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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정책 관련 도서 서평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2825
대안적 도시성장 모델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참세상, 배성인(편집위원) 2011.08.23 16:34)
[신간안내] 『저성장 시대의 도시정책』(조명래 외 지음, 한울, 2011)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도시는 인간의 허위의식과 조작된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도시의 인간들은 이성의 오만함과 편리함으로 무장하여 스스로 파괴 종결자가 되어 자연과 인간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도시의 인간은 살아있으되 죽은 것이며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하는 좀비가 된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 도시는 개발과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정책을 펼쳐왔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더 이상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이제 도시인들은 나쁜 도시에서 불행한 시민으로서의 삶을 지속하게 되었다. 특히 서울은 권력과 자본의 집중도가 매우 강하여 한국사회 전체를 뒤 흔들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구조적 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좋은 도시를 만들어서 행복한 시민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도시 파괴의 근본 원인인 재개발을 멈추고 성장을 늦추면 이러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조건에서 도시정책을 펼쳐야 하는데, 과연 정책적 변화를 통해서 가능할 까? 이러한 문제의식은 도시에서의 주체형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며, 최근 움직이고 있는 ‘도시 주인 선언’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성장 시대의 도시정책』은 그런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람 중심 도시’ 개념에 따른 도시개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저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특히 2010년 6·2 지방선거 이후 새롭게 대두된 ‘사람 중심 도시’ 개념에 따른 도시개발을 제시하고 있다.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의 화두는 뉴타운이나 도시개발이 아닌 복지와 교육이었다. 무상급식, 보육, 사회적 기업과 일자리, 생태와 환경은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까지도 거역하기 어려운 정책영역이 되어 버렸다. “콘크리트 예산에서 사람 예산으로”가 설득력 있는 구호로 다가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야당은 압승했고, ‘사람 중심 도시’가 미래 도시비전을 압축하는 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방선거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몇몇 연구자들에게 걱정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른바 새로운 도시정책을 공약하고 당선된 수많은 단체장이 실제 어떤 정책으로 성공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과거 개발주의 열풍이 불 때는 그저 조감도만 내놓고, 인허가만 챙겨 봐도 도시의 변화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조건에서 도시정책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부동산 경기 침체나 산업 침체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성장의 한계 혹은 저성장 시대의 징후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도시정책에 대한 기대는 커졌지만, 실제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이 있느냐에 대한 걱정이었다. 자칫 기대만 부풀려 놓았다가, 결국 과거 무분별한 개발패러다임이 더 나았다는 실망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커졌다.
필자들이 논의한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 지금 우리나라 도시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인구, 산업, 개발여건 등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따라서 우리 도시정책의 토대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적어도 상당기간 저성장 단계에 들어설 수밖에 없고, 이는 종전과 같은 개발주의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서둘러 대안적 도시성장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이미 바뀐 상황을 과거의 수단으로 대처하는 모순에 빠진다는 문제의식이었다.
두 번째는 그 같은 새로운 도시모델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산업에서부터 도시계획, 문화, 인권, 공동체에 이르는 각 분야에서 개혁적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이미 6·2 지방선거 과정에서 이런저런 ‘좋은 모델’과 사업도 제안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실제 실행할 수 있는 지방정부 조직이 있는 마당에 보다 현실감 있는 과제를 마련해야 하는 고민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실제 지방행정과 지방정치에 몸담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현장에서의 실험과 경험을 함께 고민하는 과제가 있었다. 아직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어떤 문제의식과 정책으로 새로운 도시패러다임을 실천할 것인가 하는 논의였다.
