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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2/18
    싸가지 없는 놈(2)
    무화과
  2. 2005/12/18
    농민들의 죽음
    무화과
  3. 2005/12/15
    미안해요(7)
    무화과
  4. 2005/12/15
    길, 길2-자전거
    무화과
  5. 2005/12/08
    과학이 종교가 되는 순간(1)
    무화과
  6. 2005/11/30
    잃어버린 편지, 잊혀져갈 기억
    무화과
  7. 2005/11/28
    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병역거부소견서)(2)
    무화과
  8. 2005/11/26
    무화과
  9. 2005/11/25
    대한민국의 국시는 국익(1)
    무화과
  10. 2005/11/23
    용서받지못한자(스포일러있음)(2)
    무화과

싸가지 없는 놈

연말이라서 여러가지 모임들이 많이 있다.

쉬고싶은 마음 산타클로스가 기겁할 만큼 길다란 굴뚝이지만

그래도 술자리 거절 못하는 인생이라 이곳 저곳 참여하다보니

피곤하다.

그런데 사실 몸보다 더 피곤한건 따로있다.

예전에 학교다닐때 내가 몸을 담았던 여러부류의 사람들...

오랫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하지만, 오랫만에 만나서 난감하기도 하다.

요사이 이런 저런 송년모임에서 유독

 

"싸가지 없는 놈"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싸가지 없다... 생각해보니 이런 이야기 여러번 들었다.

진짜로 내가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을 정도로 싸가지가 없나?

음... 나의 인간관계를 둘러보건데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래서 사전을 찾아봤다.

 

싸가지[명사]싹수 방언.

 

그래서 또 싹수를 찾아봤다.
 

싹―수 [―쑤] [명사] 앞으로 잘 트일 만한 낌새나 징조. ¶ 싹수가 없다

 

음... 사회적인 의미는 국어사전과는 약간 다르구나...

 

어쨋든 내가 선배들에게 싸가지 없다고 이야기듣는 것은

바로 예의가 없다 는 것이다.

 

예의라... 아마도 그 선배들이 지키고자 하는 예의는

내가 생각하는 예의랑은 사뭇 다르다.

난 선후배간의 예의를 지키기 이전에

인간으로써 서로간의 예의를 비켜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그 선배들의 예의는

A라는 남자선배와 B라는 여자후배가 결혼하면 나는 B를 형수라고 불러야하는 것이고

저럴테면 나의 예의는

B는 B로서 나에게 의미있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난 앞으로도 선배들에게 선배라는 이유로 예의 바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또한 그 선배들이 나의 후배라고 인식해버리는 친구들에게 선배에 대한

예의를 요구할 생각도 전혀없다.

 

여전히 싸가지 없게 살아갈 것이다.

 

대신에 난 그 누군가와 인간으로서 예의를 지키고 싶다.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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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죽음

전용철이 죽었다. 홍덕표가 죽었다.

난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그리고 난 그들이 삶이 어떤지 잘 모른다.

내가 경험한 농촌의 삶이란 김남주의 시와

대학시절의 농활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이 여의도에서 경찰에 맞아죽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한 평생을 땅에서 살아온 그들이 죽어 돌아갈 곳은

그들이 태어나고 그들의 부모를 여의고 그들의 자식을 낳았던

바로 그 땅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안다.

그들이 거듭되는 흉년에 굶어죽을 수는 있어도,

돌림병이나 자연재해에 죽을 수는 있어도,

시꺼먼 아스팔트 위에서

아스팔트보다 더 시꺼먼 피멍이 들어가며

생전 처음보는 젊은이들의 방패와 군홧발에

죽어야하는 그런 삶은 아니라는 것을

 

어차피 살아있는 모든것은 죽는 법.

그 죽음은 사라짐이나 소멸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특히나 땅에서 살아오고 땅에서 목숨을 부쳐온 농민들은

특히나 파괴에 익숙치 않고 국가폭력에는 더더욱 익숙치 않은 농민들은

특히나 지구와 더불어 인간종의 생명을 지켜온 농민들은

 

죽음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그곳,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이,

노무현 정부의 허준영 경찰청장이

노무현 정부의 허준영 청장의 이종두 지휘관이

그리고 검은 모자 검은 장갑 검은구두의 전투 경찰이

인권경찰이 민중의 지팡이가

 

땅으로 돌아가야할 그들의 삶을 시꺼먼 아스팔트 위에서

 

소.멸.해. 버렸다.

