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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1/26
    무화과
  2. 2005/11/25
    대한민국의 국시는 국익(1)
    무화과
  3. 2005/11/23
    용서받지못한자(스포일러있음)(2)
    무화과
  4. 2005/11/13
    업보
    무화과
  5. 2005/11/13
    집회에 가기 싫은 이유(4)
    무화과
  6. 2005/11/08
    11월
    무화과
  7. 2005/11/05
    사이
    무화과
  8. 2005/11/02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
    무화과
  9. 2005/10/31
    현실도피(1)
    무화과
  10. 2005/10/30
    길-만남과 단절
    무화과

한 잔의 술병의 알코올이

내몸에 흡수되면서

나른한 기분과 함께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옛 상처의 기억들

그래도 가지말라고 가지말라고

내가 붙잡았던 기억들 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 얼굴들

 

취한 밤 꿈속에서 만나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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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시는 국익

한 때 대한민국의 국시가 반공이었다고 한다.

그런 암울한 세상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음을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시는 무엇일까?

아마도 '국익'이 아닐까 싶다.

 

대체 이 놈의 '국익'앞에서는 모든것의 판단 기준은 하나로 통일된다.

국익에 부합하는 것은 선이고 국익을 헤치는 것은 악이다.

순수한 과학영역의 연구도(이런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국제법을 어겨가며 벌이는 전쟁도

운동선수 개개인의 영달을 위한 플레이도

모든 가치는 국익의 잣대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그곳에서는 언론은 국익을 위해서는 때로는 진실을 외면해야하고

국익을 위해서는 잘못된 전쟁인줄 알면서도 참여해야 한다.

그곳에서는 국가의 이익보다 앞서는 가치는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도, 인권도, 진실도 국익을 고려해야만 한다.

 

대체 국가의 이익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이익이 나의 이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누군가가 명확히 설명해주면 좋겠다.

이라크파병으로 내가 어떤 이익을 본건지, 황우석의 연구성과로 내가 어떤 이익을 본건지.

그나마 한국 사람이 스포츠경기에서 잘하면 잘 아는 얼굴이니 반갑기는 하더라만...

 

국가의 이익이 종교처럼 번지는 이세상에 한마디만 해주고 싶다.

우리는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국가의 이익에 대한 고려보다는 지구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해야한다고.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보다, 그리고 그 어떤 나라보다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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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못한자(스포일러있음)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나 너무 익숙한 풍경

 

난 군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내 주변에도 군대를 경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군대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대부분이니

사회속의 나의 인간관계에서 난 군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고, 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색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이미 내가 살고 있는 공간도 군대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군대보다 물리적 폭력은 덜 할 수 있고, 그 외의 여러 문제점들도

군대보다는 덜 하겠지만 말이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사회는 군대처럼

무식하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군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무감각하게 살아가게 만든다는데 있다.

이미 무감각하게 우리에게 습득되어있는 삶의 방식과 모양새들이

군대와 관련없는 그 누군가도 군대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삶의 관계도 그랬다. 신병을 가지고 장난치는 고참들

그리고 그 고참들보다는 낮은 계급이지만 이른바 짬밥좀 먹은 중간고참들.

예비역 선배들이 새내기하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과 신병하나 가지고

고참들이 "누가 더 잘생겼냐"며 장난치는 모습은 군대와 대학이

거울처럼 서로를 확인하는 슬픈 장면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중간정도의 짬밥을 먹은 학번으로 소극적인 비판자이자

가해자로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때로는 선배들에게 편승하고

때로는 선배들을 비판하면서... 

 

이제 군대를 거부하는 평화운동을 하고 있지만,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나에게도 분명 군대의 모습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너무도 익숙한 군대의 모습은 예비역들이 술자리에서 군대얘기를 하도 많이해서

만은 아닌 것이다.

 

참을수 없는 모욕감,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나의 인내심과 무너지는 인격

 

어리버리한 '지훈'을 가지고 놀면서 지훈의 성기를 만지는 고참.

