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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크리스챤의 영적인 치유와 심리적인 치유를 접목한 독특한 형태의 치유로,
크리스챤이 가지기 쉬운 영적인 함정이나,
정신적인 슬럼프에서 벗어나,
진정한 영적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내적치유는 영적인 치유에 중점을 두는 경향과
심리적인 치유에 주안을 두는 경우와
크리스챤의 자기 아이텐티티의 회복을 통해,
자아치유를 하는 경향으로 나뉜다.

영적인 치유에는 성령의 전적인 의존에 의한 인간영성의 치유로,
영적인 영향(악한 영이나,
왜곡된 인간 자신의 영적인 혼란 상태)으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하는데 있다.

심리적인 치유는 감정치유나,
기억치유를 통한 인간성안에 있는 억압된 모순이나 불합리를 제거하여
정신적인 건강을 얻는 것을 목표하는 치유이다.

자아치유는 참자아와 거짓자아사에서 갈등하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회복의 치유를 통해,
자신의 왜곡된 자아가 거듭나며,
새로와 진 자아상으로 태어나,
영적인 건강과 성장차원의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데 목표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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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가운데에 자라는 믿음

데살로니가후서 1:3-12

3.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 대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점점 크게 자라고
여러분이 서로를 극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이 온갖 박해와 고난을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일을 하나님이 여러 교회에서 자랑합니다.
5.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옳다는 증거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에 알맞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여러분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6.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므로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으로 갚아
주시고
7. 고난을 겪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평안히 쉬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그의 능력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8.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우리 주 예수님께 대한
기쁜 소식을 순종치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실 것입니다.
9. 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고 주님앞에서 쫓겨나 그의 능력있는 영광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10. 그날에 주님이 오셔서 모든 성도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것이며
여러분도 우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므로 그 성도들 가운데 포함될
것입니다.
1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적합한 사람으로 여기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한 목적과 믿음의 일을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2. 그것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것을 통해 크리스챤들 자신의 믿음을 자라게 한다.
고로 그들은 고통받는 현실에 대해 낙심하지 말고,
그 고난을 감수하며, 보다 나은 자신의 내일을 만들어 가게 할 것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은 고난스럽고 힘든 일 다음에는 반드시 좋은 일,
달콤한 유익하고 축복된 일들이 다가온다는 의미이다.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한 도전과 어려운 과업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기 세움이나 성장에 있어 다른 이들보다
더 강한 자기정체감을 갖고 있으며,
다가오는 미래의 어떤 일에도 용감히 대처해 갈수 있다.

고난당하는 과정을 통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은 성장한다.
그리고 그 믿음을 소유한 영혼들을 돕는 일은
그들의 믿음을 키우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그 영혼사역에 있어서, 사역자가 교우들을 위해
항상 그들의 영혼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앞에서 살것은
그의 사역을 통해 귀한영혼들의 추수와 열매맺음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다.
사역자의 영혼사역에 대한 자세는 사역의 질을 만들어 간다.
사역자의 열정과 정성을 통한 사역을 통해 사람의 심령에 접근하여,
그들의 영혼을 돕는 일들을 수행할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역에 대해서도
자신의 영혼에 대한 태도(진지함, 열정혹은 영혼의 가치에 대해 깨어있음의 의식)에 따라
그의 영혼이 살든지 죽든지 혹은 병들든지,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사역에 임하는 사역자의 자세는
이렇듯 사역을 통해 자신이나 타인에게 중대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영혼을 위한 사역은 영혼들의 믿음을 통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 믿음은 어디서 오며,
그것은 어떻게 자라는가?
그 믿음은 영혼에 양식이 되며,
영혼을 가진 사람과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이해와 신뢰심을 심는 말씀을 통해 오게 된다.

그 믿음이 자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믿음이 자라도록 하려면,
그 믿음의 생명력을 유지함이 필요할 것이다.
믿음의 생명력은 믿음의 적응력과 창조력이 함께 어울러져,
그 믿음이 깊이 사람들 속에 뿌리를 내려,
그들의 생활에서 영향력을 나타내게 될때에 그들의 믿음은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 믿음을 갖기 위해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믿음의 역사에 순응하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따라 경험하는 자기헌신이나 희생적인 수고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성장을 위한 노력은
지속적인 영적생활:자신의 영혼을 키우고 먹이는 것:
말씀의 섭취와 영혼의 호흡(기도)과 영혼의 운동(믿음의 자기증거)등을 추구하는 것일 것이다.

영혼을 맡은 사역자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 해야 할일은 무엇인가?
즉 그는 그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의 수고와 영혼을 움직이고 감동케 하는 사랑의 헌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력을 줄수 있는
열정적인 가르침의 노력등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의 영혼을 돕는 신앙에는 여러종류나, 여러 스타일의 신앙이 있지만,
가장 생명력이 있으며,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는
고난과 박해가운데에서 지켜가는 순교적인 신앙일 것이다.
지금도, 세계 여러나라에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며,
기독교신앙을 가지는 것을 법으로 금하는 나라들이 있다.
그런 어려운 조건하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의 믿음은
생명이상의 고귀한 신앙의 숨결이 있다.
신앙은 고난가운데에 고귀한 가치를 드러낸다.

고난을 참고 견딘 믿음은 고난을 통한 시련을 겪은
마음의 단련으로 금보다 더 귀한 정결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믿음을 지키려고 할때에 어려움이 오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
하나님앞에서 영적으로 훈련을 받는 길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
고난은 신앙을 세련되게 하며, 강화시키며, 성장하게 하며,
자신의 안목의 차원이나 깊이를 넓혀준다.

