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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교수 [경향신문 신년 기획 - 2013년을 말한다](1)

 

 

[신년 기획 - 2013년을 말한다](1) 지그문트 바우만 교수 (경향, 인터뷰 진행 | 이택광 경희대 교수, 2012-12-31 22:22:00)
ㆍ“자본주의 편리성에 대한 실망과 불만 커지며 ‘불편한 대안’ 나올 것”
ㆍ“정치적 선택엔 책임이 수반, 따라서 SNS는 정치를 대체할 수 없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올해로 88세가 되는 노학자에게 e메일을 보낸 까닭은 간단하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인 그에게서 2013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지그문트 바우만 교수는 근대사회에 대한 독특한 입장을 피력해온 사상가로서, 근대의 문제점을 넘어서기 위한 실천 지침을 거듭 이야기해온 학자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에서 향후 5년의 정부를 선택했던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부각되고 있는 화두는 ‘민생’과 ‘민주화’라는 단어로 축약할 수 있는 근대의 문제이다. 근대를 미완으로 간주하고, 완벽한 근대사회를 호명했던 것이 지난해 치러진 대선의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난 대선의 과정은 미래전망을 제시하기보다,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고 그것을 다시 살려내려는 의지로 충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부의 출범은 이런 문제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바우만 교수가 지적하는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의 현기증이 과거지향적인 투표를 불러왔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우만 교수가 말하는 ‘액체성’이라는 것은 우리 삶의 기준이 소멸하고, 국가기능 약화로 인해 시장의 장악력이 강해지는 일련의 현상을 의미한다.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던 국가 장치가 축소되고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는 결과는 진보의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지난 대선처럼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정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하게 될 위험 부담조차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이다. 바우만 교수의 분석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걱정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지표를 제공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 오프라인의 즐거움을 지키는 것은 이제 낡은 것으로 간주돼
상호협력과 우애로 가득 찬 인류의 세계는 사라져
▲ 2012년 대선 결과에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한국 국민들은 책임져야
향후 어떤 선택이 다시 주어졌을 때 교훈으론 남을 수 있을 것

처음으로 던진 질문은 그의 분석을 관통하고 있는 ‘액체 근대’라는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바우만 교수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본다면, 근대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왜 액체성이라는 개념이 중요한지 궁금할 법했다. 바우만 교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오늘날 인간의 조건을 표현하는 적절한 용어로 ‘액체 근대성’을 이야기했는데, 액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 중 하나가 ‘고체’에서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액체는 자신의 형체를 오랫동안 보전하지 못한다. 아주 약한 힘에도 액체는 금방 바뀐다. 액체화라고 할 수 있는 고체의 ‘용해’는 모든 근대성을 규정하는 항구적인, 아마도 결정적인 속성일 것이다. 최초의 단계에서 근대성은 이전 시대에서 물려 받은 구조와 제도를 녹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근대성은 (자신의 속성 때문에) 최초의 ‘고체’ 단계에서 충분히 고체화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이런 덜 고체적인 고체성을 새로운 것, 훨씬 잘 기획되고 구성된, 변화하지 않고, 인간의 통제가 항구적으로 통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으며 수정 가능한 것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액체 근대’의 시기는 ‘고체성’ 자체가 불리한 것처럼 보이면서 경험되고 있기 때문에 고체의 구조와 제도는 용해되어 버린다. 유동성, 변화무쌍함, 유연성이라는 속성들이 바람직한 사물의 자질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선택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미래를 저당 잡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멈추지 않는 것, 이런 개념들이야말로 액체 근대적인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설명을 들어보면, 바우만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액체성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흐르는 속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액체성은 근대의 속성이고, 이런 특징은 흥미롭게도 최초의 단계에서 충분히 덜 고체적인 것을 훨씬 더 통제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등장했다는 것. 근대성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이 통제가능한 것으로 상정된 것이 바로 시장이다. 