 
목 차
서장_저성장과 도시 패러다임의 전환
제1부 진단과 방향
제1장 21세기, 좋은 도시의 조건
제2장 도시발전 패러다임 변화와 성장편익 공유 도시
제3장 6·2 지방선거에 나타난 진보적 도시정책의 과제
제2부 분야별 평가와 제안
제4장 대도시 경제의 전환과 대응
제5장 시민과 지역 친화적 복지를 찾아서
제6장 회색의 세상, 녹색의 도시
제7장 사람 중심의 도시개발이 가능하다
제8장 성장기 택지개발의 후유증과 치유: 경기도 사례
제9장 진보 단체장을 위한 도시계획 십계
제10장 거꾸로 가는 자치재정: 지방이 진짜 주체가 되어야
제11장 주민의 인권과 권리를 보장하는 참여도시 만들기
제12장 문화예술로 여는 사람 중심의 도시
제3부 외국의 경험
제13장 혁신 지자체는 가능한가: 일본의 경험과 교훈
제14장 풀뿌리 진보정치의 가능성: 광역 런던 시의회 사례
제15장 시장지배 경제에서 사회중심 경제로: 영국과 이탈리아의 사회적 기업
제4부 현장과 과제
제16장 사람이 반가운 도시를 위한 거버넌스: 해피 수원 만들기
제17장 풀뿌리 정치와 개발욕구: 더불어 사는 전원도시 과천의 딜레마 풀기
제18장 진보집권 도시의 성공전략: 두바이 인천의 신화 깨기
제19장 사람중심의 생활구정: 서울시 성북구의 변신
제20장 더 좋은 도시, 더 행복한 시민을 위한 기초자치단체장의 과제 

 


 

전원도시보다 아파트촌이 생태적이다!? (프레시안, 강현수 중부대학교 교수, 2011-07-22 오후 5:43:18)
[프레시안 books]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가 쓴 책 <도시의 승리>(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 해냄출판사 펴냄)는 흥미로우면서도 논쟁적인 내용을 가득 담고 있다. 글레이저가 말하는 핵심 주장은 이 책의 영어판 부제(How Our Greatest Invention Makes Us Richer, Smarter, Greener, Healthier, and Happier)에 있다. 즉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도시가 인류를 더 부유하고 영리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있으며, 거기다 환경 보호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장 최근에 나온 도시 예찬론의 집대성이다.
현재 선진국 인구의 대부분과,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가 도시에서 살고 있다. 인구 대국 중국과 인도, 나머지 개발도상국에서도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인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도시화의 진전과 함께 도시 규모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인구가 수백만이 넘는 대도시가 증가하고 있고, 인구 수천만 명에 달하는 거대 도시권도 세계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도시화 및 도시 규모 확대 현상을 걱정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글레이저는 오히려 도시화 현상을 인류 번영과 행복의 열쇠라고 여긴다.
지금으로부터 200~300년 전 쯤 서구에서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가 막 시작되던 때부터 도시화 현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했고, 이러한 시각 차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에베네저 하워드 등은 도시화의 부정적 측면을 우려하면서 그 대안으로 자연 회귀나 소규모 전원도시를 주창했던 사람들이다. 반대로 르 코르뷔지에, 제인 제이콥스 등은 대도시 생활을 찬미하고 대도시에 걸 맞는 공간 형태를 제안했다. 이 책 <도시의 승리>를 통해 글레이저는 도시화 및 대도시 옹호론 계보의 젊은 선봉장이 되었다.
대도시 옹호론의 선봉 역할을 맡은 글레이저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한 방대한 실증 통계 자료이다. 글레이저는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입증하고자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도시들의 다양한 현장 자료들을 활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의 막연한 상식을 숫자로 재확인해 주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우리들의 기존 상식을 뒤엎는다.
고층 건물로 가득 찬 대도시가 숲 속에 둘러싸인 전원 주거지보다 더 환경 친화적이라는 글레이저의 주장은 우리 대부분의 상식을 뒤집는 주장이다. 저자의 탄탄한 경제학적 논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방대한 통계 자료, 거기에 저자의 재치와 유머가 있는 문체가 더해져서 이 책에 담겨있는 많은 내용들이 대중들에게 큰 설득력을 가진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참으로 많지만, 핵심 주장과 그 정책적 시사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먼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장은 이 책의 제목처럼 도시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도시가 승리하는 이유는 도시가 혁신과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지식의 공동 생산이라는 협력 작업이 가능한 곳이다. 가난한 사람도 농촌에서는 얻지 못할 기회를 도시에서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도시의 성장을 억제하는 규제 정책이나 이민 반대 정책들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 소기업들이 많고 교육을 많이 받고 숙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도시들은 번창하지만, 반대로 단일 산업에만 편중되어 있고 교육 수준이 낮은 비숙련자들이 많은 도시들은 쇠퇴한다. 따라서 도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람, 글레이저의 용어로 인적 자본에 투자해야 한다. 양질의 교육에 투자하는 것은 도시의 성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쇠퇴하고 있는 도시에서 사람에 투자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는 건물이나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셋째, 도시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교외 지역으로 나지막하게 확산되는 저밀도 교외 지역보다, 높은 고층 건물로 구성된 고밀도 도시가 사람들 사이의 접촉을 원활하게 하여 도시의 활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더 환경 친화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외화를 촉진하는 정책보다 도시의 밀도를 높이고 고층화를 촉진하는 정책이 더 바람직하다.