 

농민들을 아스팔트 위에서 국가공권력이 죽이는 일만큼

죄스러운 일은 없다. 그것은 실정법의 위반일 뿐더러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며,

인간 삶에 대한 예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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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비정규직으로 취직한

선배는 주를 번갈아 맞교대로 8시부터 8시까지

12시간을 일하고서 100만원을 채 못받는다.

나는 일주일에 세 번 5주동안 15번 논술학원에 가서

5000원짜리 밥을 시켜면으면서도 250만원이 넘는

돈을 받는다. 필요 이상의 너무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일하는 것 이상의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본 슬로브핫의 딸들.

YMCA의 여성회원들은 회원의 60%에 달하고

자원활동의 90%를 차지하면서도 투표권이 없어서

남성이사들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남성'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한 번도 나의 성별 때문에

피해를 입어본 적이 없는 나는 여성들에 비해 이미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환태형의 원폭60년, 그리고... 를 봤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원폭피해자의 문제.

지난해 여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난 대체 무엇을 보고

돌아온 것일까. 역사적 사실이 그저 머리속에 머물른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직까지 진행되는 고통의

역사를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최고의 악이라는

핵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비해,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도 좋은 몸과 환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돌아오라 자이툰, 미안해요 이라크

별음자리와 돕헤드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노래라기 보다는 하나의 절규이고 읍소였다.

광화문네거리는 겨울을 넘어서 이미 연말의 분위기에

나무마다 전등을 달고 한껏 취해있었고,

추위마저도 온통의 네온사인과 크리스마스 장식에

발딛을 틈이 없었다. 과연 이라크의 연말도 이러할까.

미안해요 이라크.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도, 아직도 더 가지기위해 아둥바둥하는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미안해요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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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길2-자전거

 

어느덧 집을 나선 발걸음은 

10분을 접어들고 있다.

혼자걷는 발걸음.

길은 빙판길 계속되는 한파로

좀처럼 녹지 않는다

 

언제까지인가 혼자 걷기싫던 시절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걸었던 길들을

이젠 너무익숙해진 혼자걷는 길 사이로

 

얼굴을 스치고 마음을 흔들고  불어오는 바람

내 마음을 아파해준 소녀의 눈물

 

사이로

 

가끔씩의 외로움

 

 

 

길2-자전거

 

정말이지 오랫만에 한겨울 칼바람에 맞서

자전거를 끌고 용감하게 나섰다.

 

짜증스럽고, 우울하고, 찌뿌둥했던

요새의 기분을 던져버리려

타고나선 겨울길의 서울도심에서

 

내몸속의 찌거기들은 칼바람에 에이는

상처사이로 모두 빠져나갔지만,

내가 찾고자했던 애초의 것들은

 

찾을수 없어서 헤매이었던 겨울길

내 친구 자전거와 함께 잃어버린 길

미열과 함께 불쑥 다가온 피로가

나에게 속삭인다.

'추억을 기억하지말고 그대로 놔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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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종교가 되는 순간

무위님의 [난 대한민국이 점점 더 무섭다.] 에 관련된 글.

정말이지 대한민국이 무섭다.

 

이라크 파병이 결정났을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파병은 되었고, 우리들은 어찌보면 패배했지만,

그래도 파병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월드컵때도 이정도로 무섭지는 않았다.

물론 붉은악마의 광풍이 거세었지만,

'태극전사'가 영웅이 되고 히딩크가 구세주가 되었지만,

붉은 악마의 응원을 단지 국가주의적인 감성만으로 볼 수

없었기에, 분명 거리에세 축제를 벌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황우석의 연구를 둘러싼 한국의 상황은

나를 너무 무섭게 한다. 어쩌면 그 공포는

노무현 정권이 쏘아대는 물대포와 전경들의 방패날보다도 무섭다.

그것은 거대한 권력을 지닌 국가가 가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PD수첩을 폐지시키는 네티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그것이 거짓 과장된 속임수라도, 이런 속임수가 통하는 것이 무섭다.

PD수첩이 취재윤리를 위반해서 욕먹는 것보다,

황우석에게 덤볐기에 페지당하는 것이,

그것도 박정희 같은 독재자가 국가권력으로 폐지 하는 것이 아니기 떄문에

더더욱 공포는 소름과 온몸의 털을 하늘로 향하게 한다.

 

국가에 의해서 언론이 통제당하면 국가에 맞서 싸우면되지만

인민에 의해서 언론이 통제당하면 무엇을 해야하나...

