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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심히 썼다가 글이 등록이 안되고 날아갔는데 아주 힘빠지네요. 시스템을 탓할 것인가, 부주의를 탓할 것인가. 그래도 오기 발동. 다시 작성.)
프랑스의 소도시 로셀, '코스'라 불리는 공장폐쇄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한다. 한 신문은 이 소설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제르미날"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삶을 강요하는지는 프랑스나 남한이나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같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무 전형적이고 따라서 사실주의적인 소설. 등장하는 노동자 인물들의 대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만한 인식들이 어느 정도는 퍼져있으니 이런 묘사가 가능하겠지. 부럽다.)
생산에서 철수하는 자본, 금융세계화
이 소설의 주된 무대인 공장은 플라스틱필름을 제조하는 공장이다. 이 공장이 결국은 폐쇄되고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수밖에 없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고 금융투기로 전환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1) 경쟁력이 약화된 공장을 한 초국적 기업이 인수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공적자금과 물질적, 행정적인 편의를 제공받는다.
(2) 그러나 이 기업은 생산을 남부유럽, 동유럽에 재배치하면서 물량을 감축하면서 수익성을 이유로 구조조정을 강요한다. 이를 이유로 다시 한번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는다.
(3) 이 회사는 다시 미국계 금융투기자본인 한 페이퍼컴퍼니에 매각된다. 이제 완전히 청산. 이 투기자본은 공장이 가지고 있는 특허권만 매각하고 나머지는 폐기한다.
전체 과정 속에서 국가는 자본의 금융화를 재정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하면서 노동자의 불만을 적절히 관리하는 역할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어떤일이 벌어졌을까? 구조조정 과정에서 300여명의 노동자들 중 70여명이 정리해고되고 임금은 삭감된다. 그리고 최종적인 공장폐쇄 과정에서 전체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이런 과정은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여 완전히 금융화되는 과정이나, 생산의 초국적 재배치와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중심부, 반주변부 제조업이 처하게 되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작가가 이런 과정을 면밀하게 묘사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이런 식의 자본의 생산철수가 빈번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로서 금융화라는 쟁점이 대중적으로도 인식되는 사정도 더 이해할 수 있다.(ATTAC과 같은 대중적인 사회운동을 생각해보자.)
이에 비해서 남한에서 공장폐쇄는 주로 '해외이전', '산업공동화'로 이해된다. 강력한 생산기지로 부상하는 중국이 인접해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사회운동 진영에서조차 문제가 '금융화', '생산에서의 철수'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중국으로의 공장이전에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보다는 중국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외환은행과 론스타, 오리온전기 사태 등에서도 보이는 것과 같이 금융투기, 금융화의 효과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뚜렷히 드러나는 중이다.
프랑스의 노동관행, 제도, 투쟁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에서 노동제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행동양식. 구조조정과 공장폐쇄가 진행되고 지방 소도시의 거의 유일한 공장인 300명짜리 직장이 사라질 위기가 되자, 이 문제는 지자체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그리고 중앙정부 차원의 관심사로 등장한다. EU-정부-지자체가 해고 노동자들의 특별퇴직금을 분담하는 안까지 논의된다. (남한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노동조합과도 이러한 보상 방안을 두고 정부와 지자체가 직접 협상한다. (역시 남한에서는 거의 어림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의 폭력적인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투경찰이 등장하는 광경은 남한과 똑같다. 마지막 대규모 지역시위 과정에서 연대투쟁온 다른 공장의 노동자와 지역주민 여성이 각각 전투경찰 폭력으로 사망하고, 전투경찰도 한 명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역주민 여성은 직격발사된 최루탄에 맞아서(이한열 열사처럼), 연대투쟁온 노동자는 곤봉에 맞아서(강경대 열사처럼) 죽는다.
한편, 정부가 이런 식의 교섭에 나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동조합의 입장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코스'공장 안에는 세 개의 노동조합 조직이 있다. (복수노조니까 당연하겠지. 사실, 노동자가 자기가 속하고 싶은 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은 시민적 권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이를 노동법으로 규제하는 남한의 현실은 웃음거리가 되기 알맞다.)
노동총동맹CGT, 노동자의 힘FO, 민주노동동맹CFDT 새개의 조직이 있다. 일반적으로 CGT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FO는 우익적, 실리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것으로, CFDT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에 대한 묘사는 흥미로운데 아마도 현실에서 이들이 취하는 입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같다.
CGT는 입으로는 원칙적인 입장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런 입장을 갖고 투쟁을 하지도 일관되게 밀고 가지도 못한다. CFDT는 온건하게 '합리적인' 입장을 가지지만 반여성적인 구조조정에 동의하고 인종주의적인 모습도 보인다. 차라리 경제주의적인 입장에 충실한 FO가 솔직하게 자기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여튼간에 이들은 시종일관 조합원들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시종일관 실패한다. 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와일드캣 스트라이크가 빈발한다)에 밀려서 협상장에 나서는 것이 이들의 포지션이다.
CGT의 모습은 공장에서 지부대표의 모습 뿐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나온 간부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파견나온 중앙 간부는 시종일관 공장폐쇄를 기정사실화하고 특별해고수당을 더 확보하고, 직업훈련기간과 그 기간의 임금을 더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하는 순간에도 이들을 기만하고 현장에서 합의되지 않은 안을 갖고 협상을 진행한다. 더구나 간부는 현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아니라 정부(노동부와 지자체)와 협상하기 위한 '조정자'라는 신분으로 왔다.
이러한 모습은 민주노총의 '국민파 '보다도 우익적인 것으로서, 공산당을 지지하는 조직이라는 말이 민망한 일이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공장점거와 투쟁을 주도하는 급진적인 젊은 노동자들이 대부분 CGT 조합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시종일관 CGT의 방침을 거부하고 투쟁을 밀고 나가지만 말이다. 결국, 마지막 국면에서 CGT 대표가 쓰러져 병원에 옮긴 사이에 FO, CFDT 대표들은 후퇴된 합의안에 '직권조인'하고 공장에 합의를 (노동자에게) 강요하러 온다.
여튼, 이런 모습을 보면 그나마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은 전투성이나 원칙에 있어서는 '양반'인가 싶기도 한데, 씁쓸한 일이다.
