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9/11/07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1/07
    포도밭의 경제학 (시대를 읽는 문학/박혜영)
    tnffo
  2. 2009/11/07
    한국에도 파시즘이 오는가 / 손호철(1)
    tnffo
  3. 2009/11/07
    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1~5)
    tnffo

포도밭의 경제학 (시대를 읽는 문학/박혜영)

거의 1년이 지나도록 단 한번도 내 눈길을 끌지 못했던 한겨레의 특별코너를 오늘에서야 발견했다. '시대를 읽는 문학'이라는 타이틀 아래 영문학자 박혜영(45) 교수라는 분이 풀어주는, 제목 그대로의, 험한 시대(주로 자본주의, 물질만능, 등등)를 문학적 요소와 함께 얽어 상당히 재미있게 엮어가는 시평으로 보인다. 무턱대고 자본주의와 반민주주의를 외부의 악마로 설정하고는 싸워나가길 권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모르게 숨어든 내 속의 자본주의적 순응인자들을 들춰내고 나도모르게 길들여진 내 일상의 반민주주의적 요소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돕는 것이 -좀 과장하여 말하자면- '시대를 읽는 문학'에서의 문학이 맡은 역할로 필자는 설정하고 있다고 감히 상상해 본다. 한마디로 유익하고 흥미롭다. 이하, 관심가는 몇 개의 제목을 모아두고 맛보기용 한 편을 옮겨온다.

 

 
경쟁은 ‘생존의 법칙’ 아닌 ‘죽음의 법칙’  / 박혜영


영시에서 죽음의 신은 들판에서 풀을 베는 농부처럼 때때로 한 손에 어른 키만 한 긴 ‘낫’(scythe)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허리춤까지 자란 풀을 긴 낫으로 추수하는 풍경에서 옛사람들이 죽음을 떠올린 것은 풀이 농부의 낫질을 피해갈 수 없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이 공평하게 보내주는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삶의 시작은 비록 불공평해도 신의 뜻으로 그 끝은 언제나 평등하게 마무리되기에 영국인들은 사는 동안 생긴 불평등을 ‘평평하게 해주는 것’(Leveller)이 죽음이라고 보았다.

영국 최초의 시민혁명이었던 청교도혁명에서 의회파 지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파 내에서도 급진적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을 ‘수평파’(levellers)라고 비하했는데, 그것은 런던의 가내수공업자와 의회군 내의 하급 사병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마치 낫을 든 죽음의 신처럼 혁명을 통해 모든 것을 평평하게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수평파들은 공화제와 보통선거, 토지의 균등한 재분배와 같은 급진적인 평등을 통해 진정한 신의 왕국을 영국에 구현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부르주아 상인계급과 부농으로 이루어진 대다수 의회파로서는 이런 요구가 전제왕정을 옹호한 왕당파 못지않게 두려운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당연히 수평파 지도자들은 왕당파를 꺾은 직후 모두 반역죄로 처형되는데, 그것은 신의 지상낙원을 구현하려는 이들의 급진적 평등사상이 크롬웰과 같은 청교도주의자들의 개혁논리로도 용인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청교도혁명의 유토피아정신은 정치적, 경제적 현실논리 속에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영국에 지상낙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부르주아 의회주의자들이 떠받들던 평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평등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흔히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말하는 능력에 따른 기회의 평등이 아닌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의 평등이었다.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천국의 모습에 대한 유명한 성경 구절을 들어 영국이 지향해야 할 사회를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른 아침에 장터로 나간 하늘나라의 포도밭 주인은 하루에 1데나리우스를 주기로 합의하고 몇 명의 일꾼들을 포도밭으로 보낸다. 정오쯤에도 장터에 나간 주인은 여전히 빈둥거리고 있던 몇 명의 일꾼들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기로 하고 모두 포도밭으로 보낸다. 오후 늦게 다시 장터에 나간 주인은 또 빈둥거리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기로 하고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윽고 저녁이 되자 주인은 일꾼들을 모두 불러 모아 품삯을 나눠주는데, 오후 늦게부터 일한 일꾼이건 맨 먼저 도착하여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이건 모두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이다. 당연히 맨 먼저 온 일꾼들이 불평을 하자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다. 너는 나와 1데나리우스를 받기로 합의하지 않았느냐.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에서는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러스킨 경제사상의 정수를 의미하는 이 우화는 경제적 평등에 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다분히 종교적이자 윤리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농부가 땅의 모든 생명을 돌보듯 신은 만인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기에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각자의 능력과 무관하게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고 잘 존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포도밭 주인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건, 일을 적게 한 사람이건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같은 품삯이 필요하기에 같은 품삯을 준 것이다. 러스킨은 경제의 본질이란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명을 돌보고, 공동체의 삶을 존속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기에 평등한 생명의 가치를 돌볼 새로운 평등의 경제학을 꿈꾼 것이다.

