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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24
    20세기와 2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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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11/22
    피가 거꾸로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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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c access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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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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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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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10/30
    조희연 교수의 진보세력 다원화론 비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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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10/30
    거만한 우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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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와 21세기

 

한달정도되었나, 도서관에 다닌다. 그러고보면 종로구는 잘만 찾아보면 참 공부하기 좋다. 국립도서관인지 시립도서관인지, 이 근처에 커다란 도서관이 2개나 있다. 그것도 경복궁 반경 1km안에. 검색해보니까 다른 지역엔 도서관이 거의 없던데, 종로구민이라서 참 좋다.

 

삼청동길 어귀, 옛 경기고등학교 터에 있는 정독도서관에가면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나고 건물 색깔도 한결같이 베이지색으로 덧칠된 게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예전엔 강당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식당 건물 입구엔 "참새가 들어오니 묻을 닫아주세요"라는 귀여운 멘트도 적혀있다. 참새가 들어오니 문을 닫아달라니 ㅋㅋ 문을 닫으시오, 라는 냉정한 지시어 대신 90년대의 낭만이 있는듯하다. 정독도서관은 정말 서울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이 살아있는 도서관임에 분명하다. 화장실은 좀 구질구질하지만 다른 시설은 썩 괜찮다. 인터넷을 맘껏할 수 있는 정보열람실, 어린이도서관, 온갖 잡지가 비치된 간행물실이 있는가 하면 할아부지들이 하루죙일 종복를 뒤지며 자신의 허구적 뿌리를 찾다가 '실망스런 표정으로' 돌아가는 족보열람실도 있다. 열람실에선 스팀 소리가 덜컹덜컹 나는데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그중에 제일 스타일 안맞는 분들은 찌지지직~ 듣기 싫은 현광펜소릴내며 별로 효율적인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법전이나 부동산공인중계사 시험 참고서를 암기하는 할아버지들이다. 왠만하면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앉는다. 커플들도 좀 짱난다 ㅎㅎ 그리고 아무래도 정독도서관의 묘미는 언덕입구 앞에 삼청동 미술관들이랑 '라땡'과 '먹쉬돈나'가 있다는거! 먹쉬돈나 줄은 항상 길게 늘어져있다. 그래서 기다리는거 무지 싫어하는 나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 뭐가 그렇게 맛있길래..

 

몇일전부터는 정독도서관말고 종로도서관에 다닌다. 정독도서관이 20세기라면, 종로도서관은 21세기다. 중학교때 아주 가끔 시험공부하러올땐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었는데 지금은 완전 최신식이다. 건물 리모델링도 새로하고 시설도 새로 다 바꿨나보다. 구비한 책도 많아서 볼만한 책이 참 많다. 매점도 깔끔하고, 정독도서관과 다르게 열람실도 전부 칸막이가 쳐있다. 덜컹대는 스팀소리도 안나고 ㅋ 학습 이상한 방식으로 하시는 아저씨들도 없다. 다들 쥐죽은 듯 조용하다. "저기,저기, 120번에 앉은 **고 오빠 디게 멋있지," 라면서 맨날 수다떠는 대마왕 여중딩들도 거의 없다. 다들 묵묵히 행시공부들에 열중하실뿐. 20세기와 21세기의 묘한 경계가 느껴진다. 예컨대 정독도서관은 열람실 입실할때 종이쪼가리를 받아서 들고가야되는데, 여긴 그런게 없고 인터넷을 써도 완전 pc방 스타일이라는거? 어이쿠,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14분 나와있다고 나오네.

 

오늘은 8시반에 왔다. 여기서 대충 개기다가 밤10시쯤되면 친구생일추카해주러 가야된다.

휴, 이제 딱 열흘만 있음 d-day다. 지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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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거꾸로 솟는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연합뉴스와 온갖 잡탕 인터넷언론, 보수언론들의 '교통대란' 개수작 논리가 인터넷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속이 뒤집어져서 그딴 기사 읽기도 싫고, 수준떨어지는('이라고 생각하고말기 쉬운') 네이버 댓글 악플러들 욕설들을 보기도 싫지만. 그러나 너무 답답하다. 기껏 만들어놓은 한미FTA 반대 여론을 우습게 내주는것 같아서 뭔가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만든다. 근데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막상 생각이 안난다. 아니, 생각하기 싫은 걸지도... 너무 답답하니까! 다른 동지들도 다들 그런 기분일것 같다. 이럴땐 좌파 블로그가 이곳에 갇혀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학교 안에서 논쟁이 한창이며 운동권들이 막 욕먹을때, 활동가들 모두 운동권 동아리방 안에 쳐 모여있는 기분이랄까?-_-;;; 물론 그랬던 적은 없다. 강의실에 가서, 교문앞에 가서 리플렛을 뿌리고 발언을 했었드랬지. 그치만 난 지금 너무 무력하다. 앞으로 열흘간은 더 아침일찍 도서관 열람실에 가서 하루종일 앉아있어야하는 나의 모습...

