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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분46초의 숨막힌 외침, ‘플로이드 영상’이 뒤흔든 질서

등록 :2020-06-07 09:31수정 :2020-06-07 09:35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영상으로 기록된 흑인 사망

스마트폰 카메라 손에 쥔 대중
백인 경찰 집요하고도 끈질긴
8분46초간의 공격 그대로 찍어
‘경관 생명 위협’ 해명 안 먹혀

‘이미지 정치’ 대명사 트럼프는
시위 밀치고 교회 인증샷 ‘기행’
미디어에 기득권 민낯 또 전시

약자의 실상 저장된 영상 물결
미디어 독점했던 기득권 겨냥
‘게임의 법칙’ 뒤집히는 중일까
지난달 28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시내에서 한 시위자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경찰 앞에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시내에서 한 시위자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경찰 앞에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 2주간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웠던 영상은, 영화도 드라마도 토크쇼도 아니었다. 다른 모든 영상을 제치고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영상 뭉치는, 복수의 행인들이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한 아마추어 기록 클립들이었다.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살던 46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의 무릎에 목이 짓눌려 질식해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한 이 클립들은, 보는 이들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물론 누구도 이 클립들을 보고 ‘엔터테인’ 되지 않았다. 가볍게 웃으며 볼 만한 영상을 찾던 사람들의 정수리에, 이 클립들은 얼음장처럼 찬물을 끼얹으며 말했다. 미안한데 지금 웃고 떠들 때가 아니라고,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인종차별이 사람을 죽였다고. 메시지에 압도당한 미국의 방송사들과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자들은 모두 신작 공개를 미루거나, 연대의 의미로 8분46초간 검은 화면을 전송했다. 8분46초, 플로이드가 쇼빈의 무릎에 짓눌려 숨을 거두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영원한 실시간’으로 남을 그 영상물론 무고한 흑인이 경찰의 과잉진압과 인종 프로파일링으로 사망한 사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조지 플로이드 이전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흑인들의 이름만 적어도 신문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플로이드의 죽음을 담은 영상들은 보는 이를 뿌리부터 송두리째 뒤흔든다. “구할 수 있었는데 눈앞에 두고도 구하지 못한”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트라우마는 힘이 세다. 마치 우리에게 뱃머리 바닥 부분을 수면 위로 드러낸 채 천천히 가라앉는 세월호 영상이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인 것처럼, 공포에 질려 제발 자신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고 김선일씨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는 상처인 것처럼. 그러니까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2004년 <씨네21>에 기고한 영화인 이라크 파병반대 선언문 ‘김선일 테이프는 우리 휴머니즘의 실상을 증언한다’를 인용하자면, 이런 것이다.“이 녹화 테이프에 대해서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않는 점이 하나 있다. 이 테이프가 ‘이제부터 항상 현재로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김선일씨가 살아났다면 이 테이프는 과거의 역사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김선일씨가 죽는 순간 이 테이프는 역설적으로 불멸성을 획득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려달라고 하소연했던 그를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하소연한 그 순간은 앞으로 영원히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우리에게 하소연하게 될 것이다. 불가능의 역설. 그러므로 이 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항상 우리의 휴머니즘을 질문할 때 실제 시간이 될 것이다.”이제 위의 글에서 ‘테이프’를 ‘비디오’로, ‘김선일’을 ‘조지 플로이드’로 바꿔서 읽어보자. 플로이드 영상을 접한 이들은 모두, 언제든 아직 플로이드를 살릴 수 있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플로이드 영상은 정서적으로만 강력한 것이 아니라, 그간 수많은 이들이 내심 확신해왔지만 물증이 없어 제기하지 못했던 의혹에 증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압도적이다. 플로이드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도 않았고, 도주하려 들거나 경찰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반면 그를 향한 경찰의 공격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 어찌 해볼 수 없었던 사고’가 아니라, 8분46초 동안 지속된 집요하고 끈질긴 공격이었다. 경찰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고, 언제든 공격을 멈출 수 있었다. 그동안 경찰이 즐겨 사용하던 ‘진압 중에 용의자가 사망한 것은 불행한 일이나, 사진은 진실의 일부만 담고 있다. 현장에서 용의자가 체포에 불응해 거세게 저항했고 경관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같은 해명을, 플로이드 영상은 적극적으로 반박한다.
미국 워싱턴 백악관 근처에서 지난 3일(현지시각)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항의하는 수많은 시민이 휴대전화 전등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워싱턴 백악관 근처에서 지난 3일(현지시각)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항의하는 수많은 시민이 휴대전화 전등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사진이나 목격자 증언만 있었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랐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이미지가 프레이밍을 통해 진실을 어떻게 왜곡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미지가 진실을 다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대중의 지식을 역이용하면, 진실을 담고 있는 이미지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일 또한 가능한 것이다. 동영상은 얘기가 다르다. 물론 동영상도 편집과 조작을 통해 교묘하게 진실을 호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조지 플로이드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영상처럼 중간에 끊기거나 편집되는 일 없이, 그가 서서히 짓눌려 숨을 거두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 앞에서는 다른 핑계를 대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더구나 곳곳에 설치된 폐회로티브이(CCTV)와 사람들 손에 들린 수많은 스마트폰 카메라의 존재는 교차검증을 가능하게 만든다._________
압도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
경찰의 부당한 과잉진압을 경험해본 흑인들은 플로이드의 영상을 보면서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나 또한 저와 같은 일을 경험해본 일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종차별주의적인 태도를 지우지 못하던 보수주의 백인들조차, 영상으로 기록된 명백한 증거 앞에서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폭스 뉴스> 앵커들부터 전 미국의 경찰서장들이 모두 앞다투어 쇼빈의 행동을 비판했다. #BlackLivesMatter(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가 미국 내 50개 주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로이드 영상이라는 압도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었기에, 반응이 이처럼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었던 것이다.공교롭게도 시위대의 반대편에서 “시위대가 약탈과 방화를 이어간다면 연방군을 투입해 진압하겠다”고 말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또한 동영상 기반의 미디어 정치를 통해 인기를 쌓아온 정치인이다. 그는 미국 프로레슬링 리그 ‘레슬마니아’ 시리즈에 출연하고, 최후의 1인을 자기 회사에 취업시키는 오디션 프로그램 <어프렌티스>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대선후보 경선 토론에서는 상세한 정책 설명 대신 티브이로 토론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에 한번에 쏙쏙 박힐 만한 손동작과 캐치프레이즈를 밀면서 이미지를 쌓았고, 리얼리티쇼 출연자를 연상시키는 기행과 폭언으로 하드코어 지지자층을 집결시켰다.본디 동영상 기반의 미디어 정치는 이처럼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한 기득권의 몫이었다. 이라크전 당시 <시엔엔>(CNN)은 미군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과 폭격당하는 바그다드 시내를 생중계하며 전쟁을 엔터테인먼트의 소재로 삼았는데, 미군 또한 이를 통해 자신들의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하며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평화체제)의 질서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스마트폰만 있으면 영상을 촬영하고 전송하고 배포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되면서, 공고했던 기득권은 조금씩 균열을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플로이드 영상이 온 인터넷을 휩쓸면서, 그동안 미디어에서 집요하게 왜곡되고 지워졌던 미국 내 흑인들의 현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미디어를 활용해 구축한 이미지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호소하던 도널드 트럼프는, 이번에도 그럴싸한 이미지를 통해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 했다. 소요사태가 계속된다면 강경 대응하겠다는 연설을 마친 뒤, 트럼프는 최루탄과 고무탄으로 시위대를 밀어내고는 세인트 존 교회로 걸어가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기행을 벌였다. 종교적, 도덕적 권위를 상징하는 성경을 손에 쥔 채 사진 촬영을 한 것은, 분명 보수층 지지자들에게 호소하려는 의도였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을 기록한 영상에서, 트럼프는 “그 성경은 당신 소유의 성경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그저 “성경이다”라고 어물거렸다. 성경을 읽지도, 성경 구절을 인용하거나 기도하지도 않은 채 기념사진만 찍었다는 얄팍한 전후 맥락이 기록된 영상은 보는 이들의 비웃음을 샀다.
어쩌면 2020년에 공개된, 그리고 공개될 모든 영상 중 가장 중요한 플로이드 영상 앞에서 생각한다. 미디어에서 집요하게 지워졌던 이들은 모습을 드러냈고, 미디어를 이용해 이미지를 구축한 이는 미디어로 그 민낯을 고발당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게임의 법칙이 뒤집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48197.html?_fr=mt1#csidxe9a42a95f838eacb410d64ef2284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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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양심?

강기석 | 2020-06-05 11:19: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아! 바로 이 친구였구나!”

오늘(4일) 아침 한겨레 오피니언면에 실린 석진환 한겨레 이슈 부국장의 칼럼 ‘누구도 양심을 장담할 수 없다’는 칼럼을 읽고 비로소 알았다. 10여 년 전 어느 날, 치열하게 전개되던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정치검찰의 표적수사 와중에 나로 하여금 언론에 대한 극도의 실망감을 갖게 하고 급기야 “나라도 수사와 재판의 전 과정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그 진실을 기록에 남겨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장본인을 발견한 것이다.

조중동과 그 아류 신문, 방송사에 대한 실망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진보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한겨레에, 그 한겨레 기자가 쓴 칼럼이 내게 그토록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 정확한 내용이야 지금 기억에 남아있을 리 없지만 그 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았다.

“거의 모든 정치인은 부정한 돈을 받는다. 돈을 받은 정치인은 수사가 시작되면 처음에는 거의 모두 돈 받은 사실을 부인한다. 한명숙 전 총리도 그럴 것이다. 검찰이 아무 증거없이 수사를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깨끗하게 정치를 해왔다는 한명숙 전 총리도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끝내 혐의가 밝혀질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칼럼은 당시 이명박 정권의 전 방위적인 야당인사 사찰과 탄압의 실상을 모른 체하고, 야당 지도급 인사에 대한 손톱만큼의 배려도 없었음은 물론, 가장 기본적인 무죄 추정의 원칙마저 저버린 채, 오로지 검찰 입장에서 쓴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식의 글이었다.

오늘(4일) 석진환 부국장이 쓴 칼럼의 줄거리도 대동소이하다. 전부(9억 원)가 아니고 일부(3억 원)일지라도 한 전 총리의 유죄는 확실하지 않은가. 여전히 “결백하다”고 말하지만 법적 판단이 끝났고 재심도 어렵고 돈을 줬다는 한만호씨도 죽었으니 한 전 총리의 결백 주장은 이제 신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믿는 도끼가 ‘검찰’에서 ‘대법원 판결’로 바뀌었을 뿐 처음부터 한 전 총리 유죄 심증은 여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석 부국장에게 묻고 싶다. 

-대법원 전원합의 판결은 영원히 무오류인가?(대법원이 확정한 유신, 5공 시대의 무수한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 판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1억 원짜리 수표는 어떤 혐의에 대한 물증인가.(검찰은 3억 원씩 3번에 걸쳐 한 사장이 한 총리에게 직접 전달했다고 주장했고, 변호인단은 오직 한 번 3억 원이 한 사장과 한 총리 지역구 보좌관 사이에 오고 갔을 뿐이라고 했다. 여기에 포함된 1억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보좌관이 한 총리 동생 전세자금으로 일시 빌려 준 것이다) 

-유죄는 검찰이 입증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무죄는 피고인이 입증해야 하는가.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피고인은 무죄 입증할 필요도 없이 무죄인 것 아닌가.(무죄 판결을 내린 1심 재판관마저도 1억 원짜리 수표 교환과 용처에 대해 보좌관과 한 총리 동생의 석명이 충분치 않다고 하면서도 이 수표가 한 총리로부터 동생에게 전달됐다는 검찰의 (유죄) 추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아닌가)

-수사과정에서 증거 날조 등 검찰의 부정행위가 드러난다면 그것이 어느 정도 재판에 영향을 준다고 보는가(‘미란다 원칙’이란 것도 있는데 증인이나 증거나 조금이라도 조작됐다면 재판은 전면 무효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은 석 부국장이 우려했듯 재심 여부가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검찰의 무시무시한  조작질이 문제인 것이다. 그 조작질에 연루된 인물들은 지금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아직은 신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고 인간의 영역, 즉 법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이니 석 기자는 너무 안타까워 할 필요도 없다. 

한겨레는 안타까워(하는 척) 하는 대신 뉴스타파 등이 제기한 검찰의 불법 수사-기획 증거 날조 혐의- 취재에 매진해야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리 한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다.

석 부국장은 왜 이런 칼럼을 썼을까? 내가 보기에 변명하기 위해서다. 스스로 토로했듯 10여 년 전 자신이 법조기자를 하면서 검찰의 뜻에 따라 처음부터 한 전 총리를 유죄로 몰아갔던 행위들에 대해 면죄부를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변명의 방법마저 치졸하다. 자신은 여전히 옳고 양식있는 기자로 인정받기 위해 한명숙 총리가 겪고 있는 희생을 그냥 덮자고 하면서 지금에라도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민주당을 ‘오만’으로 몰아 부치는 것이다.    

다음은 내가 쓴 책 ‘무죄’ 머릿글의 한 대목이다.

“나는 40여 차례에 이르는 한명숙 전 총리 1차, 2차 사건 1심 재판을 빠지지 않고 방청했다 (...) 그런데 해괴한 것은 현장을 열심히 들여다 본 사람들(1심 재판부)은 한명숙 전 총리의 무죄를 확신한 반면, 현장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사람들(2심 재판부)은 너무도 쉽게 유죄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

언론도 마찬가지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공판을 지켜 본 나 같은 기자는 검찰의 공소장이 얼마나 허술한가, 증인과 증거라는 것들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그럼에도 한 전 총리를 꼭 잡아 넣겠다는 집념만은 얼마나 강렬한가를 개탄하며 무죄를 확신한 반면, 현장에 잘 나와 보지도 않은 언론은 왜 빨리 한 전 총리의 유죄 판결이 확정되지 않나 안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검찰의 횡포가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언론의 이런 무책임한 태도가 하나의 큰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한겨레 지면에서 석진환 기자의 글을 자주 읽었을 수는 있지만 재판정에서는 그를 자주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나는 그의 얼굴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그가 그의 칼럼에서 인용한 한 대목,

“인간의 양심은 절대 장담해선 안 된다고 한다”를 그에게 반사하고 싶다. 
“당신의 양심부터 잘 지켜라.”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0&table=gs_kang&uid=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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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일본 첫 승전 100년... 그날의 재구성

봉오동전투 일본군 궤멸적 타격... 신출귀몰한 홍범도 부대

20.06.07 11:16l최종 업데이트 20.06.07 11:16l
 봉오동 전적지 들머리에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
▲  봉오동 전적지 들머리에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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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 7일

2020년 6월 7일은 우리나라 최초 독립전쟁인 봉오동전투가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년 전인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洪範圖)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연합부대)가,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월강추격대대' (越江追擊大隊)를 참패시킨,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 대일전 승첩의 날이다. 이 봉오동전투는 사흘 전인 1920년 6월 4일에 있었던, 화룡현 삼둔자(三屯子)전투에서 시작됐다. 그날 새벽 30여 명의 우리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일본군 2개 중대는 이를 보복하려고 우리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조선인 양민들을 무차별 살육했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독립군은 삼둔자 산기슭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타격했다. 이에 함북 종성군 나남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사처럼 약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삼둔자 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추격대대'를 임시로 편성했다.

이들 월강추격대대는 야스가와 소좌의 인솔로 1920년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이런 낌새를 알아 차린 홍범도 장군은 그들과 교전에 앞서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했다. 그러고는 봉오동 상동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해 놓았다. 그런 다음 월강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해 포위망 속에 가둬두고 일망타진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분대를 월강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으로 내보낸 뒤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하게 하여 그들 전 부대를 유인했다.

