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생각_펌 - 2005/01/23 10:14

쭌모님이 -적어도 나에겐 - 매우 소중한 자료를 찾아냈다.

1990년 3월 9일, 잠긴 방안의 불의 연기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혜영이,용철이 남매의 추모제에 대한 자료다.

굿 형식의 추모제를 다룬 글임에도 말로 만 듣던 그 사건이 마음에 와닿는다.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할 일을 자꾸 잊는다.

적어도 10만 보육인은 잊지 말아야 할 그 사건, 무엇을 위해 활동할지 처절하게 깨닫게 해주는 그 사건, 다시는 없었으면 하는 그 사건.



혜영·용철이 추모제

 

박  영 희(굿연구소 객원연구원)

 

1.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굿이 무엇이기에 우린 21세기를 바라보면서도 되새김질을 하는 걸까요?
오랜 시간의 여행 속에서 많은 신흥종교들은 이 땅에서 생겨나고 또 사라지면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 그것도 백의민족이 사는 우리 한반도의 굿은 그 어려운 질곡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민중들과 더불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은 진정 무엇이었을까요? 
신관(神觀)이 그럴 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무당을 길러 낼 굿학교 하나 없는데 굿은 어떻게 전승되어졌을까요!
필자는 이 의문에 어느 하나 논리적으로는 대답할 능력이 없지만 이 시대에서도 분명 굿을 보았고 그 굿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현장을 통해서 “이런 것이 ‘굿’이라는 것이로구나!”는 가슴 저리는 감동과 확신을 갖게 됐으며, 우리가 마련하고 해야 할 굿의 방향과 방법을 미흡하게나마 제시받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현장은 이랬습니다.
오누이가 방에 갇혀 불에 타 죽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일입니다. 가난을 벗어나려 서울에 와 사랑하는 두 아이를 잃어버린 이 사건은 올라가는 전셋값을 마련하지 못해 자살한 가장들의 죽음과 더불어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게으르고 무능해서 생긴 사건들이 결단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불균형에서 파생된 결과라고 여성단체에서는 입을 모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죽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토론하였습니다.
당시 어느 단체도 전문문화패를 독자적으로 꾸리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짧은 시간 내에 내용을 담아 낼 수 있는 집회로 상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존 집회 문화의 성격으로는 죽은 이의 한과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의 모순을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 두 내용을 다 넘나들 수 있는 “굿”이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단체에는 기독교 단체가 많아 “굿=미신, 故로 절대불가”란 지론이 원체 거세었기에 “추모제”로 명명하였습니다.
글쓴이는 “추모제를 왜 하는가?”에 대한 사건의 전말과 준비과정, 추모제 진행 상황, 추모제 이후의 작업과 그 의미들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2. “혜영이 영철이 추모제”의 전말


■ 3.8 여성대회


혜영이 영철이의 사건이 나기 하루 전인 1990년 3월 8일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제6회 한국여성대회’가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이때 여성의 권익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 제시되었습니다.
<탁아입법>, <농촌 상설탁아소 설치>, <여성직업병 대책>, <가족계획 정책 전환>, <외자도입법 개정>이 이 대회에서 제시된 정책들입니다.

 

■ 혜영.용철이의 죽음

사회의 곳곳에서 방치된 어린이들의 사고가 잇달아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되던 차 1990  년 3월 9일 오전 9시경 혜영(5살) 용철(4살)이는 어린 남매가 연기에 질식되어 병원으로 옮기던 중에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경비원이요 어머니는 파출부였습니다. 시골에서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사귄 이웃도 없고 아이들의 친구들도 없었으므로 아이들을 방안에 두고 밖에서 자물쇠를 잠근 채 맞벌이 부부는 일을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좀더 나은 곳을 찾아온 서울에서 맞은 죽음이었습니다.

