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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21-28 |
학개 1: 3-7
3. 여호와께서 다시 예언자 학개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4.”내 성전은 황폐한 채로 있는 데 너희는 호화주택에 살고 있느냐?
5. 그러므로 전능한 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자기 소행을 잘 살펴보아라.
6. 너희가 많이 심었으나 적게 거두었으며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흡족하지 않으며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품삯을 받아도 구멍 뚫린 지갑에 넣는 격이
되었다.
7. “전능한 나 여호와가 말한다. 너희는 자기 소행을 잘 살펴보아라.
성전중심의 삶은 성전중심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중심의 신앙을 전개하며,
말씀중심의 신앙을 정착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현현을 기대하게 하는 성전중심의 신앙은
언제나 성전을 통해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생활의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통치를 바라보며 나가는 신앙이다.
주님은 주님의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다.
성전에서 부르짖는 간구에 주님이 응답하시며,
그의 손길과 역사하심이 그의 임재를 통해 이루어진다.
당시 유다백성은 바벨론 유폐의 생활에서 고토에 돌아와
옛왕국이나 자신들의 살았던 삶의 터전을 세우는 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살집이나, 혹은 사회기반건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유다백성의 삶의 근본은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망각하고,
그들은 성전재건의 사역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자기살 길에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에 성전을 지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학개 예언자는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전달하실때에 그의 메신저를 들어서 전달하신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달할 책임이 주어진다.
고로 예언자는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달하는 사명을 받은 설교자나, 성경교사들은 말씀전달을 통해
주님의 뜻과 그의 음성을 전하는 것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유다백성들은 고토에 돌아와 자기 살길이 바빠, 하나님의 집의 재건을 소홀히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그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관심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길로 가기가 쉽다.
인간의 관심이 자기에게로만 집중이 되면,
객관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살펴보는 지혜가 없어진다.
사람에게 영적인 관심이 없어지면, 육체적인 일에 집중하며,
도덕이나 윤리적인 원칙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행위를 살피지 않고, 가치없고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
집중력을 잃고, 자신을 흩어지게 하는 산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상태를 간파하시며,
인간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임을 알고 계신다.
인생은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잘못되었나를 무시하고 살아가기 쉽다.
인생이 기준없이 살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보면,
자신의 일들이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관찰하시며 판단하신다.
사람이 자신의 중심이 흔들리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최선을 하기가 어렵다.
이말은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고, 자기의 생각이 명료해지는 것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영혼이 만족한 상태에 있을 때에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안에서 인간의상태가 영과 혼과 육의 체계를 질서있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게 된다.
고로 먼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살펴서 자신을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의 질서를 따를때에
사람은그 안에서 가장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며, 인간의 자기능력이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자신의 인간성안에
인간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영혼의 가치를 추구할 때에 가장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며,
그 상태에서 자신의 본연의 삶에 충실할수 있다.
고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먹이는 일에 관심을 가지며,
그 일을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일이 잘되어야 자신의 능력을 잘 표현하게 된다.
하나님은 먼저 인간의 상태를 보시는데,
그 인간의 상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여,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근본적인 상실감속에 있거나, 진리를 떠난 미로의 길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여
자신의 영혼을 바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하는 일을 판단하며, 그들의행위를 살피며,
그들을 평가하며, 심판하신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상태를 반영하는 고로 자신안에
하나님의 선과의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들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기준을 통해
그들의 행위를 바르게 할수 있으며, 자신의 삶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을수 있다.
여기서 성전중심의 삶은 바로 하나님중심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생활은 자신의 영혼의 근본적인 문제를 돌아보며,
자신의 상태를 올바르게 회복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며,
자신의 하는 일을 통해 아름다운 결과를 이룰수 있다.
마가 복음7:24-30
24.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계시려 하셨으나 곧 알려지고 말았다.
25.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가진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즉시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녀는 수로베니게 태생의 그리스 사람인데 자기 딸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27.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먼저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 개에게 던지는 것을 옳지 않다.”
