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6/07/10 22:51

노동넷의 인동준동지가 정보운동포럼 + @의 건으로 찾아왔었는데,
얘기하다보니 불현듯 노조에 오자마자 깨달은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진보넷 활동가였을 때, 나에게 노동조합 사람들은 서비스 수요자였다.
제공자 입장에서 노동조합 사람들은 '대중에게 무엇을 제공할까? 유도할까?'의 대상 중 하나로 포함된다.
노조 홈피 담당자가 와서 이런 저런 부탁(을 가장한 요구)을 하면 '어떻게 만족시킬까?'의 수준으로 진화(내지는 퇴보)하게 된다.


내용상으로는 다를 수 있긴 하지만 노조 홈피 담당자들의 경우 대체로 '어떻게 하면 조합원들이 홈피에 들어오고 활발히 참여할 수 있을까?'하는 유인책에 관심이 쏠려있었다.
결국 노조 홈피 담당자에게도 조합원들은 서비스 수요자라고나 할까?


 



수요자? 어림없더라. 차라리 행동을 시켜라!

 

그런데 그 '수요자'라는 거, 이거 엄청 힘든거다.

 

무언가를 소비하려면 그것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내지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보통신에 대한 어떠한 이해나 노력도 원치 않는,

내지는 이 사회가 강요하는 수준에 맞추기 위한 억지의 노력 정도가 전부인 대부분의 조합원에겐

차라리 그들의 원래 목적과 목표를 상기시키는 것이 훨씬 유효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세상 살맛나게 살기 위해 노조에 가입한 거고, 그 수준에서 투쟁하거나 미조직 조직화하거나 등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물론 이런 사람도 많은 건 아닙니다만...)


그러니 괜히 관심도 없는 수요자 자리 앉혀주는 것보다 투쟁이나 조직화에 맞춘 온라인 기획을 던져주는 게 훨 유효하다.

 

진짜로

"조합원마당에 알콩달콩 글 써보삼~!"하는 것보다
그냥 "온라인 집회할테니 모여봐라!"가 더 쉽다.

심지어 이런 거 몇판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온라인에 대한 관심이 좀 붙기도 한다. 아님 말고...

 

노조 홈피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나가라.

 

대부분 정규직 노조 간부들이 널부러진 조합원들 때문에 고민 또 고민하더라.
어느새 고객도 아닌 것들이 뭐든 챙기고 또 챙겨줘야 하는 존재가 되어있다.

챙기고 있는 사람 입장에선 열받는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냐? 금송아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 잡것들을 그냥~!'

 

그래도 말이지.

나같이 비정규직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은 노조에 있다보면,

아직 노조는 비밀결사체까지는 아닐 지 몰라도 결사체 정도는 될 필요가 있다.
노조 전체로 봐도 그렇지.

전체 노동자의 50% 정도 노조에 가입되어 있다면야 좀 널부러진 것 정도 봐줄 수 있겠는데, 솔직히 10% 안팎으로 모인 주제에 벌써 풀어지면 좀 곤란하잖아?

 

게다가 눈 씯고 둘러볼라치면,
이제 미조직된 조직 대상의 상당 부분은 비정규노동자들이다.
그들에게 노동조합 가입은 정규직의 총파업 동참과 같은 거다.
파리목숨 주제에 노조 가입하면 다음날 바로 해고되는 수가 있다.

설상가상, 비정규노동자는 대체로 장시간 노동에 허덕거린다.

이런 저런 거 다 따지면 '어떻게 조직화해야 하나' 난감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우리가 조직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헉...T.T

이 와중에 조합원들이 뻗어 있으면 곤란하다.

임원과 간부 뽑아놓고 조합원들이 손놓으면 될 일이 하나도 없다. 널부러진 거 추스리고 뭐든 행동해야 한다.

조합원에게 '투쟁의 주체'로 세우지 못하는 지도부를 욕하게 할 것이 아니라(물론 이것도 좀 하고)

더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라고 닥달하면서 자잘하게라도 뭔가 시켜야 한다. 온라인, 좋잖아?ㅋㅋ

 

처음 보육노조 홈피 오픈과 메일링리스트 숱하게 뿌렸더니 조회수가 꽤 좋았다.

'내가 잘 만든게쥐..ㅋㅋㅋ'하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대부분 사용자들이 오고 간 거다.

그러면 그렇지.

장시간 노동에 허덕거리고 있는 주제에 조합원도 잘 안오는 홈피에 미조직 보육노동자들이 그렇게 자주 올 리가 없지.

비단 보육노동자 뿐이겠어?

다른 비정규노동자들도 행여나 노조 홈피까지 찾아오겠다.

차라리 몇시간 틈나면 검색엔진에서 놀거나 게임사이트 전전긍긍하다가 뻗어자겠지.

직종 관련된 사이트야 구인구직란 붙어있는 한두개 사이트 지정해서 들어갈테고...

 

그래서 처음 노조 출범하면서 온라인 홍보단이 만들어졌다.

기왕이면 간부 말고 평조합원으로...

보육, 유아교육쪽에선 꽤 유명하다는 사이트나 보육정보센터 사이트를 돌아다니거나, 대형 포털에 블로그 만들면서 초특급 펌순이, 펌돌이가 되도록.