 

아휴, 기분이 대략 안좋다. 문제는 인터넷 여론을 장악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 개 네이버, 쿠키뉴스, 연합뉴스...를 이겨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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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access 운동

사실 public access 운동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왠지 따분해보여서 관심없었는데, 내용을 듣고보니, 바로 내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운동이 바로 이 운동이 아니었나 싶다. 예컨대 내 생각은, 투쟁 동영상이나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아무리 생산되어도 '운동권들'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우린 어떻게 대중들에게 진실을 알려나가야 할 것인가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샌가 우린 매체라는걸 갖고 만들고, 또 이렇게 jinbo.net같은 훌륭한 싸이트도 있지만, 그리고 수많은 투쟁들을 동영상에 담아왔지만, (물론 난 못했고, 그걸 찍는 분들이 하셨다.) 우리가 정작 알리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대한 접근권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은 있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그럼 어떻게 접근권을 확대시킬 것인가. 그리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만들것인가. 잘은 모르지만, public access운동이 바로 이런걸 추구하고 쟁취하기 위해 싸워가는 운동인 것 같다. 아직은 '요구하고', '제안하는' 운동의 한계에 머물러있지만, 다양한 상상력을 필요로하며, 또 그 상상력만큼 성장할 수 있는 운동이 바로 이 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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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채널] - 쐐기들의 운동
 


꿈돌이 ( '닫힌채널' )

  
(1) ‘닫힌채널'을 아세요?  - 이 사람들 재미있게 삽니다.


인터넷 카페 ‘닫힌채널'(http://cafe.naver.com/shutchannel.cafe)의 활동이 이제 석 달째 되어갑니다.

‘닫힌채널'이 뭐냐구요?

영상미디어를 통해, 자기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순전한 마음으로 발언을 하고자  KBS의 ‘열린채널'에 액세스를 시도하던 시민제작자들과 이의 문제점들을 진작부터 알고 그 개선을 끊임없이 요구해오던 미디어 활동가들이, 더욱 더 완고한 고집쟁이처럼 되어가는 KBS와 방송위 등 관계기관들의 횡포와 무관심에 상처받고, 열받고, 스트레스 받으며 ‘그럼 그걸 바꿀 방안을 마련해보자!' 며 꾸린 모임입니다.

이 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이용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보통 2주에 한번 씩은 ‘얼굴보는 만남'을 갖는데, 이 때, 여러 가지 수다를 떨면서 생각과 마음과 영혼의 진동폭을 넓혀갑니다. 7월에 문을 연 이 카페의 가입자는 9월 말 현재 10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들은 2006년 8월, 열린채널에 참여했던 시민 제작자를 대상으로 심층적인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이에 대해 37명이 의견을 보내주었습니다. 설문의 결과 분석에 대해선 보다 전문적인 분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여기서는 기억나는 한 가지 질문의 결과를 이야기하겠습니다.  11번째 문항은 ‘KBS 시청자 지원센터가 지원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였는데, 이 질문에는 31명이 답을 주었습니다.  답변자 중 7명은 ‘잘못하고 있다',  15명은 ‘매우 잘못하고 있다', 9명이 ‘그저 그렇다'고 대답하였고, ‘잘하고 있다' 거나 ‘매우 잘하고 있다'라고  대답한 제작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닫힌채널 사람들은 ‘아! 상처받은 게 나만이 아니로구나. 답변자 전원이  KBS의 열린채널의 지원이란 것에 대해 문제를 느끼고 있구나 !'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KBS 시청자서비스팀에 직간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최근 새로 구성된 제 17기 KBS 시청자 위원회 (현행 방송법에 따르면, 이 곳이 열린채널의 책임 운영주체라는 것을 다들 아시죠?) 위원들에게 ‘열린채널'의 파행적 운영상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가 하면, 열린채널의 정신을 담은 작품들을 모아서, [분노의 확성기 -방방곡곡]이란 제목의 오프라인 전국순회상영회를 진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2) KBS가 정말 ‘열린채널을 알기나 하는 것인가요?'

