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강양구·강이현의 <밥상혁명>, 살림터 펴냄

 
"살고 싶다면, 당신의 밥상을 엎어라!" (프레시안,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2009-12-25 오전 9:28:53)
[화제의 책] 강양구·강이현의 <밥상혁명>, 살림터 펴냄
 
요즘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치고 학교 급식에 관심 없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학교 무상 급식을 둘러 싼 대립으로부터 급식의 안전성과 품질 문제 등등. 그런데 이 문제를 하나의 교육 정책 항목으로 다루는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교 급식이라는 화두를 통해 인간관과 세계관을 조망하는 경지에까지 이를 수는 없을까?
 
이런 점에서 일본의 경험은 우리에게 음미할 만한 사례가 된다. 이른바 '먹을거리 교육'이 그것이다. 교육 이론가들의 아이디어 차원이 아닌 정부 차원의 공식 정책이다. 2005년에 먹을거리 기본법까지 제정되었다. 이 법은 그 전문에서 "아이들이 풍부한 인간성을 키우고 살아가는 힘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먹을거리'가 중요하다. (…) 그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기본이다"라고 선언한 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국민의 식생활에서 영양 불균형, 불규칙한 식사, 비만과 같은 생활 습관병 증가, 과도한 다이어트, 먹을거리의 안전 문제, 외국 의존 문제가 생기고 있다." 이 한 문장 속에 인간의 삶과 건강, 근대성의 한계, 지구화의 폐단이 강력하게 암시되어 있다. 총리가 의장을 맡는 추진위원회가 생겼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이 정책이 시행되고 있으며, 국회에 매년 이행 사항을 보고해야 한다. 지역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생산자와 영양사가 상의해서 급식의 내용과 질을 결정한다.
 
한 마디로 말해 건강한 먹을거리 문화의 정착을 위해 전 사회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얌전한 모범생 같아 보이는 정책이지만 그것의 실천적 함의를 살펴보면 식품의 상업화, 다국적 기업, 정치지리학 등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야심이 엿보인다. 이 정도면 일본 생활정치의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나라를 한번 돌아보자. 학교 급식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시민운동 쪽에서 식생활교육기본법을 제정하자는 요구를 계속 해왔다. (실제로 최근 일본을 따라했지만 그 내용에서는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의 식생활교육지원법이 제정·발효되었다.) 그러나 2006년에 발생했던 기업 제공 식자재 식중독 사건 이후 학교 급식을 2010년까지 직영 급식으로 전환하도록 개정된 학교급식법을 다시 무효로 하려는 개정안을 일부 국회의원들이 제출해 놓은 상태다. 사회적 퇴행의 징표다.
 
우리 식중독 사건을 전해들은 일본의 한 영양사가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학교급식을 정말 대기업이 좌지우지하나요? 어떻게 그 중요한 교육을 대기업에 맡길 수가 있죠?" 아이들의 밥그릇에까지 장사논리를 들이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천박상과 물신성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밥상혁명>(강양구·강이현 지음, 살림터 펴냄)에 소개된 수많은 사례들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생생한 사례들을 훑어가다 보면 어느새 이 책의 마지막 쪽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놀라움과 분노와 희망이 한꺼번에 축약되어 있는 책, 그것이 이 책을 덮으면서 든 느낌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먹을거리에 대한 책들이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밥상혁명>은 몇 가지 확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 책은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무장한 현직 언론인들이 철저한 현장 조사를 거쳐 완성해 낸 의지와 발품의 산물이다. 먹을거리의 생산과 유통 현장을 찾아 국내를 샅샅이 훑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외국으로도 눈을 돌려 미국, 영국, 인도, 일본, 프랑스, 캐나다 등의 먹을거리 운동 현장을 직접 취재했다. 이 정도로 넓은 폭과 현장성이라면 국제 저널리즘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높은 차원의 시도라 할 만하다. 미국 같았으면 당장 퓰리처상 탐사 보도 분야의 후보 목록에 올랐을 것이 분명하다.
 
둘째, 이 책은 곳곳에서 저널리스트의 날카로운 현실 감각으로 원론적 차원의 문제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는 수작이다. 그 결과, 스스로 꽤 진보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도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좀 더 깊이 생각해볼 고민거리를 선사 받는다.
 
예를 들어 보자. 건강과 환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기 농업 먹을거리와 친환경 식품이 좋다는 데 찬성할 것이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농약 친 농산물을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농산물만 찾아 먹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이 책의 '농약에 의존하는 농민, 밉지만…'이라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다음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①먼 나라에서 생산된 유기 농산물. ②제3세계 농민들이 생산한 공정무역 먹을거리. ③관행 농업(통상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지역 먹을거리. 정답은? 세 번째다. 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일찍이 해답을 제시한 바 있다. "덮어놓고 자꾸 차원을 높이는 것은 안 됩니다. (…) 유기 농업을 하는 농민뿐만 아니라 농약을 쓰고 화학 비료를 쓰고 그러는 농민까지 안고 가야 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야 질 낮은 유정란을 생산하는 생산자를 내치는 게 당장은 편하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이 땅의 농민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행 농업으로 생산하는 농민들을 끊임없이 설득해 내야 한다. 그게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윈윈(win-win)하는 길이라고 한다. 학교, 직장, 식당에서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구매하면서, 동시에 소비자가 유기농 먹을거리를 원한다는 시그널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격려, 인센티브, 꾸준하고 지속적인 진보의 방향 제시, 대중과 함께 하는 운동 등이 이 교훈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이것을 연대와 상생의 환경-생명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셋째, 이 책은 단순한 계몽을 넘어 책을 덮은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리키는 방향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적절하게 소개되어 있는 각종 참고 자료, 필요하면 당장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국내외의 수많은 단체와 운동과 사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영감을 통해 독자들의 의식을 자극한다. 필자들이 언론인이자 학구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전문가들이었으니 가능한 시도였을 것이다. 실제로 평자는 이 책에 소개된 참고 문헌만 뒤져도 <먹을거리의 사회학>과 같은 강좌를 한 학기 동안 진행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넷째, 이 책은 우리의 먹을거리가 인간에게 존재론적으로 얼마나 근본적인 쟁점인가 하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까지 짚어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먹는 음식들로 이루어진 생명체이다. 이것은 가장 초보적이자 환원 불가능한 원초적 가정에 속한다.
 