 

■ 추모제

이 사건이 나기 전에 이미 “3.8 세계여성대회”를 통해  <탁아입법>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로 제시한 바 있는 여성 단체들은 바로 하루만에 발생한 “혜영이 용철이의 죽음”을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두 오누이의 죽음은 탁아문제의 심각성을 웅변적으로 환기시켜 준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탁아문제 특별 대책위원회(이후 ‘탁특위’라 기술하겠음)”가 구성되었습니다. 이 “탁특위”에는 여성단체연합회,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 한국여성노동자회, 도시빈민연구소, 감리교 사회선교여성회, 카톨릭지역아동협의회, 기독여민회가 참가하였습니다. 탁특위가 병원을 찾았으나 두 오누이의 시신은 화장터로 떠난 후였고 화장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줌 재로 변한 뒤였다고 합니다.
이 죽음은 부모만의 잘못이 아니기에 부모로 하여금 죄의식에서 해방시키고 사회적 환경을 환기시키기 위해 추모제를 갖기로 탁특위는 결정하였습니다. 지역사회탁아소연합회가 보고한 보고서를 그대로 옮겨보면 그 전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준비모임은 3월 14일이고 추모제는 25일이었으므로 짧은 시간내에 역할을 세분화시켜 진행시켜야 했습니다.
필자는 여성단체연합회 산하의 한국여성민우회 문화기획실의 간사를 볼 때였으므로 한풀이 부분과 애도시에 대한 부분을 담당하였습니다.  필자는 이 사안을 당시 굿연구소(현)결성을 준비하던 준비모임에서도 함께 논의하였습니다.(필자도 준비모임의 일원이었음) 이 준비모임에서는 “굿(巫굿)의 형식이 가장 적합하다.”는 안을 제시하였고 적극적으로 굿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만장일치). 그러나 행사가 치러질 곳이 교회였고 또 위령제 참가 단체들 중 기독교단체가 많았으므로 ‘굿’이라 명명할 수 없는 난관에 처했습니다. 무악은 굿연구소 준비모임(4명)에서 담당하기로 하였으나  무당이 문제였습니다. 굿은 무굿의 형식을 택했기 때문에 무당이 필요하였습니다.  판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그 당시 기존의 강신무 중에 이 추모제에 주저없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판을 이끌 수 있는 무당을 찾기란 불가능 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무굿을 문화운동적차원에서 실기를 익히고 판을 만들며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던 극단“현장”의 단원(조 의자)을 섭외하여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두 어린 영혼이 무당에게 실려 쏟아낼 목소리(공수)는 작가(안일순)에게 의뢰하여 대본울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준비가 끝나고 계획된 25일 추모제가 성문밖교회에서 열렸습니다. 당일 진행된 추모제는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 전체적인 순서를 살펴보고 이런 구성을 하게 된 이유와 상세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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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  준비 모임  보고서

 

1. 날짜 : 1990년 3월 14일
2. 참가단체 : 기독교여민회, 한국여성노동자회, 여성단체연합회, 지역탁아소연합회
3. 위령제에 관하여
    1) 제목 : 추모제
    2) 부제 : 혜영. 용철이의 넋을 기리며
    3) 행사일 : 1990년 3월 25일
    4) 진행순서
         ① 애도곡과 애도시와 함께 헌화
         ② 한풀이
         ③ 부모님 조사, 교사 조사
         ④ 주제강연
         ⑤ 결의문
    5) 홍보물
          홍보전단, 플랭카드, 피켓, 벽보구호, 대자보
    6) 진행담당
          ▷ 한풀이
          ▷ 부모조사,  교사조사
          ▷ 주제강연
          ▷ 결의문
    7) 각 단체 담당 사항
          ▷ 여성단체연합회 - 홍보전단, 애도곡, 애도시, 한풀이(굿)
                              맡길 곳 선정, 기자연락(보도의뢰)
          ▷ 지역탁아소연합회 - 플랭카드, 피켓동원, 휘장, 흰색천,
                                조사의뢰, 결의문 후 들어갈 주장, 혜영.용철이 사진
          ▷ 기독교여민회 - 벽보구호
          ▷ 한국여성노동자회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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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용어에 있어서도 전체적인 구성과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통일감의 부족과 산만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용의 중복도 보입니다. 굿의 용어와 유교식의 제사용어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집회문화의 구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어의 불일치, 구성의 산만함, 표현의 거칠음은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충분한 시간과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면 좀더 매끄럽고 굿적인 판을 갖출 수 있었겠지만 오누이의 죽음 앞에서 또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무당의 공수가 쏟아지지 않는다고 그 어느 한사람 가짜 무당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았습니다. 무당이 등장해 굿을 한다고 거부감을 표현하는 사람도 하나 없었습니다. 종교의 다름, 표현 형식과 세련됨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혜영이 용철이가 왜 죽었고 우린 왜 한자리에 모였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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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 진행 상황

