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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0/22
    걸레질
    무화과
  2. 2008/10/19
    2008평화활동가대회
    무화과
  3. 2008/10/18
    2008년, 서울 하늘(2)
    무화과
  4. 2008/10/16
    말과 글, 그리고 삶(3)
    무화과
  5. 2008/10/14
    갓바위를 내려오며
    무화과
  6. 2008/10/07
    증발
    무화과
  7. 2008/09/30
    10월1일 플랭카드
    무화과
  8. 2008/09/30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 (2)
    무화과
  9. 2008/09/28
    북부지원 가는 길에
    무화과
  10. 2008/09/26
    땅 부자들의 피해의식
    무화과

편지

딱히 그럴만한 일도 아닌데 괜시리 짜증만 나던 하루. 울고싶은데 빰맞은 것처럼 짜증 날만한 일을 만났다. 그동안 참았었는데 참지 말아야지 하다가 아서라 참는게 이기는 거다 하다가 암튼 참지 안기로 마음은 결정했지만 그래도 조금 시간을 둔 것이 다행이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받아온 편지들을 읽어봤다. 참 많은 사람들 도움으로 살아왔었구나 그리고 지금도 내가 미쳐 인식하지 못할뿐이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겠지. 그래서 편지를 써야겠다 오랫만에 손편지를 쓰는 계절이 되어야겠다.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그런데 뭐라고 쓰지? 최근에 한 통의 손편지를 써봤지만 안쓰다가 쓰려니 쉽지 않았다. 고마워서 쓰는 편지인데 글씨 못써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건 아닌지 몰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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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께 사람들은 주로 수능대박의 소원을 빈다 저런 속세적인 소원을 빌어서야 되겠냐며 고고한척하다가 결국 나도 마찬가지의 소원을 빌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나간 하루 이런날도 있었고, 지겹도록 더딘간 하루도 있었다. 어쨋든 살아가고 있고 삶이 힘겹지는 않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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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질

간밤의 술기운이 새벽공기처럼 아스란히 남아있어 온천물처럼 갈증이 솟구치고는 된장찌개 한사발에 밥과 무채김치 갓김치 배추김치 김치볶음을 후딱 먹어치웠다. 풍성한 채식의 식단이여! 이로써 나의 진보적인 식생활은 어머니의 가사노동력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나는 그 잘난 입으로 육식이 얼마나 수많은 관계를 파괴하는지 역설한다 돼지고기 삼겹살 냄새는 안나더라도 얼마나 역겨운 입냄새가 나의 말에서 풍겼을까? 뚝딱 해치운 아침 설거지를 뒤로 하고 슬슬 사무실로 출근해서 또 나의 진보적인 평화운동을 해볼까 하다가 돈 한푼 안보태고 밥얻어먹는 비루한 인생이 부끄러워 청소좀 해주고 나가달라는 엄마의 부탁이 생각나 두 팔 걷고 걸레를 들었다 여름 내 쌓여 있던 먼지들은 장판속까지 파고 들어 온 힘을 다해 걸레질을 빡빡 해보아도 때가 묻어나온다 하물며, 29년간 쌓여온 지져분한 것들이야 빡빡 닦아도 끝내 결벽해지지 못하는 바닥처럼 쉽게 내뱉은 말들과 휘갈려 쓴 글들로 이루어진 내 삐까번쩍거리는 양심들도 저 속에 찌든 때는 끝내 벗겨내지 못할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도 어쩌냐 매일 매일 걸레질하듯이 이나마라도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땀 뻘뻘 흘리며 닦아야 할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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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평화활동가대회

내용 많이 넣어달라는 웹자보는 예쁘게 만들기를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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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서울 하늘

한숨처럼 새어나온 안개같은 것이 도시를 뒤덮었다. 아무리봐도 그것은 안개는 아니었다. 안개는 촉촉하고 포근하지만 그것은 퍽퍽하고 답답했다. 한숨보다 짙은 어떤 짜증같은 것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 이런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해는 힘을 잃고 한 점 하늘도 물들이지 못한채 빨갛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강건너 희미하게 보이는 국회의사당의 둥근지붕만이 서럽게 떨어지는 해를 보듬고 있었다. 저 눈부신 태양을 두 눈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아마도 50년쯤 후에야 이런 일기를 쓸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쯤이면 이처럼 흐릿한 시계가 안개때문인지, 내 눈의 노안때문인지, 다른 어떤 것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2008년의 서울을 살고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시간만 2008년에 멈춘채 세상은 훌쩍 흘러서 사실은 지금이 2050년인지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의 시간만 2008년에서 머물러 있다가 이제 정신이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우울한 대기와 삭막한 도시가 이해가 된다. 내가 살던 시절의 가을 하늘은 도대체 너무도 아름다워서 시인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노래했지 않았던가 강물은 여전히 29살의 내 얼굴을 비춰주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중년의 남성이 강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일지도 29살 그 시절 나의 친구들은 이 세상에서는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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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 그리고 삶

