를 넘어서면서 존재의 근거인 것이 바로 一者이다. 이 일자는 헤겔에게서 정신적 生으로 변모하고 내적 모순을 통한 개념적 운동의 원인이 된다.

칸트가 이런 난점을 인식의 한계설정을 통한 현상계와 예지계의 명확한 구분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면 헤겔은 과감하게 형식논리의 모순율을 어기고 하나의 존재 안에 긍정과 부정의 계기를 동시에 통합시킨다. 존재는 이제 자신 스스로 안에 모순을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플로티누스의 존재 너머라는 초월의 의미가 영향을 준다.

이러한 모순이 한 존재 안에서 구현 가능하기 위해서 헤겔은 관계 즉 계기를 주목한다. 핵심적인 표현으로 헤겔의 철학은 본질적 탐구가 아닌 개념의 탐구이다. 칸트까지는 세계의 본질로부터 현상계를 연역하는 전통이 크게 영향을 미쳤으나 이제 헤겔에서부터는 낮은 단계의 현상 그 자체가 정신적 진보를 향해 한 발작 한 발작 나아가는 도정 즉 발전의 진리 개념을 제시하면서, 근대의 이념인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라는 인식의 도야를 향해 나아간다. 개념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이며 이런 세계사적 정신의 구현으로서 개념의 현 주소가 바로 진리 그 자체이다. 유명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가 그것을 말한다. 본질이 아니라 개념을 인식의 실마리로 삼는 것은 그 운동성과 관계성의 개방적 성격에 있다. 이제 철학은 시대정신을 말하기 시작한다.

헤겔의 변증법적 구도는 일종의 원환구도이다. 흔히 생각하는 한 방향으로의 발전만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해 나가는 知의 역정은 최종 도달된 정신의 고양에 이르러서 어느덧 자신이 원래 출발했던 자아 자기 자신에 다름이 아님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칸트적 의미라면 최초의 출발에 이미 모든 것은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고 구체적이 내용이 구현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헤겔이 있어서는 최초의 출발은 힘이자 운동 즉 가능성이지 내용적 현실성은 아니다. 내용적 현실성은 知가 자신의 동일성의 모순으로부터 소외되어 외화의 역정을 거치면서 점차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변증법적 전개는 사실 종착점이 없다. 이 점은 기독교 철학과 차별되는 점이다.

헤겔의 엑기스를 변증법으로 보느냐 체계로 보느냐에 대해 분분한 이론이 많이 있어왔다. 하지만 위의 논의를 따른다면 헤겔의 엑기스는 변증법임에 분명하다. 설사 헤겔 스스로조차 분명히 자각하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체계가 엑기스라면 절대정신에 이르러 헤겔의 체계는 완성되고 더 이상 도달해야 할 세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과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에서 주는 교훈은 헤겔의 철학이 변증법적 역동성과 개방성에 있음을 증명한다. 헤겔에게서는 한 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그 나아가는 힘과 방법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절대정신에 이르는 길은 수많은 갈래가 있으며 정신현상학에서 보여준 역정은 그 갈래의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우리는 그 예시에서 우리 자신의 현실적 삶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과 지혜를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학자는 정신현상학의 가장 높은 경지는 마지막 절대정신이 아니라 바로 전 종교 장에서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개방성과 열려진 모순을 끌어안는 논리는 헤겔에게 미친 동양사상의 영향을 추측케 하기도 한다. 대논리학에서 A와 ~A의 개념적 이중화를 통한 존재와 무의 통일은 불교의 공의 논리와 친화력을 갖는다. 하지만 헤겔 자신은 동양사상의 영향에 대해 인정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동양적 정신을 아직 이성의 단계에도 고양되지 못한 즉자적 정신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헤겔이 서술한 철학사에서 소개되는 중국 고대 사상이나 불교논리학에 대한 이해는 많이 피상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굳이 헤겔과 동양을 엮어 보려는 노력은 별로 영양가가 없을 것이다.

현상知가 점진적으로 현상한다는 사상. 이것은 칸트의 물자체 개념과도 중요한 연관이 있다. 물자체가 비록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현상은 물자체의 현상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지의 것에 대해서는 칸트처럼 미지의 것을 지각하는 초월적인 특별한 능력을 바라는 것보다 현상으로 드러나는 미지의 베일이 펄럭이는 율동을 관조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고 헤겔은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후설의 현상학과 가다머의 변증법적 해석학에도 이어진다.

이제 헤겔에 이르러 보편 속에 개별이 연역되거나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이 개별로 전개해나가는 전체성의 운동 자체가 진리라는 인식에 이르렀다.

 

Marx

포이에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헤겔에서는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다.” 이것은 유명한 “철학은 이제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어야 한다” 라는 맑스의 힘찬 선언으로 이어진다.

맑스는 한 마디로 유물론자다. 철학의 출발을 이성이 아니라 현실로 대체한 위의 선언에서 그의 표현대로 헤겔을 거꾸로 뒤집은 유물론적 근본 입장이 드러난다. 하지만 변증법의 정신은 다른 물적 토대 속에서 맑스에 의해 그대로 실현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격한 말과는 달리 맑스는 실제로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적인 의미의 신성성에 깊이 애착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그가 구상한 사회주의 이상사회는 단지 경제적 평등만이 전부가 아니라 경제적 평등을 통한 최소한의 인간적 삶의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자유, 그리고 미적 취향을 그야말로 인간성을 실현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산업혁명기의 가장 잔인했던 노동에 대한 착취의 현실에 직면해서는 맑스의 문화적 취향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많이 소외되어 읽혀졌다.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주의자이면서도 목표로 하는 정점은 가장 고상하고 순수한 인간성의 솔직함에 고향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경제적 평등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성의 외면이자 소외된 형태인 돈이 인간의 인문적 자유의 가능성을 억압하는 측면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맑스에게는 순수 예술과 현실 참여 예술이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결합한다. 이 점은 현대에서도 예술에 있어서 상업주의와 예술적 창조력의 자율성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깊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맑스에게서 개별자는 관념적 영역의 개체성이 아니리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적으로 만져지는 물질의 개체를 뜻하게 된다. 당연히 이러한 시각의 전환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질지라도 수천 년의 기독교 문명의 세례 속에서 살아온 서구인들에게는 과학의 혁명적 발전이 아니었더라면 상상하기 힘든 당연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실 현대인은 그야말로 유물론자들이다.

철학의 출발을 현실에서 시작한다는 명제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라는 세계관적 투쟁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맑스주의 철학이 인기가 없어진 지금에도 격변의 시기에 맑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선배 학자들은 학문적 방법론에 있어서 맑스에게 힘입고 있는 바가 매우 크다. 그것은 바로 물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교훈이다. 지금의 학문적 풍토가 발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가, 바로 논문을 쓰거나 저작을 내거나 할 때 비록 맑스주의와 결별하고 포스트주의적 작업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역사적, 물적, 경제적 토대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확대해석한다면 정말 학문적인 엄밀한 작업들도 고증적 방법이나 문헌학적 방법, 역사적 배경을 반드시 논문에 제시하는 방법을 통해 맑스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 외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논술시장에서 과거 운동권 출신으로 맑스주의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접한 세대들이 현실과의 생생한 접합점을 찾고 오히려 더 참신하고 구체적인 발상들을 발휘하고 있다. 출판 분야에서도 이런 사회주의 운동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의 역량은 두드러지게 발휘되고 있다. 상아탑 속에서의 관념적 자기 만족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실물적 대상들이 움직이는 변즉법적 운동의 원리였다. 그래서 그 시대에 그리고 지금에서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 획득의 문제를 자본이라는 즉 돈이라는 실물의 운동 매커니즘을 분석함으로써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과업의 결정체가 바로 자본론이며, 헤겔에서의 현상지와 같은 역할을 자본론에서는 상품 장에서 대표적으로 분석한 자본이 대신하고 있다.

맑스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인간학적인 실존주의적인 맑시즘과 과학적 맑스주의를 든다. 전자는 사르트르가 대표하며, 후자는 알튀세르가 대표적이다. 시기상으로도 전자의 입장은 주로 공산당선언으로 대표되는 맑스의 청년기 초기 저작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고, 후자의 입장은 자본론에서 확인된다. 전자는 당시 노동 현상의 처절한 인권유린의 실태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권익 확보에 중점이 맞춰져있고 후자는 사회주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주도면밀한 이론적 근거를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초기의 저작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서의 소외이론이 중심을 이루고 후기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 기제를 파악하기 위한 정치경제학적 노동가치론이 중심을 이룬다.

맑스주의의 키워드를 말하자면 소외와 착취이다. 초기 저작에서 소외란 자신이 자신의 본질인 바의 스스로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동이란 본래 인간성과 능력을 실현시키는 성스러운 활동이었던바 본래적으로 인간은 노동 속에서 즐거움과 자아실현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대에서는 노예제라는 신분적 제약 속에서 근대 산업혁명 이후부터는 대량생산과 분업, 노동과 기획의 분리 과정을 통해 노동이 인간성의 실현으로부터 멀어지는 소외의 비극을 낳았다. 그래서 사회주의라는 평등에 기초한 계획 경제만이 인간성으로부터 노동이 소외되지 않는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더 나아가 착취의 측면이란 후기의 자본론에서 본격적으로 논구되는 대상으로서 자본주의의 본래적 속성이 착취에 기반하고 있음을 경제학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자본주의 자체가 결국은 노동 계급의 투쟁에 의해 저절로 붕괴될 것임을 하나의 필연적인 역사적 법칙으로 제시한다. 여기에는 노동가치설에 근거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이루어진 자본 구성을 분석하고 자유 시장경제의 본원적 속성에 근거한 평균이윤율 저하법칙을 통해 주기적 공황을 통한 자본주의의 종말과 공산주의 사회의 필연적 도래를 증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증명된 현실을 논외로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기술 혁신에 힘입어, 그리고 케인즈 이론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복지 체제의 복합적 운용 마지막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맑스의 제한된 성찰로 비롯하여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되새겨지는 철학의 거시적 문제는 바로 세계의 모습의 전체성과 이중성이다. 헤겔에게서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보편과 개별의 변증법적 전개는 전체로서의 세계의 모습이 보편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덧 개별의 제약을 겪고 다시 개별을 지양하고 통일한 보편이 사실은 이미 어느덧 개별에 불과하게 되는 세상의 끊임없는 원환운동을 보여준다. 이제 이러한 세계의 무궁무진한 율동 속에서 일견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듯한 신비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가라는 과제가 과중한 책임으로 다가온다.

