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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3
    이상한 애도(1)
    무화과
  2. 2009/01/19
    글쓰기
    무화과
  3. 2009/01/18
    오래된 물건(1)
    무화과
  4. 2009/01/16
    렛 미 인
    무화과
  5. 2009/01/13
    성명서와 기고글(4)
    무화과
  6. 2009/01/13
    안경잡이
    무화과
  7. 2009/01/13
    2009/01/13
    무화과
  8. 2008/12/26
    서른 개의 거짓말
    무화과
  9. 2008/12/26
    2008/12/26
    무화과
  10. 2008/12/25
    성탄절이 뭐 이래 (2)
    무화과

엄마의 귀국

엄마가 돌아왔다. 생각해보면 최근 몇년동안 이상하게도 같이 살지 못했다. 내가 구속되었던 1년 2개월, 출소후에 바로 엄마는 이모의 병간호를 위해서 미국에 가서 5달동안 머물렀고, 작년 11월에 이모가 다시 아파서 또 미국으로... 2006년 8월부터 2009년 2월까지 7개월정도만 같이 살았었네. 내가 집을 나가서 독립한것도 아닌데. 암튼 이모가 설날에 돌아가셔서 예정보다 빨리 귀국하게 되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괜찮아 보이신다. 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을텐데... 참 못할 짓이었을텐데. 엄마 말이 너무 많이 울어서 이제는 그냥 눈물도 말라버렸다고.... 근데 엄마 오신다고 서울에 올라온 막내 이모가 계속 운다. 아... 이런 분위기 견디기 힘들다. 무겁다.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다. 돌아가신 이모 생각을 억지로 안하고 있었는데 엄마를 보니까 막 생각난다. 사촌들 중에서 나와 내 동생을 유난히 이뻐하던 이모였는데. 작년 봄 이모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왔을 때가 아직도 생생한데. 이럴거 같아서 일부러 이모 생각안했는데. 죽음이라는 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라는걸... 엄마한테 들어보니 그래도 이모네 식구들은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할머니에게는 아직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 자식이 미국가서 고생만 하다가 아파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갑자기 듣고 멀쩡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돌아가신 이모랑 이모부는 지금까지도 막 연애를 시작한 애인처럼 닭살커플이었는데 이모부가 많이 힘들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직 엄마가 미국에 있었을 때, 이모부가 술에 취해서 "내가 도대체 죄가 얼마나 많길래 이런지 모르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이모부는 굉장히 어렵게 살았던 분이라서 우리엄마가 이모의 결혼을 반대했었다고 하던데... 초등학교 때부터 구두닦이, 껌팔이, 아이스께끼팔이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우리 아빠랑 같은 고향 출신인데 우리아빠 친구 중 제일 가난한 친구집에 문간방에 세들어 살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 고구마를 너무 많이 먹어서 질려버려서 지금도 고구마를 안드신다. 암튼 이모가 없는데 이모부가 잘 지내실지... 엄마가 참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내가 힘이 되어 주기는 커녕, 이 무거운 분위기조차도 벅차다. 힘들다. 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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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쉬카

렛미인을 보고 극장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엘리가 너무 가슴에 와서 박혀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휘루의 요쉬카를 듣게 되었다.

아니 휘루의 요쉬카는 그 이전에 들어봤지만

별다른 느낌을 남기지 못했었는데,

렛미인을 보고 나서 그 가사가 도통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가와서 내목을 물어뜯은 아이가'로 시작하는

요쉬카를 들으면서 렛미인의 이엘리를 생각했다.

 

이엘리. 요쉬카(아마도 소녀일거라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이상하게도 그녀들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목구멍으로 액채상태의 피를 먹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리고 그들의 고독이, 피냄새 나는 외로움이 낯설지 않다.

 

생각해보니 프란체스카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흡혈귀들은 항상 혼자인거 같다.

 

단단한 발톱을 세우고 있는 요쉬카처럼

나도 항상 가시돋힌 말들로 날을 세우고 두꺼운 방어벽 뒤에 숨어서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남에게 상처입히고 살고 있다.

 

호수에서 태어난 작은 흡혈귀 요쉬카에게

여긴 살아갈 만한 곳이 아니듯.

나에게도 그다지 살아갈 만한 세상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일까

하긴 돈있고 권력있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그다지 살아갈만한 세상은 아닐듯 싶다.