예수 이름때문에 받는 고난은 자랑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현재의 자신의 영성을 높이며, 자신의 신앙의 정체감을 강화시켜,
신앙의 가치와 효력를 높여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고난의 흔적이 주님앞에서 자신의 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은 것은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한 위함이며,
자신을 단련하는 시련과 훈련의 기회로 여기게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기에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받을 엄정한 심판의 원인을 제공하게 한다.
그러나 고난을 감당하는
주의 자녀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게하는 영광의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의 믿음을 강화케하는 고난의 과정과
자신의 성품을 단련하는 시련을 겪는 통과를 거치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훈련된 사람들,특히 고난을 통해 이들이 들어가게 된다.
그들이 받은 고귀한 사명과 영광된 미래의 기업을 위해
현재의 당하는 어려움과 고난은 그들을 더욱 귀한 존재로 세우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귀하고 좋은 것들을 받기게 부족함이 없는 자들로 만들어 준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들에게 공평하게 대하신다.
그는 현재일이나 장래일의 이루어 질 일 가운데에 사람들을 택하며,
혹은 분별하여, 사람들이 행한 대로 공정하게 심판을 행하시며, 상급을 내려주신다.
그의 자녀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을 끼친 자들을 결코 가만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상응하는 형벌과 고통으로 댓가를 치루게 하신다.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언제나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것을 이길 힘을 주시며, 그것을 극복할 만한 힘이나 노하우의 지혜를 주신다.
그후에 또한 고난 뒤에 얻는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평안과
장차 들어갈 고난을 겪는 이들이 얻을 영광에 이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은총을 입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신 주로,
그는 갖은 수모와 고난을 당하시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희생당하시므로,
고난당하는 자의 모델이 되셨다.
그는 고난 당하는 모든 이들을 이해하며,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과 그들을 이끌어 내시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며,
결국에는 그들을 영광의 자리로 올리실 것이다.
그 주님은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상급을 주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에는 영광의 주로 임하시며,
그를 호위하는 많은 권능있는 천사들이 함께 할 것이다.

주 예수의 재림의 날은 모든 일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때인고로,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게 되며,
하나님앞에서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그를 준비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고 산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으며,
주 예수의 전파되어진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의 메시지를 거부한 인생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근거가 없어,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시간은 영원에 속하게 되며,
인간의 모든 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나, 모든 것의 시시비비를 가려,
심판의 저울이 모든 인생에 적용이 된다.

모든 피조물이 다 창조주에게 나왔으나,
그들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을 거부한 인생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고통의 벌을 받아,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은총을 받는 것에서 박탈당하여,
영원한 감옥의 형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를 인정하고 그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찬란한 영광의 자리에 초청을 받으며,
그가 준비하신 모든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

주님의 날이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며,
주님과 성도들이 함께 하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때에 주님은 그의 택함입은 성도들로 부터 영광을 받으시며,
세상에서 올곧은 신앙을 지켜온 그의 백성들의 찬양을 받으신다.
그 주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무리가 되어
거룩하신 주님에게 붙어있는 사람들로 그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여,
그들의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될 것이다.

현재 그의 성도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그 말씀의 증거를 믿어,
그 말씀과 함께 삶의 운명을 함께 하는 그들이 아닌가?

성도들을 택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이
그들을 온전한 그의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
주님은 마련하신 은혜와 은사의 부르심을 통하여 이루어 가신다.
그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할수 없는
성도들의 영적생활[의인의 상태유지:
날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의 공로(주님의 의의 전가)에 힘입어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의의 인정을 받는다.
성화의 삶: 그의 거룩하신 영의 도움을 힘입어
날마다 거룩함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이루어 가는 은혜를 입는다 ]을 가능하게 한다.

더 나아가 그분이 그들에게 주시는 능력과 영향력의 은사들은
그분의 영광의 나타내심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자유롭게 공급이 되어진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사역을 온전하게 하며,
또한 사역의 열매를 맺게 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들로 쓰여진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성도들의 온전함과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지향의 삶을 가능하게 하며,
그리고 성도들 자신이나 사역자들의 기도의 협력으로 인하여
언제나 그분의 의도를 따라 살아갈수 있게하는 능력을 힘입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약속과 축복이 보장된 것으로
주님의 자녀들이 기도의 응답이나 효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그들의 사역에 만족할 만한 성취와 업적을 이룬다.
그래서 그 기도는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난가운데에 자라는 믿음도
그 고난을 이기려는 강한 의지와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과
그분의 능력을 간구하는 가운데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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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자라는 아이처럼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에 대한 묵상

칭의(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통해
죄인들을 의인으로 여기는 진리의 도)의 의미를 깨달은 날이
자신에게 영적인 생일날이라면,
성화의 과정을 터득하는 시기는 마치 첫 돌맞은 아이가
혈기왕성한 성장을 보여주어
이제 부모님들앞에서 열심히 자라가,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듯,
하나님앞에서 주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변화혹은
개선이나 완성의 사명을 향해,
한걸음씩 그의 발자취를 흠모하며,
그분의 분량까지 나가는 도전적인 거룩한 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성화의 길 그 끝에는 그분과 함께 누릴 영광스러운 미래가 놓여있다.
거룩한 무리들이 도달하여 들어갈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며,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화는 자신속에 배태되어 있는 생명의 씨인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자신의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 할수 있다.

요즘 나는 기도하는 시간을 갖으면서,
자신의 변화되어가는 성화의 과정이야말로
자신의 임무중에 가장 중요한 업무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인생의 어떤 이루어 야 할 업적이나 맡은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자신을 만들어가는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앞에서 평생 자신이 이루어 가야 하는 숭고한 자기 사명이다.

하늘의 생명(주님이 주신 영생)으로 부터 거듭난 자신은 하나님께 구별된 자로,
날마다 죄로부터 벗어나는 회개의 과정을 지내며,
마음을 새롭게하는 말씀의 새창조의 역사에 따라 가는 것이리라.

성화는 초월적인 주님의 사역이다.
사람 자신안에 새사람들을 만들어가는 재창조의 사역이다.
구원된 자신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성품을 이루어 간다.

마음안에 아직도 나는 변화되어야 하는 많은 불순물이 있다.
질투, 시기, 미움, 분노, 걱정등,
바람잘낫없는 세월의 풍상에서 자신의 찟겨지고 상한 모습을 돌아보면,
아직도 하는 생각이 든다.
덜 되어있는 자신의 상태는 생의 과정을 사는 동안은
계속해서 자기변화를 일구어야 할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갱신하며 재창조하는 주님의 영적세계안에서
자신의 영적인 변화를 통한 신의 고상한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날마다 새로와지는 자신이 되기를 소망한다.