1. 참가자 : 혜영. 용철이의 부모, 각 지역탁아소의 자모들, 각 여성단체의 회원들, 기타 민주단체 회원들  
2. 진행 순서
   1) 제사 상향
         ① 추모곡 - 한국여성민우회 어머니 노래단
         ② 주제강연 - 김경태(제목: 탁아소현실과 문제점)
         ③ 추모곡 - 정태춘(곡명: 우리들의 죽음)
   2) 판씻김
         ① 무당, 무악, 춤패 등장 - 판을 정갈하게 하는 의식
         ② 초혼 - 부정거리에 초혼의 내용까지 함께 담음
         ③ 신내림 - 사설 공수. 혜영 용철의 혼을 받아들임.
         ④ 어미넋풀이 - 글을 준비한 안일순이 직접 낭송
         ⑤ 추모곡
         ⑥ 조사낭독 - 탁아소의 자모 한 분과 탁아소 교사
   3) 천도굿
 긴 베(저승길을 상징)위에 참가자들이 국화꽃을 헌화한 후에 무당이 이 베를 가르며 오누이의 혼을 보낸 후에 그 국화꽃을 들고 천도를 기원하는 춤을 춤.
   4) 결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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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추모제는 문화집회, 시위집회차원을 뛰어 넘어 살아 있는 우리민족문화로써 자리매김하는 가능성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시사해 주었습니다.
진행상황과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가능성과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순서인 “제사 상향”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상향(上饗)’이라는 용어는 다알고 있듯이 유교적 한문 표현입니다. ‘제사음식(굿음식)을 정성껏 올리니 기꺼운 마음으로 잘 드시라는 뜻이지요.’ ‘제사(祭祀)’라는 용어 역시 유교식 한자입니다. 이 한자를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을 한다면 ‘굿’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그냥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한국여성민우회 산하의 문화소모임인 어머니 노래단이 추모곡을 부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곡의 내용은 차지하더라도 이들이 노래하는 추모분위기는 전체의 흐름과는 무척 다르다는 반응이었습니다. 하얀블라우스와 검정치마로 통일한 차림새는 상당히 고상했으며 아름다운 미성(美聲)으로 노래했지만 오히려 이 점들이 가난한 맞벌이 부부와는 조화롭지 못하다는 결과를 줬을 것입니다. “경제적 토대가 달라서 그렇다”고 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울립니다. 이어서 연단에 선 김경태회장의 우리나라 탁아문제에 대한강연은 전체적인 시간안배에 비춰 볼 때 너무 길었고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를 사후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수 정태춘의 순서가 되면서 분위기는 돌변했습니다. 통기타를 하나 들고 무대에 선 정 태춘은 혜영이 영철이의 사고 소식을 텔레비젼 뉴스로 접하는 순간 졸지에 불덩이 속에서 몸부림치다 공포에 죽어 갔을 애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고, 같은 또래의 자식을 둔 부모로서 혜영이 용철이 엄마 아빠의 심정이 내 아픔으로 아려왔다는 당시의 감회를 밝힌 후에 자신이 기타 반주를 하며 준비해 온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아른 거리는 혜영이 영철이의 몸부림치는 모습과 엄마 아빠의 심정이 가사가 되고 곡이 되어 그날 밤에 한 편의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노랫말은 사건의 상황을 잘 그려 주고 있었습니다. 내용으로 보나 음악적인 면으로 보나 노래가 담당해야 할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라는 면으로 보나 뜻깊은 노래였기에 그때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음미할 겸 가사를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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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리 들 의    죽 음  

 

                                               작사/ 작곡 : 정 태 춘


1..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에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 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리 심심해도 할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 줄도 몰라 밤에만 보는데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나와 우리 집도 동네도 안나와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장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불장난을 했었어

 

