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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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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정치학자가 바라본 '자본주의의 종말'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2007-09-19 06:01)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제에다 거기에 적합한 사회 형태와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가 갖춰지면 이것이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 된다."(27쪽) 베를린 자유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이며 독일 녹색당의 이론적 지주로 손꼽힌다는 엘마 알트파터는 "자본주의의 종말은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알트파터의 저서 '자본주의의 종말'(동녘)은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미래는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비판은 가치가 있고, 대안들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부자들의 재산은 계속 불어나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생산성 향상을 위해 필요한 자원들은 고갈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고 있다.
 
저자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원동력은 세계를 지배하는 유럽의 합리주의, 자본주의적 사회 형태, 화석 에너지라는 삼위일체에서 나온다고 말한다.이 가운데 화석 에너지가 고갈된다면? 저자는 석유의 대안으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제시한다. 이 에너지는 생물 자원의 활용, 풍력과 수력의 이용, 지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둔 생태학적 정치경제학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해 왔다는 저자는 미래의 모습에 '연대'라는 개념을 더한다. 연대의식은 "실업, 빈곤 혹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문화, 민족, 지역, 계층을 포괄하는 인생 경험에 바탕을 두고" 형성돼 있을 수 있으며, 한 사회에서의 공통성과 내적 결속성에 대한 의식을 전제로 한다. 저자는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미래가 현재와는 달리 비(非)자본주의적 세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새로운 사회 형태는 만들어질 수 있으며 역사는 종말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아간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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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공황, 자본주의 붕괴의 서곡? (프레시안,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2008-09-20 오후 12:05:58)
[길에서 책읽기] 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
 
알트파터는 산의 꼭대기에서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의 금융 위기 실상을 명확히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오늘날 금융은 실물경제와 철저히 분리되어 별세계에서 따로 움직이고 있으며 사회와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전세계 외환 거래 가운데 실제 상품결제 액수는 2%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른바 OECD 국가들의 수출이란 초국적 대기업들의 기업 내부거래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머지 98%는 실물경제와 관련없는 금융거래이다. 정확히 말하면 투기자본들의 이동이다.
 
전세계 금융자산 규모는 2007년 기준 대략 170조 달러 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 가운데 60%가 달러화로 20%가 유로화로 보유되어 있다. 전세계 GDP의 3,5배 가량이다. 자본수지가 무역수지와 경상수지를 과도하게 압도하는 이상비대증의 체제는 수시로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마침내는 경제 자체를 붕괴시키고 만다.
 
실물경제가 어려운데 금융이 잘 나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암세포가 점점 커지다 숙주를 압도할 정도로 성장하면 당연히 암세포 자신과 숙주는 생명을 잃는다. 알트파터는 현재의 금융자본주의는 암세포라고 단언한다. 세계화, 글로벌 스탠다드란 결국 투기꾼들의 돈벌이를 위해 만든 고상한 용어라는 게 알트파터의 지적이다.
 
알트파터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이용하면 자동으로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 차로 변하듯 자본주의도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서막이다. 머지않아 닥칠 에너지 식량위기의 쓰나미와 함께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이 붕괴된다. 그 소리가 북극 빙하가 무너지는 소리처럼 굉음일지 아니면 암환자의 고통스런 신음소리처럼 처연할지는 또 아무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사태를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여기서 알트파터가 제시하는 대안은 태양에너지 사회, 연대경제 협동조합을 비롯한 수많은 네트워크가 결합된 연대사회이다. 태양에너지 체제란 농업사회를 말한다. 그는 공업과 산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심은 농업인 사회를 태양에너지 사회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 서구화, 근대화, 산업화를 죽을 힘을 다해 추구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간신히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이른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서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풍요가 지속불가능하고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된다니, 조금은 황당한 예측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사치스런 풍요에 안주해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 잊고 있다. 무엇보다도 석유의 고갈과 함께 식량 고갈, 다른 천연자원의 고갈이 머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본주의 산업문명과 풍요의 원천이었던 석유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산업문명과 풍요 또한 사라진다.
 
