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오사카 보육운동연락회 히쿠치 부회장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바로 전에 올린 일본보육정책 흐름과 비슷한 사회 현상들이 동일하게 드러나는데, 보육운동체의 입장에서 실제 어떠한 투쟁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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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5,60년대 고도경제 성장 시대를 맞이하여 맞벌이가 종용되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었다. 도시에 인구가 증가하였고 핵가족화되다보니 보육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렇게 높아지는 ‘보육소 건립 요구’가 보육운동연락회 창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1954년부터 개최된 ‘어머니대회’는 육아의 어려움을 나누는 자리로, 매년 모여 분과별로 절박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그중 한 분과에서 보육소 설립 요구가 진행되었다.
이 ‘어머니대회’를 기반으로 1964년 보육운동연락회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어머니들끼리 스스로 회비를 걷어 모임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지역 내 보육에 관심있는 사람들끼리 일하면서도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만든 무인가 보육소가 많았으며, 직장 내 탁아소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45~64년 사이 보육소가 조금씩 늘어나게 되는데, 65년 당시 인가된 보육소가 327개소에 이르렀다. 또한 70년까지 150개 무인가 시설도 존재했는데, 연락회는 이러한 비영리를 담보한 무인가 시설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처음 운동의 중점은 행정상 인가된 시설을 만들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사실 시정촌은 여전히 보육시설 설립에 소극적이었고, 기존의 무인가들은 인가받기에는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다.
그러다가 70년대 공보육에 관심을 가진 도쿄 지사와 오사카 부지사가 취임하면서 공공보육으로의 정책 변경이 활발해진다. 이러한 지자체의 실질적인 움직임과 주민들의 요구 및 집회가 이어지면서 70년대 들어 공공보육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1974년 1월에는 공인법인 보육운동센터가 설립되었다.
보육운동정보센터는 기존의 보육운동연락회 회원 등이 중심이 되어 보육운동의 공식적인 거점을 만들기 위한 법인체로 구성되었으며, 정부 지원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보육운동센터 내에 임의단체로 존재하는 보육운동연구소, 보육운동연락회(지역주민운동체) 등은 회원들의 자발적 운동체이며 회비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보육운동센터에서는 연수회 장소를 확보하여 각 지방별 모임과 회의 진행하고, 무인가를 인가시설로 만들기 위한 요구와 방법을 고민하였다.
실제 도내 150개 무인가를 인가화하고 개축 등을 통해 전환, 발전시켰다.
무인가시설은 보통 작은 장소에서 20명 내외의 아동을 보육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만 3세 이상이 되면 장소의 협소함으로 인해 보육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정원과 마당이 있는 인가시설 만들도록 촉구하는 활동을 해왔다.
새로 취임한 지사에게 압력을 넣어 연간 60곳 정도의 보육소를 증설하였다. 이렇듯 보육소 확대에 따라 보육노동자와 보호자가 많아지면서 아동 보육권과 부모 노동권에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게 되었다. 일례로 수이타시의 경우에는 ‘지사를 새로 뽑자’는 운동 등을 통해 지자체에 압력을 넣었다.
일본의 보육은 ‘정부와 자치체가 책임지고 아동 키워야한다’는 전후 헌법에 기초하여 아동복지법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다.
당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부모는 부모회를 설립하면서, 노동자와 부모가 연대하여 보육운동을 전개해왔다.
운동의 내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보육 내용이 아동 성장에 적합지 못하다거나, 환경상 시설 기준 미흡, 급식 빈약, 놀이방과 수영장 부재, 피아노 부재, 보육시간이 부모노동시간에 못 미침 등에 대해 지자체에 요구해왔다.
70년대 말부터는 공립보육소 설립이 본격화되고 인가시설 만들기 운동도 활발해졌다. 기존 무인가로 있던 연락회 소속 보육소들도 운동단위들끼리 재정을 마련하여 땅을 사고 시설 정비하여 인가화시켰다.