2.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 저기 옮겨 붙고 훨훨 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눈에도 훨훨
   방문은 꼭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안에 꽉차고
   우린 서로 부등켜 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밖에는 할 게 또 없었네. 동생은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에는 누구 하나 찾아오지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 지도 몰라 거긴 어쩌면 낭떠러지인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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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성을 검증 받은 가수가 조용하면서도 애잔하게 호소력있는 가창력을 바탕으로 읊조리듯 때로는 넋두리하듯 들려주는 노래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때까지의 조금은 지루하고 뭔가 생경하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혜영이 용철이의 울부짖음이 모든 참석자들의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통곡케 하고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애써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던 혜영이 용철이의 엄마는 감정을 더이상 추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뿐만 아니었습니다. 이 노래는 평소 굿의 대중성획득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노래는 꼭 무가를 듣는 착각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아니 한 편의 서사무가였습니다. 내용은 대표적인 서사무가인 “바리데기”이야기나 “장자풀이”이야기처럼 하나의 사건과 이야기를 노래에 실어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바리데기의 아픔과 이 시대의 가난한 어떤 어린 오누이의 아픔은 “아픔”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아픔이 단순히 개인적인 아픔의 차원이 아니고 각각의 시대에서 같은 운명과 조건을 갖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아픔과 슬픔이라는 점에서, 이는 그 사회와 그 시대의 모순과질곡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즉 천대받던 여자의 운명 그것도 아들을 낳기 위해 일곱 번째(혹은 아홉 번째)까지 낳은 자식도 결국은 딸이어서 딸부자집을 만들어 버린 “여자(바리 데기)”가 맞게될 운명은 그 시대(봉건시대라고 표현하면 적절할는지)의 모든 여자들이 안고 있었던 슬픔이었습니다. 이는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사회/ 남성 지배의 권위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모순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돈이 우상시되는 사회에서 태어난 가난한 도시 어린이들이라면 누구나 맞이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아픔과 모순을 혜영이 용철이는 대변한다는 점에서 똑같다는 말입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 태춘은 악기 하나만으로 반주를 하되 직접 자신이 반주를 하였습니다. 음악의 도입부는 마치 이야기를 전하듯 특별한 선율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부분부터 선율이 나왔습니다. 그것마저도 읊조리듯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습니다.  이 모습과 분위기는 전라도 씻김굿의 “오구굿(바리데기 설화를 구송하고 난 후에 망자의 환생을 점쳐보는 거리)”이나 “손굿(천연두신인 마마신을 잘 달래 집안의 액운을 걷어내는 거리. 마마신이 조선땅에 오는 노정기를 무당이 구송한다)”과 구조와 분위기가 닮아 있었습니다. 두 거리 다 무당(단골)이 장구 하나만을 들고 직접 구송하는 구조입니다. 동해안별신굿의 “심청굿(심청전의 이야기를 4-5시간에 걸쳐 쉼없이 무녀가 구송한다)”은 씻김굿과 달리 양중(남자 악사)이 반주를 하기는 하지만 꽹과리 징과 같은 시끄러운 다른 무악기는 다 쉬고 장구 하나만으로 반주하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거리와는 달리 이들 서사성을 띤 거리들은 유독 그 화려하고 높은 기예를 갖은 고인들이 받쳐주는(이를 단골들의 사회에서는 ‘바라지’라고 표현한다) 삼현육각의 반주를 거부하고 무당(단골)이 직접 장단을 맞추며 무가를 부릅니다. 특히 손굿은 “無장단”이라고 해서 일정한 정형이 없는 불규칙한 리듬꼴로 칩니다. 넋두리하듯 무당이 읊어 대기에는 오히려 장단을 맞추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비효과적일 지 모릅니다. 넋두리의 감정을 가장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구조는 그때그때 감정이 가는 대로 맡겨 두는 것이 더 효과적일 테니까요. 특히 이야기의 내용을 잘 전달시키기 위해서는 시끄럽고 화려한 반주음악보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덜 지겨우면 되고 재미를 살려주는데 필요한 리듬만 유지해 주면 될 것이니 최소한의 악기구성과 음량과 선율이면 충분할 것이며, 이것이 가장 적절한 구조와 음악적 장치일 것입니다. 무정형이 하나의 정형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점에서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은 서사무가의 음악적 수준에 근접하고 있었습니다.