출처
[직접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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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칙들 [ laws , 法則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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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니츠 (Leibniz), 로크 (Locke), 흄 (Hume), 베이컨 (Bacon), 데카르트 (Descartes), 버클리 (Berkeley), 칸트 (Kant), 밀 (J. S. Mill), 마하 (E. Mach), 러셀 (B. Russell), 나겔 (E. Nagel), 헴펠 (C. G. Hempel), 굳맨 (N. Goodman), 맥키 (J. L. Mackie), 훼웰 (Whewell), 하레 (R. Harré), 캄벨 (Campbell), 바스카 (Bhaskar), 라카토스 (Lakatos), 브래들리 (F. H. Bradley), 브랑샬드 (B. Blanshard), 어윙 (A. C. Ewing), 람세이 (F. Ramsey), 쉬릭 (M. Schlick), 뒤카스 (C. J. Ducasse), 헤스 (M. B. Hesse), 닐 (W. Kneale), 포퍼 (K. Popper), 화이트헤드 (A. Whitehead), 아친스타인 (Achinstein)

1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법칙에 관한 근대적인 개념이 나옴으로서 신학적인 뜻(內包, connotation)과 규범적인 뜻을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법칙 그 자체는 언명(言明, 明題, statement)과 그 언명이 의미 하는 것을 적용하는 것이 막연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옴의 법칙은 명제(命題, proposition)와 그 명제가 기술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즉 어떤 변수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서로 다른 종류의 언명 혹은 현상을 법칙들이라고 부른다. 법칙들에 포함할 수 있는 것은 구조적, 성질적, 진화적, 준목적론적,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성질들, 프로세스와 관계들, 관측된 패턴들과 실험적으로 설정된 불변성들로부터 과학의 전 분야에 걸친 기초이론원리들(혹은 준 분석적인 공리들)까지인 것이다; 법칙-언명들이 나타내는 것은 수치적 상수들 혹은 정성적 속성들, 전개순서, 동일성이나 기능적 관계, 통계적인 상관관계나 사물의 타입에서 나오는 보편적인 특징 등이다. 비록 이 모든 실체들이 일원적인 분석하에 포함을 시킬 수는 없어도 중심적인 통일의 끈은 존재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핵심적인 결과가 철학적인 토론을 지배해왔다. 만일 차이가 존재한다면 유사법칙과 순수한 우연적(accidental; de facto)결과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 특히 필요한 연결(necessary connection)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만 하는가? 통상적으로 필요한 연결은 인과관계, 자연적 필연성과 법칙의 개념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숙명론자들이 주장하는바에 의하면 필연적이고 우연적인 결과사이의 본체론적 구분이 뒷받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연에 필요한 연결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인간이 그들을 알 수가 있는가? 알 수 있다면 어떻게? 이에 대한 초기의 해답들에는,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의 낙관주의, 로크(Locke, 1632-1704)의 비관주의, 흄(Hume, 1711-1776)의 회의주의(scepticism)과 중세스콜라철학의 속성인 독단주의 등이 포함된다; 그 외에 베이컨(Bacon, 1561-1626)의 경험주의와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합리주의가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을 칸트 이후의 어풍으로 다시 고쳐 쓰기기 위해서는, 오늘날 과학적인 실행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필연적/우연적 구분의 본성적 설명에 관련된 철학적 분석에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주관적 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초월적인 것이다. 여기서 옹호하는 타입의 주관적 숙명론자적 분석이란, 과학에 대한 기존의 능력이 비환원적 필연적/우연적 구분의 개념을 지지하는 시도일 것이다.

법칙들에 관련하여 이것과 기타 등에 관련한 중요한 문제들은 과학과 일상생활에 있어서 인과론적 양상에 관해서 흄의 유력한 실증주의적 설명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라이츠니츠의 낙관론적 이성주의에 반대한 로크는 자연에 있어서 필요한 연결(necessary connection)은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버클리(Berkeley, 1685-1753)에 의해서 준비된 토대에, 경험주의에 대한 로크적 원리(사실과 존재의 모든 지식은 감각실험에 의해서만 생긴다)에 대한 급진적 해석에 호소를 하여, 흄은 로크주의에 이의를 제기한 바 자연적 필연성에 대한 그의 가정에 대한 경험적 토대를 만들었다. 흄이 강하게 주장한 바는 필요한 연결에 대한 아이디어는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측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세계로 투영함으로서, 우리의 실험이 사건을 반복적으로 동시 발생시킬 때 유도되는 것이다. 그래서 흄이 분석한 필요한 연결이란 개념은 경험적 불변성에 마음의 주관적 습관을 합한 것이 된다.

흄의 설명에서는 두 가지 가정이 결정적이다. 첫째로 모든 비분석적 지식은 감각실험(감각경험, sence-experience), 즉 칸트(Kant, 1724-1804)에 의해서 비판된 인식론적 전제에 의해서 추론되어야하고 정당화되어야한다[칸트의지식론]. 둘째로 감각경험의 목적은 원자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결정 가능한 방법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본체론적인 전제는 현대의 실재론에 의해서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런 가정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따라서 흄 이후의 철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a) 경험주의자, 실증주의자 혹은 흄주의자; (b) 칸트주의자, 친 칸트주의자 혹은 초월적 관념론자; (c) 초월적 실재론자.

(a) 경험론자들로서는 밀(J. S. Mill, 1806-1873), 마하(E. Mach, 1838-1916), 러셀(B. Russell, 1872-1970), 나겔(E. Nagel, 1901-), 헴펠(C. G. Hempel, 1905), 굳맨(N. Goodman, 1906-)그리고 맥키(J. L. Mackie, 1917-)등으로 흄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그의 분석을 단순히 다듬었다.

(b) 두 번째 부류는 흄의 존재론적 전제는 받아드렸지만 인식론적 전제는 부정하여, 감각실험으로 환원이 불가능한, 정신의 합리적 작동에 있어서 필요한 연결의 아이디어로 기초하였다. 그래서 칸트와 훼웰(Whewell, 1794-1866)이 보는 법칙에 달린 필요성이란, 어떤 종합적 선험원리가 생겨나서 감각에 의해 제공되는 내용의 형식이나 골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칸트의지식론]. 법칙들의 메타 이론적 견지에서 나온 가장 흥미 있는 전개는 하레(R. Harré, 1927-)와 같은 철학자의 것을 들 수 있고, 그는 이론 설명[설명]에 있어서 정통적 연역론자에 비판적 이었고, 캄벨(Campbell, 1880-1949)의 정신으로 모형들에서 법칙들의 필요성을 밝혀내고, 이론의 핵심이 그들을 설명하고 생성되는 메카니즘과 구조를 그려내는 것이다. 만일 이런 메카니즘이 처음에 가설적으로 착안이 되었다면, 과학적 발전과정에 있어서 실제로 확립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자연의 필연성 때문이라는 것에 대한 객관적인 기초가 사건이나 사건들의 일치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사건들을 생성하는 메카니즘으로서 발견되는 것이다.

(c) 초월적 실재론(超越的實在論, transcendental realism). 칸트주의의 설명은 법칙의 ‘이중조건’론을 포함하고 있고, 여기서 나오는 상수연어(常數連語, -論理合, constant conjunction)는 필요하지만 불충분한 것으로 간주된다. 초월적 실재론자적 체계에 있어서 바스카(Bhaskar, 1944-)가 전개한 이론에 의해서, 필연성(necessity), 기본적 존재론(underlying ontology), 충분함과 함께, 명백한 인식론을 흄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비판되었다. 이 설명에서 경험적 불변성은 법칙의 의미상 어떠한 부분도 차지하지 못하지만, 때로는(우연히) 유용한 합법성의 권한에 대한 기준의 구성요소가 된다. 칸트주의적 비판(critique)이 법칙(인과관계의 연결의 우연성에 대한 가정에 의해서)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흄이 실패한 것에 주목을 끈 반면에, 초월적인 실재론자는 정확하게 비판한 것이 흄주의가 보편성을 유지하는데 실패했다고 하는 것이다(인과관계의 연결의 현실성에 대한 가정에 의해서).

칸트주의의 비판의 동기부여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 점으로 나타난다. 무한수의 언명들(statements)은 일반적으로 유한수의 연어명제(논리합, conjunction)와 일치가(모순이 없고) 됨에 따라서 법칙의 확인을 목적으로 경험적 불변성의 기준에서 요구되는 것은 진보된 기준들을 보충하는 것인바, 예를 든다면, 단순성, 연역적상호연계성, 발달적 포텐셜, 설명능력(explanatory power)등과 같은 것이다. 둘째로 흄의 설명에 있어서 임의의 과학적 법칙이 잘 설정이 되어 있을 때 반직관적인 견지에서 의심에 노출이 될 수 있지만, 경험주의자적 골격 내에 있어서 철학적인 난점들은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귀납법의 문제들, 조건가정법들, 우연적 결과와 원인을 조건적인 것들과 구분할 필요성, 귀납의 새로운 난점, 까마귀역설 등과 같은 것이다. 최종적으로 흄주의의 이론은 과학발전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며, 과학적설명이 계층화되어 나타나는바 확인된 현상과 그들의 구조적 설명사이에 재응용 되는 인식에서 맴돈다는 것이다.