이처럼 능력이 아닌 필요에 따라 인간의 삶을 공평하게 돌보아주는 것이 하늘나라 포도밭의 경제학이며, 그런 신의 뜻이 살아서 구현되는 곳이 바로 지상낙원일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평등한 만큼 삶도 평등해야 한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셈법으로는 유토피아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평등은 남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더 많이 할수록 더 많은 품삯을 주는 것이지 그 일이 얼마나 사람의 생명을 돌보고, 공동체의 삶을 존속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로 품삯을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학으로는 생명을 돌보는 농부의 일이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공동체를 파탄에 빠뜨리는 금융전문가의 일보다 언제나 더 하찮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학은 공기나 햇살, 혹은 우정이나 신뢰처럼 생명에 유익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두 하찮게 만들기 때문이다. 탐욕과 과시, 경쟁과 이기심에 토대를 둔 경제를 가지고는 그 어느 공동체도 생명을 돌볼 수 없을 것이다. 곳곳이 오직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가 될 뿐이다. 그래서 러스킨도 “협력은 모든 사물에서 생명의 법칙이고, 경쟁은 죽음의 법칙이다”라고 하였다.

공동체는 어떤 평등의 원칙을 따를 때 지속가능할 것인가? 낭만주의 시인인 블레이크“사자와 소에게 같은 법을 적용하는 것은 압제다”라고 하였다. 흔히 더 많은 경제성장이 더 많은 평등을 보장해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의 평등은 다분히 기계적, 산술적인 평등이다. 사자와 소가 서로 한자리에서 싸울 수 있도록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억압이지 평등이 아니다. 포도밭의 경제학으로는 농부는 농부의 삶을, 노동자는 노동자의 삶을, 학자는 학자의 삶을 살면서도 서로 평등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이윤만 추구하는 경제적 동물로 살기 시작하면 삶의 곳곳을 전쟁터로 만들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억압할 만큼의 부를 축적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다른 존재를 억압하고,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신이 만든 경이로운 포도밭의 경제학을 잃어버리는 순간일 것이다. 아일랜드의 시인인 브렌던 커넬리는 다른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무슨 짓이든 다 할 수가 있고, 따라서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옥이란 모든 경이로움이 발가벗겨져 속속들이 알게 되는 것.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이 내 눈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내가 우정을 당연히 여긴 적이 언제던가?

내가 죽인다는 생각에 익숙하던 적이 언제던가?

내 육체가 더 이상 감탄스럽지 않던 적이 언제던가?

내 정신이 늙어 덤덤해진 적이 언제던가?

나는 안다, 이런 순간이면 언제나

내가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음을.

내 안에서 경이로움이 사라질 때 권력은 생겨나리니.

세상도 바꿀 수 있으리, 내가 더 이상 푸른 하늘을 꿈꾸지 않을 때면.

신도 배신할 수 있으리, 내가 길거리에 퍼지는 소녀의 노랫가락과

수수밭에 내리는 햇살의 은총을 듣지 못할 때면.


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기사등록 : 2009-09-11 오후 07:02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76282.html

 

 

시대를 읽는 문학 / 박혜영
첫회)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가벼운 목숨, 기사등록 : 2009-01-23 오후 06:25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5090.html
2) 쫓겨난 교사들과 거룩한 바보들
3) ‘필요’만 허용되는 헐벗은 삶이여
4) 작가여, 누구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5) ‘닫힌 귀’에 불복종할 양심
6) 풀·달·여치한테 인간의 길을 묻다
7) 사람을 먹는 자본…빈곤을 낳는 풍요
8) 경쟁은 ‘생존의 법칙’ 아닌 ‘죽음의 법칙’ [펌]
9) ‘물질적 풍요’ 앞에 늑대가 된 인간, 기사등록 : 2009-10-09 오후 06:59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81117.html
10) ‘자본의 애완견’ 민주주의에 바치는 추도사, 기사등록 : 2009-11-06 오후 08:01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86342.html

* 박혜영(45) 교수가 ‘에세이’ 면의 새로운 필자로 참여합니다. 박 교수는 영국 글래스고 대학에서 낭만주의 영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금 인하대에서 영시와 영미문화비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국에도 파시즘이 오는가 / 손호철