무가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데에 일조를 한 조건은 또 있었습니다. 이 추모의 노래는 가상적인 상황을 상정하여 만든 노래가 아니었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서 만들어졌으며, 그 노래가 불리어진 장소도 그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는 실제의 상황 즉 생활현장이었으며, 그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그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은 당사자들이거나 이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 인식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갖은 간접적인 당사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노래를 만든 작곡자와 가수 역시나 그 사건과 간접적일 망정 당사자로 인식하고 그 생생한 감정과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의 상황, 당사자, 장소, 생생한 감정의 표현이 일치하고 있는 생활(삶)현장 그 자체였다는 말입니다. 굿은 실제 상황이 아니면 하지를 않습니다. 굿은 생활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만 가장 적합한 시기를 택하고 가장 적절한 방법을 택해서 합니다. 그리고 굿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은 꼭 가시적으로 이룩해 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상적인 상황을 거부합니다. 당사자(직접,간접의)들만이 참석합니다. 굿의 과정에서 내 일이 아니라고 느끼면 참가자는 거부하거나 판을 떠나갑니다. 굿은 당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굿판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무당(광대)은 당사자의 감정을 갖고 굿판에 임하도록 요구받습니다. 무당은 신병(神病)을 통해서 혹은 사회적인 강제와 굴레를 통해서 어떤 상황의 인간사라도 내 아픔으로 내 일로 공유할 수 있는 훈련과 인성을 이미 갖춘 사람들입니다. 굿은 실제의 상황을 가장 잘 담아내고 풀어내어 실제의 상황이 잘 운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구조와 형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한 순간의 앞날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유동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이런 특성을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담아 내기 위해서는 무정형의 정형과 정형이 유효 적절하게 배치되야 하며 이를 가능케 할 춤과 노래와 이야기, 그리고 덕담과 협박과 의상과 상징물(소품)과 제의와 놀이와 기쁨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노여움과 사랑과...이 모든 것이 다 필요합니다.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기동성있게 상황에 따라 유효적절하고도 즉흥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들의 죽음”은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물론 차이점도 있었습니다.
음악적인 면에서 본다면 “우리들의 죽음”은 서양음악이었고 “굿”은 한국음악이라는 점입니다.
내용적인 측면의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이땅은 수도 없는 바리데기(아니 모든 이땅의 여자는 바라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긴 헤아릴 수 없는 바리데기들의 한과 염원이 응축되고 한데 모여 바리데기에게 초인적인(神과 같은) 힘을 줌으로써(힘으로 化하면서) 바리데기는 결국 온갖 고난을 극복해내고 마침내 생명수를 구할 수 있었으며, 그 힘(생명수)은 어린 생명(바리데기 자신)을 죽여버리려 했던 친아버지(오구대왕;남성지배사회의 모순과 압제를 상징;원수)의 생명을 오히려 구제해 줌으로서(원수의 생명까지 용서) 가정의 화목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승리를 얻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혜영이와 용철이는 이 시대 이 땅의 많은 혜영이 용철이의 아픔과 슬픔을 아직은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고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이 다릅니다. 바리데기는 신(巫祖神)이 되어 질곡과 아픔을 겪는 헤아릴 수 없는 이 땅의 여인들을 어루만져 주고 헤쳐나갈 힘을 주었으나 혜영과 용철이는 아직 가련하고 불쌍한 어린 죽음에 불과하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이질적인 조건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만나야 하고 공통점을 바탕으로 두 개의 이질성을 녹여 내어 하나가 되야 할 성질임을 환기시켰으며 그 가능성을 확인시켰습니다. 전통적인 굿양식이 아니라 대중가요만으로 굿을 해치우는 무당이 이미 서울 장안에 존재하며, 재즈를 공부하다 신을 받고 무당이 된 젊은 박수가 장차 재즈를 굿에 도입시켜 나름대로 굿을 해보겠다던 포부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가 이 시대의 “우리문화”를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하고, 이를 생활과 연결시킴으로서 직접적이고도 필요한 문화로서 기능하고 역할하도록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는 대명제를 실천해 갈 구체적인 하나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기회였다는 데에 의의가 컸습니다.
마침내 이런 긍정적인 결합이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결국은 계속이어진 추모제의 모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추모제가 끝난 후의 여성단체들의 노력과 싸움을 통해 혜영이와 용철이가 바리데기와 같은 힘을 갖춰서 우리 모두의 신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어가야 한다는 문제제기로 귀결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추모제는 그 힘을 모아 가는 출발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두번째 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추모제는 이제 본격적으로 혜영이 영철이의 넋을 불러 위로하고 기리는 판씻김거리로 접어 들었습니다.
“판씻김”이라는 말은 주로 필자가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평소에는 의식 도입부에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판의 부정을 가려 깨끗하게 정화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을 불러들이는 초혼과 넋을 달래고 죽음의 의미를 모두가 기리는 실질적인 위령굿의  내용을 판씻김이라고 명명해 보았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본다면 정태춘의 추모곡이 실질적으로 초혼을 한 셈이 되어 내용적으로 중첩된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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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라 어린 것이   이 어미가 안아 보자
안자 하니 몸이 있나   보자 하니 얼굴이 있나
차라리 물에 빠져 죽은 들 이보다 억울할 소냐
차라리  얼어 죽은 들  이보다 슬플소냐