지역투쟁
이 소설의 절정이라고 할만한 대규모 지역시위. 인근지역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결정도 없이 비공인파업에 돌입하여 연대한다. 지역주민들도 거리에 나선다. 지역주민들은 '코스' 노동자들의 친척이자 친구이며, 이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이런 방식의 지역투쟁이 가능한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지역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단체, 연대기구같은 것이 없이도 지역의 공동체성만 갖고 투쟁을 조직해서 나서는 모습은 놀랍다. 지역차원의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지역민중연대'같은 조직도 중요하겠지만, 지역의 노동자`시민들이 공동체라는 관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와 여성노동자
첫번째 구조조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성노동자들이다. 회사는 근속연수, 나이 등 여러가지로 '기준'을 만들지만 그것은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여성노동자들을 해고대상으로 이미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에 불과하다. 기준자체가 젠더편향적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여성들이 해고된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지자체는 직업훈련과 재고용을 약속했지만 정작 훈련받은 직업에 취직된 경우는 없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마당이니 취업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나마 취업한 경우라면 가정부, 보육, 웨이트리스 등이 저임금, 비공식, 하인 노동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여성들을 어디로 내모는지 보여준다. 여성의 권리가 증진된 국가로 알려져있지만 그 근본적인 양상은 남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국제적인 '통일성'을 새삼 확인한다.
놀라운 여남관계 ; 다중성과 개방성
이 소설의 주요 플롯에서는 조금 떨어져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여남관계가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일 뿐 아니라 다중적이라는 점. 주인공 루디를 포함해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결혼한 배우자가 아닌 남성, 여성과 성적 관계, 애정관계를 맺는다. (동성애도 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가책을 느낀다거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결혼한 배우자를 사랑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의 애정관계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전에 이미 관계가 안좋은 경우.) 우리나라에서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이 책을 읽은 한 동지는 이 책을 보면서 '폴리 아모리'라는 개념이 떠올랐다고 이야기했다. 비독점 다자연애, 혹은 개방결혼이라고 번역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아내가 결혼했다> 소설로 알려진 개념. 소설에서와 같은 상황을 나타낸다는 것인데, 이성애, 동성애에 대한 관념이 사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 발견한다.
이러한 관계방식은 콜론타이의 자유결합과도 또 다른데, 같은 시기에조차 동시에 복수의 이성과 애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제르미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한 평가가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 소설은 제르미날의 구도와도 매우 유사하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구조 자체와 연결된 자본가의 착취와 폭력에 맞서 투쟁하고 그 과정에서 폭력도 돌발한다. 그러나 결국 노동자들은 패배하고 누군가는 죽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개별 투쟁이 패배하더라도, 자본가들이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단결이 가지는 힘과 한계를 모두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함부로 다룬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으로 얻는데, 따라서 당면한 투쟁에 자본가가 승리하더라도 무작정 착취를 강화할 수만은 없게 된다. 제르미날Germinal, 혁명력,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에 맞게.
이 책에서 주인공 격인 루디도 제르미날의 주인공인 에티엔느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이며, 젊은 노동자이고, 사회주의자이고 투쟁에 나서고, 또 패배한다. 그리고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19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넘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유사한 방식(사실주의)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놀랍다.
산자와 죽은자
소설의 제목은 산자와 죽은자. 이것을 작가가 어떤 의미에서 붙였는지 알수는 없지만, 산노동과 죽은노동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자본가들에게 구조조정은 자본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 숫자를 통제하고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해 몇명의 노동자를 해고할 것인지, 해고수당을 얼마로 할 것인지 같은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자본가에게는 수익률과 다를 바없는 의미를 가지는 해고 노동자의 숫자는, 하나 하나가 한 노동자의 운명에 걸려있다.
이 소설에도 등장하는 노동자들도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하나하나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 구체적인 노동을 수행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죽은 노동의 대리인일 뿐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인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노동자들이 쟁취하는 것은 시민권의 가장 중요한 실현. 이 책의 추천사에서 소설가 신경숙은 "새삼 훌륭한 시민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깊이 하게 하는 대작"이라고 썼다. 인간=시민으로서의 노동자의 권리가 곧 시민권이자 인권이라는 점에서, 신경숙의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시사적이다.(노동자가 시민이라는, 이 중요한 쟁점은 많은 경우에 잊혀지기 쉽상이지만 말이다.)
루디는 말한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공장장님이 옳습니다. 그 기계는 코스의 재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스를 지배하고 있는 회사의 재산이겠죠.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직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기계는 우리 것입니다. 이 기계에 그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노동이니까요."
--
마지막 덤으로.
루디를 비롯한 젊은 급진적 노동자들이 점거중인 공장의 작업실 하나를 폭파시킨 후. CGT 공장지부 대표인 피냐르와 루디의 대화.
"지금 자네들이 한 짓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나? 급진주의라고. 그럼, 급진주의란 뭔가? 그건 고용주들이 제일 반기는 것 아닌가?"
"그런 말은 신물나게 들었어요! 그러니 제발 더는 하지 마세요. 공산당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로 죽 그런 소리를 해대지 않았나요!"
덤으로 하나 더. '제르미날'과 같은 프랑스혁명 후 혁명력에 대해서.(펌)
1793년 10월 5일 국민회의가 소집되어서 달력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법령을 통과 시킵니다. 그 내용으로는
1. 1년은 가을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즉 추분에 시작된다. 옛 달력으로는 9월 22일에 해당한다. 이 날은 최대한 정확한 천문학적 측정을 토대로 정해진 것이다.
2. 1년은 모두 30일씩 갖는 12달로 나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가을 1월 : 포도 수확의 달(Vende'maire, 방데미에르)
2월 : 안개의 달(Brumaire, 브뤼메르)
3월 : 서리의 달(Frimaire, 프리메르)
겨울 4월 : 눈의 달(Nivose, 니보즈)
5월 : 비의 달(Pluviose, 플뤼뷔오즈)
6월 : 바람의 달(Ventose, 방토즈)
봄 7월 : 싹의 달(Germinal, 제르미날)
8월 : 꽃의 달(Floreal, 플로레알)
9월 : 풀의 달(Prairial, 프레리알)
여름 10월 : 추수의 달(Mseeidor, 메시도르)
11월 : 더위의 달(Thermidor, 테르미도르)
12월 : 열매의 달(Fructidor, 프뤽티도르)
3. 나머지 5일은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세력의 이름을 따라 상퀼로티드(Sansculottide)라고 통칭한다.