손호철이 옛날에 정운영 선생 등과 함께 <이론> 동인으로 활동할 때에는 상당한(좀 무조건적인) 존경으로 그의 글을 읽곤 했었는데, 10여년이 훨씬 지난 최근에 그의 글들은 학자의 글도 아니고 좌파 밀리땅의 글도 아닌 것이 그냥 고집스럽다는 인상으로 거부감이 많았다. 그래도 세파를 나보다 한참 많이 겪은 사람이고 명색이 진보지식인으로 통하니 가끔씩은 그의 글을 읽어주기는 한다. 때로 만나는 아래와 같은 글은 좋은 고민거리를 던져주기도 하기에 유익할 적도 있긴 있다.

 

 

[시론] 한국에도 파시즘이 오는가 / 손호철

 

[...] 사실 현재의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에도 그 핵심에 존재하는 것은 MB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는 박정희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승리를 가져왔다. 주목할 것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하류층의 52%가 김대중 후보를, 36%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등 가난한 계층일수록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간 완전히 바뀌어 2007년 대선의 경우 하류층의 72%가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을 정도로 가난한 계층일수록 보수세력을 지지하는 것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진짜 우려되는 것은 앞으로다. 우리는 흔히 중산층이 튼튼해야 민주주의가 안정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우리사회에서 하층민의 비중은 34.6%에서 45.2%로 늘어난 반면 중산층은 61.1%에서 53.4%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53.4%는 우리가 속해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비해 무려 20% 낮은 수치다. 그만큼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민주주의의 뿌리가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특히 경제위기가 장기화하고 세계적인 탈 신자유주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현재처럼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해 서민층의 경제적 어려움이 장기화할 경우, 한 진보 이론지가 ‘파시즘 X’라는 이름을 통해 경고한 바 있듯이 약 100만명에 달하는 실업자들, 600만명에 달하는 영세자영업자들, 그리고 잠재적 실업층인 청년세대와 같은 시장의 낙오자들을 중심으로 파시즘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확산될 우려가 있다. 이와 관련, 얼마 전 ‘친북 매국노’들을 제거하는 데 목숨을 바치겠다고 공언하고 나선 애국기동대라는 극우 민간단체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만든 분향소를 습격해 철거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도 독일과 같은 ‘진성 파시즘’이 오는가?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경향 입력 : 2009-11-06 18:05:29ㅣ수정 : 2009-11-06 18:05: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061805295&code=99030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1~5)

여성혁명가들을 통한 '외도'를 한참 했던 고종석이 유럽식 새 학년도의 시작과 더불어 다시 돌아와 자기의 주전공에 대한 '썰'(說)을 풀어나갈 모양이다. 한국일보에 월요일 아침마다 오른다는 썰의 장에 걸린 정식 문패는 '말들의 모험'이고 보조문패는 '언어학 카페'인 듯하다. 소쉬르, 촘스키, 야콥슨 등의 고전적 언어학자들을 딛고 고종석 특유의 친근한 숨결을 어떻게 딱딱할 언어학에 불어넣을 지가 상당히 기대된다. 막 세상을 떠난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주의의 개척자라면, 언어학의 대부인 소쉬르는 -고종석의 아래 인용 말처럼- "자신이 구조주의자인 줄 몰랐던 [최초의] 구조주의자"일 것이다. 이제 구조주의는 한물갔는지 모르겠지만, 소쉬르 언어학은 -오래전에 CLG를 잠시동안 맛뵈기 수준으로 공부한 바에 의하면- 언어 속에 숨겨진 사실관계를 (구조적으로?) 누설하는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으므로 '한물 가고말고'와는 무관한 고전일 것이다. 따로 소쉬르나 언어학을 다시 공부할 여가(여력)가 내게 더는 없을 듯하니, 고종석의 '카페'를 가볍게(!) 따라가며 부족한 공부가 저절로(?) 되길 희망해 본다. [이 포스트에 링크는 계속 추가해 가겠지만 내용은 가능한한 더더 압축적 펌으로 이어갈듯... 사족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고종석이 '유럽통신'인가 어딘가에서 부드러운 글쓰기를 위하여 선택한 편짓글 문체가 나중에는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더라는 스스로의 술회를 어디선가 본 듯한데, 비슷하게 나도 이번 연재물의 싹싹한 서울식 대화체가 쫌 불편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내가 너무 촌놈이고 너무 오랫동안 삭막한 서술체에 익숙해진 탓이리라.]

