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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05
    중얼중얼(2)
    루냐
  2. 2007/10/04
    네팔, 희망을 말하다! _여성환경연대
    루냐
  3. 2007/10/04
    free! free! Burma!
    루냐
  4. 2007/09/30
    계피(5)
    루냐
  5. 2007/08/27
    가을 밤, 너에게(8)
    루냐
  6. 2007/08/15
    롤플레잉(8)
    루냐
  7. 2007/07/24
    소월 시 <가는 길>(7)
    루냐
  8. 2007/07/20
    [펌] 이랜드 파업농성과 민주화 20년의 한국사회(2)
    루냐
  9. 2007/07/11
    어느 수요일 밤(2)
    루냐
  10. 2007/07/02
    shame on me(6)
    루냐

중얼중얼

이맘때 학교 안은 학교 밖보다 더 춥다. 덕분에 주말 내내 공부도 안 하고 감기로 골골골. 회사는 이제 정말 그만 나와야지. 손이 시렵다. 입술이 튼다. 입 안에 난 혹은 여전하다. 아빠의 문자를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린다. 나도 아빠도 똑같이 애다. 혼자서 병원을 찾아갔을 모습을 상상하니 안쓰럽다. 우울하다. 서울우유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들의 요구는 너무 소박한데 회사는 들어주지 않는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 회사의 압박 때문에 초과적재까지 해가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기사들이 생각난다. 내가 마셔온 우유들은 맛있는 척, 신선한 척, 1등급인 척, 몸에 좋은 척을 해왔구나. 벌써 이 일로 두 사람이 죽었다. 회사는 더 많은 사람들의 숨통을 지긋이 누르고 있다. TV는 안 봐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문은 그들의 죽음과 요구에 너무 조용한 것 같다. 참세상에서 찍은 투쟁 모습이 생경하다. 사람들은 이런 것과 너무 상관없이 살고 있으니까. 누가 자꾸 우리 등을 미는 걸까. 옆을 둘러볼 새도 없이, 연대의 손을 내밀 틈도 주지 않고(하긴 같은 회사 동료와도 연대하기가 쉬운가?), 자기 밥벌이만도 버거워 헉헉대며 살아가게 만든 걸까. 그렇게 바빠도 어차피 가난할 텐데, 돈을 이미 가진 사람들의 돈굴리기는 쉬워지고, 노동해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갈수록 팍팍해질 텐데...... 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회사도 가지 않고, 이제 시간이 잔뜩 생겼는데, 다시 학교에 갇혀 일본어 문장이나 외우고 있다. 이런 내가 가끔씩 한심해 보이고, 이것이 공부일까, 싶기도 하다. 자본에 이용당하지 않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해봤지만, 그 말은 11월의 스산한 바람 한 줄기와 다르지 않았다. 내일은 또 무엇을 할까,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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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희망을 말하다! _여성환경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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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free! Burma!

계피

추석연휴를 며칠 앞둔 9월 어느 날이었다. 일거리는 마치 씹다 뱉은 껌처럼 책상과 머릿속에 눌어붙어 퇴근하려는 내 뒤통수를 끈덕지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단호히 칼퇴근을 해버렸다. 집에 일찍 가는데도 기분이 개운치 않아 이나영의 사진이 붙어 있는 빵집에 갔다. 그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UFO 빵'이 있다. 어리석고 소용 없는 생각이지만, UFO 빵은 UFO라서 왠지 힘이 난다. 지구의 평화로운 종말을 기도하며 빵을 씹을 것이다. 나만 들을 수 있는 내 머릿속 카세트에서는 "날아와 머리 위로~" 하고 패닉의 노래가 흘러나올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빵을 사러 간 건데 옆에 있는 작은 빵이 눈에 들어왔다. 계피가루 범벅이 된 작은 만주. 같이 샀다. 빈 집에 들어가 이불에 기대고 앉아서 빵을 먹었다. 계피향이 참 좋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아빠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환상이라기보단 우리 아빠가 대단한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로서는 그냥 견학을 다녀왔을 뿐인데, 난 그때 우리 아빠가 엄청 대단한 일을 하느라고 독일도 가고 일본도 가는 줄 알았다. 아빠가 독일을 다녀온 어느 날, 무거운 빵을 사왔다. 엄마는 그게 계피빵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입 베어 물고는 "이게 무슨 '빵'이야? 퉤퉤퉤" 하고 말았다. 그건 빵이라기보단 한약을 뭉쳐놓은 것 같았다.