28.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있는 개도 아이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29. “네 말이 옳다. 이제 너는 돌아가거라. 이미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래서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귀신은 이미 나가고 어린 딸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인류의 문명이나 문화발전은 저 미지의 세계 넘어있는 그들의 꿈과 비전의 이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도전정신과 실험시도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그들에게는 위기나 혹은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기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실험정신, 즉 개척자적인 정신이 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기회를 쟁취하는 불굴의 용기의 정신이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도전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인 시돈지방으로 가셨다. 그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잃어버린 선민들을 위해 이땅에 오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셨다. 본문에서는 그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시게 되었다. 주님이 이방인들에게 가셔서 접촉하신 일은 드물게 그의 사역에 나타난다. 사마리아 지역에 가셔셔 전도하신 일이나, 혹은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에 이방인들을 만나신 일도 있지만, 이렇게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시게 되었다.
그 지역에 이방인인 한 여인이 자기 딸로 인하여 늘 염려와 사랑으로 돌보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에게 딸은 소중한 자녀로 그녀에게 삶의 희망이었으나, 그녀의 딸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귀신이 들려버렸다. 이방인 지역은 우상을 섬기고, 악령이 횡행하다보니 그녀의 딸이 사춘기의 급격한 변화로 혹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나 혹은 나쁜 어른들로부터 상처를 입은 상태로 지내다. 그 상처로 인하여,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딸이 실성하여 귀신이 들렸다. 패인이 되어버린 그녀의 딸은 어미에게는 크나큰 인생의 짐이며,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앞으로 나아오게 하였다. 인생의 문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앞에 나오게 한다.
그녀는 그리스의 사람이 었다. 수로보니게의 지역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리스사람은 당시 전세계에 헬라(그리이스)문명이 영향을 주고 있는 시대여서 그리이스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 살았던 것 같다. 이방인들은 보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문화이기에, 사람들 가운데에 악령들이 쉽게 영향을 주며, 사람들은 귀신들의 지배나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무리 문화나 문명이 발달하여도 하나님을 모르는 문화나 문명은 영적인 존재들에 영향을 받는데, 특히 악한 영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인간의 죄나 그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악령들은 인간에게 영향을 주며, 지배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 땅에도 악령들의 지배가 있었으며, 마음에 상처를 받았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때에 악한 영들은 사람들에게 접근하며, 영향을 주며, 나중에는 상주하여 지배를 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중에 하나가 인간세계에 있는 사단이나 그의 하수인들인 악령들의 영향이나 지배를 없애려고 오셨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녀의 청원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기존관념을 내세우며, 기존의 유대인우선, 선민사상으로 나가셨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에게 유대인우선순위를 내세워, 자녀들이 배불리 먹어야 하리라. 이방인들이 들으면 화가 날 개념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기존 관념의 한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관념이나 편견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충실하였으며, 자신의 간절함을 따라 행동하였다.
이방인들에 대한 처우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편견이나 제한을 생각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민 그의 자녀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말씀하셨다. 기존 관념에 대한 생각들에 대해 여인은 자신의 주장으로 맞섰다. 믿음은 주님의 의견이나 생각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으로 그 여인은 믿음의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믿음은 자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믿음이 었다. 그녀에게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상관이 없다. 그녀에게는 다만 자신의 딸을 치유하는 의사이신 주 예수님이 계시고, 그녀에게는 오직 그 딸을 치유하려고 하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절박함과 간절함에서 나온 강인한 갈망의 에너지가 넘치는 믿음이 었다. 자신이 소유한 믿음에 갈망의 에너지가 넘쳐나 그 에너지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해결의 접근하게 하였으며, 여러가지 장애요인들을 극복하는 시너지 효과로 종합적이고 집중적인 믿음의 활력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분출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믿음은 기회를 잡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앞에 메시야 구세주 예수께서 다가오실때에, 그녀는 담대히 유대인앞에 나가서 자신의 요구를 간청하였다.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상종하는 것은 금기로 여기는 것이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서로 접근이나 대화의 장벽이 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장벽을 넘어가는 믿음이 었다. 그녀의 시도는 실험정신이며, 도전정신이다. 이것이 세상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다. 발명이나 발견의 시도는 모험이나 시련에 대한 도전정신이다. 새로운 시대나 흐름에 대한 개척정신이다.