4. 윤년에는 여섯 번째 상퀼로티드를 추가한다. 윤년은 예전처럼 4년마다 오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정해지는데, 이것은 정확한 천문학적 관측을 통하여 새해 첫날, 즉 포도 수확의 달(방데미에르) 1일이 정확히 춘분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혁명 달력에 따른 윤년은 공화국 2년, 7년과 11년 이었다. 그레고리우스 달력에 의하면 1793년 1798년과 1802년에 해당한다.
연말이라 이런저런 송년회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자리에서 여성단체 상근하는 동기도 함께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인사동에서 송년 번개 자리.
편한 술자리이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여성'(類로서의 여성이나 개인으로서의 여성이나)에 대해서나 '여성문제'에 대해서 정말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역시 이걸 확인한 자리. 특히 몇가지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별칭 부르기 운동
이건 딱히 여성문제라고 보긴 힘든 것이지만, 이야기하는 중에 운동단체 안에서 별칭부르기와 관련된 화제가 있었습니다. 전 이제까지 이런 별칭부르기가 그냥 일부 단체들 안에서 '재미있는 대안문화'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더군요. 잘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름(별칭)을 자신과 동료들이 정하는 과정도 그렇고, 호칭에 부여된 자신의 정체성을 주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더군요. 직책과 나이를 떠나서 단체 안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를 호칭 속에서 만들어간다는 점도 인상깊었습니다. 별칭부르기는 나이에 따라 존대말을 쓰는 관행을 폐지하는 것과 병행되는 데, 적극적으로 나이에 따른 위계를 폐지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노조와 같은 조직에서는 <담당--차장-부장-국장-실장-임원 > 등으로 이어지는 관료적 위계가 호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호칭 자체가 위계를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호칭에 반대하는 한 동료를 함께 놀려먹었던 우리 사무실 분위기, 깊이 반성합니다.) 이런 관료적 위계는 활동가 사이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구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권위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본과 권력과 '동등'해지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규노조 교육을 하면서 항상 위원장, 혹은 지부장을 호칭 속에서나 다른 대우에서 존대해야 사측이 노조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교육을 해왔습니다. 위원장이나 지부장은 사장, 기관장과 동급이라는 인상을 주어야한다는 것이죠. 저도 이렇게 교육을 해왔습니다만, 별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됩니다. 노조를 구성하는 동지들간에 호혜-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기존에 자본이 부여한 관계방식(위계와 복종)과 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는 않은지하는 것이죠. 사장, 기관장과 동등해지기 전에 조합원들 상호가 동등해져야하는 것은 아닌가.
노조가 조직적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현실적인 유용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미 자본이 부여한 위계가 판을 치고 있고 그것에 노동자들도 익숙한 상황도 있지요. 게다가 노조같은 경우에는 대중기관이라는 점에서 별칭을 쓰게 되면, 조직운영에 있어서 노조가 책임지는 대중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를 호칭이 반영하고 호칭이 다시 관계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이념에 맞게 그것을 개조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과도적이고 절충적인 방식이라도, 현재의 것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다면 방법은 없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노조 등의 대중조직이 적극적으로 운동의 하나로 수용하면서 운동조직을 바꾸어갈 수는 없을까요? 현존하는 대중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수용-적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운동조직이 적극적으로 변용하는 과정으로서 말이죠. 사회운동단체에서 시작해 대중조직으로 확산되면서 조직문화를 바꾸어왔던 이제까지의 많은 시도들을 생각해보면, 의지가 있다면 방법이 없을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동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행'이 지나는 중이라는.. ─_─;; 암튼 '유행'은 아니어야할 것같네요.)
(다만 나이를 전제하지 않고도 존중받을 만한 사람에게 상호 존칭을 사용하는 것이나 존대말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는 더 고민이 필요해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교사)와는 관계가 친근하더라도 존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지적 위계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존경과 존중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모두 폐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사회진보연대같은 곳에서는 "~씨"라는 존칭을 붙이는 것이 관행이기도 한데, 서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서적 관계가 증발된 너무 메마른 호칭으로 느껴집니다. 결국 나이, 직책의 위계가 아니라, 호혜-평등하고 우애로운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면서도, 그것이 관계의 무정부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되어야할 듯.)
그리고 이런 호칭 문제는 가족 안에서도 문제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익숙하게 쓰여지는 가족관계의 호칭들, 형수, 올케, 며느리 등등 주로 여성과 관련해서 쓰여지는 호칭에 문제가 많더군요. 예를 들어 '올케'는 '오라비의 겨집'이라는 것이 어원이고, '며느리'는 '내 아들에게 딸려 더부살이 하는 이'라는 식으로 편견이 반영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점 놀랍습니다. '집사람', '아내'와 같은 호칭이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부인'이라는 낱말도 문제가 있군요.(놀라움의 연속! 한편으로는 그럼 뭘로 칭해야하는지 오리무중.) 그래서 호칭을 변혁하는 문제, 대안을 만들어가는 문제가 가족 안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지적.
이런 호칭들을 바꾸자는 취지에서 여성단체가 진행하고 있는 켐페인입니다.
열악한 여성노동권
상담사례를 이야기하다가 나온 이야기들도 다소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결혼을 이유로 여성이 당연퇴직하도록 공공연하게 강요하는 회사가 많다는 겁니다. 잘 알려진 어느 유명 제약회사는 여성들이 결혼과 함께 퇴사하게 하는 데, 이런 식으로 매년 엄청난 여성이 강제로 해고된다는 것이죠. 또 다른 어느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있지만, 결혼을 이유로 하는 퇴직에 대해서 어쩌겠냐하는 반응이라고 하고 말이죠. 마치 80년대에 여성에 대해서 25세 정년 폐지 투쟁을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아직도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많은 여성들이 이런 것들을 여전히 '체념'하고 그만둔다는 것이고 싸울 엄두를 두지 못한다는 것. 상담을 했던 여성들의 경우에도 결국 사측의 회유, 압력이나 가족의 만류에 의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고, 적절하게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고 싸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죠.