넷째, 성장하는 도시에서는 개발을 억제하지 말고, 쇠퇴하는 도시에서는 인위적인 부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도시의 흥망성쇠에 괜히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굳이 개입하려면 쇠퇴하는 도시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정책을 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지원하는 정책은 좋은 정책이지만, 가난한 장소를 지원하는 정책은 나쁜 정책이다.
글레이저의 이러한 주장은 과연 옳은가?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도시들이 그의 주장을 적극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는 기본적으로 시장 경제를 중시하되,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도시 정책에서 공공 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경제학자이다. 무조건 자유 시장의 원리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와는 입장이 다르다.
그렇다고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자도 아니다. 미국적 기준으로 보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온건한 보수주의자에 속한다. (그러나 만약 글레이저가 한국에서 활동했다면 아마 진보 진영에 속할 것이다. 워낙 우편향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좌파나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도 있다!) 그는 자유로운 시장만으로는 결코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도시에서 불필요한 규제나 장소에 대한 정부 지원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한다.
나는 이 책에 실린 글레이저의 많은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시장주의자의 입장에서, 콘크리트에 대한 투자 대신, 사람에 대한 투자가 필요함을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이 책의 가치가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글레이저는 기본적으로 시장 원리를 강조하는 경제학자이다. 식수 공급, 위생, 대중교통, 치안 등의 영역에서는 공공의 적극적 개입을 인정하지만, 나머지 도시 정책 영역에서는 수요와 공급에 기초한 자유 시장 원리를 옹호한다. 그래서 공공이 행하는 토지, 건축, 환경 규제 등을 비판한다.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이 부분에 있다.
특히 가난한 장소에 투자하지 말라는 글레이저의 주장에는 반대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른바 '장소의 번영' 대 '사람의 번영' 논쟁이 진행된 바 있다. 가난한 장소를 돕지 말고 대신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4대강 사업 같은 토건주의가 판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 거주 장소와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경제, 사회, 인간관계는 거주 장소와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거주 장소를 포기하고 새로운 장소로 옮기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낙후 지역이나 쇠퇴 지역을 방치하자는 주장은 그 곳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 상당수를 방치하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또 도시들의 지나친 흥망성쇠를 용인하는 것은 쇠퇴 지역에 이미 투자된 하부 구조가 사용되지 않음에도, 성장 지역에 신규 하부 구조를 새로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자원의 낭비를 초래한다. 그래서 미국의 경우 대체로 보수주의자들이 사람에 대한 지원을 주장해 왔는데 비해, 진보주의자들은 장소에 대한 지원이 사람에 대한 지원과 동시에 병행되어야 함을 주장해 왔다.
이 책에서 말하는 도시의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것, 그래서 교외 지역은 도시에 속하는 것인지 아닌지가 불확실하다는 등 몇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내용들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해도 되는 사소한 것들이다. 하지만 꼭 하나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에서 전 세계의 많은 도시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의 주장은 미국 도시들에 대한 연구나 실증 자료에 주로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미국적 맥락에서 나온 이 책의 논리와 주장이 하버드 대학 교수라는 글레이저의 권위에 기대어 미국과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이 상이한 우리나라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될 가능성이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우리나라에서 서울의 재개발 재건축 적극 추진론자, 지역 균형 발전 반대론자, 수도권 환경 규제 반대론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견강부회하는데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정치권력은 워싱턴에, 금융 자본은 뉴욕에, 가장 좋은 대학은 보스턴이나 그보다 더 작은 도시들에, 그리고 로스엔젤리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 나름대로 탁월한 경쟁력을 갖춘 여러 대도시들이 공존하면서 도시 간 공평한 경쟁이 가능한 미국에서 파생된 글레이저의 주장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권력이 모두 서울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는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되기는 곤란하다.