 

요쉬카라는 이름도 너무 매혹적이다.

나 이름을 요쉬카로 확 바꿔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요쉬카                   

 

다가와서
내목을 물어뜯은 아이가
내게 다가왔어 내게 다가와
내게 하는 말이
나무를 찾고 있다고
내가 태어난
나무를 찾고 있다고

단단한 발톱을 하고 다가온
내 이름은
요쉬카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메니

요쉬카-
여긴 네가 살 곳이 아니란다
호수에서 태어난 작은 흡혈귀
그 이름은 그 이름은
요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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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분노하기

요새 세상에 일어나는 일련의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일들을 접하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고 이내 무기력해지곤 했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영어학원을 빼먹지 않았는데, 최근들어 도저히 공부할 정신적인 컨디션이 아니라며 결석이 잦아지고 있다. 또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기복에 허우적 거리며 대체 사람죽인 놈들은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왜 이래야 하나 하며 자책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최근들어 분노는 느낄때는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커져 그 막강한 에너지에 내가 잠식당한거 같다. 그런 흥분상태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그냥 분노 한 번 하고 말꺼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그냥 화 한 번 내는 것은 내 기분 푸는 것 밖에는 안된다. 내 기분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지 그뿐은 아닌거다. 세상을 내가 좀 살아갈만한 곳으로 바꾸려면 화풀이만 해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천천히 분노하자.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의 속도를 찾자. 천천히 분노하면 아무래도 냉철하게 사고할 수 있을거다. 그리고 어차피 인간인 이상, 모든것이 유한한 인간인 이상, 모든 에너지를 한 번에 다 소모해버리기 보다는 길고 오래갈 수 있도록 아껴두자. 분노라는 것도 한 없이 샘솟는 것은 아닐진대, 한 번에 다 써버리고 나면 그저 재가 되는 것이다. 나의 속도로 간다는 것은 분노가 슬픔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난 분노보다는 슬픔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분노할 것에 대해서 천천히 분노하되 그것은 슬픔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세상과 맞서는 일은 공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성이 있을 수가 없고, 그 끝은 죽음과 맞닿아 있을 것이니. 평생 해나갈 일이라면 너무 지나치게 서둘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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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 읽기 걷기