특히 이런 종류의 상담이 노조보다는 여성단체에 가는 것같은데, 이는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신뢰가 가는 집단으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에 놀랐던 이유가, 노조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이런 일에 분노하고 뭔가 해보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소극적인 태도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을 텐데요, 여성들의 경우에는 더 나서기 힘든 조건이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나마 나서려고 해도 노조가 적절한 대안으로 생각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고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할지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한편, 제가 아래에 썼던 "우리은행, 그게 과연 '정규직화'일까"라는 포스트에서 주류여성운동들에 대해서 비판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연, 여노회 등이 우리은행의 조치가 가진 여성차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환영을 표하는 데 대해서 여성단체로서의 역할이라도 충실히하라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여성단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여성민우회같은 경우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제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성명]우리은행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박수는 시기상조) 싸잡아서 여성단체 비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되었다면 사과할 일입니다.
은폐와 부풀리기
마지막으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노조가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요, '은폐와 부풀리기'라는 평가가 있다고 합니다. 조직 내에서 발생한 문제인 경우에는 '은폐', 자본과의 관계에서나 다른 정파와 관련된 경우 '부풀리기'.
어느 경우에나 다른 조건에 대한 종속변수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이 투쟁 중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해당 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폭로'하고 '활용'하는 것도 좋게만 볼 수는 없다는 지적. 그것이 투쟁과정에서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으로 제기된다고 해도 여전히 가지는 한계가 있다는 점. 특히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은폐'하기 쉽상인 노조들이 말입니다. 이런 운동구조 속에 있는 저도 뭐라 말하기 힘든 일인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죠. 어려운 문제입니다.
매번의 사건들이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일반화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하나의 경향으로서, 그것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의 어떤 일을 보면서도 다시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성폭력 문제를 노조 내 정치와 연관시키면서 제기하는 일들을 보면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이번에는) 다른 또 한번조차도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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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끝나고 집에 오면서도 '정말 어려운 일들'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특히 남성의 입장에서는) 어렵기는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나가야할 문제들.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지속적으로 배워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가는 요즘입니다.
대우센터빌딩 투쟁이 해를 넘기고 있습니다.
28일,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진행할 '개관식', '점등식' 등 행사를 앞두고, 사측이 교섭을 요청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역시나 한때를 모면하기 위한 기만적인 행태라는 것이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역시, 자본가놈들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터럭만큼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군요.
△ 금호아시아나가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로고도 이렇게 바꾼 것이지요. 이 간판 점등식을 한다고 천막을 치워달라는 요구로 교섭을 하자고 했던 겁니다. 노조는 요구안의 핵심인 '일괄재계약'을 전제로 사측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사측은 24시간도 안되어서 말을 바꿉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날 28일 집회는 간단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 쓰려고 한 것은 이런 사정은 아니구요, 서울경인공공서비스노조(이제는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의 지부가 되었지만,)의 독특한 연대의 자세입니다.
집회가 끝나고 노조 집행부와 연대단위의 간담회가 진행되었습니다. 구권서 위원장 진행.
△ 노조사무실에서 진행된 연대단위간담회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이번 투쟁의 진행경과와 의미, 이후 전망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투쟁방향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아직까지 연대단위들과 이런 수준의 이야기를 나누는 투쟁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투쟁일정에 동원하거나 지원방안 정도를 논의하는 정도였지, 투쟁의 의미 등에 대해서 토론하고, 투쟁전망, 조직상황에 대해서 깊은 수준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은 보지 못했었습니다.
이번 투쟁에 많은 연대단위가 함께하고, 연대가 확장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이건 단순히 당일 설명회의 문제라기 보다는 연대의 자세의 문제일 겁니다. 연대를 위한 이런 '성의'는 이제까지 계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집회참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투쟁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과정.
특히 이 자리에는 학생동지들이 많이 있었는데, 학생동지들에게는 일종의 '교육'적인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 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물론 이렇게 연대하는 학생동지들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투쟁에 이렇게 열심히 연대하는 모습이 말이죠. 여기에 비하면 제가 학생운동을 할 때에는 '거창한' 정치적-정세적 목표가 있는 큰 집회에는 좀 나갔던 것같지만 이렇게 열악한 노동자들의 어려운 현장 투쟁에 연대한 경험은 별로 없다는 점에서 반성을 하게 됩니다.(사후적으로 반성하자면, 당시에는 '민중연대'의 의미를 너무 추상적으로, 정치적으로만 사고했던 것같습니다.)
이번 투쟁이 사측의 기만에 다시 한번 속은 셈이 되고 좀 더 길어질 전망입니다.(그렇다고 28일 당일 어떤 선택이 가능했을지는 고민입니다만..) 이런 속에서 연대의 힘은 계속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단지 연대단체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공유하고 자신들의 투쟁으로 만들어가는 이러한 과정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겠죠. 이번 투쟁의 주체들을 보면서 또 하나 중요하게 배우는 점입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세 개의 작품.
최근 개봉한 영화,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그리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를 꼭 보라는 친구의 소개(소개만 하지 말고 같이 봐줄 것이지, 쳇 ^^;)에 따라서 보려고 준비하다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작품을 아예 더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예전에 읽었고, 지난 홈페이지에 관련 글을 쓰기도 했다. 번번히 볼 기회를 놓쳐서 부끄럽게도 아직 보지 못했던 '랜드 앤 프리덤'은 이번에야 보게 되었다. (eMule 프로그램을 열 몇시간 돌린 끝에 겨우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 그래도 결국 파일을 다 받았으니 다행.)
1936년 스페인 :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영화포스터에 보이는 붉은 깃발에 쓰여진 POUM은 '통일노동자당'의 약호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자신도 이 당이 주도한 민병대에 참가했다고 밝히는 바로 그 당.
영화는 혁명을 지키려는 투쟁과, 그것이 소진되는 과정을 그린다. 파시스트와 전투에서 죽은 동지를 묻는 처음 장례식 장면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를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영원할 것이라는 결의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당(통일사회당PSUC)의 탄압으로 숨진 동료를 묻을 때, 부르는 'A las Barricadas'(To The Barricades)는 참담하다.
영화는 혁명의 교과서라고 할 만큼 명대사로 가득하다. 아래 몇가지는 꼭 인용하고 싶은 것들.
해방된 마을에서 토지를 집단경작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 마을에서 혁명을 계속할 것인지, 혹은 적당히 미봉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 한 늙은 농부가 말한다.