그녀의 믿음은 하늘 나라의 좋은 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믿음이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천국은 사모하고 갈망하고 얻고자 하는 강인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언제난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하나님은 천국을 두드리고 구하고 찾는 자들에게 열려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천국은 가고자 갈망하는 자들에게 열린 문으로 다가온다. 구하는 자에게 얻어지는 곳이며, 찾는 자에게 찾아지는 곳이다. 그리고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녀의 믿음은 도전하는 믿음이며, 실험정신의 믿음이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자녀의 떡에 제한 하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그 자녀의 떡을 취하고 기다리는 믿음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녀들의 빵을 취하고저 하는 도전정신이 있었다. 이 믿음은 바로 그 옛날 구약의 조상중에 가장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한 야곱의 믿음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다. 야곱은 자신이 형인 에서에게 장자대신에 차자로 태어나서 그 장자에 대한 축복을 취하고저하는 열정과 그 그 장자권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통한 일관된 추구는 급기야는 그가 어느 발 밤에 얍복강에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면서 축복의 하나님에게 축복을 쟁취하고야 만 도전적인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칭호를 갖게 되었다. 너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속에 하나님과 겨루어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축복을 얻어내는 인간의 믿음의 도전적인 시도들을 격려하며 축복하셨다.
그녀에게는 기회를 쟁취하고저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절박함을 주님에게 대한 한계나 제한을 넘어가는 믿음으로 표현하였다. 만일, 인생에 절박함이 있고,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에게 구하지 않으면 그 문제를 해결할수 없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고질적인 딸의 문제를 들고 주님에게 나온 것이다. 그 문제로 인하여 그녀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에게로 나와 그의 은혜의 치유로부터 딸의 치유와 구원을 받는다. 자신의 딸의 문제로 구세주를 만날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그 딸을 악령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딸의 구원과 치유를 받는다. 더구나 그녀의 불굴의 용기와 같은 믿음의 표현으로 인하여 주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
그녀의 불굴의 용기와 끈질김은 그녀의 간청으로 포기하지 않고 주님에게로 매어 달리는 믿음으로 나타난다. 매몰차게 제한과 한계를 설정하신 주 예수님의 거절의 답변을 듣고도 그녀는 주님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한다. 일의 성공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나타난다. 일의 성취도 중간에 있는 반대작용이나 한계를 넘어가면서 이루어 진다.
그녀의 주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고백은 이렇다. 상아래있는 개도 아이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필요를 관철하고저 하는 끈질긴 간구의 기대를 갖고 있었다. 믿음의 능력이나 효과는 믿음의 기대만큼에 정비례한다. 끈질긴 믿음은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게 한다.
예수님은 그녀의 주장에 대해 옳다고 인정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주장이나 의견에 대해 인정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셨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이 하나님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의 정신은 절박함이나 간절함에서 나오지 않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인간의 생각이나 태도나 정신은 그 간절함이나 절박함에서 나오는 기대감이다. 그의 이론이나 생각이나 인간의 편견을 넘어가는 도전적인 것이 있다. 사람은 대개 기존개념에 머물게 된다. 비상한 사람들은 그 상식적인 생각을 넘어가며, 그 너머에 있는 가능성의 열매를 따먹는다.
다윗시대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틴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의 도전을 받았다. 당시의 군인들은 누구나 저 거인을 아무도 이길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거인에 도전할 만한 용기가 나서질을 않았다. 모든 군인들의 생각에 거인을 이길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잡혀 있었다. 그런데 다윗만은 달랐다. 골리앗이 거인이라도, 전사라도 그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용기가 있었다. 용기가 있는 믿음이 큰 상급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 여인에게서 배울 것은 그녀에게는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갖고서 주님의 은총을 입고 그녀의 딸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녀에게는 먼저, 실험정신의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의 이방인에 대한 새로운 사역을 가능하시도록 유도하였다.
그녀의 믿음는 편견을 넘어가는 믿음이 었다. 유대인은 되고, 이방인은 안되는 편견을 넘어가는 것이었으며, 자신에게 오는 불편 부당한 대우나 편견된 상황을 뛰어넘는 자기 재치나 지혜나 지략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녀의 표현된 믿음안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입견이나 상식을 넘어가는 창조적인 정신이 있어, 그 정신에 의해 축복의 기회를 잡았다.
그녀의 믿음은 도전하는 믿음으로 유대인이신 주님의 매몰찬 거절과 냉혹한 한계의 현실을 극복하여, 여러가지 장애를 넘어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었다. 세상은 여러 많은 도전이나 시련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원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은 자신의 성취의 동기의 주요한 밑거름이나 자신을 단련하는 과정이 된다.
마태복음 22:35-40
35. 그들중에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36. “선생님, 모세의 법중에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다.