6월 7일 아침 8시 30분 무렵에 월강추격대 첨병이 독립군 분대의 뒤를 쫓아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월강추격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치고는 봉오동 하동을 정찰한 결과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죄다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봉오동전투 격전지인 봉오동을 품고 있는 초모정자산
▲  봉오동전투 격전지인 봉오동을 품고 있는 초모정자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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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봉오동전투

그들은 본대를 불러 봉오동 하동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 뒤 그날 정오 무렵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봉오동 중동, 상동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월강추격대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봉오동 상동 남쪽 300m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곧장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주력부대가 들어오길 묵묵히 더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기관총을 앞세우고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제야 홍범도 장군은 공격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은 일제히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월강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의 전투는 무모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리고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 월강 추격대를 혼비백산케 했다. 통쾌한 대일 승전이었다.

당시 중국 〈상해시보〉에 따르면,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추격대를 150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 게릴라 전의 개척자로 알려진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  우리나라 게릴라 전의 개척자로 알려진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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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 평양 서문안 문렬사 부근에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조선 순조 때 농민의 난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와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홍경래 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일가친척이 화를 입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와서 장사를 하며 살았다.

홍범도 아버지 홍윤식은 할아버지 생전에 남긴 빚을 갚고자 머슴살이를 했다. 홍범도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그는 인물이 남달리 뛰어나 관기로 뽑혀갈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자 외가어른들이 서둘러 홍윤식과 혼인시켰다.

가난한 부부는 결혼 이태 후 아들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산모가 해산한 뒤 하혈이 심하여 이레 만에 세상을 떴다. 홍윤식은 동네 아낙네들에게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 부모를 여읜 홍범도는 머슴살이, 병정, 막일꾼 등으로 자라다가 나중에는 중이 되고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외금강 신계사 주지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하지만 한 해 남짓 만에 수도생활을 청산하고 하산했다. 그때 홍범도는 여승 옥녀와 정이 들어 뱃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옥녀의 고향인 북천으로 가고자 봇짐을 지고 금강산을 떠났다. 하지만 원산 교외에서 불한당으로부터 변을 당해 홍범도는 옥녀와 생이별을 한 뒤 방랑객이 되었다.

그는 그때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아가자면,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 했기 때문에 무예를 닦는 길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홍범도는 강원도 회양에서 만난 포수로부터 사냥총 한 자루를 구입했다. 그 길로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사냥꾼으로 생업을 삼으면서 사격술과 검술을 닦았다. 뒷날 일본군들이 홍범도란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오싹했던 백발백중 사격술과 신묘한 검술은 그때 익힌 솜씨였다.

홍범도의 인생길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일제 깡패 무리들이 남의 왕궁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명성 황후를 난도질해 죽이고, 그 시신마저 장작더미에 던져 태워버렸다는 얘기를 듣자 홍범도의 울분은 하늘을 찔렀다.

그는 일제 침략자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수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항일 투지가 불탔다.

1895년 10월 홍범도는 강원도 단발령에서 만난 포수 김수협과 뜻이 맞아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한 뒤, 곧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통쾌하게 처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홍범도의 맹렬한 항일 무장투쟁이 펼쳐졌다.

일제 강압에 따른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11월 홍범도와 차도선은 항일 의병대를 만들어 함경남도 후치령에서 일제 북청수비대를 섬멸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그 뒤를 이어 의병대는 함경남도 삼수, 갑산에서 일제 군경과 수십 차례나 처절한 격전을 벌였다.
 
 카자흐스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 세워진 흉상.
▲  카자흐스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 세워진 흉상.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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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의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작업

1911년 봄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첫 국내 진격전을 감행하여 함북 경원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개가를 올렸다. 또 1919년 10월에는 평북 강계 만포진을 공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여 명을 살상했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게릴라전의 개척자로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역시 홍범도 장군의 공이 컸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에게는 '날아다니는 장군'으로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우리 겨레에게는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 '백두산 호랑이'로 추앙 받았다. 장군의 발자취는 조국의 산과 계곡, 압록강 두만강 굽이굽이, 백두산 밀림과 만주 벌판에,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황야에까지 남겼다.

장군은 조국 광복을 이태 앞둔 1943년 10월 25일, 러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즐 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항일구국 생애를 마감했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신 지 40년 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는 장군의 반신 동상이 세워지고, 생전에 살았던 곳은 '홍범도 거리'로 명명되었다.

우리 정부는 올해 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도 친일의 무리와 그 추종자들이 활개치는 세상에 홍범도 장군은 한 줄기 빛과 한 줌의 소금으로 겨레의 수호신 역할을 하리라 믿는 바이다.
 
 봉오동 전적지. 지금은 봉오동저수지로 물에 잠겨 있다.
▲  봉오동 전적지. 지금은 봉오동저수지로 물에 잠겨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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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기자는 1999년 8월에 이어 2005년 6월에도 현지를 답사하였습니다. 이 기사는 사학자 장세윤 박사 지음 <홍범도 장군>을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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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文 대통령 남북·북미 선순환관계 비판 "남북관계는 민족내부문제"

박한균 기자 | 기사입력 2020/06/0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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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매체가 7일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북미 선순환관계 정책에 대해 “악순환관계”라고 비판했다.

 

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관지 우리민족끼리는 ‘달나라타령’ 제목의 기사에서 “북치고 장고치는 타령도 좀 사람들이 들을 맛이 있게 해야 여운이 남지 오히려 남을 피곤하게 한다면 그것을 어찌 타령이라고 할 것인가”라며 “아마 남조선집권자가 북남합의 이후 제일 많이 입에 올린 타령을 꼽으라고 하면 선순환관계 타령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매체는 ‘시도 때도 없이 선순환관계 타령’을 했다며 “선순환관계를 남조선당국자는 북남관계와 조미관계를 서로 보완하며 추진해나가는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해석하는데 말이 그렇지 실천에 있어서는 북남관계가 조미관계보다 앞서나갈 수 없으며 조미관계가 나빠지면 북남관계도 어쩔 수 없는 관계로 여기는 것 같다”라고 짚었다.

 

매체는 이에 대해 “지금까지 북남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사건건 미국에 일러바치고 미국이 승인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손들고 나앉아 아까운 시간을 허송세월한 것이 남조선당국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실증해주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매체는 “이거야 상식적으로 봐도 악순환관계이지 어떻게 선순환관계인가”라며 “도저히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는 타령이다”라고 주장했다.

 

매체는 특히 “북남관계는 북과 남이 손잡고 민족공동의 대업인 평화와 번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내부문제라면 조미관계는 말 그대로 우리 공화국과 미국과의 관계문제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판판 다른 북남관계와 조미관계를 억지로 연결시켜놓고 선순환관계 타령을 하는 그 자체가 무지와 무능의 극치이다”며 “만 사람은 물론 자기 스스로도 이해 안 되는 선순환관계 타령을 읊조리며 허구한 세월을 무료하게 보냈으니 그 타령이야말로 달나라에서나 통할 달나라 타령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북은 지난 4일 김여정 북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담화를 통해 탈북자들의 대북전단 살포행위를 막지 않으면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바로 다음 날 당 중앙위 통일전선부도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대북 전단 살포와 관련 남측 정부 태도를 비판하면서 첫 번째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부터 철폐할 것이며 이후 다른 조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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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독립과 호국이 오늘 대한민국의 뿌리”

대전현충원에서 65번째 현충일 추념식 열려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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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06  10:4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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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했다. [사진제공-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65번째 현충일 추념사에서 “독립과 호국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나라를 지켜낸 긍지가 민주주의로 부활했고, 가족과 이웃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의인을 낳았다”며, “독립·호국·민주 영령들은 각자 시대가 요구하는 애국을 실천했고, 새로운 시대정신과 역동적인 역사의 물결을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역사는 “독립·호국·민주”로 이어졌다고 정리한 셈이다.

문 대통령은 “국립 대전현충원의 현판을 안중근 의사의 글씨체로 교체하게 되어 매우 뜻깊다”고 밝혔다.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이었다. 광복군을 거쳐 지금의 우리 군까지 이어지고 있는 군인정신의 사표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 순국 110주년이다. 

문 대통령은 “내일은 봉오동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일”이라고 상기시켰다. 100년전 암울했던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이 이끈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제 맞서 봉오동에서 거둔 ‘독립전쟁 첫 번째 대승리’다. 

또한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의 뿌리가 독립군이었고, 2018년 국방부는 독립군과 광복군을 국군의 기원으로 공식 확인했다. 해방 후 많은 독립군, 광복군이 국군이 되었다”며 “독립정신을 호국정신으로 계승하여 6·25전쟁에 참전했다”고 밝혔다.  

‘한강 방어선 전투’를 지휘한 김홍일 장군은 광복군 참모장 출신이었고, 기병대 대장으로 활약하다 1950년 8월 생을 마감한 장철부 중령도 광복군 유격대장 출신이다. 

   
▲ [사진제공-청와대]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외손녀 이현원 중위는 국군간호사관학교 1기생으로 1953년 3월 임관해 참전했다. 독립군의 딸, 고(故) 오금손 대위는 한국전쟁 때 ‘백골부대’ 간호장교로 복무했다.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김필달 대령 역시 1950년 11월 간호장교로 임관해 한국전쟁 등에 참전했다.

그 후예들인 국군간호사관학교 60기 졸업생 75명이 올해 3월 3일 임관하자마자 대구로 가서 ‘코로나19’ 방역전에 참가했다. 6일 ‘경례문’을 낭독한 이혜민 소위는 임관식에서 “6·25 참전용사인 할아버지를 본받아, 국민과 군을 위해 목숨 바칠 각오로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말했다.

65번째 현충일 추념식 사회는 6.25참전용사 후손 이정민 아나운서와 배우 김동욱 씨가 맡았다. △대통령 내외 입장 △개식선언 △추모 묵념 △헌화 및 분향 △국민의례 △편지 낭독 및 노래 △국가유공자 증서 수여 △추념사 △추념공연 △현충의 노래 제창 △폐식 및 대통령 내외 퇴장 순으로 진행됐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딸, 장사상륙작전 참전용사, 3·15의거 희생자 배우자, 화살머리고지 국군 전사자 유족, ‘코로나19’ 순직공무원 유족과 동반 입장했다. “역사 속 애국의 현장에 있던 이들을 기리기 위해”라고 청와대가 밝혔다.

국기에 대한 ‘경례문’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뜻을 이어나간다는 의미로 6·25 참전용사 후손 간호장교 이혜민 소위와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증손자 김도현 해군대위가 낭독했다.

1951년 7월 강원도 양구에서 전사한 고 임춘수 소령이 당시 가족에게 보내기 위해 가슴에 품고 있던 ‘편지’를 딸 임욱자 씨가 낭독했다. 가수 이수현(악동뮤지션) 씨는 이 사연을 담은 ‘아버지’를 불렀다.

추념공연은 6·25 전쟁고아 2세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천안함 46용사 묘역에서 드보르작의 ‘고잉 홈(Going home)’을 연주하며 시작됐다. 이어 소프라노 임선혜, 가수 알리 씨가 ‘그 날’을 함께 불렀다.

행사 장소가 대전현충원으로 결정된 배경은 수도권에서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방역 대책 때문이다. 참석 인원도 최소화하여 300여명으로 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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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하면 욕심 끝없어…나이 들어 안 물러나는 건 헛짓”

등록 :2020-06-06 07:06수정 :2020-06-06 07:09

 

 

 

원혜영과 남승우의 아름다운 은퇴

‘국회의장 유력’에도 은퇴한 원혜영
“국회의장 하면 또 대통령 바랄지도
한번도 당선 안 된 사람 많은데
시장까지 일곱차례, 뭘 더 바라요”

“더 긴 것과 비교하면 욕심 끝없어
언제든 시민으로 돌아갈 때 대비해
내려놓기 연습을 맘속으로 했죠”

전문경영인을 후계자 만든 남승우
“자녀에게 돈 물려주는 건 몰라도
경영권 세습하는 건 촌놈이죠
이재용도 약속 지킬 수밖에 없어”

“글로벌 기업은 65살 은퇴가 당연
기업의 업무량과 성격이 바뀌어
늙어서는 제대로 대응 못해요”
국회의원과 부천시장 등 30년 동안 7선의 선출직 공직생활을 지내고 은퇴한 원혜영 전 의원(왼쪽)과 2년 전 전문경영인에게 ㈜풀무원의 경영권을 물려준 남승우 풀무원재단 상임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를 마친 뒤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국회의원과 부천시장 등 30년 동안 7선의 선출직 공직생활을 지내고 은퇴한 원혜영 전 의원(왼쪽)과 2년 전 전문경영인에게 ㈜풀무원의 경영권을 물려준 남승우 풀무원재단 상임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대개의 우정은 아름답다. 그것이 정의 등 사회적 가치에 바탕을 둔 우정임에야. 원혜영 전 의원과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은 고교 때 만났다. 민주화운동가와 산업일꾼으로 각자 걷는 길은 달랐지만, 공정과 정의에 대한 생각은 같았다. 5선을 지낸 원 전 의원은 기부와 깨끗한 정치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며, 식품기업 풀무원을 이끌었던 남 고문은 윤리경영의 대표적 실천가로 평가받는다. 30대 초반에 동업하면서 새겼던 ‘풀무원 정신’이 삶의 바탕이 됐다. 두 사람은 각자가 이룬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남 고문은 2년 전 전문경영인에게 후계 자리를 물려줬으며, 원 전 의원은 국회의장직이 눈앞에 있음에도 정계 은퇴를 선택했다. 끝자락마저 아름다운 삶이다. 남 고문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일체 언론을 만나지 않았지만, 50년 지기를 위해 기꺼이 “찬조출연” 했다.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두 사람에 대한 1차 인터뷰를 했으며, 의원 임기 종료 하루 전인 28일 오후 국회도서관에서 원 의원을 별도로 만났다.
“어서 와. 국회의원 임기가 열흘밖에 안 남았네.”“비가 그치니까 하늘이 깨끗해. 도시 공기가 매일 이래야 하는데.”오랜 친구는 말을 건너뛰어도 대화가 부드럽다. 2년 전 기업 경영에서 은퇴한 남승우(68) 풀무원재단 고문이 정계은퇴를 앞둔 50년 지기 원혜영(68·이하 호칭 생략) 의원을 반갑게 맞았다.“품격 있는 의원들이 별로 없는데 그나마 원 의원조차 사라지면 더 없어진다고 아쉽다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그의 은퇴에 대해 다들 훌륭하다고 해요. 정말 잘한 거죠.”(남승우, 이하 남)“남 사장이 2년 전에 물러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자극받은 면이 있어요. 한다더니 진짜 은퇴하는구나 했죠, 그때.”(원혜영, 이하 원)30여년 동안 정계와 재계에서 활동했던 두 친구는 각자의 정점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원혜영은 최다선 의원(6선)이 될 수 있는 21대 국회를 앞두고 지난해 12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평소 의정활동이나 유권자들의 평가, 지역구(부천시 정) 특성 등을 고려할 때 당선은 확실했다. 게다가 차기 국회의장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정치인이었다.

