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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0/30
    시기심
    피에로
  2. 2006/10/26
    이데올로기, 비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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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10/26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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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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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10/22
    피에로
  6. 2006/10/21
    긴장푸시오
    피에로

시기심

시기심

-퇴근하자마자 쓰는 일기.

 

오늘 직장에서 든 생각. 사람들은 서로서로 시기한다. 왜 그럴까, 내가 보기엔 너무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에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 같다. 직장에서 다른 부서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별 것도 아닌 일로 동료들끼리 티격태격하는걸 보곤 한다. 상사한테 '괜히 너떄문에 혼났다'는 게 대부분 다툼의 이유. 물론 부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 것 같다. 우리 팀은 별로 그렇지 않으니까. 그러나 어쨌든 '내가 상사한테 미움받아 일자리에 불안정해지는 것'의 탓을 동료들에게 돌리는 게 일상다반사. 연대는 언제 가능할까. 관리자들은 이 틈, 이 헛점을 이용해 끊임없이 노무관리의 수단으로 감정들을 이용한다. 저들은 도도하게 저 멀리서 쳐다보면서 티격태격하는 부하직원들을 보며 비웃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실수했는데 한명만 탓하는 관리자의 저 뻔뻔함!! 오늘 오후 그의 심리가 나에 의해 간파되었다. 썩소하는 나쁜넘.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시기심을 부추기는 시스템으로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 같아보인다. 아니면 소외시키고 배제시키거나. 난 관리되지 않는 대신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이 지겨운 반복되는 노동!!! (그러나 칼출근 칼퇴근의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 5일치, 6일치... 누적되는 일들이 계속 쌓이고 있다. 허허. 난 정말 팔짜늘어진 '계약직'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초반 포지셔닝의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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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비극

 

우리같은 20대의 젊은 사람들이 보수화되고 있다며 한탄하는 이야기들을 여기저기서 듣곤 한다. 답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숨이 가득 베어있다. 그 한숨 소리 가득한 한탄에 100번 공감하나, 그러나 그 한탄이 우리의 전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때면, 또다른 한숨을 쉬게 된다.

 

21세기 남한 땅에 존재하는 20대의 새파란 대학생들이 지닌 생각은 모두 자기 존재를 배반한 허위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그 유명한 '허위의식' 레테르는 일부만 맞고 상당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정녕 허위의식이라면 근대적 계몽만으로 모든 운동의 내용이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운동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대중들의 의식이 급진화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따라서 난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성 주위에 맴돌거나 몇몇 주황빛깔 남한 지식인들이 퍼뜨린 그 레테르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마나 한 말이란 것이다.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사람들의 의식을 결정짓는 것은 문화, 정치, 경제, 일상생활, 민족주의 등 여러가지들이 복합적으로 뭉쳐져 형성된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닐까. 운동의 목표는 이데올로기를 경외시하며 무시하고 계몽하여 다른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대중적인 이데올로기 안에 침투하고 급진화시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 운동의 대다수의 양태는 거의 그러하지 않은 것 같다. 답답함과 조급한 계몽주의적 구호만 공허하게 맴돌뿐. (운동권들은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운운하지만 정작 이데올로기 투쟁을 하진 않는다. 아니면 버겁거나. 영원히 버겁다면 이 버거움은 영원한 늪으로 우릴 계속 빠뜨리고 말 것이다.)

 

술자리 대화 주제의 75퍼센트가 '돈'인 20대 '서민'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역시 서민이기에 '그 현실적인 이야기'의 내면을 알고 있는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도통 모르겄다. 즐거운 얘기, 해방의 기운이 넘치는 이야기 말이다. 오늘 사무실 사람들이랑 함께한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의 대화 주제는 돈, 재테크, 로또, 연애(연애를 하면서 무엇을 샀다는 둥.) 등 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20대는 왜 이토록 비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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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일단 지금 이 순간에는 최선을 다 하고,

불합격한다면 그땐,

그 다음, 그때가서 생각해야지.

생각이 복잡한건 별로 좋지 않다.

이 진보블로그는 내가 아무 쓰잘데기 없는 말을 씨부려놔도 글쓴 순서대로 왼쪽 bar에 뜨니까 조금 부담스럽다. ㅎㅎ 쓸데없는 말을 끄적거리기 부담스럽다고 해야하나? 그러나 지금은 극복되었다, 다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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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안가기

어느덧 20대 중반.