 

저는 올 8-9월에, 시청자 참여프로그램 운영협의회의 대표중의 한사람으로써 KBS 시청자 써비스팀장과 면담의 자리를 갖기도 하고, 국회의원실이 마련한 토론회에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시청자 KBS써비스 팀장은 너무도 당당하게 충격적인 발언들을 쏟아었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발언들의 요지를 적어보자면


‘시청자들은 아마추어들이고 KBS는 프로들의 집단이다. '
‘이제 열린채널에 참여하는 시청자들도 경쟁을 해야한다 '
‘KBS 입장에서는 [열린채널]이 다른 외주제작 프로그램과 다를 게 없다!'
‘ KBS(의 편성권은) 본래 시청자를 대표하여 전문가들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는 '다수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열린채널]은 소수자를 위하여 징발당한 것이다.'
‘왜 용돈달라는 아이들처럼 떼쓰느냐? 뭔가 문제가 있으면 방송위에 가서 하라. '
‘왜 편성시간도 적은데다가 사람들도 몰리는데 KBS 와서 액세스를 하느냐? 다른 채널에 방영신청을 해라'


등입니다. 이와 같은 발언들에 대해 시민제작자들이 반론을 하려하자, 그는 더 이상의 견해 표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말들이 두렵냐구요? 아닙니다. 그냥, 참 막막해집니다.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서 정신을 자리게 될 때 스멀스멀 다가옵니다. 그래도 ‘시청자들의 액세스권'에 대해 가장 고민을 많이 하여야 할 위치라고 추정되는 ‘KBS 시청자써비스 팀장' 이란 분의 생각이 그 정도라면  KBS라는 독점적 미디어기업의 ‘퍼블릭 액세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할 것인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지요. 무리한 바램이겠지만, 이와 같은 발언이 ‘실무자의 독특한 개인적 생각의 표현이기를 바랍니다.
 


(3) KBS의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생각을 좀더 들여다봅시다.
 


1) ‘시청자들의 참여 의지에 비해 편성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퍼블릭액세스 권리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는 주장에 대한 태도

시민제작자들은, ‘시민의 액세스는 늘어가는데, 소통의 창구는 극도로 작다. 2000년 당시의 시민사회단체의 원안대로 주 60분 편성이 되도록 해야 한다. 현재, 신청제작물의 1/4 만 선정되고 방영을 할 수 있다.  매달 10편-20편의 제작물들이 4편에 못 들었다는 이유로 불선정 통보를 받아야한다. 이는 심사의 형평성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어떤 제작물이, 중요하며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을지라도 협소한 편성시간 때문에 불선정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퍼블릭액세스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KBS담당자는 퇴행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이들은 ‘신청하는 제작물이 많아 골치가 아프다. 시민들도 프로들처럼 경쟁을 해야한다. 아무리 많은 제작물들이 편성신청을 하더라도 월 4편만 선정하는 게 답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는 다양한 환경과 가치관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상업적으로 활동하는 프러덕션들처럼 경쟁을 하여, 거기에서 승리한 자에게만 발언권을 주겠다'는 발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는 미디어 독점구조 속에서 그동안 부정당하거나 무시당했던 소수자들에게 자기표현 기회를 공공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퍼블릭액세스의 취지를 훼손하는 말입니다.

결국 ‘1등부터 4등까지의 의견을 뺀 나머지의 의견은 문제의식이나 사회.문화적 함의와는 상관없이 무시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2) ‘시민'이 ‘KBS를 보호하는 괴상한 이행보증보험제도

[현재의 보증보험제도]는 ‘KBS에 발생할지도 모를 손해'를 대비해서 액세스를 하려는 제작자가 대신 보험을 들어주는 식입니다.  KBS는 ‘그 보험료는 나중에 ‘방송위'로부터 보전받는다‘ 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KBS는  열린채널 운영지침 15조에 ‘ ④ 제2항과 제3항의 이행(지급)보증보험 가입시의 보험료는 제작지원금 지급시 포함하여 지원할 수 있다. ' 라고  애매하게 규정하여, 이 문제에 대한 비난을 피하려는 유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이 규정에 의하면,  방송위는 이를 지급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식인 겁니다. 결국 ‘보험료를 누가 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답이 없는 상태인데,  시청자제작자는 무조건 이를 내고 있는 셈입니다.

‘KBS를 위한 보험료를 시청자 제작자가 내야하는 것' 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험의 수혜자는 ‘KBS'이지 '시민제작자 자신‘이 아닙니다.