"혁명은 새끼 밴 암소와 같아서,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암소와 송아지까지 잃게되고, 아이들은 굶게 돼"
자본주의 외국들에게 경계심을 갖게해서는 안된다는 둥 갖가지 핑계로 '온건한' 조치를 요구하는 데 대한 간명한 답변이다. 혁명은 중단하는 순간 후퇴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손녀딸이 낭송하는 윌리엄 모리스의 시(詩).
전투에 참여하라
아무도 실패할 수 없다
육신은 쇠하고 죽어가더라도
그 행위들은 모두 남아
승리를 이룰 것이므로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국제적 연대가 이루어진 투쟁이었지만, 가장 더러운 배신이 망쳐놓은 투쟁이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자들(PSUC)는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민중을 관리하려하고 혁명을 압살했다. 전선에서 부르조아 군대와 같이 계급과 위계제를 다시 도입하고 여성을 밥짓는 일로 축출했다. 도시에서 경찰을 부활시키고 '통제'를 도입하며 노동자의 파업을 금지한다. 아나키스트-공산주의자들이 접수한 공공기관을 정부가 '관리'하기 위해서 병력을 투입했다.
베르나르라는 의용군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이봐, 민병대는 투쟁의 심장이라구. 스탈린은 우리를 두려워해. 서방세계와의 협정에 싸인하고 싶으니까. 이미 그렇게 했어. 프랑스와 협정을 맺었지. 협정에 싸인하기 위해서는 거부감을 없애고 우호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지. 그런데 우리와 우리의 혁명을 지원하면 신뢰를 잃게 되는 셈이야. 그게 우리가 스탈린을 비난하는 이유야."
실제 역사는 진행된 대로. 스탈린은 배신하고 히틀러는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게르니카에서의 학살(피카소).
주인공격인 데이빗(사실 이 영화에선 모두가 주인공이다)은 PSUC의 입장을 지지하는 영국공산당 당원증을 찢어버리면서 이렇게 편지에 말한다.
"스탈린은 노동 계급을 장기말 처럼 이용할 뿐이야.
팔아 먹고 이용해 먹고 희생시킬 장기말."
데이빗은 이렇게 해서 (지금의 우리들이 그런 것처럼) '당없는 공산주의자'(알튀세르)가 되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당운동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미리 보여주는 듯한 장면.
아이러니한 것은 21세기 지금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한편으로 스탈린을 용인하면서 한편으로 당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주체주의자)들은 어치피 죽어다 깨어나도 스탈린주의자들일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노동자 계급의 자발적 투쟁을 관리하려 들고, 협상하려드는 노조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당관료주의를 상징하는 스탈린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용인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혹은 그렇게 비판하는 주체주의자들(당관료주의)이나 노조관료주의와 자신들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감기(맹목)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은 곳곳에서 혁명을 질식시켰는데,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르주님의 블로그; "북한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으로 침묵하는 계급인가?" 를 읽어보자. 아래로부터 대중의 자발적 투쟁을 혐오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마드리드의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나, 평양의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나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영화에 삽입된 노래 중 'A las Barricadas' (가자! 바리케이트로)라는 곡은 폴란드 혁명가인 La Varsovienne (The Song of Warsaw)라는 곡을 스페인 무정부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개사해서 부른 노래다. 참세상 겨울잠프로 중 구닥다리노래창고 13회. "우리가 알고 모르는 번안가요들 1"에서도 소개와 함께 들을 수 있다. 김정환의 번안으로 메아리가 부르기도 했다.(새벽인가?) 암튼, 여기 링크를 따라가면 들을 수 있다.
가사가 이렇다. (Wikipedia 홈페이지에서 인용, 가사끝에 Confederation은 최대의 노동자조직-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이었던 CNT(전국노동자협회)를 뜻한다고 한다.)
△ '랜드 앤 프리덤'에 삽입된 곡
Black storms shake the sky
Black clouds blind us
Although death and pain await us
Against the enemy we must go
The most precious good is freedom
And we have to defend it
With courage and faith
Raise the revolutionary flag
Moving us forward with unstoppable triumph
(original: carrying the people to emancipation)
Working people march onwards to the battle
We have to smash the reaction (aries)
To the Barricades!
To the Barricades!
For the triumph
of the Confederation
1944년 스페인 :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감독은 비극적인 현실을, 판타지라는 양식을 통해서 예술적인 비극으로 형상화해낸다. 판타지라는 장르가 이렇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본 것도 놀라운 경험.
영화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이 거의 파시스트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 '랜드 앤 프리덤'에서부터 8년 후, 1944년. 역설적이게도 2차대전의 유럽전선에서 나치들은 패망했지만, 프랑코는 승리한다. 얄타협정이 냉전의 국경선을 획정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최종적인 배신.
그러나 여전히 민병대는 남아 '반군'이 되어 투쟁한다. 마을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이 '잘 훈련된 정예부대'로 대체하고자했던 그 사람들이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민병대를 살해하고 무장해제하던, 제복을 차려입은 그 '정예부대'는 다 어디에 갔단 말인가?)
(여기서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 내 블로그의 제목인 '겨울철쭉'은 '녹슬은 해방구'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아마도 1953~4년 겨울의 빨치산의 상황일 텐데, 혁명이 후퇴하고, 전투가 패배한 후, 그러나 여전히 투쟁하는 비극적인 상황. 이 영화의 민병대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비극일 수 있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체가 자기 스스로에게 떳떳하며, 숭고하기 때문이다.)
영화 첫장면, 해설이 끝나고 첫대사.
"대체 저 많은 책을 어쩔 셈이니! 오필리아"
오호! 이건 내가 책을 또 살 때마다 주변에서 나에게 하는 낯익은 잔소리다. 어쩌긴요, 하나하나 가장 소중한데다가, 언젠간 다 읽을 거랍니다. 그 속에서 모험이 시작되죠. 일단 오필리아, 나와 공감.
오필리아는 책에 나온 요정 이야기를 믿는다. 그래서 요정을 만나고, 미로 속에서 판Fauno을 만난다.(판Fauno는 마치 POUM같은 어감이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책의 이야기도 요정 이야기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렇다. 산속 반군들은 노동자, 인민이 평등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책에 나온 것을 보고 믿었는지는 확실치 않더라도, 그들은 산속에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반군과 함께하는 하녀 메르세테츠는 유일하게 오필리아를 믿어주는 사람이다. 그/녀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에는 전선이 그어져있다. 여기서 짧지만 빛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구절을 다시 생각해보자.