성화를 이루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도덕적이고 형식적인 종교행위와 미신적인 요소들에 휩싸여있으며,
그리고 왜곡된 인간적인 신앙인의 모습들이다.
종교인들의 비신앙적인 모습속에서
기독교의 신앙인에 대한 자기회의와 그들의 영적인 퇴보를 극복케하는
새롭게 도전되는 성화의 길을 가련다.

자신의 거룩한 변화의 과정의 사명의 길에서
생명없는 형식적인 종교의 너울들을 벗고,
영성의 알맹이 있는 생명있는 신앙인으로 새롭게 자라갈 것을 생각해본다.

신앙인의 비신앙적인 요소(강신술, 영육분리사상, 변질된 예언및
저급한 영성화에 의한 영매숭배주의,
점괘와 기복만능의 비역사성등)들가운데에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신앙의 변질되고 왜곡된 모습에서
신앙의 맹점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인간적인 종교관(공적주의, 업적주의, 형식주의등)에서
영적인 불순물들을 극복하고
자신의 건강한 영성화를 추구하여
자기사명의 성화를 이루는 일을 위해
이런 장애되는 요소들을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속에 말씀으로의 구체화의 성취를 이루려고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깊이 생각, 또 생각하는, 그리고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는)하여,
그 말씀의 능력과 영향력안에 거하기를 힘쓴다.
자신에게 새겨진 그 말씀이 내게 가까와
그 주어진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말씀과 더불어 주시는 거룩함의 은혜를 통해
성스럽게 변화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성품을 본받으려고, 주님을 묵상하는 중에
그의 흘리신 보혈이 자신의 죄를 깨끗케 하며,
그리고 모든 부정과 불의에서 자신을 구원해주는
죄의 고백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성결의 은총을 받아,
정화된 영성화에 이르려고 한다.

내안에 오신 성령은 날마다 탄식하듯
내영혼이 거룩함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꺼지지 않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계속해서 내안에서 타오르는 불꽃같은 성령을 통한
거룩함의 과정은 그의 내주와 인도와 충만으로
자신의 점점 그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감을 맛볼수 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은 날마다 주님을 배우며,
주님과 사귀며,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자신이
되어감을 바라며 영적인 땀을 흘리기를 힘쓴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접하는 영적세계의 은혜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자신의 영적인 센스의식이나,
영적인 민감한 기질이 그분의 뜻안에서
그의 인도를 받아 그의 길을 좇아 가기를 힘쓴다.
내 뜻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기도의 노력은
어린아이같은 생각이나 바램에서
점차로 자신의 바램이나 생각이 점점 변화되어,
자신의 뜻이 주님에게 맞추어가는 성장하는 장성인로 변해간다.

무수히 변개되는 자신의 기도제목과
고쳐지는 기도의 바램들이 어느 덧 주님의 뜻을 품는 자로 변화되어
자신의 영성을 강화하며,
자신안에 자라는 그의 거룩함의 성품을 이루어 간다.

귀중한 기도의 파트너나 혹은 영적인 동지들을 만나,
그들의 영성이나 감화력을 배우며,
그들의 삶의 향취를 맡아본다.

그리고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영성의 삶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 고전의 저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영성과 신앙을 배운다.

예를 들어, 존 번연의 주님의 사랑의 깨달음의 깊이를 보며,
영적인 순례의 길을 발견하고,
존 뉴톤의 주님의 은혜의 폭넓은 영역을 밟아보며
그들의 신앙의 깊이를 맛보고,
리차드 박스터의 영적인 영혼의식의 탁월함에
자신의 영성의 질을 높이는 계기로 삼는다.

이렇듯 먼저 이 세상에 살아간 믿음의 많은 선진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들이 쌓은 영적인 상아탑을 바라보며,
그들이 보여준 신앙의 아름다운 흔적을 좇아
그들과 닮은 꼴로 살려는 의지가운데에
성화하는 믿음의 순결함으로의 승화는 계속 전진되리라.

자신의 거룩한 성품의 개발은 자기의 상한 조각난 모난 성품이라도,
그안에서 주님의 거룩케하심을 바라보며,
그분의 은혜의 역사안에 있는 평생을 통해
자신의 못난 것이라도 귀한 조각품으로 빚어 가시는 창조주의 솜씨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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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인으로 살아가기

칭의에 대한 묵상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안에서 살기로 다짐하는 성도들에게 칭의는
하나님의 자유롭게 베푸시는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믿은 자신에게 주신 그 선물은 내가 예수안에 있을 때에 시작이 되었다.
고로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죄의 용서를 받은 의인이 된 죄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은 본성으로 죄를 짓지만,
그의 공로의 은혜로 죄가 용서받으며,
그 용서안에 주시는 의인의 칭호의 특혜를 받으며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그 공로를 믿고 따르는 죄인들을 의인으로 여기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죄인이 자신이 비록 본성은 타락한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로 의롭게 여기심을 받는 은총을 힘입어,
의인의 반열에 세움을 입었다.

이제는 자신은 의인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하나님의 어엿삐 보시는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자아를 온전한 사람이라 여긴다.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 태어난 의인이다.
그리스도의 의의 빛을 받은 죄인은
그와 같이 의인으로 빛된 삶을 살아간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로 재판정에서 쓰는 것으로
법을 어긴 죄인들을 사면하여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법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사형받은 죄인으로 형벌을 받으셨다.
고로 나는 형벌받는 죄인의 신분에서 형벌을 면한 사면받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죄인으로 형벌을 받으시므로
하나님은 그의 공로를 통해 죄인들을 용서하여,
의인으로 여기는 복을 예수믿은 내가 받은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그의 죄성이 그대로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게 여기는 행위로 아무리 악한자라도,
그가 예수안에 믿음을 견지하면,
혹은 그의 믿음은 연약할 지라도
믿음의 근거를 통해 죄인들을 하나님은 의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의 효력의 근거는 그분의 칭의의 선언의 약속위에 있다.
그 약속은 자신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 약속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의 선언과 그 칭의의 행위는
절대자 하나님의 법을 통해 이루어 지기 때문에,
한번 의롭게 여김을 받은 죄인들을
결코 그의 의롭게 여겨주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움을 여김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들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의로움을 심어,
그의 의로움안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분의 성품안에 있는 그분의 거룩하심안에서
사랑, 기쁨, 평안, 인내, 친절, 선, 신실함,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어 간다.