오래전에 슬픔은 나의 힘이라고 이 블로그에 쓴적이 있었는데. 근데 그게 과하면 슬픔 아닌 다른것이 되어버리고 나를 숨막히게 한다. 심장이 눈물로 가득차버려 질식할거 같은 느낌. 이런 이야기를 했던니 친구는 나에게 글을 쓰라고 한다. 자기도 요새 너무 미칠거 같아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세상이고 자기속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라서 요새 글을 한 번 쓰면 피를 토하며 쓴다고 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 막막하고 어두운 기분들을 떨쳐내야겠다. 친구의 말대로 글쓰기도 참 좋은 거 같다. 그리고 또 여러가지 생각해 봤는데, 음... 암튼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들이 그래도 제법 여러가지가 있다. 말한대로 글쓰기. 쌓아두면 병된다. 혹은 도망치면 나중에 후회한다. 이럴때일수록 도망치지 말고 눈감지 말고 귀막지 말고 입다물지 말고 거침없이 쏟아내야 한다. 무엇이든지 쓰자. 쓰고 보자. 일기장에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것은 참 좋은 결정인거 같다. 그리고 걷기. 지난 주, 그래서 많이 걸었다. 어떤 날은 광화문에서 신촌까지, 종로 5가에서 인사동거쳐 삼청동까지 걸었다. 남산에서 명동 청계천까지, 그리고 종로3가를 거쳐 다시 명동까지 걸었다. 걸을때는 아무 생각도 안한다. 그냥 몸이 움직이고 나는 몸을 따를 뿐이다. 물론 중간에 후루꾹장애인(집회참가자 중 한 명이 그렇게 표현하더라ㅋㅋ)때문에 잡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ㅋㅋ 내가 왜 이곳을 걷고 있는지. 집회에 내가 왜 참여하고 있는지. 그저 멍하니 이따금씩 하늘의 달을 보면서 걷다보면 말하지 않아도 안에 쌓여 있는 무언가가 조금씩 씻겨나가는 것 같다. 근데 문제는 설연휴 직전의 집회 후, 서울역에서 홍대까지 걸었던 그날 이후 왼발바닥이 아프다는거. 그래서 많이 걸을 수 없다는 거. 그리고 어쩌면 이거는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책을 파고 들어야 겠다. 사실 출소 1년 후부터 내 안에 쌓여있던 것들이 다 소진되어서 뭔가 다시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읽기를 생각했었는데 요새는 좀 살아보고 싶어서. 살아가야겠어서. 책에 몰두하다 보면 책속에서 누군가 위로를 건네줄거 같아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도 내 속도를 찾아야겠다. 눈감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쉽게 흥분하지 않고 천천히 분노하면서 내 살 자리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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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그래도 이제는 글 하나 정도는 쓸 수 있을 거 같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2009년은 갑자스럽게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시작되고 있다. 죽음이라는 거. 사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아주 특별한 사고가 아닌한 내가 이 나이에 죽을 일이 없고 그건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부모님도 아직 건강하시니까... 근데 생각해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더라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가자지구에서의 죽음들은 나에게 절망으로 다가왔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슬픔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심하게 감정이입이 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심리적, 지리적 거리감 탓이겠지만. 그보다는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일에 대한 절망이 컸다. 그건 이스라엘 군대에 대한 절망이라기 보다는(군대는 원래 그런곳이니까) 그런 학살을 수행하고 있는, 군복을 벗으면 평범하기 이를데 없을 군인들 개개인에 대한 절망이었고, 더 크게는 언덕에 도시락 싸들고 올라가 망원경으로 폭격을 구경한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절망이었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의심케 하는 그런 지옥같은 상황을 무서워서 차마 말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떻게 야구경기보듯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용산에서의 죽음은 팔레스타인에서의 보다는 더 큰 슬픔과 분노를 일게 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물론 나와 같은 심장을 빌려쓰고 있을테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보다 훨씬 가깝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리적인 원근감의 차원은 아니다. 싫든 좋든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과거 철거민들의 투쟁에 열심히 연대하면서 골리앗도 같이 쌓고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여기에 있고 내가 가자에 있었으면 단지 그 이유때문에 내가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용산에서의 죽음은 더 큰 확률로 그것이 나의 죽음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다가왔다. 그 때, 상도동에 골리앗을 쌓았을 때, 이런일이 일어났다면. 나와 내 친구들중 누군가가 언제나처럼 그 골리앗 안에 있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아무 기도도 안하지만 경찰들과 대통령이 보여주는 저 후안무치의 태도가 분노를 일으킨다. 저들에 대해서는 쓰고싶지 않다. 그냥 분노 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이모의 죽음. 유난히도 나와 내동생을 다른 사촌들에 비해 이뻐하던 이모가 죽었다. 저 멀리 아메리카에서. 울 엄마는 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몇 달동안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모의 죽음에 대한 나의 방식은 가장 큰 슬픔과 그것에 대한 회피였다. 예전에는 죽음은 소멸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것. 이모가 이제 세상에 없다. 나를 보면 마구 껴안고 하던 이모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죽음은 소멸이라기 보다는 조용한 망각인거 같다. 이모의 육신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자체가 아예 사라진것은 아니다. 사진첩의 사진속에, 나의 기억속에, 이모와 닮은 우리엄마의 얼굴에도 조금씩은 남아있다. 다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것일뿐. 사실 지금도 이모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나는 피하고 있다. 그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닐것이다. 다만 슬픔에 직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어쨋든 살다보면 잊혀질 감정들에 부대끼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참 미안하다. 이모한테 잘가시라는 말 한마디 못한것이 참 맘이 안좋다. 연말에, 크리스마스에 카드 한 통이라도 보낼까 망설이다가 뭐라고 써야할지, 삶을 포기하지 마라고 해야할지 편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시라고 해야할지(이미 이모는 그 당시 오래 못살거라고 진단을 받고 있었다) 알 수 없다는 핑계로 그냥 미뤄둔 것이 후회스럽다. 너무나 후회스럽다. 그래도 우리 식구들은 이모가 오래 못 갈 것을 알고있어서 슬프지만 충격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느정도씩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가자지구와 용산에서 가족을 잃은 분들은 어떨까... 그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죽음에,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마지막의 인간다운 죽음을 박탈당한 모습에, 그 감정을 나로썬 짐작할 수 없을 따름이다. 세상에 어느 목숨붙이가 미사일 총탄에 맞아죽을 운명으로 태어났단말인가. 세상에 어느 사람이 경찰에 몰리고 깡패한테 위협당하며 불 타 죽을 운명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겠지만, 요즘처럼 죽음이 도처에 검은 구름을 띄우고 있는 시절은 숨쉬기가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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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애도

