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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긴 하루

   회의와 데이트 사이에 삼십분 정도 시간이 있는 틈을 타서 쓴다.  지난 수요일, 최악의 날에 대하여.



 학생들을 위해서나 강의하는 사람을 위해서나 세 시간 연강은 비효율적이지만 시간이 없어 어쩔수 없다.  강의가 오전중에 한 시간이라도 있으면 검진과 사업장 방문일정을 맞출수가 없어 그냥 몰아서 하는 것이다. 뒤이어 잡힌 사업장 방문일정때문에 강의를 10분가량 먼저 끝내고 점심먹을 시간이 없을 것같아 준비한 도시락을 들고 간호사샘의 차에 탔다.

 

 차안에서 우물우물 먹자니 목이 멘다. 그렇게 찾아간 사업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기업 계열사인 자동차부품 업체는 전원 사무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산은 누가 하냐고? 놀랍게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내하청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약 삼사천명의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생산하고 그 두 배를 넘는 원청소속 사무직 노동자들이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을 관리하고 물건을 파는 일을 한다.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2교대 근무를 하는데 작업자의 주요 문제는 소음, 유기화합물류, 근골격계 부담 작업 그리고 정전기이다. 이 가운데 정전기는 산업안전보건법에 규정되지 않은 유해인자인데 작업자들은 소음이나 화학물질보다 하루에도 몇번씩 정전기때문에 놀라는 불쾌한 경험을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호소한다. 

 

  검진결과 사후관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규모가 50인 미만이나 원청에서 시키기 때문에 억지로 추가비용을 지출하면서 보건관리대행을 하는 하청업체 사장들이 협조할 리가 없다. 그래서 참 어렵게 진행해온 곳인데 그래도 몇년간 공들인 결과 건강상담과 작업장 순회점검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하청업체중 한 명에서 이번에 소음성 난청 유소견자가 나왔다. 

이 건을 두고 원청 보건관리자의 언행은 내 피로를 가중시켰다. 아침부터 연강을 한데다 건강상담을 하는데 옆에서 하청업체 사장이 특수검진 결과표를 하나 하나 보면서 잡아낸 우리 검진팀의 문제점을 가지고 궁시렁대는 소리를 두 시간씩이나 들었기 때문에 인내심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그가 나타나서 내 속을 뒤집었으니 폭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내 판정이 법적 기준을 뛰어넘은 것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했을 때 내가 한 대답은 '그래, 법대로 해' 였다. '이의있으면 다른 산업의학 전문의한테 환자 보내고 노동부에 특검결과 보고할 때 내 판정에 동의할 수 없다고 문제제기 해라. 여기서 시끄럽게 견해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문제로 실갱이 할 필요도 없고 네가 판정의 전문성을 판단할 능력도 없지 않냐 '  

 

 사실 방문일정이 잡혔을 때는 이 문제를 부드럽게 풀려고 했었다. 여러가지 정황상 환자가 유소견자 판정을 받는 것 외에 다른 변화가 없는 답답한 상황에서 원칙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구하려고 간 것이었다. 개인적인 컨디션의 저하 + 우리 검진팀의 여러번 이야기해도 고쳐지지 않는 문제점 + 원청보건관리자의 안하무인인 태도,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 이렇게 되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에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들은 이야기. 그 보건관리자가 얼마전 일과성 뇌허헐 의심(뇌졸증의 가장 약한 형태)증상으로 며칠간 입원했었다가 나왔고 오늘 그 문제로 상의하려고 왔던 것인데 예기치 않게 나랑 다투느라 정작 본인 문제 상담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이구, 내가 미쳐. 그럼 미리 이야기 좀 해주지. 

 

 과에 돌아왔더니 보건관리대행 사업장에서 전화가 와 있다. 요통부담작업에 배치예정인 작업자가 채용시 건강진단에서 요부 방사선 검사의 비특이적 이상소견때문에 탈락했는데 이를 해결해달라는 요청이다. 안전관리자는 탈락을, 총무과는 채용을 주장하며 다투고 있으니 전문가가 나서 중재해달라는 것이다. 그 전화 삼십분 하고 특수검진 판정하고 과 컨퍼런스 하고 나니 6시이다. 아이쿠 미군기지 주변 마을 조사에 가야하는데 늦었다.

 

  마을조사하러 가서 시골길을 좀 걸었더니 진정이 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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