설문에 응답한 제작자 중 96% 가 ‘이 보험료는 KBS 나, 방송위가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KBS 실무자들은 ‘제작지원금 속에 보험료가 (당연히) 책정되어있는 것이다! ' 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정말 상식적인 방식은, ‘KBS가 자신의 비용으로, 혹은 방송발전기금의 일부를 가지고 직접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작지원금' 속에 ‘KBS 위한 보증보험료 가 산입' 되어 있다는 KBS측의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시청자들에게 KBS를 위한 보험료를 내도록 심부름을 시킬 것이 아니라, 직접 방송위로부터 그 비용을 받아 스스로 보험을 드는 것이 맞는 일 아니겠습니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현재의 보증보험제도가 KBS를 위한 제도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실무자의 강압에 못이겨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반정도의 제작자들은 이 보험이 자신을 위한 보호장치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KBS측의 권위주의적인 개입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많이 있지만, 일단은 생략하겠습니다. 
 


(4) ‘[닫힌채널]과 같은 활동으로, 철옹성 KBS의 독선적 운영으로부터, [열린채널]을 구출할 수 있을까 ?' 하고 생각하는 분들께 
  
영어 관용표현 중에, ‘더 엣지 오브 더 웻지 (The Edge of the Wedge)' 라는 표현이 있답니다.
발음이 재미있으니 관용표현이 되었겠지요. (아마, 잘은 모르지만 제가 모르는 언어들 중에도, 그와 유사한 표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이 말을 직역하자면, '쐐기의 끝' 정도가 되겠는데요. 과거에 석공들이 거대한 바위를 쪼갤 때, 나무 쐐기를 사용했답니다. 나무토막으로 바위를 쪼갠다니 말이 안 된다구요? 말이 됩니다.

석공들은 떼어낼 자리에 금을 긋고 작은 구멍을 정으로 쪼아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그 작은 구멍들에 나무로 만든 쐐기를 박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토막(쐐기)에 날마다 조금씩 물을 주는거죠. 그러면 나무는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물을 머금어 팽창을 합니다. 그렇게 몇 날 몇 밤, 혹은 몇 개월 동안, 나무쐐기들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합니다. 석공들은 기다립니다. 중간에 비바람에 쓸려나가거나 햇볕에 말라 부스러져버리는 쐐기들도 있을겁니다. 그러면 또 다른 쐐기를 갖다 박고, 때때로 물을 줍니다.
... 눈에 띄지는 않지만, 쐐기들의 미세한 숨쉬기 운동은, 완고한 바위조직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러던 어느날 , 바위는 예고없이, 쩍 ~ 하며 쪼개집니다.

열린채널 도입 육년째, 지난달, 국회의 토론회에서, 방송위와 KBS시청자 지원팀 실무자들의 '육성'을 처음으로 들으면서 ' 앗! 그들은 거대한 바위로구나 ! 우리의 열린채널(자수정)이 그 단단한 바위 속에 갖혀있구나 !'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린채널이 숨이 막힐만하구나 ! 그렇다면 어떻게 그 단단한 바위로부터 떼어내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위를 완전히 쪼개는 것이 무모하다면, 또 그럴만한 연장도 힘도 없다면 무엇을 이용하여 열린채널을 구출하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쐐기'라는 관념이 제 머릿속을 떠돌았나 봅니다.
무모하게 파괴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소중한 것을 떼어내는데 사용되는 도구 !
조용히 숨쉬는 나무토막 !
쐐기!

 

닫힌채널은, 이제 생긴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뭐 힘이 쎈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의 사람들은, 무모하게도,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에 갇혀 있는 자수정을 잘라내려 합니다.  그 걸 잘 다듬어, 우리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거울과 프리즘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평택 대추리에서 멀쩡한 집을 부수려고 국방부가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쇳덩이 기계들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끝이 뾰족한, 숨쉬는 작은 나무토막' , '쐐기'가 이런 때 필요합니다. 우리는 막강한 힘을 가진 연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거대한 기계팔과 쇳덩이 해머를 이용하여 무지막지하게 때려대거나 쪼아대는 크레인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구요.

 

우리는 그럼 무엇을 가지고 [열린채널] 을 구해낼 수 있을까요? ' 작은 정! 숨쉬는 나무토막 ! 물 ! 그리고 기다림! ' - 이것으로 바위를 떼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위에 박힌 쐐기의 끝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지 모릅니다. 그 것이 무슨 힘을 가지고 바위를 쪼개느냐고 비웃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그 작은 나무의 끝은, 장차 벌어질 거대한 균열과 변화의 발단이 되는 것입니다.