때문에 우리는 사회 체제 자체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모색과 사색의 단초를 알트파터는 다소 무겁게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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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의 살풍경…결국 '유령'이 도래한다" (프레시안, 박준영 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009-03-21 오후 12:34:55)
[철학자의 서재] 엘마 알트파터의 <자본주의의 종말>
 
유령의 도래는 곧 자본의 종말이라는 것, 도래와 종말은 항상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끔찍하거나, 즐겁거나, 소란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속으로 들끓으며 비등점을 향해 가기 때문이라는 것, 잠재성이 곧 현실적이라는 것 말이다. 어리석은 지배계급은 이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사실 지배계급이 자본에 대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자본이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을 때조차, 이 무식한 지배계급은 상황 판단이 전혀 서지 않는다. 다만 두려워할 뿐이고, 대책이 없고, 땅만 판다. 거기 겁에 질린 타조처럼 머리를 묻으려고? 대중들의 봉기에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채로, 한 쪽으로는 눈치를 살피고, 다른 쪽으로는 경찰들을 집결시킨다. 하던 짓이 그 짓이기 때문에 '몽둥이와 삽질' 외에 다른 게 생각나지 않는다. 야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야비함은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종말'은 '유령의 도래'다. 엘마 알트파터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야만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야만은 미래의 주축이 될 것인데, 이 야만이란 '분명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야만'이라는 것은 오래된 진실이다. 자본의 초기 축적은 온간 탈취와 토지에 대한 강제 귀속, 유랑민들에 대한 학살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초기조건은 항상 반복된다. 지금도 그렇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원주민 부대에서부터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선 곳, 이곳 용산에 이르기까지 종말을 유예하기 위한 강박적인 반복이 있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이러한 지옥도가 펼쳐져 왔다는 것을 한번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종말'이란 얼마나 당위에 가까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정글의 법칙이며, 따라서 짐승의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종말 너머의 유령은 어떤 조건 하에서 도래할 것인가? 알트파터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을 인용함으로써 유령을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 '내인성(內因性)' 쇠약에 의해 붕괴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외부로부터의 아주 격심한 충격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들과 결합해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브로델이 말하는 바는 매우 명백하다. 순진한 낙관론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에 의해 붕괴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뒤에 또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외인(外因)'이 단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의식화인 것만은 아니다. 대안이라는 것이 '혁명 전위대' 뒤에서 대오를 맞추어 가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서글프게도 이 방면에서 만큼은 레닌의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면 내부에서 무르익고 있는 대안들과 외부 원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알트파터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내부모순 외에 외적 요인들로 에너지 고갈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를 든다. 자본주의란 유럽합리주의와 함께 화석연료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합리주의가 그 본래의 철학적 의미를 폐절하고 효율과 이윤 획득 가능성이라는 논리로 정제되기 위해서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낳은 결과는 명백하다. 합리주의, 다시 말해 이성중심주의란 인간 내부의 모순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해야 하며 그를 통해 질서 잡힌 사유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타락한 합리주의는 이러한 사유체계를 통해 모순을 피지배자의 자율적-내면적 훈육체계로, 생체적 메커니즘으로 바꾸어놓는다. 그것은 질서 속에 안주하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강요한다. 질서를 넘어서는 모든 혁명과 소요는 이제 단죄되어야 하는 '괴물'이 되었다. 이제 이성은 경제적 효율성에 봉사하고, '성장'이라는 최고 목표를 향해 가는 것만을 허용할 뿐이다. 마침내 차가운 이성이 탄생한다. 사실 이 차가운 이성이야말로 '괴물'에 다름 아니다.
 
화석연료란 이 괴물의 거의 유일한 먹잇감이다. 맹렬한 식욕 때문에 생태계와 환경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이는 결국 괴물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건 비단 자본만이 아니다. 알트파터는, 만약 여기에 대안이 있다면 '재생 가능 에너지'가 되리라고 말한다. 즉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란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제', 이 에너지 체제에 적합한 '사회형태' 그리고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의 삼위일체가 갖춰질 때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화석에너지', '합리주의'라는 타락한 삼위일체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들이 발생할 수 있는 자본주의 내적 요인은 무엇인가? 알트파터는 이를 '사회로부터 시장의 유리'라고 정리한다. 사회적 가치가 더 이상 시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가 차가운 이성에 의해 구성되고 그것이 '성장'이라는 목표에 정향되었을 때 모든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 의식은 괴물의 먹잇감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식의 경제를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알트파터는 이 이념이 이미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긴 2008년에 이르러 월가가 나자빠지고,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이 낡은 이념이 임종을 고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소위 '순수한 시장논리'라는 것은 개나 줘야할 처지가 되었다. 알트파터는 그러한 논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공허한 모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속 빈 논리를 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유포한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말하는 '학자들' 속에는 분명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학파 이데올로그들이 속해 있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시장, 또는 자본은 반드시 '자폐증적'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는 글로벌화된 자폐증이다. 사회적 가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 자본은 금융자본이 되면서 그 자폐적 특성이 극대화된다. 눈에 보이는 게 돈밖에 없는 노름꾼처럼 매 순간순간의 배팅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배팅의 순간순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는 노름꾼 자신의 욕망에서 기인한다. 도대체가 그 욕망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욕망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배팅의 액수를 높여야 하는데, 깔린 판돈이 이 욕망에 따라 가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제 합리적인 이성이 계산을 포기한 지점에 폭력과 탈취, 다시 말해 초기축적의 반복이 다시 생겨나는 것이다. 포드주의의 종말이란 다른 게 아니다. 네그리라면 이를 '가치론의 붕괴'라고 말했을 것인데, 알트파터는 이를 친절하게 풀이해 준다. 즉 실물자본이 추동하는 잉여가치 창출이 금융자본의 수익률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지점, 실물자본의 불행한 회계사가 손익분기점 위로 치솟는 이자율을 공포에 질린 채로 바라보아야 하는 그 지점에서 합리적 경제 정책은 종말을 고하고, 그 대신에 국가 폭력과 탈취가 횡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강대국, 특히 미국과 같은 나라의 군사력은 정치나 지역 방위 체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경제논리(최대 이윤 달성)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시의 같잖은 종교적 신념이나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보다 더 추잡한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인지 물어 볼 수 있다.
 