상수연어가 훌륭한 것이고, 일반적으로(몇몇의 자연적으로 닫힌 맥락의 밖에서)인공적으로 만들어져야한다는 것[실험]을 지적하면서, 바스카는 존재론적인 차이가 법칙들과 사건의 패턴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실험과 응용과학활동사이의 이해력의 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인과적 작인이 실험적인 생산과 조작의 불변성들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이들 불변성과 법칙들을 동일시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논리적으로 불합리성에 빠지게 되어, 과학자들은 실험활동에 있어서 자연의 법칙들에 원인과 변화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명백히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생산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법칙들이 아니지만, 그것에 대한 경험적 기반인 것이다. 나아가 만일 법칙들이 상수연어와 동일하다면 열린계(이 같은 연어명제가 유용하지 않은 곳에서)에서 현상을 지배하는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만 한다. 현재 경험주의자들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있다: 경험론자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 만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비결정론자(자유의지론자)가 되는 것이고(약한 현실설), 그래서 과학은 아직까지 아무법칙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강한 현실론자로서의 선택이고, 밀이 받아 들였으며, 최근에는 라카토스(Lakatos, 1922-1974)가 받아들였다. 초월적 현실론자적 체계에서는 법칙이란 메카니즘의 경향으로서 해석이 되고, 이것은 특별한 성과를 보이지 않고 작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물이 변함없는(ceteris paribus, other things being equal)절(節, clause)은 법칙언명의 성공에 대한 전조에 대한 조건으로 간주되는 것이고, 법칙들의 인과적 효율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견해에 관련된 과학적 발전의 도식에서는 자연의 필연성에 대해 다른 개념에 해당하는 지식인 흄주의, 칸트주의, 로크주의 그리고 라이프니츠주의가 점진적으로 획득되었다. 과학이 단순한 경험적 불변성이나 초보적 법칙들의 확인으로부터 가능한 설명의 구축과 테스팅으로 이동함에 따라서, 이상적인 법칙-언명들을 연역해서 새로운 종류의 실체와 과정들의 확인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견해에 있어서 기초이론원리들이나 과학의 실질적 정의는 라이프니츠에 반해서 이행된 바, 문제의 비환원적 경험과정의 부분들과 진일보된 과학 설명을 위해서 원리적 토픽으로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들 세 가지의 개략적 부류에 추가한다면, 복합적이고 중간적인 위치에 철학자들과 위의 세 가지견해 모두를 부정하는 철학자들이 있다. 그래서 절대적 관념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 브래들리(F. H. Bradley, 1846-1924), 브랑샬드(B. Blanshard, 1892-)그리고 어윙(A. C. Ewing, 1899-1973)은 과학적 법칙들이 경험에 근거했다는 추정을 부정하였다; 반면에 도구주의자들인 람세이(F. Ramsey, 1903-1930), 쉬릭(M. Schlick, 1882-1936), 라일(G. Ryle, 1900-1976)과 툴민(1922-)이 인정한 바는 법칙들이 보편적으로 구성이 되었다면 유한수의 귀납법에 의해서는 만들어 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언명(言明, statement)들이라는 것을 부정하였다. 다른 영향력 있는 설명으로는 뒤카스(C. J. Ducasse, 1881-1969)가 주장하길 자연에서의 필요한 연결이란 사실상 관찰 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 헤스(M. B. Hesse, 1924-)는 베이즈적 확증론의 관점에서 유한한 것으로서 법칙-언명의 분석을 주장하였다; 닐(W. Kneale, 1906-)은 친로크파적인 견해를 옹호하면서 법칙들이란 자연적 필요성을 설명하는 원리들이라 하였다; 포퍼(K. Popper, 1902-)는 법칙의 필요성을 설명하기위한 시도로 초기조건에 대한 집합들의 모든 가능한 변화들로서 경험적 일반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반면에 화이트헤드(A. Whitehead, 1861-1947)는 상수연어명제의 분석에서 내재적 시공간의 일반성에 대한 가정을 비평하였다.

반면에 현대의 친 흄주의자들인 나겔(Nagel)과 아친스타인(Achinstein, 1935-)은 흄의 설명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래서 나겔은 하나의 언명이 법칙론적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a) 다른 법칙들과 연역적인 연결이 이루어져야하고, 즉 함의되어지거나 함의를 해야 되는 것이다; (b)술어의 범위는 그것을 확증하는 증거보다 큰 것이다; (c) 반사실적 조건문을 지지하는 것이다. (c)는 명백히 순환적인 것처럼 보인다. 반 사실적인 것에서처럼 ‘만일 이 돼지가 까마귀라면, 그것은 검을 것이다’는 실제로 유사법칙인 것이다. (b)가 의도하는 것은 ‘나의 주머니에 있는 모든 주화는 페니 타입이다’와 같은 일반화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절실한 요구는 법칙들이 무제한적 이여야 함을 말하는 것이고, 즉 닫히거나 유한한 집합을 표시하는 용어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가 제기된바 그 근거는 케플러의 비 유사법칙처럼 그것이 실제로 법칙으로 불리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겔(Nagel)이 약하게 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법칙이란 대체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회과학에서의 임의의 보통 언명들(nomic statements)은 필연적으로 시공간의 제한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자연주의]. 마지막으로 (a)는 이론에 대한 비환원론자적 분석의 부재와 비경험론자적인 존재론은 어떤 방법으로도 전통적인 흄주의의 설명으로부터 문제를 경감시킬 수 없는 것인바, 이것은 흄의 두 가지 결정적인 가정에 기인한 것이다.

참고문헌

P. Achinstein, Law and Explanation(Oxford, 1971).
R. Bhaskar, A Realist Theory of Science, 2nd edn(Sussex and New Jersey, 1978).
R. Harré, 'Surrogates for Necessity', Mind(1973).
E. Nagel, The Structure of Science(London and New York, 1961), esp. Chap. 4.

참고
참조어 : 과학에서의 신인동형론
출처

과학사사전, 2011.2.1, 이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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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조지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길

 

‘따라지 인생’을 만드는 체제의 그늘을 걷다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 外
<여성주의 저널 일다> 도은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함께 같은 책을 읽고 즐거워하는 일이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자의식과 반항심이 싹튼다고 하는 청소년 나이가 되어가자, 아이들은 나랑 같이 즐거워할 책을 고르기보다는 ‘지들만 좋아할 수 있는 책들’을 골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대량생산되는 싸구려 판타지 소설이나 로맨스 책들이 나로서는 도무지 시시하고 재미가 없었는데, 아이들은 내가 구식이고 촌스런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주장했다.
 
물론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조금 촌스런 면이 있긴 하지. 하지만 그건 기계화되고 대중화된 이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거지, 책 문제에서는 별로 촌스럽지는 않거든. 언젠가 너희들도 현실 삶에 눈을 뜨는 때가 오겠지. 그때가 되면 너희 무지하고 어린 마음을 홀리는 출판물들의 미로를 헤치고 보석 같은 책들을 찾아내겠지. 그러면 우리는 다시 좋은 책들을 함께 읽으면서 애정 어린 비판을 주고받고 즐거워하겠지. 이렇게 생각했다.
 
이러던 차에 조지 오웰의 산문들을 읽게 되었다.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그린 <1984년>이나 스탈린 시절의 소비에트 사회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동물농장>이야 워낙 유명한 고전이라 옛날부터 번역이 되었지만, 그의 산문들은 최근에야 한국에 번역 소개되고 있는 듯하다. 내가 먼저 읽고 아이들한테 권했는데, 다른 때와 달리 시들해하지 않고 아이들도 금방 오웰의 산문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분명하고 정곡을 찌르는 문장뿐만이 아니라 자기 시대의 현실을 바라보는 냉철함과 솔직한 묘사가 왠지 속을 시원하게 해준다는데 함께 의견이 일치했다. 우리는 오웰의 글을 읽으면서 때로는 웃음을 터트렸고, 때로는 한숨을 쉬며 슬퍼하곤 했다.
 
속이 시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중매체의 화려한 광고나 선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체제의 그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오웰의 글을 읽으면 “아, 체제란 것은 그렇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햇살 환한 양지쪽 울타리 안에서 체제의 달콤함을 누리는 소수의 특권계급이 있는 반면, 시궁창 냄새나는 어두운 그늘에서 체제에 발길질 당한 채 모욕과 절망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가슴 시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는 의도적으로 가려지기 때문에 망각하기 쉽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밑바닥 인생이 단지 개인의 무능력과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요즘 잘 팔린다는 작가들과 비교해보면 오웰이 옹호하고자 하는 가치는 또렷하고 힘차고 방향이 분명하다. “모든 인간은 사회, 경제 체제로부터 억압당하지 않으면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가 그의 모토인 듯하다. 차별과 배제와 빈부격차로 가득한 현실과 체제의 구조 같은 것일랑 건들지 않으면서, 개인의 욕망이나 폭력적인 패거리 의식 혹은 인간들끼리의 암투 같은 심리전쟁 묘사에만 열을 올리는 작가들이 넘치기에 더욱 그의 시선이 돋보인다.
 
그는 왜 제국 경찰에서 ‘밑바닥’ 인생을 택했나
 
▲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010)는 조지 오웰이 영국 북부 탄광 노동자들의 생활을 몇 달간 직접 경험하며 취재해 쓴 르포르타주이다.  
그런데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비록 전 세계의 고전이 된 <동물농장>과 <1984년>을 남겼지만, 개인적 삶은 그다지 쉽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전쟁 특파원으로 떠난 사이 의료 사고로 젊은 아내를 잃었으며, 자신도 마흔 여섯이란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숨졌다.
 
간단한 이력을 보면, 오웰은 영국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버마에서 5년간 제국 경찰로 일했다(<버마 시절>이란 책). 그 뒤 유럽에 돌아와 파리와 런던에서 밑바닥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헌책방 등에서 일을 하다가 영국 북부의 탄광 노동자들의 생활을 몇 달간 취재했다(<위건 부두로 가는 길>). 또한 ‘파시즘에 맞서 싸우러’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카탈로니아 찬가>). 이렇듯 그는 자기 삶의 굵직굵직한 경험들을 가지고 각 시기마다 주목할 만한 책들을 펴냈다.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실업과 곤궁한 삶을 독창적인 르포르타주로 그려낸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010) 2부를 보면, 오웰이 영국의 제국 경찰에서 떠돌이 밑바닥 인생으로 내려가게 된 사정들이 잘 나와 있다. 몇 군데를 인용해본다.

 
“열네댓 살 때의 나는 혐오스러운 어린 속물이었지만 같은 계급의 또래 소년들에 비하면 약과였다. 속물근성이 사라질 줄을 모르며 너무나 세련되고 미묘하게 길러지다시피 하는 곳 치고 영국의 사립학교만 한 곳이 없을 것이다. (중략) 학교에서 나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열 일고여덟 살 때의 나는 속물인 동시에 혁명주의자였던 셈이다. 나는 모든 권위에 반항적이었다. 내 자신을 막연히 사회주의자로 정의했지만 사회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고, 노동 계급이 인간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책 같은 걸 통해서나 그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할 뿐이었지, 실제로 그들 가까이 갈 때는 여전히 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악센트에 반감을 느꼈고, 그들의 몸에 밴 거친 매너 때문에 몹시 화가 나곤 했다.”