 

쐐기의 끝 !
저는 [닫힌채널]에 참여하는 분들이 KBS와 방송위원회라는 거대한 바위에 박힌 작은 쐐기의 끄트머리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해머나 포클레인같이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런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간의 활동을 통하여, ‘바위를 깨는데, 쐐기들의 존재와 그들의 인내는 불가피' 하단 점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자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와! 신난다!' ‘우리가 물을 머금어 숨을 쉬고, 지치면 오그라들기도 하다가... 다시 물을 머금고... 다른 구멍에 또 다른 쐐기가 되고... 뭐 그런 일이 꾸준히 계속되면, 어느 순간 바위가 깨지는 거야!'
자! 이제, 쐐기중의 하나가 될 분들은 [닫힌채널]로 오세요. 그게 많아야, 바위가 쉽게 깨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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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내PD들의 알리바이

새벽길님의 [당권장악을 위해 자주파가 알아야할 필수 욕지거리 9선] 에 관련된 글.



논쟁은 중요하다. 그러나 저것은 건강한 논쟁의 일부가 결코 아니다. 아무래도 이건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조야해 보인다. 민노당 안에서의 NL과 PD 나이드신 분들이 피튀기게, '이전투구'(열받지마시길. 내가 보기엔 너무 이 표현이 '적합'하다.)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그 싸움이 운동의 발전을 위한 '치열한 논쟁'이 아니라, 이전투구로 비치는 것은 내용과 방식이 너무 조야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본질도 아니며, 정수도 아니며, 문제해결에 하등 도움안되며, 스스로 뒷걸음질만 치는 결과만 나을 것이다, 라는 뜻!

 

NL이 어쨌건 저것을 일반화시켜서 빈정거림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저런 쓰잘데기 없는 <당권장악을 위해 자주파가 알아야할 필수 욕지거리 9선> 같은 글을 쓰느라 시간낭비하는 건 분명 소위 'PD' '선배님들'도 그 조야함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 아닐까? (아이고, 이런 하극상이... 하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하니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전선 위에 같이 서있으면 동지는 동지라고 생각하는데... 왜 논리적인 비판글 대신 빈정거림과 욕설들이 난무하는가... 배설들은 끊임없는 배설들만을 낳을 것이다.

 

학교에 있을때 예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하던 얘기가 있다. 다짜고짜 타 정파 욕부터 하고, NL동지들을 멍청하다고만 말하는 분들 얘기는 절대로 듣지말라고. 열이면 열, 배울게 별로 없는 '술자리'좌파들이었다. 물론 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일반화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다 그랬다. 소위 마니아들이었던 것이다. 대중을 만나지 않고, 집회엔 혼자 다니며, 학교 안에서 NL동지들이 얼마나 열심히 대중들을 만나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민족주의 멍청하다고 혼자 외치는, 좀 나이 많은, 내가 하면 정치, 남이 하면 '운동대운동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단지 술수', (일본말로는) 오타쿠!

 

아, 너무 건강하지 않다. 가뜩이나 시대가 하수상하여 부르주아들이 무자비한 탄압을 하고, 이데올로기 공세는 강해지는데 왜 이런 건강치 못한 쌈박질에 몰두하는가. 개소리는 무시하면 되는거 아니었나? 왜 똑같이 열받는가. 민족주의자건, 소위 '좌파'건, 그 사람의 운동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건강하게 운동하느냐 일텐데, 당내 싸움은 누구를 막론하건 응원하고 싶지 않아보인다. (물론, 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난 당원도 아니고...)

 

진보블로그에서 저런 방식의 조롱들을 많이 본다. 눈쌀 찌푸려진다. 여긴 80년대, 90년대학번말고, 나같은 '순수하고' '초롱초롱한' 어린이들도 많은데 너무 안좋은거 많이 배우는것 같다.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난 소위 전통적 PD 학생운동의 풀 안에서 운동했(하)고, 운동하면서 NL동지들에게 배신감 느끼고 열받았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이 건강하지 않게 운동한다고 따라서 똑같이 하라고 배우진 않았던 것 같은데...

 

모 학교 선배님들은 전부 '전진'으로 갔다던데, 가끔 보면 아무래도 저건 내가 배운 운동과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든다. 왜 목매다는건가. 계속 저렇게 하면 NL이랑 '같이' 망할게 분명하다. 대중운동은 계속 무너지고 있는데, 저기서 지금 뭐하고 계시나... NL들이 당권 장악할 동안 뭐하고들 계셨나, 이런 생각만 든다. 당권 장악은 욕찌거리로 되는게 절대 아닐텐데. 민노당이 그렇게 우스운 당인가? 당권 장악은 '대중운동, 대중조직'으로만 가능하다. 일단 선배님들은 아는건 많지만, 어쨌건 그 '민족주의자'들한테 대중운동, 대중조직으로는 한참 지고 있는 것이다.