하나님의 의롭게 여기심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달로 죄인들에게 베푼 것으로
하나님의 의의 수준에 도달하게 한다.

칭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에 있으며,
또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들을 영광을 주기 위함이다.
칭의는 받은 자들에게 그들의 양심안에 의의 평안을 맛보며,
성화를 이루어가는 근거가 된다.

자신안에 있는 자아의 불안과 상태의 부조화와
신분에 대한 불합리의 모순의 세계는 사라지고,
그분안에 있는 평안과 상태의 조화와
자기 신분에 대한 확신의 세계안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신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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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어

요한 1:14
14 말씀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에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말씀이 구체적으로 인간들의 내면이나 삶에 영향을 주며,
그 말씀안에서 사람들이 자기변화와 개선과 완성을 이루어간다.

만물의 중심인 그 말씀은 우주창조의 원리이며 또한 우주보존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를 통하여 모든 만물이 조성이 되었으며,
그의 통치의 영역안에 모든 만물이 놓여 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영역에로 그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

인생이 알아야 할 사실은 말씀의 존재의 선재성이나,
우주의 중심성이나, 만물의 목적성등에 대해 연구를 하므로,
그 말씀의 근본적인 위치와 영향력등 일것이다.

말씀을 알고 말씀을 받아들인 인생들은
자신속에 있는 소우주에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질서와 조화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창조의 순서의 원리는 먼저 혼돈과 무질서가 있는 가운데에서,
채움과 질서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세계의 원리가 이루어 진다.

말씀이신 주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라고 하셨다.
주의 말씀에 거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말씀안에 자신의 변화나,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안에서 자신의 인생의 집을 지어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은 철학이며, 논리이며, 신앙이며,
처세관을 이루는 인간의 근본을 새롭게 창조하는 역활을 한다.

말씀의 내면화를 통해 말씀이 사람속에 오셔서,
그의 인격성이 자신의 내면에 영향력을 주어,
말씀안에서 사람 자신의 새로운 성품이 조성이 되고,
옛사람의 타락한 성품이 변화되어,
새로운 성품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간다.
그것을 이루는 것은 사람들의 내면의 생각이나,
성향등에 영향을 주는 말씀의 영향력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은 자아와 생각과 성향등이 마음이라는 곳에 어우러져
인간의 소우주의 세계를 이루며,
그 내면의 조성에 따라 외부의 환경과 사람이 표현하는 행동이나 습관에 영향을 주며,
자신이 만들어내는 인생의 생활을 이루어 간다.

고로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우주인 내면의 세계를
생명이신 말씀으로 마음의 집을 잘 조성해 가야 할 것이다.
마음은 인간의 영혼을 담은 그릇이다.
그 마음안에는 사람의 심령이 임재하는 곳으로
거기에서 말씀이 인간의 심비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인
영생의 생명의 창조와 사람의 성품변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심어진 그의 말씀은 그의 인격의 영향력이며,
그의 존재의 임재의 표시이다.
그의 말씀이 어느 사람에게 심겨졌다는 것은
그 말씀의 영역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사람자신이 말씀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사람속에 이루어지는 말씀의 구체화는
말씀이신 그분의 임하심이 구체적인 육체를 입고,
우리가운데에 머물러 있듯이 자신의 내면이나 인생의 중심에
구체적인 자신의 집(장막)을 그 안에 짓듯이 머물러 계신다.
이스라엘의 광야의 생활에 주님은 이스라엘인들의
천막들 중심에 있는 장막(하나님의 성막)에 거하시며,
그 백성들과의 만남을 가지셨다.
그 만남의 장막에서 그들을 대면하여,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의 광야생활의 진행을 인도하셨다.
고로 말씀이 인생의 갈길에 구체적인 교훈과 삶의 이치와 원리를 담고 있다.

말씀이신 예수는 인생의 걸어가는 삶을 살아가셨다.
그는 하늘의 말씀으로 그가 이땅을 밟고 살므로써,
구체적인 인생의 모델의 자취를 남기셨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가 걸어가신 삶의 흔적들을 찾으며,
그안에서 진정한 인생의 교훈과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여,
그가 가신 그길의 뚜렷한 삶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 그의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것이다.

말씀을 모신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 말씀의 능력화가 이루어진다.
말씀은 그 자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갖고 있다.
세상은 그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선포되어지므로,
말씀의 창조력은 혼돈과 무질서한 우주에 창조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창조력을 가진 말씀안에는 사람들속에서
다시 죽은 심령들을 살려내는 생명력이 있다.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비쳐질때마다
생명력이 나타나 죽은 사람들을 살리며,
사람속에 있는 소우주의 모든 요소들을 질서있게 하며,
어둡고 죽어가는 상태들을 소생케하는 능력이 있어, 그 마음을 새롭게 한다.

그 말씀안에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있으며,
그영광은 만물의 주인으로서의 영광이며,
우주안에 있는 모든 인생들을 포함한 보이는 존재나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로부터 받는 영광이 있다.
그의 영광은 사람들에게 비쳐주는 영광이며,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생명의 창조의 영광이 있다.

그는(말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가 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을 이해하는 통로로 나타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말씀안에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모든 예언의 성취를 바라본다.

그 말씀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으로 존재한다.
그 말씀안에 하나님의 인간에게 베푸시는 모든 좋은 요소들과 혜택을 담고 있으며,
그가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각종의 지혜와 축복의 은총을 포함하고 있다.
그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그것을 깨달으며, 확인하며, 그것을 추구하여,
자신속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에게 은혜의 전달이 이루어진다.
말씀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충분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축복의 요소들을 갖고 있어
사람에게 부여하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에게 충분한 공급으로 은혜가 베풀어 진다.

그 말씀은 만물이 통하는 우주의 진리가 있으며,
진리안에는 인생의 마땅한 도리가 있으며,
방황하는 영혼들을 이끌어 주는 확실한 생명의 길이있다.

고로 진리는 하나님의 원리이다.
그 진리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게 이르며,
하나님안에 머물게 된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온전함과 완전함을 드러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 진리안에서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하나님의 정하신 때와 장소에 자신의 도달해야 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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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어떤 진행형의 삶인가?

로마서 1:16-17
16. 나는 이기쁜소식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유대인에게만 해당되었으나 이제는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어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17. 이 기쁜 소식에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쓰인 말씀과 같습니다.