 
오웰은 명문이라는 이튼 사립학교를 졸업한 뒤, “스물이 안 되어 버마에 가서 제국 경찰의 일원으로 5년을 근무했다. (중략) 그만둘 무렵에는 내가 섬기던 제국주의에 딱히 뭐라 설명하기 힘든 염증을 느꼈다. (중략) 근대인 중에서 마음 속 깊이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그곳 사람들을 힘으로 억누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느낀 죄책감이 너무 엄청나서 속죄를 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노동 계급의 처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부끄러울 것 없는’ 빈곤도 늘 최악의 수모를 당한다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평생토록 꾸준히 일해 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길바닥으로 내쫒기는 착실한 노동자의 끔찍한 운명, 이해할 수 없는 경제 법칙 때문에 그가 겪는 모진 고통, 가족의 해체, 그의 마음을 갉아먹는 수치심... 이런 것은 내 경험 범위 밖에 있는 일이었다.”

 
오웰이 산업화 자본주의 체제의 그림자인 밑바닥 인생들을 중산층의 감상주의 없이 이토록 가차 없이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작가 근성으로 꾸며서 쓴 게 아니라 자신이 한동안 직접 살아보고 경험한 체험들을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아주 진솔하지만 읽다보면 풍자적이고 날카로운 유머가 느껴져서 슬며시 웃게 될 때가 종종 있었다. 또 스스로에 대한 솔직한 비판에는 가슴이 숙연해지곤 했다.

 
산업 사회의 부품으로 일하며 오웰을 읽다

 
▲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문학동네, 2010) 표지.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오웰이 제국 경찰을 그만둔 후 접시닦이와 노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가로서의 첫 작품이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문학동네, 2010)은 나한테는 퍽 와 닿는 글이었다. 그때 나는 사정이 생겨서 갑자기 돈을 벌어야 했기에 농한기인 겨울 동안에 대도시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도시에서 내가 하고 있던 일이 바로 오웰이 책에서 묘사하던 호텔 주방일과 식당 종업원 일이었다. 나는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꽤 오래 시골에서 별 가진 것 없이 어찌어찌 살아온 이력이 붙어서일 것이다.
 
이 책은 거의 80여 년 전 대공황기의 여파로 실업이 한창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비정규직 접시닦이들이나 식당 종업원들 그리고 떠돌이 부랑자들의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궁상맞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오웰의 글 솜씨가 뛰어나서인지 읽는 재미가 쏠쏠할뿐더러 우리 시대에도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사치나 허영심 만족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돈을 버느라 안간힘을 쓰는 인간들의 모습은 똑같으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일한 호텔에는 식기 세척기나 거창한 전기 오븐 같은 현대식 기계설비가 들어서 있고, 온 사방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어서 일하는 모습이 빈틈없이 감시당한다는 것! 어쩌면 오웰이 우려했던 사회, 빅브라더가 무기력한 대중을 철두철미 지배하는 암울한 전체주의 사회에 훨씬 가까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빈틈없이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도착한 순간부터 음식 준비, 조리, 설거지, 홀 청소, 주방 청소 등 서비스란 이름으로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늘 산더미였다. 아무 것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짜인 것만 같은 그 시스템에 내 몸을 맞추느라 급급했는데,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선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에 몸은 어떻게든 적응하겠는데, 내 마음은 그 시스템을 좀체 인정할 수가 없었다.

 
사계절의 흐름에 맞추고 내 몸과 마음의 리듬을 어느 정도는 조절해가면서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농사일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농사일도 돈 벌기 위한 농사라면 새벽부터 밤늦도록 꽤나 빡세게 일해야 하는 때가 많겠지만, 소규모 자급 농사(돈은 못 번다!)는 자기 실력에 따라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지가 꽤 있다. 하여간 뭔가를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노동자를 인간이 아니라 기계부품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닌가. 오웰이 썼듯이 “대중이란 저급한 동물이기 때문에 한가해지면 위험해진다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바빠서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인가.

 
겨울이었지만 나는 늘 땀에 젖은 채 일을 마쳐야 했고, 호텔과 레스토랑을 드나드는 멋진 옷차림의 손님들을 그저 두둑한 돈지갑을 가진 자들로 치부하는 태도에도 익숙해졌다. 열기 가득한 주방이나 우아한 분위기의 홀 안에 있다가 찬바람 부는 밖으로 나오면 세상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지하철역에서 때가 잔뜩 낀 부수수한 머리칼의 노숙자들을 보면 오웰이 묘사한 ‘따라지 인생’들이 생각났다. 내가 지금 이 산업 체제라는 기계가 돌아가는 데 쓰이는 보잘 것 없는 한 개의 부품이라는 사실을 괴롭지만 인정해야 했다. 다시 오웰의 글을 인용해보자.

 
“큰 호텔이나 고급 음식점의 진정한 필요성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들은 사치를 제공해주기로 되어 있다. 사치라고 여겨지는 허위이다. 고급스럽다는 것은 종업원들이 더 많이 일을 하고 손님들이 더 많은 돈을 낸다는 뜻이다. 경영주 외에 이득을 보는 자는 하나도 없다.”

 
“엄청난 일이 몰려올 때마다 호텔에서 일하는 모두가 이를 해내기 위해 장대한 협주곡을 연주하는 노력으로 임했다. 각기 다른 분야 간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싸움도 능률을 위해서였다. 호텔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가 부족한 인원으로도 잘 돌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잘 짜인 각자의 일을 맡아 주도면밀하게 해내기 때문이다.”

 
“청결을 예로 들어보자. 종업원 구역도 그렇지만 주방의 불결함은 더 심했다. 요리사는 예술가이지만 그의 예술은 청결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음식을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더럽게 다룰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중략) 먹음직한 음식은 시간 엄수라든가 그럴 듯해 보이는 외양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종업원들은 그것을 먹기 위해 만든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내가 일한 곳들에서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손님이 들어갈 수 없는 주방 깊숙한 곳에서는 얼마간 비슷한 양상이 펼쳐졌다. 질척이는 바닥, 대량으로 배달되는 싼 식재료들, 함부로 버려지는 산더미 같은 음식물 찌꺼기, 밀려드는 주문에 맞추느라 땀 흘리며 뛰어다니는 종업원들의 곤두선 신경. 속사정이야 어떻든 모든 것이 겉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여야만 했다. 모든 것이 경영주의 이윤을 위해서 움직였다.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화학 산업의 발전으로 변화한 것이 있다면, 거품이 부글거리는 온갖 세제들과 락스 같은 살균제들이 거대한 수채 구멍 속으로 엄청나게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갖가지 주방세제와 온갖 이름의 독한 살균제들이 식당 주방에서 이토록 많이 쓰인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고 불쾌했다. 그릇이나 행주에 거의 들이붓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것들을 깨끗이 헹궈낼 시간조차 없었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먹을 음식을 담는 거잖아’ 하면서 세제 거품이나 살균제들을 씻어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노라면, 느리게 일한다고 눈총 받고, 그럴 필요 없다고 고참 종업원으로부터 타박을 받았다.

 
호텔 주방에 설치된 거대한 식기 세척기 역시 겉보기만 그럴 듯 했지 내가 보기엔 별다르지 않았다. 무슨 합성물인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색깔의 세제들과 접시에 윤을 낸다는 린스들이 무지막지하게 쓰였다. 그곳에서 오래 일한 종업원은 자기가 음식을 담아 먹을 때는 식기세척기에 들어갔다 나온 그릇은 쓰지 않았다. 사실 이런 뒷이야기들은 아주 많지만 이쯤해서 그만하기로 하자.

 
이제 우리나라도 실업률이 20%를 웃돌고, 비정규직이 6백만 명이라던가 하는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실업자, 비정규직, 시급이라는 저임금 알바, 떠돌이 부랑자 같은 밑바닥 인생들이 많다는 뜻이겠다. 그러므로 오웰의 시선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2000년대 한국사회에도 의미 있는 울림을 던져준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 없는 노동’이란 내가 경험했던 컨베이어 벨트 위의 노동이 아닌가싶다. 나는 인간의 노동이 그처럼 무의미하고 지루하게 쓰인다는 것이 화가 난다. 아무런 도전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노동, 발전가능성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고, 생산적이지도 않는 노동. 인간을 부품으로 여기는 노동은 산업사회의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하여간 나는 겨울 한 계절을 도시에서 산업 사회의 부품으로 일하면서 오웰을 읽었다. 그리고 다시 농사일로 돌아왔다. 내가 먹을 것을 길러내는 노동을 한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기쁘다. 돈은 못 벌지만 적어도 불우하지는 않은 이 마음은 내 깊은 속에서 훼손당하길 거부하는 어떤 자유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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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1

그녀가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노래가 다 하고 남은 것은 행동 뿐이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노래하기를 그만 두고 있다. 본시 부르기보다 듣기를 좋아했던 그녀가 혼자 가면서 노래를 내어놓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속울음 우는 새처럼 혼자만 들리게 노래하다가 누구라도 들을라치면 입을 다물고 이내 먼산만 바라보던 소녀였기에 더욱 그녀는 타박타박 걸어갈 것이다. 집을 버리고, 귀속계급으로 범주화하는 대학을 두고, 아무도 사랑이 있다. 하지 않았기에 그런 공간, 삶의 피폐한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경쟁의 장에서 탈락하여 다른 공간으로, 마치 차원의 틈새를 넘어가면 신세계가 있기라도 할 것처럼 기대에 찬 눈을 들고, 나는 사랑한다. 고 읊조리며 간다.