“국회의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두고 얼마나 아쉽냐고 많이 얘기하는데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식이라면 국회의장을 하면 대통령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할 것이고, 한국 대통령을 하면 미국 대통령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할 거예요.(웃음) 자꾸 나보다 더 긴 것과 비교하면 끝이 없어요. 4년 전 선거 때 나와 맞붙은 새누리당(미래통합당의 전신) 후보가 내건 공식 현수막의 문구가 ‘누구는 일곱번(부천시장 재선 포함) 하고 누구는 한번도 못합니까’였어요.(웃음) 그 사람 처지에서 보면 ‘저 사람은 별로 잘난 것도 없는데 일곱번이나 하냐’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처럼 한번도 당선이 안 돼 평생 애를 쓴 사람이 훨씬 많은데 더 이상 뭘 더 바라겠어요.”(원)

 

“나보다 더 큰 것이나 긴 것과 비교하면 끝이 없어요. 일곱번이나 선출직 공무원을 했는데 더 이상 뭘 더 바라겠어요?” 원혜영 전 의원이 지난달 19일 서울 수서동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나보다 더 큰 것이나 긴 것과 비교하면 끝이 없어요. 일곱번이나 선출직 공무원을 했는데 더 이상 뭘 더 바라겠어요?” 원혜영 전 의원이 지난달 19일 서울 수서동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아들에게 물려주려면 가족기업 해야”

 

정치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보통 ‘내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할 일이 더 남았고,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저는 사실 2012년 19대 총선이 끝난 뒤에 늦어도 20대 국회로 끝마치겠다는 생각을 혼자 했어요.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하기 때문에 적절한 때에 물러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죠. 내가 대표한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선거에 안 떨어지고 그만둘 기회가 있는데 왜 기어코 떨어지고 그만둡니까.(웃음) 제가 이 얘기를 했을 때 아내가 제일 재밌어했어요. 저보다 남 사장의 경우 훨씬 결단하기가 어렵죠. 사업하는 사람은 망하거나 죽거나 또는 죽기에 가까울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잖아요.”(원)2년 전인 2018년 1월 남승우는 ㈜풀무원의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연 매출 2조원이 넘는 회사의 창업자이자 대주주(51.84%)다. 은퇴할 때 회사가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대주주의 건강 등 신상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1남2녀의 혈육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이효율)을 후계자로 내세웠다.“예전에는 중간에 물러나는 게 이상한 사람이고 안 물러나는 게 당연한 거였어요. 왕이나 기업의 창업주는 죽을 때까지 했잖아요. 그러나 지금은 업무량이나 업무 성격을 보면 그건 말도 안 되는 헛짓입니다. 늙어서는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글로벌 기업에서는 전부 65살에 물러납니다.”(남)현재 풀무원에서는 최고경영자 임기가 끝나면 대주주가 아니라 전문경영인이 자신의 후계자를 뽑아서 시이오 후보추천위원회에 올리게 된다. 전문경영인 체제의 작동 방식이다. 남승우가 퇴임 전 확립한 시스템이다.“전문경영인을 후계자로 뽑은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외국의 공개 상장기업을 보면 안 그러는 게 이상합니다. 물론 과거에는 통상적으로 아버지 자리를 아들이 물려받는 것이 보편적이었어요. 그러나 기업 경영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이 됐거든요. 그래서 외국도 처음에는 자식들한테 물려주다가 지금은 가족기업 빼고는 아무도 아들한테 안 물려줍니다. 아들한테 물려주려면 패밀리 비즈니스 하면 돼요. 상장해서 퍼블릭이 된 기업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퍼블릭 기업이 된 뒤에 글로비스를 만들고, 에버랜드를 통해 괴상한 짓을 하다가 회사 임원들이 범죄에 연루되는 것을 우리가 다 봤잖아요. 돈을 물려주는 것이야 문제없지만, 경영권을 물려주겠다는 것은 촌놈입니다. 얼마 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아들에게 경영권을 안 물려주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너무 당연한 거예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어요. 삼성이 변하면 다른 회사도 따라가겠죠.”삼성은 이건희→이재용 경영권 승계를 위해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발행이라는 불법행위를 했으며, 현대차는 정몽구→정의선으로의 3세 승계를 위해 글로비스를 만들어 내부거래를 해왔다. 남 고문의 아들(남성윤)도 ㈜풀무원 관계사 중 하나인 올가홀푸드의 대주주(94.95%)여서 승계 포석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러려면 글로비스나 에버랜드처럼 내부거래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하나도 없어요. 올가홀푸드가 풀무원 지분을 전혀 안 갖고 있고요. 원 의원이 39년 전에 시작했던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에 뿌리를 둔 회사라는 상징성 때문에 매년 적자를 보면서도 유지해왔어요. 그런데 그동안 자본금 174억원을 다 까먹고, 제가 개인적으로 보증을 서서 빌린 차입금으로 겨우 운영하고 있는데 곧 정리가 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은 촌놈이죠. 외국의 상장기업은 모두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줍니다. 우리나라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수서동 재단 사무실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은 촌놈이죠. 외국의 상장기업은 모두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줍니다. 우리나라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수서동 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꼴찌 하다가 서울법대 합격한 남승우

 

원혜영과 남승우의 만남은 10대 중반인 고교(경복고) 때 시작됐다. 1학년과 3학년 때 같은 반을 했지만, 둘은 ‘노는 물’이 달랐다. 가난한 이웃들과 공동체생활을 하며 컸던 원혜영은 모범생에 속했다. 우열반으로 나뉘어 있을 때 원혜영은 열반(연고대반)의 반장(3학년)을 맡았으며, 성적도 반에서 상위권이었다. 신문과 시사잡지를 섭렵했던 원혜영은 박정희의 3선 개헌(1969년)에 반대하는 서울시내 고교의 연합시위를 준비하다가 발각되기도 하는 등 일찍부터 정치의식이 강했다. 반면에 중산층 출신의 남승우는 학교보다 만화방을 더 자주 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날라리’ 과였다. 조건부로 3학년에 겨우 가진급했을 정도로 성적은 꼴찌그룹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3학년 2학기 첫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법대에 합격해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두 사람의 대학시절은 더 달랐다. 재수 끝에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입학(1971년)한 원혜영은 교양과정부(1학년) 학생회장을 맡아 교련 반대 운동을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강제징집과 두번의 구속, 세번의 제적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반면 남승우는 대학에서도 공부 대신 여행과 연애 등 낭만적인 시간을 보냈다. 졸업할 즈음부터 뒤늦게 사법시험에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실패하자, 1978년 당시 재계 순위 2~3위였던 현대건설에 취업했다. 건설 붐이 한창이던 중동에 1년 동안 파견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직장에서도 잘나갔다.민주투사와 산업일꾼으로 제 갈 길을 걷던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1980년 초겨울이었다.“최규하의 체육관 대통령 선출을 막고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 위해 벌였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식’ 사건(1979년 11월)으로 수배당해 장기 도피 생활을 할 때였어요. 서울 신촌 부근을 지나다가 우연히 승우를 만났죠. ‘다음에 한잔하자’고 인사성 말을 하고 돌아서는데 이 친구가 ‘다음에 하자는 것은 보지 말자는 소리다’ 하며 인근 술집으로 데려갔어요.”(원)“저는 학교 다닐 때 데모를 싫어했어요.(웃음) 이상돈 의원이 법대 동기인데 2학년 때 학생회의 학년 대의원으로 추천하길래 그마저 거부했을 정도였죠. 군대도 보안사에서 근무했고요. 그러나 민주화운동 하는 친구들한테 미안하고 빚진 마음은 늘 있었어요. 그래서 고생하는 친구에게 따뜻한 밥 한끼 먹이고 싶었겠죠.”(남)그와 만난 지 얼마 안 돼 원혜영은 생계를 위해 사업에 나서야 했다. 1년여 전에 결혼한 아내 안정숙마저 기자(당시 <한국일보>)로 일하다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탄압 과정에서 해직당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그는 아버지 원경선(2013년 작고)이 경기도 양주에서 운영하던 ‘풀무원 농원’에서 나오는 유기농산물을 가져다 파는 가게(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를 1981년 5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열었다. 국산콩으로 두부와 콩나물도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품’을 제공한다는 기업 철학을 처음부터 분명히 세웠다. 서른살 때였다.하지만 유기농산물은 수급이 불규칙한데다 원재료 값으로 인해 두부와 콩나물 가격이 기존 제품보다 3배나 비싸다 보니 사업이 어려웠다. 긴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변 친척들에게 손을 벌리던 그는 “언제든 찾아오라”던 남승우를 떠올렸다. 남승우는 원혜영에게 기꺼이 돈을 빌려줬을 뿐 아니라 사업이 안정적이려면 제조업을 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

“아내가 부천 집에서 콩나물을 직접 키우는 등 온 가족이 달라붙었지만, 경험 없이 뛰어든 일이어서 초기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승우의 조언도 있고 해서 당시 유행하던 현미효소를 유기농으로 시도해서 1982년 개발에 성공했어요. 이때 승우는 첫 투자까지 했죠. 그래서 두부와 콩나물을 중심으로 하는 ‘풀무원 유기식품’과 별도로, 현미효소에 집중하는 ‘풀무원 건강식품’이란 회사를 만들었어요. 풀무원 유기식품은 제 개인회사였고, 건강식품은 저랑 승우가 공동대표를 맡았어요.”(원)

 

두 사람은 고교 때 같은 반 친구
원혜영은 민주화운동에 매진
남승우는 연애·놀기 등에 열중
1980년 우연한 운명적 만남 뒤
‘풀무원 창업과 계승’의 우정

원, “대세보다 옳은 정치” 한길
겸손한 ‘여의도 신사’ 자리매김
남, “이웃사랑 생명존중” 정신으로
기업의 윤리경영 모범 만들어

 

오랜 친구인 원혜영 전 의원(왼쪽)과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오랜 친구인 원혜영 전 의원(왼쪽)과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이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풀무원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원혜영은 종류가 다른 사람이죠”

 

그러나 효소식품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인 보도로 인해 당시 엄청난 붐이 일었던 효소식품 시장 자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말았다.“총판과 대리점까지 다 모집해 놓았는데 언론 보도로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등 난리가 났어요. 제가 당시 1억원을 빌려서 일단 부도를 막았어요. 한달에 40만원인 제 월급을 모아서 그 돈을 갚으려면 한푼도 쓰지 않아도 20년이 넘게 걸리겠더라고요. 또 낮에는 사무실에 나가 회사 일을 하고, 밤에는 효소 사업 일을 하는 이중생활을 더 지속할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1984년 1월 현대건설에 사표를 내고, 풀무원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죠. 원대한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코너에 몰려서 그랬죠. 대부분의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수영장 옆을 지나다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셈이죠. 그럴 때 포기하고 마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개헤엄부터 배우면서 헤쳐나가는 거죠.”(남)평탄한 직장생활을 두고 앞날이 불확실한 사업에 뛰어든 남승우는 방문판매에 관한 책을 쌓아놓고 마케팅 공부부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주부 등으로 구성된 판매원 조직을 만들어 유기농 현미효소 시장을 다시 살려냈으며, 그해 가을에는 빚도 완전히 털어냈다. 걸출한 경영자를 만나 풀무원이 이내 자리를 잡아가자, 원혜영은 자신이 탄생시킨 기업을 도리어 떠났다.

“남 사장이 와서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원래 하던 민주화운동으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죠. 오랫동안 동지였던 김근태 선배도 저한테 빨리 돌아오라고 몇번 요청하기도 했었고요. 그래서 남 사장한테 유기식품과 건강식품을 통합해서 실질적인 오너를 네가 맡아서 운영하라고 줄기차게 설득했죠. 1984년 말에 그렇게 하기로 합의하고, 대신 사업이 안정될 때까지 2년간 더 남아 있어 달라는 요청을 제가 수용해서 86년 말까지 풀무원에서 일했죠.”(원)

 

1981년 서른살의 청년 원혜영이 만든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에서 시작한 ㈜풀무원은 1982년 유기농 현미효소를 개발함으로써 사업의 영역을 한 차원 높였다. 당시 현미효소의 시제품을 시음하는 모습. 오른쪽 끝은 당시 현대건설 구매과 직원이던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 그 옆은 원혜영 전 의원. ㈜풀무원 제공
1981년 서른살의 청년 원혜영이 만든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에서 시작한 ㈜풀무원은 1982년 유기농 현미효소를 개발함으로써 사업의 영역을 한 차원 높였다. 당시 현미효소의 시제품을 시음하는 모습. 오른쪽 끝은 당시 현대건설 구매과 직원이던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 그 옆은 원혜영 전 의원. ㈜풀무원 제공
 
1986년 새로운 두부공장을 세운 뒤 풀무원식품직판장에서 직원들이 고사를 지내고 있다. 뒤편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원혜영 전 의원, 그 옆 검은색 양복 차림이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 ㈜풀무원 제공
1986년 새로운 두부공장을 세운 뒤 풀무원식품직판장에서 직원들이 고사를 지내고 있다. 뒤편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원혜영 전 의원, 그 옆 검은색 양복 차림이 남승우 풀무원재단 고문. ㈜풀무원 제공
 
원혜영이 떠난 1987년 풀무원은 연 매출이 100억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고, 미래 전망도 밝았다. 반면 민주화에 대한 전망은 전혀 안 보일 때였다. 게다가 그는 2명의 어린 아들을 둔 36살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원혜영은 상표권만 빼고 모든 지분을 남승우에게 넘겼다. 1996년 상표권을 일정 지분으로 되돌려받으려 했으나, 세금 문제 등 상황이 복잡하자 원혜영은 20억원 전액을 들여 장학재단(부천육영재단)을 만들었다.“특별하게 고민하고 그런 것은 전혀 없었어요. 가족들도 제 선택을 존중해줬고요. 친구 덕분에 제 꿈이었던 민주화운동으로 복귀하는 날을 앞당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풀무원에서 손 떼는 느낌은 시원섭섭했던 것 같아요.”(원)“사람들이 물어보니까 시원섭섭했다고 하는 거지 실은 전혀 아니에요. 그때도 자기 꿈과 생각이 확실했거든요. 원 의원은 보통사람과는 영 다른 사람이에요. 나중에 장학사업 하는 것을 봐도 그렇고, 지금도 다르잖아요. 아버지인 원경선 원장님을 꼭 닮은 사람이거든요.”(남)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원경선은 해방 이후 잠시 토목업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1949년 사업을 접고 농부의 길을 택했다.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의 미개간지 1만여평을 사서 논밭을 일궜다. 나중에 풀무원 농원이라고 이름 붙인 이곳은 원경선 가족의 삶터이기에 앞서 전쟁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공동체의 터전이었다. 원경선은 1974년 우연히 일본 잡지 <애농>(愛農)을 보고, 생명과 지구 환경을 살리는 유기농에 눈떴다. 1976년 그는 부천을 떠나 경기도 양주군으로 풀무원 농원을 옮겨 한국에서 최초로 유기농업을 시작했다. 또 1988년부터 국제기아대책기구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생을 마칠 때까지 평화주의를 실천했다. 이러한 ‘이웃사랑 생명존중’이라는 원경선의 정신은 풀무원의 브랜드 정신이 됐다. 원경선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혜영이 대학 1학년 때 시위에 앞장서자, 지도교수가 부천 집으로 찾아가 ‘이러다가 아들이 제적되거나 감옥에 갈 수 있다’면서 단속을 주문했다. ‘아들이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면 말리겠지만, 정의로운 일을 하는데 어떻게 말리겠느냐. 오셨으니 딸기나 드시고 가라’고 했다는 일화는 원경선의 인물됨을 잘 보여준다.