한 두명 건졌다. 하긴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 인간들에게 뭘 바라겠어?

어찌나 시간들 없는지. 오히려 후원자중에 원장인 사람들 몇사람이 가장 성실한 펌질녀들^^;;

 

그래도 확실히 도움이 된다.

펌질만 좀 해도

노조를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해당 사이트에서 노동권 얘기하기도 훨씬 부드러워진다.

(원래 동네 천사 분위기 땜시 보이지 않는 언어 통제가 심하거든)

 

심지어 온라인 가입도 좀 한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노조에 대해서 모른다. 직업군이 다양해져서 그런가? 자기 직업에 노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꽤 된다. 산별되어도 한참 설명해야 할 거다.

결국 이미 조직된 조합원들이 뛰쳐나가서 엮어와야 한다.

노조 홈피까지 들어올 열성 노동자였으면 이미 노조 가입 10번도 더 했다.

미조직 노동자가 있는 곳으로 조합원이 가야한다. 그건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투쟁하냐? 정보통신해라!

 

희한한 건 조합원의 지역별 IT 사용현황과 노조의 지역별 온라인 활동이 별 상관없다는 점이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제법 인터넷을 사용하고 온라인 조합 가입도 꽤 될 만큼 '뚫으면 열릴만한 온라인홍보 핵심지역'이지만, 그렇다고 서울지부가 유난히 온라인 활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보육노조 홍보하는 시간, 하루 5분.

 

그거면 충분하지만 자기 싸이 가꾸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관심 떨어지는 일이다.^^;;

오히려 오프 활동과 상관관계가 더 높다. 한마디로 오프에서 사업이나 투쟁 잘 하는 곳은 온라인에서도 성실하다.


2004년도에 보육노조 준비위에 들어왔을 때, 보육노조 조합원들의 정보통신 역량은 그야말로 상상불허였다. 디지털 세계에서 아날로그 세계로 return!한 느낌.
2006년이 된 지금도 조합원 중에는 메일 보낼 때 전달(forwarding) 기능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선전물 만들 때도 뭐든 "어렵다"는 바람에 매년 선전 관련 기조는 '쉽게!'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날 문득 중앙의 '선전물 어렵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조합원이 만든 선전물을 보면서 깨달았다.

나도 잘 안쓰는 우리 노조 최고의 만연체, 한문식 표현의 대가, 위원장의 글을 잔뜩 섞어놓은 걸 보면서, '이건 마음가짐 문제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노조 동네는 희한하게 아무리 어려운 문구 나와도 '임단협 요구안이다.', '지침이다', '위원장 가라사대'라고 붙이면 다들 읽는다.


온라인 집회 지침 내리면서 인천지부 참가자 명단을 물어보려고 문자 보냈더니 다들 '어려워서', '글을 못써서' 동참 못하겠다고 답문자가 왔다.

매우매우 걱정하면서 썰렁해질 온라인 집회를 걱정했지만

생각외로 하룻밤에 500개 게시물이 각자 서로 다른 제목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할 줄 알면서 엄살 떨었던 건 아닌 것 같다.

느낌이 한 5분 정도 헤맸더니 '아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하고 깨달은 것 같다.

집회하는 동안 '사회'를 본 이 바쁜 나에게 5번이나 문자를 보내 이것저것 물어본 조합원도 있었다.

'너무 빨리 지나가서 글을 못 읽겠어요.', '제목에 쓴 글을 본문에 똑같이 써도 되네요?'

 

온라인 집회 한판 했더니 예상치도 못하게 조합원마당이 왁자지껄해졌다.

늦게 접속했다가 끝나는 바람에 낭패봤다며 반성문 써놓은 조합원,

오랜만에 질러서 기분 좋았다는 조합원,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조합원,

이 기운으로 토론회와 문화제도 성공적으로 해보자는 조합원 등...

왠지 억지로 집회 한번 끌려왔다가 꽤 괜찮은 집회 만나 동네 이슈에 관심갖게 된 형상?

왠만해선 오프활동이 힘든 장시간 노동자에겐

정보통신에 대한 관심을 떠나 노조 활동에 동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나보다.

 

조합원들에게 IT 기술이니 트렌드니 익히라는 건

완전 개인적 취향 선택과 같은 걸

이 자본주의 사회와 같이 '익혀야 해! 그래야 살아남아! 이 동네에서도 살아남으려면 IT해!'라고 옥죄는 거 아닐까?

 

노조 내에서, 또는 사회단체들에서

조직이나 교선, 정책과 마찬가지로 정보통신에 대해서도 길 좀 틔워줄 등대지기만 있다면

조합원들에게 수요자가 아닌 그저 투쟁처럼 정보통신하게 만드는 것이

노조의 정보통신 전술이 되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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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0 22:51 2006/07/10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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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노조를 대하는 정보통신활동가의 자세

    Tracked from 2006/07/12 01:51  삭제

    jineeya님의 [정보통신을 대하는 노조조합원들의 자세] 에 관련된 글.

  1. 새벽길 2006/07/11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 깨달음을 주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2. jineeya 2006/07/12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벽길/헉. 깨달음까지... 읽어주셔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