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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 미즈타후, 히모리, 나카지마

  • 등록일
    2009/03/09 16:58
  • 수정일
    2009/03/09 16:58

어제 돕이 알려줘서 알았다.

빈집에 나카지마의 친구가 와 있으며,

미즈타 후 상이 아프다는 사실을.

그래서 부랴부랴 언니가 보내준 한라봉과 천혜향(흐미 이 귀한 것슬)을 싸들고

빈집으로 향했다.

빈집은 비어있고 (처음 본 빈 빈집)

옆집에 여성들이 왁자지끌 모여 수다를 떨고 있네.

그리하여 한라봉과 천혜향은 그녀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여튼 맛있게 먹으니까 기분 좋더라.)

 

나중에 빈집에 다케시씨를 비롯한 고노와 일본인 친구들이 왔는데,

몇몇은 한국말을 잘하고 몇몇은 못하고.

이럴때만 일본어 공부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나.

하지만 손짓, 발짓, 어설픈 일본어와, 고노다이스케 사전을 이용해서

대강 의사소통은 되더라.

다케시는 혹시 몇년전에 억수로 더운 날 나카지마와 함께 온 7명의 아나키스트 무리 중

하나일까 생각도 했는데,  그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날씬한 체구의 살짝 펑크스런 느낌, 짙은 쌍커플이 인상적인

참 매력적으로 생긴 젊은이였다. (ㅎㅎ)

 

너 얘 아니, 재는 아니, 하면서 인맥조사도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잠깐 얘기도 하다가

후 상이 아프다는 얘기로 이어지고,

빈집을 떠날때 후상에게 전하는 나의 메시지를 동영상기능이 되는 카메라에 담았다.

 

후상, 마니꾸데스. (후상, 매닉이에요)

겐키니 잇데 쿠다사이. (건강하게 계세요)

아토데 아소비니 이키타이데스카라  (나중에 놀러갈고 싶으니까요)

사요나라 (안녕히 계세요)

 

후상에 대한 기억은, 2001년 그 무덥던 여름날,

오사카의 집에 놀러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할아버지와 나, J, 윤, 정, 김 등 몇명의 아나키즘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존경해마지 않는 '폭력론 노트'의 저자이자 아나키스트인 무카이 코를 만나러 갔었다

(무카이 코는 몇년 전 고령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무카이코와 함께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이 몇몇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무카이코의 나이어린 파트너 미즈타 후상(당시 50대)과,

무카이 코와의 대화를 방해한다며 할아버지로부터 타박을 들었던 무카이 코의 광팬 히모리씨였다.

히모리씨는 댜음해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이스라엘 철수를 부르짖으며 어느 공원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히모리씨의 유서 --> http://www.dopehead.net/board/view.php?id=dmz&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keyword=모리&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46 )

 

나카지마는 그중 유일한 젊은이에다, 해사하게 생긴 꽃미남이었기에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몇 년 후 나카지마가 한국에 왔을땐  거의 40이 다 된 그의 모습에서

해사한 꽃미남의 모습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지만 (어우 야, 난 너무 얼굴만 보나 봐)

그날 밤 오사카의 아파트에서 나카지마가 입은 일본식 가운(파자마라고 해야하나)이

바람에 살랑이던 모습이 강하게 인상에 남아있다.

그는 무카이코, 미즈타후에겐 거의 '가족'과 같은 존재로, 무카이코가 예전부터 만들어온

아나키스트 소책자인 "흑"의 편집을 맡고 있었다. 물론 글쓴이로도 활동하면서.

미국, 특히 서부연안 아나키스트, 밥블랙이니 존저잔이니 하는 이들의 논쟁과 논객들을 다룬 특별판은

나에게도 보물 1호 중 하나였다. ('과거'형이던가 - -;)

 

미즈타 후는 18살 무렵 조그만 마을에서 무작정 상경을 하여

당시 반전운동을 하던 오다마코토([전쟁인과 평화인가]의 저자,  녹색평론) 의 사무실을 찾아가

무조건 여기서 일하고 싶으니 날 좀 써달라며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다 무카이코를 만나고 둘은 생의 반려자이자 동지가 되었다.

 

그녀의 콧소리 섞인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뽀얀 피부 (나보다 더 좋더라 헐),

특히 신기한듯 쳐다보는 소녀같은 동그란 눈동자가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경험과 연륜에서 나온 지성과

경험과 연륜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천진난만함과

권위에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당돌함

이런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어울려보이는 인물을 만나기란 흔치 않을 거다.