(* 원래 운동단위에서는 초기 질 좋은 무인가 시설을 비영리적으로 운영하면서 정부에게 보육 운영의 표본을 보이려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나, 정부가 ‘무인가니까 그렇게 운영이 가능한거 아니냐?’며 공립보육소에 적용하지 않고 외면해버렸다. 따라서 운동단위에서 무인가가 아닌 아예 인가를 받고 직접 실천함으로써 바람직한 보육 운영 표본도 보이고 공립보육소로의 기준 확대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인가화 운동을 벌였다.
또한 초기 사립인가보육소는 자선사업의 차원이어서 보호자의 운영 참가라는 민주적 구조 조성이 어려웠는데, 이에 대한 해소 역시 기존 운동단위의 보육소를 인가화함으로써 운동의 확장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각각의 시정촌에 1개 이상의 인가시설화를 추진하고 실질적 성과를 얻어냈었다. 실제 역량 상 많이는 하지 못하였지만, 모델이 될 수 있도록 거점 포인트가 될 시설이 설립되었다.)
1980년까지 보육소는 꾸준히 증가하고 시설 조건도 좋아졌다. 그로 인해 아이를 더 낳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보육사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일을 끝나고 센터에 모여 보육내용, 아동 발달, 실천내용, 부모와의 관계 등에 관한 교육과 모임을 시행하였다.
80년대 이후부터는 제도적으로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UN이 1979년을 ‘국제 아동의 해’로 지정하면서 실제 아동 권리 보장 시대가 열렸으나 일본에선 정치가 오히려 후퇴하고 무인가 시설에선 연간 50명의 아동이 죽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엔 보육소를 설립하지 말자는 여론이 형성되고, 정부는 보육, 의료 등에 재정 투입 중단하려 하였다.
그러면서 작은 무인가 시설 다시 생겨나고 기업들의 영리사업화가 진행되면서, 무조건 싸게만 운영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편, 당시 오사카부 내 공무원노조 내 보육소지부 지도자였던 하야세씨는 오사카부 내 공립보육소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1984년 보육소 필요 여부에 대한 주민생활실태조사를 실시하였다. 당시 정부는 영영아의 보육소 보육을 부모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반론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0세아가 태어난 집을 직접 방문하여 보육소 필요여부를 물어보았다. 예를 들어 수이타시의 경우 1년 5,000여명의 아이 태어나는데, 1000팀(국립보육소노동자와 민간보육소노동자 500명 + 부모 포함 보호자 500명 = 1,000명)의 조사단을 조직하여 5 집씩 방문하였다.
27,000여 세대를 조사한 결과 모두 ‘일하고 싶다, 아이를 맡기고 싶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후 오사카부내 100만명 서명운동 실시(당시 인구 860만명이었음)하였으며 실제 200만명의 서명을 받아 오사카부에 직접 전달하였다.
그리고 이때 이웃사귀기운동도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보육원 다니지 않는 아동이 보육원을 경험하도록 하는 운동이다. 현재 오사카부내의 보육원에는 ‘지역실’이라는 공간을 두고 0~2세아를 가진 보육원을 다니지 않는 보호자를 대상으로 보육원에서 연령별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하고, 보육원의 생일잔치를 지역사회로 열어 보육원을 다니지 않는 아동도 함께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들을 통해 정부는 노조, 보육소가 필요없다고 했으나 사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나가면서, 80년대 정부 탄압을 잘 헤쳐나갔다.
90년대 출산율이 급격히 저하되었는데, 보육소 건립이 필요하지 않다던 정부정책을 바꾸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5년 사이 1.57 ->1.20%로 저하되면서 정부는 보육소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의 설립은 부정하면서 시장원리에 맡기고자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2000년 주식회사가 보육시설 설립 가능하도록 하였다.
* 몇가지 간단 정리
1. 보육운동연락회에 대하여
- 1964년 창립, 1965년 뉴스레터 발행 시작
- 비영리단체이며 정부 지원받지 않음. 회비가 중심 재정.
- 연락회는 보육에 관심있는 개인이나 단체, 즉 보호자, 보육사, 경영자, 노동자, 보육원 보호자회, 노동조합 등 누구든 가입이 가능.