 

진정 무서운 것은 황우석도, 배아줄기세포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이다. 그냥 사람들...

 

과학이 국익이라는 교리를 만나서 종교가 되는 순간에 나는 살고 있다.

 

국익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으니 이번에는

과학과 종교이야기나 해보련다.

기본적으로 난 과학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고,

어찌보면 종교적인 영성이나 이런 것에는 오히려 우호적인 사람이다.

난 윤회를 믿고 있고, 과학적인 방식보다는 비과학적인 방식을 좋아한다.

한국의 고등학교 식으로 나누자면 철저하게 난 문과형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솔직히 황우석의 연구에 대한 논란은 아무리 봐도

내용에 대해서는 뭐가뭔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가 아무리 모르고 싫어하더라도 과학의 영역이 있고

종교의 영역이 있으며, 각각은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황우석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건, 사모하건, 존경하건 그건 내 알바 아니다.

난 황우석보다 이나영이 더 좋고, 이상은을 더 사모하며, 홍세화을 더 존경한다.

남들이 이나영을 싫어해도 상관없으며, 홍세화를 비판해도 그다지 큰 상과이 없고,

이상은을 좋아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분위기는 황우석을 존경하라고 강요하는 분위기이며,

사랑을 넘어서 집착을 요구한다.

 

이건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일들이다. 물론 어쩌다

개인에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런 절대적인 사랑을 누군가에게

쏟아붓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개인적일 뿐 절대 사회적 관계는 아니다.

황우석신드롬은 사실상 종교적인 믿음에 위치하고 있다.

황우석은 그가 원하든 원치않든 간에 이미 절대자의 위치에 놓여있고,

많은 신도들이 국익이라는 교리를 설파하며, '믿지 않는 자 구원받지 못하리라'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사회에서 매장하려 하고 있다.

 

세상에, 그 어떤 제대로 된 종교도 믿지않는 자를 구원하려고 하지

매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절대자인 신들은 대게가 마음이 넓어서

자신을 해꼬지 하는 어리석은 인간들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론 황우석 신드롬은 종교가 아니기에 그런 넓은 마음까지는 가질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종교가 아니라면, 종교처럼 절대적으로 믿으면 안된다.

믿음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아니 남에게 강요는 커녕

자기 자신도 맹목적으로 믿으면 안된다.

오히려 끈임없이 의심하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더더욱 과학의 영역이라면.

 

종교는 믿음으로서 진리를 탐구하지만,

과학은 의심으로서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종교가 되는 순간, 의심해야 할 것들을 맹목적으로 믿는 순간,

맹목적인 믿음이 그 대상을 인간의 영역으로 향하는 순간,

인류역사에서 반복되어온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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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편지, 잊혀져갈 기억

그동안의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게 가장 소중한 편지 하나가 없어진걸.

지난달엔가 그 편지를 읽었었는데

그리고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다.

있을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나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청소하는 도중에 종이 쓰레기 틈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모른다.. 모른다.

 

아...

이렇게 예전의 기억들은 닳고 애달픈 모습으로 잊혀져 가는구나

편지가 사라지듯이

편지를 통해 기억되었던 사람들과 사람들과 추억들도

아마 편지가 사라졌듯이

어느순간엔가 잊혀져 있을 것이고

난 잊혀진 기억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고 그 새로운것들도 언젠가는 잊혀져 갈것이다.

 

슬픈 기억들...

 

편지를 찾게되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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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병역거부소견서)

 

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평화가 나에게 왔습니다. 아주 조용조용하게. 아주 사뿐사뿐하게. 그것은 겨울날 얼굴을 에는 찬바람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빠르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한 여름 푹푹찌는 더위 속에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처럼 갑작스레 오지도 않았습니다. 평화는 한 겨울 이겨낸 새싹이 돋아나듯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평화는 빨갛게 봉숭아물 든 손톱이 자라나 붉은 반달을 이루듯, 아주 익숙한 속도로 나와 만났습니다. 내가 평화는 만나는 과정이 바로 ‘평화’ 였습니다.


 평화를 알게 되고 병역거부를 결심한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를 결심하면서부터 평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역거부는 저에게 있어서 어떤 커다란 사건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저마다 삶에서 중요시하는 가치가 다르고 그 가치를 지켜가는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의 대답은 항상 정리된 논리라기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미래에 무엇이 되느냐는 그것이 추구해야할 대상이 아니고, 현재의 나의 삶을 가꾸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의 신념은 미래의 모습을 그려나가기 위해 것이라기보다는 현재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위한 것입니다. 제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살아가는 것’ 그 자체로 가꾸어가고 증명하는 것이 바로 저의 병역거부입니다.