..오히려 그들이 그들 자신의 가상의 요구들에 부응하여 행동하고 그 결과들을 도출해내려고 집단적으로 시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中
이 영화에서도 오필리아는 슬픈 조건에 처하고, 우리에게 슬픈 감정을 불러오지만 그것은 '햄릿'에서의 오필리아와는 다르다. 오필리아는 이번에는 지극히 능동적이고, 자신의 죽음-희생도 스스로 선택한다. 따라서 그녀의 행동은 단지 슬픈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기쁜 정념'. 판타지와 현실 사이(사실 그 구분이 뭐 필요할까 싶지만)에서 슬프지만 기쁜, 기쁘지만 슬픈. 그래서 오필리아는 한편에서는 죽지만, 지하세계의 공주로 찬란하게 부활한다.
그래서 오필리아가 돌아가는 곳은 영화의 처음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 지하에서 그곳의 아버지는 말한다.
"일어나거라, 내딸아. 어서 오너라.
너는 다른자의 순결한 피를 희생하지 않고 너 자신의 피를 흘렸구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마지막 과제란다"
이 시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전략)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세상의 미래를 가장 먼저 이룩한다
그렇다 생애는 추락보다 멀고 깊다
그렇다 패배를 죽음에 비유한 것은 옳지 않았다
무엇이 또 다시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씨앗이 아니다 일어서는 것은
이미 이룩된 것이다, 일어서라
이룩된 것이 보다 찬란하게 일어선다"
- 김정환, '에필로그' 『하나의 二人舞와 세 개의 一人舞』(1993)
소련의 몰락으로 한 시대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것으로 생각된) 후 쓰여진 시에서 우리는 유사한 비극적 감성을 느낀다.
그녀는 운명 앞에서 자신에게 끝까지 당당하기 때문에 이것은 숭고한 비극이다. 마치, 최종적인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투쟁을 계속하는 반군들처럼 말이다.
오필리아는 그래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그리스 비극은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숭고한 정신을 형상화한다.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오필리아와 반군들에게도, 그리고 1953년 겨울의 빨치산과 80년 광주도청의 시민군에도 적용될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20세기의 패배 이후에도 투쟁하는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언젠가.)
오로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만이 죽음의 운명을 통해 도리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죽음보다 더 큰 정신의 크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146쪽)
..여기서 고귀함이란 자기의 탁월함을 실현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죽음의 시험 앞에 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80년 광주의 전사들처럼, 삶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선과 악이 싸우는 싸움터요, 때때로 그 싸움은 우리에게 의로움과 목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를 요구할 만큼 치열할 때가 있습니다. 트로이 성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생존을 버리고 덕을 선택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운명보다 더 크고 강한 정신의 힘을 보였습니다. 80년 광주도청을 마지막으로 지켰던 사람들도 그랬겠지요.(151쪽)
-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한길사 中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영화. '랜드 앤 프리덤'과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 둘 모두 그렇다. 현실과 영화 세계의 진정한 비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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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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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입니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던 문제점들을 아주 속 시원하게 정리해주셔서 눈이 탁 깨이는 느낌!!! 잘 배우고 갑니다 ^^ (음.. 저도 가서 읽어보고 좀 써야겠네요 ^^;)부가 정보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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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넘 멋져여! 이런 블로그 있었으면 진작에 좀 알려주구 그러지..부가 정보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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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선 겨울철쭉님의 용기 있고 진지한 주장에 많은 부분 공감하고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몇자 적습니다.겨울 님의 가장 주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이 평등한 권리를 찾아가는 것이 남성들의 권리를 빼앗는 어떤 행위는 아니라는 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데,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평등을 찾아 나가는 것이 남성들의 '특권'에 위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겨울 님이 남성들이 자신의 "기득권"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득권 내지 특권 포기의 이유가 그에 따르는 (남성에게만 주어지는) 의무들의 고통스러움으로부터 남성들 또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저에게는 조금 의문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반대로, 대부분의 남성들은 바로 그러한 의무들이 자신들의 특권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감내하고 또 그것들을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는 심지어 어떤 기쁨까지 누리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통을 누리면 누릴수록 더욱 더 값진 훈장이 되는 것이겠지요. 남성들이 자신의 군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을때, 작동하는 논리가 이것일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기쁨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가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기쁨이라면 다른 하나는 고통을 동반하는 기쁨이지요. 정신분석학에서는 전자를 쾌락(pleasure)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쾌락원칙을 넘어선 것으로서 주이상스(향락)(jouissance)라고 부르지요. 이때 겨울 님께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정확히 주이상스를 포기하고 쾌락을 추구하라, 왜냐하면 주이상스는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주이상스(=죽음충동)의 문제를 그냥 맹목점에 놔두는 방식일 수 있다는 점이 조금 문제인 듯 합니다. 남성주의적 남성들이 이러한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것도 나름대로는 원인이 있는 것이겠지요. 사실 이 문제는 마지막에 겨울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도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입니다. 즉, "여성들의 자기치유에 조차 욕설과 성폭력 언어를 가하는 잔인함이 당신들은 즐거운가?"라고 물을 때, 남성들이 "그렇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즐거움이 정확히 죽음충동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여성들이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남성들에게 어떤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할 때, 저는 과연 그런 것일까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군가산점 폐지 운동이 '운동'으로서는 실패했다고 말씀하실 때 과연 그것이 그렇게 쉽게 평가될 수 있을까 의문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싸움의 곤란은 여성들의 주장과 요구들이 사실은 남성에게 위협적이지 않은 것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여성들이 어떤 정세에서 사용하는 어떤 대항폭력들을 결국 비난하게 만드는 쪽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금 위험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즉 여성들의 투쟁을 비폭력으로 제한하게 만드는 쪽으로 말입니다. 물론 대항폭력의 도착이라는 문제와 우리가 대결해야 하지만, 이는 대항폭력의 전도로서 비폭력으로 나아감으로써 해결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군대 그 자체에 대해서 너무 쉽게 그런 것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실 때도, 한 편으로 그러한 주장을 이해 못할 것 같지는 않지만 다른 한 편으로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 그런지....그렇게 쉬운지...