 

그땐 그렇게 싫었는데, 난 지금 계피가 참 좋다. 그리고 계피향을 맡으면 반드시 그 고약한 맛의 계피빵이 생각난다. 계피빵은 자연스럽게 아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계피향은 좋지만 아빠는 싫었고 지금도 나와는 안 맞는 사람인데, 그 둘의 관계는 긴밀하다. 아마 그때까지도 그가 그 자신이 되기보다는 '우리 아빠' 라는 신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계피빵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때 내가 그를 '내가 원하는 이미지대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아빠를 인격적으로 알 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 며칠 뒤면 추석이었고 아빠는 혼자 할머니댁에 가거나, 텅 빈 집에 혼자 있거나 할 것이었다. 아빠한테 갈 용기도 없고 대면하려면 더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계피향 덕분에 그냥 잠시 그를 생각할 뿐이었다. 어느새 일에 대한 걱정이나 다른 생각은 다 잊어버린 채,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빵을 천천히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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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 너에게

스무 살에 서로 알게 된 우리는 이제 스물다섯이었다.


이십대의 정점, 스물다섯의 정점에 선 우리는, 우리의 삶은

피곤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생각만큼 흥미진진하거나 열정적이지 않았다.

뭐든 닥치면 잘할 것 같았지만, 사실 닥쳐보니 깨지고 치이느라 잘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깨달은 건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이었고,

바뀐 것이라면 어느 정도는 포기할 줄 아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타협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입은 너무 쓰고 텁텁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환하게 웃어주고 싶었는데, 미안했다.


나도 지쳐있었다. 피곤했다.

열정을 끌어모으기엔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애착이 부족했다.

내가 정말 만들고 싶은 책을 낸다면, 그땐 열정이 솟아날까?

어쨌든 쉬고 싶었다. 너를 만나 어깨에 기대고, 한없이 온기를 느끼며 쉬고 싶었다.

너도 피곤했고, 나도 피곤했고,

우리는 젖은 날개를 바닥에 펼쳐놓고 입으로는 괴로움을 토해냈다.


배를 채우고,

길로 나왔다.


길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고, 우리는 일찍 들어가 쉬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졌으면서도

그렇게 우리가 함께 걷는 그 길이 향기롭다고 느꼈다.

어디선가 향기처럼 트럼펫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컴컴한 고궁에서 올려다보이는 산도

그 고궁을 몇백 년을 지키고 살아왔을 나무도

노오란 나트륨등도

우리와 함께 트럼펫 소리를 즐기고 있었다.


골목 어두운 구석에 앉아 트럼펫을 부는 아저씨에 대한 호기심과

그 분이 만들어내는 따뜻하고 정감어린 소리가

우리를 벤치에 앉게 만들었다.


우리는 드디어 쉼을 얻었다.

치이고 차이고 쓰러지고 눈물나던

연약한 우리는.



이제 우리는 다시 흩어져, 각자 생활을 시작하겠고

점점 그 밤의 향기와 온기는 멀어지겠지만,

나는 너와 함께한 그 길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2006.09.18.)

.

+) 친구가 요즘 힘들다. 그러던 차에 내가 일 년 전에 미니홈피에 올려놓은 이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고 했다. 끝이 없는 우리 사춘기 덕분에 녀석은 이 글을 다시 본 이 날도 눈물이 날 뻔했다고 했다. 나도 찾아서 다시 읽어보고, 일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나란히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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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플레잉

벌써 1년 반이나 이 역할을 해왔지만 나는 뭔가 강요받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롤플레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그러니까 루냐,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모습을 나에게 강요하는 게 아닌 거다

일요일 밤마다 내일 아침에 쓰고 나갈 익명의 직장인의 탈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그냥 루냐는 지금 편집자 역할을 맡았으며, 정성껏, 가끔은 지겨울 만큼 루냐를 쏟아부어서

가장 편집자다운 사람이 되면 그뿐이다

 

이 역할만 평생 할 가능성은 낮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거니

그냥 지금,에 나의 100%를 쏟아버리자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나의 살아 있음을 위해서

.

.

+)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이대로 사는 것의 차이는 일단 접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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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 시 <가는 길>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

/

/

: 보채거나 조르거나 자꾸 생각할수록 괴롭고 피곤해지는 건 나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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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랜드 파업농성과 민주화 20년의 한국사회

이랜드 파업농성과 민주화 20년의 한국사회  


노중기 | 한신대 교수

이랜드 여성노동자들의 홈에버, 뉴코아 매장 점거농성투쟁이 전국에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육아와 가사노동 부담까지 이중으로 짊어진 40대 주부노동자들이 절규하고 있다. 비정규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의 이른바 '비정규노동자 보호법안'이 시행된 첫날, 바로 그 '보호법안'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보호법안'이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일방적인 대규모 정리해고, 외주 용역화로 나타나는 기만적인 현실을 고발하는 저항의 함성이었다.