그러나 이런 시장의 유동성은 역설적으로 근대의 고체성을 ‘불리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이 문제는 소비주의라는 새로운 삶의 양식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바우만 교수는 소비와 소비주의를 서로 구분하고 있다. 이 구분의 의미를 물어봤다.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는 그들의 환경과 신진대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모든 유기체는 살아남기 위해 소비해야 한다. 소비에 대한 이런 관점은 자연적이고 항구적인 생명의 속성에 대한 새로울 것 없는 관찰의 결과이다. 그러나 소비주의는 역사적인 현상이다. 특정한 문화가 수없이 탄생했고 지금 현재에도 한 곳에서 다른 지역을 점유하면서 퍼져나가고 있다. ‘소비주의’라는 용어는 무엇보다도 소비의 행위를 어마어마하게 의제를 설정하고 패턴을 결정하는 수준까지 올려 놓고 있다. 말하자면, 상품-고객의 관계라는 패턴을 인간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까지도 주형해내고 있는 것이다. (소비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계는 잠재적인 소비 대상을 보관하고 있는 거대한 저장소처럼 보인다. 쾌락-만족-능력이라는 관계설정은 사물의 효용성을 위한 유일한 척도이다. 우리는 취득한 소비의 대상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 쾌락-용량이 모두 소진되거나 시장에 나타난 다른 대상보다 쾌락의 가능성이 떨어지는 순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 소비의 대상을 폐기해버린다. ‘소비주의’라는 개념은 협소한 전통적인 개념에 갇힌 소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소비시장과 쇼핑객들에게 제공되기 위해서 발전한 태도와 전략에 물들고 침윤되어 있는 우리 삶의 양식을 형성하는 총체성을 의미한다.…”
소비는 살아가기 위해서 지속시킬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생명의 속성이고, 소비주의는 특정한 역사적 현상이라는 말이다. 거칠게 말해서 소비가 자연적인 것이라면, 소비주의는 인공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다. 바우만 교수는 단순하게 화폐를 매개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품의 교환행위에 소비주의 양상을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의제를 설정하고 삶의 패턴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의 총체성으로 보고 있다. 인간 관계뿐만 아니라, 세계와 인간이 관계 맺는 그 방식까지도 소비주의가 결정한다는 말이다. 소비주의는 일종의 패러다임처럼 우리 삶의 가치를 지배한다. 소비의 관점에서 본다면, 특정 대상을 오래 소유해도 무방하지만, 소비주의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훌륭한 소비자는 특정 대상을 빨리 빨리 교체하는 ‘얼리어답터’이다. 바우만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소비주의에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한다. 사물의 효용성을 ‘쾌락-만족-능력’에 맞춰 판단하기 때문에, 소비주의는 소비주체에게 자기해체의 길을 걷게 만든다. 말 그대로 아이러니한 소비주체이다. 과연 이런 근대가 강제하는 소비주의적인 주체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자본주의의 논리는 지배적인 것을 바꾸는 것은 고사하고 그 논리에 광범위하게 적응해버린 주체성이 가질 수 있는 다른 대안의 가능성도 효과적으로 소멸시켰다. 물론 이 소멸이 폐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소비주의적인 다양성에서 자본주의 시장은, 위험에서 자유로운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며, 쉽게 조종할 수 있고 통제 가능하며 개인적인 의지와 욕망에 복종할 수 있는 삶의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약속하며 자신을 믿게 만든다. 시장은 과거에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으로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며 신선한 것을 약속한다. 훨씬 편안하고, 자기만족적인 삶도 자아에게 약속한다. 그것들은 너무도 복잡하고 힘든 작업을 요구하며 위험으로 가득 차 있었던 임무들을 쉽게 끝내거나 안전하게 해치울 수 있다고 우리를 달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아니면 몇 가지 이유로 너무 과중하거나 따분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인간 관계가 맺어졌다가 깨어지는 경우를 경험한다. 그러나 (인터넷 같은) 전자매체로 중재되고 온라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참으로 쉽고, 문제도 없이 재빨리 만족한 결과를 얻게 되어서 장기적 목적을 금방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거부하기는커녕 정말로 유혹적인 제언이며 극도로 저항하기 어려운 장점들이다. 따라서 ‘대안적 주체성’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훨씬 덜 편안하고 훨씬 더 위험하고 지루하기 십상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오랫동안 무가치한 것으로 방치되고, 관심을 받지도 못하고 망각되었다. (대안적 주체성을 추구하기 위해 누군가) 능력과 천재성을 최대한 발휘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압도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또는 ‘오프라인’의 즐거움을 지키는 것은 이제 낡아빠진 것으로 간주되거나 방기되고 있다. 인간의 연대가 제공하는 경이와 도전, 그리고 상호협력과 우애로 가득한 그 세계는 이제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삶의 양식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다른 가능성들이 있겠지만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바우만 교수의 대답은 명쾌했다. 