 

미국이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하고, 테러의 편이냐 우리의 편이냐를 전 세계 에 강요할 때,

후는 폭탄테러를 저지른 소녀의 일화 속에서

소녀를 둘러싼 '폭력적 세계'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자신은 결단코 '테러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했던 그 글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그분이 아프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세계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인 되는 사람이 있다.

할아버지와 미즈타 후상이 그런 인물들인데,

나는 그들에게 너무 소홀하지 않았나 싶은 후회가 밀려든다.

다케시가 갈때 조그마한 마음의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은데, 언뜻 떠오르는 게 없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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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모독 금지

  • 등록일
    2009/03/06 14:50
  • 수정일
    2009/03/06 14:50

MB는 미워도 쥐는 밉지 않다!!!

쥐모독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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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탱이

  • 등록일
    2009/03/03 15:40
  • 수정일
    2009/03/03 15:40

햄스터와 사랑에 빠졌다.

아래 프로필 그림을 방금 그림판에서 5분만에 그렸다.

그리고보니 딱 우리 볼탱이 같이 생겼다.

매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보았더니,

저절로 손이 그 놈을 그린다.

ㅎㅎ 사랑스러운 나의 볼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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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 등록일
    2009/03/03 10:42
  • 수정일
    2009/03/03 10:42

토요일, 용산이다, 미디어법이다 도심에서 한창 집회가 벌어지고 있는 시간,

난 집에 콩 들어박혀서 나나를 봤어.

예전에 한번 5권 정도까지 읽은 적은 있어.

다시 읽으니까 새로 읽는 느낌.

딱히 꿈도 없고 중심도 없고, 늘 '나쁜' 남자들과의 관계에 휘둘리는 나나와

고아나 다름없이 버려져 외로움과 소외의 상처로 인해

강해져서 세상에 우뚝서야하는 강박에 늘 사로잡힌 나나

읽으면서 나는 어느 나나와 더 닮았을까 생각하게 되더라.

우선은 고마츠 나나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게 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솔직함, 그것을 날것 그대로 표현하는  꾸밈없음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에 더 괌심을 끈다.  (왜 나는 내 몸 가는대로 사랑할 수는 없을까?)

강아지처럼 밥을 주는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것이 순수한 건지 타락인 건지,

본인도 계속 저울질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엉덩이를 가볍게 놀리는 여자'가 되거나 되고 싶지 않나?

펑크 나나도 멋지고 때로는 공감하는 캐릭이지만,

나에겐 고마츠 나나가 더 연구 대상이고 더 재밌는 캐릭이다.

 

엉덩이를 가볍게 놀리면서 순수한 여성이란 많은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었지, 사실.

엄청나게 많은 영화와 소설이 이런 여성에 바쳐져 있지 않아?

때론 그냥 그대로 남성들의 판타지인 것도 있고 (거의 대부분)

때론 판타지로 출발하지만 결국은 판타지를 해체하고 반성하고 다시

물음으로 돌아오는 것도 있지 (가끔)

그리고 판타지에 대한 거부와 상처가 위악으로 나타나는 것도 있고 (많아)

 

나나는 이것과는 좀 다른 판타지인것 같아.

나쁜 남자들에게 휘둘리는 여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 빛을 발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물론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나의 감상을 말하기는 부족한 것 같아.

오히려 정형화 되지 않은 관계의 복잡 다단함.

어떤 공식없이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와 눈이 맞을 수 있다는 활짝 열린 광장에서의 만남?

물론 개인들은 괴로워하고 상처받고 아파하지만

그걸 그리는 사람과 보는 사람은 저러기도 하고 이러기도 하는 거지 하며

여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것. 어느 특정한 캐릭터에 사로잡히지 않음?

 

순정의 공식에서 살짝 비껴갔기 때문인지,

예전처럼 주인공과 주변사람의 관계와 감정에 연연하지 않으며 읽게 되는

담담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

어쨌든 나한테 그랬다.  물론 아직 10권을 더 읽어야 하지만 ㅋㅋ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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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에서 온 이메일

  • 등록일
    2009/02/23 11:47
  • 수정일
    2009/02/23 11:47

인권활동가로 일하는 친구가 콜럼비아에서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가 서울에 있을때  콜롬비아의 준군사 조직의 만행에 대해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무나 안녕,

방금 첫 여행에서 돌아왔어. 3주 걸렸는데, 정말 놀라웠어. 콜럼비아에 대해서 네가 번역했던 기사 생각나? 준군사 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젊은이 얘기 기억하지? 2주 동안 그의 마을에 머물면서 그의 부인도 만나고 그가 납치되어 죽임을 당했던 장소도 가보았어.  마을 공동체와 군사조직 간의 회담에도 참석했는데, 군인들은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같았어. 하지만 마을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는지! 그 살해당한 젊은이의 부인이 군인들을 향해 자기 남편을 죽이지 않았냐고 항의하는데 정말 감동적이더라. 버스로 9시간, 트럭으로 3시간, 그리고 보트로 2시간 강을 건너 마을에 왔어. 마을에는 15가구가 전부야. 차는 전혀 없어. 사람들은 주로 산에서 나무를 베어 노새와 배를 이용해서 도시에 팔아. 마을에는 가게가 몇 개 있고, 바도 하나 있어.  전기는 전혀 없어, 가게와 바에 발전기가 한대씩 있을 뿐.