기쁜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며,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만한 놀라운 뉴스라고 할수 있다.
바울은 이 기쁜소식에 대해 즉 자신이 전하는
그 복음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확실한 사실과
자기 경험에서 온 진리의 증거가 있다.

기쁨의 소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뉴스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병을 치료할수 있는 약이나 처방에 대한 뉴스는
그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소식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지식의 힘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

자기가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준 그 무엇이 그이의 삶을 받쳐주는 것이 아닌가?
각자는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준 그 무엇을 가지고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의 가르침혹은, 사상이나, 영향력등일 것이다.

자신에 대해, 자신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사람에게는 자신의 학문일수 가 있으며, 어느 경우에는 자신의 재능이나,
혹은 배운 기술일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자질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며,
자신이 세운 인생관은 자신의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준다.

자신의 자질은 자기가 배우고 터득한 좋은 경험들이나
개발된 재능으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실력인 것이다.
자신의 자질은 무엇을 할수 있는 자격이 될만한 능력이나
혹은 무엇을 이룰수 있는 자기의 기본적인 실력이다.
이 능력이나 실력은 사람의 자신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할수 있다.
사람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 타고난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는 자기훈련의 지속적인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인가?
두가지를 다 생각해볼수 있다.

먼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이 중요하다.
자기가 세운 뚜렷한 자기만의 삶의 철학은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버팀목 역활을 해준다.
후회없는 인생은 자신이 확신하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일 것이다.
자기가 확신하는 것을 좇아,
자신이 해야 할일을 하면서 살면 그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성품이나 인격에 있어서 자신에 대해 부끄럽지 않게 여기며,
자신이 하는일에 대해서도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살아가면
그의 삶을 통해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것들이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그것이 건강일수 있으며,
어느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성실함이 있을 수 있다.
어느 사람에게는 잘하는 한가지 기술이 있어,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보다 더 중요한 자신이 갖고 있는 놀라운 것은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바를 추구하며,
그 추구를 통해 자신의 삶을 투자하며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타락한 본성으로 인한 인간의 심적상태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것들 중에 죄책감과 수치심이 있다.
죄책감은 구체적인 죄나, 죄짓는 자신의 일면에 대한 것이라면,
인간이 가지는 수치심은 인간의 마음의 전체적인 상태를 표현한다.
그 수치심에는 건강한 수치심이 있는 가하면 해로운 수치심도 있다.
건강한 수치심은 좋은 마음의 기능을 가진 인간의 양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신이 그릇된 일을 할 때에나 자신속에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자신을 고쳐서 바른 일을 하려고 노력을 하게 한다.

해로운 수치심은 행동하는 구체적인 것보다는 행동하게 하는 자아에 치중하는 것으로
지나친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자기비하나,
혹은 자기모멸에 가까운 상태의 자아학대에 해당한다고 할수 있다.
그것이 지나치면, 병적인 상태의 자아가 형성이 되어,
무엇이든지 자신의 눈으로 모든 사물에 대하는 자신을
지나칠 정도로 병적으로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하늘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더 나아가 이웃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는 태도로 살아가는 인생의 철학을 갖고 산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 것이다.
여기 복음을 전하는 이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은
이러한 분명한 인생의 방향을 통해,
후회없이 살아가는 자신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시인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럽지 않는 인생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인하여 그 행복감과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러면그가 가졌던 복음은 무엇인가?
그가 소유하고 전했던 그 복음에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그안에 생명력이 있다.
그안에 죽음을 맛본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죽음을 맛본 사람들 어떤 사람일까?
죽고싶은 심정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죽음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사는 경우일 것이며,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이 되어
무엇이든지 붙잡으려는 다급한 상황하에 있었던 경우일 것이다.

사람은 죽을 운명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의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병으로
인간속에 있는 죄가 인간을 끝임없이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아,
수도 없이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오는 절망,
존재불안에서 오는 절망, 죄의 깊은 영향력으로 인한
절망적인 자신으로 인한 좌절감과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삶에 대한 존재의 불안에서 겪는 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고 싶은 심정으로 내몰게 한다.

삶의 각종의 스트레스는
시시각각 사람들에게 불안과 우울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기도 한다.
이렇게 어둠속에서 헤매이는 인생들에게
이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절망에서 소망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무의미에서 가치있는 삶으로 바꾸어 가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사람을 살리며,
병든 인생을 고치며, 상한 심정들을 새롭게 하여,
밝은 광명의 빛으로 사람들을 인도한다.

하나님안에는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의 힘이 있는 것과 같이
병들고 상하고 망가진 인생들을 고쳐 새롭게 하는 재창조의 능력도 있다.
그안에서는 모든 인생들이 새롭게 변화될수 있으니,
하나님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인생들의 진정한 의사이며,
비틀거리며 시달린 인생살이를 살아가는
수 많은 인생들의 유능한 조련사이다.
그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며,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내신다.

기쁨의 뉴스는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줄만한 놀라운 사실과
거기에 모두를 기쁘게 해주는 반가운 소식이 담겨있는 것이다.
지난 날에 기뻐하고 즐거웠던 기억들은
우리의 삶에 행복으로 다가오는 일이나 사건이다.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 는 것이나,
혹은 고대하고 기다리던 입시합격의 통보나,
혹은 취직시험을 치루고 난후에 입사통지를 받는 소식등이다.

이렇게 지난 세월에 여러가지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소식이 있었다.
나자신에게는 행복해하고 좋아해하며, 그소식에 감격해 하던 기억들,
나에게는 하나님을 만난 일이 가장 자신의 생애에 의미있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복음은 기쁨을 담고 있는 좋은 뉴스이다.
한국이 지난 날 2002년에 있었던 월드컵에서 준우승(4위)을 한 소식은
모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뉴스였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복있는 소식이다.
그소식은 만인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아름다운 소식이다.
망망대해에서 난파를 당한 조각배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선이 가져다 주는 목마른자에게 시원함을 주는 기쁜소식이다.
누구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죄때문에 죽어야 할 자신에게 형벌과 죽음에서 해방을 얻는 기쁨을 맛본다.