 물론 저에게 있어서 이런 의미를 가지는 병역거부지만, 저의 병역거부가 사회와 만났을 때, 더 많은 의미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마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의미를 부여했을 때, 이 세상에 다가서는 몸부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과 사람들이 저의 양심과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저의 병역거부를 특별한 것으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신념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논리정연한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몸과 삶의 태도 속에 습관으로 각인되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병역거부를 통해서 사람들이 가졌으면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강함을 항상 과시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보호해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배려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 다른 이를 약한 자로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온갖 폭력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국가와 국가, 그리고 인간이 만드는 모든 형태의 공동체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형성한 가장 거대한 조직인 국가가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강한 군대를 과시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속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거대한 만큼,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합법적인 폭력의 권한을 군대에 부여함으로써 인류의 많은 비극들은 발생했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오만함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강하지 않은 수많은 인류는 희생당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병역거부는 우리 인간이 약하고 미흡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구성원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파괴의 신이 아니라 생명과 창조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일 뿐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미흡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억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약함을 서로 보완해주기 위해서 함께 모여서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 강함을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애써 남을 위협하거나 과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그런 곳에 들어갈 힘을 돌려 서로의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을 것입니다.


 부족하기에, 저는 저의 삶이 다른 생명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삶은 물론 제 스스로 일궈온 것이지만, 제가 만나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저의 보잘것없는 양심이라는 것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의 삶이 저의 삶과 완벽하게 분리되어있다면 지금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이 지구생명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의 피와 살로부터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전제로 살아온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저 또한 다른 생명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고, 제 삶을 위한 희생을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을 요구하고 제가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최대한의 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너무 많은 것을 받았으며, 앞으로 갚아야 할 것들에 비해 인생은 짧게만 느껴집니다. 낭비할 시간도 없는 마당에 제 것을 내놓기는커녕 내가 살기위해 남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군대라는 것은 제가 살기위해서 남을 죽이는 곳입니다. 저는 제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그 곳에 할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은 늘어나고, 갚을 시간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무서운 것은, 내 마음 속에 겸손한 보은의 감정대신에 뻔뻔한 자기 합리화의 배은망덕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병역거부는 저의 삶을 지켜가는 최소한의 방어이자, 사회와 소통하며 평화를 퍼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실천입니다. 저는 입영영장을 받고 비로소 병역거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제 부족함을 깨닫고 사람들과 부족함을 나누어 평화를 만들면서 이미 병역거부자가 되었고, 또 출소한 이후에도 계속 병역거부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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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술병의 알코올이

내몸에 흡수되면서

나른한 기분과 함께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옛 상처의 기억들

그래도 가지말라고 가지말라고

내가 붙잡았던 기억들 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 얼굴들

 

취한 밤 꿈속에서 만나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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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시는 국익

한 때 대한민국의 국시가 반공이었다고 한다.

그런 암울한 세상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음을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시는 무엇일까?

아마도 '국익'이 아닐까 싶다.

 

대체 이 놈의 '국익'앞에서는 모든것의 판단 기준은 하나로 통일된다.

국익에 부합하는 것은 선이고 국익을 헤치는 것은 악이다.

순수한 과학영역의 연구도(이런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국제법을 어겨가며 벌이는 전쟁도

운동선수 개개인의 영달을 위한 플레이도

모든 가치는 국익의 잣대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그곳에서는 언론은 국익을 위해서는 때로는 진실을 외면해야하고

국익을 위해서는 잘못된 전쟁인줄 알면서도 참여해야 한다.

그곳에서는 국가의 이익보다 앞서는 가치는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도, 인권도, 진실도 국익을 고려해야만 한다.

 

대체 국가의 이익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이익이 나의 이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누군가가 명확히 설명해주면 좋겠다.

이라크파병으로 내가 어떤 이익을 본건지, 황우석의 연구성과로 내가 어떤 이익을 본건지.

그나마 한국 사람이 스포츠경기에서 잘하면 잘 아는 얼굴이니 반갑기는 하더라만...

 

국가의 이익이 종교처럼 번지는 이세상에 한마디만 해주고 싶다.

