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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동원된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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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 성장, 저항의 힘을 농축시키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10-01-08 오후 08:07:58)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모순적 이중성
과실 커질수록 비판의식 늘어나 ‘파국’
〈동원된 근대화〉조희연 지음/후마니타스·2만원
 
 
<동원된 근대화>는 박정희 독재체제를 붙들고 숙고해온 사회학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의 야심작이다. 지은이는 2007년 출간한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에서 박정희 시대의 역사를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조망한 바 있다. <동원된 근대화>는 이 역사 서술을 전제로 삼아 박정희 체제의 근본성격과 작동방식을 복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박정희 시대 이해의 지평을 넓혀 놓는다.
 
지은이는 박정희 독재를 규정하는 핵심 용어로 ‘개발동원체제’를 제안한다. 지은이의 설명을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후발 국가들이 국민을 동원하여, 개발·발전·성장으로 요약되는 ‘근대화’를 지향하는 체제다. 이 체제는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후발 국가들에서 특히 전형적으로 나타나는데, 박정희 체제는 바로 ‘후-후발 국가의 개발동원체제’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 ‘복합적 분석’의 중요함이다. 박정희 체제를 ‘폭압 독재’의 틀로만 이해하거나 반대로 ‘발전국가’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단선적·일면적 시선은 이 시대의 복합적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에서 말하는 ‘이중성’이 이 복합적 성격을 가리킨다. 박정희 체제는 국민을 억누르고 쥐어짜는 ‘수탈국가’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발전국가’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두 성격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돼 상호작용했으며, 이 상호작용을 통해 체제가 작동하고 위기를 겪고 파국으로 나아갔다고 이 책은 말한다.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에서 지은이가 먼저 주목하는 것이 ‘동원’이다. 말하자면 ‘어떻게 국민을 동원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때 국가 또는 권력이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심리적 전제가 필요한데, 지은이는 그 전제를 ‘결손국가·결손국민’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나라가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경제적 종속상태·후진상태에 있다는 국민적 인식이 이 ‘결손’에 담긴 의미다. 그렇다면 어서 빨리 경제를 발전시켜 정상국가·정상국민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심리적 공감대에서 동원체제가 작동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경우, 이승만 시대에 형성된 ‘반공규율사회’가 사회적 조건으로 따라붙었다. 이런 조건 위에서 박정희 체제는 ‘반공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가동해 국민을 끌어들였다.
 
지은이가 두 번째로 주목하는 것이자 이 책의 몸통에 해당하는 것이 ‘헤게모니 분석’이다. 지은이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재구성해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삼는다. 그람시가 말하는 헤게모니는 지배권력이 순전히 강압으로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피지배집단이 지배에 동의할 때 안정적 지배가 이루어지는데, 이 동의를 이끌어내는 지적·도덕적·문화적 주도권이 헤게모니다. 그람시는 그런 헤게모니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이와 달리 지은이가 눈여겨보는 것은 헤게모니 형성이 아니라 헤게모니 균열이다. 헤게모니란 언제나 분열·갈등·적대를 내적 속성으로 안고 있다. 일시적·잠정적으로 그 틈이 봉합될 뿐이다. 이 봉합이 뜯겨 그 내부의 갈등과 적대가 드러나는 것이 헤게모니의 균열이다.
 