 

 

영광의 정치인 시절은 부천시장 때”

 

풀무원을 떠난 원혜영은 박원순, 서중석, 이이화, 임헌영 등이 중심이 된 재야 학술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에 1987년 1월 초 합류해 계간지인 <역사비평> 발행을 맡았다.“정치를 하려고 풀무원을 관둔 게 아니었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러 나왔는데 6월항쟁으로 합법적인 정치 공간이 열렸던 거죠. 그때도 바로 정치를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당시 민주화를 바라던 시민들은 양김(김대중·김영삼)이 힘을 합쳐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를 원했죠. 저 역시 단일화를 촉구하는 일에 참여했고, 그것이 깨진 뒤인 1988년 13대 총선 때 정치에 참여하게 됐죠. 단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와이에스(김영삼)나 디제이(김대중) 쪽으로 많이 흡수돼 갔지만, 제정구, 유인태, 저, 김부겸 등은 외롭고 현실적으로는 가장 전망이 없는 독자노선을 택했어요. 양김을 극복하는 새정치를 내걸고 기호 5번인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어 출마했지만, 당연히 떨어졌죠.”첫 출마 때 원경선은 아들에게 ‘돈의 유혹을 이길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원혜영은 “돈을 벌려면 잘되는 사업을 하지 왜 정치를 하겠습니까. 자신 있습니다”, “하나님 기준은 몰라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부정부패에 자신이 없으면 애초부터 안 하는 게 맞다고 봐요. 뒤돌아보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기준에서는 바르게 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죠.”원혜영은 1992년 14대 총선 때 통합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 중구에서 당선돼 여의도에 첫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해 말 대선 패배 직후 정계은퇴를 했던 김대중이 1995년 복귀하면서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나가자, 원혜영은 이를 반대하면서 민주당에 남았고 이듬해 총선에서 다시 떨어졌다.

“나는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믿음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 목적이지 국회의원이 목적이 아니었다. 낙선은 했지만 대세를 따르지 않고 대의를 지킴으로써 내 방식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자긍심도 있었다.”(<아버지, 참 좋았다>, 원혜영)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원혜영 국회의원 정치마무리 기념출판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하나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오른쪽부터),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원 의원, 우상호 의원이 토크쇼를 하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지난달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원혜영 국회의원 정치마무리 기념출판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의 하나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오른쪽부터),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원 의원, 우상호 의원이 토크쇼를 하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원혜영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를 위해 김대중의 국민회의에 다시 합류한 뒤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부천시장(1998~2003년)을 거쳐 17대 총선(2004년)부터 내리 4선을 했다. 당 사무총장과 정책위의장, 원내대표를 지냈으며, 매너 좋은 의원들에게 주는 백봉신사상을 세차례나 받았다. 이번 21대 총선 때는 민주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아 총선 승리에 기여하기도 했다.“정치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시절은 부천시장 때였어요. 하기만 하면 ‘퍼스트무버’이고 ‘뉴프런티어’였어요. 그야말로 펄펄 날았어요. 버스 도착시간 안내시스템(BIS)을 세계 최초로 도입했고, 부천을 만화의 메카로 만드는 등 문화도시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죠. 국회로 다시 와서는 정치적인 이슈로 싸우기보다는 어떡하면 일하는 국회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몸싸움 없는 국회를 구현하기 위한 국회선진화법(2012년 5월)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그 일환이었죠. 자랑스러운 성과 중 하나입니다.”5선 의원에 주요 당직과 국회직을 두루 지내면서도 원혜영은 늘 소탈하고 겸손한 것으로 유명하다. 재벌가의 갑질이 사회문제가 됐던 2018년 4월 그의 전직 비서관이 ‘갑의 역습’이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에서 원혜영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수행비서 대신 운전을 한 적이 있는데 저녁 약속 장소에 가면서 의원이 직접 운전을 하고 비서인 자신은 뒷좌석에 앉아 갔던 일, 지방 출장을 갔다가 3만원짜리 허름한 모텔방 하나에서 의원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고 침대는 자기에게 내준 일이었다.“별거 아니에요. 저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이거든요. 제가 길을 더 잘 알기에 운전을 했고, 적당한 호텔이 없어서 모텔에 들었고, 남자 둘이 방 두개를 쓸 필요가 없어서 그랬던 거죠. 침대를 양보했다지만, 그런 침대가 얼마나 좋겠어요?(웃음) 다만, 내려놓기 연습이랄까 그런 것은 늘 마음속에 있었죠. 국회의원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하는 거다, 좋은 사무실과 보좌진은 국가와 사회가 잠깐 빌려준 거다, 그러니까 4년 계약직을 그만두고 시민으로 돌아갈 때 허전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잘못된 거다라는 생각을 했죠. 물론 인품 있는 정치인이 되어야지, 그러려면 즐기고 누리는 것을 참아야지 하면서 도 닦듯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몸에 맞았어요. 어릴 때 가족의 범위가 확장된 환경에서 자란 영향이 아닐까 싶어요.”원경선의 불호령이 다진 윤리경영원혜영이 떠난 뒤 남승우가 홀로 풀무원을 키웠다. 그가 풀무원을 인수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법대 나온 녀석이 콩나물 장사가 뭐냐. 차라리 메리야스 장사를 하라”며 반대했다. 남승우는 “신라호텔과 여인숙이 모두 숙박업이듯 콩나물·두부 장사도 라면회사와 같은 식품업”이라고 설득했다. 실제로 그는 김치와 고추장, 생수 등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그 결과 풀무원의 매출은 30여년 만에 200배 이상 커졌다. 원경선이 낳고 원혜영이 다듬은 ‘풀무원 정신’을 훼손하지 않고 계승 발전시키면서 이룬 성과였다.

“1989년쯤 고추장 사업에 진출할 때였어요. 창사 이후 풀무원의 원칙은 쌀과 채소는 유기농만 사용하고, 잡곡은 국산을 쓴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고추장 원료인 고추를 유기농으로 키우는 농가가 거의 없어 할 수 없이 국산 고추를 사용해야 했어요. 원경선 원장님한테 보고를 했더니 ‘할 수 없지. 대신 풀무원 이름은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광고를 냈죠. 제품명으로 ‘명가 고추장’이라고 쓰고, 작은 글씨로 ‘풀무원 식품’이라는 회사 이름을 표기했죠. 원장님이 그걸 알고는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 당장 풀무원 이름을 빼라’고 불호령을 내렸어요. 그때 원장님한테 찍혀서 제가 몇년 동안 신뢰를 회복하느라 고생했어요.(웃음) 그러나 풀무원 정신을 다잡는 좋은 계기가 됐죠.”

 

풀무원의 정신이자 뿌리인 원경선 원장(가운데)이 2009년 5월25일 남승우 당시 대표(왼쪽), 원혜영 의원과 함께 충북 괴산에 위치한 풀무원 로하스아카데미 개관식에 참석하고 있다. ㈜풀무원 제공
풀무원의 정신이자 뿌리인 원경선 원장(가운데)이 2009년 5월25일 남승우 당시 대표(왼쪽), 원혜영 의원과 함께 충북 괴산에 위치한 풀무원 로하스아카데미 개관식에 참석하고 있다. ㈜풀무원 제공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등 위기도 몇차례 있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초인 2009년 중국산 유기농 콩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관세를 포탈했다는 혐의는 고비였다. 시민운동가의 사외이사 선임에 대한 탄압 의혹 등 짚이는 데가 있었지만, 소비자 신뢰가 중요한 풀무원으로서는 결과가 중요했다. 관세청과 검찰은 강도 높은 수사 끝에 380억원의 세금 추징을 했다. 풀무원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소송 끝에 2014년 무혐의 판정과 함께 추징금을 전액 돌려받았다. 풀무원은 공정거래위원회와 한국소비자원으로부터 12년째 ‘소비자중심경영’(CCM) 인증을 받았으며,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 선정하는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에 13년 연속 선정됐다.“풀무원의 제일 큰 자산은 이름이에요. 이름에서 원경선 정신이 나오거든요. 그것을 잘 지키려면 윤리적이지 않으면 안 돼요. 윤리경영이란 간단합니다. 투명하고 공정하면 됩니다. 우린 비자금이란 걸 모르고, 시이오 차량의 운행일지까지도 세세하게 다 기록합니다.”남승우는 풀무원재단에 매일 출근해 여러 분야의 책 읽기에 하루 네댓 시간을 투자한다.“학교 때 공부를 안 했으니 뒤늦게라도 보충해야죠.(웃음) 다음 세대인 아이들을 상대로 한 바른 먹거리 교육, 평화 교육에 관심을 쏟으려고 해요.”연명의료결정법 제정(2016년)에 앞장섰던 원혜영은 앞으로 ‘웰다잉 운동’에 매진할 계획이다.“5년 뒤면 우리나라는 65살 이상 노인 인구가 전 인구의 20%가 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합니다. 이런 사회가 건강하려면 노인들이 자기 삶의 마무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하는 생활문화가 절실합니다. 인생의 막을 내리기 전 20~30년은 인생의 자투리가 아니라, 인생의 당당한 한 막이거든요. 새로운 일을 하려니 마음이 설렙니다. 생활의 리듬을 잘 간직하면서 여유있고 보람있게 지내야죠.”원혜영에게 사무실과 차에 대해 물어봤다.“사무실이 왜 필요해요. 그럴 돈도 없고요. 여기(국회도서관) 의원열람실은 전직들도 이용할 수 있다고 해요. 앞으로 여기 자주 와서 책 읽고 공부하려고 해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겠지만, 적당한 크기의 차를 샀어요. 당연히 제가 몰고 다니죠.”원혜영과 남승우는 지인 몇사람과 함께 책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인생 2막도 1막처럼 ‘따로 또 같이’ 가고 있다.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만화 발전을 지원한 원혜영 전 의원을 위해 신문수 만화가가 그린 그림. &lt;원혜영이 그린 만화도시 이야기&gt;
만화 발전을 지원한 원혜영 전 의원을 위해 신문수 만화가가 그린 그림. <원혜영이 그린 만화도시 이야기>
원혜영 전 의원은 부천시장 시절 부천시를 만화의 메카로 만드는 등 만화계 발전에 앞장섰다.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두호 만화가가 그린 그림. &lt;원혜영이 그린 만화도시 이야기&gt;
원혜영 전 의원은 부천시장 시절 부천시를 만화의 메카로 만드는 등 만화계 발전에 앞장섰다.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두호 만화가가 그린 그림. <원혜영이 그린 만화도시 이야기>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948160.html?_fr=mt1#csidx60881a9a19ec67da3c59572b881f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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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명의 친일파 군인이 현충원 명당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장] 현충원에 묻힌 '조선인 일본군', 법적인 재평가 및 파묘 시급 20.06.05 20:32l최종 업데이트 20.06.05 20:32l김종성(qqqkim2000)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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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1월 5일, 24세의 젊은 시인 윤동주는 '별 헤는 밤'이란 시를 썼다. 시에서 그는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라고 읊은 뒤 이렇게 노래했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윤동주는 1941년 늦가을의 밤하늘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서정적인 이름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밤하늘 별들을 보면서 늦가을뿐 아니라 1년 내내 추악한 이름들을 떠올려야 할 때가 있다. 그곳에만 가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국립현충원의 장군 묘역들이 바로 그곳이다.

지난 4일 군인권센터가 <친일인명사전>을 토대로 친일파 군인들의 군 경력과 현충원 안장 실태를 정리해 발표한 "국립묘지에 묻힌 '조선인 일본군'의 묘를 파묘하라"는 성명에 따르면,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 군인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56명이다.

그 가운데 20명은 일본제국 군인이고 36명은 만주국 군인이다. 이들은 모두 8·15 광복 뒤 대한민국 국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현충원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다. 56명 중 46명은 광복 뒤 장군이 돼서 별을 달았다. 일본제국과 만주국의 군인이 국군 장군으로 승진한 뒤 대한민국 현충원 장군묘역을 점거하고 있다.

깨우지 않을 수 없다
 
 김창룡 특무대장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  김창룡 특무대장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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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군인 56명 중에는 박정희 못지않게, 어쩌면 훨씬 더 극적으로 국군에 안착한 이들도 있다. 일본 관동군 헌병 이등병으로 출발해 항일세력에 대한 첩보 활동으로 성가를 날리고 헌병 오장(하사)까지 올라간 김창룡(1916~1956)도 그중 하나다. 해방 뒤 그는 사관학교 생도를 거쳐 초대 특무부대장(군사안보지원사령관)에 올랐다. 최종 계급은 중장이다.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김창룡은 해방 뒤에 국군이 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남한 땅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해방 직후 고향 함경남도로 귀환했다가 소련군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창룡은 탈옥에 성공했다. 그 뒤 38선을 넘어 국방경비대 제5연대 사병으로 입대했다. 만주군 출신인 박기병 소위의 추천 덕분이었다. 그는 국군에 들어온 뒤에도 또 한 번 '도망'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탈옥이 아니라 탈영이었다. 그 이유를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이렇게 설명한다.
 
"가혹한 훈련에다 관동군 헌병 출신이라는 이유로 연대의 경비사관학교 지원 추천을 받지 못한 불만이 겹쳐 근무지를 이탈했다."
 
사관학교 입학 추천을 해주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탈영했지만, 더 이상 남하할 곳은 없었다. 그냥 남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정보 전산화가 이뤄지지 않은 당시의 기술 수준이 그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그는 몰래 국군에 재입대하는 데 성공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다시 박기병이 근무하던 국방경비대 제3연대의 사병으로 재입대"했다고 말한다. 그런 뒤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정보 장교로 명성을 날리며 별 셋을 달게 됐다.

김창룡을 포함한 친일파 군인 56명 대다수는 국군 장군이 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육군·공군·해병대의 지휘부까지 점거했다. 군인권센터 보도자료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실제로 그 56명 중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자가 6명,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자가 2명,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자가 3명이고, 초대 육군참모총장(이응준), 공군참모총장(김정렬), 해병대사령관(신현준)은 모두 친일 군인이다.

심지어 육군참모총장은 생존 중인 백선엽(7·10대 총장)을 제외하고는 1대부터 9대(이응준, 채병덕 중임, 신태영, 정일권 중임, 이종찬, 이형근)까지 모두 친일파로 현충원에 묻혀 있고, 해병대 사령관은 1·2·3대(신현준·김석범·김대식)가 모두 친일파로 현충원에 묻혀 있다. 육군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의 초대 교장도 친일 군인이며, 56명 중에는 국방부 장관을 지낸 자 4명(신태영·이종찬·임충식·유재흥)이고, 대통령도 1명(박정희) 있다."
 
이렇게 일본제국과 만주국 군인들이 별을 달고 초기 국군의 수뇌부를 점거했다. 또 그들이 현충원 장군묘역까지 차지했다.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은 국립 시설이다. 국립현충원에서 일본제국과 만주국 군인들이 추앙받고 있으니, '국립'의 국(國)이 어느 나라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약 친일파 군인들이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한 상태에서 국군에 들어왔다면, 그들의 과거를 굳이 들추어낼 필요가 없다. 반성하고 사죄한 상태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새로운 전공을 세우고 현충원에 안장됐다면,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현충원 파묘를 생각할 이유도 없다. 그런 절차도 없이 현충원에 누워 있으니 일어나라고 깨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근원적 부조리 제거
 
 2006년 3월 1일 대전국립묘지 장군 제1묘역 김창룡 장군 묘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반민족행위자 및 반국가사범의 국립묘지 퇴출'을 주장하며 묘비에 끈을 묶어 쓰러트리는 파묘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2006년 3월 1일 대전국립묘지 장군 제1묘역 김창룡 장군 묘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반민족행위자 및 반국가사범의 국립묘지 퇴출"을 주장하며 묘비에 끈을 묶어 쓰러트리는 파묘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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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전향 절차도 없이 국군 수뇌부를 장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 바로, 미국의 남한 정책이다. 미국은 해방 직후 전국 곳곳에서 분출된 한국인들의 자치 역량을 억압하고 남한 땅을 자국의 전략에 맞추고자 했다. 그래서 한국 내 친일 세력 및 보수파와 손을 잡았다.