 

좀 논지를 벗어나는 말이지만,

 

심지어 당은 너무 의회주의로 변질되어, 더이상 대중투쟁을 선도할 수 없는 '정책정당'이 되어서, "당을 통한 지역 민중 조직화"라는 꿈은 물건너가도 한참 물건너간 것으로 보이기 까지하다. 게다가 "어쨌건 당권 장악"하면 또 뭐 어쩔껀데, 이런 생각도 들고.

 

내 생각에, '무조건 우리가 하면 잘 된다'는 건 환상이다. 우리가 안해도 잘하는 대중운동에 능한 자들이 있곤했으며, 우리가 해도 대중운동 할 줄 몰라 당년도 학교 운동 망친 예들이 셀 수 없다.

 

그것은, 알리바이였던 것이다! 얼마나 편한가!!

"다 쟤네 때문"인데.

 

p.s.

정치적 입장의 옳음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여기선 논외. (PD도 PD나름이지만, 일단 PD는 옳다고 치는 것을 가정하고. 이것은 그러나 심상정보다는 강기갑이 훨씬 훌륭한 동지로 보인다는 내 눈을 속일 순 없다. 정말 "강기갑은 nl이니까 옳지 않"은가? 입장의 옳음은 오직 실천과 운동의 진정성만으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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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전태일

 

복개된 청계천거리가 참 싫기도 해서 아예 가지 않으려했던 때도 있었다.

그건, 공개되어 수십만 인파가 몰렸다던 그날.

왠지 조작된 연극무대,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파쇼정치에 동원되는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 거리, 그 중에서도 청계천광장 근처에서 젊음의 거리 건너편까지,

그리고 동대문에서 전태일동상까지 구간을 가장 좋아하고,

종종 가곤 한다. 특히 늦은 밤.

왜 그럴까, 그 동상 옆에 서면 썩혀진 나를 정화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나의 어리석음, 내가 싫은 나의 여러모습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알 수 없는 자신감을 얻고 온다.

참 고마운 거리다.

아 참, 그 거리는 이명박이 만들지 않았다.

공사하면서 죽기도, 다치기도 했던 건설노동자들이 만들었다.

이명박이 설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곳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가는가가 중요하다.

전태일 동상 앞 거리에 락커칠을 하고싶다.

노동해방 이렇게, 큼지막하게, 쓰고 싶다.

 

 

 

저 큰 흉상,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믿는 자들에겐 저 동상이 자신들의 젊은 날의 추억의 사진과 같이 느껴질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그 흉상에 비친 전태일 동지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그 표정, 그 앞에 감히 아무도 부끄럽지 않게 설 수는 없는 현실.

그러나 저렇게 가득,

피켓을 들고, 마스크를 쓰고 매일같이 외롭고 힘겨운 투쟁을 하고있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처럼

그 외로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이명박이 모르는 것처럼,

저 잘난 386 영웅들도,

강단 위에서만 준엄한 척하는 좌파 '교수님'들도,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 출신 국회의원님들도,

절대 모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항상 적어도 자기만은 잘났다지만, 그것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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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리동네 사람들 너무 싸가지 없어

사진을 꼭 찍어서 같이 올리고 싶어서 계속 미루어두었지만 카메라도 없는데 사진은 언제 찍나 싶어서 이렇게 올린다. 이것은 서울 **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난 10년 넘게 이 동네에 살고 있다. 이 동네가 온갖 부르주아지로 가득차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처럼 역겨울때는 없었다. 요 근래 **동 몇몇 주민들이 '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서 아주 그냥 결사 투쟁을 하고 계신다. 우리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가에 플랜카드 여러개가 걸려있다. 가히 꼴불견이다.

 

   "조용한 고급주택가에 치매양로원 왠말이냐!"

   "전용 자연경관에 치매양로원 결사반대!"

 

이런 미친놈들. 왠말이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역겹다. 몇일전부터 어디 충무로가서 대자보라도 인쇄해서 붙여놔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바뻐서 그것도 잘 안된다. 아니면 플랜카드라도 걸고 싶은데 돈이 너무 없다. 어떻게 해야할까. 저걸 그냥 내버려둬야하나. 테러할까. 찢어버릴까. 낙서할까. 라카칠할까...

 

지능장애를 겪는 노인(치매노인)들을 아예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저 작태는 대체 어떤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지 궁금하다. 어떻게 다 큰 인간들이 저따위일까. 동네 사람들 다들 저렇게 생각할까?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렇진 않더라도 저게 대세일까? 온갖 인간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역시 부르주아들은 씨를 말려야하나...