지은이가 볼 때 박정희 개발동원체제는 이 헤게모니가 일시적으로 형성됐다가 이후 봉합이 해체되면서 균열이 드러나고 커지는 과정을 거쳤다. 박정희 체제는 폭력과 강압을 일상적으로 활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절반 정도를 위수령·계엄령·긴급조치 따위로 연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강력한 반공주의·개발주의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규합해 동의를 끌어내기도 했다. 박정희 체제는 나라를 준군사적 총력동원체제로 바꾸어 경제성장의 ‘효율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 효율성이 관철되면 될수록 균열성과 파괴성이 함께 커졌다는 데 박정희 체제의 ‘모순적 이중성’이 있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경제가 성장해 그 과실의 일부가 국민에게 돌아가자 생각의 여유, 곧 권리의식이 커졌고, 또 동시에 그 과실이 한쪽에 편중됨으로써 국민의 비판의식이 커졌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국민은 저항주체, 곧 민중이 되어갔다. 1960년대에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부분적으로 얻었던 박정희 개발동원체제는 1970년대에 들어와 그 동의의 근거를 상실했다. 박정희는 1972년 유신체제를 세워 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순전한 강압과 폭력이었고, 동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최종 결과가 박정희 체제의 파국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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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동원된 근대화 (2010 01/19 위클리경향 859호, 정원식 기자)
ㆍ박정희 정권은 ‘능동적 대중 동의’ 못 받았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는 평가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극과 극을 이루면서 정권 붕괴 후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불꽃 튀는 ‘해석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인화성 강한 연료 구실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해석 경쟁 가운데 하나는 2004년 <대중독재론>의 출간 이후 벌어진 학계의 논쟁이다. 한양대 임지현 교수를 중심으로 제기된 대중독재론의 핵심은 박정희 정권이 공권력의 철권에 의존한 폭압적 정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광범위한 동의를 바탕으로 유지된 정권이라는 것이다. ‘사악한 소수 독재 세력 대 선하고 핍박받는 대중’이라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진보 진영의 기존 인식에 충격을 가한 도발적 문제 제기였다.
 
당시 논쟁의 당사자이기도 했던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임 교수의 대중독재론에 일단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기존의 독재 연구 또는 파시즘 분석을 뛰어넘는 새로운 통찰력과 넓은 연구 지평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저자가 보기에 진보적 논의는 “다양한 새로운 연구들을 개방적으로 흡수하고 내포화하지 못해 ‘앙상’해진 측면이 있다.”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2007)를 잇는 조 교수의 박정희 정권 연구서 <동원된 근대화>의 문제 의식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책이 겨냥하는 것은 정권의 폭압적 성격을 강조하는 진보적 관점에서 대중독재론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진보적 재해석’을 위해 저자가 동원하는 수단은 박정희 정권을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한 후 그 체제가 헤게모니 형성과 헤게모니 균열이 모순적으로 공존한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헤게모니 형성 과정이 동시에 헤게모니가 균열되는 과정과 중첩돼 있었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 추진’이라는 국민적·민족적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획득한 도덕적 선도성을 바탕으로 사회의 자원을 총동원하는 ‘개발동원체제’였다. 그러나 ‘동원된 근대화’는 근대화된 대중을 낳았고, 이렇게 탄생한 근대화된 대중은 자신을 낳은 체제와 불화하는 관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중의 동의는 결코 지속적이거나 능동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박정희 체제에는 정치적·경제적 성취와 위기가 공존했다. 개발동원체제는 근대화라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는 효율적이었지만 그 강압성으로 인해 위기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국의 산업화가 촉진됐다는 보수적 시각과 박정희 체제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에 의해 붕괴했다는 진보적 시각은 모두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저자는 진보든 보수든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해석은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각자의 시각을 견지하면서 반대 시각이 제시하고 강조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해석적으로 내재화하는 방향으로 풍부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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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체제와 북한이 같을까? (레디앙, 2010년 01월 16일 (토) 09:25:19 이병천 / 강원대 교수)
[서평] 조희연, 『동원된 근대화』…‘개발동원체제’ 개념 불안정
  
1. 박정희 시대의 무게, 진보의 공백에 대한 응답
국민 대중은 단지 보수에 대한 비판 일변도를 넘어, 성공 대 자학의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 열린 진보의 새로운 근현대사론을 요구하고 있다. 그간 우리가 무엇을 성취했고 무엇을 잃었는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어떤 새 길을 열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새로운 성찰을 기대하고 있다. 사정은 박정희 시대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진보의 재해석에 기여함은 물론, 진보의 한국근현대사관의 새로운 재구성을 위해서도, 나아가 저자가 ‘우리 안의 보편성’이라고 부른 한국적 특수성 속에 존재하는 일반성을 발견하는 작업에서도 새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2. 『동원된 근대화』의 핵심 논지 : 개발동원체제와 그 이중성
이번에 나온 『동원된 근대화』는 저자가 앞서 낸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가 역사서술 방식의 대중서 성격을 갖고 있다면, 『동원된 근대화』는 사회과학적 분석에 주안점을 둔 전문 학술서에 해당한다. 그렇다 해도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 또한 단순한 대중서는 아니었다. 『동원된 근대화』에서 핵심 개념으로 잡은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은 이미 그 책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그러나 그 사회과학적인 규정과 분석은 미루어져 있었던 터였다.
 