한국인들의 원성을 샀던 친일 경찰과 기업인들이 해방 뒤에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제휴해 한국 민중을 억압하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미국의 전략적 필요성과 무관치 않다. 친일파 군인들이 전향 절차도 없이 국군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미군의 주도로 조직되기는 했지만, 해방 직후 국군 내에는 친일파뿐 아니라 민족주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지지하는 세력도 국군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을 좌파 빨갱이로 매도하고 이들의 국군 입대를 막기 위한 노력도 있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009년에 <사림> 제33호에 실린 노영기 조선대 교수의 논문 '국방경비대·육군의 세력분포와 숙군'은 해방 직후의 국군과 관련해 "다양한 세력들이 국방경비대에 참여했다"며 "그러나 아직 어느 한 세력이 압도하지 못한 채 좌우 세력의 공존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어느 한쪽도 압도하지 못하던 국군 내에서 보수세력과 친일파가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무관치 않다. 미국의 입장이 남한 단독선거 쪽으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군부 내 역학관계가 크게 바뀌는 일이 벌어졌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을 국군 내에서 숙청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에 따라 단행된 숙군 작업이 국군 내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보수파·친일파를 강화시켰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1947년 하반기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국방경비대의 위상이 변화하자, 미 군정은 단독선거에 반대할 수 있는 좌익세력의 추방을 묵인했다. 좌익세력 추방은 정부 수립 후에도 지속됐다. 오히려 정부 수립 후 반체제 세력들의 육군 입대를 봉쇄하거나 그들을 육군에서 추방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이를 위해 육군은 인적 보충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고, 정부 수립 후에도 지속적인 숙군을 전개했다."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지지하는 세력이 미국과 이승만에 의해 쫓겨남에 따라 보수파와 친일파의 국군 장악력이 현저히 높아졌고, 이런 가운데 친일파 군인들이 별을 달고 수뇌부를 구성했다. 그래서 그들의 눈부신 성공은 그들의 개인적 성공뿐 아니라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성공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들이 현충원에 누워 있는 것은 그들 개인의 파렴치를 떠나 훨씬 더한 구조적 부조리를 반영한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국민의 뜻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이 미국과 친일·보수파의 뜻대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구조적 부조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법적 재평가와 현충원 파묘가 절실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근원적 부조리를 제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충원의 별들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홍석 묘지 친일파 묘비에 적힌 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친일파 백홍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홍석은 장군제1묘역 중턱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국립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이 나온다. 여기에 김창룡의 묘가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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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는 밤'을 쓸 당시의 윤동주는 겉보기에는 여리고 순수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야심 차고 웅대했다. 그는 무장 독립투쟁을 염두에 두고 구체적 조직 활동에 나섰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43년 7월 14일 교토에서 특고경찰(사상범 단속)에 체포된 것도 그런 활동 때문이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보안과가 작성한 1943년 12월호 <특고월보>에 수록된 '재(在)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책동 개요'에 따르면, 윤동주는 군인들과 함께하는 무장투쟁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특고월보>에는 다음과 같이 윤동주의 행동 계획을 설명하는 부분이 들어 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강화조약에 즈음하여 조선의 독립 문제가 반드시 조건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만일 제기되지 않더라도 일본의 국력이 약해지거나 또는 일본이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독립운동을 전개시키면 조선인은 모두 궐기할 것이다. 그때에 조선 출신 군인들도 큰 구실을 해야 할 것이며, 우리들도 목숨을 바쳐 궐기해야 한다."

 
윤동주는 '조선 출신 군인들'과 함께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자신이 무장투쟁을 주도하는 데는 한계가 많았겠지만, 적어도 그런 운동에 참여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별 헤는 밤'을 쓸 당시의 그는 그런 의지를 품고 있는 열혈 청년이었다.

윤동주는 '조선 출신 군인들도 큰 구실을 해야 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시기에 친일파 군인 56명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일본군과 그 2중대인 만주군에 소속된 그들은 오로지 일본제국의 승리를 위해 정신없이 싸울 뿐이었다.

윤동주 같은 열혈 청년들을 모셔도 시원찮을 국립현충원이 그 56명을 가장 중요한 공간에 모시고 있으니, 대한민국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제국과 만주국에 충성한 사람들을 위해 국민들이 세금을 들여 현충원을 운영하고 거기에 가서 참배하고 경의를 표해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윤동주는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오늘날 현충원의 별들을 보면 박정희·백선엽·김창룡·나응준 같은 '이국(일본국·만주국) 장군들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충원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무 걱정 없이 별을 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들의 무덤을 하루빨리 파내야만 우리도 현충원에서 윤동주처럼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라고 읊을 수 있을 것이다.

 

태그:#현충일, #서울현충원, #현충원 파묘, #친일파 군인, #친일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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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은 단지 방아쇠...코로나, '아메리칸드림'을 침공하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06/06 10:20
  • 수정일
    2020/06/06 10:20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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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의 '인사이드 아메리카'] 제국이 그들의 배를 불리는 방식 16


 

▲ 조지 플로이드 사망 관련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워싱턴D.C.의 링컨 기념관 앞에 정렬한 주방위군. <워싱턴포스트>는 이 정경이 미국의 이상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며 군대가 국민을 방어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눌 것인가를 묻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6월 4일 자 갈무리.

 
 
잊힐 만하면 흑인에 대한 백인 경찰의 과잉·강압에 의한 사망사건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이번만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시위대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격화되고 있고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인다. 이번엔 백악관 앞까지 시위대가 밀고 들어갔다. 트럼프는 백악관 지하 벙커로 대피하기까지 했다. 심상치 않다. 
 
그런데 이번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를 단순하게 흑백 간 인종차별적 인권 유린 문제로만 보는 것은 사태를 잘못 짚은 것이다. 왜 그럴까? 미국의 모든 문제의 정점에는 반드시 인종 문제가 있다. 마치 끓어오르는 화산의 마그마가 가장 약한 지반을 뚫고 폭발하듯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비등할 때 터져버리는 취약점이 바로 인종이다. 그래서 인종 문제는 점잖은 표현으로 종합선물세트, 나쁘게 표현하면 오물통 같은 것이다. 오물이 쌓고 쌓이면 결국 흘러넘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나는 격화된 시위를 단순히 흑백 간의 차별에 분노한 시위, 즉 인종 간 문제 해결 요구로 축소시키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경계하고자 한다. 거기엔 다른 모든 문제들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종 문제는 단지 그 분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우려와 경계는 이번엔 기우가 될지도 모르겠다. 시위를 전하는 언론들도, 심지어 시위에 나온 필부필부들조차도 이번 사건을 기화로 뭔가 미국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경찰의 잔인한 폭력을 징벌하라는 데만 있지 않고, 망가진 미국 시스템을 전체를 교정할 때가 왔다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 근접해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다. 과거엔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이전에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 많은 호응을 얻지 못하고 단발성에 그치고, 근본적인 문제 제기나 비판에는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그저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것에 실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성급한 나만의 바람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미국과 미국인 자신이 자신들의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 확실히 알고 난 뒤에나 벌어질 일이었기 때문이다. 뭐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과외나 학원보다 자기주도 학습이 더 중요하듯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이야기가 사뭇 다른 것 같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9일 자 'The America We Need')
 
미국 언론은 지금 미국은 '부싯깃통'(tinderbox)라고 이야기 한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22일 자 'American Is a Tinderbox') 불똥만 튀면 터져버리기 직전의 일촉즉발의 상태라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미국과 미국인들을 이런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 되었을까? 그 계기는 코로나19다. 
 
 

▲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 나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고무 탄환에 맞아 눈이 부은 미니애폴리스의 한 시민. 제목은 '일촉 즉발(부싯깃통)의 미국'이다. <뉴욕타임스> 6월 29일 자 갈무리.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 코마거(Herny Steele Commager, 1902~1998)는 그의 책 <미국 정신(The American Mind)>에서 "인류 역사상 미국처럼 성공을 거둔 나라는 없다. 그리고 모든 미국인이 그 사실에 대해 안다"라고 썼다. 그러나 코마거가 아직도 살아서 코로나를 겪고 있는 미국을 보고 있다면 아마도 저 문장을 다시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이 거둔 성공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미국인들이 그것이 착각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뉴욕타임스> 칼럼처럼 코로나 침공은 미국 역사상 미국 본토에서 일어난 최초의 침공으로 기록될 만하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5월 21일 자 'The First Invasion of America')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참혹했다. 6월 3일 현재 확진자는 180만 명, 사망자는 10만6000명을 넘어섰다. 미비한 의료체계와 환경으로 검사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 나간 자들이 그 몇 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걸 감안하면 완전한 참패다. 그러나 참혹함은 미국인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코로나는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첫 번째 침공으로 기록될 만큼 위력이 대단했고 참혹한 결과를 남기고 있다. 그 후유증은 미국 사회를 어디로 인도할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뉴욕타임스> 5월 21일 자 갈무리.

 
 
코로나로 인해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창피를 당했다. 그런데 속된 말로 그 '쪽팔림'은 당하는 당사자들만 모르면(혹은 모른 체하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이 정확한 사태 파악을 어느 순간 하게 되면 그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마치 안데르센 동화의 벌거숭이 임금님과 간신들처럼. 너나없이 벌거숭이 임금님을 칭송하던 이들이 임금이 벌거벗었다며 '얼레리 꼴레리'를 외치는 아이의 돌직구에 정신을 차렸던 것처럼, 코로나가 지금 미국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일상에 금이 간다. 현상학적 사회학이 알려주듯 당연시되던 것들은 그것의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 동안만 그 당연시가 유지될 뿐이다. 일상은 그렇게 깨진다. 당연시되던 것들이 의문시되면 모든 것이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제껏,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는 훨씬 더 해결할 능력이 있고,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래서 미국이 세계 제1의 국가로 당당하게 군림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떠벌여 그렇게 알고 있던 코로나라란 괴질조차 통제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허둥대는 국가 체계의 무능함과 부실함을 보면서, 그 때문에 자신들의 생명이 절대적 위협을 받게 되면서, 미국인들은 보건 문제를 넘어 그 이상의 다른 모든 것들까지 도매금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아차, 미국이란 나라가 벌거숭이 임금님 꼴이었구나!
 
 

▲ '우리(미국인)는 실패한 국가에 살고 있다'는 제목의 <애틀랜틱> 6월 이슈 갈무리.

 
 
그리고 나온 말이 "이게 나라냐!"이다. 
 
우리가 몇 년 전 창피해하며 되뇌던 바로 그 말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믿었던 국가에 대한 실망, 좌절, 분노에서 오는 단말마적 비명이다. 그것은 '실패한 국가'에 대한 자괴감의 발로이다.(☞ 관련 기사 : <더 애틀랜틱> 6월 이슈 'We Are Living in a Failed State') 즉, 창피함에서 오는 미국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의 울림이다. 그러나 그 창피함은 어떻게 이런 나라가 세계최강일 수 있느냐는 다른 나라의 손가락질이(☞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5월 8일 자 'The World Is Taking Pity on Us', <아이리시타임스> 4월 25일 자 'Fintan O’Toole: Donald Trump has destroyed the country he promised to make great again') 자조감으로 변하면서 자연스레 생긴 자기 모멸이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그렇게 스스로 비웃다 스스로 창피해하고, 결국 자기 연민에 빠졌다.(☞ 관련 기사 : <워싱턴포스트> 5월 14일 자 'The United States Is A Country To Be Pitied') 그리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최고의 국가 미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먼저 불쌍한 처지에 놓인 우리 꼴을, 우리 자신의 몰골을 볼 줄 알아야 그나마 이 나라를 다시 세울 일말의 희망이라도 엿보일 것이라고 일갈하고 있을 정도다.(☞ 관련 기사 : <워싱턴포스트> 5월 15일 자 'There’s No Hope For American Unless We Can Pity Ourselves') 과거에 이런 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어디 감히 세계 제1의 대국 자랑스러운 미국의 시민을 깔보며, 어찌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단 말인가.) 
 
 

▲ '우리(미국인)가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일말의 어떤 희망도 없다고 전하는 <워싱턴포스트> 5월 15일 자 갈무리.

 
 
코로나 창궐에 속수무책인 나라. 의료 체계가 엉망진창인 나라. 실직하면 하루아침에 중산층에서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해버리는 나라. 먹을 것을 무상으로 얻기 위해 몇 킬로미터의 줄을 서야만 하는 나라. 대부분의 국민이 팍팍한 삶으로 끔찍한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지만, 부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배를 불리는 나라. 이런 것을 해결해 줄 생각일랑 눈곱만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에 대한 불만. 
 
한 번 터지니, 우르르 봇물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모든 게 의문에 휩싸여버렸다. 그러한 고질적 문제와 병폐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나빠지는 나라. 그 정점에 있는 빈곤과 불평등과 인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아니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좌절. 
 
'빌어먹을' 아메리칸 드림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혹시 허구? 그런 회의가 물밀 듯 밀려오는 지금의 미국이다. 그 민낯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수면에 완전히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해결될 수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한 이들의 절망. 
 
천하를 호령하던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쉽게 이야기하면, 미국이 여러 나라들 중 지존이란 표현)는 빈곤과 불행 그리고 사망의 의미로 희화화되었다.(☞ 관련 기사 : <가디언> 5월 10일 자 'Under Trump, American Exceptionalism Means Poverty, Misery and Death') 하다못해 과거의 영광스러운 '예외주의' 딱지를 한국 같은 나라에 붙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관련 기사 : <애틀랜틱> 5월 6일 자 'What’s Behind South Korea’s COVID-19 Exceptionalism?')  
 
이렇게 자신이 거주하는 외부환경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그다음 수순은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애틀랜틱> 5월 6일 자 'We’re Discovering Our Character') 세계 최강 국가의 국민에서 이제는 자신들이 무시했던 제 3세계 국가의 국민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관련 기사 : <가디언> 4월 22일 자 'Top Economist: US Cornoavirus Response Is Like Third World Country') 그러면 차별, 불평등, 좌절과 분노, 그리고 절망은 단지 흑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전에는 흑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래서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로 알았던 것들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라는 처절한 자각! 
 
 

▲ 지금 미국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진 미국과 미국인의 실체를 파악하는 중이라고 전하는 <애틀랜틱> 5월 6일 자 기사 갈무리.

 
 
그러니 <뉴욕타임스>가 현재 미국인들 사이에 팽배한 정서를 "공포(Fear), 불안(Anxiety), 분노(Anger), 절망(Desperation)"으로 짧게 규정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것들이 길거리로 사람들을 나가게 한다. 해서 지금 미국 도처에는 흑인 사망 사건의 피해자 조지 플로이드가 흘러넘친다. '내가 바로 목 눌려 숨져간 그 피해자, 조지 플로이드'라는 각성이 사람들을 인종, 지역, 연령, 직업에 상관없이 항의 시위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변상련과 감정이입. 그것이 길거리를 수많은 조지 플로이드들로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한다. 플로이드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6월 2일 자 '‘In Every City, There’s a George Floyd’') 하여 백인 경찰은 단순한 대립각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것은 피폐해진 나의 삶을 질식시키고 있는 기성체제와 못된 세력으로,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태껏 존재했던 차이와 그로 인해 벌어졌던 문화 전쟁들을 매우 하찮은 것들로 여길 정도로 코로나의 위력은 대단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의 갈림길 앞에서는 플라스틱 빨대냐 종이 빨대냐, 와인이냐 싸구려 맥주냐의 차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22일 자 'The Coronavirus Makes Our Old Culture Wars Seem Quaint') 이처럼 여태까지의 인종차별의 갈등 양상은 코로나 이후 큰 변화를 갖는다. 흑인 대 백인의 대립 구도는 지금 '네 편 내 편'으로 갈릴 문제가 아닐 정도로 진화했다. 물론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트럼프는 이들의 정서를 집중 공략해 지지자를 결집시킨다.) 
 