이런 전제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만 형이상학이든 종교이든 철학이든, 다음 단계의 사고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물리적 실존의 문제를 시장과 대기업과 로비 집단, 그리고 그들에게 놀아나는 정부에 맡길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라면 인간이 공동체에 뿌리를 내린 존재로서 집합적 차원에서 민주적이고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이 책의 저변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바로 민주주의의 두 가지 원리 자체를 묻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먹을거리라는 렌즈를 통해 '민의 평등'(육신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로서), 그리고 '민의 지배'(엘리트와 권력자가 아닌 풀뿌리 민초들이 자기 삶을 통제하는) 원리를 지금 여기에서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식량 안보가 아니라 식량 주권을 이야기한다. 우리 존재의 근본인 먹을거리를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는 먼 나라 시장 논리에 맡기는 것만큼이나 반민주적인 행태가 어디에 있겠는가? 4대강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양수리 유기농 단지를 엎어버린다면 세상에 그런 반생명적 정치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관점으로 본서를 읽어보면 왜 이 책이 2003년 목숨을 끊은 농민운동가 이경해 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박진도 교수의 간곡한 인터뷰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의 문제와 실현 가능한 진보의 문제를 실천-이론 양면에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지구화에 대응하는 논리로 네 가지가 있다고들 한다. 지지, 거부, 개혁, 대안이 그것이다. 이중 <밥상혁명>은 대안의 관점에서 지구화라는 흐름을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런데 반지구화 대안론은 공상적이고, 고립되어 있으며, 세상과 등을 진 소수파들의 은둔지향 행위, 아니면 비타협파들의 근본주의적 선택이라는 딱지가 붙기 쉽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고정 관념을 보기 좋게 날려 버린다. 대중과 함께, 실천 가능한 보폭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연대하자는 대안론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토피아적 현실주의의 표본과도 같다. 이런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주장 앞에서 우리가 설득당하지 않을 재주가 없을 성싶다. 자기 자신과 우리 이웃과 인류의 삶을 생각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일독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부제가 왜 "세상을 바꾸는 21세기 생존 프로젝트"라고 되어 있는지, 절박하게 따져 보면서 말이다.
 
-----------------------
사람 살리는 ‘반체제 밥상’ (이권우 도서평론가·안양대 강의교수, 2010-02-05 오후 07:26:44)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태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것이 덫이고 함정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불이익을 참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의가 불이익을 안겨주는 일도 왕왕 있다. 더욱이 불이익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불의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불이익과 불의 사이에 인식의 전환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놓여 있다.
 
먹을거리를 놓고 세상이 온통 시끄러울 적에도 이 점에 착안해 상황을 주시한 적이 있었다. 불이익과 불의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데, 과연 어디로 확산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 뜨거운 열기가 슬그머니 사그라진 것을 보면, 그리고 좀처럼 되지피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불이익과 관련 있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밥상혁명>은 지역 먹을거리로 밥상을 채울 때 세상마저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목만 보고도 여러 가지를 곱씹어 볼 수 있다. 정말 먹을거리 문화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개인 차원에서 혁명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길들어져온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맛있고 싼 것들에만 익숙해졌는데, 가까운 곳에서 유기농업으로 재배된 것으로 밥상을 채운다는 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다. 돈도 들고 시간도 들고 입맛도 적응하려면 한참 걸리는 법이다. 그럼에도 건강이라는 이익을 생각하면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밥상혁명>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밥상에서 시작한 변화가 세계체제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니 말이다. 정의로운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지역 먹을거리를 소비하면 궁극에는 세계 차원에서 식량정책과 무역구조를 재편할 수밖에 없고,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게 된다. 지은이들은 이러한 점을 입증하기 위해 그야말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책에 담았다. 변화의 바람이 곳곳에서 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또다른 핵심어는 식량주권이다. 정부차원에서는 식량안보에 관심을 쏟고 있는데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식량을 확보하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식량주권은 식량자급을 뜻하며, 이 정신에 동의할 적에 밥상혁명은 시작된다. 불이익에 대한 거부가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 확대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길이 있단다. 지금 밥상을 엎고 지역 먹을거리로 다시 차리면 된다. 소비자가 건강해지고, 소농이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재래시장이 살아나고, 마을 경제가 활기를 띠고, 굶어죽는 사람이 줄고,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한번 해볼 만한 일이지 않은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