100분토론을 보면서, 참 이상한 애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든다. 죽음을 애도한다면서 니들이 폭력을 써서 모든 문제가 일어났다고 이야기한다. 뭐 이따위 애도가 있는지 차라리 애도하지 말아라. 솔직하게 이야기해라. 니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라고 그냥 얘기해라. 백번 양보해서 모든게 철거민들 때문이라고 해도 죽음에 대해 애도를 하려면 그 따위로 더러운 입을 놀려서는 안된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진 않은 자들 때문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수치심을 망각한 자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뒤바뀐다. 분노가 짜증으로 짜증이 슬픔으로 슬픔이 허무로. 저들이 나와 같은 종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나고 저들의 망각된 수치심까지도 가난한 사람들이 짊어지는 것이 슬프고 과연 이런 세상을 밥잘먹고 잠잘자고 살아가도 되는지 어슬픈 양비론으로 공정한척 점잖빼는 자들 입에 발린 말로 애도를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자들 이제는 그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 독일이 나치의 역사를 사과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어떠어떠한 비판을 했던가. 그냥 무릎을 꿇었을 뿐이다. 피해자는 비판받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가해자라면,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인간감정이라도 있으면, 그 비판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사과만 하기에도, 혹은 애도만 하기에도 모자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철거민들의 투쟁 방식이 문제라면 그 비판은 철거민들 스스로와 혹은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해야한다. 사람죽여놓고 피해자의 방식이나 도덕성이나 정치적인 의도를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역겨운 핑계거리인지. 도대체 얼마나 뻔뻔하길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지. 차마 하늘 보기 부끄러워 살 수가 없다. 내가 인간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너무나도 수치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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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소식지 기사 써야하는데, 징하게 안써진다. 사실 1월 초에 나와야했을 소식지인데 내 맡은 글조차도 다 못쓰다보니 다른사람들에게 독촉을 못하고 있다. 하고싶은 말이 참 많은 주제를 가지고 쓰는 기사인데 그래도 왠지 글이 안나온다. 새롭게 찾아야할 정보도 별로 없고 그동안 많이 생각해본 문제인데 왜이리 글이 안써지는지 마치 기름칠 한 50년동안 안해준 가래떡 뽑는 기계에서 억지로 가래떡 뽑아내느라 구멍엔 떡이 덕지덕지 붙어서 토해내듯이 토막토막 가래떡이 뽑아지는 느낌이다. 글이 쉽게 쓰여지면 안되는건 맞지만, 그래도 어렵게 쓴다는 것이 지금처럼 이렇게 뭔가 짜증스러운 과정은 아닌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글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써 버릇했는데 참 안좋은 습관인거 같다. (당연히 퇴고도 안한다ㅠㅠ) 약간은 다른 뉘앙스이긴 하지만 윤동주도 쉽게 쓰여진 시에 대해서 그렇게도 부끄러워했는데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쓸 때 그렇게 쭉쭉 글을 뽑아내서야. 글 한 편을 쓰더라도 마치 내 모든 감정과 영혼을 다 쏟아부어야 하는데, 보고싶어 맘설레는 사람에게 문자하나 보낼때 10번은 썼다 지웠다 하는 것처럼 그렇게 소중한 마음을 담아서 글을 써야 하는데.... 문장 하나 하나가 나의 인격의 전부인것처럼 생각하고 단어 하나 하나가 마치 시람들에게 보내는 꾹꾹 마음으로 눌러쓴 편지라 생각하고 신중하고 사려깊게 써야하는데... 보나마나 이렇게 포스팅해놓구 또 갑자기 필받으면 뚝딱 기계로 찍어내는 것처럼 순식간에 마침표를 찍고 퇴고도 안할거같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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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광주로 다시 서울로 총 10번정도 이사를 다닌 거 같다.(물론 내가 다녔다기 보다는 부모님이^^) 그래도 지금 집이 이제 9년째 살고 있으니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일것이다. 이사를 자주 다니게 되면 가구와 같은 부피가 큰 물건들은 아무래도 세월의 상처를 온몸에 새기게 되고 자잘한 물건들은 그것들이 꼭 필요하거나 아주 쌩쌩한것이 아니면 떠날때의 미련들과 함께 남겨지기 마련이다. 그 많은 이사에도 꿋꿋히 함께 따라다니고 있는 것들이 있으니 이놈들은 우리집에서 산 지 얼추 30년에 가까운 것들이다. 나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우리 식구가 된것들 먼저 이유식 숟가락 '거버'던가? 