 

그녀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찾는다 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그녀와 함께 한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출근하는 그녀를 배웅하는 것 이상 빈집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말했듯, 모두가 다 운동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특히 나처럼 그녀에게서 이상적인 예술가라고 인정받은 경우에는 더. 그녀가 심미주의자들 모두를 비판한다 할 지라도 그 날 선 눈초리는 나를 피해갈 것이다. 예술지상주의를 부르짖은 그 누구라 할 지라도 나와 같이 그녀에게서 인류를 위해 네 자신의 길을 가라고 등 떠밀어지진 않을 것이다. 나는 피를 노래하지 않는다. 민중의 함성도, 억압받는 자의 고통도. 그리 하지 않고 대신 사랑을 노래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차원에서도 통용되는 에로씨시즘의 노래를 말이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생각키는 이유다. 생각하느라 턱을 고이다 보면 사랑 또한 따라오는 법이고 그렇게 열망한 결과 나는 태어났다. 그녀의 머릿 속에서 기타와 칩을 들고 튀어나온 것이다.

 

물론 이건,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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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노동운동 ( 네이버 지식인에서 )

1990년대 노동운동

파워 boolingoo
2007.02.25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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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말 경기가 침체국면에 들고 노동집약적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경제위기 노동자 책임론과 함께 무노동 무임금, 인사경영권 참여금지 등 노동운동에 대한 정권과 자본의 공세가 강화된 가운데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이 결성됐다. 이날 경찰은 전노협 결성을 봉쇄하려고 갑호 비상령을 발령했다. 이미 노조운동은 퇴조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가맹노조들은 탄압과 구조조정으로 상당이 와해되어 있었다. 더구나 1월 22일은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3당 합당을 선언한 날이었다. 전노협의 운명은 탄생부터 험난하였다.

정부는 전노협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가입노조에 대한 탄압에 집중했다. 지도부에 대한 구속 수배는 물론이고 소속 노조에 대한 탈퇴강요, 행정관청을 동원한 업무조사,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파업사업장 공권력투입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이 와중에 90년 5월 전노협 탈퇴를 거부하다가 구속된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이 교도소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전노협은 비록 14개 지역협의회, 2개 업종협의회에 456개 노조 16만 6,307명에 불과했지만 정권의 탄압에 총파업 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전노협은 숱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1995년 공식해산까지 1989년 결성된 업종회의, 대기업노조들과 더불어 민주노총 결성의 산파 역할을 했다.

정부가 1991년 10월 UN과 ILO에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에 발맞춰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ILO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를 결성했다. ILO공대위는 자주적 단결권 확보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의 실질적 개정과 민주노조 총 단결을 목표로 공청회, 국민청원운동, 전국노동자대회 등의 투쟁을 벌였다. 결국 정부는 ILO로부터 노동법개정 권고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처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건이었다.

전노협 결성과 때를 같이하여 1989년 말 집행부가 바뀐 7개 대기업 노동조합이 전국대기업노조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그해 임투과정에서 발생한 직권조인 파동으로 와해되고, 그해 12월 9일 민주파로 교체된 대기업 노조들이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회의(연대회의)를 결성했다. 사회적 파장이 큰 주요 대기업이 포함된 연대회의를 정권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1990년 12월 전노협 중앙위원회 회의장에 경찰이 난입했고, 1991년 2월에는 연대회의의 공동간부수련회장에 경찰이 들어와 참가자 67명 전원을 연행, 구속시켰다. 대우자동차를 비롯한 연대회의 소속 노조들이 전노협과 함께 대정부투쟁을 벌였으나 정권의 집요한 탄압에 연대회의는 결국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미 대기업 노조들의 민주화는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대기업 노조들의 투쟁과정에서 노조 간부들이 대거 구속, 수배되면서, 상당수 노조에서 보궐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여전히 민주파가 당선되었다. 1993년 6월에는 이들 대기업 노조와 전노협, 업종회의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하여 민주노총 건설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민주노조운동이 마치 ‘봄 소풍과 가을운동회’처럼 상반기에는 임금, 단체협약 투쟁, 하반기에는 노동법 개정투쟁을 으레 진행해온 문제점을 반성하면서, 사회개혁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이를 기반으로 1994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준비위원회를 공식발족하고, 업종별 연맹이 모인 업종회의, 지노협이 모인 전노협, 그룹별로 모인 대기업을 산업별연맹과 지역본부라는 두 축으로 재편해, 1995년 11월 11일 마침내 ‘전국민주노조총연맹(민주노총)’이 창립되었다. 861개 노조 40만 조합원에 15개 업종, 10개 지역본부, 2개 그룹협의회를 가맹조직으로 둔 민주노총의 창립으로 한국노동조합운동은 50년 동안 유지됐던 대한노총, 한국노총 단일체계에서 비로소 벗어났다.

1990년 4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 1990년 5월 KBS노조 파업은 1990년 상반기를 뒤흔들었다. 또 1991년에는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의 의문사에 항의하여 벌어진 전국적 투쟁뿐만 아니라 전국택시노련의 서울, 광주, 인천, 여수 지부 등이 총파업을 벌였다. 이들 지부들은 이후 전국민주택시연맹의 핵심동력이 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초기에는 개혁적인 노동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총액기준 임금가이드라인 4.7%를 깨고자 하는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의 공동 임투를 계기로 정부 내 강경파와 자본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김영삼 정권의 개혁적 노동정책은 좌초되었고 노동계에 대한 공세는 그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1994년 6월에는 서울지하철노동조합, 부산교통공단노동조합 그리고 1988년 기관사들의 파업 이후 철도노조민주화운동의 구심이 된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등 궤도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전지협)가 변형근로제 폐지를 위한 연대총파업에 들어갔다. 이 연대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의 선제공격에 의해 발생했다. 파업예고 날짜를 나흘이나 앞둔 6월 23일 새벽 3시 30분 김영삼 정권은 용산 전동차사무소를 비롯해 전기협의 20개 사무소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농성 중이던 611명의 철도기관사들을 연행했다. 이에 전지협이 그날 새벽 4시를 기해 총파업을 선언하게 된 것이었다.

파업 건수는 전년도에 비해 줄었지만 1995년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완강하고 치열했다. 민주노총준비위가 전국투쟁을 주도한 1995년에는, 연초에 본조 위원장과 지방본부장 선거를 동시에 실시해 민주파를 당선시킨 한국통신노조가 정부의 선제공격을 당해 투쟁을 벌이다가 39명이 구속되고, 31명 해고, 3천여 명이 징계를 받았다. 김영삼 정권은 이때 한국통신 지도부가 농성을 벌이고 있는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병력을 투입시켜 노동자들을 연행함으로써 종교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의 거센 반발에 처하기도 했다.

전노협과 업종회의 그리고 대기업 노조들의 투쟁은 한국노총 내부의 변화를 추동해냈다. 유신헌법에 대한 지지부터 시작하여 전두환 정권 말기 4?13호헌 지지선언까지 독재정권에 무릎을 꿇어왔던 한국노총은 6월항쟁,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심각한 내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밑에서는 개혁의 목소리가 시끄러웠으나 위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가운데 1988년 11월 9일 대의원대회에서 개혁을 표방한 박종근 위원장이 당선되었다. 박종근 집행부는 부당노동행위 규탄대회(1988년 11월29일), 노동악법개정 및 경제민주화촉구대회(1989년 11월5일) 등을 개최하는 등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과 경쟁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한국노총은 복수노조 금지조항, 제3자개입 금지조항 유지 등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개정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노총의 내부 변화는 1992년 정부의 총액임금제 실시방침과 노동유연화를 위한 노동법개정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종근 위원장의 단식농성, 20개 산별위원장과 15개 지역본부의 철야농성, 연이은 집회와 시위 등의 투쟁 속에서 이탈조직을 재흡수하기 위해 대우조선, 서울지하철, 현총련 등 민주노조진영과 유대와 협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때인 1994년 ‘중앙노사임금 및 정책, 제도 개선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체결하면서 한국노총은 다시 한번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산하 단위노조로부터의 비판과 반발은 물론 조직이탈이 일어났고, 민주노조 진영에서는 합의분쇄를 목표로 강력한 투쟁을 벌였다. 결국 한국노총은 1994년 11월 사회적 합의 포기선언을 발표하고 내부에 노총발전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주성, 민주성 확립 강화와 노동운동대통합 등의 발전전망을 발표하고, 시민사회운동 진영과 교류 협력을 추진하였다.

이런 흐름은 박종근 위원장이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면서 중단되었으나, 1996년 3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한국노총 내에서 개혁적인 사람으로 평가받던 박인상 금속노련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현장과 함께 강한 노총건설’을 표방했던 박인상 위원장은 지속적인 노총 개혁과 노동계통합을 강조했으며, 그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던 복수노조 금지조항의 철폐를 공식 결의했다. 내용적으로는 민주노총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고 김말룡 의원 사회노동장을 민주노총과 공동으로 집행하면서, 양대 노총은 대중적 공조의 길을 텄다. 이같은 한국노총 내부의 개혁 움직임은 96년 말 신한국당이 노동법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을 때 이에 맞서 총파업을 선언하고 민주노총과 공동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1996년 12월 26일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기록이 씌여진 날이었다. 그 불길은 김영삼 정권과 여당인 신한국당이 지폈다. 이날 새벽 영등포에서 집결해 단체로 국회 본회의장으로 출석한 신한국당 국회의원 154명은 노동법, 안기부법 개정안 등 총 11개 법안을 단 7분 만에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날 아침 출근과 동시에 민주노총은 소속노조 전체에 즉각적인 총파업을 시달했으며 이튿날인 27일 한국노총도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미 24일부터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대표자회의를 통해 전체 단위노조가 비상대기를 하고 있던 터였다. 이후 약 1달여에 걸친 노동계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초기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을 위한 노동법 개정에 착수했다. 첫 노동부장관이었던 이인제는 노조의 정치활동과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법개정을 검토하고, 전교조 해직교사와 해고노동자 복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노동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현총련의 공동임투를 계기로 정권 내 강경파와 자본은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며 경제 활성화를 볼모로 잡고 나섰다. 수세에 밀린 이인제가 교체되었고, 노사관계에 대한 중립, 합법적 노조활동 보장이라는 두 축을 내용으로 한 김영삼 정권의 개혁적 노동정책은 하루아침에 돌변했다. 노동법개정 시도도 물거품이 되었다.