말은 애시당초 믿을 것이 못된다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나 과격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내 뱉는 것이다. 듣기 좋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말들은 우리의 귀를 현혹시키고 생각을 마비시킨다. 물론 말 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가 되는 경우도 있다. 폭력의 피해자가 마침내 입을 열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그리고 사회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게의 경우 말많은 사람들은 그리 진실되지 못한것이 사실이다(나도 말이 너무 많다. 어차피 내가 뱉어내는 많은 말들은 장난섞인 뻥 이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는 않을테지만) 고통스러운 말을 목 밖으로 끄집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지만, 번지르르한 말이나 과격한 말들을 뱉어내기는 얼마나 쉬운가. 누구라도 말로써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수 있고 평화주의자로 만들수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지만, 모두 떠난 자리에서 말은 머물곳을 찾지못해 쓸쓸히 부유할 뿐이다. 글은 말보다는 신중하다. 말은 즉각적인 반응이다. 물론 평소에 깊은 사색을 해 온 사람같은 경우는 말자체가 하나의 삶일수 있겠다. 예수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책 한권 쓰지 안고도 지금까지 그 말씀이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는 동적動的인 소통방식의 '말'보다는 정적인 소통방식인 '글'이 훨씬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낼 수 있다. 말은 내뱉으면 주워담긴 힘들지만 글은 내보이기 전에 얼마든지 수정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말잘하는 사람보다 글 잘쓰는 사람이 똑똑한 경우가 많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 순발력과 재치 등이 필요하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논리적인 생각의 체계가 잡혀있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글을 잘쓰는 사람을 믿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바꾸는 운동을 하고자하는 사람들은(직업적인 활동가이든 아니든 간에) 하여간에 말을 할 일과 글을 쓸 일이 참 많다. 기자회견이니 토론회니 각종 회의에서 수다스럽게 떠들어야하고 각종 원고와 기사와 기고글들을 뽑아내야한다. 말 잘하고 글 잘쓰는 사람은 확실히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훌륭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세상은 말과 글로 바뀌지는 않는다. 번지르르한 말은 처음에는 듣기좋아도 느끼한 버터마냥 금방질리기 마련이고, 대책없이 과격적인 말은 처음에는 인상깊지만 갈수록 모호해지기 마련이다. 글 또한 마찬가지. 화려한 수사와 체계적인 논리는 처음에는 재미있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만 몸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머리의 기억은 언젠가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결국 삶의 문제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반대를 그럴듯한 이론을 바탕으로 외치고 글을 써도 자신의 삶이 자본주의가 주는 떡고물을 아무 생각없이 넙죽넙죽 받아먹는다면 그 명문장과 명언들이 도대체 무슨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세계평화 너무도 좋은 말. 입으로 떠들어봤자, 글로 써봤자 그게 대체 어떳단 말인가. 내 삶은 권력과 폭력에 너무도 익숙해져있는데 말이다. 물론 모든면에서 올바른 삶을 살 수는 있는 사람은 드물거나 없을 것이다. 결국엔 지금의 나의 모습을 반성하고 삶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 말을 못해도, 글을 못써도 진실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주 느리고 더디지만 자신의 주변에서부터 세계로 뻗어나가는 변화를 만들어 낸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말과 글을 잘쓰면 금상첨화겠지만 말이다. 삶이 거세된 말, 삶에서 멀어진 글들이 펼치는 화려한 축제에 눈멀고 귀멀지 않기를. 내가 한 말들이, 내가 쓴 글들이 나의 삶을 배반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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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를 내려오며