'나에게 반말을 해대면서 내 성기를 만지려는 고참 앞에서는, 헌법도 군법도

유엔의 인권선언서도 사문화되고 만다'는 책의 한구절이 비로소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서 절실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병장이

편지를 빼앗가 사람들 앞에서 읽어내려가며 비아냥거리는 장면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인공 승영과 공유했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 외람된 말일지로 모르겠지만

그런 모욕감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욕감이 견딜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보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승영이 서서히 그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적응시켜

가는 모습.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것에 굴복하고 순응하고, 적극적 가담자가 되어

가는 것만큼은 그 어떤 육체적 정신적 모욕감보다 힘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아내는 자신의 인내심이 수치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 질서의 적극적 행위자가 되었을 때, 과연 그 인격이 입은 상처와

남들에게 입힌 상처는 누가 치유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가해자로,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의 무서움

 

승영은 군대의 폭력적인 질서에 의해 상처받는 피해자였다. 사실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누구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중간은 없다. 피해자로써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적극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피해받지 않기 때문에 저항의 필요성이 없는 사람이며, 가해자들을 폭력을 침묵으로서 방관하고 혹은 동조하는

다른 방식의 가해자일 뿐이다. 이 끔찍한 이분법은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구조의 문제를 눈감고 그 구조에 가담할 수 밖에 없다.

한 번 그 구조에 가담한 후에는 이왕 가담한 바에야 그 안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고민하게 되고 그러던 한 순간 적극적 가해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극적인 구조를 더욱 피비린내 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군대라는 공간은 그 거대한 구조의 폭력과 비겁한 개인들이 행사하는 물리적인 폭력이 동시에 재생산되는 곳이다. 승영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어쩔수 없었다고 누군가 말해주길 바란다.

이 영화가 군대이야기이자 한국사회의 단면이고 어쩌면 세상의 거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폭력의 최대치인 국가폭력이 합법적으로 용인된 군대가 '폭력의 재생산'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존재라는 것은 지당하다. 하지만 너무도 흡사하게 폭력의 재생산이 우리사회에서 기능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의 가해자인 아버지를 죽이는 세상, 이스라엘의 분리장벽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자살테러(용어가 맘에 들진 않지만), 김일병의 총기난사사건...

거대한 폭력의 구조에서 한 개인은 너무 미약하다...

 

아마도 병역거부는, 그리고 세상의 너무 당연한 것들을 자신의 신념으로 거부하는 일은

미약한 개인이 거대한 폭력의 구조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자 최소한의 방어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폭력의 구조는 때로는 개인들의 신념과 인격을 무참히 뭉게버리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복무하지 않는 어떠한 권력과 구조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많은 폭력을 거부하고 더 많은 비폭력행동이 늘어날 때, 폭력의 구조가 우리에게 강요한 모든것을 거부할 수 있을 때, 아마도 혁명은 가능할 것이다.

나약한 모든 개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권력도 권위도, 심지어 신도 없다는 것이 내가 가지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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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

예전에 썼던 글들을 보면서 속으로 조용히 울고있다.

그 당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준 상처로 나조차도 아파하고 힘들어했던

기억들과 느낌들이 글을 읽고 있으니 다시 생각이 났다.

지금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내 마음도 치유하고

그 글속에서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과도 잘지내고 있지만

아마도 그 아픈 기억은 내 평생동안 잊을 수 없는

깊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겼고

내 인생은 그로부터 그 때의 업보와 그때를 계기로 깨닫게 된

이전의 업보들을 갚아나가게 되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난 그 업보를 짊어지고 갈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상처가 더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더라도

그 짐은 벗을 수 없을거 같다.

업보를 벗게 될 때는... 나의 사랑이 이루어질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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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 가기 싫은 이유

물론 집회가기 싫은 이유만 있는것은 아니다.

가고싶은 이유도 있고 가야하는 이유도 있다.

그래서 난 가는 집회도 있고 안가는 집회도 있다.