다만 사람에게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수용할수 있는 믿음이라는 그릇이다.
믿음만이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내세울수 있는 인간의 가치를 인정받는 길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인간을 향한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 그분을 찾으며,
그분이 믿음으로 그분을 찾는 인생들에게 당연히 돌아갈 생명과
그에 따르는 축복의 상급을 주시는 분이다.

무엇이 사람을 바르게 하는가?
도덕인가, 인생의 수양이나 혹은 고고한 철학적 가르침인가?
도덕은 인간에게 바른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도덕이나 율법은 사람의 마땅한 길을 제시하나 인간을 도와 줄수는 없다.
그 도덕률을 지키면, 그 사람은 올바르게 될수 있으나,
그런 것들을 다 따라 행하기에는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인생을 바르게 건강하게 수양하는 것으로 극기하며,
자신을 수련하여, 고도의 훈련의 과정을 통해
어느 수준의 고양된 인격은 소유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사람이 온전해 질수는 없다.

또한 고고한 철학적인 지식도 사람에게 희망의 능력을 줄수 없는 것은
그 지식들에 대해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어두운 동굴들에 갇힌 사람들이 그 동굴들을 헤쳐나올 지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그 철학적인 지식은 끊임없이 막연한 우주의 원리의 선상에서
무엇을 잡아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있는 인격신인 하나님과 잇닿을 수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

오직 우주를 창조한 신이 인간에게 찾아와 그신을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할 진리와
그 진리를 따르는데 필요한 힘과
그것을 통한 인생에게 주어진 진리를 통하여 얻은
결과에 대한 신의 배려로 인하여
모든 것이 순간속에서 사라지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주는 영생의 길과
그 인생길에서 결국 다가오는 인생의 죽음을 이길수 있는 생명의 길만이
사람들을 살리는 진정한 능력이다.
그 능력이 죽음을 이긴 주 예수님에게 있으며,
그의 오심과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
바로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이며, 기쁜 소식인 것이다.

삶이란 다양하게 진행되는 항상 현재진행형이다.
무엇으로 사는 가에 따라 그 진행형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그 진행은 무엇이 지탱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세상의 방식으로 물질의 힘으로 움직여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인가?
보이는 현상에 의해 존재하는 물질만이 의미이며,
가치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보이는 육체의 추구하는 것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물질주의, 육체적인 욕구, 현재적인 현상,
그리고 일시적인 상태의 추구등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든지 사람들에게는 항상 삶의 진행형안에서 존재한다.
그 진행형은 다만 일직선상의 전진만이 있고
후진할수 없는 시간의 한계선의 삶이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와서 미래로 나가지만,
다시는 과거로 돌이킬수 없으며,
그 미래도 자신에게 현재로 다가올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삶의 진행형은 시간이라는 제한 속에 있지만,
그 제한 속에서 제한을 넘어가는 영적인 세계와
영원한 차원의 세계를 따라 움직여 갈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진행형이다.

인생의 삶이란 자신의 인생관에 의해 움직여지며,
자신을 살게하여,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이루어간다.
그리고 장래에 그것의 결과로 결정된 것을 맞이한다.

무엇을 따라 살아가는 가?
어느 경우는 철을 따라 유행을 좇아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유행에서 사라지면, 자신이 좇은 그유형이나 스타일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는 옛날 방식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경우일 것이다.
수없이 왔다가 사라지는 유행처럼,
한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했던 것 같은데,
사라지는 시간과 더불어 없어지며
자신의 삶의 종착인 영원한 세계에 잇닿아지는 때에는
그런 것(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이 다 무용지물로 남아있게 된다.

자신의 삶의 진행형에 사라지지 않을 것들을 추구하는 살아가는 방식으로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방식만이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설수 있게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 믿음의 방식만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다가가며,
시간과 영원을 잇대으며,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하며,
사라질 물질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를
창출하며 살아갈수 있는 근거의 인생의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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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응답

예례미야 33:1-3-9

1. 내가 아직 궁중 감옥에 갇혀 있을때에 천지의 창조자이신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너는 나에게 부르짖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응답할 것이며,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기도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는 영혼의 탄식이다.
때로는 기도는 대화이상이며,
언어표현이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영혼의 절규이다.
그것은 또한 상한영혼의 고통의 하소연이다.
인간의 갇혀진 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부르짖는 영혼의 울부짖음을 하나님은 때로 요구하시며,
그 절규에 응답하신다.

내면의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는 가?
영혼의 탄식은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자기 표현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들을수 있다.
때로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를때에,
자신도 모르는 것을 구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사람의 나약함이란 어리석음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영혼의 소리도 외면하며,
자기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인간속에 새로운 마음을 심고,
인간의 깊은 곳과 연결되게 하는 그의 영을 통해
인간의 가장 필요한 영혼의 소리를 대변할때도 있다.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을때에 가장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잘 기울일수 있다. 한곳에 갇혀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자기한계에 갇힌 그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속에서 나오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감옥에서 사람들은 깊은 사색이나, 연구나,
혹은 사람들의 깊은 속에 있는 인생의 깊은 생각을 길어낼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는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평신도로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지만
국가에서 설교를 허락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이 한 설교때문에 그는 감옥에 13년을 갇혀 있으면서,
유명한 천로역정(하늘나라 가는 영적의 순례의 길)을 썼다.
그는 감옥에서 깊은 사색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신앙인들이 살며 겪을수 있는 여러가지 경우들을
보여주는 신앙인의 인생순례를 보여준다.
그 책은 성경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며,
사람의 인생사는 걸음을 인도하는 지침의 역활을 하였다.

일본시대에 기독인의 모델이 되었던 주기철목사는
감옥에서 자신의 일사각오의 순교적인 신앙을 다지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의 절개를 지켜 나갔다.
신사참배의 위협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절개있는 믿음과
애국의 독립적인 자세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한국기독교의 귀감이 되는 믿음의 발자취를 남겼다.

마틴루터킹 목사는 알라바마의 감옥에서
그는 자신의 비폭력 운동의 타당성에 대한 글을 쓰며,
자신의 하는 인간의 기본권보장을 위한
흑인 민권운동을 전개하는 철학적인 에세이를 쓰기도 하였다.