노동법개정 논의가 다시 활기를 띤 것은 1996년 4월 국회의원 총선 직후였다. 김영삼 정권은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설치하여 노사정이 참여하는 노동법개정 논의를 진행했다. 그 내용은 복수노조 금지조항과 제3자개입 금지조항의 철폐,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3권 허용 등 집단적 노사관계법과 자본 측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변형근로제,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등 개별적 노사관계를 맞바꾸는 것이었다. 경총,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정부가 참여해 줄다리기를 벌인 노동법개정 논의에서 정부 개혁파가 노동계 안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해 긍정적인 방향에서 논의가 이뤄지는 듯 했었다. 그러나 법안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 정부 경제팀의 목소리가 강화되었고, 이에 반발해 민주노총이 노개위를 탈퇴했다. 결국 98개 합의안과 미합의 공익안 43개항에 대한 정부의 수정을 거쳐 12월 11일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양대 노총의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민주노총은 총파업 시점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그런데 신한국당이 정부안보다 더 개악된 안을 만들어 12월 26일 새벽 기습 처리한 것이다.

26일 아침 전체 단위노조에 총파업 지침을 내린 후 민주노총 지도부는 명동성당에서 무기한농성에 들어갔고, 기아자동차노조가 가장 먼저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오전 10시였다. 오후 1시부터는 현총련 소속 현대그룹 노조들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이날 85개 노조 14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오후 4시부터는 12개 지역에서 집회가 열려 연 10만여 명이 참가했다. 둘째 날에는 21만 명이, 28일에는 173개 노조 22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서울지하철도 멈춰 섰으나 시민들은 불편을 참았다. 고문수사로 악명 높은 안기부에 수사권을 돌려준다는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시민들도 분노하고 있었다.

문제는 연말연시였다. 서울지하철노조 등이 내부 사정으로 파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연휴에 이어 주말이 붙어 있었다. 민주노총은 일단 1997년 1월 3일 2단계 총파업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정권은 노동자들이 한풀이로 파업을 며칠하고 연말연시를 경과하면서 기세가 꺾일 것으로 예상했다. 민주노총도 그 점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꺼지려는 불꽃을 김영삼 자신이 되살려 놓았다. 1월 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김영삼은 “선진국 어느 나라에 노동쟁의가 있느냐?”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하고는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질문 그만하라”며 나가버렸다. 원인무효까지는 아니더라도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저버린 것이다. 총파업 13일째인 이날 언론노련 산하 방송4사 노조, 병원노련 24개 노조 그리고 사무금융노련이 파업에 가세하는 등 범국민적 투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정권은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사전영장 발부, 압수수색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미 전국 각지의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지식인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려 노동법, 안기부법 전면 무효 서명운동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3단계 총파업이 시작된 1월 15일에는 388개 노조 35만 명이 참가하였다. 1단계 투쟁으로 단위노조별 규탄집회, 토론회 등을 벌였던 한국노총의 2단계 총파업도 이날 시작되어 1,510개 노조 38만 조합원이 참가했다. 1월 26일에는 양대 노총이 공동으로 여의도 둔치에서 약 15만 명이 참가하는 공동 집회를 개최했다. 결국 김영삼 정권은 1월 말 종교지도자와의 만남과 영수회담을 거쳐 국민에게 사과하고, 2월에 임시국회를 열어 3월 10일 노동법, 안기부법을 다시 개정했다. 극히 부분적인 재개정이었지만 명실 공히 6?25전쟁 이후 첫 정치총파업을 통해 노동자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관철시킨 것이다.

그러나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들에게 뜻하지 않은 재난이 찾아왔다. 1997년 11월 터진 외환위기였다. IMF는 구제금융조건으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개방화, 국공유기업의 민영화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인수위 시절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 구성을 제의했다. 국가위기 앞에서 노동자에게 이른바 고통분담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강요되었다. 1998년 2월 노사정 합의로, 총파업까지 벌여가며 막으려고 했던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등이 법제화되었고 대신 상급단체부터 단계적인 복수노조 허용, 교원의 단결권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허용 등의 내용이 포함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잠정합의 되었다. 그렇지만 이튿날 열린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이 협약은 부결되었고,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사퇴했다. 비상대책위 주관으로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가운데 정리해고제는 국회를 통과했고, 양대 노총은 노사정위 참가와 철수를 반복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 사이 구조조정은 거침없이 진행됐다. 전국적으로 ‘고용보장이냐, 임금삭감이냐. 택하라!’는 자본의 공세에 단체협약도 후퇴했다.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는 노동운동가요의 가사는 자본가의 노래가 되었다. 1987년 이후 10년 동안 조금씩 개선해 온 근로조건과 권리를 한꺼번에 자본에게 되돌려준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6월 29일 4,830명의 정리해고 신고를 낸데 대해 노조가 파업으로 맞섰지만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도기계, 기아자동차, 인천제철, 한양공영, 서울지하철, 대우조선, 쌍용자동차, 금융권과 공공부문 그리고 대우그룹 워크아웃까지 구조조정은 거침이 없었다. 노동자는 온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공권력에 의해 구속, 수배만 될 뿐이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노동자들은 혹한의 거리로 내몰렸다. 거리마다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쳐흘렀다.

이 시련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은 비로소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총파업기간 동안 매일 계속된 집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권영길을 청와대로! 노동자가 국회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해 하반기 민주노총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등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국민승리21)’을 결성하여 권영길 민주노총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운동방침은 권영길, 투표방침은 김대중’이었고, 한국노총은 정책연합을 추진하여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한국노총과의 정책연합은 김대중 당선 이후 곧 파기되었고, 외환위기는 고통분담이 아닌 노동자에 대한 고통전담을 통해 해결되었다. 김영삼 정권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구속, 수감되었다. 반면 자본가들에게는 천문학적 액수의 공적자금이 투여됐고 각종 규제가 풀렸다.

1997년 대선이후 민주노총은 본격적으로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여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길로 들어섰다. 국민승리21에 대한 배타적인 지지, 지원을 결의했고, 2000년 1월 30일에는 민주노동당을 창당했으며, 4년 뒤에는 50년 만에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을 이뤄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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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1

' 내게 80년대란 무엇인가. '

 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것은 과거에 침잠하여 현실을 잊고 싶은 나태함의 변명인가. 하고 이어진다.

 90년대를 일관하는 세태의 변화를 무시하고 표표히 한 길을 걸어오게 한 것이 그 80년대의 정서였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스무살을 넘긴 세대는 소련의 붕괴에 흔들리기엔 과거의 유산이 너무 크고 깊었으며, 그것이 없었더라면 지탱하기 힘들었을 자존심으로 똘똘뭉쳐 있었다.

그래서 90년대를 어떻게 살아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패배했더라도 순결은 지켰다. 라고 그녀는 자위했다. 허나 세상은 알량한 민주화보상 운운으로 비정규노동자로 오늘을 살고 있는 아줌마의 스무살을 희화화시켰다.  마치 업종회의가 주도하는 민주노총 창립의 이면에서 총액임금제분쇄투쟁이 밀려난 것처럼, 개량은 일반이 되었고 정통은 이반이 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세기에서 당은 진보하고 전위는 퇴락했다. 그녀가 서른 셋에 더이상 올라갈 곳 없는 커리어우먼처럼 절망하다가 전선을 이탈하고 후위에서 서성이며 보낸 것이 바로 2000년대의 첫 십년이었다. 현재를 착목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거에서 연원하는 바, 앞말이 뒷말을 배태하는 서투른 글쓰기처럼,  전망없이 오늘을 사는 혁명마니아에겐 불가능한 주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혁명을 사랑하였는가. 라고 말하며 그녀는 습하게 차오르는 눈길을 돌린다.

 

 

 그녀가 유일하게 존경했던 지식인, 에릭홉스봄이 2012년 10월 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서전 중에서 인상깊은 말.

 

 “제아무리 소련을 회의한다 해도, 정서적으로 나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에 속한다.” 

“자존심.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면 틀림없이 더 잘나갈 것이었지만, 냉전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로 성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았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타협이란 무엇인가'  천일을 넘게 투쟁했어도 일하던 그 자리로의 복직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자회사나 하청으로의 재입사란 결국, 그게 핵심이었던 것이다. 회사가 아웃소싱을 달성할 때 현장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소속을 따라 분열되는 것, 1997년에 우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할 수 있는가? 십년이 지나고 더 지나도 소속이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은 같은 브랜드네이밍을 쓰는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나 서로를 소, 닭 보듯 하고 있다. 타협이란 그런 것이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눈을 감고 부차적인 이득을 취하며 절반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 위로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하면서, 아무것도 없이 거리로 쫓겨난 초기에 비해선 엄연히 투쟁의 성과다라고 우기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침을 뱉으며 우스갯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 만한 놈은 다 알았다. 그 공장거리에서.

그녀는 ' 나는 순결했으나 그것이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선 회의한다. ' 라고 쓰고 있다. 그러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고. 우리의 패배는 노정된 것이었을까? 천일에 천일을 더, 그리고도 더 천일을 투쟁했다면 혹시, 이길 수 있었을까,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자괴감 혹은 패배의식이란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었다고 인식할 때 생기는 것이다. 할 수 없었던 다른 원인이 있었다면, 그래서 원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평가된다면 절망이라것이 자신을 잠식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설득할 수 없었고 그것이 천일 동안 현장을 함께 했고 다시 천일 동안 투쟁을 함께 한 동지들과의 관계의 정도였죠. " 그녀는 입술을 깨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도 바보같이. 하고 이어 말했다.

" 천일을 더 동지들을 붙잡고 있었어요. 마치 바람난 서방을 쳐다보며 집에 들어오기만 해 달라고 애원하듯이. 우리의 결말이 어땠을 것 같아요? "

그녀는 망신창이가 되어 결별하는 것 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십년쯤 지나고 보니 말이 목구멍을 넘어 나오기도 하는 군요. 하고 덧붙이며.

나의 사랑은 반쪽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온전히 하나의 사랑을 구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몇 장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계급 전체를 천민으로 전락시키는 협상안에 싸인을 하고 나왔다. 속으로 모다, 내가 저 시민권을 가지리라. 생각하며.