때문에 오늘 노동자대회에 다녀와서 적는 이 글은

오늘 느낀점들, 사실은 항상 느낀점을 적는 것이지만

이 글에 적지 않는 이유들로 인해 결국에는

집회에 참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집회는 꽤 규모가 큰 집회들이다.

 

대학교에 입학하고나서 호기심과 설레임과 놀라움으로

경험했던 몇번의 집회 참가이후 사실 거의 대부분의 집회는

가야하지만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다.

 

첫번째로 집회는 너무 시끄럽다.

거대한 엠프소리는 나처럼 목이 약한 사람에게는

굉장한 부담이다. 집회에서는 애써 목청껏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옆사람과 이야기만 해도 난 목이 아프다.

지하철 5호선보다 집회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힘들다.

물론 때와 사안에 따라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거대한 엠프소리가 때와 사안에

따라서 준비되는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혹 그럴 필요가 있는

집회라 할지라도 엠프 소리 조금 덜 크다고 해서 집중도가 떨어지거나

집회에 모인사람들의 힘이 덜 모이는 것은 아닐텐데.

 

두번째로 아무곳에서나 피워대는 담배연기와

아무곳에나 버려지는 담배꽁초

사실 운동권만큼 비흡연자들을 배려하고 생각하지 않는 집단은 드물다.

하다못해 프로야구장에 가더라도 하늘이 훤히 보이는 공간이라도

공적인 장소는 금연구역으로 정해져있다. 물론 그런 법적 규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집회장에서는 평소에 길을 걸을때에

비해 담배연기를 맡게되는 가능성이 엄청 높다.

비흡연자들은 금연석과 흡연석이 나누어진 피씨방보다 집회장에서

보다 많은 원치않는 간접흡연에 노출된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버려진

담배꽁초는 때로는 내 바지의 엉덩이를 무참히 공격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미없다.

이 이유때문에 집회의 참석은 해야할 일이 되고 하고싶은 일과는 점점 멀어진다.

매번 똑같은 아저씨들이 똑같은 말투로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에 정말이지

재미가 없다. 오히려 규모가 작고 확실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집회는

즐거운 분위기는 아닐 수 있어도, 집회에 집중할 수 있지만.

거대한 규모의 집회는 정말이지 무언가 집회를 즐길수가 없다.

 

거대한 소리는 사라지고 작고 아기자기한 각각의 목소리들의 합주와

담배연기 사방에서 뿜어져나와 바람의 방향이 어느쪽을 향하더라도

간접흡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언제쯤이면 겪지 않을 수 있을까.

재미없더라도 위의 두 가지 만이라도 해결된다면 정말이지

집회에 참여하는 부담감이 절반을 줄어들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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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예전에 학생회선거때의 생각이 갑자기 났었는데

집에 돌아와 친구와 채팅을 하던중 지금이 바로 그 학생회 선거철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고, 갑자기 2002년의 기억들이 차분하게 밀려들어온다.

 

참 열심히였고, 열정적이었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일순위.

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좋았던 기억이 아니라

아쉬움의 기억이다. 물론 선거자체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지만...

 

어쨋든 날이 그렇게 춥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덧 따뜻함에 신경을 써야하는(디자인에도 신경을 써야하는)

선본옷을 입고 다녔던 기억들.

지난 상처들이 아물어 가는 과정속에서 아마도 상처와 더불어

학생운동의 기억들은 차츰 닫혀진 상처속에서 희미해져 갔나보다.

 

23살의 그때와 이제 곧 27살이 되고 다시 세상과 만나는 28살

고등학교 졸업 후 그때까지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이 더 많아지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너무 가시투성이어서

나와 내 주변사람들이 가시에 다치기도 했었고,

지나친 확신으로 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난 11월의 추억들이

길거리를 뒤덮은 은행잎들과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 사이로

불쑥 불쑥 아픈 사랑의 기억을 한껏 후비고 지나간다.