혜영아 용철아         이렇게 갈 바에야
태어나질 말지         하필이면 가난한 부모 만나
음지에서 갇혀 살다    숨이 막혀 죽었느냐

차라리 내가 죽지      이 가슴에 너희를 묻고
어찌 사나 내 못산다.
나도 가자 이런 세상   살아서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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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춤패“디딤” 소속의 춤꾼 2명이 판을 씻으며 무악에 맞춰 춤을 추며 판에 들어섰습니다. 그 뒤를 무당이 따라 들어 왔습니다. 이어서 무당은 황해도 굿형식에 빌어 판과죽음에 끼인 온갖 부정을 쳐내어 판을 깨끗하게 하는 부정거리를 하고 이어서 혜영이와 용철이의 죽은 혼을 불러들이는 굿을 하였습니다.  이어서 안일순이 준비해온 “넋풀이”를 낭독하였습니다.
당초에 무당의 몸과 입을 빌어 내려온 혜영이 용철이 혼이 엄마 아빠를 만나고, 만나고 싶은 사람과 굿판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할 이야기와 원통함을 들어보는 순서(공수)로 상정하였으나 엄마 아빠의 심정을 대신 표현함으로서 넋을 달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초 계획대로의 시행여부와는 무관하게 모든 참석자들의 심금을 다시 한번 건드렸으며 넋놓고 울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어서 민중가요 작곡자인 안혜경이 이 추모제를 위해 작곡한 “이제야 돌아왔구나”를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지역탁아소에 아이를 맏기고 있는한 부모가 나와 조사문을 읽었습니다. 내용은 “혜영이 용철이를 빼앗아 간 이 현실의 부조리함을 올바로 알고 이제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일하는 엄마들 모두손을 잡고 함께 일어납시다”였습니다. 이어진 탁아소 한 교사의 내용은 “다시는 너희가당한 아픔이 없도록 우리의 모든 아이들, 자녀들을 보호할 근거지를 확보하겠노라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힘겨운 일터로 부모를 내몰고도 아이는 집에서 키워햐 하고, 탁아소가 많이 생기면 가정이 파괴된다며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우리 부모들을 이리저리 몰아부치는 무리들의 입을 모조리 봉해 버리겠다.”는 내용이었었습니다.  
이제 추모굿은 막바지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두 영혼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저승길을 잘 닦아 미련없이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 주었습니다. 이 거리를 천도굿이라고 명명해 보았습니다. 무당이 황해도굿의 형식인 십대왕거리를 빌어 진행하였습니다. 먼저 문밖을 향하여 긴 무명베를 펼쳐 길을 만들었습니다. 참석자들이 나서서 양편에서 베를 맞잡아 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바로 흰무명베 위에는 참석자들이 혜영이 용철이가 마지막 가는 길에 받친 흰국화꽃이 수북히 쌓였습니다. 국화꽃을 바치는 참석자들은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혜영.용철이 또래의 어린 고사리손에 쥐어진국화가 헌화될 때는 그나마 참고 있었던 눈물들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흰 국화꽃으로 뒤덮인 길을 무당이 몸으로 찢어나가며 무가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천도의식이 시작된 것입니다. 무당의 앞소리(무가)가 끝나면 사람들은 후렴을 따라 불렀습니다. 그 노랫소리는 “탁아법을 제정하라”였습니다. 우리는 무당의 소리에 맞춰 한 목소리로 따라 부를 때 ‘한 자리, 한 힘’을 다같이 느끼며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동의 노래는 쉬었고 따라 하기도 좋았습니다. 절실한 우리의 요구가 “탁아 법을 개정하라”는 운율로 변하여 입에서 입으로 불려질 때 ‘아 난 이래서 광대를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혜영이 용철이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슬퍼만 하며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혜영이 용철이가 가는 길은 탁아법을 개정시켜야 하는 길이었기에 우리의 ‘탁아법을 개정시키겠다’는 의지로 두 어린 넋의 저승길을 닦고 열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탁아법을 기필코 따내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쳤습니다. 단지 추모제는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3. 추모제 이후의 작업과 그 의미들