자본주의는 대안적 주체성의 가능성을 어렵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편리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약속하는 자본주의의 시장원리에 있다. 당장 우리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전자기기만 해도 그렇다. 휴대폰은 과거에 비해 얼마나 편리하게 상호관계를 맺게 만들어주는가? 과거에 젊은 층에 독점되어 있던 스마트폰을 중장년층이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대선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은 간편함을 제공하게 되어 있다. 이런 장점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은 없다. 다만 바우만 교수가 말하듯이, 대안적 주체성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모양새는 지금 자본주의 시장에서 얻고 있는 편안함과 만족감에 부합하지 않는다.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운 대안적 주체성이 등장하기 위한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이라고 바우만 교수는 말한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그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현실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나타난 한국 사회의 과거지향적인 투표성향도 그렇지만, 2011년 영국 폭동은 대안적 주체성과 다른 풍경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우만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영국폭동은 좌절한 소비자의 반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란은 실업과 같은 처지의 전락에서 발생한 분노와 실망의 표출이었다. 자신들은 가진 것이 없는데 눈앞에서 화려한 소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런던 폭동 가담자들은 소비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소비주의의 즐거움은 이들의 것이 아니었다. 소비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패러다임인 까닭에 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면 인간으로서 자기 존립을 할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런던폭동 같은 사건은 소비주의로부터 추방당하는 순간 소비자는 부랑자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 저항하는 것도 결국 소비주의의 한계 내에서 일어나는 카니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비주의는 우리의 선택을 제한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든다. 소비의 대상은 얼마든지 교체가능하다. 그것을 제대로 교체하지 못하면 능력을 갖지 못한 존재이다. 이 말은 곧 소비를 제대로 못하면 능력 없는 자로 낙인 찍히는 것이다. 신용카드나 백화점 우대권은 이런 능력을 과시하게 만드는 상징이다. 당연히 이 상징의 소유에서 배제된 자들은 분노하거나 실망할 수밖에 없다. 마치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못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소비자들’은 분노와 실망을 가졌지만, 자본주의 시장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만족감 자체를 거부하는 선택을 하지는 못했다. 소비의 대상을 교체할 수 없는 무능력의 존재로서 자기 자신들에게 불만을 가졌기에 상황은 ‘폭동’에 머물고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욕망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까닭인데, 최근 바우만 교수가 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동녘)이 한국에서 번역출간되어서 큰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징조이다. 한국의 독자들도 자본주의 시장원리에서 더 이상 즐거움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것은 아닐까? 모든 고민과 성찰이 불편함과 불만족에서 시작한다면, 바우만 교수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은 그나마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바우만 교수 본인의 생각을 물었다.
“나는 이 책에서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한번에 끝나는 일년 정도 걸리는 실험을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특별한 계획이나 기획 없이, 그리고 내가 무엇을 논의하겠다는 논제에 대한 일람표도 만들지 않고 실험을 시작했다.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을 기록하고자 했고, 사건들이 부각되었다가 사라지는 발전 과정을 지켜보고자 했다. 그 사건들을 요약하고, 의미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그것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읽고 흐르는 ‘사물의 질서’에서 장소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200년 전에 살았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처방이기도 한 ‘작은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라’는 말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 우리 시대의 본성을 연역하는 것은 일 년 동안 일어난 사건의 연대기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그 사소한 것에 남겨진 총체성의 성격이다. 때때로 참으로 사소하고 겉으로 보기에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파편들일지라도….”