어쨌든, '코로나 속에서 많은 이가 참여하는 저항이 가능할까?'라는 칼럼(☞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21일 자 'Will the Coronavirus Crush the Resistance?')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과거엔 볼 수 없던 시위가 터졌고, 더 대규모로 더 극렬하게 더 오래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이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의 지적도 나온다. 시위와 저항이 미국적인 게 아니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미국식이란 뭔가? 저항정신이야말로 자유를 지키고자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 정신이 아니었는가? 저항정신이야말로 미국적인 것 아닌가?(☞ 관련 기사 : <애틀랜틱> 5월 31일 자 'The Double Standard of the American Riot') 사리에 맞지 않는 저항에 대한 이중 잣대는 무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시위에 참여한 미국인들에게 건네고 싶은 몇 마디가 있다. 
 
첫째,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약탈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약탈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약탈을 하는 순간 시위의 정당성과 취지는 훼손되고 더 많은 지지를 얻어 낼 수 없으며 상대방에게 빌미를 줄뿐이다. 또한 약탈로 인해 피해를 입는 이들의 대다수는 같은 처지에 있는 소상공인들과 대형할인마켓의 필수노동자들이다.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코로나로 수 개월간 벌이가 신통치 않았고 감염의 위험성 속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 사지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당장의 처지가 어려워졌기에 생긴 물욕 때문에 그들에게 약탈의 위협을 가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다. 폭력을 규탄한다면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형편이 어려우면 오히려 구걸을 하는 게 낫다. 
 
둘째, 하는 말 족족, 하는 짓 족족 밉상인 트럼프가 설혹 불에 기름을 붓는 짓을 한다 해도(☞ 관련 기사 : <워싱턴포스트> 6월 2일 자 'Episcopal bishop on President Trump: ‘Everything he has said and done is to inflame violence’', <샌프란시스코 클로니클> 5월 31일 자 'Editorial: Trump’s failure of leadership for a nation in crisis', <워싱턴포스트> 6월 3일 자 'Intelligence Experts Say U.S. Reminds Them of a Collapsing Nation'), 미국의 모든 잘못을 트럼프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야말로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물론 그의 탓도 매우 크다. 하지만 미국이 안고 있는 중증 문제가 모두 트럼프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니다. 트럼프는 그 일을 다룸에 있어 그 이전의 대통령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그의 방식은 뻔뻔하고 조잡한 무시 전략. 그래서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것 같이 보일뿐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골수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 
 
트럼프 이전의 다른 지도자들은 동정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문제 해결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바마가 그 썩어 문드러진 체계를 고치려 시도했는가? 아니다. 트럼프나 다른 이들이나 모두 자신들이 선택한 정치적 행위를 할(했을) 뿐이다. 누구를 위한? 기득권을 위한 정치적 행위! 대표적인 문제인 계층 계급간의 불평등을 보라. 그것은 트럼프 이후 급증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던 미국의 중증 기저질환이다. 심각한 기저질환이 지속되었고 아무도 그것을 치유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을 부채질 해왔던 기득권세력들, 내가 말하는 제국들을 위해 열심 봉사 했을 뿐이다. 미국은 그 둘의 노선 사이를 왔다 갔다 할 뿐, 아니 트럼프가 나와서 둘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것 같이 보이게 했을 뿐, 관통하는 사실은 단 하나 국민이 아닌 제국을 위한 정치였다. 따라서 모든 문제를 트럼프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의 해결커녕 더 엉클어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이 때문에, 나는 트럼프 정권하에서 미국의 예외주의가 빈곤, 불행, 사망으로 변해버렸다고 말하는 로버트 라이시의 견해엔 동의할 수 없다. 미국의 예외주의는 그가 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했던 클린턴 때도 이미 그렇게 변질되어 있었다.) 
 
따라서 문제는 트럼프가 아니다. 잔인무도한 폭력을 행사한 백인 경찰이 아니다. 물론 이것들도 큰 문제이지만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더 큰 근본적인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공부가 필요하다. 내가 보건데, 미국의 모든 문제의 핵심엔 '원흉'인 월가가 있다. 해서 이번 일의 동변상련과 감정이입 다 좋다. 그러나 비판(과 개혁)의 대상을 공략할 때는 대상의 층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흑백 문제와 공권력의 만행 문제는 그 수준으로 공략하라.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곤경과 불안한 경제적 삶, 그리고 암울한 미래에 대한 문제는 그것대로 따로 공격 대상을 정해 공략하라. 이 수준에서 생성된 공포와 좌절, 절망과 분노의 유발자로는 월가가 있으니 월가와 거기에 동참해 당신들의 삶을 척박하게 만들어가는 데 일조하는 정치권에 화살을 겨누라. 그렇게 하지 않고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며 "백인 경찰의 엄중 처벌"만을 요구한다면, 뒤에서 비웃을 이들은 월가와 정치가들이다.

그래서 공격의 타깃은 썩어 문드러진 미국의 시스템의 교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톱다운'(top-down, 위에서 아래로) 방식이어야 한다. 고작 20달러(약 2만 원)짜리 위조지폐 사용 혐의(위조지폐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가 사망에 이를 정도의 중범죄라면, 나라 전체를 강탈하고 전 국민의 삶을 위험에 빠트리는 월가의 대형은행과 사모펀드의 사기와 강도 짓은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처벌은커녕 그들에게 두둑한 보상(구제금융)까지 주고 있는 것에 대한 끝까지 저항이 있어야 한다.(그런데 여러 가지 여건상 과연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과연 <애틀랜틱>의 진단처럼 미국 역사상 2020년이 최악의 해가 될 것인가?(☞ 관련 기사 : <애틀랜틱> 5월 31일 자 'Is This the Worst Year in Modern American History?') 귀추가 주목된다. 


 
참고자료 

- Henry Steele Commager, The American Mind: An Interpretation of American Thought and Character Since the 1880's (New He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59). 

- “We Are Living in a Failed State,” The Atlantic, April 20, 2020. 

- “There’s No Hope For American Unless We Can Pity Ourselves,” Washington Post, May 15, 2020.

- “The United States Is A Country To Be Pitied,” Washington Post, May 14, 2020. 

- “The America We Need,” New York Times, April 9, 2020. 

- “‘In Every City, There’s a George Floyd’: Portraits of Protest,” New York Times, June 2, 2020.

- “Intelligence Experts Say U.S. Reminds Them of a Collapsing Nation,” Washington Post, June 3, 2020.

- “What’s Behind South Korea’s COVID-19 Exceptionalism?” The Atlantic, May 6, 2020.

- “The Double Standard of the American Riot,” The Atlantic, May 31, 2020. 

- “Is This the Worst Year in Modern American History?,” The Atlantic, May 31, 2020. 

- “Retailers, Battered by Pandemic, Now Confront Protests,” New York Times, June 1, 2020.

- “We’re Discovering Our Character,” The Atlantic, May 6, 2020. 

- “8 Minutes and 46 Seconds: How George Floyd Was Killed in Police Custody,” New York Times, May 31, 2020.

- “What Happened in the Chaotic Moments Before George Floyd Died,” New York Times, May 29, 2020.

- “Will Protests Set Off a Second Viral Wave?” New York Times, May 31, 2020. 

- “Will the Coronavirus Crush the Resistance?,” New York Times, April 21, 2020. 

- “The First Invasion of America,” New York Times, May 21, 2020. 

- “Under Trump, American Exceptionalism Means Poverty, Misery and Death,” The Guardian, May 10, 2020.

- “Top Economist: US Cornoavirus Response Is Like Third World Country,” The Guardian, April 22, 2020.

- “The Coronavirus Makes Our Old Culture Wars Seem Quaint,” New York Times, April 22, 2020.

- “American Is a Tinderbox,” New York Times, April 22, 2020. 

- “The World Is Taking Pity on Us,” New York Times, May 8, 2020. 

- “‘They just kind of destroyed the place’: Businesses closed for months now face looting aftermath,” Boston Globe, June 1, 2020. 

- “Editorial: Trump’s failure of leadership for a nation in crisis,” San Francisco Chronicle, May 31, 2020.

- “Episcopal bishop on President Trump: ‘Everything he has said and done is to inflame violence’,” Washington Post, June 2, 2020.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0516253099674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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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개원’ 폐단 끊고 출발한 21대 국회, 상임위원장 쟁탈전도 국회법대로?

‘8일 상임위원장 선출’ 의지 드러낸 김태년…박병석 의장 “합의 안 되면 의장이 결단”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 2020-06-05 17:49:00
수정 2020-06-05 18: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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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된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1대 첫 본회의에서 당선인사를 하고 있다.
21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된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1대 첫 본회의에서 당선인사를 하고 있다.ⓒ뉴시스 21대 국회가 5일 첫 본회의를 열었다. 13대 국회(1988년)부터 반복해 온 '지각 개원'의 폐단을 끊어내고, 국회법에서 정한 날짜대로 이날 문을 연 것이다.

미래통합당을 제외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국민의당, 열린민주당은 이날 오전 10시 국회 본회의를 열고 민주당 박병석 의원과 김상희 의원을 각각 국회의장과 여당 몫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표결에 참석한 의원만 하더라도 193명에 달해 103명의 통합당 의원을 뺀 대부분의 의원이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통합당 의원들은 예상을 깨고 본회의에 참석하는 듯 보였지만 표결에는 동참하지 않고 집단 퇴장했다. 자당과 합의하지 않은 본회의는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통합당은 관례를 앞세우며 원 구성 협상을 매듭짓고 개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국회법을 보면 5일에 첫 본회의를 열고 의장단을 선출한다고 하지만 그 조항은 훈시조항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조항은 아니다"라며 "177석이니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이면 21대 국회는 출발부터 협치와 상생으로 국가적 과제를 처리해달라는 요구에 어긋난다"고 반발했다.

이에 맞선 민주당 김영진 원내수석부대표는 "정쟁 때문에 국회를 멈추고 법을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관행은 안 된다"고 지적했다. 통합당의 집단 퇴장을 겨냥해선 "21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잘못된 관습에 따라 퇴장한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법대로 국회 문 연 민주당, 통합당 뺀 야당도 동참
'발목잡기' 비판 여론 의식한 통합당도 본회의 참석 후 퇴장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1대 첫 본회의에서 항의 후 본회의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2020.06.05.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1대 첫 본회의에서 항의 후 본회의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2020.06.05.ⓒ뉴시스

이번 개원은 이례적으로 법정 시한을 준수한 개원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국회의원 선거 후 첫 본회의에서 국회의장을 선출해야 한다'는 국회법이 개정(1994)된 후 국회법에서 규정한 시한 내 국회의장을 뽑은 경우는 2004년과 2008년 단 두 차례뿐이었다.

그동안 여야는 원 구성 협상이라는 지루한 줄다리기를 반복하다 국회 개원을 미뤄오기 일쑤였다. 심지어 2008년 18대 국회에서는 5월 30일 임기 시작 후 7월 10일에야 국회의장을 선출했고, 상임위원장 선출은 8월 26일에야 마쳤다. 13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원 구성에만 평균 41.4일이 걸렸다는 국회입법조사처 조사 결과도 있다.

177석의 압도적인 의석을 지닌 민주당은 21대 국회만큼은 이전의 국회에서 반복됐던 잘못된 관행들을 끊어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유권자들이 177석을 만들어 준 의미는 이전과 다른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달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협상 과정에서도 국회법에서 정하고 있는 내용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방침을 세우며 협상은 하되 법을 지키겠다고 공언해왔다. 국회법에 따르면 5일에 첫 본회의를 열어 의장단을 선출하고 8일까지 상임위원장 선출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이렇게 법으로 정해진 날짜는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협상하겠다는 얘기다. 국회 개원에 동의하는 야당들과 함께 이날 국회 문을 연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물론 통합당도 이 같은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통합당이 이날 본회의 자체를 막아서지 않은 이유도 이전 국회에서 수없이 보여줬던 '발목잡기'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실제 이날 본회의에는 범여권 정당뿐 아니라 국민의당까지 동참해 통합당의 불참 명분이 힘을 잃었다. 통합당의 한 의원도 본회의에서 퇴장하며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오늘 본회의에 들어간 이유가 있나'라는 질문에 "안 들어가면 발목 잡는다고 쓸 거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민주당 계획대로 '8일 상임위 구성'도 마무리될까
김태년 "좌고우면 않고 다음 걸음으로"

박병석 신임 국회의장이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장실에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와 회동하고 있다.
박병석 신임 국회의장이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장실에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와 회동하고 있다.ⓒ뉴시스

이제 남은 것은 가장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임위원장 배분 협상이다. 민주당과 통합당 모두 핵심 상임위로 꼽히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과 예결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자당이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국회법에 상임위원장 선출 시한을 8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내대표는 물론 원내수석부대표들까지 짬이 날 때마다 협상을 이어오고 있지만 접점은 찾지 못했다. 더욱이 민주당은 상임위원장 선출도 국회법에서 정한 대로 8일까지 마무리 짓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만일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회법 규정대로 본회의서 표결을 통해 선출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이날 본회의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며 "민주당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다음 걸음을 내딛겠다"고 선언했다.

김 원내대표는 "국회법이 정한 일정대로 상임위를 구성하겠다"며 "국정 운영을 논의하는 대화의 길은 언제든 열려있다. 하지만 야당이 과거의 관행대로 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원칙대로 행동할 계획"이라고 단언했다.

김 원내대표는 '상임위원장을 표결로 선출하는 방법까지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국회법이 정한 절차가 있다. 법을 지키도록 하겠다"고 여지를 남겼다.

여야 모두 막판까지 협상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당장 이날 선출된 박병석 국회의장은 김태년, 주호영 원내대표를 의장실로 불러 원구성 협상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한 채 헤어졌다. 박 의장은 "원 구성 협상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의장이 결단할 생각"이라며 여야를 압박했다.

한편, 여야 원내대표와 원내수석부대표는 오는 7일 국회의장 주재로 회동하며 막판 협상을 이어간다. 공식 회동 전에도 물밑 협상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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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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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결단코 철폐”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 “대결의 악순환 속에 갈 데까지 가보자”
이계환 기자  |  k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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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06  01: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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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은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 남측의 태도를 비난하면서 “북남공동연락사무소부터 결단코 철폐할 것”이라고 5일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북측 통일전선부 대변인은 이날 밤 담화를 내고 “김여정 제1부부장은 5일 대남사업부문에서 담화문에 지적한 내용들을 실무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검토사업에 착수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면서 “첫 순서로 할 일도 없이 개성공업지구에 틀고 앉아있는 북남공동연락사무소부터 결단코 철폐할 것이며 연속 이미 시사한 여러 가지 조치들도 따라 세우자고 한다”고 밝혔다.

   
▲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통일뉴스 자료사진]

앞서 김여정 제1부부장은 4일 ‘스스로 화를 청하지 말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남북연락사무소 폐지와 함께 금강산 관광 폐지, 개성공단 완전 철거, 9.19남북군사합의 파기를 언급한 바 있다.

대변인의 이날 담화는 남북연락사무소 폐지에 이어 후속 조치들도 계속 취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대변인은 그 이유로 “우리 인민의 격해진 감정을 담아 김여정 제1부부장은 지난 4일 담화를 내고 쓰레기들과 이를 방치한 남조선당국이 사태의 엄중성과 파국적 후과를 깊이 깨닫고 할 바를 제대로 하라는 의미심장한 경종을 울렸다”면서 “그런데 이를 대하는 남쪽동네의 태도가 참으로 기괴하다”고 꼬집었다.

특히, 대변인은 “남조선에서 공개적으로 반공화국 삐라를 날려 보낸 것이 5월 31일이지만 그전부터 남측의 더러운 오물들이 날아오는 것을 계속 수거하며 피로에 시달려오던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더욱 확고히 내렸다”고 강조했다.

대변인은 “지금 남조선당국은 이제야 삐라 살포를 막을 법안을 마련하고 검토 중이라고 이전보다는 어느 정도 진화된 수법으로 고단수의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면서, 그렇다면 “남쪽에서 법안이 채택되어 실행될 때까지 우리도 접경지역에서 남측이 골머리가 아파할 일판을 벌려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라고 남측의 지지부진함을 지적했다.