오늘밤에도 잠은 오지만, 눕지를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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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무엇과 무엇사이에서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사랑과 우정사이라는 노래가사도 있듯이 사랑과 우정의 사이에서

서로 상처받지 않고도 최선의 관계를 맺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비단 사랑과 우정사이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관계가 이러한 끌고 당김의 긴장관계 속에서

이루어 진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무작정 가까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브레이크 없는 관계의 밀착화는 때로는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개인적으로 여유로울 수 있는 혼자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싶어하고

또 모두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어한다.

이 둘은 항상 시소처럼 감정의 엇갈린 굴곡을 그리면서도

각 각의 한 쪽이 너무 쳐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적절한 거리와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않다.

 

감옥을 앞둔 요새 내 모습이 이 적절한 거리를 찾아 방황하고 있는 형상이다.

때로는 수감기간을 홀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생각도 깊게 해 볼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하고 보다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야겠다

다짐도 하면서 주위사람들을 대할때도 보다 나에 집중함으로써 사람들과의

관계에 신경쓰지 않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두려운 수감생활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을 기대하며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싶어하고, 이런 생각들이 그대로 행동에 반영이 되어

요새들어 괜히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더 심하게 놀리기도 하고,

삐뚤어진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마음의 적절한 거리와 긴장관계의 함수는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그 사이에는 무엇이 들어가야하는지.

생각하는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사이에... 무엇이 필요한지...

사이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생각보다 세상살기가 쉽지만은 않다.

고 생각하는 사이와 세상과 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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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지 아니한 기다림

모든 기다림은 즐겁다.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만남을 준비하고 상상하며 여러가지 계획들을

세우고 다시 세우다 보면 대체 달력이나 시계따위가 눈에 들어올 일이 없다.

 

계획된 만남과 기다림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고 기다리는 것이다.

옛 애인을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우리는 그 만남을 기다리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과 아련한 마음은

우리가 그러한 만남을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렇듯 삶은 기다리는 재미로 이어진다.

오히려 '헤어짐'을 예약하는 '만남'보다

'만남'을 준비하는 '기다림'이 더 즐거운 법이다.

 

그런데 지금 난 그다지 즐겁지 아니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

어제 집에 들어오니 등기가 와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오늘 12시에서 2시사이에 다시 온다는 메모...

나에게 집으로 올 등기는 '입영영장'

 

처음받아보는 입영영장도 아니고,

갑작스레 날라온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이미 병역거부를 하기로 마음먹은지도 오래,

여러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내면서

나름대로의 준비도 오랫동안 해왔다.

그리고 난 나의 병역거부가 그다지 슬픈일이거나

안타까운일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뜻대로 살아가는 일만큼 즐거운 것은 없고,

그럴 수 있는 사람만큼 축복받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다.

사무실에 일찍 나가려고 했는데 그걸 기다리느라고 못나간것도 싫고,

내 삶의 즐거움인 기다림이 이럴수도 있다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도

 

국가가 나에게 강제적인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

 

물론 국가라는 것이 내 삶에 강요하는 것이 징병뿐이겠냐만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강요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즐겁겠는가.

 

그래도 난 즐겁게 살아갈거다.

어떠한 거대한 권력집단이 아무리 나에게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을 강요하여도

난 나름대로 즐거운 기다림들을 상상하고 만끽하며 살거다.

 

친구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눈과 목도리와 호빵(이미 나와버렸지만), 그리고 겨울을 기다리며,

옛 연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의 새롭고 향긋한 만남들을 기다리며,

 

살다보면,

달력넘어가는 소리도 시계바늘 소리도,

무엇보다도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따위는

신경쓸 겨를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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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도피

언제부터인가 콧물이 훌쩍훌쩍 멈추지 않는다.

또 언제부터인가 생전 앓아본적 없던 두통이 끊기지 않는다.

학원에서 너무 많은 담배연기를 마셔서인지 목도 마치 수술하기 전처럼 아프다.

음식은 먹어도 포만감은 없고 속은 울렁거리며 다시 배만 고파진다.

몸의 컨디션이 매우 안좋다.