어릴적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암튼 그 이유식 회사에서 나온 아기 이유식용 작은 숟가락이 부엌 수저통 한 구석에서 조용히 다른 수저들을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기의 입에 쏘옥 들어갈 정도의 크기에 손잡이 부분은 약간 동그랗게 아기의 얼굴같은것이 조각되어 있다. 다른 놈들도 다 10년은 넘은 녀석들이어서 뭐 풋풋한 신입생같은 녀석은 없지만 암튼 저 작고 무뎌진 숟가락은 이제는 커피를 휘휘젓는 용도로만 쓰인다. 이 녀석은 나보다 살짝 늦게 우리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이야 천연그대로의 이유식을 부모들이 선호할테지만 옛날에는 '거버'처럼 인공적으로 가공된 이유식이 몸에 더 좋다는 믿기힘든 분위기였다고 한다. 두 번째로 분 빛이 바랜 하늘색 네모난 종이상자에 들어있는 분은 지금 욕실의 구석에서 여전히 은은한 향기를 머금고 있다. 아마도 아직 말을 못했을 아기였을때(그때는 참 남들이 보기에도 제법 괜찮은 인간이었겠다 싶다ㅋㅋ) 목욕을 마치고 난 아기의 엉덩이에 토닥토닥 하얀 가루를 두들겨 줬을 것이다. 아기의 몸냄새와 분의 향기가 어우러진 집안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를 것이다. 체질이 많이 바뀌어서 땀이 많이 줄었지만 요새도 여름철엔 종종 샤워를 마치고 그 분을 땀이 많이 나는 부위에 두드려주곤 한다. 이 녀석은 나보다도 먼저 우리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 누군가가 선물로 줬다고... 마지막으로 맥도날드 쟁반 아직 한국에 맥도날드가 없었을 시절(아마도... 맥도날드가 한국에 언제 들어왔을까?)부터 우리집에 있었던 쟁반. 미국으로 오래전에 이민간 큰이모가 준 쟁반인데 우리엄마가 결혼하면서 가져왔다고 하니, 이 녀석은 나보다 더 오랜세월을 우리 엄마와 보낸 것이다. 쟁반에는 맥도날드의 피에로가 해변가에서 보물상자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고, 문어 한 마리가 그 보물상자를 바닷속으로 가지고 가려고 아둥바둥하고 있다. 지금이야 뭐 맥도날드 따위야 마구 싫어하지만 어렸을 때 화려한 색채의 맥도날드 쟁반을 좋아했었다. 그놈은 참 튼튼한거 같기는 하다.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깨지기는 커녕 이하나 안나가고 있다니. 김치전 부쳐서 올려놓기 딱 좋은 쟁반 아마도 이 녀석들도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른다. 조금 더 오랫동안 있을지도 모르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추억하거나 애써 기억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두려 한다. 어쩌면 그것들이 버려지거나 부서지는 건 한순간이지만 왠지 나에게는 한순간에 버려진다는 느낌 보다는 지금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것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내가 깨닫게 된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래된 물건들에 대한 나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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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이엘리 너를 처음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어. 어둠속에서만 살아가야하는 널 보며, 너도 지독히 혼자구나. 나도 모르게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어. 아아 너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네가 아빠라고 부르던 사람의 병실에서 그 사람의 피를 받아먹고 나서 오스칼에게로 갈 때 사람들은 알까? 너의 슬픔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살아남아야하는 너의 그 해결할 수 없는 존재자체의 슬픔말이야 사람들은 때로는 흡혈귀를 악마처럼 생각하자나 십자가를 두려워하고 신을 두려워하고 심장에 말뚝을 박아야한다는 둥 살기 위해서 죽인다는 너의 말, 그 감정 하나 안실린듯한 무뚝뚝한 말에서 나는 너의 눈물을 봤어. 사람들은 고상한척하지만 오히려 뱀파이어가 더 도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 너는 네가 살기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자나. 먹을것이 아니어도, 혹은 자신의 목숨에는 아무 상관없어도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어쩌면 인간밖에 없을테니까. 그리고 사람들도 모두다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살아가자나. 혼자 고상한척 해도 다른 이들의 희생이 없으면 자신의 삶이 지금처럼 영위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넌 오히려 솔직한 편이지. 암튼 이러저러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오랫동안 열두살로 지내왔던, 피냄새나는, 너의 어두운 낮과 음침한 밤이 끝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널 만나게 되어서 참 기쁘기도 하지만, 모르겠어. 이 묘한 감정을. 