수능시험 한 달 남짓 남은 10월의 주말 팔공산 갓바위는 소원을 비는 손바닥으로 장터처럼 붐빈다 저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듣고만 있어도 피곤하겠다며 되먹지못하게 감히 부처님 걱정하는 이 놈의 중생은 세속적인 욕망으로 부처님을 괴롭히는 치들을 한심한 듯 쳐다보다가 다소 철학적인 소원을 빌어보고 우쭐해한다 팔 백 오 십 미터의 관봉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올라갈 때 그리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내려오다가 힘겹게 땀 흘리며 걸어오는 너를 만난다 햇볕을 머금은 이마의 땀방울은 구슬처럼 빛나고 슬픈눈이 간직한 이야기들을 차마 묻지 못하고 나는 그만 풀썩 무릎이 풀려버렸다 부처님 앞에서도 당당히 꿇지 않던 무릎인데 갓바위 정도는 가뿐하게 오르내리던 종아리인데 바짓 가랭이 움켜잡힌 것처럼 아무 저항도 못하고 엉거주춤 주저앉은 나를 너는 지나가며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는 바라보며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그 계절에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이별의 이유였다 저 멀리 하늘, 구름이 산을 힘겹게 넘고 있다 --------------------------------------- 갓바위 부처님앞에 바글거리는 인파에 질려서 내려오던 길에 갑자기 어떤 상황에 대한 상상력이 발동되었다 소설의 도입부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내가 소설쓰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면 이 느낌을 잊어버릴꺼 같아서 기록을 남겨야 겠다고 생각했다 쓰고 나서 보니 잘 모르겠다. 그 때의 내가 느꼈던 것들이 잘 표현되었는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느낌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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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

가끔식 너무나도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세상이 느껴질 때는 왠지 이 지나친 현실감이 마치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얼굴에 와서 감기는 서늘한 바람, 뒷 목을 따스하게 적시는 오후의 햇살, 계절로 가득찬 파란 하늘, 이 모든 것들이 따뜻한 살갗과 거친 숨소리보다 더욱 진짜처럼 느껴져 마치 나라는 존재는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져버릴것만 같다. 오늘 낮에 완이를 잠깐 만났을 때,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의 핵심은 결국엔 인간답게 죽는 것. 그런데 왠지 나는 인간답게 죽기보다는 한순간에 햇빛에 눈부셔서 돌아보면 사라져버리는 그렇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 빅피쉬에서처럼 물고기가 되어서 훌쩍 떠나버려도 좋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가득채운 이 복잡한 일들 사이에서 나는 증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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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극복하는 일

자전거를 타고 안양천을 따라 집에오다 보면 언제나 망설이게 되는 갈림길이 있다. 고척교, 다리위로 올라와서 경인국도를 타고 오는 길과 목감천의 자전거도로로 돌아오는 길, 두 갈래 길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아주 잠깐이라도 망설인다. 경인국도의 장점은 시간. 고척교에서 우리집까지 경인국도는 거의 직선으로 쏴준다. 5km거리니 미친척하고 밟으면 10분정도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미친척하고 밟고 싶지는 않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심장은 귓가에서 소리보다 빠르게 두근거릴테니. 하지만 단점은 차와 함께 달리니 아무래도 무섭고, 특히나 남부순환로와 교차하는 오류IC는 차들이 어찌나 씽씽 달리는지 공포의 대상이다. 목감천으로 돌아오는 길은 약간 돌아서 시간은 더 걸리지만 자전거도로를 길게타서 안전하고 쾌적하게 달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늦은 밤에 올 때면 이 길 또한 두려움에 가득찬 길이 되어버린다. 자동차들의 속도와 사고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원초적인 두려움. 고요하고 시커먼 하천과 습하고 차가운 공기와 사람 허리까지는 자라있는 풀들(실제로 낮에 보면 무릎정도밖에 안자란)이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한다. 결국 어느 길로 가든 두려움은 피할 수 없다. 야구는 두려움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방망이를 거꾸로 잡고도 3할을 친다는 양준혁은 어느 인터뷰에서 가장 어려운 공은 빠른 직구라고 했다. 몸쪽으로 붙는 빠른 직구는 아무리 프로선수라도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릎으로 공을 본다는 최고의 선구안을 가진 장성호도 같은 맥락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투수로 이혜천을 꼽았다. 빠르고 제구가 되지 않는 투수만큼 두려운 상대는 없다는 뜻이다. 이혜천이 마운드에 있으면 그냥 야구하기가 싫어진다고 한다. 한 편 2008시즌 기아를 상대한 팀들은 바로 다음 팀과의 경기에서 평균적으로 타율이 올랐다는 어느 야구광의 분석도 있었다. 빠른공을 던지는 선수가 많은 기아를 상대하면서 두려움을 어느정도 극복했기 때문에 다른 팀과의 경기에선 타율이 올랐다는 이야기였다. 부산의 롯데팬들에게 가을에도 야구하는 선물을 선사한 로이스터감독 또한 야구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훌륭한 타자의 조건인 3할 타자는 10번나와서 7번을 실패한 타자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결코 좋은 타자가 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투수도 홈런맞을까봐 걱정하게 되면 자신의 공을 던질수가 없다고 인터뷰하였다. 아웃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홈런 맞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다시 돌아와서 인생 또한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의 극복이 관건인거 같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면 좋겠지만, 즐길 수 있는 두려움이란 애시당초 두려움이 아니다. 그렇다고 극복이라는 단어로 쉽사리 해결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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