 

조의금은 모두 672.000원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472.000원은 혜영.용철이 부모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추모제를 치르는 데 들어간 경비가 총380.000이었습니다. 모자라는 금액은 각 참가단체가 나누어 부담하였습니다.
추모제가 미친 파급효과는 여러모로 크게 나타났습니다.
‘절대 안된다’는 금기를 깨고 교회에서 굿을 했다는 이유로 산업선교회인 성문밖교회의 이근복목사님이 그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당시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초 논란과 반대와는 달리 굿이 끝난 후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함께 공감하고 다짐했던 우리의 과제에 대한 공통된 인식과 의지, 이들이 만들어 냈던 공감대와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 추모제의 감동에 편차와 편견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장에 없던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고 교회에서 굿이 가능하도록 허락한 목사님 이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희생양이었던 셈입니다. 김경태회장님의 다급한 사과방문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탁아법제정>을 위한 운동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선 추모제에 대한 참가 단체들의 자체 평가는 긍정적이었습니다. 여성단체연합회의 1990년도 총회보고서에 의하면 “탁특위의 활동 중 대사회적으로 탁아문제에 대한 선전을 극대화해 냄으로서 여론 형성에 큰 성과를 보였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특히 “각 집회의 위상과 수위에 걸맞은 차원에서 실질적인 준비가 필요하며 그 방안의 하나로 문화위원회 구성을 향후 과제로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추모제의 전 과정을 여성영상모임인 “바리데기”에서 기록하여 탁아문제 비디오인 “우리네 아이들”을 제작하였으며, 이 영상물을 추모제 이후에 실시한 탁아문제 집회나 모임에서 상영하였고 유통시켰습니다. 그 파급효과는 컸습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추모제는 1994년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영.육아 탁아입법”을 획득해 내는 토대 구실을 하였습니다.
한편 지금에 와서 돌이켜볼 때 탁아교사들의 처우문제까지 거론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많은 사설 “어린이집”이 생겨나 탁아소의 역할을 대신 해줘 맞벌이 부부들의 큰 짐을 덜어주고 있으나 정작 저임금, 늘어난 노동시간, 충분치 못한 교구와 교재, 초과인윈에 의한 과다한 업무량으로 교사들은 충분한 대우를 못 받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노조를 결성하려는 연대의 모습과 보다 질 좋은 교육을 전달하고 전인교육자로서 전문성을 높여 가려는 노력이 교사들에게 지워진 과제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글쓴이나 굿에 대해 고민하는 문화운동활동가들에게도 의미있는 자리였습니다. 이 판을 통해 “굿은 무엇이며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하는가?”를 검증하고 생생하게 느껴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현재 생활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처하며 구체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자리였으며(생활로서의 굿), 마음을 같이 하는 여러 정성들이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모였으며(대동성), 함께 경비를 마련하고 뜻을 모아 동참했으며(걸립정신), 각자 우러나오는 정성을 바탕으로 갖고 있는 능력을 나름대로 표현하니 표현방식은 달랐으나 한 목소리를 냈으며(굿의 총체성), 현장성과 사실성에서 우러나는 절심함이 우선이고 표현 방식이나 테크닉은 부차적인 요소라는 점을 재삼 확인시켰으며(굿의 예술성), 한의 원인과 해결을 개인적인 차원에 묶어두지않고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차원으로 인식하고 대처하였으며(굿의 사회성), 이후의 지속적인 작업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냈다(신명의 본질)는 점들이 감동을 준 요소이자 “굿이 무엇”이고 “어떤 굿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우리의 숙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굿이 곳곳에서 행하여지고 있으며 그 작업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인과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더욱 생생한 증거로 6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그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회고담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사실을 들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 같은 감동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 http://www.kut.or.kr 의 굿지 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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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3 10:14 2005/01/2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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