이제 새 책에서 저자는 ‘개발 동원 체제’ 개념을 과감하게 박정희 체제론의 핵심 개념으로 끌어 올려 체계적으로 장착시키고 있다. 그리고 개발동원 체제가 모순적인 이중성, 또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봄으로써 박정희 체제의 구조적, 역사적 성격과 함께 그 작동 방식, 정치사회적 동학을 진보적 시각에서 해명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개발이라는 목표를 향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회를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다. 그 때문에 이 체제는 국가주의적 체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저자는 개발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특별히 새롭다 할 의미 내용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 성장, 발전, 근대화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한다. 반면 방점을 찍어 강조하는 것은 ‘동원’이라는 말이다. 책의 원제와 부제 모두에서 동원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동원은 개발, 또는 근대화 목표를 압축적 또는 전투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회를 조직화하는 전략적 행위다. 그리고 개발이 경제적 변화과정이라면, 동원은 경제체제의 정치사회적 작동 양식이다.
 
평자가 보기에, 저자의 개발동원 체제 개념이 갖는 새로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점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개발 동원 체제 개념을 한국의 박정희 체제를 넘어서 후발 근대화 이행 체제로 일반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와 제 3세계는 물론, 서구 후발 자본주의 근대화 체제도 이에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개발동원체제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 걸치는 개념으로, 즉 체제 관통적인 개념으로 제시한다. 소련의 스탈린 체제, 북한의 초기건설 체제, 나아가 오늘날 개혁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조차 개발동원체제에 포함된다. 그리하여 박정희 체제는 이렇게 다양한 개발동원체제중 하나의 특수한 케이스로서 후후발,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 파악된다.
 
둘째, 저자는 개발동원체제의 국가중심성을 말하면서도 그간의 국가중심론을 넘어서고자 한다. 저자가 보기에 대표적 국가중심론이라 할 수 있는 개발국가론은 국가 자체의 주도적 개입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개발의 정치사회적 과정 또는 양식인 동원의 지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체제’(regime) 수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체제’라는 개념이 국가와 사회간의 특수한 관계가 작동하는 개발의 사회적 과정의 특성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국가 자체에 내재된 자율성과 개입 능력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계급적, 사회적 조건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박정희 체제에서 그 특수한 조건들을 분석하고 있다.
 
다음으로 『동원된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개발동원체제, 그리하여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서 한국의 박정희 체제가 모순적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이중성’의 테제는 책의 부제로 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이 관점은 저자가 그람시, 제솝, 톰슨, 폴란차스 등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자원에서 길러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이중성론에 섬으로써 저자는 박정희 체제의 구조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역사적 동학도 보여 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모순적 이중성이란, 박정희 체제가 한편으로 경제적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제에 부응하는 성격과 또 다른 한편으로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성격, 그리하여 위기적 성격을 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중성 또는 복합성은 또 달리 헤게모니적 성격과 ‘헤게모니 균열‘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저자의 모순적 이중성론은 혹시 이런 측면도, 저런 측면도 있다는 식의 병렬적 절충론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대답은 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이론적 수준인데 저자는 그람시 헤게모니론이 강압과 동의를 상호 배제적으로 보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고 동의와 강압의 통합적 이중성론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지배의 양측면으로서 강압과 동의가 어떤 방식으로 상호 침투하고 통합되는지에 대해 말한다. 또 구체 분석수준에서는 박정희 개발동원체제의 전시기에 걸쳐 동의와 강압, 또는 헤게모니적 측면과 그 균열의 측면이 어떤 역사적, 계급적 사회적 조건위에서 출현할 수 있었고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 그 결합이 왜,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리고 이 이중적 체제가 마침내 어떻게 아래로부터 ‘민중의 주체화’와 정치적 저항에 의해 파국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해 그 모순적 동학을 밝힌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차적으로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은 저자의 모순적 이중성론이 박정희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일방적인 보수적 정당화론, 나아가 립셋, 헌팅턴 등이 대표하는 주류적 근대화론, 즉 권위주의적 산업화 연후에 정치적 민주화라는 단선적, 단계적인 진화론과 대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위인 박정희’론은 물론, 국가중심론을 벗어나 지배의 전략 대 저항의 전략, 지배의 동학 대 저항의 동학이 연출하는, 모순에 찬 발전 체제로서 박정희 체제를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에게 있어 박정희 반공 권위주의적 개발동원체제는 하나의 역사적 헤게모니 체제임을 인정하면서도, 무엇보다 뛰어나게 ‘헤게모니 균열’의 사례가 된다. 저자가 임지현의 대중독재론, 이영훈의 신보수적 근대화론과 논쟁하면서 보여주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3. 토론: 개발동원체제 개념의 불안정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는 몇 가지 토론 지점들을 열어 놓고 있다. 토론점들은 꽤 많지만, 여기서는 아무래도 이 책의 육중한 무게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해 보고자 한다. 과연 개발동원체제라는 말이 이 책에서 시도한대로 새로운 사회과학적 분석 개념으로서 구성, 정립될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다.
 