그들은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하루 여섯시간 이상 서서 정신없이 바코드를 찍고 쉴새없이 손님들을 상대하는 댓가로 80만원도 안되는 임금을 받았다. 또 몇년 이상 같은 직장에서 일했지만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리 목숨 같은 신세를 면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보는 대로 헌법에 명시된 노동기본권을 요구하면 당장 공권력 투입, 구속수배가 떨어지는 노예노동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천민자본, 종교재벌 이랜드 사주가 십일조 헌금으로 교회에 내는 130억 원의 돈에는 그들의 땀과 고통, 그리고 직업병이 모두 담겨 있었다.      

지금 이 분노와 함성은 사실 이랜드 노동자들만의 목소리는 아닐 것이다. 지금 이랜드 노동자의 투쟁은 우리 사회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는 875만 비정규노동자들의 고난에 찬 삶과 분노를 대변한다.  

'비정규직 보호법안' 과연 누구를 보호하는가

비정규노동자들의 저항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노무현정부 이래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이 목숨으로 그 현실을 고발한 바 있었다. 약 먹고 목 매달고 분신하여 저항한 노동자들이 여럿이었다. 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민주정부의 감옥에 갇혔으며, 포항 건설노조의 비정규노동자, 하중근 열사처럼 싸우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노동자도 있었다. 또 삭발투쟁, 농성, 삼보일배, 거리시위 등 온갖 방법으로 500일이 넘게 싸우고 있는 KTX, 새마을호 여승무원 해고노동자들은 비정규 현실의 살아 있는 증거이다. 이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30여명이 서울역 앞 땡볕 아래에서 단식농성중이다.

민주화 20년인 2007년, 한국사회에 과연 민주주의가 존재하는가? 노무현정부의 자화자찬, '참여민주주의'는 도대체 어디쯤에 와 있는가? 그 잘난 '민주화 개혁세력'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과 투쟁에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쉬운 답이 들어 있다. 이랜드 투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현재를 포착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비친 참여민주주의 현주소

먼저 이랜드 투쟁의 도화선이 된 소위 '비정규노동자 보호법안'을 만든 노동부장관은 1987년 민주화투쟁의 주역이었고 지금 민주화유공자이다. 그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엄혹한 노동탄압에 항거한 몇 안되는 인권변호사였고 1987년에는 5공정권의 노동자 탄압에 저항하다 구속된 이력까지 갖고 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재판에서는 구속된 파업노동자들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훌륭한 최후변론으로 주위를 감동시킨 뛰어난 노동전문가였다.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불법과 좌경'으로 몰아치던 노태우·김영삼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불법쟁의'의 실체적 정당성을 설파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민주화된 지금 이랜드 노동자들을 향해 '법과 원칙' 운위하며 '불법파업에 대한 공권력투입' 협박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랜드 사태의 최고책임자는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노동자들의 표를 모아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도 장관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권변호사이자 노동전문가, 민주화투사였다. 또 구로동맹파업의 여파로 구속된 창원의 통일중공업 노조위원장을 변론한 것도 닮은꼴이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파업선동으로 구속되고 노태우정권의 노동자 탄압에 대해 변호사이자 국회의원으로 이른바 '불법'의 실체적 정당성을 주장했던 것까지 꼭 같다. 다만 훨씬 달변이어서 말이 많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랜드 파업에 대해 어떤 말을 할지 너무도 궁금하지만 도통 말이 없다.

그 시절의 민주화투사들은 어디로 갔나

요컨대 가장 대표적인 민주화투사, 노동인권 전문가들이 국회의원,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 비정규노동자들을 불법으로 몰고 탄압하는 현실, 그것이 민주화 20년 한국의 민주주의이다. 또 이것이 대선을 앞두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이른바 '386들'이나 '대선주자들'이 요란하게 외치는 '민주개혁세력' 구호의 실체인 것이다. 그 '민주와 개혁'은 노동자, 특히 비정규노동자에게는 선거 때만 쓰이는 편리한 물건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구속되어도 오불관언이며 국가권력이 노동자를 때려죽여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민주와 개혁'이 도통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비정규노동자들, 그것도 가장 온건하고 힘없는 주부 여성노동자들이 자기들을 보호해준다는 '보호법안'에 구속을 불사하고 온몸으로 항거하는 현실이 오늘 우리의 민주주의이다. 이 웃지도 못할 코미디 같은 일은 참여민주주의와 법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장관과 대통령과 386 민주개혁세력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말이다. 정당성을 가진 민주정부의 합법적인 권력행사 아니냐고.