토요일에 바에서 파티가 벌어졌어. 밤새도록 음악을 들으면서 춤도 좀 추었어. 노새들은 밖에 묶어놓고, 사람들은 고무 장화나 박차가 달린 부츠를 신은 채 살사댄스를 추었어.(여기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흙 때문에 장화를 신고 있어) 박차를 달고서도  어찌나 폼나게 스텝을 밟던지!


여기 사람들은 군대의 억압과 가난때문에 힘든 생활을 하며 살아가지만, 다른 곳보다는 좀 형편이 나은 것 처럼 보여. 농민회와 풀뿌리 조직들은 현실도 잘 인식하고 있고,  "식량주권"(식량안보 보다 더 발전된 개념)을 위한 여러가지 프로젝트들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어.  식량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큰 산업농이나 다국적 기업들이 설 자리를 없내자는 거지. 또 밀림을 보전하고 동물의 사냥을 제한하는 등 생태주의 실천에도 열심이지. 이들은 유전자 변형 종자와 농약에도 반대하고 있어.


마을에 텔레비전은 2개뿐이야. 아이들은 주로 바깥에서 치기장난을 하면서 하루종일 뛰어 놀아. 마을에서 학교를 지었는데, 정부에서 선생을 보내지 않고 있대.


회담에 가기 위해 노새를 타고 5시간 산을 올랐다 다시 5시간을 돌아오는데 엉덩이가 어찌나 아픈지. 노새 타는 건 정말 고통이었어. 고통을 참는 법과 불쌍함을 무릅쓰고 박차로 차는 법을 배워야만 노새를 탈 수 있어.


처음 들른 마을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마치 아나키스트 마을 같았어. 규모가 작아서 그런게 가능하지 않나 싶어. 급수시설, 학교관리, 전화선 등 모든 생활의 문제를 공개 회의를 통해 결정해. 내가 갔을 때에는 회의가 혼란 그 자체였어.  여러가지 내부 문제도 많아보이고. 하지만 정말 훌륭한 마을이었어.


40명의 마을사람들, 아이들과 함께 작은 보트와 트럭을 타고 도시로 나왔어. 2명의 활동가가 아직 감옥에서 재판중이야. 총 80명의 사람들과 데모를 하며 재판에 갔어. 가는 길에 보트에 있는데, 뭔가 하얀 가루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야. 작은 비행기들이 헬리콥터의 보호를 받으며 몬산토 농약을 뿌리고 있었어. 코카를 박멸한다는 명목으로 뿌린다지만 다른 작물과 숲, 가축들에도 피해가 막대하대.  

지금은 한국 호스텔에 돌아왔어. 주인이 나한테 한국말을 해서 너무 좋아!


내 여행 얘기를 듣고 싶어 할 것 같아 써보았어.

새로 생긴 인디미디아는 훌륭하던데!


잘 있어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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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햄스터

  • 등록일
    2009/02/02 10:27
  • 수정일
    2009/02/02 10:27

I

어제 어느 할인매장 지하에서 골든 햄스터를 봤어.

노오란 털이 송송 까만 눈이 수박씨같은, 고급 3D ,애니메이션(라따뚜이 같은?)에서 갖 튀어나온 듯한 이질적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런 귀여운 아이였어.

만져주고 싶은 도닥여주고 싶은 뽀뽀해주고 싶은 그리고 가지고 싶은,

내 뜰에 풀어 키우고 싶은, 물주고 싶은, 먹을 걸 주고 똥을 치워주고 싶은,

이야기해주고 옹알이를 듣고 싶은...

귀엽고 이쁜 것에 대한 단순한 욕심인지, 아니면 생명을 키우고 싶은 모성인지.

 

II

요즘, 남아공출신의 Coetzee('쿠시에'라고 읽나봐)의 Age of Iron에서 등장하는

암에 걸린 늙은 주인공 백인 여자가 남아공의 흑백분역정책 속에서 살해당하는

흑인 아이들의 죽음을 보고 "I"를 반성하는 대목이 나오지. 