1). 한국의 박정희 체제, 동아시아와 제 3세계 국가들의 발전체제, 독일 비스마르크 체제를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의 후발 발전체제, 소련의 스탈린 체제, 북한 초기 사회주의 건설체제, 개혁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이 모두를 저자는 한 바구니에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나의 개념 바구니에 너무 많은 것, 이질적인 것들을 담아서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개발을 위한 국가 주도의 사회 조직화라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이들을 같은 개념으로 묶을 수 있겠는가. 같이 묶을 수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같이 묶은 개발동원 체제 개념이 얼마나 유의미한 함축을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2). 개발동원체제 개념의 중요한 난점은 하나의 사회구성에서 공(公)과 사(私), 국가와 사회, 국가권력과 사회 지배세력, 계획과 시장, 공유와 사유의 쌍에서 각각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양자의 상호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것이 그 사회의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 사회 발전 방식과 경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하는 문제가 너무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발동원체제 개념에서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은 개발보다는 동원이다. 개발은 다분히 중심 과제, 중심 가치로 전제되어 있다. 동원의 측면에 더 조명을 줌으로써 새로운 것도 얻었지만 잃은 것은 없는가. 동원이라는 말은 그 자체 매우 국가중심적인 함축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동원주체는 국가이고, 사회는 동원대상이다. 그 때문에 저자는 국가중심론을 비판하고 국가의 계급적 사회적 조건을 강조하고 있지만, 오히려 의외로 개발주의 체제 개념에서 개발동원체제 개념으로 나아감으로써 국가 중심주의를 훨씬 더 강화시킨 의미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사실 연구사상 개발국가론, 개발주의론에서도 동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미 개발주의체제가 민족주의적, 반공주의적 동원체제 성격을 중요한 특성으로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결코 동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동원과 같이 가는 협력이 중요하다. 개발주의론은 동원과 협력, 사기업에 대한 규율을 동반한 지원, 그리하여 국가와 사기업, 국가와 시장간 공사 협력의 시너지를 낳는 체제적 특성에 주목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개발동원 체제론에서는 국가중심주의가 한층 더 강화됨으로써 사회의 지배세력의 존재, 그리고 이들과 국가와의 특수한 관계 방식의 문제가 부차화되는 의미 변화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저자는 국가의 계급적 사회적 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와 동학에서 자본가 계급, 지배 블록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론틀의 수준에서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주의체제론에 비해 국가 주도에 의한 사회동원을 체제의 핵심 골격으로 잡았다고 하겠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의외로 국가중심체제에 내장된 국가물신숭배의 위험, 그 정치적 반동성의 위험, 국가민족주의의 이중성의 위험에 대한 지적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동원된 근대화』에는 정치적 ‘반동성’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동성’이라는 말보다 ‘작위성’이라는 개념적으로 애매한 말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3). 개발동원체제에서 공과 사의 위상 및 복합적 상호 관계에 시선을 두게 되면, 대중들이 단지 ’동원‘만 되는 것이 아니라 ’호응’하는 문제, 왜 어떤 방식으로 호응하는지 하는 문제가 퍽 중요해진다. 이 주제는 물론 대중독재 논쟁의 주제이기도 했고 저자 또한 그람시적인 ‘강압과 동의’의 문제틀 위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는 예를 들어 한국 박정희 개발주의의 경우, 국가주도 냉전반공주의, 국가민족주의의 대중 동원력뿐만 아니라 그 동원이 먹힐 수 있는 가족주의 기반의 문제가 별로 거론되고 있지 않다.
 