작은 파편에서 세계의 질서를 읽어내려는 노력의 산물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었다는 진술은 바우만 교수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모든 추상적 사유의 경로는 구체적 현실에서 보편적인 문제의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서구 학자들 중에서도 그는 한국의 변화에 민감하게 관심을 기울였던 이론가이다. 특히 인터넷 문화에 대한 여러 논평들을 남기고 있는데, <소비하는 삶>에서 바우만 교수는 당시에 유행했던 ‘싸이월드’와 쇼핑몰 문화에 대한 분석을 제시했다. 이런 분석 이후에 한국 사회의 변화는 그가 예견한 방향으로 더욱 급격하게 진전된 것처럼 보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공공영역을 지배하는 모습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가 얼마나 인터넷 기반 문화에 젖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이 전환 국면이 우리 삶을 더욱 ‘액체성’에 가깝게 흐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SNS에 회의적인 태도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바우만 교수 역시 아랍 혁명을 비롯한 정치적 상황에서 SNS가 가진 이중적 측면을 꾸준히 문제삼았다. 우리 역시 SNS 환경이 일방적으로 야권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입견이 2012년 대선에서 깨어졌다. SNS 환경은 특정 집단에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면 SNS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우만 교수의 말은 이렇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디지털 미디어를 비롯한 새로운 매체는 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예단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SNS를 통해 사회운동이 추동되는 경우는 이전까지 없었다. 분명히 놀라운 일은 맞다. 그러나 덧없는 부분도 없지 않다. 과거에 자주 예로 들었지만, 인터넷 데이트 같은 경우, 진실한 만남이 가능하기 어렵다.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이 주는 간접성이 직접적인 만남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대신, 그 만남의 가치를 불편하게 여기게 만든다. 사람들에게 어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기에 SNS는 충분한 역할을 한다.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트위터에서 치열하게 정치적 문제에 대한 의견을 전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정치적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선택은 책임의 문제이다. 정치적으로 무엇을 선택했다면 책임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SNS가 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다. 정치제도를 없애고 SNS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온라인의 인공성이 현실성을 대신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이 새로운 환경에 대해 우리는 좀 더 두고본 뒤에 이야기를 해야할 것이다.…”
SNS가 정치를 대체할 수 없다는 지적은 상당히 되새겨봐야 할 내용이다. 인공성과 현실성의 관계에 대한 유보적 태도는 노학자의 신중함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SNS를 과도하게 정치에 적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정치를 거세해버린 측면도 없지 않다는 사실을 반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통이라는 명목으로 끼리끼리 의견을 나누는 행위에 급급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억압하려는 태도는 여야를 막론하고 항상 문제시되어온 SNS의 악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지금 대다수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근대의 액체성은 안정감보다는 위기감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근소한 차이이긴 하지만, 기성세대가 정권교체의 불안보다도, 기존 체제가 제시하는 안정의 가치를 선택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일 것이다. 이런 전환의 국면에서 바우만 교수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내가 한국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당신들이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또는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책임을 지는 것은 필연이다. 설령 책임 지는 것을 거부하더라도 책임은 언제나 강렬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의 선택 결과를 주의깊게 고려하고 당신 자신과 당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면밀하게 따져 본 뒤에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그 선택이 무엇인지, 또한 그 선택이 초래할 문제들에 대해 최대한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려울지라도 그 노력을 통해 선택의 결과를 평가하고, 추후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2012년 향후 5년을 위한 선택을 한국 사회는 했다. 그 선택이 특정한 집단이나 세대의 것이라고 해도 그 책임은 공동의 것이다. 바우만 교수가 지적하듯이, 책임은 회피할 수가 없다. 설령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 책임에 대한 요청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뼈아프다. 향후 어떤 선택이 다시 주어졌을 때, 신중하게 ‘선택의 결과’에 주목할 수 있다면, 이번 선택이 비록 실패한 것이더라도 교훈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2013년에 대한 전망을 물었다.
“점쟁이가 아니라서 확답을 할 수는 없다. 사건은 유행처럼 왔다가 가기도 한다. 역사의 변화라는 것은 금방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무엇인가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경우도 많다. 그토록 관심을 끌었던 ‘아랍의 봄’도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기존의 정치제도나 체제로 수렴할 수 없는, 또는 기존의 관점으로 파악하기 힘든 불만과 실망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불만과 실망에서 지금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편리성이나 효용성과 다른 대안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금방 그 결과가 나온다는 장담은 없다. 지난해까지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던 모든 사건들이 예고 없이 출현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013년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분노와 실망은 새로운 형식을 따르지 않고 낡은 형식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형식이 사건으로 출현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를 일이지만….”
실망과 분노가 컸던 만큼, 이제 대안에 대한 가능성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다. 2013년이 우리에게 의미를 남길 수 있다면,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제공하는 편리성과 만족감을 넘어설 수 있는 불편한 대안에 대한 고민들이 자라나게 하는 것일 테다. 언제나 말줄임표(…)가 붙어 있는 바우만 교수의 대답처럼, 우리의 미래도 항상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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