우리는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국가의 이익에 대한 고려보다는 지구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해야한다고.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보다, 그리고 그 어떤 나라보다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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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못한자(스포일러있음)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나 너무 익숙한 풍경

 

난 군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내 주변에도 군대를 경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군대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대부분이니

사회속의 나의 인간관계에서 난 군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고, 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색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이미 내가 살고 있는 공간도 군대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군대보다 물리적 폭력은 덜 할 수 있고, 그 외의 여러 문제점들도

군대보다는 덜 하겠지만 말이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사회는 군대처럼

무식하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군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무감각하게 살아가게 만든다는데 있다.

이미 무감각하게 우리에게 습득되어있는 삶의 방식과 모양새들이

군대와 관련없는 그 누군가도 군대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삶의 관계도 그랬다. 신병을 가지고 장난치는 고참들

그리고 그 고참들보다는 낮은 계급이지만 이른바 짬밥좀 먹은 중간고참들.

예비역 선배들이 새내기하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과 신병하나 가지고

고참들이 "누가 더 잘생겼냐"며 장난치는 모습은 군대와 대학이

거울처럼 서로를 확인하는 슬픈 장면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중간정도의 짬밥을 먹은 학번으로 소극적인 비판자이자

가해자로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때로는 선배들에게 편승하고

때로는 선배들을 비판하면서... 

 

이제 군대를 거부하는 평화운동을 하고 있지만,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나에게도 분명 군대의 모습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너무도 익숙한 군대의 모습은 예비역들이 술자리에서 군대얘기를 하도 많이해서

만은 아닌 것이다.

 

참을수 없는 모욕감,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나의 인내심과 무너지는 인격

 

어리버리한 '지훈'을 가지고 놀면서 지훈의 성기를 만지는 고참.

'나에게 반말을 해대면서 내 성기를 만지려는 고참 앞에서는, 헌법도 군법도

유엔의 인권선언서도 사문화되고 만다'는 책의 한구절이 비로소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서 절실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병장이

편지를 빼앗가 사람들 앞에서 읽어내려가며 비아냥거리는 장면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인공 승영과 공유했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 외람된 말일지로 모르겠지만

그런 모욕감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욕감이 견딜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보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승영이 서서히 그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적응시켜

가는 모습.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것에 굴복하고 순응하고, 적극적 가담자가 되어

가는 것만큼은 그 어떤 육체적 정신적 모욕감보다 힘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아내는 자신의 인내심이 수치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 질서의 적극적 행위자가 되었을 때, 과연 그 인격이 입은 상처와

남들에게 입힌 상처는 누가 치유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가해자로,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의 무서움

 

승영은 군대의 폭력적인 질서에 의해 상처받는 피해자였다. 사실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누구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중간은 없다. 피해자로써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적극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피해받지 않기 때문에 저항의 필요성이 없는 사람이며, 가해자들을 폭력을 침묵으로서 방관하고 혹은 동조하는

다른 방식의 가해자일 뿐이다. 이 끔찍한 이분법은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구조의 문제를 눈감고 그 구조에 가담할 수 밖에 없다.

한 번 그 구조에 가담한 후에는 이왕 가담한 바에야 그 안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고민하게 되고 그러던 한 순간 적극적 가해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극적인 구조를 더욱 피비린내 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군대라는 공간은 그 거대한 구조의 폭력과 비겁한 개인들이 행사하는 물리적인 폭력이 동시에 재생산되는 곳이다. 승영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어쩔수 없었다고 누군가 말해주길 바란다.

이 영화가 군대이야기이자 한국사회의 단면이고 어쩌면 세상의 거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폭력의 최대치인 국가폭력이 합법적으로 용인된 군대가 '폭력의 재생산'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존재라는 것은 지당하다. 하지만 너무도 흡사하게 폭력의 재생산이 우리사회에서 기능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의 가해자인 아버지를 죽이는 세상, 이스라엘의 분리장벽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자살테러(용어가 맘에 들진 않지만), 김일병의 총기난사사건...

거대한 폭력의 구조에서 한 개인은 너무 미약하다...

 

아마도 병역거부는, 그리고 세상의 너무 당연한 것들을 자신의 신념으로 거부하는 일은

미약한 개인이 거대한 폭력의 구조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자 최소한의 방어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폭력의 구조는 때로는 개인들의 신념과 인격을 무참히 뭉게버리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복무하지 않는 어떠한 권력과 구조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많은 폭력을 거부하고 더 많은 비폭력행동이 늘어날 때, 폭력의 구조가 우리에게 강요한 모든것을 거부할 수 있을 때, 아마도 혁명은 가능할 것이다.

나약한 모든 개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권력도 권위도, 심지어 신도 없다는 것이 내가 가지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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