점점 군대 집단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커지고있다. 생각할수록 짜증나는데, 문제는 피할 방법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피해? 아니, 피하는게 아니라 무시하는거라고 해두고 싶다. 지들이 뭔데 내 인생에 관여한단 말인가. 안그래도 주입식 교육과 군사주의 문화로 맘에 안드는데 내 인생에 태클까지 거니까 더 맘에 안든다. 지들이 언제 나한테 뭐 해준거라도 있단 말인가. 나같이 평범한 애들은 그들에게 빼앗기기만 했을뿐이다.

 

거기가서 인생허비하고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 나랑 비슷하게 군대가 무지 맘에 안들어 몸이 베베꼬이며 따분한 병장, 상병 생활을 버티고 있는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정말 개 쓸데없는 짓거리로 시간낭비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든다"는 것이다. 씨뎅, 내 아까운 인생. 절대 안가. 죽어도 안가. 그들의 부름을 무시할 방법을 거의 일주일에 세네번은 생각한다.

 

1. 병역거부

가장 끌리지만, 가장 어려운 선택이다. 그 답답한 공간, 감옥에서 1년4개월이나 있어야 한다. 예전에 유치장에서의 2박3일도 정말 답답하고 깝깝해서 죽을 것 같았는데 1년4개월(=485일)을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그 어두컴컴한 좁은 방에서 말이다.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꺼리들을 생각해보곤 하는데, 독서와 집필활동? 허허. 수많은 독서와 그와 연계된 집필활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서술된 아시아 민중史 따위의 책을 한번 써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계획이라는 생각이 당연히 든다. 이 생각을 할수록 1년4개월을 버티고(?) 나온 분들이 존경스럽다. 내가 군대가기 싫은 이유가 상상력이 빈곤해질까봐, 임을 감안할때 감옥은 과연 어떤 공간일지... 감옥은 상상력을 압살할 것이 분명하다.

 

2. 무작정 연기 이후 대체복무

무작정 연기하다가 대체복무법이 입법되길 기다리는 것이다. 정말 대책없는 생각이다. 그래도 내가 남한정부가 하는 선거때 민주노동당에 투표하는 얼마없는 이유였는데, 좀 가망 없어보인다. "2012년 집권"은 무슨.

 

3. 방위산업체 현역병 취직

IT업계라면 하늘에 별따기다. 아는 사람 있어야 가능하다는 얘기가 쫙 퍼져있다. 아는 사람 없다. 이게 가능하다면 다른 거 다 제치고 이거 하겠지만,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까. 일단 정보처리기사 요런거라도 공부해서 따놓을까, 하고 생각해는 중.

 

4. 프랑스로 도피, 장기체류.

요즘들어 떠오르고 있는 주요 후보다. 학교 졸업하고 프랑스로 여행비자로 간 다음에 거기서 불법체류자로 남는 것이다. 서른네살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법적인 문제를 좀 더 알아봐야겠다. 영영 고향땅으로 돌아오지 않을 순 없다.

 

5. 사회주의 혁명

젤 좋다. 혁명 이행기 속에서 자본가의 군대가 폐지되는 것이다. 이행기이기 때문에 군대가 완전히 폐지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부터 군대는 자발적으로 입대가 가능하며, 계급간 서열이 없고, 혁명 이행 투쟁에 관한 부대별 집단적인 토론과 논쟁이 살아있으며, 학습과 여러가지 여가활동(예컨대, 영화 제작, 스노우보드 타기 등)이 가능한 공간으로 변화'할수도'있다. 그럼 군대 갈지도 모른다. ㅎㅎㅎ 근데 아무래도 3년안에 이런 시기가 오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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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과 투쟁하는 민중들에게 진 빚이 있다.

 

언제부턴가 나의 존재론적 물음표와 혼란스러움들의 마침표를 항상 그곳에 찍어왔다. 투쟁의 거리. 적어도 그곳엔 명쾌함이 있는 듯했다. 항상 유예시켜왔다. 적어도 존재하는 나는 항상 그곳에 있었으니까. 그곳에서 얻어진 해답, 생겨난 질문, 모두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곤 했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투쟁의 거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고민들, 사람, 결의, 선도투, 상처들 모든 것이 내겐 '투쟁의 거리'이다.