녹지 속에 듬성듬성 세워진 미국의 저밀도 도시에서 고밀도를 촉진해야 한다는 글레이저의 주장이, 그렇지 않아도 전체 주택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로 지어져 가뜩이나 고밀도인 우리의 대도시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저소득층 저층 주거지를 중산층을 위한 고밀도 아파트로 재개발하자는 주장으로 맥락 없이 연결되어서도 곤란하다.
국토 면적, 인구 밀도, 도시 간 계층 구조, 도시 내부 건축 밀도, 공공 예산 배분 구조, 복지 전달 체계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미국에서 나온 주장을 우리가 반면교사로 경청할 수는 있지만, 무조건 모방하거나 수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글레이저의 말대로 성공한 도시들은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무척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두꺼운 책이지만, 전 세계 수많은 도시들의 셀 수 없이 많은 도시 문제들의 해법이 이 책 한권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이왕이면 이 책에 담긴 많은 주장들의 시시비비를 하나하나 가려본다는 태도로 꼼꼼하게 읽으면 더 좋을 것이다.
글레이저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저자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은 많은 공부거리를 던져줄 수 있다. 그래도 이 책의 주장에 무언가 허전함과 거부감을 느낀다면 다음 세 권의 책을 함께 읽기를 권한다.
이 책의 저자가 속한 대도시 옹호론 계보의 대선배이지만, 뉴욕에서 재개발 반대 투쟁에 앞장섰던 노전사(老戰士) 제인 제이콥스가 지은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유강은 옮김, 그린비 펴냄), 이 책의 저자 글레이저와 다른 이념적 입장을 가진 마이크 데이비스가 지은 <슬럼, 지구를 뒤덮다>(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 및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엮은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펴냄)를 함께 읽는다면, 이 책에 담긴 주장이 놓여 있는 정치경제적 위치, 이 책 주장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기가 좀 더 수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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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85519.html
휘황찬란 건물 지으면 도시가 번성한다고? (한겨레, 김성홍/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20110701 20:51)
다양한 이민자·교육경쟁력…우수 인력 유인이 성공 비결
작은 기업 역동성 성장촉진…경제학적 분석으로 통념 깨
〈도시의 승리〉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해냄·1만8000원

지난 10년 동안 세계 언론과 평단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건축물을 꼽는다면 단연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번쩍거리는 금속판이 이리저리 요동치는 이 미술관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도시 조각품이다. 쇠퇴한 산업도시 빌바오를 단번에 전세계의 이목을 끌게 한 이 기이한 미술관은 도시 르네상스의 전형이 되어 버렸다. 미술관을 보려고 빌바오를 찾는 관광객만 한해 100만 명에 이른다. ‘구겐하임 신드롬’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과연 이처럼 하나의 건축물이 쇠퇴하는 도시를 단번에 부활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야심을 품은 정치인이라면 한번쯤 도전해 볼 문화전략이며, 건축하는 사람들로서도 무척 반길 일이다. 그런데 구겐하임처럼 매년 몇 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세운 영국 셰필드의 문화센터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실패했다. 빌바오에 대한 환상, ‘거대건축 지향주의’의 패착은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근사한 새 건물은 경관을 멋있게 보이게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도시의 근본 문제는 치유하지 못한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의 승리>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도시를 살리는 것은 건축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숙련된 사람이며, 세계경제와 연결된 산업이다. 500쪽이 넘는 묵직한 이 책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뒤져 본 곳은 참고문헌이었는데, 젊은 경제학자 글레이저가 도시의 부침을 분석하기 위해 어떤 이론적 지평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놀랍게도 현대 자본주의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건너가야 할 길목인 앙리 르페브르, 데이비드 하비, 에드워드 소자, 프레더릭 제임슨과 같은 후기 마르크시스트 연구자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글레이저의 뒤에 거목처럼 버티고 있는 스승은 1961년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쓴 제인 제이컵스다. 그는 도시계획가도 학자도 아닌 행동하는 언론인이었다. <도시의 승리>는 현대판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으로 읽힌다. 다만 제이컵스가 체험에서 우러나온 분노와 감성으로 호소했다면, 글레이저는 방대한 자료, 치밀한 분석, 정연한 논리로 무장한 채 조목조목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도시이며, 성공한 도시의 공통점은 똑똑한 사람을 많이 끌어들이는 곳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도시는 일자리를 만들고, 다양한 먹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놀거리를 선사한다. 이런 시각에서 글레이저는 도시의 빈곤마저 살아 꿈틀거리는 도시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책 전반에서 글레이저는 ‘세계화’ 옹호론자의 모습을 띤다. 경제의 장벽은 없애고, 다양한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교육경쟁력을 높여 인적 잠재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글레이저의 사유엔 도시정부가 현명한 정책을 견지한다면 도시는 윤활유를 친 수레바퀴처럼 잘 돌아갈 것이라는 낙관론이 깔려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제인 제이컵스와 닮았다.