부유하고 포근한 안락함 속에 살아가지면 사실은 분열되고 고립되고 죽었으나 살아있는,

살아있지만 죽지 못하는, 인형의 머리처럼 텅빈 "I",

분열된 존재의 이면에는 노예노동과 흑백차별이 존재하고 있어.

안락한 I 는 원래 그런 존재라는 거지. 날때부터 그림자들을 끌고 다니는 밝음.

어릴때 엄마 손에서 걸음마하며 찍은 사진 한장을 놓고

"사진에 찍히는 순간 삶은 내 속에서 빠져나가버렸다"고 얘기하는 대목이 있어.

그리고 삶은 영원히 사진의 프레임 밖에 존재한다고.

아직 책을 다 읽진 못했지만, 그 프레임 밖이 의미하는 건 짐작은 가. 하지만 아직 규정하진 않을래.

규정하는 순간 그림자는 프레임 밖은 또 안이 되고 밖은 계속해서 생겨나니까 양파껍질처럼...

 

III

왜 햄스터의 얘기가 남아공의 늙은 여자의 한탄으로 이어지는 걸까?

서서히 느껴지는 '나'라는 껍질의 가벼움/혹은 무거움 때문일까?

삶의 무거움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비겁하고 자신감이 없어서,

삶의 가벼움을 풍선처럼 머리에 인 채 살아가기엔 발이 땅에 안 닿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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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등록일
    2009/02/02 09:47
  • 수정일
    2009/02/02 09:47

J는 미국의 어느 시골 복음주의 공동체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고 해.

어렸을때부터 엄격한 교리에 따라 생활하며, 다른 아이들은 락과 연애를 이야기 할때

교회에서 하나님과 영적 교감을 나누며 눈물 흘리곤 했다지.

지금의 J를 보면 다소 과장스럽고 감정적인 제스쳐를 갖고 있는 다른 영어권 친구들과는 달리,

곧은 자세와 다소 냉담한 듯한 냉철한 말투가 그때의 훈육떄문이 아닌가도 싶어.

하여간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번도 키스를 포함한 성애적 접촉을 하지 않았었다니

다른 미국 아이들과는 완전 딴 세상에서 살았던 거지.

안경을 쓰고 입에 치아교정기를 낀 조용한 주근깨 왕따 모범생이 눈앞에 떠오르더라.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부모님이 '한 아이의 영혼을 구하겠다'며 남미에서 입양한 아이래.

그 아이도 J처럼 엄격한 신앙 속에서 생활하다가 복음주이 교회가 운영하는 수녀원같은 대학 기숙사에 들어갔대.

J는 세상에 눈을 번쩍 뜨고 난 후에, 동생을 그 감옥같은 기숙사에서 빼내기 위해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대.

J의 부모는 비싼 변호사를 사서 맞섰는데, 결국 J가 어르고 달래서 소송을 취하했대.

그래서 J의 동생은 해방되었어.

 

그래서 그런지, J의 말과 행동에서는 자신감과 분별력이 느껴져.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생겨먹었고, 그 속에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행복하고 의미있어 질 수 있을거라는 그 분명하고 생생한 비전.

 

그래서 나에게 필요한 건 용기와 자신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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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져가세요~~~

  • 등록일
    2009/01/23 14:55
  • 수정일
    2009/01/23 14:55

서울리데리티의 멤버였던 조슬린이

미국으로 가면서 물건들을 많이 내놓았어요.

가질 분들은 선착순!

26일까지 연락주세요!

그 이후에는 모두 어떻게든 처분할 예정이랍니다.

보니까 쓸만한 것들이 많네요.

개인적으로 서라운드 스피커와 믹서가 가지고 싶네요.

26일 오후나 27일에 가서 싹 쓸어옵시다.

 

버너가 4개 달린 가스렌지 + 오븐 (25만원 주고 산 중고)

서랍장 2 (큰 것과 작은 것)

서랍 달린 캐비넷 2 (가운데 판자를 올려놓으면 책상으로도 충분히 사용 가능)

책장

커다란 TV 스탠드 (3단 유리 수납장)

소파 겸 배드 (올리면 소파, 내리면 배드가 됨) / 이불

자전가 (덤으로 자물쇠)

세탁기

오래된 큰 냉장고 (옮겨 쓸만한 가치가 있을까 모르겠지만...)