역사적 뿌리가 매우 깊고 6.25전쟁 이후 새롭게 재구성된 가족주의와 생존을 위한 강렬한 소유집착주의, 그에 따른 국가동원에 대한 대중들의 호응 문제는 박정희 시대뿐만 아니라 민주화와 세계화시대 한국에서 공적 신뢰의 약함과 그에 따른 복지연대형성의 곤란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 개발주의시대 이후, 87년 민주화 이후 왜 시장주의 시대가 도래했고 진보가 ‘불신의 덫’에 빠지게 됐는가, 이는 다방면으로 심층 연구가 필요한 큰 주제인데, 나는 소유집착적, ‘사민’(私民)적, 경쟁적 가족주의에 오늘의 시장주의와 이어지는 중요한 하나의 연결 고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높은 교육열과 사교육 과열경쟁도 단지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며, 역사적 가족주의와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비대한 사교육은 이전부터 부동산 투자와 함께 복지 안전망이 빈약한 상황 속에서 대중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존, 안위 및 지위 상승을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미래 투자행위에 속한다.
 
4). 앞의 논의를 전제로 이제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의 이론적 계보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국가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저자는 개발동원체제론이 개발국가론, 그리고 평자가 제안한 바 있는 개발자본주의론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은 너무 소략하고 간단히 처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은 내용적으로 그 연관성이 흐릿해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개발국가론의 주창자 존슨은 스탈린적 국가독점사회주의와 일본 및 동아시아 개발 자본주의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존슨의 개발국가론에 따르면, 전자는 ‘계획 이데올로기적’ 모델로서 실패한 반면, 후자는 ‘계획 합리적’ 모델, 국가와 시장간, 국가와 사기업간 ‘공사협력’모델로서 성공한 모델이다.
 
개발국가론, 개발주의론에서는 어떻게 그 체제가 공사협력의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기제, 제도형태를 갖고 있는지 하는 것이 핵심 관심사다. 반면에 조희연의 개발동원체제론에서는 존슨이 범주적으로 확연히 구분한 스탈린 모델과 동아시아 모델이 같은 개발동원체제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다. 또 그 체제의 작동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계없이 모두 개발동원체제로 정의된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개념의 실질적 내용 부분에서 개발동원체제론은 개발국가론 및 개발자본주의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의 이론적 계보가 좀 묘연해 진다.
 
에번스의 ‘연계된 자율성’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중요한 급소를 찌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율성‘과 함께 ’연계성‘이 개발국가론의 핵심이라는 대목은 덜 주목한 것 같다. 생각하기에 따라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은 내용적으로, 개발국가론의 계승, 극복론이라기 보다는 전혀 뜻밖에 헌팅턴류의 강한 국가론의 계승, 극복론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흥미로운 논란 지점이 될지 모른다.
 
5). 또 다른 이론적 계보 문제로서 개발동원체제론이 권위주의론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동원된 근대화』가 박정희 시대의 정치사회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중요하다. 저자는 박정희 체제를 개발동원체제의 특수한 사례로서 권위주의적 반공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권위주의 체제라는 것이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적 성격과 동학을 파악함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빠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찍이 권위주의론의 제창자 린츠가 말한 대로, 이 체제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이분법으로 포착되지 않는 회색지대를 지칭하는데, 제한된, 정치적 다원주의의 존재는 그 필수적 특징이다. 정치적 다원주의의 존재여부, 권위주의의 제도화수준이 낮은지 높은지, 어떤 방식의 제도화인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의 박정희 체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치적 다원주의 제도 그리하여 공적 경합 공간의 존재가 지배연합 대 저항연합의 각각의 능력과 어우러지면서 그 체제에 고유한 내적 모순과 불안정을 투입하면서 역동적 동학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와 대만정치의 차이도 이 지점에서 비교가능하다.
 