글레이저의 큰 그림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지만, 화석에너지의 위기의 시대에 미래 도시에 대한 논리적 전개는 흥미롭다. 첫째, 숲과 전원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연을 즐기는 사람들은 도시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사실이다. 전원도시의 건물은 친환경기술로 지었는지 모르지만 일터를 오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더 많은 기름을 길에다 쏟아붓는다. 탄소배출량을 줄이려면 사람들은 전원에서 나와 도시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 밀집된 도시일수록 정보기술이 대면접촉을 촉진해 더욱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도시의 밀도가 인간의 창조성과 직결되므로, 과거의 문화유산을 박제화하지 말고 필요하다면 도시 안에 과감한 개발을 감행해야 한다는 경제학자다운 주장도 편다.
둘째, 도시는 작지만 패기 있는 기업이 경쟁할 때 번성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거대한 기업들은 단기적으로는 생산적일 수 있어도 장기적 성공에 필요한 역동적 경쟁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자동차산업의 신화 도시 디트로이트의 몰락에 글레이저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문제는 글레이저가 진단한 자동차 중심의 미국식 라이프스타일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개발도상국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하지만 미국인은 중국이나 인도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줄이라고 설득할 자격이 없다. “에스유브이(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 운전자들의 나라가 자전거 운전자들의 나라에게 모페드(모터 달린 자전거)를 몰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387쪽)처럼 자신조차 위선적이라고 글레이저는 실토한다.
<도시의 승리>라는 근사한 제목에 끌리는 독자라면 두 가지를 유념하길 권한다. 첫째, 화려한 도시 이미지를 기대했다면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꼼꼼한 자료와 치밀한 논리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스스로 상상력의 세계에 빠져들라. 둘째, 이 책에서 한국적 해답을 얻고자 하는 조급함을 잠시 접으라. 경제학자로서의 당연한 한계이겠지만 글레이저의 이론을 도시건축의 현실에 적용하려면 분명 논박과 수정이 필요할 듯하다.
해박한 경제지식으로 세계의 수많은 도시들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폭넓게 들여다본 <도시의 승리>야말로 ‘통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반가운 책이다.

 


 

대안 없이 생떼? 나라 꼴 이 지경인 게 누구 탓인데!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 2011-04-15 오후 6:38:11)
[프레시안 books] 박용남의 <꾸리찌바 에필로그>
누군가의 입에서 '대안'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들의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활기를 띠었던 분위기는 가라앉는다. 먼저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항변을 하지만 이미 이완된 분위기는 회복 불능이다. 결국 대화는 흐지부지되고, '대안신공(神功)'으로 좌중을 압도한 이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론도 시민단체도 '대안 강박증'에 걸렸다. 대안을 말하지 못하면 정당한 문제제기도 못할 상황에 처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툭하면 "대안 없는 비판"이라는 딱지가 붙여지면 생떼만 쓰는 집단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왜 대안을 언론과 시민단체가 말해야 하는가?
폭력을 독점하고, 세금을 거둬들일 권한을 행사하도록 시민이 용인한 정부야말로 온갖 문제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고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그런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납득할 만한 설명이라도 내놓는 게 정부의 할 일 아닌가? 문제를 제기한 측이 대안도 내놓아야 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無정부!)을 도대체 언제까지 용납해야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참에 박용남의 <꾸리찌바 에필로그>(서해문집 펴냄)를 읽었다. 한 시민운동가가 10년 이상 혼신의 힘을 다해 꼼꼼히 조사하고 치열하게 연구한 온갖 대안을 줄을 그어가며 읽다 보니 갑자기 분통이 터졌다. '아니, 도대체 이 정부는 어디까지 알려줘야 한다는 말이야!'