참담한 상태의 현실에서 그것을 타개하는 길은
자신의 마음속에 새로운 기대를 갖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궁중감옥에 갇혀 현실이 암담하였다.
갇힌 그에게 희망이란 보이지 않으나,
그가운데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희망적인 징조나,
혹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질때에,
하늘을 바라보며, 창공의 하늘에 대한 기대로 자신을 향해,
이세상을 있게 하신 그 신이시 하나님이 나의 희망이다.
그분,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다라는 생각에 부르짖으며,
그에게로 다가가며 자신의 울분을 토하며 나아간다.

영혼의 절규는 사람이 할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신의 간구이며,
자기절규에서 나오는 하소연이다.
때로는 세상을 주관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깊은 속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고 응답하며,
역사를 바꾸기도하며 혹은 역사를 새롭게 하신다.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위해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약속하신다.
기도는 미래를 여는 창조의 사역이다.
기도는 인간의 역사속에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초청하는 것이다.

어두움의 역사가 깊은 곳에 희망찬 새날에 기대가 고조된다.
암담하고 참담한 현실에서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와 축복의 날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눈이 새로운 미래를 열것이며,
비록 마음 깊은 곳에서 탄식하는 영혼의 소리에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다.

예언자는 비록 감옥에 갇혀 고통을 받고 있지만,
멸망해가는 조국의 현실을 향해 동족들의 죄에 대해 탄식하며
그들의 잘못에 대해 책망을 하며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다가오는 심판 넘어의
새로운 희망차고 축복된 민족의 미래의 번영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여기며 사는 경우라면,
그 인생에 대한 자신안에 있는 괴로움이
영혼의 탄식으로 변하여 도움을 주실 신에게로 향하다면,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이나 고난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인류역사속에서 고난이라는 도전과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용기와 희망의 기회라는 응전으로 하여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사람사는 곳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뼈아픈 현실을 맞이하는 때도 있으니,
그런 상황하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며,
살아갈 힘을 자신의 영혼의 탄식의 소리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얻기를 기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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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초등학교의 학예발표회

어느 저녁날 초등학교(1-6학년)에서
“Go to west” 라는 연극과 노래가 곁들인 서부 대사극을
전 학년이 다 함께 참여 하였다.
서부개척시대의 시대를 배경을 가지고,
아이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로 분장하여,
각기 자기가 맡은 역을 하며, 서부로 향하여 가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연출하며,
그 시대에 일어난 일들을 담고 있었다.
미국의 개척자의 정신을 반영하며, 미국의 정신을 대변하는 극이 었다.
그 개척의 정신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기회와 가능성을 바라며, 진출하는 미래정신으로
미국을 건설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또 어느 저녁날 학부형을 초청하여,
한 미국의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에서 갖는 학예발표를 하는데,
1학년, 3학년, 5학년이 연극을 하였다.
저녁시간에 학예발표회를 가졌는데,
교장이 장황하게 학교에 대한 광고를 하고 나서, 학년별로 학예발표를 가졌다.

1학년은 예수님의 탄생과 의미에 대해
기독교적으로 연극을 하고,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암송하는 것으로 마쳤다.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예수로부터 해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고,
죽음과 그리고 나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야기까지 극화로 한다.

3학년은 서부극에 서 은행강도와 그들의 일당이
개과천선하여 나오는 무대를 꾸미고 연극을 진행하였다.
서로 총질하는 것이나,
총으로 당시 서부사회의 법과 정의의 구현 행세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연극한다(이 연극을 보면서
미국인들이 자기들이 조상적부터 총기를 소지하는 문제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5학년은 시인의 연가집을 극화하여,
여러 아이들이 각기 그 시인의 아이들을 위한 삽화에 대해, 연극을 한다.
아이들이 부모에 대한 것이나,
혹은 자기들끼리의 대화를 말하며,
부모사회의 사회극을 풍자적으로 표현하면서 아이들이
자기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어린이 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공립학교에서는 사립학교의 경웅하는 달리, 개인의 특성발표에 더 중점을 둔다.
개인의 독립성이나 개인의 권리나 자유의 존중은
미국교육의 정신이나 시민 정신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악기 연주나, 장기자랑으로 연출한다.
유행하는 가수의 흉내를 내며, 각자 자신의 장기나 특성을 살려,
자기의 리사이틀 시간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이런 내용들이 비슷하게 개인적인 장기자랑으로 발표하는 아이들도 있으며,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를 통해 자신의 장기 자랑을 하는 학예회였다.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차이는 공립학교는 국가에서 의무교육으로 정부에서 관히 하는 경우로,
대개 학교시설이나, 일반적인 교육은 공립학교가 낫게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만, 교육에 대한 일관된 교육철학이나 인성교육은
각 사립학교의 특성에 따라, 공립학교보다는 건강한 인성교육을 실시한다고 생각한다.

사립학교중에는 유대교 계통의 학교도
좋은 학교들이 있으며, 주로 많은 경우는
기독교계통이나 카톨릭 게통의 학교가 주류를 이루지만,
때로는 개인이나 세속단체에서,
공부의 특수한 환경조건하에서,
부모들이 사교육비를 들여가면서 시행하는
각종의 대안학교의 계통의 학교들이 미국내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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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해(1)

용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사람은 어릴때 태어나면서 많은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인간관계안에서 자신을 키우며, 성장한다.
자신을 형성하는 부분에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대인관이나, 가치관이 정립이 되어간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가누지 못하며
자아에 눈을 뜨지 않을때에 경험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세계에서 보다 무의식세계의 심층에 남아,
자신도 모르게 자아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그 형성되어지는 자기가 이해하는 인간관계에서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가해자라기 보다는 피해자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주변인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런 기억들은 자신의 자아의 형성에 뿐 아니라,
현재의 자기표현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왜곡되고 상처난 인간관계의 기억들에 대해
피해자로서 자신은 가해자들에 대해 일정한 자기대응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의 상처에 잡힌 자신은 그 가해자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과 사람과의 용서의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사회적인 환경에서 발생이 된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용서하는 것은
잘못된 인간관계의 상태에서 화해와는 것과는 다르지만,
대체로 용서가 안되면 상처난 인간관계의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용서에는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화해주도적인 입장에서 필수적이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나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에는
반드시 인간관계의 화해가 필수적이지 않다.
이말은 타인에 대해 화해가 이루어질때,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는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어느 정도 정상화할수 있다는 의미이다
( 이말을 현실에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자신과 원수관계에 있는 상대방에 대해 용서가 안되지만,
부득이 현실적이고 필연적인 인간관계에서 용서를 접어두고,
그와의 화해를 하게 된다).