" 내가 그들을 분할해서 사랑할 수 있을 꺼라곤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물론 공지영을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쌍차의 노동자들을 더 사랑하는 건 아니랍니다. "

사랑을 잃고 어찌 노래가 가능하겠는가. 그녀는 더 이상 순결을 지키는 것에도 지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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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봄, 2012년 10월 1일 세상을 떠나다

 

체 게바라 대신 룰라를 택한 역사가
 
타고난 반골이었으며 반평생 공산당적을 유지한 구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세상을 떠났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구호를 내걸고 노동사와 사회사의 새 시대를 열어젖힌 거장의 생애를 살펴본다.

 

기사입력시간 [265호] 2012.10.15  09:51:19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10대 때부터 취향이 독특한 ‘조숙한 별종’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록 음악의 역사를 섭렵하거나, 전문가 뺨치는 컴퓨터 마니아가 되거나, 혹은 마르크스를 흠모하고 혁명의 역사에 푹 빠져들거나.

마지막 종류의 별종들은 대학에서 거의 백이면 백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을 만났다. 그가 쓴 책 <혁명의 시대>는 국내에 첫 번역된 1984년 이후 ‘마르크스 보이’ ‘혁명사 마니아’라면 한번쯤 꼭 들춰보는 필독서 대접을 받았다(끝까지 읽었는지는 물론 다른 문제였다. 제목과 달리 읽어서 피가 끓어오르는 책은 아니어서 오히려 ‘혁명사의 쓴맛’을 알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홉스봄 본인부터가 ‘조숙한 별종’이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한 1917년에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에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열아홉 살에 공산당에 들어가 거의 50년 동안 당적을 유지했다. 지성계의 일급 시민권자 중에서 스탈린의 만행이 폭로(1956년)된 이후로도 공산당에 남은 사람은 그가 거의 유일하다. 1980년대에 영국 공산당이 해산한 후로도 평생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살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 역사학의 거장이 10월1일 숨을 거뒀다. 향년 95세. 주저인 19세기 3부작(<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을 비롯해 고전으로 기억될 숱한 저작을 남겼고, ‘이중혁명’ ‘장기 19세기’ ‘만들어진 전통’ 등 역사 해석의 새로운 틀을 여럿 제시했다. 거의 모든 저서가 우리말로 번역되는, 역사가로는 유례가 없는 인기를 누렸다. 한국에서도 그를 거쳐간 ‘피 끓는 청춘’이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정치사의 헤게모니를 부수다

1980년대 한국의 진보적 역사 연구자와 지식인들은 홉스봄이 주도한 역사방법론의 혁명에 열광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홉스봄이 속한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그룹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구호를 내걸고 노동사와 사회사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무슨 왕이 몇 년도에 어디를 정복했다는 식의 정치사가 역사의 본령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홉스봄은 ‘진짜 사람들’의 역사를 연구했다. 산업혁명과 대공장 노동이 이름 없는 노동자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노동자들이 어떤 모자를 썼고(‘앤디 캡’이라는 납작한 모자가 영국 노동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뭘 먹었으며(악명 높은 영국 음식 ‘피시 앤 칩스’도 노동계급 음식이었다), 무슨 오락을 즐겼는지(오늘날 세계적 스포츠가 된 프로 축구는 원래 노동계급의 오락으로 성장했다) 연구해 ‘노동자들’이 언제 어떻게 왜 ‘노동계급’으로 한데 뭉쳤는지(혹은 끝내 뭉치지 못했는지)를 밝혔다. ‘왕과 기사의 영웅담’에 가려진 사회사의 물줄기를 찾아냈다.

사회사 혁명은 대성공을 거뒀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20세기 역사학의 가장 유명한 구호가 되었다. 정치사에 천착하던 정통파는 퇴조했고,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그룹은 프랑스의 아날 학파와 더불어 20세기 역사학을 양분했다(아날 학파는 정치사에 관심 없기로 한술 더 떴다). 

한국의 역사 연구자들에게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준 충격은 상당했다. 광복 직후 한국 역사학 1세대들이 찾아 헤매던 핵심 화두가 ‘발전’이었다면(선진국의 발전 경로 연구가 초창기 국내 사학계의 주류였다), 민주화 요구가 높아가던 1980년대 신진 연구자들의 화두는 ‘변혁’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이들에게 꼭 맞는 무기였다.
 

80학번인 이용재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홉스봄은 변혁의 시대, 역사학도들의 바이블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변혁을 꿈꾸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사회사·노동사를 하는 시대였고, 홉스봄은 최고의 길잡이였다. 마르크스주의 텍스트가 해금된 후 가장 많이 읽히는 역사가 중 하나였다.”

1980년대의 황혼기에 터진 두 사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붕괴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에도 큰 숙제를 던진다. 지적 혼란의 시기에, 평생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살아온 홉스봄은 일종의 ‘고정된 좌표축’ 구실을 했다. 다시 이용재 교수의 회상이다. “홉스봄이 그냥 고집 센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면 시대 변화를 못 따라간 늙은이 취급을 받았겠지만, 그는 사학계에서 누구도 부인 못할 업적을 쌓아올린 거장이었다. 반평생 공산당원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단 한 번도 교조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학문이 시대 변화를 견뎌냈고, 후학들에게도 지표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50년을 공산당원으로 살았던 홉스봄의 책 대부분은 정작 소련에서 금서였다. 소비에트의 악명 높은 ‘공식 역사관’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유대인이면서도 이스라엘에 비판적이어서 유대인 주류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쯤 되면 태생이 반골이다.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

하지만 이 위대한 반골에게도 ‘자기 검열’은 있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20세기에 대한 소련의 공식 견해가 엄존하는 한 1917년(러시아 혁명) 이후의 역사를 썼다가는 정치적 변절자로 매도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업 역사가로서 나의 역사는 1914년(1차 세계대전 발발 연도)에서 끝났다”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19세기 연구자가 된다. 그의 주저인 ‘19세기 3부작’은 1914년까지의 이야기다.

자기 검열은 1991년 소련 붕괴 후에야 풀린다. 1994년 홉스봄은 20세기사를 다룬 <극단의 시대>를 내놓는데, 이 책은 40개 언어로 번역되어 가장 널리 읽힌 역사서 중 하나가 된다. 사학계에는 “오래 사는 것도 역사학자의 중요한 재능이다”라는 농담이 있다. 홉스봄은 1991년을 넘기며 오래 산 덕에 20세기사를 다룰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용우 동덕여대 교수(85학번)는 “1994년에 쓴 이 책에서도 소련에 대한 애잔함은 은근히 묻어 있던 기억이 인상적이다”라고 말했다.
 


1956년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새 총서기 흐루시초프는 이 해에 대량학살 등 스탈린의 만행을 고발한 연설로 전 공산권을 충격에 빠트린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다. 한때 혁명의 전위로 존중받았던 소련 공산당의 위신은 돌이킬 수 없이 떨어지고, 공산주의 지식인들의 탈당 러시가 벌어진다. 공산당에 남은 일급 지식인은, 학문 분야를 통틀어서도 홉스봄 하나 정도였다. 그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난했지만, 탈당은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인터뷰를 할 때마다 어김없이 “왜 그때 탈당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자서전에 나온 그의 답은 두 가지다. “제아무리 소련을 회의한다 해도, 정서적으로 나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에 속한다.” 두 번째는 더 홉스봄스럽다. “자존심.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면 틀림없이 더 잘나갈 것이었지만, 냉전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로 성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았다.”

이 타고난 반골은, 묘하게도 학문 세계에서는 확고한 정통파였다. 그가 주도한 사회사 혁명은 어느 순간 ‘정통’이 되어버렸다

 

한국 사학도들이 홉스봄에 열광하던 그 즈음부터, 정작 사회사는 후학들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문화사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홉스봄의 경제 중심적 해석(경제 환원론까지는 분명 아니었으나)은 점차 인기가 떨어졌다. 21세기 들어서는 프랑스 혁명이나 제국주의에 대한 홉스봄식 해석이 다시 소수파로 고립된 듯한 인상을 준다.

현실 세계는 더 가혹했다. 소련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강단의 소수파 외에는 의미를 찾기 힘든 이념으로 전락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계보도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진보 세력도 더 이상 마르크스에서 답을 구하지 않는다. 이에 맞서 홉스봄은 2011년 <어떻게 세상을 바꿀 것인가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를 숙고하다>를 낸다. 그의 나이 아흔넷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는 반골이었고 투사였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문화적으로도 그는 굳이 새로운 유행을 따라가지 않으려는 정통파였다. 어릴 때부터 재즈 팬이었던 그는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재즈 평론을 썼다. 1950년대 록 음악이 떠오르자 그는 록을 일시적 유행으로 치부하는 오판을 했다. 록이 확고한 주류로 자리매김한 후에는 “미국 대중음악에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록이 재즈를 죽였다”라는 가시 돋친 논평을 쓰기도 했다. <옵저버>는 “이 표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홉스봄이 역사를 이렇게 쓰지는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그는 1960년대 신좌파의 아이콘 중 하나였던 청바지를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이른바 ‘68 혁명’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신좌파의 물결에 구좌파 중의 구좌파 홉스봄이 얼마나 시큰둥했는지는 유명하다. 홉스봄은 축제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정통파 혁명가의 정서를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의 책 중 하나가 68 세대의 필독서로 간주된다는 말에 그는 뿌듯해하기보다 놀라고 당황했다. “나이든 좌파인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이 친구들은 정치적 목표를 이뤄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였다.”(자서전)

68 혁명의 ‘문화적 해방’에 냉소

젊은 시절 늘 스스로를 혁명 활동가로 생각했던 그는 신좌파가 정치적 목표 대신 문화적 해방(그의 눈에는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워 보였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극단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특유의 삐딱한 영국식 유머로 이렇게 쓴다. “학생들이 정부의 타도나 권력 장악과 같은 하찮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68 세대의 아이콘이었던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해서도 홉스봄은 냉소적이다(“그것은 극적으로 잘못 구상된 전략이었다”). 반면 그는 브라질의 룰라를 “구좌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라며 집권 전부터 주목했다. 무장 게릴라 특유의 낭만주의를 배척하고 제도권 정당을 통한 집권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준다. 분명 그는 낭만주의자는 아니었다(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던 홉스봄이 게바라를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는 농담 같은 논평도 있기는 하다). 1968년에 51살이었던 홉스봄은 자신은 68 세대를 이해하기에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훗날 토니 주트와 같은 68 세대 출신 역사가도 홉스봄의 ‘68 무용론’에 동참한다.