그래서 “우리도 남측이 몹시 피로해할 일판을 준비하고 있으며 인차 시달리게 해주려고 한다”는 것.

대변인은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직시하면서 대결의 악순환 속에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 우리의 결심”이라면서 “어차피 날려 보낼 것, 깨버릴 것은 빨리 없애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며 결의를 밝혔다.

한편, 대변인은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제1부부장이 경고한 담화라는 것을 심중히 새기고 내용의 자자구구를 뜯어보고 나서 입방아를 찧어야 한다”고 말해, 김 제1부부장이 대남사업을 총괄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대변인담화--

지금 우리 인민들은 《탈북자》쓰레기들이 저지르고있는 반공화국삐라살포행위와 이를 묵인하고있는 남조선당국의 처사에 치솟는 분노와 혐오감을 느끼고있다.

더러운것은 애당초 피하는것이 상책이라 하였지만 똥개들이 감히 우리의 최고존엄을 건드리며 신성한 우리 지역에 너절한 오물쪼각들을 도가 넘을 정도로 날려보내는데 대해 격분을 금할수 없다.

이러한 우리 인민의 격해진 감정을 담아 김여정제1부부장은 지난 4일 담화를 내고 쓰레기들과 이를 방치한 남조선당국이 사태의 엄중성과 파국적후과를 깊이 깨닫고 할바를 제대로 하라는 의미심장한 경종을 울렸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남쪽동네의 태도가 참으로 기괴하다.

꿈보다 해석을 좋게 하는데 습관되여 그런지 처음에는 저들에 대한 협박으로,나중에는 거기에 협박이라기보다 남측이 먼저 교류와 협력에 나서라는 숨은 메쎄지가 담겨져있다고 어리석게 해석하더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난해에도 10차례,올해에는 3차례 삐라를 뿌렸는데 이번 살포를 특별히 문제시하는것을 보면 대화와 협상을 바라는것 같다는 나름대로의 헛된 개꿈을 꾸고있다.

놀라운것은 《통일부》 대변인이 《탈북자》들이 날려보낸 삐라의 대부분이 남측지역에 떨어져서 분계연선 자기측 지역의 생태환경이 오염되고 그곳 주민들의 생명과 생활조건에 악영향을 미치기때문에 삐라살포가 중단되여야 한다고 가을뻐꾸기같은 소리를 내고있는것이다.

그런가 하면 저들이 오래전부터 대치계선에서 긴장조성행위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삐라살포방지대책을 취해왔고 실효성있는 제도개선방안도 검토하던중이라며 마치 아차하여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듯이 철면피하게 놀아대고있다.

그 어디에도 조금이나마 미안한 속내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수 없고 다시는 긴장만을 격화시키는 쓸모없는짓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이번 사태의 엄중성이 민족앞에 약속한 력사적인 선언과 합의에 대한 엄중한 파기이고 누구도 바라지 않는 적대적감정과 긴장만을 격화시키는 쓸데없는 짓이라는것을 몰라서 하는 생주정이 아니라는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있다.

허튼나발을 불어대기 전에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제1부부장이 경고한 담화라는것을 심중히 새기고 내용의 자자구구를 뜯어보고나서 입방아를 찧어야 한다.

그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면 암매한 천치들이고 알면서도 딴전을 부리는것이라면 천하의 비렬한것들이라 해야 할것이다.

김여정제1부부장은 5일 대남사업부문에서 담화문에 지적한 내용들을 실무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검토사업에 착수할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

남조선에서 공개적으로 반공화국삐라를 날려보낸것이 5월 31일이지만 그전부터 남측의 더러운 오물들이 날아오는것을 계속 수거하며 피로에 시달려오던 우리는 더이상 참을수 없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더욱 확고히 내리였다.

우리는 남쪽으로부터의 온갖 도발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고 남측과의 일체 접촉공간들을 완전격페하고 없애버리기 위한 결정적조치들을 오래전부터 생각하고있었다는것을 숨기지 않는다.

첫 순서로 할 일도 없이 개성공업지구에 틀고앉아있는 북남공동련락사무소부터 결단코 철페할것이며 련속 이미 시사한 여러가지 조치들도 따라세우자고 한다.

지금 남조선당국은 이제야 삐라살포를 막을 법안을 마련하고 검토중이라고 이전보다는 어느 정도 진화된 수법으로 고단수의 변명을 늘어놓고있는데 그렇다면 결국 그런 법안도 없이 군사분계연선지역에서 서로 일체 적대행위를 중단하자는 군사분야의 합의서에 얼렁뚱땅 서명하였다는 소리가 아닌가.

하다면 남쪽에서 법안이 채택되여 실행될 때까지 우리도 접경지역에서 남측이 골머리가 아파할 일판을 벌려도 할 말이 없게 될것이다.

우리도 남측이 몹시 피로해할 일판을 준비하고있으며 인차 시달리게 해주려고 한다.

벌어지고있는 사태를 직시하면서 대결의 악순환속에 갈데까지 가보자는것이 우리의 결심이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언제나 곧바르기때문이다.

공든 탑을 제손으로 무너뜨리겠다며 그렇게도 악몽을 현실로 만들고싶어 몸살을 앓는데 굳이 말릴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날려보낼것,깨버릴것은 빨리 없애버리는것이 나을것이라는것이 우리의 립장이다.

주체109(2020)년 6월 5일

평 양 (끝)

(출처: <조선중앙통신> 2020.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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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카니발 폭행’ 가해자 징역 1년 6월 법정구속…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

판사의 따끔한 일침 “바른길로 가라”
 
임병도 | 2020-06-05 08:35:4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제주에서 난폭운전, 일명 칼치기를 하다가 이를 항의하는 운전자를 어린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폭행한 ‘제주 카니발 폭행 사건’ 가해자에게 실형이 선고됐습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6월 4일 오전 10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과 재물 손괴 혐의로 기소된 카니발 운전자 34살 A씨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A씨는 지난해 7월 4일 제주시 조천읍 도로에서 급하게 차선을 변경하는 등 난폭운전을 했습니다. A씨의 난폭운전에 위협을 느낀 다른 차량 운전자 B씨가 이를 항의하자, 오히려 A씨는 B씨에게 물병을 던지며 욕설과 폭행을 했습니다.

또한 A씨는 폭행 장면을 촬영하는 B씨 아내의 스마트폰을 빼앗아 길에 던지기도 했습니다. 폭행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 B씨의 차량에는 5살과 8살 된 자녀들도 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교통사고 전문 한문철 변호사가 개인 유튜브 방송에서 A씨의 폭행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을 공개하면서 사회적 공분이 벌어졌고,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20만 명이 넘게 서명했습니다.

2019년 10월 11일 강정수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제주 카니발 폭행사건’ 국민청원에 대해 “국민 눈높이에 맞게 수사가 진행되는지 점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구속영장 기각, 그러나 합의할 때 위협적이었던 가해자

‘제주 카니발 폭행’사건은 가해자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이 됐지만, 지난해 9월에 있었던 가해자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습니다.

당시 제주지법 심병직 부장판사는 “피의자가 일정한 직업과 주거지를 가지고 있는 등 도주의 염려나 증거인멸 우려가 인정되지 않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다”며 구속영장 기각 이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심 판사는”피의자가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피해자와 일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범행 자체는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위협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재판을 맡았던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 장찬수 부장판사는 “본 법정에서 자세하게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피해자와) 합의를 하려면 가족과 친지를 데리고 가야지 왜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엉뚱한 사람을 데리고 가느냐”고 말했습니다.

장 부장판사는 “피해자는 그 사람으로 인해 위협을 느꼈고 심지어 재판부에 진정서까지 제출했다”며 합의 과정과 방법이 부적절했음을 지적했습니다.

판사의 따끔한 일침 “바른길로 가라”

제주지법 장찬수 부장판사는 A씨에게 “피고인, 사람은 바른 길로 가야 한다”라며 “옆길로 가면 위험하다. 재판부가 양형을 앞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장 부장판사는 “피고인과 피해자가 제주에서도 같은 지역 출신이고, 심지어 부모님도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다. 어떻게 보면 이웃 사촌지간”이라며 “피고인은 다른 사정을 종합해보면 매우 급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화를 내면 결국 나한테 그 화가 돌아오게 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장 부장판사는 A씨에게 “이번 판결이 끝나고 난 뒤 곰곰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A씨는 장 부장판사의 말에 “재판부가 많이 배려해줘서 이제까지 합의에 노력해왔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죄송하다”면서 “앞으로 피해자 측과 지속해서 합의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피해 차량의 뒷좌석에 탑승했던 자녀들이 폭행을 목격한 점을 이유로 아동학대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최종 기소단계에서 아동학대 혐의 적용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제외했습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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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휩쓴 인종주의와 차별의 팬데믹 "플로이드 죽인 건 바로 이것"

조지 플로이드 추도식 열려...6살난 딸 "우리 아빠가 세상을 바꿨어요!"

 

경찰의 과잉 진압에 의해 희생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추도식이 4일 그가 숨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노스센트럴대학교(NCU)에서 열렸다.

 

시민단체 '내셔널액션네트워크' 주최로 이날 오후 1시께(현지시간) 열린 추도식에는 유족들과 시민, 정치인 인권운동가 등이 참석했으며 TV와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됐다. 추도식에는 흑인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 고(故)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장남인 마틴 루서 킹 3세, 미네소타주 상원의원인 에이미 클로버샤, 제이콥 프레이 미니애폴리스 시장 등이 참석해 애도를 표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플로이드 추도식 ⓒ NBC 화면 갈무리

이날 추도식에서 인권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는 "이제 우리는 조지 플로이드의 이름으로 일어나 '우리의 목에서 너희들의 무릎을 떼라'라고 말해야 한다"며 "미국은 흑인들에게 결코 위대한 나라가 아니었다"고 인종차별에 대해 규탄했다. 그는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인종차별 항의시위와 관련해 "우리는 처음으로 미국을 모두에게 위대한 나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플로이드의 형과 동생 등 유족들은 "우리는 플로이드를 위한 정의를 원하며, 그는 그것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를 무릎으로 눌러 살해한 데릭 쇼빈은 '2급 살인' 혐의로 기소됐으며, 현장에 같이 출동했던 경찰들도 살인에 동조한 혐의로 사법 처리될 것으로 알려졌다.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플로이드 추도식 ⓒNBC 화면 갈무리

이날 미니애폴리스를 시작으로 노스캐롤라이나주 래퍼드(6일), 텍사스주 휴스턴(8일), 휴스턴 비공개 장례식(9일) 등 플로이드를 추도하는 행사가 이어진다. 이날도 뉴욕, 워싱턴 DC, 로스앤젤러스, 필라델피아 등 미국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대다수가 그가 목이 짓눌렸던 8분46초간 무릎을 꿇는 추모 퍼포먼스, 연좌 시위, 행진 등 평화롭게 진행됐다. 유족들도 이날 평화 시위를 당부했다.

 

▲ 경찰이 이날 추도식장에 플로이드의 관이 도착하자 무릎을 꿇고 애도를 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플로이드 추모 집회.ⓒAP=연합뉴스
▲4일 미국 전역에서 열린 집회는 평화롭게 진행됐다. 사진은 워싱턴 DC 집회 장면. ⓒAP=연합뉴스

한편, 유족 중 여섯살 난 딸 지애나가 플로이드의 친구이자 전 NBA 선수인 스티븐 잭슨의 어깨 위에 목마를 탄 채 "아빠가 세상을 바꿨어요!"라고 외치는 영상이 공개돼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휴스턴에서 부인, 딸과 함께 살던 플로이드는 일자리 때문에 미니애폴리스로 혼자 이주해 지내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60507081320056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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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철폐 대행진과 ‘노조 할 권리’가 만나다

  • 기자명 조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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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0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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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4 class="subheading"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 0px 0px 1.875rem; padding: 0px 0px 0px 0.75rem; font-weight: bolder; text-rendering: optimizelegibility; line-height: 1.25; font-size: 1.25rem; letter-spacing: -0.075em; border-left: 3px solid rgb(174, 174, 174); word-break: normal; overflow-wrap: break-word;">[사진 현장] ‘함께 살자’ 2020 차별철폐 대행진 – 울산지역 대행진</h4><article id="article-view-content-div" class="article-veiw-body view-page font-size17" itemprop="articleBody" style="box-sizing: inherit; font-size: 1.063rem; letter-spacing: -0.05em; margin-bottom: 5rem;">

    ‘먹고살자 최저임금’, ‘비정규직 철폐’, ‘열어라 재벌 곳간’,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이라는 요구를 내건 ‘함께 살자 2020년 차별철폐 대행진’ 중앙대행진단이 울산 첫 일정으로 찾은 곳은 법인분할 반대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현대중공업 앞이다.

    지난해 회사를 쪼개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는 법인분할에 맞서 동구 주민과 한마음으로 투쟁한 노동자들.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파업투쟁으로 인해 4명이 해고되고 1400여 노동자들이 징계를 받았다. 졸속적으로 처리된 법인분할 주주총회 효력정지 가처분 본안 소송도 준비하며 매일같이 투쟁하고 있다.

    ▲ 이날 아침 정문 앞엔 민주노총 차별철폐 대행진단과 울산지역본부 산별 대표자들과 간부, 현대중공업지부 원하청 조합원 등 80여 명이 모여 출근 선전전을 진행했다.
    ▲ 이날 아침 정문 앞엔 민주노총 차별철폐 대행진단과 울산지역본부 산별 대표자들과 간부, 현대중공업지부 원하청 조합원 등 80여 명이 모여 출근 선전전을 진행했다.

    법인분할 반대 투쟁과 함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주요 현안 중 하나는 중대 재해 문제다. 현대중공업에서 올해만 5명의 노동자가 중대 재해로 사망했다.

    정동석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수석부지회장은 “현대중공업은 산재사망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사고를 은폐하기 급급하고 안전하게 일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작업지시 매뉴얼도 지키지 않고 있다. 다단계 하도급을 주면서 비용 절감에 눈멀어 노동자들을 죽음 내몰고 있다”고 분노했다.

    윤택근 민주노총 부위원장도 “아침에 출근해 퇴근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한 해 2400명에 달한다. 재벌의 탐욕이 중대 재해를 만들고 있다”고 규탄했다.

    ‘재벌 곳간을 열어 최저임금을 올리자’, ‘재난 시기 해고 없이 함께 살자’고 주장하며 재벌 개혁을 이야기하고 있는 대행진단과, 현대중공업 자본의 이윤 추구를 위해 생존권과 목숨을 위협받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재벌’을 향한 목소리는 이렇게 닮아있다.

    중앙대행진단과 울산본부 대행진단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다운서사지구 LH공사 건설현장이다. 이곳엔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투쟁하는 건설기계 노동자들이 있다. 대행진단은 이들과 ‘모든 노동자의 노조 할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 장현수 울산건설기계지부 지부장은 “16년간 운송비와 건설기계 임대료 인상을 위한 투쟁을 벌여왔지만 이런 투쟁만으론 한계가 있다”면서 “울산 건설기계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건설 자본을 상대로 단체협약 체결 투쟁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 장현수 울산건설기계지부 지부장은 “16년간 운송비와 건설기계 임대료 인상을 위한 투쟁을 벌여왔지만 이런 투쟁만으론 한계가 있다”면서 “울산 건설기계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건설 자본을 상대로 단체협약 체결 투쟁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건설사인 두산중공업, 대보건설을 상대로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며 현장을 멈췄다. 그러나 건설사들은 ‘전국에서 (건설기계노동자와) 협약을 체결한 바가 아직 없다’며 한 달 째 버티고 있다.