- 현재 단체회원은 250군데, 총 구성원은 약 35,000여명(연락회의 영향 하에 있는 사람들)
- 중앙은 도쿄에 있으며, 월간 [찌이사이나카마] 발간하고 있다.
- 오사카부내 30군데. 전국조직으로 되어 있음
- 법인 센터 안에 연락회 등 임의 조직 존재.
- 보육원 오사카부내 4,500여명, 전국 20,000여명.
‘누구라도 안심해서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도록 하자’가 연락회 정신이자 구호가 됨.
일하는 조건과 보육조건 만들기 위한 운동. 모든 사람들의 의견 전달될 수 있도록 인가화 -> 전파, 확장됨.
2. 오사카 보육운동연락회
- 현재 오사카부 내 취학 전 50만명 있음. 이중 보육수요 35%. 수용율은 25%. 13만명이 보육원 다님. -> 10% 정도 시설 부족 상태
- 제도적으로 의무보육수준으로 내용이 충실한 편이며, 보육책임은 시정촌이 가진다.
보육이 필요한 아이에 대해 시정촌에서 책임을 가지는 구속력 강한 법률이 존재한다. 그러나 법률 제도 그대로 운용되지 못하는 면도 있다.
- 최근 고민과제 : 여당에서 유치원 의무화가 논의되고 있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 중.
- 연락회에서 향후 공식적 사업 추진을 위해 보육운동센터를 법인으로 설립하였다.
현재 모두 활동가는 보육운동센터의 상담원 직원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 각각의 임의단체 소속되어 있음. - 보육운동연구소 3명, 보육소 중심 주민운동(보육운동연락회) 4명, 학동보육연락회(방과후 보육을 의미) 4명.
3. 오사카 보육운동의 특징
- 부모가 보육의 주체자로 확실히 자리매김
- 보육노동자의 전문성과 연대하여 제도 개선, 보육내용이 풍부
- 모든 시민에게 영향 가도록 공적 제도로 만들어 나가게끔 제도적 변화 꾀함
- 정치의 힘이 크므로 정치권에 발언하는 정책 활동을 벌이고 있으나 정치권이나 지자체의 반대가 심하다.
- 우리만의 보육소라도 만든다는 운동적 마인드가 많음
-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운동을 하기 위해, 우리들만 좋다는 폐쇄적인 운동이 되지 않도록 실천 위주의 운동을 하기 위해 노력중
- 스스로 만든 내용을 출판, 배급하는데 신경쓰고 있음
4. 최근 오사카 보육운동연락회의 고민
- 공립 보육원의 민영화.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공립 보육원의 민영화 바람이 불고 있다. 현재 80개소가 민영화되었으며, 향후 오사카 내 100개소가 더 민영화될 예정.
- 시장원리 도입
주식회사의 민영 운영 또는 공립보육소 운영이 가능하도록 규제가 점차 완화되고 있다. 이를 통해 보육 내 시장원리가 도입되고 있으므로 공적 책임을 준수하도록 요구를 하고 있다. 이러한 민영화는 보육노동자의 임금체계에도 큰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 보호자의 노동실태 가혹
: 비정규 증가, 저임금, 권리보장이 안되는 ‘프리타(free time)’가 급증하고 있다.
: 경영자 입장에선 재정 절약 차원의 정책이지만 실제 아동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경제적, 정신적으로 어려워진 노동자 문제가 아동 학대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감성적인 아이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 환경과 보육소 환경 정비, 무엇보다 부모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 보육원 아이들뿐 아니라 집에서의 아이들도 보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 대한 실행과 고민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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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eeya님의 [보육운동연락회 활동을 통해 본 일본 보육의 흐름] 에 관련된 글. 연락회에서 준 몇가지 활동 사진들임다. 호빵맨과 더불어 하는 퍼포먼스를 가미한 긴급집회.
Tracked from 2006/11/02 12:50 삭제
jineeya님의 [보육운동연락회 활동을 통해 본 일본 보육의 흐름] 에 관련된 글. 23일과 25일저녁 때 두차례 방문했었는데요. 역시 40년 넘는 조직이라 그런지 온갖 자료로 넘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