한국의 70년대 유신체제는 저자가 말하는 ‘민중의 주체화’뿐만 아니라, 60년대의 제한된 다원주의 공간마저 박정권이 폐쇄하려고 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하고 자기 무덤을 판 측면이 있다. 이렇게 봐야 개발동원체제의 ‘헤게모니 균열’과 그 이후에 대해서도 민중의 주체화와 저항에 의한 붕괴라는 단순 도식을 넘어 다양하게 열린, 복합적 경로를 논의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평자는 그간의 헤게모니적 ‘대중독재’ 대 ‘헤게모니 균열’의 논쟁 구도 이상으로, ‘어떤 균열인가’를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저자가 주장하는 개발동원체제의 모순적 이중성론과 뛰어난, 생동하는 동학론도 다원적 권위주의 체제와 그 다양한 제도화 방식 및 수준에 기반을 둠으로써 이론적, 경험적 분석의 빈틈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개발동원체제론은 전통적인 정치적 힘관계론과 이데올로기론을 벗어나지 못할 우려마져 없지 않다.
 
6). 위와 같이 말함으로써 나는 저자의 개발동원체제론에서 제도론의 빈곤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동원 체제론이 선행한 개발국가론, 개발자본주의론 그리고 권위주의론과 이론적 관계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하고, 그럼으로써 개발동원체제의 구조적 성격과 동학을 파악함에 있어 중요한 난점을 갖게 된 데는 <동원된 근대화>에서 사회세력간 타협의 소산이면서도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관계의 ‘제 3항’으로서 제도의 이론, 제도의 정치사회학이 좀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다름아닌 개발동원의 ‘체제’(regime)를 말하면서 그것에 고유한 정치사회적, 경제적 제도 형태들, 그 배치방식과 연관들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개발주의 정치경제학이 그렇듯이, 개발동원체제의 정치사회학 또한 제도론적 전환을 통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제도론이 아니라 갈등과 쟁투의 계기를 삽입한 진보적, 역사적 제도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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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탄생했나? (프레시안, 황병주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2010-01-16 오후 1:37:52)
[화제의 책]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
 
박정희 체제는 현재 진행형
종말을 고한 지 한 세대를 넘겼음에도 박정희 체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것은 사회 현상으로서의 '신드롬'이나 퇴행적 향수 또는 정치 공학적 술수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박정희 체제 18년을 전후한 시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국면이었다. 근대 세계 체제의 시민권은 곧 국민·민족 국가였고 박정희 체제기는 '국가 형성(nation building)'의 핵심 과정을 포함했다. 그 핵심 중의 핵심이 산업화였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재)생산 시스템의 비가역적 전화야말로 박정희 체제를 (재)생산하는 영구기관이다.
 
이른바 '국민 경제'의 구성과 확장은 '국민'의 형식적 포섭을 넘어 실질적 포섭을 가능케 했고 모든 구성원을 '집단 살림'의 식구로 만들었다. 집단 살림의 주기적 경기 변동이 영원한 운명을 대신했고, 이것을 떠난 개체의 삶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요컨대 국민 또는 민족은 운명 공동체를 넘어 생활 공동체가 되었고 공동의 운명이라는 추상적 긴박보다 생활 상의 일상적 구속을 통해 동질적 집단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산업혁명은 사회혁명을 추동했고 한국 사회 전체가 급속한 변화에 휘말리게 되었다. 사회적 유동성은 극단적으로 상승하였고 대중정치의 본격화는 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감각의 활성화를 초래했다. 역설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독재의 반정립으로 구성 확산되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조화로운 발전'이라는 김대중 정권의 슬로건은 박정희 체제와 단속적으로 연결될 것이며, 뉴타운은 새마을의 번역이다. 박정희 체제는 그것을 스스로 '조국 근대화'라 불렀다. 그러면 박정희 체제의 조국 근대화는 어떻게 가능했고 또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을 내세운 박정희 체제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박정희 체제='개발 동원 체제'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발간된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후마니타스 펴냄)는 주목할 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오랫동안 한국의 진보 학계의 중심 역할을 해온 저자의 최근 고민이 집대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 2부 6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박정희 시대의 체제적 성격'을 규정한 다음 2부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대중적 동의 기반'을 집중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2007년에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역사비평사 펴냄)를 통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했기에, 이번 책은 이론적, 사회과학적 분석에 집중하고 있다.
 