39. 그 다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40.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교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살아가는 중심계명이다. 이 계명은 성경의 전체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의 삶의 계율이다.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가교의 계명이며,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신의 의지의 반영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사랑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안에서 새롭게 그들의 잃어버린 지위와 권세를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사랑의 계명은 그의 삶의 정신에서 나오는 교훈이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사랑의 정신으로 그가 수행하신 사명을 감당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가를 보면 알수 있다. 교회공동체나 신앙적인 모임안에 이 사랑이 존재하고 있을 때에 그곳은 그의 나라의 실현을 이루어 가는 것이며, 인간관계의 이상적인 분위기를 세울수 있을 것이다.
율법학자는 율법을 정통하였던 사람들로 그들은 항상 율법을 생각하며, 연구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율법의 핵심의 의미를 소홀히 하여, 그법에 매여 법으로 이웃의 모든 행위를 판단하는 역활을 하였다. 이 본문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 학자들이 율법의 눈으로 인류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시험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라고 할수 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한다. 그들의 모든 생활이 근간이 되는 율법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종교와 윤리의 기준을 세운다고 생각한다. 고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은 자신들의 삶의 기준을 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율법의 본질적인 진위를 모르고 피상적인 이해와 형식적인 법적용에 머물러 있다. 고로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의 성품과 속성의 근저는 그 사랑하심에 있다. 그는 사람을 향해 그 사랑의 화신으로서 사람에게 다가 오신다.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구원의 근간을 이루며, 하나님의 자기의지의 표상으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갈수 있는 그의 성품이며, 그의 속성의 본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길을 보여주셨다. 그의 생애 그 자체는 하나님 사랑의 화신으로서 사셨으며, 그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향한 지극한 삶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시고, 그 길을 보여주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이나 삶의 표현방식은 하나님 사랑에 도달하면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되며, 가장 고상한 사람의 성품에 도달한다. 사람이 갖고 있는 영이나 혼이나, 마음이나 정신이나 생각에 있어, 하나님사랑하는 표현이 나타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형상과 그의 선하신 뜻이 실현되는 것이다.
인생이 힘쓰고 애써야 할 일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알고, 터득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인간구원이나 승리의 보장을 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가르침이나 생활이나, 삶의 흔적들이 오직 그 계명 즉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의지와 정신의 실현에 있으셨다.
주님은 강조하신다. 하나님 사랑하는 계명이 제일 근본이 되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가장 고귀한 존재로서의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알려주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그의 성품을 부여받은 존재로 이세상에 태어났으며,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속에는 자신 스스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나 표본을 따르지 않고 자기 중심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시도에 의해 그 하나님의 수준을 벗어나, 어리석은 사람의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며, 자기혼란안에 빠져 버렸다.
사람이 원래 하나님이 만드시고 원하시는 위치로 돌아가는 길은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는 의지와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생활이나 삶의 평생의 과정이나 흔적들은 그 계명의 실천과 그 실천안에 있는 인간의 자기사명과 자기 수행을 진행할 때에 사람은 자기가 가야 할 바른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웃도 그의 모습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그의 돌보심과 주관하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웃의 모습안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이메지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웃을 바라보는 눈이 사랑의 하나님의 관점을 통해 바라볼때에 그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의 하나님의 대상이 되며, 이웃도 바로 그의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이웃의 모습안에서 자신과 비슷하며 자신을 반영하는 속성이나 자신과 똑같은 인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의 형상을 본다. 고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태도의 연장으로 바라보게 되며, 자신을 사랑하고 애착하듯, 이웃을 향한 자애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웃은 바로 나 자신의 연결고리로 이어진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세계안에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안에서 이웃은 나 자신과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공동운명체의 부분이며, 함께 그의 형상을 받고 나눈 혈연이며, 글로발 가족의 한 일원 인 것이다. 고로 이웃사랑의 범위나 실천적인 영향력의 대상은 민족이나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확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사회를 향한 뜻과 의지의 실현이 율법을 통해 계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은 인간의 삶을 보호하며, 인간사회안의 사람들사이의 상호 합리적인 관계와 질서있는 생활의 기준의 법으로 제시되며, 그 율법의 중심에는 십계명이 있다. 그 십계명의 정신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율법을 받은 인간사회는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사회를 향하여 계속하여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세우신 법을 지키도록 하셨다.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사회에 알리시며,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인도를 받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들을 돌보며 인도하시는 큰 테두리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이웃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개인의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각자 개인의 삶을 통해서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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