마치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 살아나는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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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와 기고글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글이 아마도 성명서와 기고글일것이다. 뭐 회의문서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사람에게 읽히기 위한 글보다는 다분히 기능적인 글이니까 논외로 하고, 성명서과 기고글이 받는 대접, 성명서와 기고글을 쓰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봤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명서는 언제나 기고글들에 비해 푸대접을 받는다. 좋은 성명서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성명서는 대개의 경우 급하게 써야하는 일도 많고, 아무래도 적절한 분량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편이고, 그래서 글을 아주 잘쓰는 사람들도 좋은 성명서를 쓰기란 쉽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성명서들이 처한 이러한 핸디캡들을 애써 보상해주더라도 성명서는 기고글에 비해서는 푸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나부터도 기고글을 쓸 때와 성명서를 쓸 때 들이는 노력은 크게 다르다. 그것은 정보 수집 등과 같은 노력뿐만 아니라 글을 쓸 때의 감정적 정서적 깊이까지도 포함하는 이야기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성명서는 단체의 명의로 나가고, 여타의 기고글들은 개인의 명의로 나가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이름자가 걸려서 나가는 글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더 신경을 쓰고 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성명서는 비록 내가 쓰더라도 그것은 나의 글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 글에 대한 온갖 칭찬이나 비판도 왠지 나에게 향한다고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해탈한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게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고글에 더 많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을 신경쓰게 된다면(게다가 그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마땅히 경계해야할 일이다. 알량한 몇글자의 끄적거림으로 이름을 알리고싶은 허영심, 좋게 말해봤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아무튼 어떤 글이 내용과는 별개로 한 개인에게 집중된 결과를 낳는다면 운동에서의 성과 또한 집단보다는 그 한 사람에게 귀결될 수밖에 없다. 기고글과 성명서를 쓰는 사람들은 누군인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더 재미있어진다. 성명서를 쓰는 사람들은 활동가들이고, 기고글은 주로 교수라던지 대학원생이나 학위소지자등 소위 가방끈 긴 사람들이다. 물론 활동가들도 각종매체에 기고글을 쓰기도 하지만 섭외 우선순위는 박사님들이나 교수님들일것이다. 그리고 예외적인 케이스라도 그런 분들이 성명서를 쓰는 경우는 못봤다. 이를테면 한홍구선생님이 병역거부연대회의의 성명서를 쓰는 경우는 없다. 물론 한홍구 선생님이 글을 재미있고 어렵지 않게 잘쓰기 때문에 한홍구가 병역거부관련 기고글들을 많이 쓰는 것에 대해서 일말의 불만도 없다. 다만 어떤 전문가라 불리는 집단과 단체나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 혹은 대우가 성명서와 기고글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서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글쓰는 일이 생업과 보다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 활동가들보다 글쓰는 능력은 뛰어나겠지만, 진실은 항상 머릿속의 합리적 사고와 논리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인데, 과연 활동가들의 신체에 각인된 무수한 경험들이 아무래도 찬밥신세인거 같아서 화가 난다. 뭐 열심히 좋은 글을 쓰시는 분들을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명서보다는 기고글을 쓰는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되먹지도 못한 글 따위 가지고 허영심부리는 모습이 싫고, 소위 전문가들의 꽁무니만 졸졸 쫓으며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한국사회의 찌질한 모습이 나한테도 보이는 것이 화가 나는 거다. 물론 기고글을 쓸 기회들에서는 당연히 많은 노력과 감정을 들여서 써야겠지만, 앞으로 성명서를 쓸 일이 있다면 더 큰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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