 

나 어릴때 17살때인가? 그땐 이런 플랜카드가 동네를 장식했다. 저 아래 큰길가까지.

 

   "장애인시설 결사반대한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기억이 난다. 난 세상에 그렇게 플랜카드까지 인쇄해서 10여개나 걸 정도로 싸가지없는 어른들이 많은 지 그때 알았다. 집에 가자마자 엄마한테 처음했던 말이,

 

   "엄마, 우리동네 사람들 너무 싸가지 없어."

 

부르주아 동네에서 인간성 유지는 가능한가. 이 동네 사는 꼬맹이들 장래가 너무너무 걱정된다. 애들 다 저렇게 되는거 아니야? 이런 근심. 공기는 좋지만, 이 동네 정신상태가 피폐해져가는 것 같다. 정말이지, 서울에서 반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인 동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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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

만주개장수님의 [무하마드 알리] 에 관련된 글.

무하마드 알리에 대한 e채널 영상을 봤다. 정말 멋지다. 21세기의 남한 20대가 신뢰해야할 것은 '글로벌리제이션'과 '월드컵'이 아니라, 억압에 저항해 가장 인간답게 싸워온 무하마드 알리와 같은 사람들의 젊은 시절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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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회 사건

일심회 사건의 성격은 무엇인가? 이것만은 분명히 합의해두고 논쟁을 해야한다.

 

가장 첫째로 이것은 주사파들이 뭔 뻘짓을 하건말건 사회적 파장과 국정원과 보수언론들의 이데올로기 공세적 측면에서 볼때 '명백히 공안탄압'이다. 이 점을 놓치고 "당내에서 주사파들 몰아내자~"며 난리치는 건 옳지 못하다. 결과적으로나 현상적으로 저들의 공작에 놀아나는 꼴 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난 주체사상에 결코 동의하지 않고 저 강고한 정치분파의 사회운동 내에서의 비대칭적 권력구조의 점유, 아래로부터의 저항 운동을 왜곡시켜온 경향들에 대해 비판적이고 깨부수고 싶지만, 일심회 사건을 비롯한 여타 주사파를 볼모로 한 공안당국의 정치탄압에 대해서는 함께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운동 사회 내의 역관계에서 '옳은 입장'이 승리하는 길은 오직 운동의 옳음과 사회운동의 확장을 통해서이지, 공안당국 탄압을 통해서 일 순 없다. 지금의 이 탄압을 효과적으로 '운동'으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이후 전체 운동이 공안탄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소시기적 연대투쟁이 주체사상 옹호의 효과를 낳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지금같이 좌파가 사회운동적으로 아무 힘도 내지 못할때 자본가 정권의 공안당국은 이런 식으로 운동세력을 탄압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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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교수의 진보세력 다원화론 비판

자작나무숲님의 [진보 보수 모두 다원화 절실] 에 관련된 글.

조희연 교수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모두의 다원화가 '절실'하다고 한다. 글쎄,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길래 '절실'이라는 표현까지 썼는지 모르겠지만, 반쯤 맛간 강단좌파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그는 애매한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를 나누었다. 그의 시민의 신문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심지어 그는 노무현 지지세력조차 '진보'로 보는 듯 하다. 세상에, 노사모가 헛튼 꿈꾸고 캐속은 시절이 한참지났는데 아직도 노무현 타령인가. 그는 노무현 및 그의 지지세력을 '자유주의적 진보'쯤으로 파악하는 듯 하다. 몇년간 냉동인간됐다가 깨어난 인간이 아니라면 알 것이다. 자유주의(심지어 신자유주의지!!!)는 맞지만 진보는 결코 아니다. 어라? 내 보기에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노무현과 공병호인데 이윤율 재고와 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공기업 사유화하고, 비정규직 늘리자던데? 얼마나 자유주의적인가!! 자유주의는 좋은 것인가? 그가 쩔쩔매는 반공주의라는 한국적 모순의 백태는 이제 신자유주의자들의 적절한 놀이감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노무현 정권이 진보일수 없다는 얘기를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강단좌파 비판글 안에 넣어야 한다는게 참 우습다. 세상에 진보가 학살전쟁에 파병을 하는가? 이미 임기 초부터 볼짱 다 봤다고 봐야한다. 여기서 환상을 보는 강단좌파들이 사회운동을 '캐'망치기 시작했다. 내 말이 심한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련의 몰락 이후 자신들의 이론적 공백을 자유주의를 껴다맞춰 맞춘 GD들은 그냥 입 쳐 다물고 있어야 한다. "급진진보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게다가 노동자들을 무한정 비정규직화하는 비정규노동법 개악안을 만들고, 노동운동을 철저히 자본의 논리로 관리하는 노사관계로드맵 법안, 평택, 그리고 한미FTA도!