사실 겨울님도 이런 생각들을 속으로 이미 하고 계실 수도 있고, 게시판에 개입하기 위한 전술의 차원에서 위와 같은 주장을 하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여기 쓴 건, 사실 그냥 우리끼리의 이야기지요.^^ 저도 게시판에 개입했다면 겨울님과 같은 방식으로 말하기 쉬웠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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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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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밀리오/ 하하, 그런데 여러가지 쟁점이 많죠. 최원님이 올려주신 것처럼 말입니다.나우/ 그래도 게시판 분위기에 좀이라도 도움되었다면 다행. 신년회 한번 해얄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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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안녕하세요, 출국은 잘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 말씀하신 것처럼, 일단 마초들이 나서서 분탕질하는 게시판 분위기에서 '남성으로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사실 쓸데없이 군대이야기를 끼워 넣은 것도 그런 이유이구요..) 썼기 때문에 과잉되거나 쟁점을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사실, 저도 남성들이 가진 권력이라는 것이 (비록 그것이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부담을 준다고 하더라도) '권력'자체만큼 그 권력이나 혹은 권력을 차별적으로 배분하는 체계를 폐지한다고 할 때 남성들도 더 행복해진다고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배타적으로 소유되는 권력인 이유, 유혹인 이유가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것이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말이죠.) 권력을 폐지하는 것을 통해서 남성들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러한 권력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해질만큼' 남성들이 문명화되어야할 텐데, 그건 권력을 폐지한다는 것과 동어반복일 수도 있겠죠.
'더 행복한'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쟁점을 전위하는 개입이 필요하지 않을까합니다. 그것이 주이상스에 대한 문제제기가 되어야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다만 여성적인 주이상스에 대해서는 다른 것이 있는 지 모르겠는데, 그 부분은 제가 잘 몰라서 더 이야기하기 힘들군요)
또한 지적하신 것처럼, 여성들의 요구가 남성들에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만' 사실일 겁니다. (제 글에서 과도하게 강조된 측면이 있죠.) 다만 고민은 운동전략의 측면에서는 '권리들의 제로섬 게임'으로 드러날 경우 적대적 모순으로밖에 귀결되지 않을까하는 우려입니다. 노자 대립과도 또 다른 측면일 텐데요, 이런 과정 속에서 여성들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남성들의 개조를 요구하는 과정이 어떤 식으로든 함께 진행되어야하는 것같고.. 그래서 순수한 요구투쟁과 같은 방식만은 아닐 것같습니다. 부르조아를 교육시켜서 '교양있는 붉은 부르조아'를 만든다는 것은 무망하겠지만 이 경우에는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할 텐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가 더 고려되어야할 것같습니다.
논쟁에 개입하다보면 과잉되거나 과소하게 되고, 의도적인 단순화가 발생하는데, 논쟁에서 정치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항상 좀 '오버'하게 되는데, 이번에도 좀 그런 케이스였던 듯.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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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을 달다 보니 자꾸 수정을 하게 되는군요^^)예 덕분에 잘 날아왔습니다.^^ 밤낮이 바뀌어서 한참 고생하다 이틀전부터 어느정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말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겨울철쭉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고, 어려운 지점이 분명한데, 성적 차이가 특수한 인종들 간의 인종전쟁인양 표상되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오히려 성적 차이는 남성적인 성적 공동체와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 성 혹은 초역설적 계급으로서 여성 간의 적대로 표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점에서는 계급투쟁과도 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지요. 많은 경우 페미니즘이 마르크스주의를 비난하면서도 결국 투쟁의 모델을 마르크스주의에서 빌려가는 것은 이 때문일텐데, 계급투쟁도 두 외재적 집단 간의 인종전쟁일 수 없으며 '노동의 구체성'에 의해 으깨어진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특수계급이 아닌 보편계급으로서, 혹은 "계급-비계급"으로서 표상하면서 투쟁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이것이 실패할 때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동일성/정체성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가 발생하게 되겠지요--이것은 얼마전에 서관모 선생이 말씀하신 부분인데...). 성적 차이와 계급적대를 구별하는 것은 아마도 성적 차이는 계급적대처럼 폐지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아마도 말씀하신 성차화된 "권리들"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 같고요. 하지만 이러한 성차화된 권리란 또한 '여성 자신들 사이의 차이들의 권리들'이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여성을 어떤 공동체로 만들지 않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약간 사변적인 맛이 있지만 정식화시키자면, 아마도 (두 외재적 집단으로서의)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제로섬 게임"이라는 표상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비공동체적인 어떤 것으로 형상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공동체, 즉 민족 공동체의 해체라는 문제와 그 핵심적 국가장치의 해체라는 문제(특히 가족의 전화)를 우회할 수 없겠지요. (군대문제와 같은 경우, 아마도 그것의 단순한 파괴라기 보다는 그것의 변혁 내지 전화라는 문제를 제기해야 할텐데, 이것이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면 여성들의 군입대도 장차 미래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사실은 작금에 터져나오고 있는 모병제보다는 훨씬 나은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병제를 하게 되면 결국 군에 지원입대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지요. 기본적으로 민족 내 평등주의 마저 파괴되어 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또 다른 한 편 그것은 대중들 자신으로부터 무장력을 철수하는 시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지극히 반동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시 아마도 겨울님께서 대부분 이미 생각하고 계신 것을 바보처럼 중언부언한 것 같다는 우려가 갑자기 뇌리를!^^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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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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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말씀하신 부분 중에서 특히 "초역설적 계급으로서 여성 간의 적대"라는 개념으로 새로운 고민을 던져주시는군요. 여성이 남성 중심의 사고, 정신분석에서 사고-분석불가능한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저도 그런 한계에 묶여 있는 셈인데, 흠흠.다만, 군대의 경우에는 '전화'가 가능한지는 솔직히 좀 의문이긴 합니다. 물론 폭력을 '제도화'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겠지만, 그것을 철폐하는 사회운동을 더 밀고 나가는 것과 관련성은 더 생각해봐야겠네요. (혹은 인민의 무장이라는 관념과. 그러나, 현재의 군대는 말 그대로 파괴되어야할 국가장치의 1번이라는 점에서 전화-변혁은 불가능하다는 생각 ^^;)