이 책을 관류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즉 저자는 '진보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보수적 시각에서 강조하는 경제 성장, 대중적 동의를 '진보적 시각의 확장' 속에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복합적인' 진보적 분석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진보적 분석이 근본적으로 '실천의 과학'이기에 현실 '비평'이 아니라 현실 '변화'를 지향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실천의 논리를 위한 현실의 단순화가 초래한 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박정희 체제를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일반적' 특성을 갖는 대상으로 파악하고자 함을 밝히고 마지막으로 '모순적 복합성'과 '헤게모니의 균열' 개념을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분석된 박정희 체제는 한 마디로 '개발 동원 체제'로 정의된다. 그 의미는 '근대화'라는 국민적·민족적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이다. 이로부터 '동원된 근대화'라는 이 책의 제목이 도출된다.
 
국가-권력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해 중요하게 동원된 것이 곧 '결손 국가'와 '결손 국민'이었다. 서구적 근대 국가 및 국민을 기준으로 하여 스스로를 후진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정상적 국가와 국민 형성이 전사회적 목표로 설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생체적, 도덕적, 국가주의적 훈육 국가로서 결손 국민을 정상 국민으로 전환하기 위한 국민화 프로젝트의 담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발 동원 체제는 대단히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동원의 작위성으로 말미암아 위기적 성격을 내재하게 된다. 저자는 박정희 개발 동원 체제의 정치사회적 이중성, 즉 효율성과 위기성의 공존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표임을 강조했다. 위기성의 핵심은 '민중의 주체화'인데, 민중은 근대적인 권리 주체로서 '시민'적 존재이자, 계급적 저항 주체로 설명된다. 박정희 체제는 경제적 근대화를 지배적인 가치로 하고 개인의 자유와 시민사회의 자율성, 민주주의적 지배와 같은 근대의 또 다른 가치를 무시하는 '예외 국가'적 형태였기에 이를 대표한 것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었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 저자는 폭압을 뚫고 성장한 한국의 민중과 민주주의는 백인만의 민주주의인 미국, "파시즘의 유산이 질곡하고 있는 일본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아시아의 '모범적인' 민주주의의 전형"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으로 의미 부여했다.
 
박정희 체제의 동의 기반이 협소했던 점은 민족주의와 반공주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박정희 체제는 민족주의를 지배 담론으로 적극 활용했지만, 그것은 '두 개의 국민'을 지향하는 모순적인 기획, 다시 말해 '민족과 대결하는 민족주의'에 불과했다고 한다.
 
결론에서는 '복합적 진보' 분석틀의 정립을 강조하고 한국의 근현대 역사상 재구성 문제를 논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한국 사회 발전의 '진보적 긍정'으로 요약된다. 즉 박정희 독재는 일본이나 독일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투쟁에 의해 극복되었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켜 간 적극적 진통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안의 보편성'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면서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도덕적으로 존경받고 모범이 될 수 있는 공동체와 개인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와 연결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박정희 체제 과연 '예외국가'였나?
박정희 체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으로까지 운위되는 만큼 그 실천적, 학문적 중요성은 누차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정치적 주장을 넘어선 진지한 학문적 접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이 책의 출간은 매우 반가운 일이며 박정희 체제에 대한 학문적 인식 수준을 제고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이 책은 기존의 악무한적 '이항 대립' 구도의 지양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진보와 보수' 간의 극단적 낙차는 박정희 체제에 대한 냉정한 접근을 방해했고, 치밀한 분석과 논증 대신 정치적 주장만이 난무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진보적 시각을 완강하게 견지하면서도 보수적 견해까지 포괄하는 지적 성찰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 실천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 이 책은 박정희 체제를 주된 대상으로 삼되, 그에 국한되지 않으면서 한국 근현대사 전반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을 담고 있다. 즉 박정희 체제를 보다 넓은 역사적 맥락에 배치시킴으로써 인식론적 지평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정치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참신한 이론적 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순적 복합성, 헤게모니의 균열, 우리 안의 보편성 등의 개념은 저자의 치열한 학문적 고민의 산물로 박정희 체제 분석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분석적 개념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시도한 분석의 참신성은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우리 안의 보편성'으로 표현된 문제의식이다. 식민주의적 인식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고민은 매우 소중한 것이나 그것이 또 다른 보편성의 구축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시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되는데, 미국의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모범이 아닌 것처럼 한국의 민주주의가 여타 사회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세계는 보편이라는 추상 대신 특이성(singularity)으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보편성을 담지한 모범 대신, 특이성 간의 연대가 더 민주주의적이지 않을까?
 