 

투쟁의 거리에 선 민중들에게 진 빚을 어찌 갚을까. 그곳에 서있지 못한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답을 잃어버리니까. 내 눈 앞에 마주했던 열사들의 말, 글 그것들을 어찌 잊을까. 나는 절대 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으로 그녀를 한없이 우러러보게 했던 그녀의 고귀한 투쟁들, 어찌 잊을까.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 무엇이 옳은가? 삶 속에서 질문은 계속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조금씩 나를 수정하면서 나의 역사와 삶을 변화시켜왔다. 스릴넘치고 아픈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빚만 잔뜩지고 난 조금 비겁하게 빗겨 서 있다. 비켜서있는건가? 뭐 아무렴어때, 내가 비겁한 것만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비겁하지 않은 모습으로 삶의 빚을 갚기 위해 난 무엇을 하고 있는건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내가 준비하고 있는 미래는 아름다울까?

 

매일같이 지치고 힘들었지만 숱한 질문들로 부단히 날 이끌어왔던 3년여간의 그 날들이 그립다. 그러나 그리워할 수만은 없는 요즘이다.

 

빚더미의 무게가 내 삶을 외롭고 부끄럽게 만든다. 어쩌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민주노총 조끼를 입은 이름없는 노동자들을 만날때에도. 짧을 것이라고, 아니 짧았으면 하고, 살아내는 지금 이순간에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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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푸시오

 

다들 조급해보인다. 세상은 뭣같고 나는 열받아 죽겠는데 '학우 대중'들은 인정도 안해주니까. 속을 다 까발려서 보여주고 싶은데 알아주지 않으니까. '니들' 일인데 들은 체도 안하니까.

 

"학생운동, 너무 경직되어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소문이 적어도 쁘띠부르주아들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초반의 모습으로 정체된 체 그 끝자락을 이어온 소위 문화예술운동에는 근거없는 자존심과 경직성만 가득할 뿐, '문화'도, '예술'도 없다. 누구는 문화와 예술을 운동성 및 대중성과 기술성으로 나누더구만, 문화도 예술도 그런 단순명료한 구분선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문화 그 자체, 예술 그 자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학생운동의 예술운동의 역사같은건 몰라 한계가 있는 생각이긴 하지만 art를 '기술로서의 art'의 의미로만 해석하는데에서 소위 문화예술운동의 오류는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냥 아주 뻔하게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 학생운동의 모든 영역에 예술적 감수성의 활력을 채워넣는 운동만이 지금 가장 유효한 '문화운동'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단지 몇몇 80년대 아류 감수성으로 운동성을 고취시켜온 활동가들이여, 80년대 후반에 끝난 한시대의 문화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한다. 투쟁가요에 맞추어 활기차고 격렬하게 흔드는 몸짓 예술이나 '빡센' 투쟁노래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집착'하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자신의 문화적 감수성의 영역을 왜 한정시키고 왜곡시키는가. 언제나 모든 운동은 그 자체로 '문화운동'이 되어야 함을 모두 잊은 듯하다.

 

학생운동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만약 이 지체된 과제로 자멸하고 있는 문화운동이 스스로 왜곡된 지형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왜곡성을 점점 강화시키는 작용만 하고 있다면, 지금 한줌도 없는 학생운동 내 '분업화된' 개별 영역으로서 문화예술 부위가 존재한다는 것도 과감히 해체시켜야하는 구조가 아닐까. (풍물패와 몸짓패, 노래패들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님!) 마치 볼트를 조이는 A와 프레스를 내리는 B처럼 분업화된 학생운동 활동가 구조가 멀쩡한 구조라고 여겨질 수 있는가.

 

예술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라. 비정상적인 구조를 다분히 21세기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 난 심지어 '해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겠다. '문화운동'을 몸짓패 활동가들이 하는 운동으로 오독하는 것은 운동 내의 감수성을 해체시키는 기능만 하게 될 것이다.

 

또한 지금은 사실주의든 표현주의든, 서사적 연출이든 그 자체로 소모적인 논쟁을 할 시기도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만약 내부에 그런 논쟁이 존재한다면 그 자체로는 아주 훌륭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자신의 표현으로 '운동'의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펼치고,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 것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술 마시고 독백하는 것도 운동인 동시에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21세기 좌파는 스스로 예술가이자 혁명가가 되도록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이어야 한다. 대관절 어떤 무식한 섹히들이 그런 구분을 해놓은 것인가. 답답해하는 분들도 다 마찬가지, 긴장푸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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