 

조희연은 뻔뻔스럽게 훈계한다.,

 

진보에게는 다른 의미에서 다원화라는 도전이 나온다. 조 교수가 보기에 진보세력은 자유주의 진보와 급진진보가 분화되지 못하면서 ‘저항의 미덕’과 구별되는 ‘통치의 미덕’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에게 필요한 정책 ‘실현가능성’ 혹은 현실성을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권력을 갖고도 조중동 탓만 하는 것은 알리바이일 뿐”이라며 참여정부를 비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통치의 미덕이라니. 조희연이 보기에 진보는 곧 '운동권들'이다. 그는 진보세력이 통치의 미덕을 발휘하지 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철저히 조희연스러운 생각으로 빠진 자들이 2012년 집권 운운하며 '정책정당'이니 뭐니 하고 있지만 이미 강고한 지배이데올로기 안에서 허덕이며 의회 안에 갇힌 저들만의 '통치'만 하고 있다. 조희연식 대안은 뻔한 결말만 맞이할 뿐이라는 것이다. 민노당이 내놓은 대안들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요구가 의회안에 갇혀있는 이상 아무것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기막힌 것은 거기에 최장집의 참여정부 비판 논리를 껴맞췄다는 것이다. 이 XX, 욕나온다. 대가리가 어떻게 된거 아닌가 싶은 생각뿐이다. 아무래도 당장 동아리방 가서 조희연 책 다 태워버려야 할듯 하다.

 

 

<-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진보'가 될 수 없고, 신자유주의가 케인즈주의 경제모델의 종결 이후 대안으로 출현했다는 상식은 EBS수능 사탐 강의에도 나온다!

 

조 교수는 더 나아가 진보와 보수 사이에 비적대적 공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갈등과 각축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새로운 경제모델을 만들기 위한 경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 교수는 극심한 양극화를 완화해 정치경제적 불안정성을 낮추는 것이 기업과 자본의 ‘거시적 합리성’에도 부응한다는 점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 경제문제를 둘러싸고도 비적대적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보수에게는 단순히 박정희 모델을 부활시키는 퇴행적인 모델이 아니라 달라진 조건을 반영하는 ‘박정희 모델의 혁신적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양극화 완화의 정치경제적 불안정성을 낮추는 것이 자본의 거시적 합리성에 부응한다는 멍청한 소릴 하다니.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 자본주의의 동학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멍청한 얘기일 뿐이다. XX, 공부는 하는거야? 이윤율이 지속적으로 하락되어 70년대 이후 그 어떤 방편(예컨대, 도요티즘 등)으로도 극복되지 않으니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체제를 도입한게 아닌가. 어디서 캐 멍청한 케인즈주의 타령이냐. 자본주의의 동학조차 파악하지 못한 자가 <새로운 경제모델> 운운하다니;;;

 

진보세력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은 당위론에 그쳤고 정책으로 구현하지도 못했다. 참여정부는 박정희 모델에 반대한다고 천명했지만 관료적 작동방식은 예전과 똑같았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속에서 전개되는 민주주의가 투명성과 민주성은 높였지만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계급사회’를 출현시켰다는 게 조 교수 설명이다.

 

당연하지. 신자유주의 정권이니까. 어디서 진보래? 이 땅의 평등, 자유는 오직 아래로부터의 사회운동으로 가능할 뿐이다. 정책 구현 좋아하네. 조희연은 아무래도 50년쯤 전 미국이나, 20년전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스웨덴이나 프랑스에서조차 케인즈주의 모델, 사민주의 모델은 이미 멸종했음을 모르는가. 지금 시기 야만의 세계화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적실하게 비판하고 저항을 조직하는 일 뿐이다. 정책 대안 좋아하네, 이미 30년전에 끝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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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만한 우체국장

 

대체 왜 혼자 일 안하고 싸돌아다니는거냐. 거만하고 잘난 체만 하긴. 맨날 뉴욕이니 런던이니 하는 곳으로 전화까지 하고 말이다. 지 '아는 분'들은 다 잘나간다는 식이다. "어 그래요~ 김사장님, 이번에 따님이 뉴욕대에 입학했다구요?" 그걸 들었으면 그냥 혼자 듣지 왜 재방송하는거야? 관심없단 말이다. 맘에 안든다. 지 자랑만 하고. 앞의 직원분들은 우체국장의 거드름을 들은 체도 안한다. 코구멍 옆에 기름기에 불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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