 

연재, 고종석의 말들의 모험  

http://news.hankooki.com/hotissue/gi_sr_view.php?page=1&mode=sr&parent_id=414 

 

1. 호모 로쿠엔스… 오지랖 넓은 '말들의 수다'가 시작된다.
2. 말투·억양 달라도 소통 하는 건 머리 속 '개념 지도' 같기 때문
3. 번역 과정의 애씀이 그를 이해하는 과정
4. 어떤 번역어도 완벽할 수는 없어
5. 번역어는 보석상자 

 

 

<1> 연재를 시작하며

 
오늘부터 월요일 아침마다 독자를 찾을 '말들의 모험'은 말에 대한 수다입니다. 그 말은 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같은, 인류가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쓰는 자연언어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로쿠엔스(말하는 인간)로 만든 언어, 사람을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만든 언어 말입니다. 에스페란토처럼 세계어를 지향해 특정한 개인이 만든 인공어나, 컴퓨터 언어처럼 의미를 정확히 연산하기 위해 수학자나 철학자들이 고안해낸 논리언어, 개미들의 화학적 언어나 벌들의 비행(飛行)언어처럼 인류 이외의 동물들이 의사를 주고받기 위해 쓰리라 짐작되는 유사언어는 우리 눈길을 받기 어려울 겁니다. 부제에 '언어학'이라는 말이 들어있으니, 일종의 언어학 에세이가 되겠지요. [...]

 

사람들이 언어에 지적 관심을 기울인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지만, 언어학이 분과학문으로 자립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입니다. 그리고 이 학문은 20세기 들어 만개합니다. 특히 20세기 중엽에 구조주의라는 사조 또는 방법론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휩쓸면서, 언어학은 얼마동안 학문의 제왕으로까지 군림하게 됩니다. 구조주의의 발원지가 언어학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주의'에서 '구조'(structure)는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라는 뜻입니다. 언어가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일반언어학강의>('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줄여서 CLGㆍ1916)라는 책이 출간되고부터입니다. CLG의 저자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라는 스위스 언어학자입니다. 꼼꼼한 독자라면, CLG의 발간년이 소쉬르의 몰년(沒年)보다 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CLG는 소쉬르가 죽은 뒤에 나왔습니다. 소쉬르가 <일반언어학강의>라는 제목의 유고를 남긴 것도 아닙니다. 그는 제네바대학에서 일반언어학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소쉬르는 이 대학에서 일반언어학 강의를 세 차례(세 학기)에 걸쳐 했습니다. 첫 번째 강의는 1907년 1월부터 그 해 7월까지, 두 번째 강의는 1908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세 번째 강의는 1910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진행됐습니다(일반언어학은 말 그대로 언어 일반에 대한 학문적 탐구를 가리킵니다. 이에 견주어 한국어학, 영어학, 일본어학처럼 특정 자연언어를 대상으로 삼는 학문은 개별언어학이라고 합니다. 소쉬르가 제네바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891년 겨울학기부터고 정교수가 된 것은 1896년입니다. 그는 제네바대학 초기에 산스크리트어학이나 프랑스어학 같은 개별언어학을 가르쳤습니다). CLG는 소쉬르의 이 세 차례 일반언어학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노트를 밑절미 삼아 샤를 발리와 알베르 세슈에라는 언어학자가 편집한 책입니다.

 

[...] 영향력을 기준으로 삼을 때, 19세기를 대표하는 언어학자가 소쉬르고, 20세기를 대표하는 언어학자가 노엄 촘스키(1928~)라는 데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겁니다. 물론 20세기 사람 촘스키만이 아니라 19세기 사람 소쉬르 역시, 그 영향력이 행사된 시기는 20세기입니다. [...] 촘스키의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s'ㆍ1957)에서 싹을 틔운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 줄여서 TG)은 20세기 언어이론에 말 그대로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이 혁명적 언어학을 촘스키는 같은 제목의 저서에서 '데카르트 언어학'(Cartesian linguistics)이라고 불렀습니다. 지식의 계보에서 촘스키가 과연 데카르트의 적통(嫡統)인지를 두고 지성사적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이 유대계 미국인이 합리주의와 심성주의(mentalism)의 실로 20세기 주류 언어학의 피륙을 짠 것은 확실합니다.