거기에 오바마는 다를 것인가? 사실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 짐승의 논리인 신자유주의가 인간 오바마의 의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정이 이런데, 7%씩이나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사기를 쳐 대고 대통령이 된 자와 이 경제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애초에 그 사기라는 것이 현실이 되기엔 요원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 대통령은 아예 신자유주의 짐승과 하나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을 말하자면, 인간은 동족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수 있는 입과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양심이 있고 짐승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와 유리된 자본, 윤리적 양심과 유리된 권력은 이래서 일란성 쌍둥이다.
 
타락한 삼위일체가 자본주의의 내외적 요인이라면 그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위력은 이제 노동과 재생 가능 에너지 그리고 코뮤니즘적 경제체제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유령의 도래가 평화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혁명이란 비둘기 걸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성난 맹수처럼 덤벼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혁명, 그리고 폭력적 변화라는 테제는 대립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알트파터가 홀러웨이를 비판하면서 말하듯이 '권력'을 잡지 못하는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권력에 집착하는 혁명도 끝내 파산할 뿐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권력을 위한 정치혁명이 한 쪽에 있다면, 그 다른 쪽에 화석에너지 자본주의의 종말, 재생 가능 에너지 사회체제의 도래가 있다. 오히려 후자가 더 힘들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는 초기의 산업자본주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화석에너지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자본은 이를 하루 이틀 만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심지어 민중혁명의 당사자들조차 그럴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이 공멸의 욕망을 다른 체제로 대체하지 않는다면, 그 뇌관이 터지는 날에 또 다른 지배계급이 똑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똑같은 에너지체제를 유지하려할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규율이 내면화된 다중(multitude)들은 또 다시 죽음의 사이클을 반복할 것이다.
 
따라서 '시장실패'의 원인을 단지 금융자본의 투기욕망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금융자본이 애초에 폐기해버렸던 그 가치, 즉 '사회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 이 사회적 가치에는 '자연'이라는 매우 중요한 존재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명심하자.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체의 존재조건이라는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무분별한 사용은 이 존재 조건에 대한 침해이므로, 결국은 인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폭력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알트파터의 말대로, 먼저 경제 과정을 단지 가치창출과정으로만 보지 말고, '원료와 에너지 변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그 어떤 체제도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복수는 반드시 회귀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재촉한 이 복수가 또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연대적 경제(코뮤니즘)와 함께 자연을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혁명의 필수적인 조건인 동시에 그 혁명을 또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필수 조건이 된다. 영구혁명이란 정치에 있지 않고 생태에 있는 것이다. 정치 혁명의 성과는 나날이 이어지는 생태 혁명의 엔진이 없으면 채 한 세기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추론할 수 있다.
 
알트파터는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성장하는 이들 프롤레타리아를 '목소리'로 지칭한다. 홀러웨이가 '절규'라는 다소 비관적인 톤으로 지칭한 것을 말이다. 확실한 것은 알트파터나 홀러웨이 둘 모두 프롤레타리아를 더 이상 마르크스가 그렸던 방식으로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지금/여기'와 알트파터의 '지금/여기'는 다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계급과 마찬가지로 알트파터의 계급도 막 성장하고 있으며,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뭐라고 했던가? 가장 강력한 위력은 잠재적인 것이다. 레닌이 다시 산다면 이 잠재성의 동력을 뭐라고 했을까? 분명 러시아 혁명 때와는 달리 말했을 것이다.
 
알트파터의 지성은 매우 비관적이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자본주의 내부에 살면서 지성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비관주의라면 그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타락한 정권 내부에 사는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 대중의 역량에 기생하면서도, 그 대중을 탄압하는 권력은 결국 제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유령을 부를 것이다. 야만의 자본주의에 비열한 권력, 2009년 봄 현재 한국 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지옥도의 살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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