‘정통파 반골’ 홉스봄은 한국에서도 1990년대를 거치며 일종의 ‘제도권 편입’을 겪는다. 그의 책으로 공부한 연구자들이 홉스봄을 강단으로 들여왔다. 사회사·노동사·19세기 유럽사에서 홉스봄은 필수 커리큘럼이 됐다. 사학도들 사이에서는 “군대에 책을 들고 들어갈 때 <혁명의 시대>는 혁명이라서 걸리고 <자본의 시대>는 자본이라서 통과된다더라” 하는 농담이 자연스러워질 만큼 익숙한 텍스트가 되었다.

묘하게도, 그때부터 다음 세대의 ‘조숙한 별종’들은 이 ‘강단의 텍스트’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당시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강상구 진보신당 창당준비위 부대표(91학번)는 “우린 더 빨갛고 불온한 거 보느라(웃음) 홉스봄은 볼 시간이 없었지”라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마르크스 보이’와 ‘혁명 마니아’의 공급도 예전 같지 않았다. 사학도들에게 홉스봄은 두 가지 의미로 ‘교과서’ 대접을 받았다. 익숙해졌지만, 1980년대만큼 열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러시아 혁명의 해에 태어나, 독일에서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고, 20세기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 경쟁의 한 축을 대표하는 역사가로, 1991년 소련 붕괴까지 목격한 그는 20세기의 화석이자 압축파일이다. 홉스봄은 그 특유의 역사 구분법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1991년 소련 붕괴까지를 ‘단기 20세기’라고 부르는데, 이 “별스럽고 끔찍한 세기”의 증인으로 그보다 어울리는 사람을 떠올리기는 무척 어렵다. 정말로 여러 가지 의미로, 다시 나오기 힘든 역사가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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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그애를 찾지 못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앉았다.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려두고 가만히 손가락의 느낌을 기다렸다. 손끝, 지문돌기의 아래에서 하얀 건반이 따뜻해지고 있다. 모든 물질은 자체의 파장을 갖는다고 그애가 말했었지. 소리를 내고 싶은 것은 건반일까, 손가락일까, 아니면 우리 둘의 파장이 일치해서 일어나는 신기인걸까. 진은 소리없이 건반을 반쯤 눌렀다.

 

" 사계, 어때? 봄, 여름, 가을, 겨울... "

 

진은 피아노 앞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애는 창 앞으로 가져다놓은 의자 위에서 무릎을 감싸안은 채 앉아 있었다.  짧아진 해 어스름이 창턱에서 그애의 옆얼굴을 지나 한쪽 어깨를 감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여름, 여름이 좋아. "

 

그애가 말했고 진이 손을 움직였다. 아버지가 본가에서부터 가져온 피아노였지만 우아한 검정빛을 조금도 잃지 않고 민감하게 공명해주고 있었다. 그애는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걸 좋아했다. 여름은 어둡고 불안하면서도 끈기있게 진을 끌고 갔다. 소리는 말처럼 뜻처럼 영혼을 가진 것처럼 방 안에 가득찼고 창문을 넘어갔으며 긴 계단을 지나 플라타너스 낙엽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그애를 찾아갔다. 파장이 맞으면 반응하는 전기석처럼 그애는 귀를 기울이고 걸음을 빨리 했다. 연습실 앞에까지 온 그애는 소리없이 문을 밀고 한발 두발, 그리고 멈춰선 채 피아노치는 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깨, 춤추듯 너울대는 팔꿈치와 길고 긴 손가락. 그애는 벽 앞에서 무릎을 구부려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가을의 짧아진 해가 이울고 장막처럼 노을이 연습실 안쪽으로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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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바람이 차다. 몹시 가을 타는 그애는 어쩌고 있을까. 진은 피아노 앞에 앉았으나 선뜻 손을 올리지 못했다. 생각이 내달리고 있다, 그애는 지금...

늦은 가을이다. 플라타너스는 온몸을 흔들어 벌거벗은 채 승천무라도 추고싶다는 듯 끊임없이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연습실을 나와 사범대 앞의 계단을, 호숫가를 돌아 학생회관 별관이랑 문과대의 뒷담을 살폈으나 그애는 없었다. 집에선 분명히 학교 간다고 나갔는데, 얼굴을 아는 같은 과의 사람들을 만나 물었으나 하루종일 어떤 강의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워낙 자주 빠지는 지라 별 관심도 없다는 표정의 동기들, 오히려 선배라는 여자들이 더 성실히 답해 주었다.

 

" 동아리실에 있을 것 같은데? 점심도 거의 그쪽 선배들이랑 먹으니까. "

 

단발 머리가 길어져 목과 어깨에 닿을듯 말듯한 여자선배는 얼굴 넓데데하고 눈도 코도 입도 다 커서 시원시원한 느낌이었다. 아, 언젠가 살풀이춤을 추는걸 본 것 같...진은 아는체를 했다. 그애가 어찌나 잘 묘사를 했는지 문과대 풍물패를 하면서 장구는 기본이고 무당춤의 전승자라고.

 

" 그건, 과장이 심하네요. 그냥 동아리에서 하는 수준이에요. "

 

"  예뜨락에 있는 거 아냐? 전에 거기서 같이 막걸리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거기서 책 보다가 막 자구 그러던데? "

 

숏컷트의 정말, 자격지심 있을 것처럼 못생긴 다른 선배가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동그마하니 호박모양인데 깨가 많아서 그리 보이나, 선배들 중 가장 생각이 깊고도 선하다. 라고 그애는 각주를 붙여주었었다.

 

" 니넨 파전이라도 놓고 먹었었지, 난 그냥 생두부만 달랑 놓고 먹었다. 것도 설립자 동상 아래에서 커피 마시는 커플들 구경하면서. "

 

중동? 비스무리한 어디쯤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사람인가 싶을 만큼 가무스름한 피부에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여자선배가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곱슬곱슬한 머리도 그렇고, 아랍풍인데 아주 섹시미가 넘친다. 고 말하면서 그애가 실눈을 뜨고 미소짓던게 생각났다.

모두들 그애를 사랑하고 아끼는 듯 진에게 친절히 그리고 벌써 안 보인지 며칠 된 것 같다며 걱정스레 함께 행방을 궁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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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 나는 독신주의자야. "

 

그애는 자신없이 말했다. 결혼이란 남과 여의 제도적 결합이니, 이를 좋다할 것인가 싫다할 것인가. 진은 끌듯이 물었다.

 

" 왜? "

" 나를 받아줄 남자는 없을 것같아서, 말하자면 피동적 솔로이스트지. "

" 고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과선배가 맨날 밥 사준다고 쫓아다닌다며? "

" 나를 모르고 접근하는 것뿐이야. 알고나면 도망갈 꺼야. "

 

허나 그애는 알게 하고 싶지도 않은 듯, 누구와도 길게 만나지 않았다. 인사치레의 관계 이상 무엇도 함께 하기를 원치 않는 그애가 그나마 얘기하는 사람들은 동아리에서 세미나를 같이 하는 선배들과 동기들이었다. 조금 잘 생긴 과의 학생회장과 문학써클의 키 크고 우수에 찬 표정의 한,두명의 남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긴 했다.

 

" 시를 쓰는 사람들은 어째 하나같이 여리여리한 걸까? "

" 그래, 얼굴 허옇고 손가락 가늘고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지. "

 

진은 거기다 안경까지 쓰면 완전.

 

" 브나로드야! "

 

하하하. 같이 웃었지만 진은 사실 러시아의 지식인운동도, 김기진의 시도 알지 못 했다. 그애가 읽고 있는 책은 대체로 역사책류였지만 가끔 소설을, 더 가끔 시집도 있었고 한번인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읽어보았지만 뭐.

 

카페-의자에 겉터 앉아서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우 나로-드!>라고 떠들고 있는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앞에 있다.

 

그 시를 읽고 있었던지 그 애의 표정은 어두웠고 비감에 차 있었다. 물론 우리가 그때 아담한 까페에 앉아있긴 했었지만, 민들레찻집이라는 조그마한 걸이팻말처럼 정말 테이블이 두 세개 밖에 없는 그것도 학교 담장 아래 쓰러질 듯한 단층주택의 주차장을 개조한, 그런데에서 김치볶음밥을 먹는게 뭐 그리 부르조아틱하진 않을터인데.

 

" 대학을 다닌다는 것이 부끄러워. "

" 나두."

 

그애는 얼굴을 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진은 음.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애는 5월을 지나면서 무척 진지해지고 있었다. 두꺼운 한국현대사를 1권, 2권, 3권까지 읽어내더니 다음권이 안 나온다면서 비평잡지를 사 보기 시작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끌어대며 대화를 잇곤 하던 그애에게 익숙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카프라던가 OSS요원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봤자 그애에게 심중의 공감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진을 그애는 사랑했다.

 

"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대학을 다녀야지. 너는 왜..."

 

그애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작년 수험생 시절, 엄마보다 담임보다 더 화를 냈던 것은 그애였다. 왜 피아노과를 안가고 음교과냐구,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그럴게 뭐냐구, 나중엔 난 사범대 얘들은 다 싫어해! 라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하긴...사대 분위기가 좀 실용적이긴 하지, 반권위주의를 기치로 하는 그애의 컨셉엔 안 맞기도. 하지만 그애는 사범대로 가는 긴 계단을 좋아했다. 그늘도 지고 낙엽도 지고 바람도 땅 가까이 포복하듯 불고 가는 언덕 아래 사범대 앞의 계단에서 쇼팽의 에튀드를 들으며 진을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 음악을 듣고 있는게 좋아. 주변에 무엇이 있던, 말 거는 이 없이 내버려둬 준다면... "

 

그애의 빨간 스테레오카셋트는 아직은 책상 위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고, 93.1 메가헤르쯔의 클래식이 계속 흘러나오는 한은 대학생이라는 그애의 신분이 유지될 것이었다. 아무리 백수의 탄식을 저를 향해 읊으며 괴로워한다 해도, 페미니즘의 끝을 이어 독신의 생애를 예감한다 해도 갓 스물의 그애가 바람부는 계단에 앉아 읽던 책을 덮고 녹턴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진의 노래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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