하키 장비들: 패드, 스틱, 롤러블레이드

서라운드 음향 스피커

DVD플레이어

비디오 플레이어

작은 히터

가습기

토스터

믹서

전기밥솥

요구르트 제조기

갖가지 냄비와 후라이팬 및 주방 기구들

둥근 밥상(소)

옷가지들(여성용)

침대 (한국식으로 다리 없는 침대)

모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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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이야기

  • 등록일
    2009/01/14 10:31
  • 수정일
    2009/01/14 10:31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를 한달만에 다 읽었다.

지난번 오링스와 크레이크(국내선 민음사에서 "인간 종말 리포트"란 이름으로 작년말에 나왔다) 보다

박진감이나 깊이면에서 마음을 끄는 면이 좀 부족했지만, 역시 상상력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80년대에 상상한 여성 역압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얘기다.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를 이유로, 종교와 결합한 한무리의 엘리트들이 혁명을 일으킨다.

여성의 몸과 신분은 철저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구분되고,

'부정한' 성관계를 맺고 '합법적인' 결혼 이외의 관계를 유지한 여성들은 Handmaid(시녀) 신분으로 전락하고 이미 나이가 지긋한 고위급 간부들의 '씨받이'가 된다. 물론 간부들에게는 Wife가 있고 이들은 바깥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지만 집안일을 모두 관장하는 안방마님들이다.

시녀는 순전히 몸을 이 안방마님들에게 빌려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다.

섹스를 할때도 마님이 시녀를 뒤에서 안고 간부가 섹스를 한다. 무슨 신성한 의식처럼.

(임권택의 '씨받이'에서의 마님은 적어도 문밖에서 씨받는 순서를 읊어주는 역할을 했었다.)

시녀들은 6개월 간격으로 3명의 간부를 옮겨 다니며 아이 낳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식민지"에 버려져서 핵폐기물 등을 치우는 일을 하게 된다.

부정한 관계를 맺거나 지하혁명세력에 가담한 것이 밝혀지면 공개처형을 당하는데,

그때에는 그 동네의 모든 시녀들이 죄수의 목을 맨 밧줄을 당기게 되어 있다.

이런 반란자들의 시체는 며칠동안 사람들에게 전시된다.

끔찍한 식민지로의 추방과 처형의 공포로 시녀들은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며 또 의심받으며 산다.

결국 주인공 시녀 오프레드는 지하조직으로 탈출하고 육성으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게 되고

그 기록이 후대에 발견되어 '시녀이야기'로 문서화된다.

에필로그는 2100년대 후반에 교수들이 모여 이 시기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소위 '정치적 중립성'에 입각한 아카데믹한 연구 발표는 좀 우스꽝스럽고 풍자적으로 느껴진다.

아쉬운 건 읽는 내내 이야기가 너무 우울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오링스와 크레이크(인간 종말 리포트)는 훨씬 이야깃거리가 풍부하고 역동적이다.

아마도 애트우드의 20년 동안의 발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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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항의 집회

  • 등록일
    2009/01/14 09:48
  • 수정일
    2009/01/14 09:48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고 빈집에서 imc모임을 한다길래,

일이 끝나자마자 광화문으로 향했다.

약 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도착했을때는 이미 집회가 중반에 접어들어 있었다.

지난 광우병 촛불집회 때 이후로 경찰은 몇명만 모였다 하면 집회를 빙 둘러싼 고립장벽을 만든다.

이번에도 앞 뒤 옆으로 경찰과 경찰차로 꽉 막혔다.

너무 오바도 너무 오바지만 뭐 이명박 정권 이후로 상식적인 일이 있었나?

순수한 촛불행사에 "정치적 발언"을 한다며 해산하란다. 코미디가 따로 없지.

요즘 왠갖 다른 나라에서는 10만 20만씩 모여드는 집회에 고작 200명 모인 것을.

미네르바 구속도 그렇고, 교사들을 해직한 것도 그렇고,

경찰이 친 '바리케이트'는 우리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그들 정부와 상위 3프로도 안되는 부자들과 기득권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신의 눈으로 봐도 아주 추하고 우스꽝스럽게 말이다.

 

BBC라디오에서는 가끔 이스라엘 주민과 팔레스타인 주민을 번갈아가면서 인터뷰한다.

한 아미의 엄마라는 어느 이스라엘 여성은, 하마스의 폭격으로 이스라엘은 아이들을 shield(보호한다)하지만 하마스는 아이들을 shield(방패) 삼아 자기들을 보호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정부가 늘쌍 떠들어대는 소리.

하지만 누가 인질범을 죽이려고 인질을 쏘는가?

결국 하마스에게 겨냥한 폭격으로 아이들이 죽어도 괜찮다는 논리인셈이다.

어쩔수 없다. 결국 너희들은 우리가 쫓아내야할 다 같은 팔레스타인들 아닌가하는 내심이 숨어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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