    장 지부장은 “특수고용노동자(특고)인 건설노동자들은 합의서라는 명목으로 각서를 쓰며 일했다”면서 “노동조합의 단체 협약을 체결하는 투쟁은 특고 노동자들의 노조 할 권리를 위한 투쟁, 노동권 보장을 위한 투쟁이며, 이는 2000여 조합원의 생명선으로 생각하고 투쟁하고 있다”고 밝혔다.

    ▲ 윤한섭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은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언제 생계가 끊길지 모르고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특고 노동자를 상대로 성실히 교섭에 임하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면서 건설사, 그리고 협상의 한 당사자안 LH공사에 성실 교섭을 촉구했다.
    ▲ 윤한섭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은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언제 생계가 끊길지 모르고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특고 노동자를 상대로 성실히 교섭에 임하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면서 건설사, 그리고 협상의 한 당사자안 LH공사에 성실 교섭을 촉구했다.
    ▲ 대행진단과 건설노조 울산 건설기계지부 조합원들이 간담회를 하고 있다. 건설사들의 버티기로 한창 공사가 진행되어야 할 현장은 한산함 그 자체였다.
    ▲ 대행진단과 건설노조 울산 건설기계지부 조합원들이 간담회를 하고 있다. 건설사들의 버티기로 한창 공사가 진행되어야 할 현장은 한산함 그 자체였다.

    간담회를 마친 대행진단은 장소를 옮겨 북구 문화예술회관에서 울산본부 산별 대표자, 간부들과 함께 ‘차별철폐 및 재벌체제 개혁’을 주제로 한 강연 및 간담회를 열었다.

    ▲ 대행진단 단장인 윤택근 부위원장의 차별철폐 대행진의 의미, 4대 요구안 설명에 이어 장현술 대외협력국장이 “최저임금 투쟁 왜 재벌개혁인가?”에 대해 발제했다.
    ▲ 대행진단 단장인 윤택근 부위원장의 차별철폐 대행진의 의미, 4대 요구안 설명에 이어 장현술 대외협력국장이 “최저임금 투쟁 왜 재벌개혁인가?”에 대해 발제했다.

    이후 대행진단은 거리로 나와 울산시민들을 만났다.
    울산지역의 차별철폐 대행진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이 거리로 나온 이유에 대해 윤택근 부위원장은 “최저임금 올려서 먹고 살자고, ’재벌의 곳간을 열어서 같이 살자고, 모든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1100만 비정규직이 아니라 모두가 정규직이 될 수 있도록 투쟁하자고 외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리곤 “3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 956조, 매년 천문학적인 주식배당금을 가져가는 재벌총수들의 탐욕이 사회양극화를 낳았는데, 재난을 함께 극복하고 같이 살자고 이야기하는 국민들과 반대로 재벌들은 재난 시기에도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온갖 입법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재벌의 끝도 없는 탐욕을 국민이 나서 혼쭐을 내고 함께 잘 사는 사회 만들기에 같이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 울산시민들에게 민주노총 차별철폐 대행진에 대해 설명하는 윤택근 부위원장.
    ▲ 울산시민들에게 민주노총 차별철폐 대행진에 대해 설명하는 윤택근 부위원장.
    ▲ 울산 남구 롯데호텔 앞, 차별철폐 대행진 기자회견.
    ▲ 울산 남구 롯데호텔 앞, 차별철폐 대행진 기자회견.

    이어진 ‘노동자 민중 성토대회’에선 코로나19로 인한 피해 사업장,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 코로나 재난 속에 ‘함께 살자’는 목소리, 노조 할 권리, 정부와 재벌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국민고용보험을 시행하겠다더니 결국 자본가들의 압력에 굴복하며 특수고용 노동자를 보험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성토한 대리운전 노동자, “마스크 한 장 없이 일하는 돌봄노동자, 코로나 사태 종결까지 출근하지 말라고 해 생계위기에 내몰린 방과후 강사” 등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위협, 강제 보직변경 위협 속에서도 노조를 만들었지만 회사는 바지사장을 앞세워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규탄한 울산 현대제철 노동자,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지만(자회사) 결국 무늬만 정규직, 자회사를 강요하며 노조 분열까지 만드는 공사에 맞서 투쟁”해야 했던 울산항만공사 자회사 노동자 등 현장의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이광주 플랜트건설노조 울산지부 사무국장은 해외에서 일해온 노동자들의 코로나 피해 상황을 전했다.

    ▲ 이광주 처장은 “석유화학 시설을 만들고 공장을 보수하고 각종 설비·발전을 건설하는 플랜트 건설 노동자들도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휴업사태를 겪었지만, 특히 해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 이광주 사무국장은 “석유화학 시설을 만들고 공장을 보수하고 각종 설비·발전을 건설하는 플랜트 건설 노동자들도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휴업사태를 겪었지만, 특히 해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사우디 등에서 일해온 노동자들은 비행기 운항이 어려워지면서 귀국도 못하고 숙소에 대기해야 했으며, 귀국해서도 14일간의 격리 기간엔 아무런 생계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다. 더 심각한 현장은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에스케이 이노베이션 건설현장으로, 코로나 감염 발생 1위 국가, 특히 이 공장에서 많이 발생했고, 조합원들도 많았다. 먼 타지에서 확진돼 돌아온 조합원들 역시 일용직 건설노동자라는 이유로, 근로계약이 끝났다는 이유로 생계대책은 전무한 상황”이라며 “휴업수당 지급을 요구하는 투쟁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 중앙대행진단과 울산본부 대행진단이 함께 하는 이날 마지막 대행진 일정은 북구 달천공단의 한 공장 앞이다. 이곳은 달천공단에서 누구보다 ‘노조 할 권리’가 절실한 노동자들이 100일이 넘도록 투쟁하고 있는 곳이다.

    지난 2월 18일. 울산 달천공단에 처음으로 노동조합의 깃발, 민주노조의 깃발이 세워졌다. 바로 금속노조 울산지부 정명지회다. 그러나, 민주노조가 만들어지자 곧바로 회사는 관리자와 친인척을 모아 기업노조(어용노조)를 만들었고 결국 복수노조가 됐다. 달천공단에 있는 정명이라는 회사에 처음 노조가 생김과 동시에 두 개의 노조가 들어선 것이다.

    노동조합 현판 부착을 막고, 지회장을 숙소에서 강제로 퇴거시키려 하고, 민주노조를 상대로 한 고소·고발 건도 벌써 5건이나 생겼다. 그럼에도 40명이 채 안 되는 조합원들은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매일 아침 출근 투쟁, 중식선전, 퇴근 투쟁 등을 이어가고 있다.

    ▲ 107일 차 투쟁을 맞은 이날, 금속노조 울산지부 결의대회에 차별철폐 대행진단이 함께 했다.
    ▲ 107일 차 투쟁을 맞은 이날, 금속노조 울산지부 결의대회에 차별철폐 대행진단이 함께 했다.

    윤장혁 금속노조 울산지부장은 투쟁사에서 “정명 노동자들이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위해 헌법에 보장된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자본가들의 비호 속에 복수노조를 만들어 노조가입 탈퇴를 종용하고 조합원들에게 탄압과 협박을 일삼으며 노동자들의 소중한 권리인 노조 할 권리를 짓밟고 있다”고 규탄했다.

    ▲ 윤장혁 지부장은 “노조 할 권리 쟁취를 위해 민주노총과 함께 복수노조 노동악법 철폐 투쟁으로 떨쳐나서자”고 외쳤다.
    ▲ 윤장혁 지부장은 “노조 할 권리 쟁취를 위해 민주노총과 함께 복수노조 노동악법 철폐 투쟁으로 떨쳐나서자”고 외쳤다.
    ▲ 정명지회 박준성 지회장은 “당장의 편안함과 안일을 위해 자본이 만든 어용노조에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겠다”면서 “사측의 거짓 정보에 회유당한 어용노조를 박살 내고 민주노조 정명지회 깃발을 높이 들겠다”는 결의로 화답했다.
    ▲ 정명지회 박준성 지회장은 “당장의 편안함과 안일을 위해 자본이 만든 어용노조에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겠다”면서 “사측의 거짓 정보에 회유당한 어용노조를 박살 내고 민주노조 정명지회 깃발을 높이 들겠다”는 결의로 화답했다.

    울산지역 대행진을 마친 중앙대행진단은 다음 날(4일) 부산에서 대행진을 이어간다.

    또, 민주노총 울산본부는 다음 달 4일 열리는 ‘해고금지·생계소득 보장, 사회안전망 전면 확대, 비정규직 철폐’ 10만 노동자대회를 알리고 조직하기 위해 6월 한달 각 현장 순회와 선전전 등을 벌일 계획이다.

    ▲ 출근 선전전을 마치고, 현대중공업 원하청 노동자들과 차별철폐 대행진단의 단체사진.
    ▲ 출근 선전전을 마치고, 현대중공업 원하청 노동자들과 차별철폐 대행진단의 단체사진.
    ▲ 울산 건설기계 조합원들과 차별철폐 대행진단.
    ▲ 울산 건설기계 조합원들과 차별철폐 대행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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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대북전단 살포 중단되어야"


(추가) '김여정 담화'에 "실효성 있는 조치" 예고..“대북 삐라는 백해무익”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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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04  11: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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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은 4일 대북전단살포는 중단되어야 하며, 정부는 여러 차례 관련 조치를 취한데 이어 실효성있는 제도개선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정부입장을 발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남북군사합의 파기 가능성을 언급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의 4일 비판 담화에 정부는 즉각 실효성있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정부입장을 발표했다.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은 4일 정례브리핑에서 대북전단 관련 정부입장을 발표해 "정부는 전단살포가 접경지역 긴장 조성으로 이어진 사례에 주목해서 여러 차례 전단살포 중단에 대한 조치를 취해 왔다"고 하면서 "접경지역에서의 긴장 조성 행위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제도개선방안을 이미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 대변인은 "실제로 살포된 전단의 대부분은 국내 지역에서 발견되고 접경지역의 환경오염, 폐기물 수거부담 등 지역주민들의 생활여건을 악화시키고 있으며, 남북방역협력을 비롯하여 접경지역 국민들의 생명 ·재산에 위험을 초래하고 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이날 예정에 없던 브리핑이 진행된 것은 오전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이 담화를 통해 지난달 31일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삼아 정부 당국의 책임있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금강산관광 폐지, 개성공업지구 완전 철거, 남북연락사무소 폐쇄, 남북군사합의 파기 등 일련의 대응이 있을 것임을 경고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여 대변인은 관련 질문에 "대북전단 문제가 남북관계에 끼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정부가 분명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또 이같은 정부 입장은 대북전단 살포 금지 문제가 판문점선언 관련 합의인 만큼 선언 이행차원에서 김여정 제1부부장의 담화 그 이전부터 준비해 오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과거 전단살포와 관련해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조치를 위한 사례가 있으며, 현재 법률정비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단살포 단체가 지금까지 3차례 취한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그리고 오는 25일 추가 살포를 공언하고 있는데 대해 어떻게 조치할 지에 대해서는 관계기관과 협의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4일 오전 “4.27 판문점선언과 9.19 남북군사합의가 지켜져야 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매주 목요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례회의가 개최된다. 오늘이 목요일”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대북 삐라는 참으로 백해무익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안보에 위해를 가져오는 행위에 대해서는 앞으로 정부가 단호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추가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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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이정희,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 위한 위원회 구성 제안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20/06/05 09:18
  • 수정일
    2020/06/05 09:1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백남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0/06/05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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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규 민중당 상임대표와 이정희 국민입법센터 대표가 국민들이 나서서 전국민 고용보험 제도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사진 : 민중당)     

 

이상규 민중당 상임대표와 이정희 국민입법센터 대표(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노동계시민사회에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을 위한 국민발안위원회(이하 고용보험 발안위구성을 제안했다.

 

노동자서민의 절박한 요구인 고용보험을 정치인들의 선의에만 맡겨두지 말고 당사자와 주권자가 직접 나서서 만들자는 취지다.

 

이상규이정희 대표는 거리를 둬야 하고아프면 쉬어야 하지만 생계를 위해 새벽근무와 주말근무를 감당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라며 코로나19가 몰고 온 실업과 소득상실은 서민들에게 재앙이라고 재난의 불평등성을 지적했다.

 

이상규이정희 대표는 전국민 건강보험이 있어 아플 때 큰 부담 없이 병원에 갈 수 있듯이고용보험이 모든 일하는 사람을 보호해야한다며 코로나 사태로 수업 못하던 방과후강사나 예술강사대리운전 기사나 배달노동자15시간 미만 노동으로 내몰리는 요양보호사아이들 밥 차려 주고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 나가 일하는 무급가족종사자이런 분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줄었을 때 고용보험이 옆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민중당은 지난 대선시기 '전국민 고용보험제' 도입을 공약했었다. (사진 : 민중당)     ©

 

이상규이정희 대표는 자발적 이직 실업급여 지급감염병으로 경기가 위축돼 소득이 줄어든 경우에 대한 고용보험 역할재충전급여 도입으로 안식월’ 국가 보장청년이직준비급여 도입 등 급여 체계도 다시 설계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상규이정희 대표는 정부가 단계적으로 전국민 고용보험 도입을 추진하려는 것에 대해 전국민 고용보험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바로 지금 필요하다며 실업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선의에 맡겨놓아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용보험 발안위는 7일 오전 11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마트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정식 발족한다고용보험 발안위는 전국민 고용보험 국민발안운동에 돌입하고 30만 명의 국민발안 위원을 모집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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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 고용보험’ 도입을 위한 국민발안운동을 제안합니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습니다거리를 둬야 하고아프면 쉬어야 하지만 생계를 위해 새벽근무와 주말근무를 감당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입니다코로나19가 몰고 온 실업과 소득상실은 서민들에게 재앙입니다하지만 버팀목이 돼야 할 사회안전망이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코로나 사태로 드러났습니다코로나 사태 이후 한국 사회를 바꾸려면 무엇보다도 고용안전망부터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합니다.

 

전국민 건강보험이 있어 아플 때 큰 부담 없이 병원에 갈 수 있듯이고용보험이 모든 일하는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코로나 사태로 수업 못하던 방과후강사나 예술강사대리운전 기사나 배달노동자15시간 미만 노동으로 내몰리는 요양보호사아이들 밥 차려 주고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 나가 일하는 무급가족종사자이런 분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줄었을 때 고용보험이 옆에 있어야 합니다급여 체계도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자발적 이직도 실업급여를 지급하고 감염병으로 경기가 위축돼 소득이 줄어든 경우도 고용보험이 역할을 해야 합니다재충전급여 도입으로 안식월을 국가가 보장해야 합니다청년에게 더 많은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청년이직준비급여도 필요합니다고용보험 확대가 즉시 효력을 발휘하도록 국가가 보험료를 지원해야 합니다.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용보험을 적용하기 위해 민중당은 지난 총선에서 전국민 고용보험을 공약으로 제시했습니다문재인 정부도 전국민 고용보험을 도입하겠다고 나섰습니다다행스런 일입니다하지만 정부는 단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며 특수고용노동자는 나중에 하자고 합니다영세자영업자는 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이런 식이면 안 됩니다전국민 고용보험은 언제일지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바로 지금 필요합니다.

 

 

전국민 고용보험실업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선의에 맡겨놓아선 안 됩니다당사자인 모든 일하는 사람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민중당은 전국민 고용보험을 위한 국민발안운동을 각계각층에 제안합니다무상급식운동으로 우리 아이들만큼은 설움받지 않고 따뜻한 밥 한끼 먹을 수 있는 시대를 만들었습니다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참여로 전국민 고용보험을 도입해 실업과 소득 감소에 대한 튼튼한 안전망을 만듭시다국민발안운동으로 직접민주주의 확대의 전기를 마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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