희망의 도시 vs 절망의 도시
박용남은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1년 1월, <꿈의 도시 꾸리찌바>(녹색평론사 펴냄)를 펴냈다. 이 책을 통해서, 사람들은 당시만 하더라도 지구 반대편의 덩치 큰 빈국으로만 알고 있었던 브라질에 '도시의 미래'를 예고하는 '희망의 도시' 꾸리찌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도시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 버스 교통 개혁의 모델로 삼으면서 더욱더 유명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 등이 이 도시를 다녀왔다. 꾸리찌바 시도 "지난 10년 동안 한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시찰단을 맞았다"고 밝힐 정도다. 그러나 정작 이 도시를 국내에 소개한 박용남은 이런 관심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일부 사람들은 꾸리찌바에서 정말 배워야 할 것, 즉 도시 관리 철학과 행정의 원칙은 배우지 않고, 단순히 꾸리찌바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을 우리나라와 비교하면서 적용하기 어렵다는 논리를 펴거나 맹목적인 비판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불과 이틀에서 닷새 정도의 짧은 일정으로 현지를 방문하고 마치 꾸리찌바 전문가가 된 것처럼 행동했죠." (89쪽)
꾸리찌바가 소개된 지 10년이 된 지금 한국 도시의 모습을 보면, 이런 지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꾸리찌바가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낳는 도시 대중교통 모델을 제시했음에도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은 물론이고 용인, 의정부 등 전국의 도시에서 지하철, 경전철 등과 같은 감당할 수 없는 도시 철도 사업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하도 참담해서 헛웃음만 나온다.
한 시민운동가가 지구 반대편까지 쫓아가서 대안을 마련해 와서 10년간 국토해양부, 환경부, 지방자치단체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500회 이상의 강연을 했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움직이는 정치인, 공무원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희망의 리더십 vs 허망의 리더십
박용남이 '도시 혁명'의 조건으로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꾸리찌바의 변화를 이끈 자이메 레르네르, 콜롬비아 보고타 시장을 지낸 엔리케 페냐로사 등을 소개하면서 주민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도시를 창조할 리더십을 요청한다. 그런 리더십은 지방자치단체장을 꿈꾸는 한국의 리더십과는 천지차이다.
"자이메 레르네르는 우리나라의 단체장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도시는 문제가 아니고, 문제의 해결책이다"라고 믿는 레르네르는 예산에서 뒷자리 0을 하나 뺄 때 창의성이 시작되고, 0을 두 개 빼면 더욱 좋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도시 문제는 규모의 문제가 아니므로, 예산도 문제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103~104쪽)
실제로 레르네르는 2003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전역을 둘러보고 나서 "당시 환율로 약 3000억 원만 있으면 서울 전역의 교통 체계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레르네르의 확신을 보자면, 지금 한국의 리더들에게 없는 것은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를 풀 대안이 아니라, 의지가 아닐까?
당장 박용남이 이 책에서 꾸리찌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등의 예를 들며 소개하는 온갖 대안은 서울, 인천 등 수도권은 물론이고 대전, 대구, 부산, 광주와 같은 대도시 더 나아가 전주, 목포, 진주 등과 같은 중소 도시에서 곧바로 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는 브라질의 꾸리찌바를 놓고 "선진국은 역시 달라" 하는 변명을 늘어놓을 것인가?
"한국의 대도시, 소도시와는 규모가 다르잖아!" 이런 핑계도 궁색하다. 꾸리찌바는 인구 약 185만 명의 대전(약 150만 명)보다 다소 큰 대도시이다. (꾸리찌바의 위성 도시까지 염두에 두면 인구는 약 326만명이다!) 또 생태 도시로 유명한 프라이부르크는 인구 약 22만 명의 전형적인 중소 도시이다.
지금, 구명정을 준비하자!