자신의 인간관계의 처세에 대해 생각해보면,
과거에 대한 부정적인 인간관계의 기억은
현재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인간관계의 처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고로 현실의 인간관계를 잘 하려면,
과거에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자아가 잡고 있는 그무엇
(holding the negative propensity like anger, rage, etc)을 풀어내어 치워 버려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 쓰이는 용서의 의미를 가진 “샤락”이라는 단어는
“현재를 방해하는 것, 과거의 것들을 옮겨 놓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그것을 잡고 있으면,
자신이 그것의 영향을 받게 되며,
자신의 정신적인 활동이나 혹은 현재의 대인관계의 처세나 성향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극단적인 예도 있다.
어느 나이가 중년이 미국인 주부가 어깨통증과 신경통으로 여러 해를 고생하였다.
그것을 고치려고 약을 먹는다든지
병원에 가서 의사의 처방을 받았지만,
뚜렷한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고
그 증세는 점점 더 나빠지게 되어, 고생을 하였다.
그녀는 그문제로 고민을 하게 하다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문 상담인을 찾아가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 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중에
그 여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깊은 굴곡의 상처난 흔적이 떠올라,
그것을 생각해보니 오래전에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그 원수같은 사람에 대한 극단의 미움의 감정이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 문제를 끄집어 내어 다루는 중에
그 문제에서 자신이 놓여 나게 되자.
그 통증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자
문제가 해결된 경우이다. 필자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성경신약에는 용서라는 말로 쓰이는 헬라어 “아피에미”라는 말은
“보내는 것,혹은 면제하다.감면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자신안에서 자신을 잡고 있는 그것을 내어 보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스라엘나라에는 7년이 안식년이나 49년이 지나 50년 째되는 희년마다
그 나라에서 서로 빚을 진 사람들을 빚을 탕감, 면제해주는 일들이 있다.
그래서 7년마다 혹은 50년마다 상처난 사회적인 상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런 면제의 은혜를 통해 인간관계를 새롭게하는 일들을 하여
사회를 새롭게하고 민족의 삶을 유쾌하게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보통 부모가 자녀들에게 여러가지 규율을 세워 놓고,
그 규율이나 법칙으로 자녀를 가르치고
혹은 훈련하거나 때로는 매를 대거나 벌을 가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녀들이 만족을 하는 그리고 부모에 대해
좋은 부모관을 갖고 있는 자녀들은 자녀들에게 관용하는 부모일 것이다.

때로는 부모된 필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높은 수준이나 엄격한 규율을 적용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규칙의 위반이나, 잘못된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쉽게 분노하거나 벌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부모의 정해놓은 규율을 어길 때에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용서를 기대한다.
그리고 자녀들은 항시 부모들이 자신들에게
관용하는 부모가 되어주기를 좋아한다.

이런 용서하는 마음이나 관용하는 태도는
부모가 자녀의 입장만 되어 보면 어렵지 않게 자녀들에게
그런 태도로 대할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시행착오나, 쉽게 오르는 화를 다스리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녀들을 대하는 기본철학에 있어서는
그런 넓은 마음에서 나오는 교육의 정신을 가지면 될 것이다.
멀리 내다보는 부모의 자녀교육의 귀중한 지침이 될수 있다.

원래 인간사회나 대인관계에서 서로 용서해주는 습성은
인간을 지으시고, 정해진 테두리안에서 살도록 되어있는
인간의 현실을 스스로 박차고 나가,
허물을 범하며,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용서를 하였고,
그 용서를 통해 관계회복을 바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며, 받고 있으며,
앞으로 그 용서를 받을 사람들인 사는 사회나
그들의 인간관계에서의 서로 주고받는 용서의 문제는
언제나 빨리 풀면 좋을 성 싶은
아주 중요한 풀어야 할 인간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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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묵상

사람의 주된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영광을 돌리는 일은 두가지로 생각해보는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는 그의 속성으로서의 영광의 측면이 있고,
신성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가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이나 왕은 그들이 법적인 기간동안에 대통령으로서 영광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 자신이 영광의 존재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주지 않으며,
영광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돌려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 그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즉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과 영으로 하나님을 높여 드린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는 4가지 측면이 있다
(appreciation, adoration, affection, and subjection)

먼저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인식적인 태도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인간의 숭고한 생각안에서 하나님을 탁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분을 경배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에는 두요소를 생각해볼수 있다.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존경이며, 그리고 그분을 통치자(왕)로 경배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하나님께 대한 감성적인 표현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리고 온전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거룩한 사랑으로 대한다.
그럴때에 인간은 가장 고귀한 감정의 소유자가 된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하므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을 통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느 것이다.

그러면 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가?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있게하신 분이며,
그를 영화롭게하는 목적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만물가운데에서 영광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고유한 가치이며
하나님의 탁월함의 존재의 양식이다.
또한 창조물들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며,
당연히 그분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드리는 것이
그의 피조물로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영광을 돌릴수 있는가?
1. 사람이 순수하게 자신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을때에
그분을 영화롭게 할수 있다
(여기 그 목적하는 바의 3가지우리의 인식을 가질수 있다.
1. 자신의 삶을 통해 무엇보다 우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식.
2 . 비록 고난이 있어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는 인식.
3.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자질이나, 재능을 통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하려는 의지의 인식)

2. 사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3. 사람은 자신이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에 있어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영광을 흠모하므로써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5. 사람이 신실해지므로 즉 인생에서 선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
6.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만족해 하는 것으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7.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8.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으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한다.
9. 인생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10.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 드린다.
11.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12.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열정을 갖고 살므로 그분을 영화롭게 한다.
13. 우리의 일상의 모든 일(시민으로서, 혹은 사람으로서 하는 일들)에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 그분을 통해 활동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4.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므로 (전도) 그분을 영화롭게한다.
15.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한다.
16.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17. 우리의 거룩한 생활 (구별된 태도) 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Thomas Watson의 “A Body of Divinit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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