 

더불어 기분도 매우 안좋다.

이럴 때는 기분에 덩달아 몸도 더 안좋아진다.

신경성일까. 사고가 났던 무릎과 어깨가 아프다고 갑자기 느낀다.

 

이런 기분. 몇 번 경험해봤다.

무언가 나의 의도대로 일이 안풀리거나,

나의 단점들과 너무 적나라하게 마주할 때 느꼈던 기분이다.

 

나에게 일이 안풀린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다.

이를테면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지 않는다고 해서 일이 안풀린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면 그건 일이 안풀리는 거다.

 

이번 겨울에 감옥에 가겠구나 하고 인식한 이후로,

그리고 수감이라는 것이 나의 육신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으로

내 상상이상으로 힘들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이후로

이상하게 나의 단점들이 마구 마구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안하던 행동을 하는 것처럼 생겨나기 시작한다.

 

빨리 탈출하고 싶다.

예전의 경험을 빌어 물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탈출하고 싶다.

 

방법은 모른다.

다만 잠시나마 아픈머리를 식히고 머릿속의 복잡한 그리고 쓸모없는

생각들을 묻어두기 위해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

 

자전거가 현실도피의 도구인 것이다.

그래도, 기껏해야 잠깐의 도피인것을 알지만,

난 사실은 강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도피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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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만남과 단절

길을 좋아한다.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길은 아무렇게나 나지 않는다.

길은 마을과 마을을, 땅과 하늘을, 나무와 바람을

모두 고려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때문에 길은 하나로 길게 뻗어가면서 서로 교차하여 만난다.

 

길은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길은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길만 있는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다른 짐승들이 다니기도 하고,

짐승들이 다니는 길은 바람이 다니기도 한다.

 

길은 이동하기 위한 도구이고,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길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만나고

이웃과 이웃이 교류할 수 있게된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은 소통과 만남을 위한 것이고 그래야 한다.

 

그런데 차가 다니는 길은 그렇지 않다.

그 길은 단절의 길이고 죽음의 길이다.

그 길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아니 어쩌면 육중한 무게와 시끄러운 소음으로

무장한 자동차에게만 유용한 길이다.

 

강화도의 아름다운 산이 자동차가 넘어가는 길로 완벽하게 두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산의 이쪽과 저쪽은 허리가 자리워진

처량한 모습으로 나의 눈앞에 다가왔다.

내가 사랑하는 길들은 이쪽과 저쪽이 연결된다고 해서

다른 이쪽과 저쪽이 단절되지 않는다.

이쪽방향의 만남과 저쪽방향의 만남 그리하여 모든 방향의 만남이

항상 교차하는, 그래서 모든 길은 일직선이면서 또한 교차로다.

 

그러나 그 차도는 오로지 자동차들의 이동을 위한 이쪽과 저쪽의

완벽한 단절을 이루어냈다. 매끄럽게 일자로 뻗은 길은 그 길의

매끄러움  만큼이나 너무도 완벽하게 깔끔하고 소름돋는

단절을 만들어내고 그 길이 만큼이나 그 단절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오로지 자동차들의 그 속의 인간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자연의 길, 야생의 길에서의 죽음은 삶의 연속이고

생태계의 순환이다. 초식동물들이 육식동물들에게 잡아먹히더라도

길은 결코 불평등하지 않다. 육식동물은 길위에서 죽어서 초식동물이

먹는 풀들의 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를 위한 길은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을 잉태한다.

추구하는 것은 자동차가 좀 더 빠르게 가기 위한 속도이고

잃는 것은 인간과 함께 그 길을 사용하던 많은 것들의 죽음과

떄로는 인간의 죽음이다.

 

자연의 길위에서 죽어가는 것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자동차의 길위에서 죽는 것은 죽임 당하는 것이다.

 

만남과 소통을 위한 아름다운 길이 죽음과 단절의

아스팔트로 씨꺼멓게 변해있엇다. 그것이 강화도에서 본

가장 슬픈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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