당신들의 민주주의

비정규노동자들은 이랜드 파업, KTX 투쟁으로 이미 대답했다.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 파리 목숨의 고용불안, 그리고 노동기본권에 대한 국가폭력을 용인하는 그런 민주주의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이다. 또 비정규 노동을 더욱 확산시킬 악법을 '보호법률'로 왜곡하여 강제하는 그런 민주주의는 투쟁으로 거부한다고 답한 것이다. 나아가 전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구정당과 힘을 합해서 한미FTA, 이라크파병, 사립학교법 개악과 노동법 개악을 '합법적으로' 밀어붙이는 그 잘난 '민주와 개혁세력'은 더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외친다. 이 땅의 절반이 넘는 국민인 노동자, 그중에서도 비정규노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당신들의 민주주의일 뿐이다'

2007.7.17 ⓒ 노중기
.
+) 우울한 소식들에 한숨이 절로 난다. 쌓인 일들도 못 다 해치우기에 책상 앞에 앉은 나는 무력하기 짝이 없지만, 클릭 몇 번으로 퍼나르기라도...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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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요일 밤

네가 우리집에 온다고 해서 너를 만나기 세 시간 전부터 마음은 벌써 회사에서 집까지 왔다갔다 왕복 3회. 평소의 나답지 않게 20분 간격으로 시계를 확인하가 네가 온다는 9시보다 조금 일찍 정거장으로 향하네. 너는 버스에서 짠- 하고 내리는 대신 전화로 짠- 하고 강남에서 이제 출발해,라고 말하네. 우웅- 50분을 기다려야 했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고 버스 정거장 앞에 있는 문 닫은 약국 앞에 쭈그려 앉네. 앉아서 책을 읽다가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다가, 목과 팔에 달라붙는 모기를 쳐내며 다시 책을 읽네. 예쁘게 차려 입은 너는 어엿한 느낌으로 버스에서 내리네. 너의 이름을 부르는데 좀처럼 웃어지지 않았네. 너에게 좀 더 환하게 다가가고 싶었는데, 끈적한 팔에 달라붙던 모기에 대한 짜증이 너에게로 옮아갔네. 미안해, 미안해. 좀 더 환하게 웃어주고 싶었는데. 내가 있는 곳과는 많이 다른 세상에 사는 너의 이야기를 듣네. 참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다 마주앉은 우리. 막걸리가 담긴 뽀얀 그릇을 부딪치고 파전을 찢어주네.

네가 나에게 늘어놓듯, 나도 하염없이 내 진심을 말하고 싶었네. 그게 내 진심인지 확신할 수 없어 그냥 너의 얘기를 듣고만 있네. 고개를 주억거리고 털털한 척 큰소리로 맞장구도 쳐보고 타박도 하네. 그래도 목구멍 안쪽이 막힌 것만 같아 막걸리를 들이켜보네. 마시고 마시고 편의점에 들러 집으로 향하는 길, 비척거리는 네 개의 다리가 골목길을 지나네. 이불 위에 누워 이야기하다가 먼저 잠든 너를 보고 나도 돌아눕네. 그날만은 뱉어버리고 싶었던 알량한 진심을 입에 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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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디로 _이적

 

+) 몇 주 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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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e on me

그냥.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머리와 입으로는 약자를 짓밟은 '거물들의 횡포'와 '구조적 문제'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당장 생활 속에서 맞닥뜨리는 소소한 일들에 대해 

내 행동의 키를 어떻게 잡아야 좋을지 모를 때가 있다.

그저 순수하게 옳다고 생각한 대로 움직이기엔,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따지고 있어서

때로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참으로 얄팍하고 알량하고 역겹다.

.

내가 부끄럽다. 그러나 그렇게 순간적으로 행동의 키를 돌렸던 건,

그것이 나의 무의식에서 나온,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일 게다.
.

마음속에서 '불쌍한 인간아, 그게 너야, 그게 너야' 하는 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다.

.

하지만 부끄럽다고 자괴감에 빠지진 말아야겠지. 그냥, 이렇게 답해야겠지.
'나도 알아. 그것도 나야, 그것도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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