박용남은 이 책에서 경제 위기, 기후 변화, 석유 부족 등의 3중고를 극복하기 위한 도시 혁명의 시급함을 역설한다. 혁명의 수단은 여러 가지다. 외부로부터의 경제 위기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지역에 뿌리를 박은 경제 체제가 마련되어야 한다. 시민의 일상생활을 생활협동조합이 지탱하는 이탈리아의 볼로냐나 시민의 상호부조에 기반을 둔 '지역 화폐'가 활성화된 영국의 레스터는 경제 위기가 닥쳐도 시민의 삶이 해체되는 일은 겪지 않았다.
태양 에너지와 같은 지역 에너지에 기반을 둔 프라이부르크는 설사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나더라도 전기를 제한 공급해야 하는 상황은 피할 것이다. 또 지역에서 생산한 먹을거리를 소비하는 구조가 마련된 곳이라면 외부 충격으로 먹을거리 공급이 제한되더라도 최소한 배를 곯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시민들의 삶이 자동차 대신 저렴하고 효율적인 대중교통에 맞춰져 있는 도시라면 설사 석유 부족 사태가 오더라도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시민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자전거인 네덜란드의 그로닝겐, 독일의 뮌스터, 덴마크의 코펜하겐 같은 도시와 자동차를 타지 않으면 슈퍼마켓도 갈 수 없는 미국의 도시에 동시에 석유가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절박한 심정으로 변화를 모색 중이다. 향후 25년 내에 석유, 천연가스 소비량을 50% 줄인다는 목표를 세우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미국의 포틀랜드도 한 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포틀랜드 시민의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으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변화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의 관섭 없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연료 사용량을 줄여서 석유 의존도를 낮춰야 합니다. 그 시점이 바로 지금이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삶은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10쪽)
이제 대안 타령에 주눅 들지 말자. 대신 이 책을 읽고서 조용히 위기의 순간을 대비하자. 배가 침몰할 때, 미리 구명정을 챙겨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목숨까지 구하는 법이니까. 설사 그 이웃이 얄밉게 "대안이나 내놓으시지!" 하고 지청구를 놓았던 이라도 말이다.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레디앙, 2011년 01월 09일 (일) 15:53:33 이정신 / 출판팀)
[새책] 『도시에 대한 권리』…진정한 지역 발전을 위해
출판사 책세상의 우리시대 문고의 125번 째 책 『도시에 대한 권리』(강현수 지음, 6900원)는 프랑스의 진보적 지식인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에게 빚지고 있다. 드 세르토, 데이비드 하비 등과 더불어 도시·공간·일상 등의 주제를 주요한 사회학적 혹은 운동의 담론으로 환기시킨 르페브르가 “68운동 당시 주장한 ‘도시에 대한 권리’의 개념과 그 발전 과정을 토대로 해외에서의 사례와 국내외 현실을 돌아보고 우리 도시의 미래를 모색하는 책”이라는 것이 출판사의 설명이다.
용산 참사가 벌어진 지 2년이 된 지금, 과연 ‘진정한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용산뿐 아니다. 성미산이며 ‘작은 용산’이라 불리는 두리반, 수많은 재개발 난민들. 주거민의 생존권과 영업권보다 국가와 자본의 개발권이 우선시 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에, 이 책은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개념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도시에 대한 권리란 ‘도시 거주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하는 보편적 권리로, 국가 단위가 아니라 도시 단위에서 보장되며 시민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권리 개념’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식수, 음식, 위생에 대한 권리는 물론이고 적절한 주거와 직업, 대중교통, 안전, 의료, 복지, 교육에 대한 권리가 포함되며, 주민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도시 행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된다.
진보적인 공간환경 이론을 고민해 온 몇 되지 않은 ‘한국공간환경학회’에서 활동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를 중심으로 그 이후 생겨난 다양한 도시권 이론을 소개하고 브라질의 도시법, 일본의 혁신 자치제 등 주민들의 참여로 이뤄낸 실천 운동과 정책들을 설명하며, 이를 통해 한국 도시 권리 운동의 발전 가능성과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보고 있다.
“도시나 지역에서 진정한 발전이란 과연 무엇이며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평생 화두로 삼아 공부하고 있다”는 이 학자가 소개하는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개념이 당연한 상식이 되기 위해 단 한 명의 독자라도 더 많이 이 책을 집어 든다면 좋겠다. 특히 국내에서 도시와 지역과 관련된 운동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서 많은 이론적, 정책적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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