 

다시 소쉬르로 돌아가 봅시다. 소쉬르 언어학은 두 권의 책에 망라돼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CLG고, 다른 하나는 1922년 파리에서 간행된 <페르디낭 드 소쉬르 학술논문집>입니다. 이 논문집에는 21세의 소쉬르에게 학문적 명성을 안긴 '인도-유럽어 모음들의 원시체계에 관하여'(1878)를 포함해, 그 때까지 확인된 소쉬르의 글들이 모두 묶였습니다. 이 책은 소쉬르의 지적 조숙과 천재를 넉넉히 증명하지만, 그를 구조주의의 아버지로 만든 것은 제자들이 편집한 CLG입니다.언어가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라는 생각은 CLG에서 여러 차례 피력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구조'라는 말로 명시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체계'(systeme)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해 CLG에서 반복되는 '체계'라는 말은 20세기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조'와 거의 같은 뜻입니다. 조르주 무냉이라는 프랑스 언어학자가 소쉬르를 '자신이 구조주의자인 줄 몰랐던 구조주의자'라고 일컬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CLG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언어학의 유일하고 진정한 대상은, 그 자체로서 또 그 자체만을 위해 고찰되는 언어다." 언어학의 대상을 좁고 엄격하게 규정한 이 문장은 소쉬르 사상의 한 핵심으로 널리 인용돼 왔습니다. 그러나 CLG 독자들은 이 마지막 문장과 맞닥뜨리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CLG의 뒷부분은 지리언어학이나 언어인류학 같은, '그 자체로서 고찰되는 언어' 바깥에까지 눈길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뒷날 소쉬르 연구자들은 소쉬르 수강생들의 강의 노트에 이 구절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문장은 발리와 세슈에가 자의로 끼워 넣은 것입니다. 실상 이들은 소쉬르 만년에 이미 제네바대학 강사 노릇을 하고 있었던 터라, 스승의 일반언어학 강의 중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라 할 세 번째 강의를 거의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쉬르의 생각은, 언어학이 언어와 관련된 모든 영역을 그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로만 야콥슨(1896~1982)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소위 프라하학파를 이끈 이 러시아 출신 미국 언어학자는 1953년 인디애나대학에서 열린 언어학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언어학자다. 언어와 관련된 것 중 내게 무관한 것은 없다."(Linguista sum: linguistici nihil a me alienum puto.) '말들의 모험'도 야콥슨의 이 오지랖넓은 언어학과 친할 것 같습니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력시간 : 2009/09/27 21:31:07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09/h2009092721310584330.htm

 

 

<2> 랑그의 언어학과 파롤의 언어학 (10/04일)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0421142986330.htm
[...] 소쉬르는 언어기호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첫째는 자의성(恣意性)이고 둘째는 선조성(線條性)입니다. 기호의 자의성이란 특정한 시니피앙과 특정한 시니피에의 결합에 아무런 내적 필연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牛'라는 시니피에가 한국어에서는 {s-o}(소)라는 시니피앙과 결합하지만, 독일어에서는 {o-k-s}(Ochs)라는 시니피앙과 결합합니다. 선조성은 기호 전체의 특성이 아니라 시니피앙의 특성입니다. 시니피앙은 그 청각적 본질 때문에 시간 속에서 전개되며 , 따라서 선(線)의 특성을 갖는다는 거지요.

 

<3> 번역이라는 고역(苦役) (上): 번역 과정의 애씀이 그를 이해하는 과정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1121405384330.htm

<4> 번역이라는 고역 <中>: 어떤 번역어도 완벽할 수는 없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1821382986330.htm

<5> 번역이라는 고역 <下>:  번역어는 보석상자 (10/25)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910/h2009102521340086330.htm
새 번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기를 얻는 과정을 야나부 아키라(柳父章)라는 일본인 번역학자는 '카세트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카세트'는 보석상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잠깐 들어볼까요? "새로 만든 말은 카세트를 닮았다. 그 말 자체가 매력이다. 그리고 속에 깊은 의미가 틀림없이 담겼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사람들을 끌어서 자꾸 그 말을 쓰도록 부추긴다.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 신조어는 그 반복 사용 과정을 통해 이윽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처음엔 단지 아름다움 때문에 보석상자를 찾던 사람들이 끝내 보석을 간수하는 데 그 상자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미나 역할이 아니라 말 자체에 매혹되는 첫 체험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보석상자 같은 것이다."(<번역이란 무엇인가>)
[파롤(parole)의 번역어인] '화언'이 영원히 빈 카세트로 남게 된다 해도, 역자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번역의 역사에서 끝내 빈 카세트로 남게 된 말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오히려 그 번역의 시도를 상찬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번역은 한 세상에 또 한 세상을 들여놓아 세상을 입체화하는 엄청난 일이니까요. [...]

 

# 이어짐: http://blog.jinbo.net/radix/?pid=30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