둘째는 '모순적 복합성'이나 '헤게모니의 균열' 등으로 시도된 새로운 접근이 좀 더 명료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오직 하나의 요소로 구성되거나 유지되는 지배 질서는 없을 것이기에 복합성은 지극히 올바른 지적이며, 완벽한 무모순의 지배 질서도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모순의 강조도 이의가 있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순적 복합성을 함께 분석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박정희 체제가 일정한 동의 기반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동의적 강압'이었다고 하면 기존의 분석 패러다임과의 차별성이 선명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셋째는 근대화 담론의 국가적 사회적 확산과 관련된 문제이다. 주지하듯이 근대화 담론은 19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정립된 것이지만, 개항 이래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문명개화, 실력양성, 계몽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해왔다. 박정희 체제 성립 이전에 이미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근대화 담론을 강조했고, 박정희 체제는 그것을 국가적 수준에서 적용한 것일 뿐이었다.
 
'교수 정치'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박정희 체제는 지식인을 체계적, 조직적으로 동원했는데, '지식-권력'의 형성이라 할 만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었다. 지식-권력의 담론적 실천 결과로서의 근대화론은 사회진화론적 도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으며, 서구-근대에 대한 강렬한 콤플렉스와 오리엔탈리즘-옥시덴탈리즘에 사로잡힌 결과였다. 요컨대 근대화 담론의 사회적 확장은 식민화의 결과였다. 박정희 체제가 선동한 '5000년 가난' 운운의 '빈곤의 정치'는 그 정치적 수사였다. 저자는 근대화에 대한 '사회적 준(準)합의'가 존재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합의라기보다는 지식-권력의 담론적 실천 효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넷째는 '전통화된 지배'의 부재와 '평등주의적 전통'의 문제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은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지배와의 철저한 단절'이 이루어져 '전통화된 지배'가 부재했고, '민족적·인종적 동질성에 기인하는 강력한 평등주의적 전통'으로 인해서 박정희 체제에 대한 동의 기반이 협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주장이다.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 관습은 매우 오랫동안, 심지어 현재까지도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승만의 왕족의식은 유명한 것이었고 '부르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한국전쟁 당시 농촌 지역의 갈등은 신분제적 유제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았고 1960년대까지도 농촌 지역의 머슴은 인격적 예속상태에 있었다. 한국에서 철저한 사회혁명의 경험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왕조에서 공화제라는 국가 형식의 변화만으로 전통적 지배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을까 한다.
 
인종적·민족적 동질성에 입각한 평등주의적 전통 또한 역사적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전근대 시기까지 인종적·민족적 동질성은 운위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신분제적 차별 속에서 강렬한 평등주의적 열망이 구성되었다고 보인다. 예컨대, 만적의 난에 등장하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말은 민족적 동질성에 입각한 평등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전근대 조선사회는 남선과 북선의 격차가 매우 컸고 동질적 통합의 정도는 매우 낮았다. 일제시기 안창호가 주장했다고 하는 '일본은 우리를 20여 년간 지배하고 있지만 기호파는 우리를 500년 간 지배했다'는 말은 민족적 동질성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조선왕조 500년 간 서북 출신의 유명인은 홍경래가 유일할 것이다. 요컨대 민족적·인종적 동질화는 근대 이후 문제화된 의제이며 그것도 추상적 본질이라는 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다섯째는 '예외국가' 또는 예외적 근대 권력으로서의 파시즘 인식과 관련된 문제이다. 저자는 박정희 체제와 파시즘을 개인 자유, 시민사회의 자율성, 민주주의 등을 부정하고 근대성의 특정 측면만을 극단화하는 예외국가, 예외적 권력으로 파악한다. 월러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를 구분하고 파시즘과 박정희 체제는 기술의 근대만을 추구했기에 해방의 근대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가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예외국가라는 규정이 정상국가에 대한 과잉정당화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인다. 전시 총동원체제기 일본의 여성운동은 국가의 해방적 기능에 주목해 전쟁에 적극 협력했으며, 파시즘과 거리가 먼 미국 또한 특정 정세 속에서 예외국가적 특성이 노골화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파시즘을 근대의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하고 외과 수술하듯이 제거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라고 보인다. 오히려 파시즘은 근대의 고유한 일부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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