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본 직 후의 솔직한 나의 심정은 바로 권태로움이었다.
영화의 주제로써의 '권태'가 아닌 나의 느낌으로써의 '권태'였다.
17세의 풋풋한 아름다움을 가진 누드모델과 40대의 이혼한 철학 교수라니..
배우들이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앞으로의 스토리의 전개를 알려주는 듯 하다.
역시나 40대 교수 마르땅은 '책을 쓴다'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활동을 통해 일상의 권태를 날리고 변화를 꿈꿔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소녀, 세실리아.
그녀는 만날때마다 섹스만 하고, 대화를 해봐도 별로 관심있는 것도 없고, 심지어 자신이 뭘하고 지내는 지조차 별 관심이 없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
처음엔 몇 번 자고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결국 끊어내지 못하게 된 건 마르땅.
뒤를 밟고, 지켜보고, 추궁하고, 결국 원하는(?) 답을 듣게 된다.
세실리아는 다른 애인도 사귀고 있었고, 얼떨결에 들키긴 했지만 마르땅과 헤어질 생각도 없다. 이런 관계가 못마땅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마르땅.
영화가 끝날 무렵, 그는 심기일전을 다짐하지만, 그게 그녀를 단념하겠다는 소리인지 죽을때까지 그녀를 붙들 것이라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다.
한참 섹스를 즐기고 다른 사물에 별 관심없어 보이는 나이인 세실리아는 그저 그 나이스러운 매우 평범해보이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녀를 쫓아다니는 마르땅은 비현실적이지만 어쩐지 유럽의 권태로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인물이 아닌가 싶었다.
왠지 프랑스영화를 보면서 언젠가는 보았을 법한 설정과 내용 전개.
그래서 나는 매우 권태롭게 보았고,
다만 마르땅의 너무나 진지하여 매우 코믹스러운 연기만이 업그레이드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좀 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ㅁ
마르땅은 교수인 주제에 가르침에 대한 기쁨도 잊어가고 있고, 6개월 전엔가는 부인과 이혼했다. 일단 책도 써보려고 시도는 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보면 그는 어느새 40 평생을 살면서 단 1분 1초도 권태로움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련해놓은 삶의 공간인 가정과 학교가 모두 무료해진 그 때를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책쓰기라는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침 바로 그 당시 그때의 그에게 그런 방식은 맞지 않았고, 우연히 만난 세실리아가 바로 새로운 변화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 변화를 자신이 알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하고자 노력한다.
즉, 세실리아를 소유하고 독점한다는 마무리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만만치 않다.
그녀에게 일상은 원래 권태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뭣할 만큼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오늘 누구와 만나, 어디서 식사를 하고, 무슨 구경을 했는 지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옆에서 마르땅이 추궁할 때만 겨우 기억이 날 정도다.
그녀에게 일상의 권태로움은 그다지 처참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며, 꽤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득 마르땅이 필연적으로 세실리아가 필요했던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난 그저 마르땅이 변화가 필요한 그 시점에 때마침 세실리아가 끼어들어왔던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르땅에게 있어서 책쓰기나 세실리아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만약 그 당시 책쓰기에 필(feel)이 꽂혔다면 탈고하기 전까지는 권태로울 일이 없었겠지.
다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건대 책쓰기와 세실리아가 다른 점이 있다면
세실리아는 마르땅이 알고 있는 연애나 사랑의 방식에 맞춰 들어올 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이기 때문에,
마르땅은 이번 변화의 필요성에 있어서 시작점을 가지긴 했으나 종착점을 얻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마르땅 입장에서도 그다지 나쁜 상황만은 아니지 않나 싶다.
어떻든 마르땅은 변화가 필요했는데 뭔가 변화의 필요성이 완료되면 결국 또다른 변화의 필요성이 도래하게 된다.
변화의 필요성이 완료되는 시점, 종착점, 권태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실리아가 마르땅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어떠했을까? (심지어 청혼도 했다.)
결국 몇개월, 몇년 후에 마르땅은 또다른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되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삶에 대해 점점 달관하게 된다던데 잘 모르겠다.
나도 왠지 마르땅처럼 어느새 한 순간도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고민된다.
물론 권태로움을 참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 그닥 나쁜 일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을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내는 데는 참~ 도움이 되지 않을 듯 싶어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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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부재가 곧 인간을 조악한 유기물 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고 생각하는 철학자 마르탱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세실리아와의 관계의 패권은 전적으로 그녀의 쪽에 머문다. 세실리아는 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