ㅎㅎ 무엇보다 고민하지 못한 많은 부분에 대한 코멘트 감사드려요. 정말 그렇게도 사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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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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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현재의 군대"를 유지하자는 말은 전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지역-국제적 군사적 긴장들을 낮추는 초민족적인 대중운동들이 성공적으로 출현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통해 평화를 위한, 혹은 차라리 시빌리테를 위한 국제적인 제도들 및 대항제도들이 세워진다면 그 속에서 군의 성격은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어쨌든 폭력에 맞서는 우리의 투쟁이 (수단뿐만 아니라) 그 목표에 있어서도 '비폭력'을 추구할 수는 없기 때문에, 폭력과 무장력의 필요성은 단순히 부인될 수 없으며 따라서 군대의 단순한 파괴라라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현재의 군대가 파괴되고 그것을 대체할 어떤 모종의 "인민의 군대"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군대인 것이지요. 그것이 현재의 군대와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될 수 있는가, 말하자면 더 이상 장치가 아닌 장치 자체를 파괴하는 '반-장치'가 될 수 있는가는 그냥 '인민의'라는 수식어를 붙여준다고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닐테고요. 오히려 그러한 수식어는 그것이 행하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맹목점에 가져다 놓기 쉽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것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사실 당이라는 것이 밟아간 길도 이런 것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인민의 군대는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를 우리가 논할 수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도 군대의 변혁 내지 전화의 요점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단순히 그것의 파괴를 주장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날까 합니다. 생각해보면 맑스나 레닌이나 이런 사람들도 군대가 어떤 식으로 변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또 그 원칙들을 천명했었지요(소환제 등등). 물론 이들의 시도가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말이지요. 아 참 그리고 초역설적 계급으로서 여성간의 "적대(antagonism)"라기 보다는 아마 "갈등"(agonism)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번에 사회운동 책 속의 책에서도 그 개념이 상당히 중심적으로 나왔던데... 저도 겨울철쭉님 글들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과정에 개입하시고 있는 부분은 예전부터 매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힘내십시요!부가 정보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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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군입대 문제가 나와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예전에 어떤 영화에선가(아마도 랜드 앤 프리덤이 아니었던가 싶은데 아닐수도 있습니다) 여성동지들이 총을 드니까 남성 간부인지가 밥이나 하라는 식으로 굴던 장면이 떠오르는군요.부가 정보
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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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초기의 붉은군대도 그렇고 '랜드 앤 프리덤'에 나오는 의용군도 그런데, 장교를 병사들이 선출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여성도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등 부르조아군대와는 전혀 다른 조직원리를 가졌다는 것이 생각나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반폭력의 입장에서 군대를 사고한다고 할 때, 특히 그것은 군대 자체의 맹목에 대해서도 반대할 수 있어야한다고 할 때 무엇을 사고해야할지를 제기해주셨는데, 중요한 문제일 것같습니다. (다만 그것이 현재의 군대의 파괴라기 보다는 현재의 군대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개량시켜야한다는 식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이죠.) 또한 그것은 변혁조직에서 '반-장치'를 실현하는 문제와도 어떤 면에서는 관련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더욱 현재적인 고민이기도 합니다.(물론 더 고민이 필요한 ^^;) 고맙습니다.부가 정보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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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개량'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사실 붉은 군대 등에서 부르주아 군대와 매우 다른 원칙을 기초로 조직하려고 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초기 시도가 왜 실패했는지, 왜 다시 부르주아 군대와 유사한 것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면, 이게 단순히 군대 내부에만 어떤 다른 원리를 각인하면 되는 문제인가(직접민주주의적인)하는 것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을 둘러싼 다른 물질적 조건들의 문제가 동시에 변화되지 않으면 군대의 급진적(^^) 전화라는 것을 사고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폭력의 초민족적 사회운동의 성공적인 출현 및 경계지대(borderland)에 시빌리테의 제도, 대항제도들의 구축이 굉장히 중요한 조건을 이룬다고 생각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철쭉님과 제가 아마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비슷한 부분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나저나 저번에 박하순 님 모친상이라 경황이 없어서 안부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행복한 결혼생활하고 계시죠? 8년정도 기두리다가 저희는 덜컥 아기까지 낳아버렸는데, 어려움도 많지만 기쁨이 더 많습니다. 어쨌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부가 정보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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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참 사족같지만... 위에서 약간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저도 제대로 눈치를 못챘었고), 제가 "초역설적 계급으로서 여성들 간의 적대"라고 말한 것의 원래 문장은 "오히려 성적 차이는 남성적 성적 공동체와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 성 혹은 초역설적 계급으로서 여성 간의 적대로 표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였습니다. 여기서 "적대"란 여성간의 적대가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남성과 (비공동체로서의) 여성간의 적대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초역설적 계급으로서의 여성간의 차이는 오히려 "갈등" 개념에 어울린다는 것이었고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문장을 간명하게 쓰지 못하다 보니 생긴 오해였던 것 같습니다.부가 정보
미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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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는 남성과 동등하게 대접받으려 하면서 왜 의무는 남성과 동등하게 지지않고 남녀에 차이 운운하는 모순된게 우리나라의 어설픈 꼴통 페미니즘 이다. 권리는 남성중심의 사고방식 전통에서 부정하고 벗어나게 해 남성과 동등하게 지려하는데 의무는 남성중심의 사고방식과 전통은 긍정하며 그걸 그대로 이어가려 하는것 이런게 바로 모순이란 것이다. 출산은 선택이고 군대는 의무다. 생리는 생물학적인 여성의 특징이고 군대는 사회적 으로 한국남성 들에게만 부담되는 특징중 하나이다. 이걸 명심해야 할것이다. 케네디 前미국 대통령 말처럼 한국의 여성들은 "조국이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지 바라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수있는지 물어라."라고 말해야 할것이다. 대체 한국 여성이 의무적 으로 의무적 으로 국가와 조국을 위해 기여하는게 대체 뭐가있을까?...부가 정보
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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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여성이 가진 권리와 의무의 불균등에 대해서 심하게 편향적인 분이시군요. 남성들은 항상 '군대' 이야기만 하는데 그걸 제외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회적 모순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 알리바이로 사용하는건데, 정작 군대가 싫으면 그걸 거부하는 투쟁을 해야지 대신 그걸 여성을 공격하는데만 쓴다는 것이죠. 일관성이 전혀 없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